권리 투쟁은 권리자 자신에 대한 의무
권리를 위한 투쟁은 권리자 자신에 대한 의무다.
자신의 생존을 주장하는 것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의 최고 법칙이다. 이 법칙은 모든 생물의 자기보존 본능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육체적 생존만이 아니라 윤리적 존재로 생존하는 것도중요하며, 이를 위한 조건의 하나가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윤리적 생존 조건을 권리라는 형태로 유지하고 지킨다. 따라서 권리를 갖지 않는 인간은 짐승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런 만큼 로마인은 추상적 법의 관점에서는 이치 그대로, 노예를가 축과 동일선상에 두었다.
따라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윤리적 자기보존의 의무이고, 권리주장을 전체로 포기하는 것(오늘날 그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과거에는 가능했다)은 윤리적 자살(권리능력, 즉 법적 인격을 스스로 말살하는 것이다.
또 법이라고 하는 것은 개별 법제도의 총체에 불과하고, 각각의 법제도는 소유권도 혼인도, 계약도 명예도 각각의 인간 존재에게 물리적 또는 윤리적 생존 조건이 되고 있으므로 그러한 생존 조건의 하나만을 포기하는 것도 권리 전체를 포기하는것과 마찬가지로 법의 입장에서는 인정할 수 없다. 도리어 타인이 이러한 조건의 하나를 공격하는 것은 있을 수 있고, 그 공격을 물리치는 것은 권리주체의 의무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존 조건이 권리를 통해 추상적으로 보장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권리주체가그것을 구체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의 계기를 부여하는 것이 타인의 자의적 침해라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불법이 자의, 즉 권리의 이념에 대한 위배라고 할 수는 없다. 내 소유물을 점유하는 자가 그것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믿는 경우, 그는 내 인격을 침해하는 방식으로 소유권의 이념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소유권의 이념을 방패로 삼은 것이다. 이 경우 두 사람 사이의 분쟁은 어느 쪽이 소유자인가라는 문제를 둘러싼 것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절도나 강도의 범인은 소유권이라는 법제도의 틀 밖에 있는 것이고, 내 소유권을 무시함으로써소유권의 이념을(따라서 내 인격의 중요한 하나의 생존 조건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양식이 일반화된 상태를 생각해보자. 거기에서는 소유권이 실제로 무시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원리적으로도 무시된다. 따라서 이러한 범행은 내 물건에 대한 공격만이 아니라, 내 인격에 대한 공격도 포함한다.
그리고 자신의 인격을 주장하는 것이내 의무인 이상, 인격의 존재에 불가결한 조건을 주장하는 것도 내 의무다. 공격을 받은 자는 소유권을 방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즉 자신의 인격을 방위하게 되는 것이다.
소유권의 포기가 정당화되는 것은, 강도가 피해자에게 생명과 금전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 위협하는 경우처럼 소유권을주장해야 할 의무와 생명의 유지라고 하는 더욱 고차적인 의무가충돌할 때뿐일 것이다.
이러한 경우를 제외하면, 자신의 인격을 침해하는 형태로 권리를 무시당한 사람이 주어진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우는 것은 모든 사람이 지닌 자신에 대한 의무다.
이러한 무시를 묵인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활이 부분적인 무권리 상태에 놓여 있음을 인정하는 결과가 되지만, 그런 것을 스스로 조장하는 자살적 행동은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는다. 단 타인이 자신의 소유물을 선의로 섬유하는 경우, 그 타인에 대한 소유권자의 관계는 그것과 전혀 다르다.
이 경우, 소유권자가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문제는 권리감각의 문제, 즉 그의 품격이나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이해관계의 문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물건의 가치에 불과하고, 그가 승소한 경우의 이득과 비용 및 노력, 나아가 패소의 가능성을 형량한 뒤에 소송을 제기할 것인가 말 것인가, 아니면 화해의 길을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완전히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각주)이 부분은 내가 권리를 위한 투쟁을 설명하고 그 투쟁에서 생기는 알력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오해를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이었다. 나는 권리침해로 인해 인격 자체가 유린되는 경우에만 권리주장은 인격의 자기주장이고, 명예에 관련된 것이며, 윤리적인 의무라고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이 정도로 명확하게 강조한 구별을 간과하고, 내가 마치 싸움이나 항쟁은 대단히 좋은 일이고 소송중독증이나 권리주장증은미덕이라고 하는 바보 같은 주장을 일삼았다고 하는 것처럼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
화해라는 것은, 당사자 쌍방의 이러한 확률 계산의 결과가 종종 일치할 때에 성립한다. 그러한 전제하에서는 분쟁 해결을 위해 허용되어 있는 방법이 아니라, 가장 옳은 방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실제로는 화해의 성립이 매우 힘든 경우가 많고, 양 당사자가 법정에서 각자의 변호사와 의논할 때 처음부터 모든 화해 교섭을 거부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는 양 당사자가 모두 소송을 하면 자신이 이긴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대방을 의식적인 불법을 행하고 악의적인 의도를 갖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소송상으로는 객관적인 불법으로서, 즉 ‘소유물반환청구권‘이라는 형태로 심리되는 문제라도, 당사자의 심리에서는 이미서술한 의식적인 권리침해의 경우와 마찬가지 자세를 취한다. 권리주체인 당사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경우에 그가 자신의 권리에 가해진 공격을 배척하는 완강한 태도는, 도둑에 대한 경우와 전적으로 같은 동기에서 생긴 것이고, 동일한 윤리적 정당화를 수반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당사자에게 소송비용이나 소송에서 비롯되는 여러 가지 성가심 승소의 불확실성 등을 설명하며 소송에서 물러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당사자의 심리를 잘못 판단한 것이다. 당사자에게 문제는 이해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침해된 권리감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당사자를 설득하기 위한 유일한 실마리는 그가 상정하고 완고한 태도를 취하는 근거가 된 것, 즉 상대방의 악의적인 의도라는 것에서 구할 수 있다. 그러한 상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면, 완강했던 당사자의 반감도 약화될 것이고, 이익의 관점에서 사건을 재고하게 되며, 그 결과 화해에 응하는 것도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설득을 해도 당사자의 선입견 때문에 완강한 태도를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를 모든 법률실무가는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심리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극심한 불신감이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 즉 당사자가 된 인물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교육 정도나 직업의 상이함 때문에 명백한 강약의 차이가 인정된다고 말해도 실무가들은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완고한 시기심을 갖는 집단은 농민이다. 농민에 대해 표현할 때 종종 ‘소송중독증‘이라고 일컫는데, 이는 농민의 특징적인 두가지 요소, 즉 탐욕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어도 강력한 소유의식과 시기심이 낳은 것이다.
농민만큼 자신의 이익에 민감하고 소유물을 확실하게 장악하는 집단은 없다. 그럼에도 잘 알려져 있듯이, 농민만큼 모든 재산을 소송에 쏟는 집단도 없다. 이는 언뜻 보아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잘 설명될 수 있다. 그야말로 고도로 발달한소유의식이 있기에 그것이 침해되면 농민에게는 엄청난 고통이 되고, 이에 대한 반작용도 그만큼 커지게 된다. 농민의 소송중독증은 시기심에 근거한 잘못된 소유의식에서 비롯된다.
애정 관계에서 질투가 위험을 초래하듯이,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결국 자신에게 화살을 쏘게 하고, 그를 구하고자 생각하는 사람을 파괴하는 것이다.
위에서 서술한 내용의 흥미로운 보기를 고대 로마법에서 찾아보자. 고대 로마법에서는 모든 권리분쟁 시에 상대방의 악의를 찾아내는 농민의 시기심이라는 것이 법명제라는 형태로 채택되었다.
분쟁의 양 당사자가 모두 선의일지도 모른다는 경우까지 포함해어떤 경우에도, 패소자는 처벌되어 자신이 상대방의 권리에 가한 공격을 보상해야 했다.
침해를 받은 경우 단순히 권리의 회복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격렬하게 전개된 피해자의 권리감각을 만족시킬 수 없고, 가해자에게 고의나 과실이 있든 없든 간에 피해자의 권리가 가해자에 의해 일단 부인되었다고 하는 점에 대해 특별한 보상이 요구되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설명하겠다).
현대의 농민이 법을 만들어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면, 그것은 아마도 고대 로마의 농민법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로마시대에 법 세계의 시기심은 문화의 발달을 통해 원리적으로 극복되었다.
즉 두 종류의 불법인 고의과실에 근거한 것과 무과실에 근거한 것, 주관적인 불법과 객관적인 불법(헤겔의 용어에 따르면 ‘악의가 없는 불법‘이 정확하게 구별되었다.
이러한 주관적 불법과 객관적 불법의 구별은 입법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법이 어떻게 정의의 입장에서 사태를 바라보고, 상이한 불법에 각각의 효과를 부여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리주체가 받아들이는 방식에서는, 즉 추상적인 체계적 개념에 따라 움직여지지 않는 그의 권리감각이 불법으로 인해 받는 제재에 대해서는 앞의 구별이 전혀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구체적인 사례의 사정에 따라 법률상으로는 단순한 객관적 권리침해로 보이는 권리분쟁이라도 권리자가 상대방의 악의적인 의도, 의식적인 불법을 상정하는 것도 맞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 경우, 권리자가 이러한 판단에 근거해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다. 나의 채무자가 사망한뒤 그 상속인이 채무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고 채무의 존재가 입증된다면 변제하겠다고 말하는 경우, 채무자 자신이 파렴치하게도 돈을 빌린 사실을 부인하거나 이유없이 변제를 거부하는 경우와 똑같아, 법은 이를 객관적 침해라고 인정하는 한 나에게 전적으로 동일한 임금반환청구권을 승인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전자의 선의를 지닌 상속인의 행동과 후자의 악의 있는 채무자의 행동을 구별해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 방해받지 않는다.
후자의 경우에 채무자는 나에게 절도범과 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즉 그는 나의 것이라고 알면서 뺏는 것이고, 의식적인 불법으로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전자의 경우에는, 채무자의 상속인이 내 물건의 선의의 점유자와 같은 입장에 있다. 그는 채무자가 변제해야 한다는 명제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상속으로 채무자가 되었다고 하는 내 주장을 다투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선의의 점유자에 대해 설명한 것은 모두 그에게도 적용된다.
그런 상속인이라면 나는 화해할 수도 있고, 승산이 없는 경우에는 소의 제기를 완전히 포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소송을 두려워한다거나 안일함과 나태함과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할 것이라는의심으로 내 정당한 권리를 뺏고자 하는 채무자에 대해서는, 돈이아무리 많이 들어도 내 권리를 추구하고, 추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그러한 권리를 상실할 뿐 아니라, 권리일반을 포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론할지도 모른다. 인격의 윤리적 생존 조건으로서의 소유권이나 채권에 대해 일반인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라고. 이처럼 알고 있는가라고 물으면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러한 권리를 인격의 윤리적 생존 조건이라고 느끼느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것을 입증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육체적 생존의 조건으로서 신장이나 폐나 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지만 누구나 폐가 찔릴 때의 아픔이나 신장이나 간의 통증을 느낄 수 있고, 이를 경고로 받아들인다. 육체적인고통은 생명체의 고장을 알리는 신호이자, 생명체에게 위험한 영향력의 존재를 통고하는 신호다. 이는 절박한 위험에 대한 주의를촉구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을 예의 주시하라고 경고해준다.
의도적인 불법이나 자의적인 행동으로 가해진 윤리적 고통(윤리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진 정신적 고통)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수 있다. 윤리적 고통은 정신적 고통과 마찬가지로 (각각의 주체가 지닌 감수성의 차이, 권리침해의 형식과 대상의 차이)강력한 것도 있고, 약한 것도 있지만, 벌써 무의식적이 된 인간, 즉 현실의 무권리 상태에 익숙해진인간을 제외하고, 모든 인간에게 윤리적 고통으로 받아들여지고, 육체적 고통과 같이 경고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현재의 고통을 멈추기 위한 효과적인 경고보다는 긴 눈으로 본 경고, 침묵하면서 고통을 참아내는 것만으로는 손해를 보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경고다. 여하튼 육체적 고통이 육체적 자기보존의 의무를 수행하라고 경고하듯이, 윤리적 고통은 윤리적 자기보존의 의무를 수행하라고 경고한다는 점이다.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경우인 명예훼손과 명예감각이 최고의 정도에 이른 장교 계급을 생각해보자. 명예훼손을 인내하는 장교는 더 이상 장교가 아니다. 왜 그런가? 명예를 주장하는 일은 모든사람의 의무임에도 왜 장교계급에게는 그 의무의 실행이 특히 중시되는가? 그 이유는 장교 계급은 그야말로 자신들에게 인격의 대담한 주장이 자기 지위 전체에 불가결한 전제가 되고 있으며, 그 성질상 인격적 용기의 체현자여야 할 자기의 계급이 동료의 비겁함을 간과하면 전체 권위가 실추될 수밖에 없다는 옳은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농민을 장교와 비교해보자. 자신의 소유물을 그 정도로 완강하게 지키는 농민이 자신의 명예에 대해서는 이상할 만큼 우둔하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장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유한 생존 조건에 관한 올바른 감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농민의 직업은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고 노동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농민은 소유권을 수호함으로써 노동을 수호한다고 말이다.
농민의 경우, 노동과 소유권 확보는 장교의 명예에 상당한다. 자신의 밭을 제대로 경작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재산을 경솔하게 낭비하는 게으른 농민은 자기의 명예를 지키지 못하는 장교가 동료에게 경멸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료 농민에게 모욕을 당하게된다. 이에 대해 농민이 모욕을 받아도 결투에 나서지 않고 소송도제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동료 농민들의 비난을 받지 않는데, 이는 장교가 훌륭한 농장주가 아니라는 이유에서 장교 동료로부터 비난받지 않는 것과 같다. 농민에게는 경작하는 토지와 사육하는 가축이 생존의 기초이고, 따라서 경계의 2. 3 피트 안쪽까지 경작한 이웃이나, 소를 판 것에 대금을 지불해주지 않는 상인에 대해서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즉 엄청나게 격분해서 제기하는 소송의 형식으로 권리를 위한 투쟁을 하게 된다. 이는 장교가 자신의 명예를침해한 사람에게 칼을 들고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농민도 장교도 여기서는 맹목적으로 전력을 기울이며, 결과를 전혀 고려하지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그렇게 함으로써 윤리적인 자기보존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을 배심원석에 앉힌 다음 먼저 장교들에게는 재산범죄를, 농민들에게는 명예훼손죄를 심판하게 하고, 이어서는 그 반대로 농민들에게 재산범죄를 장교들에게 명예훼손죄를 심판하게 한다면, 이 두 경우의 판결은 얼마나 다를 것인가! 재산범죄에서 농민보다 더 엄격하게 심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바는 아니지만, 나는 다음과 같이 장담한다. 즉 농민이 명예훼손의 소를 제기했다는 희귀한 경우에, 재판관은 같은 농민이 소유권을 둘러싼 소를 제기한 경우보다도 훨씬 쉽게 화해를 권해서 성공할 것이라고
고대 로마의 농민은 손바닥으로 따귀를 맞았을 때에는 25 아스를배상금으로 받고 만족했고, 자신의 눈을 맞아 멍든 경우에도 희망한다면 대화와교섭에 응해 화해를 했다. 이에 반해 고대 로마의 농민은 절도 현행범을 붙잡았을 때 그를 자신의 노예로 삼고 그가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는 권한을 법이 인정하도록 요구했고, 법도 이를 허용했다. 전자의 경우는 농민의 명예나 신체가 해를 입은 것에 불과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농민의 재산에 피해가 있었다는 것이 대조적인 현상을 낳은 이유다.
각주)12표법을 말한다. 12표법은 로마법의 기초를 이룬 고대 로마의 성문법으로, 로마공화정 정체의 중심이었다. 그 내용은 민사소송, 채무, 가족, 상속, 재산, 부동산, 장례, 결혼, 불법 행동, 범죄 등 다양했다. 12표법은 당시 억압받던 평민 집단이 귀족들에게서 쟁취한 정치적 성공의 좋은 예로 여겨져왔으나, 그것을 편찬한 직접적인 목적은 평민의 권리 신장이 아닌, 귀족 계급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세 번째의 예로 상인의 경우를 보자. 장교의 명예, 농민의 소유권에 상당한 것이 상인의 신용이다. 상인에게 신용을 유지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사활의 문제이고, 어떤 상인에 대해 채무의 변제가 분명하지 않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그 상인을 모욕하고 그 상인의 물건을 훔친 사람보다도 더 큰 타격을 가하는 것이 된다.
최근의 여러 법전이 상인이나 그에 준한 사람에 한해 경솔하고 사기적인 파산에 대해 처벌 규정을 두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상인 특유의 지위를 고려한 것이다.
나는 권리감각이라고 하는 것이 권리침해의 중대함을 오로지 계급적 이익에 따라 측정한 결과, 권리감각의 민감함의 정도가 계급과 직업마다 다르다고 하는 단순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이러한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는 진리에 올바른 빛을 비추기 위해 필요할 뿐이다. 그 진리란 모든 권리자는 자신의 권리를 지킴으로써 자신의 윤리적 생존 조건을 지킨다고 하는 명제다.
왜냐하면 앞에서 보았듯이 농민, 장교, 상인 중 어느 경우나 권리감각의 감응도가 가장 높은 것은 각각의 계급 특유의 생존 조건에관련되는 점이지만, 그로부터 권리감각이 보여주는 반응은 통상의걱정과는 달리 기질이나 성격이라고 하는 개인적 요소에만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요소, 즉각 계급의 생활 목적에 당해법제도가 결여될 수 없다는 감각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권리침해가 있었던 경우에 권리감각이 어느 정도로 강력하게 발휘될 수 있는가가 개인이나 계급, 국민이 자기의 생활 목적을 위해권리의 의의(권리 일반 및 구체적인 법제도의 의의)를 어느정도 잘 이해하는가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지표다. 이 명제는 나에게보편적적인 진리이며, 공법에도, 그리고 사법에도 적용된다. 다양한 계급이 각 존재의 본질적 기초를 형성하는 제도의 침해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국가는 각각에 고유한 생존 조건을 구체화하는 여러 제도에 관해 민감하다.
국가에 있어, 민감도의 지표이자 여러 제도가 가치의 지표가 되는 것이 형법이다. 형법 분야의 다양한 입법은 형벌의 엄격함에 관해 놀라울 정도의 차이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주로 앞에서 말한 생존 조건의 다양성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어떤 국가든 자국에 고유한 생존 원리를 위협하는 범죄를 가장 엄격하게 처벌하고, 반면에 기타의 범죄에 대해서는 현저히 대조적으로 가벼운 형벌에 맡기고있다.
가령 신정국가는 신을 모독하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행동을 사형에 처할 만큼 중죄로 다루는 한편, 토지 경계의 이동은 단순한 경죄로 보고 있다(모세의 율법). 이에 비해, 농업 국가는 ‘토지경계이동죄‘에 중한 형벌의 압력을 가하는 한편, 신을 모독한 사람은 지극히 가볍게 처벌했다(고대 로마법), 한편 상업 국가에서는 통화위조죄나 기타의 위조죄가, 군사 국가에서는 불복종죄나 복무규율 위반 등이, 절대주의 국가에서는 대역죄가, 공화제 국가에서는 왕정복고운동의 죄가 각각 가장 중대한 범죄이고, 다른 일반 범죄의 경우와 매우 대조적으로 무거운 벌을 부과한다. 요약하자면 국가나 개인의 권리감각에 대한 반응은 고유한 생존 조건이 직접 위협당한다고 느껴지는 경우에 가장 강력한 것이 된다.
어떤 계급이나 직업의 고유한 조건으로 인해, 일정한 법제도가 특히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그 침해에 대한 권리감각의 감응도가높아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조건이 역효과를 초래할 수도있다.
하층 피지배계급은 사회의 다른 계급처럼 명예감각을 갖지는 않는다. 그들의 지위는 일종의 비하를 수반하는 것이고, 그 개인들은 전체 피지배계급이 그러한 비하를 수용하는 한 이를 제거할수 없다. 그러한 지위에 있으면서 강한 명예감각을 갖는 사람은 자기의 요구를 통상의 수준으로 내리거나, 아니면 그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가 갖는 느낌의 방식이 일반적인 것이 될 때 처음으로 그 개인은 자신의 힘을 무익한 투쟁에 낭비한 것이 아니라,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협력해 같은 계급의 명예 (명예에 대해서는 주관적인 감각만이 아니라 사회의 여타 계급이나 입법에 따른 객관적인 승인)를 높이는 일에 성공할 것이다. 하층 피지배 계급의 지위는 최근 50년 사이에 그러한 방향으로 크게 개선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