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국가의 목적

법치국가는 인간의 존엄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것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는 국가체제이다. 그러기 위해서 더 나아가 
인간의 자유와 안전을보장한다. 나치의 폭정 끝에 탄생한 
신생 독일(서독) 기본법 제1조보다 이 점을 명백히 보여 
주는 헌법체계나 문언은 없다. 

즉, "인간의 존엄은불가침이다. 이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권력의 책무이다." 이에 따르면 법치국가는 
인간의 존엄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거기에 이바지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서독헌법의 제정에 앞서 마련된 
초안 제1조도 "국가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며, 인간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천명했다. 
"국가는 인간이 만든 피조물이다. 따라서 국가 없는 
인간은 상정할 수 있어도 인간 없는 국가는 상정할 수 없다. "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 P29

그러므로 법치국가의 목적과 임무는 그의 보장기능 및 
보호기능이든, 사회적인 급부기능이든 간에, 인간과의 
관계에서 결코 인간을 지배하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의 
행복한 삶을 위해 봉사하는 데 있다. 궁극적으로는 
바로 인간의 존엄과 행복한 삶을 실현하도록 그 외부적 · 
간접적인 조건을 법적으로 마련해 주는 한도 안에 
법치국가의 성격이 나타나는 것이다. 왜냐, 존엄성의 
주체인 인간은 저마다 직접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의미 
있게 개발해 나갈 수 있는 정신적-윤리적인 자기결정과 
자기선택의 능력을 원칙적으로 갖고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법치국가는 그의 수단의 측면에서 보면 
지배조직체이지만, 그의 목적의 차원에서 보면 봉사조직체이다. 순전히 개인존재의차원에서만 본다면 어쩌면 국가 
그 자체는 하나의 악일지 모른다. 그러나 법치국가는 결코 
악을 위해 통치하지 않는다. 영국의 오래된 법언가운데 
하나인 "국왕은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 (The king can do no wrong)는 언명은 적어도 그 본래의 의미에 비추어 
이해하자면 오늘날에도 적용될만한 국가행위의 윤리적 지
도 원리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법치국가도 지배와 통제수단을 써야 할 때가 있다. 
탐욕과 이기심에 이끌리는 인간의 삶의 터전에는 갈등과 
충돌, 범죄와 일탈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그치지 않는 야만상태또는 법과 불법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혁명적 상황하에서는 인간의 존엄의 실현이나 자유의 의미의 중요성도 한 낱 공염불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최소한 이러한 야만상태를 종식시키고 
법질서가 통할 수있는 시민상태로 이전하기 위해 최소한 
지배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국가는 만인이 만인과 더불어 싸우는 전쟁상태를 극복하고,만인이 만인과 더불어 평화할 수 있는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홉스의 말을 빌리자면 무법한 야만상태에서는 만인이 
만인에 대해 늑대가 되지만, 법이 통하는 시민상태에서는 
만인이 만인에 대해 천사 같은 존재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사회적 행위를 제압하고 사회적 행위를 유도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마련해야 하고 실효성 있게 법을 집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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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 아닌 사단

단체의 실질이 사단인데도 법인격(즉 권리능력)을 
가지지 않는 것이 「법인아닌 사단(비법인사단)」이며, 
「인격 없는 사단」또는「권리능력 없는 사단」
이라고도한다. 

원래 사단은 법인으로서의 실체를 가질 수 있는 것이므로,
만일 입법상 법인의 자유설립주의를 채용한다면, 사단은 
모두 법인이 될 수 있다.

- P162

그러나 현행법상 법인의 설립은 법률이 규정하는 특정의 
경우에만 인정되므로(31 조참조), 경우에 따라서는 
권리능력 없는 사단이 생기게 된다. 사단이 법인격을 
취득하는 것은 현행법상으로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법인 아닌 사단이 많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의 하나는 민법이 사단법인의 설립에 
관하여 허가주의를 취하고 있는 데 있다(32조). 

즉, 주무관청의 허가가 사단법인 설립의 절차적 요건의 
하나이며, 그러한 허가를 얻지 못한 사단이나 그러한
허가를 얻기 전의 사단은 권리능력 없는 사단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설립자가 
행정관청의 사전의 허가나 사후의 감독 그 밖의 법적 
규제를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경우에는, 법인 설립이 
강제되어 있지 않은 이상, 법인아닌 사단으로서 남아 있게 
된다. 그리하여 민법상 권리능력 또는 법인격 없는 사단의 
존재는 불가피하며, 그 수가 상당히 많다.

교 회 

기독교의 교인들이 교리의 연구 · 예배 · 선교 등의 
목적으로 구성한 단체가 「교회」이다. 교회는 교인들의 
연보·성금 그 밖의 수입과 교회건물등으로 이루어지는 
교회재산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는 교인들이 종교적 목적을 가진 일종의 권리능력 없는 사단을 이루고 있다고 
보고, 따라서 그 재산의 귀속형태는 「합유」라고 새기는 
것이 일반이다. 초기의 판례에서는 교인들의 합유라고 
판단하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교인들의 「총유」라고 
새기는 것이 확고한 판례라고 할 수 있다(대판 1988. 3. 22, 86다카1197; 대판 1990.12.7, 90다카23561; 대판(전) 
1993.1.19,91다 1226 등 참조).

교회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법률문제는 한 교회가 분열해서 두 교회로 나누어지는경우에, 분열 당시의 교회재산의 
귀속에 관한 것이다. 판례는 법인 아닌 사단인 교회의
분열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법인 아닌 사단의 구성원들의 집단적 탈퇴로써 사단이 2개로 분열되고 분열되기 전 
사단의 재산이 분열된 각 사단들의 구성원들에게 각각 
총유적으로 귀속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형태의 법인 아닌 
사단의 분열은 허용되지 않는다. 교인들은 교회재산을 
총유의 형태로 소유하면서 사용·수익할 것인데, 
일부 교인들이 교회를 탈퇴하여 그 교회 교인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면 종전 교회의 총유 재산의 
관리처분에 관한 의결에 참가할 수 있는 지위나 그 재산에 
대한 사용·수익권을 상실한다. 종전 교회는 잔존 교인들을 
구성원으로 하여 실체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존속하며 
종전 교회의 재산은 그 교회에 소속된 잔존 교인들의 
총유로 귀속됨이 원칙이다(대판(전) 2006. 4. 20, 
2004다37775).

위와 같은 법인 아닌 사단이 현실적으로 활동함으로써 
전개되는 법률관계에 대하여 어떠한 법규범을 적용할 
것인가? 이에 관하여 민법은 재산귀속관계를 총유로 
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을 뿐이다(275조 · 278조 참조). 
그 밖에는 아무런 실체법적 규정을 두고 있지 않으므로, 
결국 이 문제는 학설 · 판례에 맡겨져 있다고 할 수있다. 
민법의 입법적 불비의 하나이다. 입법례로서는 법인 아닌 
사단에 대하여 조합에 관한 규정을 준용하는 경우가 있다
(독민 54조, 스민 62조 참조). 그러나 민법은 법인 아닌 
사단에 대하여 조합의 규정을 준용한다는 규정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소유관계를 총유라고 규정함으로써, 
법인 아닌 사단이 조합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조합의 소유형태는 합유이다. 
704 271조 참조). 그러므로 법인 아닌 사단에 대하여는, 
사단법인에 관한 규정 가운데서 법인격을 전제로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를 유추적용하여야 하며, 조합에 관한 
규정을 준용해서는 안 된다고 해석하여야 한다. 
이것이 현재 우리나라의 다수설이자 판례이다.

위와 같은 견지에서 법인 아닌 사단의 구체적인 법률관계를 비영리사단을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가) 법인 아닌 사단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단체로서의 
조직을 갖추고, 대표의 방법 · 총회의 운영 · 재산의 관리 
그 밖에 사단으로서 주요한 점이 규칙(정관)에 의하여 
확정되어 있어야 한다.

(나) 내부관계 최고의사결정기관인 총회에서 정관에 따라 
내부관계를 처리한다. 총회의 다수결은 모든 사원을 
구속하며, 그 다수결은 정관에서 특별히 정하고 있지 
않으면 과반수로 성립한다고 해석하여야 한다. 

그리고총회에 의하여 선임되는 업무집행기관은 총사원의 
수임자로서, 모든 업무집행에 관하여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를 부담한다(681조). 그 밖의 내부관계에 관해서는, 정관에서 특별히정하고 있지 않는 한, 사단법인에 관한 
규정을 적용하여야 한다.

(다) 외부관계

① 법인 아닌 사단도, 그 대표자가 정해져 있으면, 소송상의 당사자능력을 가진다(민소 52조). 따라서 제 3자는 법인 
아닌 사단에 대한 집행권원으로 사단의 재산에 대하여 
강제집행을 할 수 있다. 그 결과 소송 및 강제집행에서 
법인 아닌 사단과 사단법인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된다.

② 사단의 권리능력 · 행위능력 · 대표기관의 권한과 
그 대표의 형식 · 대표기관의 불법행위로 인한 사단의 
배상책임(불법행위능력) 등에 관해서는 모두 사단법인에
관한 규정을 적용하여야 한다. 법인 아닌 사단의 경우에 
대표자의 대표권 제한에 관하여 등기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제60조가 준용되지 않는다(대판 2003.7.22, 
2002다64780) 법인 아닌 사단의 정관에서 대표자의 
대표권을 제한한 경우에 이를 위반한 행위의 효력이 
문제된다. 판례는 거래상대방이 그와 같은 대표권 제한 및 
그 위반 사실을 알았거나 과실로 인하여 이를 알지 못한 
때에는 그 거래행위가 무효로된다고 한다(대판(전) 2007.
4.19, 2004다60072ㆍ60089)

(라) 재산귀속관계

① 재산귀속관계를 어떻게 하느냐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나, 민법은 따로 규정을 두어서 해결하고 있다. 즉, "법인 아닌 
사단의 사원이 집합체로서 물건을 소유할 때에는 총유로 
한다."라고 정함으로써, 법인 아닌 사단에 대하여「총유」
라는 공동소유형태를 인정하고 있다(275조 1항). 

한편, 소유권 이외의 재산권에 관해서도 총유에 관한 
규정(275조 내지 277조 참조)이 준용된다(278조). 
채권·채무를 비롯하여 각종의 재산권에 관해서는 
준총유라고 한다. 따라서 법인 아닌 사단의 구성원은 
공유나 합유에서와 같은 지분권을 가지지 않는다. 
사단법인의 소유형태가 그 법인의 단독소유인 데 대하여, 
법인 아닌 사단의 재산소유형태는 총유 또는 준총유이므로, 이 점에서 둘 사이에는큰 차이가 있다.

② 재산귀속관계의 공시방법에 관해서는 부동산등기법에 
특별규정이 있다. 즉, 동법 제26조 제 1항은 "종중·문중 
그 밖에 대표자나 관리인이 있는 법인 아닌 사단이나 
재단에 속하는 부동산의 등기에 관하여는 그 사단이나 
재단을 등기권리자 또는 등기의무자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이어서 제2항에서는 "제1항의 등기는 그 사단이나 재단의 명의로 그 대표자나 관리인이 신청한다."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법인 아닌 사단도 직접 사단의 명의로 등기를 할 수 있다(부동규 48조 참조). 그러나 예금채권 등의 경우에는 
대표자의 성명에다가 사단의 대표자라는 것을 명시함으로써, 사단의 채권임을 표시하여야 할 것이다.

③ 소극재산 즉 채무의 귀속관계는 제 3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므로, 매우 중요하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법인 아닌 사단의 채무는 그 구성원에게 총유적으로 
귀속한다. 즉, 총사원이 채무에 대하여 준총유를 한다. 
따라서 그 채무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은 
사단재산뿐이며, 각 구성원은 부담금만을 지급하면 
그 밖에는 개인재산으로써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유한책임).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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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심과 경제활동에 대한 규제의 필요성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이기심에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였다. 홉스에게는 전쟁 상태의 원인이 되었던
이기심이 아담 스미스의 세계에서는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았다. 

아담 스미스는 "우리가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자신의 이익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간성에 호소하지 않고 그들의 이기심에 
호소하며,우리는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의 이익을 이야기한다."라고 말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생활필수품을 지주의 ‘인간애나 정의감‘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적인 행위에서 얻어낸다고 주장했다.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는 애국자도 ‘이익을누릴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순수한 공감‘에서 행동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 P42

아담 스미스의 이기심에 대한 새로운 의미 부여는 ‘분업을 
야기하는 원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인간은 문명사회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협력하고 
서로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복잡한 인간
사회에서 무수히 많은 타인의 도움에 의존한다.

일상적인 삶에 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다른 사람의 자비이고, 다른 하나는 교환이다. 
교환의 과정 없이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다른 사람이 자비심을 베풀 때인데, 우리는 이것에 기대어 
만족스러운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나에게 주면,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라는 원리에 따라 분업이 이루어지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다른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내가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기때문이다. 아담 스미스는 
내가 원하는 것을 취하려는 마음을 이기심‘이라고 부르면서 이것이 문명사회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이기심‘을 ‘자신의 이익‘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이기심의 반대말로 ‘인간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 P43

나아가 아담 스미스는 ‘이기심‘을 통해 ‘공공의 이익‘ 또는 
‘사회의 이익‘의 산출을 설명했다. 그는『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손‘을 통해 이기심이 공공의 이익에 봉사한다고 설명하였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은 자신이 결코 
의도하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는 개인의 사익 
추구가 공공의 이익으로 변하는 과정을설명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보이지않는 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그는 모순되는 두 현상의 논리적 상충을 
해소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손‘을 사용한 것이다. 말
하자면 ‘보이지 않는 손‘은 개인의 이익과 공익의 모순관계를 돌파하기 위한 개념적 도구다. - P44

아담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직접적으로더 깊은 관심을 가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담 스미스는 국가의 부는 이런 인간의 자연적 성향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국가는 도덕적 명분을 앞세워 이기적 
인간들의 이기심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이기심은 가치 
있는 천연자원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인간의 자비심이나 이타심만을 과도하게 강조하면, 사람들은 어리석고 빈곤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자비심에 의존하여 살아갈 수는 없고, 스스로 타인과 교환할 수 있는 것을 가져야 인간다운 삶을 살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아담 스미스가 이기심에 기초한 경제활동에 
무제한의자유를 부여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이기심이 초래할 수 있는 재앙에 홉스가 
주목하였듯이, 아담 스미스도 이기심이 초래할 폐해를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개인의 경제활동이 
국가권력, ‘법과 통치‘를 통해 적정하게 규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담 스미스도 아무런 구속을 받지 않는 개인에게
이기심이 무한정 허용된다면, 홉스가 이미 지적하였듯이, 
사람들은서로 싸우고 사회질서는 유지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담 스미스가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자유방임주의자는 아니다.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법제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자유 시장은 참여자들이 
따라야 할 일정한 규칙을 필요로 한다. 계약의 실행을 
강제할 수 있는 법정, 범죄자를 단죄할 수 있는 검찰, 
세금을 징수할 조세기관 등이 필요하다. 
경제적 자유와 법의 지배는 함께 간다. 
법의 지배가 없으면 정실 자본주의로 빠진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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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안 박사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전 미국 칼빈신학교 철학신학과 교수

윤리학은 철학의 3대 영역 속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영역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윤리학은 개인의 경험 
세계관 종교와 같은 내부적 요소는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역사 전통과 같은 외부적 요소에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또한, 최근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윤리학은 더욱 혼란스러운 카오스의 
상태가 되었다. 그러므로 윤리학이 보다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윤리학이 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기준을 
필요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양성모 교수는 다양하고 복잡한 윤리적 
질문들을 다룰 때에 종교개가와 같은 마음으로 그러한 
절대적인 기준을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 두고 
논의를진행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단지 성경이 
기독교의 경전이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성경이 윤리의 
절대적인 기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성경의 무오성과 절대성을 굳게 붙잡고 복잡한 
윤리적 이슈를 성경 안으로끌어들여와 성경의 텍스트가 
무엇을 암시하며 무엇을 지향하는지 정확히 보여 준다.
게다가 사변적이며 난해한 용어 대신 논리적이며 쉬운 
언어로 풀어 설명해 준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그러한 암시와 지향성을 보고, 또한 
이해하기 쉬운 설명을 들으면서 무릎을 탁 치게 되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또한, 컨텍스트의 문제를 텍스트와
연결시켜 기독교 윤리의 적실성과 우월성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이 책에서 많은 유익합과 통찰력을 발견할 것이다.

이렇게 쉬운 언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논리, 논증의 
유기적 상관성, 호기심을불러 일으키는 수사법, 적당한 
분량과 난이도, 핵심을 꿰뚫는 통찰력 등은 이 책의 
가치를 높여 준다. 윤리적으로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하는모든 이에게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윤리의 전제는 무엇인가요?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화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요 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말함인지 알리라 - P22

윤리학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윤리의 전제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윤리학의 성립 조건이 
먼저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윤리학의 존재 
이유는 사람들에게 윤리적인 삶을 사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우슈비츠 학살과 같은 예를 들면서 
인간에게 과연 윤리나 도덕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합니다. 아우슈비츠수용소는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을 집단 학살하기 위해 만들었던 강제 수용소입니다.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들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나치즘에 
반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1945년 기준으로 유럽 전체 
유대인의 80퍼센트에 해당하는 약 600만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나치는 학살 피해자들을 가축 
수송 차량에 태워 이동시키고, 가축과 같이 내려지면 샤워실에 들어가 옷을 벗게 하고 독가스로 처참히 살해했습니다.

이러한 참혹한 장소를 가보게 되면 과연 인간에게 윤리나 
도덕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에게 윤리나 도덕이 존재할까요?
존재한다면 윤리의 전제는 무엇일까요?

윤리의 첫 번째 전제는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도덕적 인간은 도덕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얼마나 도덕적이며 윤리적일까요?
위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예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비도덕적이며 잔인한가를 보여 주는 극명한 사례입니다. 
이러한 예는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에게 재판해 달라고 찾아온 친자확인소송입니다(왕상 3:16-28). 이 소송에서 갓난아기의 가짜 어머니는 솔로몬이 갓난아기를 반씩 갈라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에게 주라고 
했을 때 그렇게 해 달라고주장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이 가짜 어머니의 반응을 보면 인간에게 윤리나도덕이 존재할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라인홀드 니버 (Reinhold Nicbuhr, 1892~1971)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가 주는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은 1932년도에 출판된 책으로 그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30년대는 정치적으로 근대 역사에서 가장 파멸적인 
전쟁 중 하나였던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폭력과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시기였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 
1929년도의 증시 대폭락으로 촉발된 세계대공황으로 
고통받던 시기였습니다.그러한 시대에 니버는 국가를 
위해서라면 참혹한 살상도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권장되고, 산업사회에서 비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살아남는 도덕적 괴리 현상을 목격하였습니다. 

즉, 개인이 아무리 타인의 이익을이해하고 존중하는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타인의 이익을 이해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집단이기주의(collective egoism) 사회에서는 군중심리에의한 충동을 통제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결국,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인 사람들도 비도덕적인 사회에 속하면 집단적 이기주의자로 변모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비도덕적이라고 여겨질 만한 본성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로마서 3:10-12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3:10-12]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또한, 로마서 3:23 을 보면 이렇게 선언합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런 의미에서 성선설과 성악설 중 하나를 택하라면 
성악설이 좀 더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은 도덕적 인간이어야 한다는 윤리의 
전제조건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도덕적 인간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위의 성경 구절들은 그러한 도덕적 인간들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를 보여 주는 것이지, 우리 인간이 
도덕적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보여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윤리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도덕적 인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주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선악과는 금단의 열매입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러한 명령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명령이자 생명과 죽음을 가져오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도덕적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장치이자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자신의 
형상(image)대로 창조하셨습니다(창 1:27). 
그것은 우리 인간이 도덕적인 존재로 지음받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윤리학의 두 번째 전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윤리학의 입장에서 자유의지의 존재는 
너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윤리학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철학적으로자유의지는 "반대선택의 능력"이라는 말로 
정의됩니다. 자유의지는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며, 특히, 반대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자유의지와 관련하여 인간이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가지고 있는지,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는지에 대해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 논란은 네 가지의 종류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정론, 자유의지론, 양립가능론, 양립 
불가능론입니다.

이런 논란은 특히, 결정론에 있어서 격화됩니다. 왜냐하면, 하이퍼칼비니즘(Hyper-Calvinism)을 포함한 결정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자유의지의 문제는 성가신 문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정론자들은 "일어날 일은무슨 일이든 일어날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갤른 스트로손(Galen Strawson, 1952~현재)과 같은 
영국의 분석철학자는 자유의지는 단지 우발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급진적인 선험적 논증을 
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결정론자들은 성경을 읽어도 그런 방식으로 읽습니다. 

인류의 시조가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큰그림 
속에서 결정된 것이며, 그 결과 인류 구속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가 진행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에베소서 1:4-5 의 말씀은 그러한 결정론을 지지하는 구절이라고 믿습니다.

[엡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러나 우리 인류의 시조가 선악과를 따먹는 비윤리적인 
행위를 하도록결정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 인류의 
시조의 잘못을 하나님께로 돌리는악한 시도입니다. 또한, 
그것이 결정론을 지지하는 증거로 사용될 수는 없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자유의지론이 맞다고 하면 인간의 구원 
문제를 해결하기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면 그러한 공로가 인간에게 조금이나마 돌려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변증학적인 측면에서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은 양립이 가능하며, 
양립 가능이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윤리학적인 측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셨을 때 윤리적으로 
악한 결정을 하도록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그렇게 
만드셨다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전선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류의 시조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그들 자신의 자유의지의 행사의 결과입니다. 

즉, 그들에게는 반대선택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뒤집어서 이야기하자면, 인간이 비윤리적 행위를 하도록 
결정되었다면 인간에게는 반대선택의 능력이 없습니다.

이는 윤리적 결정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결정론이 맞다고 하면 인간에게는 반대선택의 
능력이 없으며, 결국 인간은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로봇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거나,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놓여 있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을 도덕적인 간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훼손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성경 구절은 여호수아 24:15의 말씀입니다.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제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이 말씀은 여호수아가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신앙을 선택하겠다는의지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결정론을 옹호하는 성경 구절 또한, 
많습니다.
잠언 16:9 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잠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드라마틱한 회심을 보면 
하나님의 의지가 얼마나 강력한가를 알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반대선택의 능력이 있지만, 그것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이끄실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이 윤리학적으로도 양립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윤리학의 세 번째 전제는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민주국가에서는 윤리나 도덕을 
결정하는 최종적인 권위로 법률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윤리적인지 아닌지를 법에 의존하고 법의 판단을 
받습니다.

예를 들면, 대체적으로 의도적인 살인자에게는 법정 최고형이 내려집니다.그것은 의도적인 살인만큼 나쁜 것은 없다는 것을 법률이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법률이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로 기능합니다.

하지만 법률의 그러한 기능이 법률을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법률이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에게는 양심과 도덕과 같은 것이 있어서 윤리를 
판단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양심과 도덕이 자연법의 
관점에서 규범의 역할을 한다고생각합니다. 법률은 그러한 규범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양심은 
개인의 도덕적 기준과 규범 가치로, 법률은 국가적인 
도덕적 기준과 규범 가치라고 말합니다.즉, 양심이 옳고 
그름에 대한 내면적 인식이라고 한다면 법률은 개인의 
양심과 도덕 가치에 대한 집단적인 합의입니다.
하지만 법률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법률을 만드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논리에 의하면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를 사람에게 두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저마다의 판단 기준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심도 선한양심이 있는 반면, 악한 
양심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어느 한 행동이 어떤 
공동체에서는 죄가 되지 않는 반면, 다른 공동체에서는 
큰 죄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공동체에서는 성폭행을 당한 여성은 자살해야 합니다. 자살하지 않을 
경우 그 여성을 죽이는 명예살인을 죄로 보지 않지만, 
다른 공동체에서는 그와 같은 명예살인을 극악무도한 
죄로 봅니다. 그러므로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를 사람에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가 존재한다는 것은 윤리의 전제조건입니다. 왜냐하면, 비윤리적인 행위에 대한 처벌이 없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고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덕 법칙을 굳이 지켜야 할 근거가 사라집니다.

성경에서는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범죄하는그 영혼은 죽을지라"(겔 18:20)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비윤리적인 행위에대한 처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러한 점으로부터 우리는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과 그 권위는 
절대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 윤리의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는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를 상대주의적인 사람에게 두지않고, 절대적이며 전선하신 하나님께 
두기 때문입니다.

윤리학을 시작하기에 앞서 윤리학의 전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왜냐하면,아우슈비츠 학살과 같은 예를 들면서 인간에게 
과연 윤리나 도덕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윤리학은 인간은 도덕적인 인간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전제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도덕적으로 
창조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냉소주의, 허무주의, 감상주의와 같은 것은 잘못된 윤리관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결정론과 이를 추종하는 범신론은 죄를 전가시키는 
사악한 윤리관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왜나하면,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를 
무시하는 윤리관은 자신의 죄(비윤리)를 합리화시키는 
사악한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윤리의 전제조건을 만족하지 않는 윤리는 윤리로서 기능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윤리의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는데, 기독교 윤리는 이러한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윤리관이기 때문입니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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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 · 근대 · 탈근대적 요소가 동시에 공존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 the contemporaneity of
 the uncontemporary‘도 미국에 비해 더 심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한국 사회내부의 사회문화적 
논쟁과 토론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예컨대, 인문사회과학은 학계 내부 경쟁과 인정 투쟁으로 
매우 높은 서양 의존도를 기록한 덕분에 선진적이지만, 
문제는 그것이 한국적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데에 있다.



PC도 미국에선 수십 년간 실천되어왔고 그로 인한
부작용도 적잖이 노출되었기에 이념의 좌우를 떠나 
비판적 목소리가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사회적 운동으로서 PC의 역사가 비교적 짧은 한국에서 
그런 비판을 곧장 적용해도 좋은 건지는 의문이다. 

PC는 ‘나치돌격대의 사상 통제 운동‘인가?

PC라는 용어의 기원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어 무어라고 
단정 짓긴 어려우나, 현재 미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법의 
기원은 1960년대 미국 신좌파의 애독서였던 마오쩌둥의 
[작은 빨간 책 Little Red Book]에 나오는 ‘올바른 
생각correct thinking‘이라는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당시 신좌파는 PC를 교조주의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독선적인 동료의 과격함을 지적하는 일종의 농담으로 사용했지만, 우파는 좌파를 비난하기 위한 목적으로 PC를 ‘좌파의 대학·문화계 장악 프로그램‘으로 재정의해 사용함으로써 사실상 오늘날 사용되는 용법의 토대를 만들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진보좌파도 PC라는 용어를 쓰게 되었지만, 그들에게 PC는 ‘대학 문화계 장악 프로그램‘이아니라 ‘
소수자의 인권 보호 프로그램‘이었다. 진보좌파가추진한 
PC 운동은 1980년대에 미국 각지의 대학을 중심으로 
전개됨으로써 성차별적·인종차별적 표현을 시정하는 데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PC 운동은 그간 대학에서 가르쳐온 ‘위대한 책‘이니 
‘걸작‘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서구 백인들의 문화유산이었음을 지적하면서 소수 인종 문학 텍스트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소수 인종 교수채용과 학생 모집, 교과과정 개편을 위해 노력했다.

또 PC 운동은 나이에 대한 차별ageism, 동성연애자들에 
대한 차별heterosexism, 외모에 대한 차별lookism, 
신체의 능력에 대한 차별ableism 등 모든 종류의 차별에 
반대했다.

1991년 5월 4일 조지 H. W. 부시는 미시간대학의 졸업식 
연설의 대부분을 PC 운동을 비난하는 데에 할애함으로써
 ‘PC 운동‘을 둘러싼 논란을 격화시켰다. 

부시의 연설 직후 텔레비전 방송사들이 앞다투어 각종 PC 특집 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하면서 PC에 관한 논쟁 논란 
붐이 일어난 것이다. 그 결과 1991년 이전엔 미국 언론에서 PC라는 표현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나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매년 5,000번 이상 미국의 주요 일간지와 잡지에 
등장했으며, 1997년 한 해에만 7,200번이나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PC 비난은 주로 표현의 자유에관한 것이었다. PC 반대자들은 PC 운동가들이 자신들의운동에 반대하거나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라는 딱지를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며, 그런 
행태가 죄 없는 사람을 공산주의자라고 부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며 ‘새로운 매카시즘‘이라고 비난했다. 또 ‘미국의 
역사상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수정 제1조에 대한 
가장 큰 위협‘, ‘나치돌격대의 사상 통제 운동‘, ‘AIDS 만큼 
치명적인 이데올로기 바이러스‘ 등과 같은 비난과 더불어, 
PC 운동가들을 ‘언어 경찰languagepolice‘, ‘사상 경찰
thought police‘로 비난했다.

특히 PC 운동가들이 서구 백인들의 문화유산을 공격하고 
나선 건 이념과 무관하게 많은 지식인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탈리아의 움베르토 에코는 1990년대 후반에 이렇게 
경고하고 나섰다. "억압받는 소수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에 반대하기 위해 미국에서 탄생한 
‘정치적 올바름‘이 새로운 근본주의로 전환되려 하고있다." 그는 "불행히도 ‘정치적 올바름은 오늘날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르치는 자를 비난하고, 도곤(아프리카 서부에 사는 종족) 신화를 가르치는 자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며 "그것은 
또 다른 형식의 광신주의와 근본주의를 대변한다"고 비판했다.

PC의 연구 주제와 언론 보도 주제의 다양성

PC 논쟁은 주로 표현의 자유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지만, 
이념적 차이를 기반으로 한 문화 전쟁의 양상을 띠었기 
때문에 그 어떤 해결이나 타협의 지점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PC 연구도 동어반복의 한계를 넘어서긴
어려웠지만, PC가 미국을 넘어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연구는 계속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2000년대 들어 나온 주요 연구들은 표현의 자유, 미디어,
집단 커뮤니케이션, 교육, 페미니즘, 종합적 평가, 국제 
커뮤니케이션, 사상적 배경, 심리, 대응방안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2016년 미국 
대선을 기점으로 PC 연구가 새로운 국면을맞게 되었다는 
점이다.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PC운동가와 
지지자들의 ‘위선‘을 집중 공격함으로써 이전에 비해 
훨씬 공격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PC는 1990년대 중반 영문학자 김성곤에 의해 
처음으로 소개되었지만, 이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201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PC 비난을 전면에 내세웠던 트럼프의 선거 전략이
시사하듯이, 미국에서 ‘PC 피로증‘은 중도층 유권자들은
물론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도 존재했다. 2015년 10월민주당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여론조사 결과가
그걸 잘 말해준다. "PC가 국가적으로 큰 문제"라는 진술에
동의한 사람은 62%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진술이 트럼프가 한 말이라는 걸 밝혔을 땐 동의율은 
36%로 급감했지만, 응답자들의 정파적 반감을 감안하자면
‘PC 피로증‘이 매우 높은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2018년 예일대학 조사에선 심층 인터뷰를 한 3,000명 
중에서 80%가 "PC가 문제"라는 부정적인 답변을 했다. 

미국 PC 운동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이런 부정적인
여론과 분리해 생각하기 어렵다. 나는 기본적으로 PC 
운동의 취지와 당위성인 동의와 지지를 보내면서도, 
동의와지지를 보낼 뜻이 있는 사람들까지 등을 돌리게 
만드는 운동방식의 문제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운동 방식의 문제는 과유불급의 원리와 관련된 것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말로 압축해 지적할 수 있다. 
PC 운동이 애초에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 출발한 것임에도 어떤 사람들이 그 예의를 지키지 않거나 소홀히 대한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너무 거친 비판을 퍼부음으로써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건 자기모순이다.

너무 거친 비판은 주로 언어 본질주의 문제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누군가를 본질이 담긴 단어로 딱지 붙이기를
할 때에 언어는 곧잘 현실을 왜곡한다. 어떤 사람이 무심코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했을 때 "그건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다"고 지적하는 것과 "당신은 인종차별주의자다"라고 말하는
것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 그런데 PC에 근거한 비판은
곧잘 후자의 딱지 붙이기를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본질주의적인 딱지 붙이기는 일반 대중에게 필요 
이상의 반발을 초래해 원래 의도했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PC 운동을
일상적 삶의 ‘상식‘을 무시하는 엘리트 중심의 운동으로
인식시키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 나아가 이른바 
‘트럼프 현상‘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반反엘리트 우익 
포퓰리즘이 미국을 넘어서 서구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갖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을 가능성마저 제기되었다. - P31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국 대중의
‘PC 피로증‘과 서양의 적잖은 진보좌파 지식인들이 
PC비판에 나선 것은 상호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의 이런PC 비판은 국내에서 이루어진 진보적 PC 
비판에 적잖은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제부터 
PC의 3대 쟁점을 탐구하면서 다루기로 하자. 자유, 위선, 
계급이라는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는 3대 쟁점의 핵심을 
하나씩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유는 ‘PC 논쟁‘의 초기부터 제시된 우파의 반대 
논리로, PC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것이다. 
이는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갈등이라는 관점에서
논의한다. 둘째, 위선은 PC의 지지자들이 말로만 떠드는
기득권 세력이라는 우파의 반대 논리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인정하는 게 더 낫다는 것이다. 이는 ‘말과 행동의
괴리‘로 인한 갈등이라는 관점에서 논의한다. 셋째, 계급은
PC가 빈부격차의 문제를 비롯한 계급 정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좌파의 비판 논리로, 분열로 귀결되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자제하고 정치경제적 
구조를 바꾸는데에 힘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체성 정치‘와 ‘계급 정치‘의 갈등이라는 관점에서 
논의한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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