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들은 실제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모델(model)을 만든다.
모델은 실제 세계와 들어맞는가 아닌가에 따라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과학에서 사용하는 모델은 자연과학의 
모델과 달리 참 거짓이 확정적으로 결정될 수 없다. 
사회과학에서는 확증적인 반례가 나와도 설명력이 
높으면 그 모델은 포기되지 않는다. 
모델에 대한자세한 설명은 Ronald N. Giere, Understanding Scientific Reasoning(Fort Worth: Harcourt Brace College Publishers, 1997), pp.21-27.


- P28

하나의 모델로서 이념이념은 그 이념의 기초로서 철학적 
토대를 가지고 있으며, 현실정치에서 정책의 근거가 된다. 
현실 정치에서 여러 정책이 제시될때, 그 정책은 특정 
이념에 기초해 있다. 정책은 이념으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어떤 정책을 신자유주의적이다. 자유주의적이다, 
사회주의적이다, 우파적이다, 좌파적이다, 보수주의적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정책이 이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념은 하나의 모델(model)이다. 우리가 현실을 지각하고 사실을 바라보고 그것의 중요성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어떤 가정이나 선입견이 필요하다. 이 가정이나 선입견인 이념은 하나의 이론적 모델이다. 이 모델은 다음과 같은 역할을 한다. - P28

(1) 현실에 질서를 부여하고 일반화한다.

(2) 현상들사이에 존재하는 인과관계를 이해한다.

(3) 미래의발전을 전망하고, 행운이 따르면 예측도 
할 수 있다.

(4)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한다.

(5)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준다.

하나의 이념으로서 자유주의

그런데 자유주의자 철학자들도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질 수 있다. 
하이에크, 노직, 프리드먼, 롤즈, 포퍼는 현대의 대표적인 
자유주의자이지만 하이에크와노직, 프리드먼은 
복지국가에 대해 부정적이고, 롤즈와 포퍼는 긍정적이다.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의 이론은 대처와 레이건의 
정책을 뒷받침하고 그들은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정책을 채택하여 감세와 민영화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은 현실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같은 입장이지만, 그 경제정책을 지지하는 이론은 서로 
다르다. 서로 다른 이론적 기반을 가진 자유주의에서 
어떻게동일한 정책이 나올 수 있는가?

- P29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자인 샌델은 롤즈와 함께 
복지국가를 지지하지만, 샌델은 롤즈의 자유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공동체주의를 주창하였다. 
샌델과 롤즈는 전혀 다른 철학적 기초 위에 서있지만 
어떻게 해서 복지에 대해서는 함께 긍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가?

자유주의는 여러 형태로 존재하고, 그것의 철학적 기초도 
서로 다르다. 철학적 기초란 이론적 가정을 의미한다. 
자유주의의 철학적기초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기 위해 
필자가 우선 채택한 자유주의자들은 아담 스미스 하이에크 프리드먼이다. 이들은 일관적인 자유주의자들로 자유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잘 보여준다. - P30

특히 이들 가운데 하이에크는 진화론적 합리주의라는 
자신의 철학을 바탕으로 이러한 기초 위에 서지 않은 
자유주의를 사회주의로규정하였다. 현대 복지국가를 
뒷받침하는 모든 ‘자유주의‘는 그의관점에 따르면 
자유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다. 하이에크는 버나드
맨더빌, 데이비드 흄, 아담 스미스의 고전적 자유주의를 
이어받아 현대의 자유주의를 부흥시켰다. 

하이에크는 ‘자생적 질서‘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안하여 
자신의 자유주의를 전개하였다. ‘자생적 질서‘ 이론은 
하이에크 정치철학의 핵심이며, 그는 자신의 자생적 
질서의 지적 뿌리를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에서 찾았다. 
그는 자신의자유주의를 진화론적 자유주의‘로 규정하고, 
그것은 스코틀랜드계몽주의에서 유래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곧 ‘자생적 질서‘는 사회현상을 ‘인간의 설계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 행동의 결과‘로 이해한버나드 맨더빌, 
데이비드 흄, 아담 스미스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이에크 자유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밝히는 것은 
곧 그의자생적 질서 이론의 철학적 기초를 밝히는 것이다. 
그의 자생적 질서 이론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에 대한 
그의 독특한 해석에서 유래하며, 이것은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이론과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양자는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을 반대하고 규제없는 
시장 옹호에 대한 강력한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 P31

하이에크의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옹호가 
도덕철학이 아니라 사회 이론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현대 자유주의와 구별된다. 하이에크는 자유주의의 
근거를 사회현상에서 나타나는자기 발생적 또는 자생적 
질서의 발견에서 이끌어내었다. 

이 점에서 하이에크의 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기초를 도덕철학에서 찾은노직이나 롤즈의 자유주의와도 다르다. 
노직은 하이에크처럼 복지정책을 반대하지만 철학의 
기초를 로크의 개인의 도덕적 권리에서찾았으며, 
롤즈는 그의 분배적 정의론을 도덕적 고찰을 통해 세웠다. 
이 점에서 하이에크는 노직, 롤즈와 명확히 구분된다. - P31

이처럼 자유주의 진영에 속하는 철학자들이 특정의 사회 및 경제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유지하고, 서로 다른 
정책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들의 자유주의 이념이 기초하고 있는 철학적 기초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철학적 기초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각각의 철학자가 내세우는 이념을 지지하고 있는 세계관, 
인간관, 인식론, 형이상학 등을 총칭한다. 이 책은 이러한 
철학적 기초에 초점을 맞추어 여러 철학자들의 자유주의
이념을 분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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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권

명예에 대해 지금까지 설명한 것은 소유권에 대해서도 
해당된다. 소유권에 대한 민감함, 즉 정당한 소유감각도 
불건전한 사정과 상황에서는 약화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정당한 소유감각이라고 하는것은 영리욕, 
즉 금전이나 재산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또 값비싼 
것이라는 이유가 아니라 자기 것이라고 하는 이유에서 
자신의 소유물을 지키는 소유자 그 전형적인 대표로의 
단호한 정신을 말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즉 내가 소유하는 물건이 
도대체 내 인격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내 물건은 생계와 영리와 향락의 수단으로 나에게 도움이 
되지만, 금전을 추구해야 하는것이 윤리적 의무가 아닌 
것처럼 근소한 금액을 위해 비용과 시간을 써서 귀찮은 
소송을 시작해야 하는 윤리적 의무도 없는 것이다.
내가 재산권을 주장하는 유일한 동기는 재산의 취득과 
사용을 위한 나의 동기와 같은 것, 즉 나의 이익이다. 
소유권을 둘러싼 소송은 순전히 이익문제다.

권리의 목적물이 무엇이든 간에, 단순히 우연하게 어떤 
물건이내 권리의 목적이 되었다면, 내 인격을 침해하지 않고 그것을 빼앗아간다고 한들 내 권리에 침해가 초래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물건과 나를 연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내 의사이고, 이러한 의사는 나 자신이나 타인의 
노동에 근거해 생겨난 것이다. 내가 그 물건을 소유하고 
주장하는 것은 나나 타인이 과거에 행한 노동의 일부다. 

나는 그 물건을 내 것으로 삼음으로써 그 물건에 내 인격을
새기게 된다. 따라서 이 물건을 침해하는 자는 내 인격을 
침해하는것이 되고, 그 물건에 가해진 타격은 물건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가해지는 것이다. 
소유권이란 물건 위에 확대된 내 인격의 외연일 뿐이다.

- P83

권리와 인격 사이의 이러한 관련성은 어떤 종류의 권리에도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여지가 없는 가치를 부여한다. 
나는 이러한가치를 이익의 견지에서 권리가 가진 순수한 
물질적 가치와 대비해 이념적 가치라고 부르고 싶다. 

권리주장 시에 보는 헌신적 태도와 정력의 투입은 이러한 
이념적 가치에서 나온다. 권리를 이념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결코 고급 인사의 특권 따위가 아니라,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도 교양인도, 부자도 빈민도, 
야만인도 문명인도 이러한 사고방식을 몸에 익힐 수 있다. 
그것은 이상주의가권리의 본질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무엇보다도 웅변한다. 이러한 이상주의야말로 
건전한 권리감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오로지 저차원의 이기주의와 타산의 
세계로 낮추는 권리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인간을 이념의 
높이로 향하게 하고, 여기서 인간은 과거에 배운 모든 
억지와 타산을, 또한 모든 것을 측정하는 효용의 척도를 
잊고 오로지 이상을 향해 나아간다. 순수한 재물 세계의 
권리를 무미건조한 산문에 비유한다면, 인격 세계의 
권리는 인격의 주장을 목적으로 하는 권리를 위한 투쟁을
통해 고상한 시가 된다. 권리를 위한 투쟁은 품격의 노래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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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집권적 권위주의 국가를 반대한다는 점에서 크라베의 학설은 협동체이론에 가깝다. 권위주의 국가이론 및 
법률이론에 대한 그의 투쟁은 프로이스의 널리 알려진 
논의들을 상기시킨다. 협동체이론의 창시자인 기르케는 
스스로의 국가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즉 "국가나 여타 통치자의 의지는 법의 궁극적인 원천이 
아니라 인민들의 삶으로부터 생겨난 법의식을 표명하기 
위해 마련된 인민들의 기관이다."

- P39

통치자의 인격적 의지는 유기체적 전체로서의 국가의 
한 부분이 된다. 그러나 기르케에게 법과 국가는 
‘대등한 권력‘이며, 그 상호관계에 관한 근본적 물음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즉 양자는 인간 
공동생활의 두 가지 독자적 요소이며 한쪽 없이 다른 
한쪽을 생각할 수 없지만, 어느 쪽도 다른 한쪽에 
의존하거나 혹은 다른 한쪽에 앞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물론 혁명적인 체제변화를 통해서 법적 단절, 즉 법적
연속성에 단절이 일어날 수 있는데, 이는 윤리적으로 
요청된 것일 수도 있고 역사적으로 정당화된 것일 수도 
있지만 하나의 법적 단절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 단절은 "인민들의 법의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일정한 조치를통해서" 사후적으로 법적 근거를 부여받아 
메워질 수있다. 예를 들어 헌법협정이나 국민투표나 관습의 치유력 등을 통해서말이다. 그래서 법과 권력은 서로 
합치하는 경향이 있는 것인데, 이러한 합치가 없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긴장상태‘가 이로써 제거된다.

국가는 법을 보장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명령자가 아니라 수호자"인데, 수호자란 "맹목적 하수인이 아니라 책임을 지고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자"이다. 
그리하여 그는 소비에트 사상 속에서 협동체적 자치로의 
경향, 국가를 스스로의 ‘순수한‘ 기능으로 축소하려는 
경향의 표출을 보고 있는 것이다.

볼첸도르프는 국가를 "최종 결정을 내리는 수호자"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협동체적이고 민주적인 국가관과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권위주의적 국가이론에 얼마나 
접근해 버렸는지를 자각하지 못한 듯하다. 

그러나 크라베나 앞서 지명한 협동체이론의 대표자들에 
대해 도의 최근작은 이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실체적 의미에서의 형식이라는 결정적 개념을 
논의의 장(場)에 제시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질서자체의 
힘을 높게 평가하고, 국가의 보장 기능이란 매우 독자적인 
것이어서 국가가 더 이상 법이념의 확정자라거나 "외적이고 형식적인" 전달자가 아님을 밝혔다. 여기서 법논리적 
필연성에 비춰봐서 모든 확정과결정에 어느 정도까지 
구성적 요소가 포함되느냐, 즉 형식의 고유가치가
인정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볼첸도르프는 형식이란 "사회ㆍ심리적 현상"이며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현실을 움직이는 요소라고 하면서,
서로 대립하는 정치적 동기를 갖는 세력들이 다음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 예측할 수 있는 안정적 요소를 
헌법의 사고구조 속에서 파악 가능하게 하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국가는 삶의 
형식이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형식이 된다. 

예측 가능성을 위한 하나의 형태도르프와 헤펠레가 
사용한 것과 같은 미학적 의미에서의 형식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 P43

결단에 근거한 법형식의 특성
(기술적 혹은 감성적 형식과 대비하여)

형식 개념을 둘러싼 철학에서의 혼란은 사회학이나 
법학에서 특히 해로운 것으로 되살아난다. 
법형식, 기술적 형식, 감성적 형식, 그리고 초월론적 
철학의 형식 개념은 각각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베버(MaxWeber)의 법사회학에서도 세 가지 형식 
개념을 구분하고 있다. 

첫번째로 그는 법내용을 개념적으로 엄밀화한 것을 
법형식이라 부른다. 바로 그가 말하는 규범적 규제이다. 
물론 그는 그것을 양해행동의 인과적요인일 뿐이라고 
말한다. 두번째로 그는 영역 분류에 관해 말할 때 
형식적이라는 말을 합리화, 전문화 예측 가능성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형식적으로 발달한 법이란 자각적인 판결 원칙을 지닌 
복합체이며, 사회학적으로 보면 훈련된 법률전문가와
사법관료 등을 그 구성요소로 삼는다. 
교섭의 필요성이 증대함에 따라 전문적 훈련, 
즉(!) 합리적 훈련이 불"가결한 것이 되었고, 
이렇게 됨으로써 법은 특수 법학적인 것으로 
근대화되고 합리화되어 ‘형식적 성격‘을 갖게 된다. 

그래서 형식은 우선 법학적 인식의 초월론적 ‘조건‘을, 
그 다음으로는 훈련의 반복과 전문적 연구의 결과에서 
비롯된 합법칙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합법칙성과 
예측가능성으로부터 세번째 ‘합리주의적‘ 형식으로의 
이행이 일어난다. 이는 필연적으로 증대하는 사회적 
교류 및 법률적 소양을 갖춘 관료의 이해관심으로부터 
비롯된 예측가능성에 목적을 두는 기술적 완성으로의 
이행을 뜻하며, 이때 이러한 기술적 완성은 원활한 
기능 발휘라는 이상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칸트주의자의 형식 개념을 다룰 필요는 없다. 
기술상의 형식 개념은 합목적성의 관점이 지배하는 
엄밀화를 의미한다. 이 의미에서의 형식이라는 말은 
조직화된 국가기구에는 사용할 수 있지만 ‘사법형식‘을 
취하는 것에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엄밀한 군사명령은 기술적으로는 적절한 것이지만 법적 
이상에는 맞지 않다. 그것이 감성적이라고 평가되어 
나아가 의례화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그 기술성에 아무 
변화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고대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숙고‘와 ‘행동‘을 
대립시켰지만, 양자는 두 가지 상이한 형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숙고는 법형식에 적합하고 행동은 기술적 
형식에 적합하다. 

- P44

법형식을 지배하는 것은 법이념이고 법적 사고를 구체적 
사례에 적용해야만 하는 필연성, 즉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법실현이다. 법이념은 스스로를 실현시킬 수 없기에 
이를 위해서는 특별히 구체적 모습으로 형식어야 한다. 
이는 일반적 법이념이 실정법으로 형식화되는 데에도, 
일반적 법규범이 사법적이거나 행정적으로 적용되는 
데에도 타당한 일이다. 법형식의 독자성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바로 여기서 출발해야만 한다. - P44

현대 국가론이 신칸트학파의 형식주의를 배척함과 
동시에 전혀 다른 형식을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철학사를 더할 나위 없이 따분한 
것으로 만든 끊임없는 말 바꿔치기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이 현대 국가론의 노력에서 한가지 확실하게 
알수 있는 것은 형식이 주관으로부터 객관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이다. 라스크의 범주론에서 형식 개념은 모든 인식론적 입장이 그렇듯이 여전히주관적인 것이었다. 켈젠은 이렇게 비판적으로 획득된 주관적 형식 개념으로부터 출발하여 
법질서의 통일성을 법학적 인식의 자유로운 행위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가 하나의 세계관을 
표명하는 단계에서는 객관성을 요구하고 헤겔적 집단주의를 국가 주관주의로 비판하는 것은 자기모순이 아닐 수 없다. 켈젠이 내세우는 객관성이란 일체의 인격성을 회피하고 
비인격적 규범의 비인격적 효력으로 법질서를 환원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주권 개념에 대한 다양한 이론은 이런 객관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인격적인 것을 모두 국가 개념으로부터 
제거해야 한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인격성과 명령은 
그들에게 명백히 똑같은 것이다. 

켈젠에 따르면 인격적 명령권이라는 표상이야말로 
국가주권론의 본질적 오류이다. 그는 국내법 우위설이 
객관적으로 유효한 규범을 명령이라는 주관주의로 
대체하기 때문에 ‘주관주의적‘이며법이념의 부정이라고 
단정한다. 한편 크라베는 인격 대 비인격의 대립을
구체 대 보편, 개별 대 일반의 대립과 결부시키고 나아가 
관헌 대 법규,권위 대 내용적 타당성의 대립으로 끌고 
나가 스스로의 일반적인 철학적 정식화 속에서의 
인격 대 이념의 대립에까지 이른다. 

이런 일련의 사고방식은 법치국가적 전통에 합당한 것이다. 이 전통 속에서 추상적 규범은 실질적으로 유효한 인격적 
명령에 대립되기 때문이다. 19세기 법철학에서 아렌스는 
이 대립을 명쾌하고도 흥미롭게 설명한 바 있다. 

프로이스나 크라베에게 인격이라는 표상은 모두 절대군주제의 역사적 유물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논의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인격이라는 표상과그것이 형식적 권위와 
결합되는 것은 특수한 법학적 관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관심이란 법적 결정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매우 선명한 의식에 다름 아니다.

넓은 의미에서 이 결정은 법적으로 무언가를 지각할 
때마다 따라다니는 것이다. 모든 법적 사유는 순수한 
형태로는 현실화될 수 없는 법이념을 다른 응집상태로 
변화시키며, 법이념의 내용으로부터도 도출될 수없고 
현실에 적용되어야 할 일반적인 실정적 법규범으로부터도 도출될수 없는 하나의 계기를 덧붙이기에 그렇다. 


모든 구체적인 법적 결정은법의 내용과 무관한 계기를 
포함하는데, 현실의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의 전제로부터 
추론하는 법률적 연역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어떤 결정을 요구하는 상황 그 자체가 결정적 계기로 
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결정의 인과적이고 
심리학적인 발생이 아니라 법적가치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추상적인 결정 자체는 중요하지만 
말이다. 사회학적으로는 결정의 명확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상업거래가 활발한 시기이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례에서 알수 있듯이 거래에서는 특정 종류의 
물품보다는 예측 가능한 명확성 쪽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나에게는 개개의 열차시간표가 출발 시각이나 
도착 시각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보다도, 오히려 
그것이 믿을 수 있게끔 기능하여 나의 행동을 거기에 
맞출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법적 거래에서는 어음법의 이른바 ‘형식적 어음 엄격성‘이 이러한 관심의 한 예가 될수 있다. 그러나 이런 예측 가능성과 결정 자체에 대한 법적 관심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이 법적 관심은 규범적인 것의 특성에 바탕을 둔 것으로, 구체적 사례는 구체적으로 판결되어야 한다는 원칙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판결의 기준으로 하나의 법적 원리가 일반적 보편성으로 주어져 있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개별 사례들에 따라서 그 사례만큼의 판결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법이념 자체가 변화할 수 없음은 누가 그것을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법이념이 말하지 않는다는 
데에서 이미 짐작할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모든 변화에는 권위가 개입해 있다
(auctoritatisinterposite). 

그러나 어떤 개인이나 어떤 구체적 기관이 그런 권위를 
자신의 것으로 획득할 수 있는지를 변별하는 규정은 
법조문의 단순한 법적 성질로부터는 도출될 수 없다. 
크라베가 고집스레 무시한 것은 바로 이 어려움이었던 
셈이다.

결정을 내린 권한기관이 있었다는 사실은 결정 내용이 
옳았는지 아닌지 하는 문제로부터 결정 자체를 상대적으로, 때에 따라서는 절대적으로까지 독립시켜, 그 이후로는 
이 결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논의를 봉쇄해 버린다. 
결정은 눈 깜짝할 사이에 결정이 내려진 논거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잘못된 국가의 행위에 대한 학설은 이 사태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의미를 완전하게 드러낸다. 이 학설에 따르면 
그릇되고 잘못된 결정도 법적 효력을 갖는다. 그릇된 결정은바로 그 그릇된 덕분에 구성적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결정의 이념은 절대적으로 선언적인 결정은 없다는 사실에 있다. 기초가 되는 규범의 내용에서 보자면 앞에서
 말한 구성적이고 특수한 결정이라는 계기는 새롭고도 
생소한 것이다. 규범적으로 봤을 때 결정이란 무로부터 
태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결단의 법적 효력은 하나의 근거에서 비롯된 결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여기서는 규범의 손을 빌려 무언가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즉 결정이라는 귀속점으로부터 무엇이 규범이며 무엇이 
규범적 타당성인지가 규정되는 것이다. 규범으로부터는 
그 어떠한 귀속점도 생겨날 수 없고, 단순히 규범의 내용이 어떤 성질의 것인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법에 고유한 
의미에서 형식이란 이 내용의 성질과 대립하는 것으로, 
인과관계가 얼마나 담겨 있느냐 하는 양적 내실의 문제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후자의 문제가 법학의 
대상이 아님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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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 투쟁은 권리자 자신에 대한 의무

권리를 위한 투쟁은 권리자 자신에 대한 의무다.

자신의 생존을 주장하는 것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의 
최고 법칙이다. 이 법칙은 모든 생물의 자기보존 본능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육체적 생존만이 아니라 
윤리적 존재로 생존하는 것도중요하며, 이를 위한 조건의 
하나가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윤리적 
생존 조건을 권리라는 형태로 유지하고 지킨다.
따라서 권리를 갖지 않는 인간은 짐승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런 만큼 로마인은 추상적 법의 관점에서는 이치 
그대로, 노예를가 축과 동일선상에 두었다.



따라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윤리적 자기보존의 의무이고, 권리주장을 전체로 포기하는 것(오늘날 그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과거에는 가능했다)은 윤리적 자살(권리능력, 즉 법적 인격을 스스로 말살하는 것이다. 


또 법이라고 하는 것은 개별 법제도의 총체에 불과하고, 
각각의 법제도는 소유권도 혼인도, 계약도 명예도 각각의 
인간 존재에게 물리적 또는 윤리적 생존 조건이 되고 
있으므로 그러한 생존 조건의 하나만을 포기하는 것도 
권리 전체를 포기하는것과 마찬가지로 법의 입장에서는 
인정할 수 없다. 도리어 타인이 이러한 조건의 하나를 
공격하는 것은 있을 수 있고, 그 공격을 물리치는 것은 
권리주체의 의무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존 조건이 권리를 
통해 추상적으로 보장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권리주체가그것을 구체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의 계기를 부여하는 것이 타인의 
자의적 침해라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불법이 자의, 즉 권리의 이념에 대한 위배라고 할 수는 없다. 내 소유물을 점유하는 자가 그것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믿는 경우, 그는 내 인격을 침해하는 
방식으로 소유권의 이념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소유권의 이념을 방패로 삼은 것이다. 이 경우 두 사람 
사이의 분쟁은 어느 쪽이 소유자인가라는 문제를 둘러싼 
것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절도나 강도의 범인은 소유권이라는 법제도의 틀 밖에 있는 것이고, 내 소유권을 무시함으로써소유권의 이념을(따라서 내 인격의 중요한 하나의 생존 조건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양식이 일반화된 상태를 생각해보자. 거기에서는 소유권이 실제로 무시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원리적으로도 무시된다. 따라서 이러한 범행은 내 물건에 대한 공격만이 아니라, 내 인격에 대한 공격도 포함한다. 

그리고 자신의 인격을 주장하는 것이내 의무인 이상, 인격의 존재에 불가결한 조건을 주장하는 것도 내 의무다. 공격을 
받은 자는 소유권을 방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즉 자신의 
인격을 방위하게 되는 것이다.

소유권의 포기가 정당화되는 것은, 강도가 피해자에게 
생명과 금전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 위협하는 
경우처럼 소유권을주장해야 할 의무와 생명의 유지라고 
하는 더욱 고차적인 의무가충돌할 때뿐일 것이다. 

이러한 경우를 제외하면, 자신의 인격을 침해하는 형태로 
권리를 무시당한 사람이 주어진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우는 것은 모든 사람이 지닌 자신에 대한 의무다.

이러한 무시를 묵인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활이 부분적인 
무권리 상태에 놓여 있음을 인정하는 결과가 되지만, 그런 
것을 스스로 조장하는 자살적 행동은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는다. 단 타인이 자신의 소유물을 선의로 섬유하는 경우, 그 타인에 대한 소유권자의 관계는 그것과 전혀 다르다. 

이 경우, 소유권자가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문제는 
권리감각의 문제, 즉 그의 품격이나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이해관계의 문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물건의 가치에 불과하고, 그가 승소한 경우의 이득과 비용 
및 노력, 나아가 패소의 가능성을 형량한 뒤에 소송을 
제기할 것인가 말 것인가, 아니면 화해의 길을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완전히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각주)이 부분은 내가 권리를 위한 투쟁을 설명하고 
그 투쟁에서 생기는 알력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오해를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이었다. 나는 권리침해로 인해 
인격 자체가 유린되는 경우에만 권리주장은 인격의 
자기주장이고, 명예에 관련된 것이며, 윤리적인 의무라고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이 정도로 명확하게 강조한 구별을 간과하고, 내가 마치 
싸움이나 항쟁은 대단히 좋은 일이고 소송중독증이나 
권리주장증은미덕이라고 하는 바보 같은 주장을 일삼았다고 하는 것처럼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

화해라는 것은, 당사자 쌍방의 이러한 확률 계산의 결과가 
종종 일치할 때에 성립한다. 그러한 전제하에서는 분쟁 
해결을 위해 허용되어 있는 방법이 아니라, 가장 옳은 
방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실제로는 화해의 성립이 
매우 힘든 경우가 많고, 양 당사자가 법정에서 각자의 
변호사와 의논할 때 처음부터 모든 화해 교섭을 거부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는 양 당사자가 모두 소송을 하면 
자신이 이긴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대방을 
의식적인 불법을 행하고 악의적인 의도를 갖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소송상으로는 객관적인 불법으로서, 즉 ‘소유물반환청구권‘이라는 형태로 심리되는 문제라도, 당사자의 심리에서는 이미서술한 의식적인 권리침해의 경우와 마찬가지 
자세를 취한다. 권리주체인 당사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경우에 그가 자신의 권리에 가해진 공격을 배척하는 
완강한 태도는, 도둑에 대한 경우와 전적으로 같은 동기에서 생긴 것이고, 동일한 윤리적 정당화를 수반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당사자에게 소송비용이나 소송에서 비롯되는 여러 가지 성가심 승소의 불확실성 등을 설명하며 소송에서 물러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당사자의 심리를 잘못 판단한 
것이다. 당사자에게 문제는 이해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침해된 권리감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당사자를 설득하기 위한 유일한 실마리는 그가 
상정하고 완고한 태도를 취하는 근거가 된 것, 즉 상대방의 
악의적인 의도라는 것에서 구할 수 있다. 그러한 상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면, 완강했던 당사자의 반감도 
약화될 것이고, 이익의 관점에서 사건을 재고하게 되며, 
그 결과 화해에 응하는 것도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설득을 해도 당사자의 선입견 때문에 
완강한 태도를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를 모든 
법률실무가는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심리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극심한 불신감이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 즉 당사자가 된 인물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교육 정도나 직업의 상이함 때문에 명백한 
강약의 차이가 인정된다고 말해도 실무가들은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완고한 시기심을 갖는 집단은 농민이다. 농민에 대해 
표현할 때 종종 ‘소송중독증‘이라고 일컫는데, 이는 농민의 특징적인 두가지 요소, 즉 탐욕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어도 강력한 소유의식과 시기심이 낳은 것이다. 

농민만큼 자신의 이익에 민감하고 소유물을 확실하게 
장악하는 집단은 없다. 그럼에도 잘 알려져 있듯이, 
농민만큼 모든 재산을 소송에 쏟는 집단도 없다. 
이는 언뜻 보아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잘 설명될 수 있다. 그야말로 고도로 발달한소유의식이 있기에 그것이 
침해되면 농민에게는 엄청난 고통이 되고, 이에 대한 
반작용도 그만큼 커지게 된다. 농민의 소송중독증은
시기심에 근거한 잘못된 소유의식에서 비롯된다. 

애정 관계에서 질투가 위험을 초래하듯이,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결국 자신에게 화살을 쏘게 하고, 그를 구하고자
생각하는 사람을 파괴하는 것이다.

위에서 서술한 내용의 흥미로운 보기를 고대 로마법에서 
찾아보자. 고대 로마법에서는 모든 권리분쟁 시에 상대방의 악의를 찾아내는 농민의 시기심이라는 것이 법명제라는 
형태로 채택되었다.

분쟁의 양 당사자가 모두 선의일지도 모른다는 경우까지 
포함해어떤 경우에도, 패소자는 처벌되어 자신이 상대방의 권리에 가한 공격을 보상해야 했다. 

침해를 받은 경우 단순히 권리의 회복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격렬하게 전개된 피해자의 권리감각을 
만족시킬 수 없고, 가해자에게 고의나 과실이 있든 
없든 간에 피해자의 권리가 가해자에 의해 일단 
부인되었다고 하는 점에 대해 특별한 보상이 요구되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설명하겠다).

현대의 농민이 법을 만들어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면, 
그것은 아마도 고대 로마의 농민법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로마시대에 법 세계의 시기심은 문화의 발달을 통해 원리적으로 극복되었다. 

즉 두 종류의 불법인 고의과실에 근거한 것과 무과실에 
근거한 것, 주관적인 불법과 객관적인 불법(헤겔의 용어에 
따르면 ‘악의가 없는 불법‘이 정확하게 구별되었다.

이러한 주관적 불법과 객관적 불법의 구별은 입법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법이 어떻게 정의의 
입장에서 사태를 바라보고, 상이한 불법에 각각의 효과를 
부여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리주체가 받아들이는 방식에서는, 즉 추상적인 체계적 개념에 따라 
움직여지지 않는 그의 권리감각이 불법으로 인해 받는 
제재에 대해서는 앞의 구별이 전혀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구체적인 사례의 사정에 따라 법률상으로는 단순한 객관적 권리침해로 보이는 권리분쟁이라도 권리자가 
상대방의 악의적인 의도, 의식적인 불법을 상정하는 것도 
맞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 경우, 권리자가 이러한 판단에 근거해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다. 
나의 채무자가 사망한뒤 그 상속인이 채무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고 채무의 존재가 입증된다면 변제하겠다고 
말하는 경우, 채무자 자신이 파렴치하게도 돈을 빌린 사실을 부인하거나 이유없이 변제를 거부하는 경우와 똑같아, 
법은 이를 객관적 침해라고 인정하는 한 나에게 전적으로 
동일한 임금반환청구권을 승인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전자의 선의를 지닌 상속인의 행동과 후자의 악의 있는 채무자의 행동을 구별해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 방해받지 않는다.

후자의 경우에 채무자는 나에게 절도범과 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즉 그는 나의 것이라고 알면서 뺏는 것이고, 의식적인 불법으로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전자의 
경우에는, 채무자의 상속인이 내 물건의 선의의 점유자와 
같은 입장에 있다. 그는 채무자가 변제해야 한다는 명제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상속으로 채무자가 되었다고 하는 내 주장을 다투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선의의 
점유자에 대해 설명한 것은 모두 그에게도 적용된다.



그런 상속인이라면 나는 화해할 수도 있고, 승산이 없는 
경우에는 소의 제기를 완전히 포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소송을 두려워한다거나 안일함과 나태함과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할 것이라는의심으로 내 정당한 
권리를 뺏고자 하는 채무자에 대해서는, 돈이아무리 많이 
들어도 내 권리를 추구하고, 추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그러한 권리를 상실할 
뿐 아니라, 권리일반을 포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론할지도 모른다. 인격의 윤리적 생존 조건으로서의 소유권이나 채권에 대해 일반인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라고. 이처럼 알고 있는가라고 물으면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러한 권리를 인격의 윤리적 생존 조건이라고 느끼느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것을 입증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육체적 생존의 조건으로서 신장이나 폐나 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지만 누구나 폐가 찔릴 때의 
아픔이나 신장이나 간의 통증을 느낄 수 있고, 이를 경고로 받아들인다. 육체적인고통은 생명체의 고장을 알리는 
신호이자, 생명체에게 위험한 영향력의 존재를 통고하는 
신호다. 이는 절박한 위험에 대한 주의를촉구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을 예의 주시하라고 경고해준다.

의도적인 불법이나 자의적인 행동으로 가해진 윤리적 
고통(윤리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진 정신적 고통)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수 있다. 윤리적 고통은 정신적 고통과 마찬가지로 (각각의 주체가 지닌 감수성의 차이, 권리침해의 형식과 대상의 차이)강력한 것도 있고, 약한 것도 있지만, 
벌써 무의식적이 된 인간, 즉 현실의 무권리 상태에 
익숙해진인간을 제외하고, 모든 인간에게 윤리적 고통으로 받아들여지고, 육체적 고통과 같이 경고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현재의 고통을 멈추기 
위한 효과적인 경고보다는 긴 눈으로 본 경고, 침묵하면서 
고통을 참아내는 것만으로는 손해를 보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경고다. 여하튼 육체적 고통이 육체적 자기보존의 
의무를 수행하라고 경고하듯이, 윤리적 고통은 윤리적 
자기보존의 의무를 수행하라고 경고한다는 점이다.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경우인 명예훼손과 명예감각이 
최고의 정도에 이른 장교 계급을 생각해보자. 명예훼손을 
인내하는 장교는 더 이상 장교가 아니다. 왜 그런가? 
명예를 주장하는 일은 모든사람의 의무임에도
왜 장교계급에게는 그 의무의 실행이 특히 중시되는가? 
그 이유는 장교 계급은 그야말로 자신들에게 인격의 대담한 주장이 자기 지위 전체에 불가결한 전제가 되고 있으며, 
그 성질상 인격적 용기의 체현자여야 할 자기의 계급이 
동료의 비겁함을 간과하면 전체 권위가 실추될 수밖에 
없다는 옳은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농민을 장교와 비교해보자. 자신의 소유물을 그 정도로 
완강하게 지키는 농민이 자신의 명예에 대해서는 이상할 
만큼 우둔하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장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유한 생존 조건에 관한 올바른 감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농민의 직업은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고 노동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농민은 소유권을 수호함으로써 노동을 
수호한다고 말이다.


농민의 경우, 노동과 소유권 확보는 장교의 명예에 상당한다. 자신의 밭을 제대로 경작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재산을 
경솔하게 낭비하는 게으른 농민은 자기의 명예를 지키지 
못하는 장교가 동료에게 경멸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료 농민에게 모욕을 당하게된다. 이에 대해 농민이 모욕을 받아도 결투에 나서지 않고 소송도제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동료 농민들의 비난을 받지 않는데, 이는 장교가 훌륭한 
농장주가 아니라는 이유에서 장교 동료로부터 비난받지 
않는 것과 같다. 농민에게는 경작하는 토지와 사육하는 
가축이 생존의 기초이고, 따라서 경계의 2. 3 피트 안쪽까지 경작한 이웃이나, 소를 판 것에 대금을 지불해주지 않는 
상인에 대해서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즉 엄청나게 격분해서 제기하는 소송의 형식으로 권리를 위한 투쟁을 하게 된다. 
이는 장교가 자신의 명예를침해한 사람에게 칼을 들고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농민도 장교도 여기서는 맹목적으로 전력을 기울이며, 
결과를 전혀 고려하지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그렇게 함으로써 윤리적인 자기보존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을 배심원석에 앉힌 다음 먼저 장교들에게는 
재산범죄를, 농민들에게는 명예훼손죄를 심판하게 하고, 
이어서는 그 반대로 농민들에게 재산범죄를 장교들에게 
명예훼손죄를 심판하게 한다면, 이 두 경우의 판결은 얼마나 다를 것인가! 재산범죄에서 농민보다 더 엄격하게 심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바는 아니지만, 
나는 다음과 같이 장담한다. 즉 농민이 명예훼손의 소를 
제기했다는 희귀한 경우에, 재판관은 같은 농민이 소유권을 둘러싼 소를 제기한 경우보다도 훨씬 쉽게 화해를 권해서 
성공할 것이라고

고대 로마의 농민은 손바닥으로 따귀를 맞았을 때에는 
25 아스를배상금으로 받고 만족했고, 자신의 눈을 맞아 
멍든 경우에도 희망한다면 대화와교섭에 응해 화해를 했다. 이에 반해 고대 로마의 농민은 절도 현행범을 붙잡았을 때 
그를 자신의 노예로 삼고 그가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는 
권한을 법이 인정하도록 요구했고, 법도 이를 허용했다. 
전자의 경우는 농민의 명예나 신체가 해를 입은 것에 
불과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농민의 재산에 피해가 
있었다는 것이 대조적인 현상을 낳은 이유다.

각주)12표법을 말한다. 12표법은 로마법의 기초를 이룬 
고대 로마의 성문법으로, 로마공화정 정체의 중심이었다. 
그 내용은 민사소송, 채무, 가족, 상속, 재산, 부동산, 장례, 
결혼, 불법 행동, 범죄 등 다양했다. 12표법은 당시 억압받던 평민 집단이 귀족들에게서 쟁취한 정치적 성공의 좋은 예로 여겨져왔으나, 그것을 편찬한 직접적인 목적은 평민의 
권리 신장이 아닌, 귀족 계급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세 번째의 예로 상인의 경우를 보자. 장교의 명예, 농민의 
소유권에 상당한 것이 상인의 신용이다. 상인에게 신용을 
유지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사활의 문제이고, 어떤 상인에 
대해 채무의 변제가 분명하지 않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그 상인을 모욕하고 그 상인의 물건을 훔친 사람보다도 
더 큰 타격을 가하는 것이 된다. 

최근의 여러 법전이 상인이나 그에 준한 사람에 한해 
경솔하고 사기적인 파산에 대해 처벌 규정을 두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상인 특유의 지위를 고려한 것이다.

나는 권리감각이라고 하는 것이 권리침해의 중대함을 
오로지 계급적 이익에 따라 측정한 결과, 권리감각의 
민감함의 정도가 계급과 직업마다 다르다고 하는 단순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이러한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는 진리에 올바른 빛을 
비추기 위해 필요할 뿐이다. 그 진리란 모든 권리자는 
자신의 권리를 지킴으로써 자신의 윤리적 생존 조건을 
지킨다고 하는 명제다.

왜냐하면 앞에서 보았듯이 농민, 장교, 상인 중 어느 경우나 권리감각의 감응도가 가장 높은 것은 각각의 계급 특유의 
생존 조건에관련되는 점이지만, 그로부터 권리감각이 보여주는 반응은 통상의걱정과는 달리 기질이나 성격이라고 
하는 개인적 요소에만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요소, 즉각 계급의 생활 목적에 당해법제도가 결여될 수 
없다는 감각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권리침해가 있었던 경우에 권리감각이 어느 정도로 
강력하게 발휘될 수 있는가가 개인이나 계급, 국민이 
자기의 생활 목적을 위해권리의 의의(권리 일반 및 구체적인 법제도의 의의)를 어느정도 잘 이해하는가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지표다. 이 명제는 나에게보편적적인 진리이며, 
공법에도, 그리고 사법에도 적용된다. 다양한 계급이 
각 존재의 본질적 기초를 형성하는 제도의 침해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국가는 
각각에 고유한 생존 조건을 구체화하는 여러 제도에 관해 
민감하다.

국가에 있어, 민감도의 지표이자 여러 제도가 가치의 지표가 되는 것이 형법이다. 형법 분야의 다양한 입법은 형벌의 
엄격함에 관해 놀라울 정도의 차이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주로 앞에서 말한 생존 조건의 다양성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어떤 국가든 자국에 고유한 생존 원리를 위협하는 범죄를 
가장 엄격하게 처벌하고, 반면에 기타의 범죄에 대해서는 
현저히 대조적으로 가벼운 형벌에 맡기고있다.

가령 신정국가는 신을 모독하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행동을 사형에 처할 만큼 중죄로 다루는 한편, 토지 경계의 이동은 단순한 경죄로 보고 있다(모세의 율법). 이에 비해, 농업 
국가는 ‘토지경계이동죄‘에 중한 형벌의 압력을 가하는 한편, 신을 모독한 사람은 지극히 가볍게 처벌했다(고대 로마법), 한편 상업 국가에서는 통화위조죄나 기타의 위조죄가, 군사 국가에서는 불복종죄나 복무규율 위반 등이, 절대주의 국가에서는 대역죄가, 공화제 국가에서는 왕정복고운동의 죄가 각각 가장 중대한 범죄이고, 다른 일반 범죄의 경우와 매우
대조적으로 무거운 벌을 부과한다. 요약하자면 국가나 개인의 권리감각에 대한 반응은 고유한 생존 조건이 직접
위협당한다고 느껴지는 경우에 가장 강력한 것이 된다.

어떤 계급이나 직업의 고유한 조건으로 인해, 일정한 
법제도가 특히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그 침해에 대한 
권리감각의 감응도가높아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조건이 역효과를 초래할 수도있다. 

하층 피지배계급은 사회의 다른 계급처럼 명예감각을 
갖지는 않는다. 그들의 지위는 일종의 비하를 수반하는 
것이고, 그 개인들은 전체 피지배계급이 그러한 비하를 
수용하는 한 이를 제거할수 없다. 그러한 지위에 있으면서 
강한 명예감각을 갖는 사람은 자기의 요구를 통상의 
수준으로 내리거나, 아니면 그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가 갖는 느낌의 방식이 일반적인 것이 될 때 처음으로 
그 개인은 자신의 힘을 무익한 투쟁에 낭비한 것이 아니라,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협력해 같은 계급의 명예
(명예에 대해서는 주관적인 감각만이 아니라 사회의 여타 
계급이나 입법에 따른 객관적인 승인)를 높이는 일에 
성공할 것이다. 하층 피지배 계급의 지위는 최근 50년 
사이에 그러한 방향으로 크게 개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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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 문제, 그것은 법형식과 결정의 문제

공법의 이론과 개념이 정치적 사건과 변화를 반영하여 
형성되는 것이라면, 이에 관한 논의는 우선 오늘날의 
실천적 관점에서 이뤄져야 하고전통적 표상을 당면한 
목적에 맞게 수정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새로운 상황은 새로운 사회학적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으며, 따라서 공법적 문제를 ‘형식적‘으로 다루는 방법에 대한 
반대를 불러일으킬 수있다. 그러나 법학적 연구방식을 
정치적 역학관계의 변화로부터 독립시키고 일관된 형식을 파악함으로써 과학적 객관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이렇게 동일한 정치적 사태로부터 서로 다른 
학문적 경향과 흐름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 P30

모든 법학 개념 중에서 주권은 가장 강력한 현실적 관심에 
놓인개념이다. 주권 개념의 역사는 보댕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16세기부터 하나의 논리적 발전 혹은 
심화과정을 경험해 왔다고는 할 수없다. 주권 학설사의 
여러 단계는 다양한 정치적 권력투쟁을 통해 구획되는 
것이지 스스로의 개념성에 내재하는 변증법적 상승을 통해 구획되는 것이 아니다.

유럽이 16세기에 결국 국민국가로 해체됨과 더불어 
절대군주가 각 신분계층들과 투쟁을 벌이는데, 
이 과정에서 보댕의 주권개념이 생겨난다. 
18세기에는 새롭게 탄생한 국가들의 국가의식이 바텔의 
국제법적 주권 개념에 반영된다. 

새로이 성립한 독일제국에서는 1871년 이후 연방국가에 
대한 각 영방들의 권한 영역을 확정하기 위해 하나의 
원칙을 세울 필요성이 생기고, 이런 관심에서 독일의 
국가론은 주권개념과 국가 개념의 구분을 발견한다. 

이 구분에 힘입어 독일 국가론은각 영방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도 국가적인 성격을 유지시키려 한 것이다. 결국 언제나 여러 가지 변용을 겪으면서도 낡은 정의가 반복된 셈이다. 
즉 주권은 지고의, 법적으로 독립된, 다른 무언가로부터 
연역 불가능한 권력이라는 정의가 말이다.

이런 정의는 너무나도 다양한 정치-사회학적 복합체에 
적용되고 매우 다채로운 정치적 이해관계에 봉사한다. 
그것은 현실을 적절히 표현한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식, 
기호, 신호이다. 그래서 무한히 다의적이며 상황에 따라서는 엄청나게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고 아무런 가치가 없을수도 있다. 또한 주권의 실로 엄청난 존재감에 대해 ‘지고의 힘‘
이라는 최상급 표현을 사용해왔다. 인과법칙이 지배하는 
현실에서는 그런 힘에고유한 요소를 아무것도 추출해 
낼 수 없고, 따라서 그런 최상급 표현을부여할 아무런 
까닭도 없는데 말이다. 저항할 수 없고 자연법칙적 안정성에
의해 기능하는 지고의 힘, 즉 최대 권력은 정치적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이란 법의 존립에 아무런 증거가 되지 못하는데, 이는
루소가 자신의 시대와 의견일치를 보면서 정식화한 바 있는 범속한 이유 때문이다. 강제력이란 물리적 권력이며, 강도가 쏜 총 또한 권력이라는 명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사실상의 최고권력과 법적인 최고 권력을 
결합시키는 것이 주권 개념의 핵심 문제이다. 
여기에 주권 개념의 모든 어려움이 있으며, 이는 밋밋한 
동어반복적언술로부터 벗어나 법학의 이 근본개념을 
법학적인 본질 규정을 통해 파악하는 하나의 정의를 
발견해야 한다는 문제인 것이다.

국가론에 대한 새로운 저술들 켈젠 크라베, 볼첸도르프

주권 개념에 대해 최근에 등장한 가장 상세한 주석은 
사회학과 법학을대립시키고 단순한 양자택일을 통해 
순수 사회학과 순수 법학 같은 것을 추출하는 매우 간단한 
해결책을 추구한다. 켈젠은 [주권 문제와 국제법이론 및 
사회학적 및 법학적 국가 개념]에서 이 길을 따른다. 
모든사회학적 요소가 법학 개념 바깥으로 내버려짐으로써, 의심의 여지없는 순수성 속에서 여러 규범들과 궁극의 
통일적 근본규범이 귀속된 하나의 체계가 획득된다. 


존재와 당위 및 인과적 사유와 규범적 사유 사이의 낡은 
대립이 옐리네크 키스차코프스키가 이미 했던 것보다 
강렬하고엄격하게, 그러나 마찬가지의 논증 없는 자명함을 통해 사회학과 법학의 대립으로 전위된다. 

다른 몇몇 학문이나 인식론도 이런 대립을 법학에 적용한다는 사실을 볼 때 이 대립은 법학의 운명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켈젠은 이런 경향에 힘입어 결코 놀랍지 않은 
결론에 다다른다. 즉 국가에 대한 법학적 사유에는 순수 
법학적인 무언가가 있어야만 하며, 그것은 규범적으로 
유효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법질서의 바깥혹은 
곁에 있는 현실이나 그 언저리에서 이뤄지는 구상이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하나의 통일체로서의 자기충족적이고 
독립된(여기에 문제가있다는 사실이 아무런 어려움으로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다)법질서에 다름아닌 것이다. 


국가는 또한 법질서의 창출자도 원천도 아니다. 켈젠에 
따르면 그런 모든 표상은 의인화이자 실체화이며, 이는 
단일하고 동일해야하는 법질서를 상이한 주체로 
양분화하는 일이다. 따라서 켈젠에게 국가. 

즉 법질서는 궁극적 귀속점과 최종규범이 속하고 있는 
귀속의 체계인 셈이다. 국가에서 유효한 상위 및 하위 
질서는 권한과 권능이 통일된중심점으로부터 가장 아래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두루 미치고 있다는 데에 토대를 둔다.

최상위의 권능은 하나의 인격이나 사회학적이고 
심리학적인 권력복합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규범체계의 통일체인 주권적 질서 그 자체에서만 
비롯된다. 법학적 사유에는 실제적인 인격체도 허구적인 
인격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귀속점들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국가는 이 귀속의 최종점이며, 이 지점에서 법학적 사유의본질인 귀속의 체계가 ‘정지한다. 이 ‘지점‘은 동시에 
‘더 이상 연역 불가능한 질서‘이기도 하다. 



원천적이고 최종적이고 최상위에 있는 것으로부터 낮은, 
즉 위임된 규범에 이르는 하나의 일관된 질서체계는 
이런 방식으로 사유된다. 몇 번이고 새롭게 반복되고 모든 
학문적 반대자들에게 새롭게 제시되는 결정적 주장은 
여전히 똑같은 채로 남아 있다. 즉 하나의 규범이 유효하기 위한 근거 또한 하나의 규범일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법학적 사유에서 국가는 국가의 헌법, 즉 통일적 
근본규범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이 연역에서 핵심은 바로 ‘통일성‘이라는 말이다. ‘인식론적 입장의통일성은 일원론적 관점을 절대적으로 요구한다.‘ 
사회학과 법학 방법의이원론은 하나의 일원론적 형이상학 속에서 종말을 맞이한다. 

그러나 법질서의 통일성, 즉 국가의 통일성은 법학의 
테두리 안에서는 어떠한 사회학으로부터 순수한 채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 법학적 통일성은 세계를 포괄하는 
전 체계의 통일성과 똑같은 종류의 것일까? 자연법적인
체계나 이론적인 일반 법학이 아니라 실정적으로 유효한 
질서의 통일성을 생각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켜켜이 쌓인 
여러 실정적 규정들이 동일한 귀속점을 가진 통일성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일까? 질서, 체계, 통일성 등의 말은 
똑같은 요청을 바꿔 말한 것 아닐까? 


결국 이 요청은 어떤 ‘헌법‘(이는 ‘통일성‘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동어반복적 말바꾸기 혹은 거친 사회정치학적 
사실을 의미한다)의 기초 위에 하나의 체계가 성립함이 
얼마나 순수하고 정합적으로 이뤄져야 하는가를 보여 준다. 


켈젠에 따르면 체계적 통일성이란 "법학적 인식의 자유로운 행위"이다. 여기서 하나의 지점이 하나의 질서이자 하나의 체계이자 하나의 규범과 일치해야만한다는 흥미로운 수학적 신화는 무시한다 하더라도, 실정적 규정, 즉 명령에 토대를 두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의 귀속점으로 수렴된다는 다양한귀속 층위들의 필연성과 객관성이 어디에 토대를 두어야 
하는지를 물어보자. 

마치 세계의 자명한 삼라만상이라도 되는 양 일관된 
통일성과 질서에 관한 논의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자유로운 법학적 인식의 귀결과 오직 정치적 현실에서 
통일체로 결합했을 뿐인 복합체 사이의 전제된 조화가 
이미 성립되어 있기라도 하는 양 상위와 하위의 질서로 
이뤄진 계층질서가 논의되고 있으며, 여러 실정적 규정들에 관한 법학이론이논의하는 모든 문제에서 이런 질서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켈젠이 법학을 순수성으로 끌어올려 도달하려는 규범 
과학은 결코규범적일 수 없는데, 법률가가 자신에게 
고유한 자유로운 행위를 통해 판단을 내린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법률가는 그에게 주어진(실정적으로 주어진) 
가치를 활용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 통해 객관성이 
가능한 듯 보일지 모르지만, 실정성과의 필연적 관계는 
전혀 가능해지지 않는다. 

법률가가 끌어오는 가치는 엄밀히 말해 그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그는 이 가치에 비해 우위에서 있다. 
왜냐하면 그가 ‘순수하게‘ 법률가로 남아 있는 한, 
그는 자신이법률적인 관심을 가지는 모든 것으로부터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성과 
순수성은 엄청난 열정을 쏟아 부어야 하는 근본적 어려움을 무시하고 형식적 근거를 내세워 체계를 거스르는 모든 것을 배제하기만 하면 쉽게 얻을 수 있다. 

스스로의 법학적 입장이 그때까지 법학의 이름으로 
행해져 온 것과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예시하지도 않은 채, 
그 어떤 구체적인 사례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결연하게 
방법론에만 머무르는 자는 손쉽게 비판을 일삼는다. 


방법론적인 선언 및개념 연마, 그리고 예리한 비판은 오직 
사전 준비로서만 가치가 있다. 실제 사태로 눈을 돌리지 
않은 채 법학이 형식적인 무언가에 기초한다는데에 
집착하면, 모든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법학의 낡은 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 P36

켈젠은 주권 개념이라는 문제를 무시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가 연역한 끝에 다다른 결론은 이렇다. 
"주권 개념은 반드시 배제되어야 한다." 사실상 이것은 
낡은 자유주의가 법을 내세워 국가를 부인하팽는 일이며, 
법실현이라는 독립된 문제를 무시하는 일이다. 

크라베야말로 명확하게 이런 주장을 내세운 인물이다. 
그의 법주권설은 국가가 아니라 법이 주권자라는 테제에 
기초해 있다. 켈젠은 이 학설을 국가와 법질서가 동일하다는 자기 이론의 선구자로만 간주하는 듯하다. 그런데 사실 
크라베의 학설은 켈젠 이론의 귀결과 공통의 세계관적 
뿌리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 네덜란드 법학자와 독일 
신칸트학파의 인식이론 및 방법론적 특성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다시 말해 켈젠의 독창성, 즉 그의 방법론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것이다. 
크라베가 말했듯이, "법주권설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실제로 현존하는 상황에 대한 기술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 학설이 현실화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요청일 
수도 있다".

크라베에 따르면 현대의 국가이념은 인격적 통치권력
(군주나 통치권자) 대신에 영적 권력을 내세운다.
 "우리는 현재 자연적이든 구성적이든 (법)인격의 지배 
아래에서가아니라 규범, 즉 영적 힘들의 지배 아래에서 
살고 있다. 현대의 국가이념이 여기에 드러나 있다."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이 힘들이야말로 지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힘들은 인간의 정신적 본성으로부터 비롯되기에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법질서의 원천, 즉 근저는 오로지 "민족협동체의 법감정과 
법의식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이 근저에 관해서는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오직 하나의 현실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크라베는 지배형식의 사회학적 탐구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현대 국가의 유기체적 형태에 관한 
본질적으로 사회학적인 설명을 빼놓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크라베의 학설에서는 현대 국가의 직업 관료가 독자적인 지배권력으로서 국가와 동일시되고, 특별한 의미에서 
공공법적인 관계를 갖는 공무원제도가 보통의 직업제도와 구분되기 때문이다. 주체가 처한 현실상황의 차이에 따라 
공법과 사법이 나뉘는 한 두 법의 대립은 엄격하게 배제된다.


또한 모든 영역에서의 분권화와 자치의 광범위한 발달은 
이 현대의 국가이념을 보다 명확하게 나타낸다. 
국가가 아니라 법이 힘을 갖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언제나 되풀이되어 온 권력이 국가의 징표라는 정식화와 그 권력의 현현이 바로 국가라는 개념 규정은 
다음과 같은 하나의 전제조건하에서만 인정될 수 있다. 
즉 이 권력은 법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드러내며, 
법규범의 공포라는 방식 이외의 그 어떠한 방식으로도 
유효할 수 없다는 전제조건하에서만 말이다. 동시에 이와 
함께 확인해 두어야할 것은, 입법절차를 거치는 방식을 
통해서든 법을 다르게 해석하는 방식을 통해서든, 
국가는 법을 만들어 내는 일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국가는 법률의 적용이나 
어떤 공공의 이익의 대변을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 셈이다." 

국가의 임무란 법을 ‘만들어 내는‘ 일일 뿐이며, 이는 여러 
이해관심들의 법적 가치를 확정하는 일을 의미한다.

"이러저러한 모든 이해관심들이 스스로의 법적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은 특정 이익의 지배를 통해서가 아니라 
고유하고도 근원적인 법의 원천을 통해서이다."

그리하여 국가란 오로지 법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한정된다. 그러나 이는 국가가 내용 면에서 법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국가는 민족협동체의 법의식에 따라 
주어지는 것인만큼, 여러 이해관심들의 법적 가치를 
확정하는 것 이상으로는 아무것도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는 국가에 대한 이중의 한정이 가로놓여 있다.
즉 우선 첫번째로는 이해관심이나 복지, 즉 칸트적 
법이론에서는 질료라고 불리는 것을 법으로 한정하는 
일이 있고, 두번째로는 국가를 결코 구성적일 수 없는, 
따라서 선언적으로 확정하는 행위로 한정하는 일이 있다. 

정확히 이 확정 행위 속에 실체적 형식으로서의 법 문제가 
가로놓여있다는 사실이 이하의 논의에서 밝혀질 것이다. 
크라베에게 법과 이해관심의 대립이 형식과 질료의 대립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해야만 한다.

모든 공공의 이익은 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크라베가 말할 때, 그것은 현대 국가에서는 법적 이익이 최고의 이익임을 
법적 가치야말로 최고의가치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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