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 문제, 그것은 법형식과 결정의 문제

공법의 이론과 개념이 정치적 사건과 변화를 반영하여 
형성되는 것이라면, 이에 관한 논의는 우선 오늘날의 
실천적 관점에서 이뤄져야 하고전통적 표상을 당면한 
목적에 맞게 수정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새로운 상황은 새로운 사회학적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으며, 따라서 공법적 문제를 ‘형식적‘으로 다루는 방법에 대한 
반대를 불러일으킬 수있다. 그러나 법학적 연구방식을 
정치적 역학관계의 변화로부터 독립시키고 일관된 형식을 파악함으로써 과학적 객관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이렇게 동일한 정치적 사태로부터 서로 다른 
학문적 경향과 흐름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 P30

모든 법학 개념 중에서 주권은 가장 강력한 현실적 관심에 
놓인개념이다. 주권 개념의 역사는 보댕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16세기부터 하나의 논리적 발전 혹은 
심화과정을 경험해 왔다고는 할 수없다. 주권 학설사의 
여러 단계는 다양한 정치적 권력투쟁을 통해 구획되는 
것이지 스스로의 개념성에 내재하는 변증법적 상승을 통해 구획되는 것이 아니다.

유럽이 16세기에 결국 국민국가로 해체됨과 더불어 
절대군주가 각 신분계층들과 투쟁을 벌이는데, 
이 과정에서 보댕의 주권개념이 생겨난다. 
18세기에는 새롭게 탄생한 국가들의 국가의식이 바텔의 
국제법적 주권 개념에 반영된다. 

새로이 성립한 독일제국에서는 1871년 이후 연방국가에 
대한 각 영방들의 권한 영역을 확정하기 위해 하나의 
원칙을 세울 필요성이 생기고, 이런 관심에서 독일의 
국가론은 주권개념과 국가 개념의 구분을 발견한다. 

이 구분에 힘입어 독일 국가론은각 영방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도 국가적인 성격을 유지시키려 한 것이다. 결국 언제나 여러 가지 변용을 겪으면서도 낡은 정의가 반복된 셈이다. 
즉 주권은 지고의, 법적으로 독립된, 다른 무언가로부터 
연역 불가능한 권력이라는 정의가 말이다.

이런 정의는 너무나도 다양한 정치-사회학적 복합체에 
적용되고 매우 다채로운 정치적 이해관계에 봉사한다. 
그것은 현실을 적절히 표현한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식, 
기호, 신호이다. 그래서 무한히 다의적이며 상황에 따라서는 엄청나게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고 아무런 가치가 없을수도 있다. 또한 주권의 실로 엄청난 존재감에 대해 ‘지고의 힘‘
이라는 최상급 표현을 사용해왔다. 인과법칙이 지배하는 
현실에서는 그런 힘에고유한 요소를 아무것도 추출해 
낼 수 없고, 따라서 그런 최상급 표현을부여할 아무런 
까닭도 없는데 말이다. 저항할 수 없고 자연법칙적 안정성에
의해 기능하는 지고의 힘, 즉 최대 권력은 정치적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이란 법의 존립에 아무런 증거가 되지 못하는데, 이는
루소가 자신의 시대와 의견일치를 보면서 정식화한 바 있는 범속한 이유 때문이다. 강제력이란 물리적 권력이며, 강도가 쏜 총 또한 권력이라는 명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사실상의 최고권력과 법적인 최고 권력을 
결합시키는 것이 주권 개념의 핵심 문제이다. 
여기에 주권 개념의 모든 어려움이 있으며, 이는 밋밋한 
동어반복적언술로부터 벗어나 법학의 이 근본개념을 
법학적인 본질 규정을 통해 파악하는 하나의 정의를 
발견해야 한다는 문제인 것이다.

국가론에 대한 새로운 저술들 켈젠 크라베, 볼첸도르프

주권 개념에 대해 최근에 등장한 가장 상세한 주석은 
사회학과 법학을대립시키고 단순한 양자택일을 통해 
순수 사회학과 순수 법학 같은 것을 추출하는 매우 간단한 
해결책을 추구한다. 켈젠은 [주권 문제와 국제법이론 및 
사회학적 및 법학적 국가 개념]에서 이 길을 따른다. 
모든사회학적 요소가 법학 개념 바깥으로 내버려짐으로써, 의심의 여지없는 순수성 속에서 여러 규범들과 궁극의 
통일적 근본규범이 귀속된 하나의 체계가 획득된다. 


존재와 당위 및 인과적 사유와 규범적 사유 사이의 낡은 
대립이 옐리네크 키스차코프스키가 이미 했던 것보다 
강렬하고엄격하게, 그러나 마찬가지의 논증 없는 자명함을 통해 사회학과 법학의 대립으로 전위된다. 

다른 몇몇 학문이나 인식론도 이런 대립을 법학에 적용한다는 사실을 볼 때 이 대립은 법학의 운명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켈젠은 이런 경향에 힘입어 결코 놀랍지 않은 
결론에 다다른다. 즉 국가에 대한 법학적 사유에는 순수 
법학적인 무언가가 있어야만 하며, 그것은 규범적으로 
유효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법질서의 바깥혹은 
곁에 있는 현실이나 그 언저리에서 이뤄지는 구상이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하나의 통일체로서의 자기충족적이고 
독립된(여기에 문제가있다는 사실이 아무런 어려움으로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다)법질서에 다름아닌 것이다. 


국가는 또한 법질서의 창출자도 원천도 아니다. 켈젠에 
따르면 그런 모든 표상은 의인화이자 실체화이며, 이는 
단일하고 동일해야하는 법질서를 상이한 주체로 
양분화하는 일이다. 따라서 켈젠에게 국가. 

즉 법질서는 궁극적 귀속점과 최종규범이 속하고 있는 
귀속의 체계인 셈이다. 국가에서 유효한 상위 및 하위 
질서는 권한과 권능이 통일된중심점으로부터 가장 아래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두루 미치고 있다는 데에 토대를 둔다.

최상위의 권능은 하나의 인격이나 사회학적이고 
심리학적인 권력복합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규범체계의 통일체인 주권적 질서 그 자체에서만 
비롯된다. 법학적 사유에는 실제적인 인격체도 허구적인 
인격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귀속점들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국가는 이 귀속의 최종점이며, 이 지점에서 법학적 사유의본질인 귀속의 체계가 ‘정지한다. 이 ‘지점‘은 동시에 
‘더 이상 연역 불가능한 질서‘이기도 하다. 



원천적이고 최종적이고 최상위에 있는 것으로부터 낮은, 
즉 위임된 규범에 이르는 하나의 일관된 질서체계는 
이런 방식으로 사유된다. 몇 번이고 새롭게 반복되고 모든 
학문적 반대자들에게 새롭게 제시되는 결정적 주장은 
여전히 똑같은 채로 남아 있다. 즉 하나의 규범이 유효하기 위한 근거 또한 하나의 규범일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법학적 사유에서 국가는 국가의 헌법, 즉 통일적 
근본규범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이 연역에서 핵심은 바로 ‘통일성‘이라는 말이다. ‘인식론적 입장의통일성은 일원론적 관점을 절대적으로 요구한다.‘ 
사회학과 법학 방법의이원론은 하나의 일원론적 형이상학 속에서 종말을 맞이한다. 

그러나 법질서의 통일성, 즉 국가의 통일성은 법학의 
테두리 안에서는 어떠한 사회학으로부터 순수한 채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 법학적 통일성은 세계를 포괄하는 
전 체계의 통일성과 똑같은 종류의 것일까? 자연법적인
체계나 이론적인 일반 법학이 아니라 실정적으로 유효한 
질서의 통일성을 생각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켜켜이 쌓인 
여러 실정적 규정들이 동일한 귀속점을 가진 통일성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일까? 질서, 체계, 통일성 등의 말은 
똑같은 요청을 바꿔 말한 것 아닐까? 


결국 이 요청은 어떤 ‘헌법‘(이는 ‘통일성‘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동어반복적 말바꾸기 혹은 거친 사회정치학적 
사실을 의미한다)의 기초 위에 하나의 체계가 성립함이 
얼마나 순수하고 정합적으로 이뤄져야 하는가를 보여 준다. 


켈젠에 따르면 체계적 통일성이란 "법학적 인식의 자유로운 행위"이다. 여기서 하나의 지점이 하나의 질서이자 하나의 체계이자 하나의 규범과 일치해야만한다는 흥미로운 수학적 신화는 무시한다 하더라도, 실정적 규정, 즉 명령에 토대를 두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의 귀속점으로 수렴된다는 다양한귀속 층위들의 필연성과 객관성이 어디에 토대를 두어야 
하는지를 물어보자. 

마치 세계의 자명한 삼라만상이라도 되는 양 일관된 
통일성과 질서에 관한 논의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자유로운 법학적 인식의 귀결과 오직 정치적 현실에서 
통일체로 결합했을 뿐인 복합체 사이의 전제된 조화가 
이미 성립되어 있기라도 하는 양 상위와 하위의 질서로 
이뤄진 계층질서가 논의되고 있으며, 여러 실정적 규정들에 관한 법학이론이논의하는 모든 문제에서 이런 질서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켈젠이 법학을 순수성으로 끌어올려 도달하려는 규범 
과학은 결코규범적일 수 없는데, 법률가가 자신에게 
고유한 자유로운 행위를 통해 판단을 내린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법률가는 그에게 주어진(실정적으로 주어진) 
가치를 활용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 통해 객관성이 
가능한 듯 보일지 모르지만, 실정성과의 필연적 관계는 
전혀 가능해지지 않는다. 

법률가가 끌어오는 가치는 엄밀히 말해 그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그는 이 가치에 비해 우위에서 있다. 
왜냐하면 그가 ‘순수하게‘ 법률가로 남아 있는 한, 
그는 자신이법률적인 관심을 가지는 모든 것으로부터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성과 
순수성은 엄청난 열정을 쏟아 부어야 하는 근본적 어려움을 무시하고 형식적 근거를 내세워 체계를 거스르는 모든 것을 배제하기만 하면 쉽게 얻을 수 있다. 

스스로의 법학적 입장이 그때까지 법학의 이름으로 
행해져 온 것과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예시하지도 않은 채, 
그 어떤 구체적인 사례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결연하게 
방법론에만 머무르는 자는 손쉽게 비판을 일삼는다. 


방법론적인 선언 및개념 연마, 그리고 예리한 비판은 오직 
사전 준비로서만 가치가 있다. 실제 사태로 눈을 돌리지 
않은 채 법학이 형식적인 무언가에 기초한다는데에 
집착하면, 모든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법학의 낡은 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 P36

켈젠은 주권 개념이라는 문제를 무시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가 연역한 끝에 다다른 결론은 이렇다. 
"주권 개념은 반드시 배제되어야 한다." 사실상 이것은 
낡은 자유주의가 법을 내세워 국가를 부인하팽는 일이며, 
법실현이라는 독립된 문제를 무시하는 일이다. 

크라베야말로 명확하게 이런 주장을 내세운 인물이다. 
그의 법주권설은 국가가 아니라 법이 주권자라는 테제에 
기초해 있다. 켈젠은 이 학설을 국가와 법질서가 동일하다는 자기 이론의 선구자로만 간주하는 듯하다. 그런데 사실 
크라베의 학설은 켈젠 이론의 귀결과 공통의 세계관적 
뿌리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 네덜란드 법학자와 독일 
신칸트학파의 인식이론 및 방법론적 특성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다시 말해 켈젠의 독창성, 즉 그의 방법론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것이다. 
크라베가 말했듯이, "법주권설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실제로 현존하는 상황에 대한 기술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 학설이 현실화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요청일 
수도 있다".

크라베에 따르면 현대의 국가이념은 인격적 통치권력
(군주나 통치권자) 대신에 영적 권력을 내세운다.
 "우리는 현재 자연적이든 구성적이든 (법)인격의 지배 
아래에서가아니라 규범, 즉 영적 힘들의 지배 아래에서 
살고 있다. 현대의 국가이념이 여기에 드러나 있다."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이 힘들이야말로 지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힘들은 인간의 정신적 본성으로부터 비롯되기에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법질서의 원천, 즉 근저는 오로지 "민족협동체의 법감정과 
법의식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이 근저에 관해서는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오직 하나의 현실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크라베는 지배형식의 사회학적 탐구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현대 국가의 유기체적 형태에 관한 
본질적으로 사회학적인 설명을 빼놓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크라베의 학설에서는 현대 국가의 직업 관료가 독자적인 지배권력으로서 국가와 동일시되고, 특별한 의미에서 
공공법적인 관계를 갖는 공무원제도가 보통의 직업제도와 구분되기 때문이다. 주체가 처한 현실상황의 차이에 따라 
공법과 사법이 나뉘는 한 두 법의 대립은 엄격하게 배제된다.


또한 모든 영역에서의 분권화와 자치의 광범위한 발달은 
이 현대의 국가이념을 보다 명확하게 나타낸다. 
국가가 아니라 법이 힘을 갖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언제나 되풀이되어 온 권력이 국가의 징표라는 정식화와 그 권력의 현현이 바로 국가라는 개념 규정은 
다음과 같은 하나의 전제조건하에서만 인정될 수 있다. 
즉 이 권력은 법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드러내며, 
법규범의 공포라는 방식 이외의 그 어떠한 방식으로도 
유효할 수 없다는 전제조건하에서만 말이다. 동시에 이와 
함께 확인해 두어야할 것은, 입법절차를 거치는 방식을 
통해서든 법을 다르게 해석하는 방식을 통해서든, 
국가는 법을 만들어 내는 일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국가는 법률의 적용이나 
어떤 공공의 이익의 대변을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 셈이다." 

국가의 임무란 법을 ‘만들어 내는‘ 일일 뿐이며, 이는 여러 
이해관심들의 법적 가치를 확정하는 일을 의미한다.

"이러저러한 모든 이해관심들이 스스로의 법적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은 특정 이익의 지배를 통해서가 아니라 
고유하고도 근원적인 법의 원천을 통해서이다."

그리하여 국가란 오로지 법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한정된다. 그러나 이는 국가가 내용 면에서 법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국가는 민족협동체의 법의식에 따라 
주어지는 것인만큼, 여러 이해관심들의 법적 가치를 
확정하는 것 이상으로는 아무것도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는 국가에 대한 이중의 한정이 가로놓여 있다.
즉 우선 첫번째로는 이해관심이나 복지, 즉 칸트적 
법이론에서는 질료라고 불리는 것을 법으로 한정하는 
일이 있고, 두번째로는 국가를 결코 구성적일 수 없는, 
따라서 선언적으로 확정하는 행위로 한정하는 일이 있다. 

정확히 이 확정 행위 속에 실체적 형식으로서의 법 문제가 
가로놓여있다는 사실이 이하의 논의에서 밝혀질 것이다. 
크라베에게 법과 이해관심의 대립이 형식과 질료의 대립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해야만 한다.

모든 공공의 이익은 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크라베가 말할 때, 그것은 현대 국가에서는 법적 이익이 최고의 이익임을 
법적 가치야말로 최고의가치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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