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국가와 법치국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독일의 헌법학자 콘라드 헤세
(Konrad Hesse)교수는 "국가의 시대가 이제 끝나가고 
있다"는 말로써 당대의 헌법학에서 쟁점이 되었던 국가와 
사회의 구별 여부에 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으려 했다.‘ 
‘국가와 사회‘ 양자 구별을 주장하는 이론진영에 서 있는 
뵈켄푀르데(Böckenförde) 교수에 의하면 국가는 
기능적으로 사회와 관련을맺고 있지만 사회로부터 독립한 조직된 작용통일체인 반면, 사회는 스스로 규율할 수 없는 
작용통일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사회는 조직된 기관으로서 국가, 개인적 자유의 보장자로서의 국가, 외부조종과 
타율적 조종의 요소로서의 국가를 필요로 하며, 국가와 
사회의 구별이 개인적 자유의 기본조건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해 헤세(Hesse) 교수는 개인의 
자유 보장을위하여 국가와 사회를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은 양자를 동일시해야 한다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위험성을 내포한다고 본다. 현대국가와 현대사회의 문제는 양자동일시 또는 양자구별 같이 택일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국가와 사회의 문제는 양자를 국가의 과제, 국가의 작용, 사회적 행위에 대한 국가의 영향과 질서형성 
등의 측면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정서하는가의 문제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 본래의 문제는 헌법과 
법률에 의한 국가와 사회의 구체적이고 세밀한 정서에 
있다고 한다. 요체가 되는 것은 결국 어떻게 양자를 적당한 정도로 분리하고 또 결합시킬 것인가에 귀착된다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는 국가와 사회 양자를 분리하거나 통일시킴으로써만 실효성 있게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적 
침해뿐만 아니라 사회적 침해로부터도 보호될 필요가 있다. 자유롭지 못한 사회로부터 자유로운 국가가 생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국가는 국가를 지탱하고 또 방어하기도 
해 주는 사회적 세력에 의존하고 있는 반면, 사회의 발전
또한 국가의 체제와 기능 및 그 한계와도 밀접한 상관관계 
속에 놓여있는 것이 사실이다. 국가를 유지해 주는 사회적 
세력들에 의하여 버림받은 국가는 행정부와 사법부가 
제대로 작동하더라도 결국 자유의 파괴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세기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 구체제 
해체기의 혼란 속에서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지난 세기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국가질서와 
법질서에서최고의 규범으로 새롭게 등장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저질러진 인간모멸의 
역사적 사실을 딛고 출범한 신생국가들의헌법뿐만 아니라 유엔헌장과 세계인권선언에서 천명된 최고의 가치는 바로 
인간의 존엄이었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짓밟고 인간존재에게서 인간성을 
빼앗고 유린하며 심지어 말살하려고 하는 국가체제가 바로 불법국가, 폭력국가, 전체주의국가, 권위주의국가, 독재국가라고 한다면 법치국가, 민주국가, 자유국가, 안전국가, 
사회국가는 바로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이념으로 
고백하고 그에 경도되고 그의 실현에 지향된 국가인 것이다. 

전자에 속하는 불법국가를 국가라는 이름으로 지칭하는 데 대해서는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헌법적인 의미에서 국가란 도무지 불법이나악을 저지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정법상 국가배상책임의 전제가 되는 불법행위는 
원칙적으로 국가기능을 수행하는 공무원 개인의 불법행위를 의미하는 것이지, 국가체제가 총체적으로 또한 체계적인 
불법을 자행하는 경우와 구별되기 때문이다. 

국가가 변질되어 강도 집단처럼 체계적인 불법을 자행하는 경우는 법적인 의미의 정상국가가 아니라국가의 탈을 쓴 
레비아탄(Leviathan)에 불과한 것이다. 토마스 홉스의 
말대로 그것은 사실상으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곧 
죽어야 할 신‘(sterblicher Gott)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법치국가는 철저히 헌법과 법에 기초하여 
규범의 정향에 스스로 복종하고 따르는 국가를 지칭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열쇠는 바로 헌법질서를 포함한 
전체 법질서의 정향규범적 지시이다. 

오늘날 모든 법질서가 지향하는 인간의 존엄성은 
헌법상의 기본권 조항과 여타의 인권 목록 가운데서 
최고의 인권으로서 자리매김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이 조건은 인간이냐 비인간이냐 하는 근본적인 상황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의 공존질서를 깨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행해지는 크고 작은 형사범죄에 의해서는 직접 침해되지 않는다. 단지 간접적인 침해가 일어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는 원칙적으로 피해자의 정당방위나 긴급피난의 가능성이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긴급구조를 요청할 수 있는 가능성도 원칙적으로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개인이나 집단이 인종적 이데올로기적, 문화적인 이유로 다른 집단으로부터 차별대우를 받고 배제당하거나 고문이나 학대를 당하면서 스스로 방어할 수도 없고, 
외부세계로부터 구조를 기대할 수도 없는 한계상황하에서 시달리고 있다면, 그 상황은 인간이 인간성을 일방적으로 
유린당하여 사실상 단순한 물건이나 수단으로 전락한 것과같은 참담한 상황인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최고의 
근본규범은 바로 이런 한계상황에서 직접 침해당하고 
있는 것이다.

법치국가는 이런 비극적인 한계상황을 예방하고, 인간이 
정말 인간다움을 실현할 수 있는 직접 · 간접의 조건들을 
마련하고 또 그것을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법치국가는 법공동체 내에서 이 임무를 이행하기 위한 공조의 중심체로서 필요할 경우 최종적이고도 최강의 권력을 투입하거나 행사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필요불가결한 
조건으로 개인과 사회의 자유와 안전을 들 수 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는 개인의 삶에서나 사회생활 
가운데서 자유와 안전은 다양한 측면에서 서로 얽히고
충돌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존엄성의 주체인 
인간은 개인이면서 동시에 타인과 공존하는 사회적 
존재이므로 개인의 자유와 안전 및 사회의 자유와 
안전이 서로 충돌하여 어느 것을 우선할지 불분명한 
상황에서는 원칙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안전에 우선권을 
두어야 한다. 이것이 모든 현대헌법이 기초로 삼고 있는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대강령이다.

더 나아가 법치국가의 법질서 내에서 자유와 안전이 서로 
충돌하는 상황에서는 어느 것을 우선해야 할 것인가? 
오늘날과 같이 사회체계의복잡성이 상존하는 상황 
가운데서는 양자택일이 문제의 해결책이 되는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유냐 안전이냐 하는 양자택일보다는 적정한 
자유와 적정한 안전 사이의 실천적 조화를 추구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 실현에 어느 것이 더 본질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에 따라 양자의 비중을 저울질할 수 있는 원칙적인 방도를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유는 인간존엄성을 실현하는 삶의 발전조건인 반면, 
안전은 그것을 유지하는 보전조건이다. 자유는 인간의 
윤리적인 자기발전의 조건인 반면, 안전은 인간의 윤리적인 자기보전의 조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윤리적인 자기보전의 조건은 인간의 
윤리적인 자기발전조건의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이렇게 보면 안전은 자유라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고, 자유는 인간의 존엄이라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인 셈이다. 따라서 자유는 인간의 존엄이라는 
최고의 법 가치에 안전보다 실제 더 가까운 의미 연관성을 
지님을 알 수 있다. 왜냐, 인간의 존엄성은 개념상 "자유를 
통해 활력을 얻게 되고 동시에 자유를 더욱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존엄을 
위한 투쟁의 동인은 제1차적으로자유의 정신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법치국가는 인간의 존엄성 실현을 위한 
목적 합리적 가치 합리적 관점으로부터 안전보다 자유에 
원칙적인 우위를 부여한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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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형이 아닌 재판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먼저, 쟁점이 명확하지 않다. 처음에는 대략적인 청구를 
해놓은 다음 나중에 추가하는 식으로 소송이 진행된다. 
미국에서는 준비기일에 쟁점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준비에 오랜 시간이걸린다. 
하지만 대륙법계 변호사는 재판 준비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 - P191

증거조사라고 해봐야 하루에 증인 한 명을 부르거나
증거를 한두 개 확인하는 것으로 끝난다. 재판 초기 
미국 변호사가 재판 준비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를 
대륙법 변호사는 받지 않는다.

불의의 일격을 준비할 필요도 없다. 워낙 짧은 시간 동안 
사건의 일부에 관한 조사만 이루어지고 다음 기일에 
반론을 제기할 충분한 시간도 있다. 또 집중형이 아닌 
재판에서는 증거개시(상대방 증인과증거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것)와 변론준비기일(양 당사자의 변호인이 
쟁점을 정리하면서 재판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의 
중요성이 훨씬 떨어진다. 불의의 타격을 가할 목적이라면 
상대방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수집해야 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상대방 정보에 목말라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매 기일이 다음 기일에 대한 준비기일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따로 준비기일을 열 필요도 없다. - P192

집중형이 아닌 대륙식 재판의 또 하나의 특징은 증거를 
보고 조서를 작성하는 판사와 그걸 보고 승패를 결정하는 
판사가 다르다는 점이다. 앞서 제2장에서 본 것처럼 
대륙법의 소송절차는 교회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중세 교회법에서 증거는 판사가 아니라 서기가 보고 
기록했고, 이걸 기초로 판사가 재판했다. 나중에 절차가
바뀌어 증거조사도 서기가 아니라 판사의 주도하에 
진행되었지만 지금도 기록을 작성한 판사가 아니라 
다른 판사 또는 합의부가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교법 학자들은 이를 두고 "영미법의 판사는 현장에서 
‘직접‘ 증거를 조사하지만 대륙법 판사는 ‘간접‘적으로 
조사한다"고 표현한다. 영미법이 직접 (immediacy) 
재판이라면 대륙법은 간접(mediacy) 재판이라는 것이다. 양쪽을 비교해본 법률가들은 대체로 영미법의 재판 
방식이 더 나은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대륙법도 직접성을 높이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애초 당사자와 판사 사이에 ‘문서 장벽‘을 치고 문서를 통해 당사자가 판사와 소통하도록 한 취지는, 
재판의 공정성을 높이고 당사자의 입김이 재판에 작용하지 않도록 하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 판사에 대한 압력과 회유를 걱정할 계제가 
아니다. 직접 승패를 결정하는 판사가 당사자이야기를 
직접 듣고, 태도를 관찰하고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간접재판은 문서가 중심이 되는 재판이다. 영미법에서는 
재판에 증인이 나와서 선서한 후 판사와 배심원 앞에서 
구두로 진술하고이에 대해 상대방이 반대신문하는 식으로 재판이 진행된다. 변호인도 구두로 각종 신청과 이의제기를 하고, 판사도 구두로 답한다. 그래서 ‘구두‘ 재판이라고도 
한다. 반면 대륙법에서는 증인에게 하는질문조차도 
당사자가 준비한 질문지를 판사가 읽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게다가 증거조사를 하는 사람과 조서를 꾸미는 사람, 
재판하는 사람이 각각 다를 경우에는 구두보다는 서면이 
중심일 수밖에없다. 대륙법도 최근 들어 집중적인 재판, 
구두재판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집중심리주의, 직접주의, 
구두주의라는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 P193

바깥에서 볼 때 대륙법의 이상한 점 하나는 증인에게 
당사자가 질문하지 않고 판사가 질문하는 것이다. 
대륙법에서는 영미법과 달리 무엇을 어떤 범위에서, 
어느 정도로 물어볼지를 판사가 결정한다. 
대륙법은 판사가 물어보는 ‘직권주의‘ 시스템이고, 영미법은 당사자가 물어보는 ‘당사자주의‘ 시스템이다.

하지만 이건 너무 성급한 결론인 것 같다. 적어도 민사재판에 관한 한 이런 구별법이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 
같지 않다. 민사는 대륙법과 영미법이든 기본적으로 
‘처분권주의‘를 따른다. 처분권주의에 따르면, 쟁점이 
무엇인지, 그에 대한 증거가 무엇인지, 어떤 주장을 펼칠지는 전부 당사자 마음이다. 당사자가 결정하고 처분한다. 
거기에 두 법 전통 모두 판사에게 탐구의 역할을 약간 
부여할 뿐이다. 대륙법 국가 중에서도 독일은 판사가
 그 역할을 좀 더많이 하고, 다른 국가에서는 판사가 
역할을 조금 덜 하는 정도의 차이만 있다. 


이만 있다. 반면에 영미법에서는 판사가 끼어드는 경우가 
훨씬 적다. 두 법 전통 간에는 그 정도의 차이만 있다. 
영미법 판사는 청소년 혹은 소송 능력이 제한되는 자의 
재판이나 당사자가 제대로 입증을 못하는 경우에만 공익적 차원에서만 판사가 마지못해 끼어든다. 대륙법에서 검사나 이와 비슷한 직위를 가진 자가 공익의 대표자로서 소송에 
참가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처럼 대부분은
당사자가 주도해서 소송을 한다. 양쪽 모두 재판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당사자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주로 달려 
있다. 그래서 당사자가 신청하는 경우에만 판사가 증인에게 
질문을 하고, 질문 내용도 당사자가 준비한다.

다만 여기서 대륙법이 구두주의에 의하지 않는다는 점이 
또 한번 드러난다. 보통 증인에게 질문하려는 변호인은 
먼저 질문사항을적은 ‘질문지‘를 작성하고, 증인신문기일 
이전에 판사와 상대편 변호인에게 질문지를 제출한다. 
따라서 상대편 변호인(가끔은 증인조차도)은 어떤 내용에 
대한 질문이 오갈지 미리 알아서 그에 대한 준비를 한다. 
질문하는 변호인이나 대답하는 증인이나 무엇을 할지 알기 때문에 미국 재판처럼 직접적인 구두신문과 반대신문의 
긴장감은 한껏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심지어 질문도 판사가 
하기 때문에 당사자끼리 부딪치는 장면은 잘 연출되지 
않는다.

반대신문이라는 것도 대륙법계 변호인에게는 낯선 절차 
중 하나다. 대륙법에서는 배심원도 없고, 증인을 탄핵할 
일도 별로 없다(실무에서는 당사자나 변호인, 친인척, 
기타 이해관계인이 증인으로 나올 수 없다).

재판을 주재하는 재판장은 관련성 있는 사실을 능숙하고 
공정하게취합하며, 질문 내용도 적절하게 거른다. 질문이 
적절치 않으면 재판장에게 "이의제기서 (offer of proof)‘를 낼 수 있어서 느닷없는 질문때문에 당황할 이유도 없다. 
상대방 변호사가 할 일이라는 것도 증인신문조서에 기재될 어구를 지적하는 것이 전부다.


집중심리주의, 직접주의, 구두주의와 관련해서 대륙법과 
영미법의 차이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대륙법에서는 먼저 원고측 변호인이 주로 서면으로 
증인신청서를 판사에게 전달한다. 그 신청서 사본을 
판사가 피고 측에게 전달하면, 피고 측 변호인은 가령, 
증인이 원고와 친족관계 또는 가족관계가 있어서 
적절치 않다는 식으로 반론을 제기한다. 보통 증인신문 
청구를 받은 판사는 2~3주 후로 기일을 잡고 기일 전에 
양측 변호인이 서면을 제출한다음 기일에 출석해 구두로 
의견을 나눈다. 의견을 다 듣고 판사는다시 2주 정도 
후에 증인신청에 대한 결정을 내리며, 인용 결정이나면 
몇 주 후에 증인신문 기일을 잡아 증인의 진술을 듣는다. 
이와 같이 증인을 신청해서 증인신문을 하기까지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이 걸린다. 판사와 변호인 사이에 불과 
몇 분 오가는 대화로 결론이 나는 미국법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원고 측 변호인이 판사에게 증인을 
신청하고 피고 측 변호인은 이의를 제기하면서 간단하게 
이유를 대고, 이에 원고 측이 다시 반박한 다음 판사가
결정을 내린다. 증인 채택 결정이 나면 바로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증인을 출석시켜 진술을 들으면 된다. 
이것이 미국법이다. - P196

대륙법 국가의 법원에서 실제로 증인을 소환해서 진술을 
듣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판사는 이를 메모해서 증인의 진술 취지를서기에게 낭독해준다. 서기가 적은 데 대해서 
양측 변호인이 맞다고 동의하면 적은 것이 기록되어 
재판부에 전달된다. 기록을 받은재판부는 기록에 적힌 대로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다른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심지어 이탈리아처럼 증인신문을 진행한 판사가
재판부 중에 포함되어 있어도 결론은 같다. 
증인이 주저하고 진실되어 보이지 않다든가, 
증인의 태도가 이상해 보였어도 기록에 그사실이 
적혀 있지 않으면 기록대로 사실인정을 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영미법의 배심재판에서는 기록도 필요 없고 
사실 확정도 필요없다. 증인의 태도나 다른 정황들을 
배심원이 체크한다. 평결문에는 그걸 적을 필요조차 없다. 
보고 느낀대로 판단하면 된다. 배심원이 아닌 직업법관이 
재판할 때도 그렇다. 영미에서는 증인의 진술을 직접 들은 
법관이 판단한다. 증인의 말을 듣고 그 태도를 잘 관찰한 
다음 최종 결정을 내리도록 법이 요구하고 있다. - P197

대륙법과 영미법이 증거법과 관련해서 차이 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배심원 유무의 
문제다. 영미법의민사재판에서는 제출한 증거 가운데 일부를 배심원이 보지 못하게하는 ‘증거제한법칙‘이 존재한다. 
오랫동안 재판을 해보니까 어떤증거는 배심원에게 
보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증거의 오염 
가능성은 경고하되 증거 자체는 보게 하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았다. 신빙성이 적은 증거는 
아예 배심원에게 보여주지 않기로 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전문증거 (남에게 들은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다. 증인이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고 법정에서 그들은 바를 증언한다고 치자. 
영미에서는 변호인이 바로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이 진술은 전문증거입니다!"라고 제지한다.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을 들어서 전달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게 전문법칙이기 때문이다. 이 법칙에 따르면, 증인은 직접 법정에 나와서 
증언해야 하고, 그에 대해 상대방 변호인이 반대신문을 하고, 그 전 과정을 배심원이 보아야 한다. 그럴 기회가 없는 
전문진술은 증거에서 제외된다. 배심원이 아닌 직업법관의 재판에서는 전문진술을 받아도 되지 않느냐는 견해도 
있었지만 채택되지 않았다. 또 전문법칙에는 여러 가지 
예외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문법칙은 법칙으로 
엄연히 존재한다. 충분히 믿을 만한 증거임에도 전문이라는 이유로 증거로 쓸 수 없는 경우가 지금도 아주 많다.

대륙법에는 반대로 전문법칙이 없다. 민사에 관해서는 
배심재판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륙의 
재판에서 모든 증거가 자유롭게 법정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대륙법에도 증거제한법칙은 있다. 다만 그 기원과 
목적이 다르다. 가령 대륙법에서 말하는 증거제한법칙 
가운데 하나인 ‘증거법정주의‘는 이런 내력을 가지고 있다. - P198

증거법정주의는 중세 초결투(battle)나 신판(ordeal)에 
의한 재판말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재판제도를 도입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다. 이는 양측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검증해서 진실에 도달하는 방편이었다. 

당시에도 대륙법 판사는 그다지 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단단하게 마음을 먹어도 뇌물이나 권유, 협박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특히 돈 많고 힘센 사람의 협박에는 
판사가 견딜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판사가 그런 외부적인 
압력에 버틸 수 있도록 재판제도를 개혁했고, 그 결과 
증거법정주의, 증거제한법칙, 선서제도가 도입되었다.

이 중 먼저 증거법정주의는 증인의 수, 신분, 나이, 성별 
등을 기준으로 증인의 진술에 일정한 비중을 의무적으로 
부여하는 제도다.

가령 어떤 사실을 진실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의 
증인이 필요했고(증인 둘의 법칙‘ 등), 귀족이나 성직자, 
토지 소유자의 증언은 일반 시민, 평민, 무소유자의 
증언보다 신빙성에서 높은 점수를주었으며, 청년보다 
노인의 진술에 무게를 두고, 여자의 진술은 아예 믿지 
않거나 믿더라도 남자의 진술보다 덜 믿게 했다. 
이처럼 증거를 평가할 때 각각 완전한 증거, 절반의 증거, 
4분의 1의 증거로차이를 둔 것은 오랜 재판경험을 통해 
얻어낸 결론이었다.

증거제한법칙은 어떤 증인은 아예 증언대에 설 수 없게 한 
것이다. 재판 당사자나 그들의 친족, 이해관계인의 증언은 
기본적으로 믿을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언할 자격도 
주지 않은 것이다.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서 당사자 등이 
양심에 반하는 증언을 할 기회자체를 봉쇄하는 효과가 있다. 그들이 법정에 서면서 판사를 미리매수할 가능성도 없앨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서제도는 다음과 같이 재판이 진행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당사자 일방 A가 상대방 B와 다투고 있는 
쟁점 사실(가령돈을 빌린 적이 있는지)에 관해 선서하에 
사실대로 진술할 것을 요구한다. 만약 B가 선서를 거부하면 B에게 불리한 사실이 있었던 것으로간주된다. 

반면에 B가 선서하에 진술을 하면 B에게 유리한 사실이
있었던 것이 된다. 이때 B가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선서하에 거짓진술을 하면 B는 종교적으로도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형법상위증죄로 처벌받고, 그로 인하여 발생한 손해까지 배상할 책임이있다.

영국에서는 일찍부터 배심제도가 발달해서 대륙법에서 
이와 같이 증거의 제출 및 평가와 관련하여 만든 
증거제한법칙이 적용될여지가 없었다. 

여러 명의 배심원에게는 한 명의 판사에게 했던 것처럼 
협박하기가 쉽지 않고, 배심원이 외부 사람의 영향을 받는 
것이 제한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배심원을 
시민 가운데서 뽑았기 때문에 증거법정주의라는 이름으로 증거를 제한할 이유가 직업법관에 의한 재판보다는 훨씬 
적었다. 이해관계인을 증인으로 부르지 않고, 증인의 진술 
가운데 일부는 증거로 쓸 수 없게 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배심에 의한 재판이 사실확정에 유효한 수단이었던 점, 그리고 판사에 비해서 외부 영향을 덜 받는다는 점에서 영미의 배심제도는 대륙법의 다른 장치, 즉 증거법정주의나 선서제도보다 나은 제도라고 여겨졌다.



대륙법 세계에는 지금도 중세 시대 증거법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가령 증거법정주의는 현대 대륙법에서 추정의 법칙
(어떤 사실이 있으면 상대방이 반대로 입증하기 전까지 
사실로 추정된다는 법칙)으로 남아 있고, 몇몇 국가에서 
당사자에게는 지금도 증인자격이 주어지지 않으며,
선서제도가 공격방어 전략의 하나로 프랑스나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여전히 쓰이고 있다. 그런데 최근 대륙법이
 ‘자유심증주의‘라는새로운 증거법칙을 도입했다. 
기본적으로 능력이 부족하고, 국민들의 신뢰도가 높지 
않지만, 증거 판단을 판사에게 전적으로 맡기자는 취지에서 전향적으로 도입한 것이 바로 자유심증주의다. 판사가
자유로운 심증(마음의 확신)으로 증거를 평가해서 판결을 
하도록 하는 제도다. - P201

또 하나 대륙법의 민사소송제도에서 특이한 것은 변호사 
수임료다. 보통 미국에서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재판에서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자기 변호사에게 수임료를 낸다. 그런데 영국과 대륙법에서는 패소한 쪽이 승소한 
쪽의 수임료까지 내야 한다. 졌으니까 이긴 사람의 변호사 
비용까지 내는 것이 당연하고, 실무에서도 이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패소한자에게 너무 심한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법원이 수임료를
일정 금액으로 정한다는 점이다. 승소한 변호사는 보통 
자신이 투자한 비용 전부를 청구하지만, 법원은 조견표에 
따라 지불할 변호사 비용을 정한다. 의뢰인에게 더 많은 
돈을 받기로 약정했어도 별수 없다. 진 쪽으로부터는 
약정한 액수의 일부만 보전받고, 그 차액은 이긴 쪽 의뢰인이 직접 부담한다. 

또 대륙법은 소송 결과에 따라변호사의 금전적 이익이 
늘었다 줄었다 하는 것을 비윤리적이라고생각해서 
성공보수 약정을 금지하고 있다. 미국에서 공공연히 
성공보수를 받는 걸 보면 깜짝 놀란다. 성공보수를 받을 
자격이 있는 대룩법 변호사 자신들도 생각이 같다. 
변호사가 돈 때문에 일을 더 열심히 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것이다. - P202

원칙적으로 대륙법의 민사소송에서는 상소할 권리가 
보장된다. 이것이 또 미국법과 중요한 차이점이다. 
미국에서 상소란 1심 법원이 법적으로 잘못한 경우에만 
인정된다. 하지만 대륙법에서는 법를 문제뿐만 아니라 
사실관계를 다시 봐달라는 것도 항소 이유가된다. 

물론 사실관계를 검토할 때도 주로 1심이 봤던 기록에 
의하겠지만, 상소심에서 1심에서 내지 않았던 새로운 
증거를 제출할 수있게 하는 국가도 아주 많다. 상소법원이 
모든 증거를 다시 검토해서 사실이 무엇이고, 법적으로 
어떤 판단이 맞는지 처음부터 다시 정해도 된다. 
상소심 재판부도 판결문을 다시 쓰는데, 여기에는 법적 
쟁점뿐만 아니라 사실적 쟁점도 포함된다.

보통법(common law)에서는 배심재판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상소심에서 사실관계를 또 다시 판단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사실 1심에서조차 배심원은 어떤 사실을 발견해야 할 의무를 지는 게아니고, 당사자들의 태도나 여러 
가지 정황을 보고 평결을 내릴 뿐이다. 평결 내용을 설명할 의무도 없으며, 재판절차가 기록으로 남지도 않는다.

1심 평결문에 어떤 사실이 있다고 적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배심재판에 대해서 상소심이 다시 보겠다는 
이야기는 배심의 결정을 전부 무시하고 새로 판단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영미에서 사실에 대한 상소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반면에 대륙법에서는 사실에 대한 상소를 폭넓게 
인정할 뿐만 아니라, 법률 문제에 대한 상소를 따로 둔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파기제도나 독일의 파기환송제도가 
그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법적인 쟁점에 관하여 
상급법원이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려준다. 영미법에서는 
보통 상소라고 하면 법률 문제만을 다루기 때문에 
대륙법의 파기제도나 파기환송제도는 그와 기본적으로 
아주 비슷하다. 다만 이런 제도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적인 
경위가 조금 다르다.

우리는 제7장에서 혁명기의 이념은 법원의 법률해석권을 
전부 부정하는 데 있다고 했고, 그래서 프랑스의 파기원은 
엄밀히 말하면 법원이 아니라, 법원이 제기한 법률해석 
문제에 대하여 최종적인 유권해석을 해주던 별개의 기관이라고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프랑스와 프랑스의 
모델을 따른 국가들에서 파기원이 법원의 일부인 파기법원으로 성격이 변해갔다. 이름이 바뀌어 일반법원의 정점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임무도 당연히 법률의 정확한 해석에 
둔다. 프랑스처럼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스위스에서도 
법원은 법령의 통일된 해석을 책임지고 있고, 
이론적으로는 법원의 결정은자신이나 하급법원을 
기속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최고법원의 해석이 법원의 
해석으로 공인되고 있다. - P203

또 하나, 대륙법의 민사소송에서는 1심은 물론이고 
상소심에서도 반대의견이 없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원칙적으로 만장일치를 요구한다. 투표도 없다. 
판사가 자신이 속한 법원의 결정에 반대하는 것 자체를 
적절치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법은 모름지기 확실하거나 최소한 그렇게 보여야 하는데, 
반대의견을 적거나 따로 출간을 하게 되면 법의 확실성에 
흠이 생긴다고 믿는다. 다만 최근 들어 일부 국가에서 
헌법법원을 중심으로 반대의견과 보충의견을 적거나 
공표하기 시작한 것은 의미 있는 변화라고할 수 있다.

어떤 국가에서는 다수의견에 반대하는 판사들이 별도로 
학회지등에 논문을 출간함으로써 약한 의미의 항명을 
하는 사례가 있다. 본인들은 그것이 순전히 ‘이론적‘인 
목적이었다고 말하겠지만 동료판사와 다른 변호사는 
그것이 학문적 목적이 아니라 반대의견을 표명하기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 P204

집행 면에서도 대륙법과 영미법은 차이가 있다. 대륙법에서는 먼저, 영미법에서 말하는 ‘법정모독죄‘가 없다. 제8장에서 우리는 미국의 경우 법원이 개인에게 어떤 행위를 하라고 
명하거나 하지 말라고 명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그걸 어기면 법정모독죄, 즉법원의 명령을 어긴 죄로 징역형이나 벌금형에 처한다. 이처럼 영미법에서는 사람에 대한 
강제조치가 가능하다. 


그런데 대륙법은 그렇지 않다. 대륙법의 민사소송에서는 
법정모독죄도 없고, 사람이아닌 물건에 대한 강제조치만 
가능하다. 쉽게 말하면 상대방에 대해서 무엇을 청구하든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금전배상밖에없다. 이 차이는 
그대로 절차의 차이를 낳고, 계약의 정의 차이로귀결된다. 
가령 대륙법에서는 금전으로 배상이 가능한 것만 법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계약이라고 생각한다.

대인적 강제, 즉 사람에 대한 강제가 불가능하다는 점은 
절차 면에서 여러 가지 차이를 낳는다. 영업장부 같은 
서류나 기타 증거를내라고 하거나 재산을 조사하는 것도 
대륙법에서는 영미법만큼 단호하게 요구할 수 없다. 

민사소송에서 배상은 원칙적으로 피고 소유 재산의 경매, 
피고 물건의 인도, 주거로부터의 퇴거 같은 피고의 재산에 
대해 집행 가능한 배상만 가능하다. 아니면 불법건축물의
철거와 같이 피고가 아닌 제3자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것만 
요구할수 있다. 

민사소송에서 패소한 피고인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는 있지만 판사가 사람에 대해 형벌을 부과할 수는 없는 것이다.판사가 형사법원에 고발하는 것이 대륙법에서 아마도 
사람에 대해 할수 있는 최대한일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강제명령(amparo)‘이라고 해서, 
헌법적 권리를 침해하지 말라고 명했음에도 이를 어길 
경우 판사가 아주 예외적으로 피고를 체포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 역시 영미법에서 법정모독으로 판사가 직접 
형벌을 부과하는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와 같은 영미법과 대륙법의 차이를 약간 거리를 두고 
전체적으로 조망하면 그 바탕에 이념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영미법에서 판사는 법의 집행자이면서 도덕과 유사한 
성격을 갖는형평법의 집행자이기도 하다. 판사는 원고와 
피고의 이웃들로 구성된 배심원을 모아놓고 공동체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결과를 이끌어내고 집행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법정모독죄라는 것도 결국은피고가 
공동체의 결정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경우 피고를 처
벌하거나 피고에게 특정한 행위를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이다. 공동체 구성원인 배심원이 모인 자리에서 판사가 ‘어른‘으로서 여러 가지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반면 대륙법에서 판사는 영미법과 같은 어른은 아니다. 
판사의 결정에 반한다고 해서 당사자나 증인이 판사에게
혼난다는 생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륙법상 소송절차는 그만큼 윤리와 도덕의 색채가 옅은 
단순한 공적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차이는 손해배상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영미법에서 고의또는 중과실 책임이 있는 피고에게 형벌과 유사한 
징벌적 손해배상이나 피해 규모 이상의 삼배손해배상을 
부과하는 일이 흔히 있다.

하지만 대륙법에서는 이런 식의 배상이 최소한 민사에서는 있을 수없다. 민사와 형사의 차이가 분명하기 때문에 고의나 중과실은 형사가 다룰 문제지 민사가 다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민사에서 원고가 받을 수 있는 것은 정확하게 손해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피고가 도덕적으로 위반되는 행위를 했다고 해서 
공동체가 그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형벌은 행위 시 
법률에 따라서 범죄로 인정되는행위를 한 때에만 부과한다‘는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난다. 대륙법에서 형벌은 법에 
정한 것만 부과할 수 있다. 판사가 원한다고 할 수있는 일이 아니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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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권리는 단순히 추상적 법으로부터 생명과 힘을 
얻을뿐 아니라, 추상적인 법에 생명과 힘을 되돌려주기도 
한다. 법의 본질은 실제로 실행된다는 점에 있다. 
실행되지 않는 법규범, 실행되지 못하게 된 법규범은 
더 이상 법규범으로 불릴 자격이 없다. 그것은 법이라고 
하는 기계장치 속에서 작동하지 않게 된 나사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를 빼내버려도 아무런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실행을 수반하지 않는 법규범은 그렇게 불럴 가치가 
없다고 하는 이 명제는 어떤 법 분야에서도, 즉 헌법에서도 형사법에서도 민사법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 P94

로마법은 법률이 행해지지 않고 있는 경우, 그 폐지의
 원인을 통해 이 명제에 대해 명시적인 구속력을 부여했다. 이에 대응해 로마법에서는 구체적인 권리도 계속적으로 
불행사하면 소멸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공법과 
형법의 법적 실행이 국가기관의의무가 되는 것에 반해, 
사법의 사적 실행은 사인(私人)의 권리가 되었다. 
즉 사인의 발의와 자주성에 맡겨진다.

전자에서 법률은 국가의 관청과 관리가 자기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실행되지만, 후자에서 법률은 사인이 
자기의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실행된다. 사인이 어떤 
사정 때문에(즉 자신이 권리를 갖고있음을 모르거나 
안일하거나 비겁해서)언제까지라도 권리주장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면 법규는 실제로 위축된다.

공법상의 법규가 어떻게 실행되는가 하는 문제는 관리가 
어느정도로 의무에 충실한가에 달려 있고, 사법상의 법규가 어떻게 실행되는가 하는 문제는 권리자로 하여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게하는 동기의 강력함, 즉 그의 이익과 
권리감각의 정도에 달려 있다.

이러한 동기가 기능하지 않는 경우, 즉 권리감각이 둔해지고, 이익문제는 안일해지고 분쟁을 기피하게 만들며, 
소송의 두려움을 이겨낼 만큼 강력하게 되지 못한 경우, 
결국 그 법규는 적용되지 못하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왜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인가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권리자 자신을 제외한다면, 누구도 곤란한 사람은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대해 앞서 언급한 전선 이탈의 
예를 다시 사용하고자한다. 수천 명의 병사가 싸워야 하는 
곳에서 한 사람이 도망을 쳐도다른 사람들은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그러나 천 명 가운데 백 명이전선을 이탈한다면, 
충실하게 자기 자리를 계속 지킨 병사들의 상황은 점차 
악화되어 자신들만으로 모든 전선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그 좁은 범위 안에서 법 
일반을방위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그의 행동의 이익과 
결과는 그 개인에게 한정되지 않고, 훨씬 더 넓은 범위에 
미친다. 이러한 행동과 결합되는 공공의 이익은 단순히 
법률의 권위와 존엄이 유지된다는이념적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념적인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이익, 즉 누구나 나름 관심을 갖는, 확실한 
사회생활 질서가 보장되고 유지되는 이익이다. - P96

국가공동체가 개개인에게 생명과 신체를 걸고 외적과 
싸우라고 명령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즉 누구나 외적에 
대해 공동의 이익을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한다면, 
같은 말을 국내에서도 할 수 있지않은가? 

외부의 적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부의 적에 대해서도
모든 사려 깊은 사람과 용기 있는 사람이 결집해 단결해야만 하지 않는가? 

외적과의 투쟁 시에 비겁한 전선 이탈이 공동의 임무에 
대한 배신이라고 한다면, 국내의 마찬가지 행동에 대해서도 같은 비난을 해야 하지 않는가?

나라에서 법과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재판관이 
언제나재판관석에서 기다리거나, 경찰이 형사를 파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누구나 각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자의와 무법이라고 하는 히드라의 머리가 그 모습을 
나타낼 때, 누구나 그것을 베어야 할 사명과 의무가 있다. 
권리라는 혜택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법률의 힘과 위신을 
유지하기 위해 공헌해야 한다. 요약하자면 누구나 사회의 
이익을 위해 권리를 주장하도록 태어난 투사다. - P99

이러한 나의 견해에 따라, 자기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개인의 사명이 얼마나 고귀한 것이 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종래의 이론이 법률에 대해 전적으로 일방적이고 수동적일 뿐인 태도에 만족하라고 설명해온 것에 비해, 나는 여기서 
상호관계, 즉 권리자가 법률 서비스를 받는 대신 그것에 
대해 완전한 반응을 하는 관계에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커다란 국민적 임무에 대한 협력을 의미한다.
즉 국민적 임무가 개별 권리자에게 참여의 사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권리자 자신이 협력할 생각인지의 여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윤리적 사회질서가 위대하고 숭고한 이유는,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의 봉사만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 명령을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무의식중에 협력할 수 있도록 효과적인 수단을 충분히 갖는 데 
있기 때문이다. - P99

마침내 우리는 권리를 위한 투쟁의 이상적인 정점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익이라고 하는 낮은 동기로부터 
시작해 인격의 윤리적 자기보존이라고 하는 더 높은 
관점에까지 이르렀고, 마침내 국가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법과 권리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개인의
협력이라고 하는 최고의 지점에 도달했다.

나의 권리가 침해되고 부인되면 법 일반이 침해되고 
부인되며, 나의 권리가 방위되고 주장되고 회복되면 
법 일반이 방위고 주장되며 회복된다. 이를 통해 자기 
권리를 위한 권리주체의 투쟁은얼마나 큰 의의를 확보하는 것인가! 권리에 대한 이러한 보편성으로 인해 이념적인 
관심의 높이에서 바라볼 때 전적으로 개인적인 영역, 
즉 무지한 무리의 눈에는 권리분쟁의 유일한 원동력으로 
비치는 개인적인 이익과 목적과 정열의 들판은 얼마나 
낮은 곳에 있는 것인가!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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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왜 자기과시를 위한도덕은 위험한가?






야구 용어 중에 ‘스탠드 플레이stand play‘란 게 있다.
관중을 의식한 플레이 또는 관중에게 멋지게 보이려고 
하는 과장된 플레이를 말한다. 쉽게 잡을 수 있는 
공임에도일부러 다이빙을 해서 잡음으로써 관중의 
박수를 끌어낸다면, 그게 바로 스탠드 플레이다.

stand는 grandstand를 줄여서 쓴 말이다.
grandstand는 야구장 등의 지붕이 있는 정면 관람석을 
말한다. 그 관람석의 관중을 염두에 둔 플레이라고 해서 
생겨난 말인데, 영어에서 grandstand는 동사로도 쓰여 
"관중을의식한 플레이를 하다"는 뜻이다. 정치인이 
인기영합적인 언행을 하는걸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정치적 올바름‘이 촉발한 ‘문화 전쟁‘


"이딴 개소리를 가래 뱉듯이 사방에 뿌려대는 PC충
꼴페미를 정신병원에 잡아 처넣어라." 

인터넷에서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기사만 떴다 하면 
달리는 악성 댓글의 한 유형이다. ‘PC충‘은 PC를 
강조하는 사람을 비하하는 말로, 인기를 누리는 
인터넷 유행어의 자리에 오른 지 오래다.

앞서 정의했듯이, PC는 다문화주의의 기치 아래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언어 사용이나 활동에
저항해 그걸 바로잡으려는 운동 또는 그 철학을 가리키는
말이다.

PC의 본고장이라 할 미국에선 이 운동이 처음 
선을 보인 1980년대 초만 해도 잠깐 반짝했다가 
곧 사라질 일시적인 유행쯤으로 가볍게 여긴 사람이 
많았다지만, 그건 큰 착각이었다는 게 판명되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않았다. PC는 곧 미국 정치의 
한복판에 들어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는데, 
대체적으로 공화당은 반대, 민주당은 찬성을 하면서
 ‘문화 전쟁Culture War‘이라는 말을 탄생시킨 
주요 동인이 되었다.

‘PC충‘이 인터넷 유행어가 되었다는 건 미국의 
‘문화 전쟁‘이 드디어 한국에도 상륙한 건 물론 
대중의 일상적 삶에 파고들었다는 걸 의미한다. 
2022년 대선에서 발생한 ‘이대남 논쟁과 논란‘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한국에서 
진행되는 PC 논쟁은 미국의 그것과 비교해 이른바
 ‘문화 지체cultural lag‘ 로 인해 더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다는 걸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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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소송



대륙법 전통 내에서 민법이 실체법의 중심에 있다면 
절차법의 중심에는 민사소송법이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민사소송법은 사법 가운데도 민법과 
관련된 사인 간 권리의무에 관한 분쟁이 생길 때만
적용된다. 형사법 관련 문제는 형사소송법이 다루고, 
행정 관련 문제는 행정절차법이 다룬다. 

그런데 문제는 대륙법에서는 모든 법률이 로마법과 교회법, 중세 이탈리아법이라는 공통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민법 중심이고, 
형사나 행정도 절차법을 만들 때 민사소송법을 따른다. 
즉, 민사소송법이모든 절차법의 기본이다.

대륙법에서는 형사소송 민사소송이 다르다. 특히 혁명기 
이후 형사소송은 독자적인 법 영역으로 분화되었다. 
민사소송법과 형사소송법은 각각의 법전이 있고, 
대학 커리큘럼도 다르며, 각각 독자적인 학회와 저널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절차법의 일반원칙 또는 일반이론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은 큰 차이가
없으며, 공통분모가 많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민법 
학자들이 법의 일반원칙을 만드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듯이, 절차법의 일반원칙은 민사소송법 학자들이 만들어왔다. - P189

대륙법에서 보통 민사소송절차는 셋으로 나뉜다. 
먼저 준비기일단계에서는 합의원의 진행하에 준비서면을 
교환한다. 증거 수집 단계에서는 재판장이 증거를 
수집해서 조서를 작성하고, 마지막으로 판결 선고 
단계에서는 이미 작성된 조서와 당사자의 의견서를 보고, 
각각의 주장을 들은 다음 판결을 선고한다. 

언뜻 보기에도 ‘재판‘이라는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대체적으로영미법계 법률가들이 
이야기하는 ‘재판‘은 대륙법의 민사소송절차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영미법에서는 당연하다고 
배심제도가 대륙법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아직 
민사배심이 남아 있고, 대부분의 주에서 헌법상 권리로 
규정되어 있다.

영미법의 민사소송절차를 중심으로 보면, 배심이 있는 
것과 없는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여러 명의 시민을 
법정에 오게 해서 증인의진술을 듣고, 증거물을 확인하고, 
사실관계를 검증한 다음 재판장의 설시에 따라 법률을 
적용할 때, 비로소 재판이 완성된다. 

배심은 사실 모으는 것 자체가 쉽지 않고, 재판을 
연기했다가 다시 소집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당사자, 변호인, 판사, 배심원 모두 한날한시에 모여 사건을 끝낼 수밖에 없다. 이를 우리는 재판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민사배심이 없는 대륙법에서는 
민사소송이 아주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재판이 없기 
때문에, 같이 모이는 랭사도 없다. 전통적으로 대륙법의 
민사소송은 당사자와 판사 간의간헐적이고 짧은 모임과 
서면 교환의 연속이다. 그때 증거가 제출되고, 증인이 
진술하며, 각종 신청과 그에 대한 결정이 내려진다.



영미법에서라면 한날한시에 끝났을 일을 여러 날에 걸쳐 
분산해서 진행한다. 증거를 조사하는 판사 앞에 짧게 
나와 진술하고 서면을낸다. 비교법을 전공한 법률가가 
영미법의 재판을 ‘집중‘형이라고부르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영미법계 법률가가 집중된 재판을 선호하는 데 반해 
대륙법은 그렇지 않다. 그나마 최근 들어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집중형으로 변모하고 있지만 아직도 
대다수 국가에서는 종래와 같다.

영미법의 민사소송절차를 중심으로 보면, 배심이 있는 것과 없는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여러 명의 시민을 법정에 오게 해서 증인의진술을 듣고, 증거물을 확인하고, 사실관계를 검증한 다음 재판장의 설시에 따라 법률을 적용할 때, 비로소 재판이 완성된다. 

배심은사실 모으는 것 자체가 쉽지 않고, 재판을 연기했다가 다시 소집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당사자, 변호인, 판사, 배심원 모두 한날한시에 모여 사건을 끝낼 수밖에 없다. 이를 우리는 재판이라고부른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민사배심이 없는 대륙법에서는 민사소송이아주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재판이 없기 때문에, 같이 모이는 행사도 없다. 전통적으로 대륙법의 민사소송은 당사자와 판사 간의간헐적이고 짧은 모임과 서면 교환의 연속이다. 그때 증거가 제출되고, 증인이 진술하며, 각종 신청과 그에 대한 결정이 내려진다.
영미법에서라면 한날한시에 끝났을 일을 여러 날에 걸쳐 분산해서진행한다. 증거를 조사하는 판사 앞에 짧게 나와 진술하고 서면을낸다. 비교법을 전공한 법률가가 영미법의 재판을 ‘집중‘형이라고부르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영미법계 법률가가 집중된 재판을 선호하는 데 반해 대륙법은 그렇지 않다. 그나마 최근 들어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집중형으로 변모하고 있지만 아직도 대다수 국가에서는 종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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