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사

강영안 박사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전 미국 칼빈신학교 철학신학과 교수

윤리학은 철학의 3대 영역 속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영역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윤리학은 개인의 경험 
세계관 종교와 같은 내부적 요소는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역사 전통과 같은 외부적 요소에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또한, 최근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윤리학은 더욱 혼란스러운 카오스의 
상태가 되었다. 그러므로 윤리학이 보다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윤리학이 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기준을 
필요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양성모 교수는 다양하고 복잡한 윤리적 
질문들을 다룰 때에 종교개가와 같은 마음으로 그러한 
절대적인 기준을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 두고 
논의를진행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단지 성경이 
기독교의 경전이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성경이 윤리의 
절대적인 기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성경의 무오성과 절대성을 굳게 붙잡고 복잡한 
윤리적 이슈를 성경 안으로끌어들여와 성경의 텍스트가 
무엇을 암시하며 무엇을 지향하는지 정확히 보여 준다.
게다가 사변적이며 난해한 용어 대신 논리적이며 쉬운 
언어로 풀어 설명해 준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그러한 암시와 지향성을 보고, 또한 
이해하기 쉬운 설명을 들으면서 무릎을 탁 치게 되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또한, 컨텍스트의 문제를 텍스트와
연결시켜 기독교 윤리의 적실성과 우월성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이 책에서 많은 유익합과 통찰력을 발견할 것이다.

이렇게 쉬운 언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논리, 논증의 
유기적 상관성, 호기심을불러 일으키는 수사법, 적당한 
분량과 난이도, 핵심을 꿰뚫는 통찰력 등은 이 책의 
가치를 높여 준다. 윤리적으로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하는모든 이에게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윤리의 전제는 무엇인가요?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화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요 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말함인지 알리라 - P22

윤리학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윤리의 전제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윤리학의 성립 조건이 
먼저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윤리학의 존재 
이유는 사람들에게 윤리적인 삶을 사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우슈비츠 학살과 같은 예를 들면서 
인간에게 과연 윤리나 도덕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합니다. 아우슈비츠수용소는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을 집단 학살하기 위해 만들었던 강제 수용소입니다.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들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나치즘에 
반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1945년 기준으로 유럽 전체 
유대인의 80퍼센트에 해당하는 약 600만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나치는 학살 피해자들을 가축 
수송 차량에 태워 이동시키고, 가축과 같이 내려지면 샤워실에 들어가 옷을 벗게 하고 독가스로 처참히 살해했습니다.

이러한 참혹한 장소를 가보게 되면 과연 인간에게 윤리나 
도덕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에게 윤리나 도덕이 존재할까요?
존재한다면 윤리의 전제는 무엇일까요?

윤리의 첫 번째 전제는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도덕적 인간은 도덕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얼마나 도덕적이며 윤리적일까요?
위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예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비도덕적이며 잔인한가를 보여 주는 극명한 사례입니다. 
이러한 예는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에게 재판해 달라고 찾아온 친자확인소송입니다(왕상 3:16-28). 이 소송에서 갓난아기의 가짜 어머니는 솔로몬이 갓난아기를 반씩 갈라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에게 주라고 
했을 때 그렇게 해 달라고주장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이 가짜 어머니의 반응을 보면 인간에게 윤리나도덕이 존재할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라인홀드 니버 (Reinhold Nicbuhr, 1892~1971)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가 주는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은 1932년도에 출판된 책으로 그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30년대는 정치적으로 근대 역사에서 가장 파멸적인 
전쟁 중 하나였던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폭력과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시기였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 
1929년도의 증시 대폭락으로 촉발된 세계대공황으로 
고통받던 시기였습니다.그러한 시대에 니버는 국가를 
위해서라면 참혹한 살상도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권장되고, 산업사회에서 비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살아남는 도덕적 괴리 현상을 목격하였습니다. 

즉, 개인이 아무리 타인의 이익을이해하고 존중하는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타인의 이익을 이해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집단이기주의(collective egoism) 사회에서는 군중심리에의한 충동을 통제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결국,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인 사람들도 비도덕적인 사회에 속하면 집단적 이기주의자로 변모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비도덕적이라고 여겨질 만한 본성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로마서 3:10-12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3:10-12]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또한, 로마서 3:23 을 보면 이렇게 선언합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런 의미에서 성선설과 성악설 중 하나를 택하라면 
성악설이 좀 더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은 도덕적 인간이어야 한다는 윤리의 
전제조건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도덕적 인간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위의 성경 구절들은 그러한 도덕적 인간들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를 보여 주는 것이지, 우리 인간이 
도덕적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보여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윤리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도덕적 인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주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선악과는 금단의 열매입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러한 명령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명령이자 생명과 죽음을 가져오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도덕적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장치이자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자신의 
형상(image)대로 창조하셨습니다(창 1:27). 
그것은 우리 인간이 도덕적인 존재로 지음받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윤리학의 두 번째 전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윤리학의 입장에서 자유의지의 존재는 
너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윤리학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철학적으로자유의지는 "반대선택의 능력"이라는 말로 
정의됩니다. 자유의지는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며, 특히, 반대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자유의지와 관련하여 인간이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가지고 있는지,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는지에 대해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 논란은 네 가지의 종류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정론, 자유의지론, 양립가능론, 양립 
불가능론입니다.

이런 논란은 특히, 결정론에 있어서 격화됩니다. 왜냐하면, 하이퍼칼비니즘(Hyper-Calvinism)을 포함한 결정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자유의지의 문제는 성가신 문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정론자들은 "일어날 일은무슨 일이든 일어날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갤른 스트로손(Galen Strawson, 1952~현재)과 같은 
영국의 분석철학자는 자유의지는 단지 우발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급진적인 선험적 논증을 
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결정론자들은 성경을 읽어도 그런 방식으로 읽습니다. 

인류의 시조가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큰그림 
속에서 결정된 것이며, 그 결과 인류 구속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가 진행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에베소서 1:4-5 의 말씀은 그러한 결정론을 지지하는 구절이라고 믿습니다.

[엡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러나 우리 인류의 시조가 선악과를 따먹는 비윤리적인 
행위를 하도록결정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 인류의 
시조의 잘못을 하나님께로 돌리는악한 시도입니다. 또한, 
그것이 결정론을 지지하는 증거로 사용될 수는 없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자유의지론이 맞다고 하면 인간의 구원 
문제를 해결하기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면 그러한 공로가 인간에게 조금이나마 돌려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변증학적인 측면에서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은 양립이 가능하며, 
양립 가능이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윤리학적인 측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셨을 때 윤리적으로 
악한 결정을 하도록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그렇게 
만드셨다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전선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류의 시조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그들 자신의 자유의지의 행사의 결과입니다. 

즉, 그들에게는 반대선택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뒤집어서 이야기하자면, 인간이 비윤리적 행위를 하도록 
결정되었다면 인간에게는 반대선택의 능력이 없습니다.

이는 윤리적 결정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결정론이 맞다고 하면 인간에게는 반대선택의 
능력이 없으며, 결국 인간은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로봇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거나,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놓여 있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을 도덕적인 간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훼손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성경 구절은 여호수아 24:15의 말씀입니다.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제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이 말씀은 여호수아가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신앙을 선택하겠다는의지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결정론을 옹호하는 성경 구절 또한, 
많습니다.
잠언 16:9 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잠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드라마틱한 회심을 보면 
하나님의 의지가 얼마나 강력한가를 알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반대선택의 능력이 있지만, 그것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이끄실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이 윤리학적으로도 양립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윤리학의 세 번째 전제는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민주국가에서는 윤리나 도덕을 
결정하는 최종적인 권위로 법률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윤리적인지 아닌지를 법에 의존하고 법의 판단을 
받습니다.

예를 들면, 대체적으로 의도적인 살인자에게는 법정 최고형이 내려집니다.그것은 의도적인 살인만큼 나쁜 것은 없다는 것을 법률이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법률이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로 기능합니다.

하지만 법률의 그러한 기능이 법률을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법률이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에게는 양심과 도덕과 같은 것이 있어서 윤리를 
판단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양심과 도덕이 자연법의 
관점에서 규범의 역할을 한다고생각합니다. 법률은 그러한 규범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양심은 
개인의 도덕적 기준과 규범 가치로, 법률은 국가적인 
도덕적 기준과 규범 가치라고 말합니다.즉, 양심이 옳고 
그름에 대한 내면적 인식이라고 한다면 법률은 개인의 
양심과 도덕 가치에 대한 집단적인 합의입니다.
하지만 법률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법률을 만드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논리에 의하면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를 사람에게 두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저마다의 판단 기준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심도 선한양심이 있는 반면, 악한 
양심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어느 한 행동이 어떤 
공동체에서는 죄가 되지 않는 반면, 다른 공동체에서는 
큰 죄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공동체에서는 성폭행을 당한 여성은 자살해야 합니다. 자살하지 않을 
경우 그 여성을 죽이는 명예살인을 죄로 보지 않지만, 
다른 공동체에서는 그와 같은 명예살인을 극악무도한 
죄로 봅니다. 그러므로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를 사람에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가 존재한다는 것은 윤리의 전제조건입니다. 왜냐하면, 비윤리적인 행위에 대한 처벌이 없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고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덕 법칙을 굳이 지켜야 할 근거가 사라집니다.

성경에서는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범죄하는그 영혼은 죽을지라"(겔 18:20)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비윤리적인 행위에대한 처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러한 점으로부터 우리는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과 그 권위는 
절대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 윤리의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는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를 상대주의적인 사람에게 두지않고, 절대적이며 전선하신 하나님께 
두기 때문입니다.

윤리학을 시작하기에 앞서 윤리학의 전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왜냐하면,아우슈비츠 학살과 같은 예를 들면서 인간에게 
과연 윤리나 도덕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윤리학은 인간은 도덕적인 인간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전제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도덕적으로 
창조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냉소주의, 허무주의, 감상주의와 같은 것은 잘못된 윤리관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결정론과 이를 추종하는 범신론은 죄를 전가시키는 
사악한 윤리관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왜나하면,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를 
무시하는 윤리관은 자신의 죄(비윤리)를 합리화시키는 
사악한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윤리의 전제조건을 만족하지 않는 윤리는 윤리로서 기능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윤리의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는데, 기독교 윤리는 이러한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윤리관이기 때문입니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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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 · 근대 · 탈근대적 요소가 동시에 공존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 the contemporaneity of
 the uncontemporary‘도 미국에 비해 더 심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한국 사회내부의 사회문화적 
논쟁과 토론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예컨대, 인문사회과학은 학계 내부 경쟁과 인정 투쟁으로 
매우 높은 서양 의존도를 기록한 덕분에 선진적이지만, 
문제는 그것이 한국적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데에 있다.



PC도 미국에선 수십 년간 실천되어왔고 그로 인한
부작용도 적잖이 노출되었기에 이념의 좌우를 떠나 
비판적 목소리가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사회적 운동으로서 PC의 역사가 비교적 짧은 한국에서 
그런 비판을 곧장 적용해도 좋은 건지는 의문이다. 

PC는 ‘나치돌격대의 사상 통제 운동‘인가?

PC라는 용어의 기원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어 무어라고 
단정 짓긴 어려우나, 현재 미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법의 
기원은 1960년대 미국 신좌파의 애독서였던 마오쩌둥의 
[작은 빨간 책 Little Red Book]에 나오는 ‘올바른 
생각correct thinking‘이라는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당시 신좌파는 PC를 교조주의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독선적인 동료의 과격함을 지적하는 일종의 농담으로 사용했지만, 우파는 좌파를 비난하기 위한 목적으로 PC를 ‘좌파의 대학·문화계 장악 프로그램‘으로 재정의해 사용함으로써 사실상 오늘날 사용되는 용법의 토대를 만들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진보좌파도 PC라는 용어를 쓰게 되었지만, 그들에게 PC는 ‘대학 문화계 장악 프로그램‘이아니라 ‘
소수자의 인권 보호 프로그램‘이었다. 진보좌파가추진한 
PC 운동은 1980년대에 미국 각지의 대학을 중심으로 
전개됨으로써 성차별적·인종차별적 표현을 시정하는 데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PC 운동은 그간 대학에서 가르쳐온 ‘위대한 책‘이니 
‘걸작‘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서구 백인들의 문화유산이었음을 지적하면서 소수 인종 문학 텍스트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소수 인종 교수채용과 학생 모집, 교과과정 개편을 위해 노력했다.

또 PC 운동은 나이에 대한 차별ageism, 동성연애자들에 
대한 차별heterosexism, 외모에 대한 차별lookism, 
신체의 능력에 대한 차별ableism 등 모든 종류의 차별에 
반대했다.

1991년 5월 4일 조지 H. W. 부시는 미시간대학의 졸업식 
연설의 대부분을 PC 운동을 비난하는 데에 할애함으로써
 ‘PC 운동‘을 둘러싼 논란을 격화시켰다. 

부시의 연설 직후 텔레비전 방송사들이 앞다투어 각종 PC 특집 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하면서 PC에 관한 논쟁 논란 
붐이 일어난 것이다. 그 결과 1991년 이전엔 미국 언론에서 PC라는 표현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나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매년 5,000번 이상 미국의 주요 일간지와 잡지에 
등장했으며, 1997년 한 해에만 7,200번이나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PC 비난은 주로 표현의 자유에관한 것이었다. PC 반대자들은 PC 운동가들이 자신들의운동에 반대하거나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라는 딱지를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며, 그런 
행태가 죄 없는 사람을 공산주의자라고 부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며 ‘새로운 매카시즘‘이라고 비난했다. 또 ‘미국의 
역사상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수정 제1조에 대한 
가장 큰 위협‘, ‘나치돌격대의 사상 통제 운동‘, ‘AIDS 만큼 
치명적인 이데올로기 바이러스‘ 등과 같은 비난과 더불어, 
PC 운동가들을 ‘언어 경찰languagepolice‘, ‘사상 경찰
thought police‘로 비난했다.

특히 PC 운동가들이 서구 백인들의 문화유산을 공격하고 
나선 건 이념과 무관하게 많은 지식인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탈리아의 움베르토 에코는 1990년대 후반에 이렇게 
경고하고 나섰다. "억압받는 소수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에 반대하기 위해 미국에서 탄생한 
‘정치적 올바름‘이 새로운 근본주의로 전환되려 하고있다." 그는 "불행히도 ‘정치적 올바름은 오늘날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르치는 자를 비난하고, 도곤(아프리카 서부에 사는 종족) 신화를 가르치는 자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며 "그것은 
또 다른 형식의 광신주의와 근본주의를 대변한다"고 비판했다.

PC의 연구 주제와 언론 보도 주제의 다양성

PC 논쟁은 주로 표현의 자유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지만, 
이념적 차이를 기반으로 한 문화 전쟁의 양상을 띠었기 
때문에 그 어떤 해결이나 타협의 지점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PC 연구도 동어반복의 한계를 넘어서긴
어려웠지만, PC가 미국을 넘어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연구는 계속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2000년대 들어 나온 주요 연구들은 표현의 자유, 미디어,
집단 커뮤니케이션, 교육, 페미니즘, 종합적 평가, 국제 
커뮤니케이션, 사상적 배경, 심리, 대응방안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2016년 미국 
대선을 기점으로 PC 연구가 새로운 국면을맞게 되었다는 
점이다.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PC운동가와 
지지자들의 ‘위선‘을 집중 공격함으로써 이전에 비해 
훨씬 공격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PC는 1990년대 중반 영문학자 김성곤에 의해 
처음으로 소개되었지만, 이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201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PC 비난을 전면에 내세웠던 트럼프의 선거 전략이
시사하듯이, 미국에서 ‘PC 피로증‘은 중도층 유권자들은
물론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도 존재했다. 2015년 10월민주당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여론조사 결과가
그걸 잘 말해준다. "PC가 국가적으로 큰 문제"라는 진술에
동의한 사람은 62%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진술이 트럼프가 한 말이라는 걸 밝혔을 땐 동의율은 
36%로 급감했지만, 응답자들의 정파적 반감을 감안하자면
‘PC 피로증‘이 매우 높은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2018년 예일대학 조사에선 심층 인터뷰를 한 3,000명 
중에서 80%가 "PC가 문제"라는 부정적인 답변을 했다. 

미국 PC 운동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이런 부정적인
여론과 분리해 생각하기 어렵다. 나는 기본적으로 PC 
운동의 취지와 당위성인 동의와 지지를 보내면서도, 
동의와지지를 보낼 뜻이 있는 사람들까지 등을 돌리게 
만드는 운동방식의 문제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운동 방식의 문제는 과유불급의 원리와 관련된 것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말로 압축해 지적할 수 있다. 
PC 운동이 애초에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 출발한 것임에도 어떤 사람들이 그 예의를 지키지 않거나 소홀히 대한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너무 거친 비판을 퍼부음으로써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건 자기모순이다.

너무 거친 비판은 주로 언어 본질주의 문제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누군가를 본질이 담긴 단어로 딱지 붙이기를
할 때에 언어는 곧잘 현실을 왜곡한다. 어떤 사람이 무심코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했을 때 "그건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다"고 지적하는 것과 "당신은 인종차별주의자다"라고 말하는
것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 그런데 PC에 근거한 비판은
곧잘 후자의 딱지 붙이기를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본질주의적인 딱지 붙이기는 일반 대중에게 필요 
이상의 반발을 초래해 원래 의도했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PC 운동을
일상적 삶의 ‘상식‘을 무시하는 엘리트 중심의 운동으로
인식시키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 나아가 이른바 
‘트럼프 현상‘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반反엘리트 우익 
포퓰리즘이 미국을 넘어서 서구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갖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을 가능성마저 제기되었다. - P31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국 대중의
‘PC 피로증‘과 서양의 적잖은 진보좌파 지식인들이 
PC비판에 나선 것은 상호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의 이런PC 비판은 국내에서 이루어진 진보적 PC 
비판에 적잖은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제부터 
PC의 3대 쟁점을 탐구하면서 다루기로 하자. 자유, 위선, 
계급이라는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는 3대 쟁점의 핵심을 
하나씩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유는 ‘PC 논쟁‘의 초기부터 제시된 우파의 반대 
논리로, PC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것이다. 
이는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갈등이라는 관점에서
논의한다. 둘째, 위선은 PC의 지지자들이 말로만 떠드는
기득권 세력이라는 우파의 반대 논리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인정하는 게 더 낫다는 것이다. 이는 ‘말과 행동의
괴리‘로 인한 갈등이라는 관점에서 논의한다. 셋째, 계급은
PC가 빈부격차의 문제를 비롯한 계급 정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좌파의 비판 논리로, 분열로 귀결되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자제하고 정치경제적 
구조를 바꾸는데에 힘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체성 정치‘와 ‘계급 정치‘의 갈등이라는 관점에서 
논의한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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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국가와 법치국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독일의 헌법학자 콘라드 헤세
(Konrad Hesse)교수는 "국가의 시대가 이제 끝나가고 
있다"는 말로써 당대의 헌법학에서 쟁점이 되었던 국가와 
사회의 구별 여부에 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으려 했다.‘ 
‘국가와 사회‘ 양자 구별을 주장하는 이론진영에 서 있는 
뵈켄푀르데(Böckenförde) 교수에 의하면 국가는 
기능적으로 사회와 관련을맺고 있지만 사회로부터 독립한 조직된 작용통일체인 반면, 사회는 스스로 규율할 수 없는 
작용통일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사회는 조직된 기관으로서 국가, 개인적 자유의 보장자로서의 국가, 외부조종과 
타율적 조종의 요소로서의 국가를 필요로 하며, 국가와 
사회의 구별이 개인적 자유의 기본조건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해 헤세(Hesse) 교수는 개인의 
자유 보장을위하여 국가와 사회를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은 양자를 동일시해야 한다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위험성을 내포한다고 본다. 현대국가와 현대사회의 문제는 양자동일시 또는 양자구별 같이 택일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국가와 사회의 문제는 양자를 국가의 과제, 국가의 작용, 사회적 행위에 대한 국가의 영향과 질서형성 
등의 측면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정서하는가의 문제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 본래의 문제는 헌법과 
법률에 의한 국가와 사회의 구체적이고 세밀한 정서에 
있다고 한다. 요체가 되는 것은 결국 어떻게 양자를 적당한 정도로 분리하고 또 결합시킬 것인가에 귀착된다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는 국가와 사회 양자를 분리하거나 통일시킴으로써만 실효성 있게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적 
침해뿐만 아니라 사회적 침해로부터도 보호될 필요가 있다. 자유롭지 못한 사회로부터 자유로운 국가가 생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국가는 국가를 지탱하고 또 방어하기도 
해 주는 사회적 세력에 의존하고 있는 반면, 사회의 발전
또한 국가의 체제와 기능 및 그 한계와도 밀접한 상관관계 
속에 놓여있는 것이 사실이다. 국가를 유지해 주는 사회적 
세력들에 의하여 버림받은 국가는 행정부와 사법부가 
제대로 작동하더라도 결국 자유의 파괴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세기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 구체제 
해체기의 혼란 속에서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지난 세기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국가질서와 
법질서에서최고의 규범으로 새롭게 등장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저질러진 인간모멸의 
역사적 사실을 딛고 출범한 신생국가들의헌법뿐만 아니라 유엔헌장과 세계인권선언에서 천명된 최고의 가치는 바로 
인간의 존엄이었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짓밟고 인간존재에게서 인간성을 
빼앗고 유린하며 심지어 말살하려고 하는 국가체제가 바로 불법국가, 폭력국가, 전체주의국가, 권위주의국가, 독재국가라고 한다면 법치국가, 민주국가, 자유국가, 안전국가, 
사회국가는 바로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이념으로 
고백하고 그에 경도되고 그의 실현에 지향된 국가인 것이다. 

전자에 속하는 불법국가를 국가라는 이름으로 지칭하는 데 대해서는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헌법적인 의미에서 국가란 도무지 불법이나악을 저지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정법상 국가배상책임의 전제가 되는 불법행위는 
원칙적으로 국가기능을 수행하는 공무원 개인의 불법행위를 의미하는 것이지, 국가체제가 총체적으로 또한 체계적인 
불법을 자행하는 경우와 구별되기 때문이다. 

국가가 변질되어 강도 집단처럼 체계적인 불법을 자행하는 경우는 법적인 의미의 정상국가가 아니라국가의 탈을 쓴 
레비아탄(Leviathan)에 불과한 것이다. 토마스 홉스의 
말대로 그것은 사실상으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곧 
죽어야 할 신‘(sterblicher Gott)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법치국가는 철저히 헌법과 법에 기초하여 
규범의 정향에 스스로 복종하고 따르는 국가를 지칭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열쇠는 바로 헌법질서를 포함한 
전체 법질서의 정향규범적 지시이다. 

오늘날 모든 법질서가 지향하는 인간의 존엄성은 
헌법상의 기본권 조항과 여타의 인권 목록 가운데서 
최고의 인권으로서 자리매김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이 조건은 인간이냐 비인간이냐 하는 근본적인 상황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의 공존질서를 깨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행해지는 크고 작은 형사범죄에 의해서는 직접 침해되지 않는다. 단지 간접적인 침해가 일어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는 원칙적으로 피해자의 정당방위나 긴급피난의 가능성이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긴급구조를 요청할 수 있는 가능성도 원칙적으로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개인이나 집단이 인종적 이데올로기적, 문화적인 이유로 다른 집단으로부터 차별대우를 받고 배제당하거나 고문이나 학대를 당하면서 스스로 방어할 수도 없고, 
외부세계로부터 구조를 기대할 수도 없는 한계상황하에서 시달리고 있다면, 그 상황은 인간이 인간성을 일방적으로 
유린당하여 사실상 단순한 물건이나 수단으로 전락한 것과같은 참담한 상황인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최고의 
근본규범은 바로 이런 한계상황에서 직접 침해당하고 
있는 것이다.

법치국가는 이런 비극적인 한계상황을 예방하고, 인간이 
정말 인간다움을 실현할 수 있는 직접 · 간접의 조건들을 
마련하고 또 그것을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법치국가는 법공동체 내에서 이 임무를 이행하기 위한 공조의 중심체로서 필요할 경우 최종적이고도 최강의 권력을 투입하거나 행사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필요불가결한 
조건으로 개인과 사회의 자유와 안전을 들 수 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는 개인의 삶에서나 사회생활 
가운데서 자유와 안전은 다양한 측면에서 서로 얽히고
충돌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존엄성의 주체인 
인간은 개인이면서 동시에 타인과 공존하는 사회적 
존재이므로 개인의 자유와 안전 및 사회의 자유와 
안전이 서로 충돌하여 어느 것을 우선할지 불분명한 
상황에서는 원칙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안전에 우선권을 
두어야 한다. 이것이 모든 현대헌법이 기초로 삼고 있는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대강령이다.

더 나아가 법치국가의 법질서 내에서 자유와 안전이 서로 
충돌하는 상황에서는 어느 것을 우선해야 할 것인가? 
오늘날과 같이 사회체계의복잡성이 상존하는 상황 
가운데서는 양자택일이 문제의 해결책이 되는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유냐 안전이냐 하는 양자택일보다는 적정한 
자유와 적정한 안전 사이의 실천적 조화를 추구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 실현에 어느 것이 더 본질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에 따라 양자의 비중을 저울질할 수 있는 원칙적인 방도를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유는 인간존엄성을 실현하는 삶의 발전조건인 반면, 
안전은 그것을 유지하는 보전조건이다. 자유는 인간의 
윤리적인 자기발전의 조건인 반면, 안전은 인간의 윤리적인 자기보전의 조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윤리적인 자기보전의 조건은 인간의 
윤리적인 자기발전조건의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이렇게 보면 안전은 자유라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고, 자유는 인간의 존엄이라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인 셈이다. 따라서 자유는 인간의 존엄이라는 
최고의 법 가치에 안전보다 실제 더 가까운 의미 연관성을 
지님을 알 수 있다. 왜냐, 인간의 존엄성은 개념상 "자유를 
통해 활력을 얻게 되고 동시에 자유를 더욱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존엄을 
위한 투쟁의 동인은 제1차적으로자유의 정신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법치국가는 인간의 존엄성 실현을 위한 
목적 합리적 가치 합리적 관점으로부터 안전보다 자유에 
원칙적인 우위를 부여한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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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형이 아닌 재판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먼저, 쟁점이 명확하지 않다. 처음에는 대략적인 청구를 
해놓은 다음 나중에 추가하는 식으로 소송이 진행된다. 
미국에서는 준비기일에 쟁점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준비에 오랜 시간이걸린다. 
하지만 대륙법계 변호사는 재판 준비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 - P191

증거조사라고 해봐야 하루에 증인 한 명을 부르거나
증거를 한두 개 확인하는 것으로 끝난다. 재판 초기 
미국 변호사가 재판 준비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를 
대륙법 변호사는 받지 않는다.

불의의 일격을 준비할 필요도 없다. 워낙 짧은 시간 동안 
사건의 일부에 관한 조사만 이루어지고 다음 기일에 
반론을 제기할 충분한 시간도 있다. 또 집중형이 아닌 
재판에서는 증거개시(상대방 증인과증거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것)와 변론준비기일(양 당사자의 변호인이 
쟁점을 정리하면서 재판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의 
중요성이 훨씬 떨어진다. 불의의 타격을 가할 목적이라면 
상대방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수집해야 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상대방 정보에 목말라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매 기일이 다음 기일에 대한 준비기일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따로 준비기일을 열 필요도 없다. - P192

집중형이 아닌 대륙식 재판의 또 하나의 특징은 증거를 
보고 조서를 작성하는 판사와 그걸 보고 승패를 결정하는 
판사가 다르다는 점이다. 앞서 제2장에서 본 것처럼 
대륙법의 소송절차는 교회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중세 교회법에서 증거는 판사가 아니라 서기가 보고 
기록했고, 이걸 기초로 판사가 재판했다. 나중에 절차가
바뀌어 증거조사도 서기가 아니라 판사의 주도하에 
진행되었지만 지금도 기록을 작성한 판사가 아니라 
다른 판사 또는 합의부가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교법 학자들은 이를 두고 "영미법의 판사는 현장에서 
‘직접‘ 증거를 조사하지만 대륙법 판사는 ‘간접‘적으로 
조사한다"고 표현한다. 영미법이 직접 (immediacy) 
재판이라면 대륙법은 간접(mediacy) 재판이라는 것이다. 양쪽을 비교해본 법률가들은 대체로 영미법의 재판 
방식이 더 나은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대륙법도 직접성을 높이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애초 당사자와 판사 사이에 ‘문서 장벽‘을 치고 문서를 통해 당사자가 판사와 소통하도록 한 취지는, 
재판의 공정성을 높이고 당사자의 입김이 재판에 작용하지 않도록 하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 판사에 대한 압력과 회유를 걱정할 계제가 
아니다. 직접 승패를 결정하는 판사가 당사자이야기를 
직접 듣고, 태도를 관찰하고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간접재판은 문서가 중심이 되는 재판이다. 영미법에서는 
재판에 증인이 나와서 선서한 후 판사와 배심원 앞에서 
구두로 진술하고이에 대해 상대방이 반대신문하는 식으로 재판이 진행된다. 변호인도 구두로 각종 신청과 이의제기를 하고, 판사도 구두로 답한다. 그래서 ‘구두‘ 재판이라고도 
한다. 반면 대륙법에서는 증인에게 하는질문조차도 
당사자가 준비한 질문지를 판사가 읽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게다가 증거조사를 하는 사람과 조서를 꾸미는 사람, 
재판하는 사람이 각각 다를 경우에는 구두보다는 서면이 
중심일 수밖에없다. 대륙법도 최근 들어 집중적인 재판, 
구두재판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집중심리주의, 직접주의, 
구두주의라는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 P193

바깥에서 볼 때 대륙법의 이상한 점 하나는 증인에게 
당사자가 질문하지 않고 판사가 질문하는 것이다. 
대륙법에서는 영미법과 달리 무엇을 어떤 범위에서, 
어느 정도로 물어볼지를 판사가 결정한다. 
대륙법은 판사가 물어보는 ‘직권주의‘ 시스템이고, 영미법은 당사자가 물어보는 ‘당사자주의‘ 시스템이다.

하지만 이건 너무 성급한 결론인 것 같다. 적어도 민사재판에 관한 한 이런 구별법이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 
같지 않다. 민사는 대륙법과 영미법이든 기본적으로 
‘처분권주의‘를 따른다. 처분권주의에 따르면, 쟁점이 
무엇인지, 그에 대한 증거가 무엇인지, 어떤 주장을 펼칠지는 전부 당사자 마음이다. 당사자가 결정하고 처분한다. 
거기에 두 법 전통 모두 판사에게 탐구의 역할을 약간 
부여할 뿐이다. 대륙법 국가 중에서도 독일은 판사가
 그 역할을 좀 더많이 하고, 다른 국가에서는 판사가 
역할을 조금 덜 하는 정도의 차이만 있다. 


이만 있다. 반면에 영미법에서는 판사가 끼어드는 경우가 
훨씬 적다. 두 법 전통 간에는 그 정도의 차이만 있다. 
영미법 판사는 청소년 혹은 소송 능력이 제한되는 자의 
재판이나 당사자가 제대로 입증을 못하는 경우에만 공익적 차원에서만 판사가 마지못해 끼어든다. 대륙법에서 검사나 이와 비슷한 직위를 가진 자가 공익의 대표자로서 소송에 
참가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처럼 대부분은
당사자가 주도해서 소송을 한다. 양쪽 모두 재판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당사자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주로 달려 
있다. 그래서 당사자가 신청하는 경우에만 판사가 증인에게 
질문을 하고, 질문 내용도 당사자가 준비한다.

다만 여기서 대륙법이 구두주의에 의하지 않는다는 점이 
또 한번 드러난다. 보통 증인에게 질문하려는 변호인은 
먼저 질문사항을적은 ‘질문지‘를 작성하고, 증인신문기일 
이전에 판사와 상대편 변호인에게 질문지를 제출한다. 
따라서 상대편 변호인(가끔은 증인조차도)은 어떤 내용에 
대한 질문이 오갈지 미리 알아서 그에 대한 준비를 한다. 
질문하는 변호인이나 대답하는 증인이나 무엇을 할지 알기 때문에 미국 재판처럼 직접적인 구두신문과 반대신문의 
긴장감은 한껏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심지어 질문도 판사가 
하기 때문에 당사자끼리 부딪치는 장면은 잘 연출되지 
않는다.

반대신문이라는 것도 대륙법계 변호인에게는 낯선 절차 
중 하나다. 대륙법에서는 배심원도 없고, 증인을 탄핵할 
일도 별로 없다(실무에서는 당사자나 변호인, 친인척, 
기타 이해관계인이 증인으로 나올 수 없다).

재판을 주재하는 재판장은 관련성 있는 사실을 능숙하고 
공정하게취합하며, 질문 내용도 적절하게 거른다. 질문이 
적절치 않으면 재판장에게 "이의제기서 (offer of proof)‘를 낼 수 있어서 느닷없는 질문때문에 당황할 이유도 없다. 
상대방 변호사가 할 일이라는 것도 증인신문조서에 기재될 어구를 지적하는 것이 전부다.


집중심리주의, 직접주의, 구두주의와 관련해서 대륙법과 
영미법의 차이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대륙법에서는 먼저 원고측 변호인이 주로 서면으로 
증인신청서를 판사에게 전달한다. 그 신청서 사본을 
판사가 피고 측에게 전달하면, 피고 측 변호인은 가령, 
증인이 원고와 친족관계 또는 가족관계가 있어서 
적절치 않다는 식으로 반론을 제기한다. 보통 증인신문 
청구를 받은 판사는 2~3주 후로 기일을 잡고 기일 전에 
양측 변호인이 서면을 제출한다음 기일에 출석해 구두로 
의견을 나눈다. 의견을 다 듣고 판사는다시 2주 정도 
후에 증인신청에 대한 결정을 내리며, 인용 결정이나면 
몇 주 후에 증인신문 기일을 잡아 증인의 진술을 듣는다. 
이와 같이 증인을 신청해서 증인신문을 하기까지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이 걸린다. 판사와 변호인 사이에 불과 
몇 분 오가는 대화로 결론이 나는 미국법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원고 측 변호인이 판사에게 증인을 
신청하고 피고 측 변호인은 이의를 제기하면서 간단하게 
이유를 대고, 이에 원고 측이 다시 반박한 다음 판사가
결정을 내린다. 증인 채택 결정이 나면 바로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증인을 출석시켜 진술을 들으면 된다. 
이것이 미국법이다. - P196

대륙법 국가의 법원에서 실제로 증인을 소환해서 진술을 
듣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판사는 이를 메모해서 증인의 진술 취지를서기에게 낭독해준다. 서기가 적은 데 대해서 
양측 변호인이 맞다고 동의하면 적은 것이 기록되어 
재판부에 전달된다. 기록을 받은재판부는 기록에 적힌 대로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다른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심지어 이탈리아처럼 증인신문을 진행한 판사가
재판부 중에 포함되어 있어도 결론은 같다. 
증인이 주저하고 진실되어 보이지 않다든가, 
증인의 태도가 이상해 보였어도 기록에 그사실이 
적혀 있지 않으면 기록대로 사실인정을 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영미법의 배심재판에서는 기록도 필요 없고 
사실 확정도 필요없다. 증인의 태도나 다른 정황들을 
배심원이 체크한다. 평결문에는 그걸 적을 필요조차 없다. 
보고 느낀대로 판단하면 된다. 배심원이 아닌 직업법관이 
재판할 때도 그렇다. 영미에서는 증인의 진술을 직접 들은 
법관이 판단한다. 증인의 말을 듣고 그 태도를 잘 관찰한 
다음 최종 결정을 내리도록 법이 요구하고 있다. - P197

대륙법과 영미법이 증거법과 관련해서 차이 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배심원 유무의 
문제다. 영미법의민사재판에서는 제출한 증거 가운데 일부를 배심원이 보지 못하게하는 ‘증거제한법칙‘이 존재한다. 
오랫동안 재판을 해보니까 어떤증거는 배심원에게 
보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증거의 오염 
가능성은 경고하되 증거 자체는 보게 하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았다. 신빙성이 적은 증거는 
아예 배심원에게 보여주지 않기로 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전문증거 (남에게 들은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다. 증인이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고 법정에서 그들은 바를 증언한다고 치자. 
영미에서는 변호인이 바로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이 진술은 전문증거입니다!"라고 제지한다.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을 들어서 전달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게 전문법칙이기 때문이다. 이 법칙에 따르면, 증인은 직접 법정에 나와서 
증언해야 하고, 그에 대해 상대방 변호인이 반대신문을 하고, 그 전 과정을 배심원이 보아야 한다. 그럴 기회가 없는 
전문진술은 증거에서 제외된다. 배심원이 아닌 직업법관의 재판에서는 전문진술을 받아도 되지 않느냐는 견해도 
있었지만 채택되지 않았다. 또 전문법칙에는 여러 가지 
예외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문법칙은 법칙으로 
엄연히 존재한다. 충분히 믿을 만한 증거임에도 전문이라는 이유로 증거로 쓸 수 없는 경우가 지금도 아주 많다.

대륙법에는 반대로 전문법칙이 없다. 민사에 관해서는 
배심재판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륙의 
재판에서 모든 증거가 자유롭게 법정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대륙법에도 증거제한법칙은 있다. 다만 그 기원과 
목적이 다르다. 가령 대륙법에서 말하는 증거제한법칙 
가운데 하나인 ‘증거법정주의‘는 이런 내력을 가지고 있다. - P198

증거법정주의는 중세 초결투(battle)나 신판(ordeal)에 
의한 재판말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재판제도를 도입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다. 이는 양측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검증해서 진실에 도달하는 방편이었다. 

당시에도 대륙법 판사는 그다지 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단단하게 마음을 먹어도 뇌물이나 권유, 협박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특히 돈 많고 힘센 사람의 협박에는 
판사가 견딜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판사가 그런 외부적인 
압력에 버틸 수 있도록 재판제도를 개혁했고, 그 결과 
증거법정주의, 증거제한법칙, 선서제도가 도입되었다.

이 중 먼저 증거법정주의는 증인의 수, 신분, 나이, 성별 
등을 기준으로 증인의 진술에 일정한 비중을 의무적으로 
부여하는 제도다.

가령 어떤 사실을 진실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의 
증인이 필요했고(증인 둘의 법칙‘ 등), 귀족이나 성직자, 
토지 소유자의 증언은 일반 시민, 평민, 무소유자의 
증언보다 신빙성에서 높은 점수를주었으며, 청년보다 
노인의 진술에 무게를 두고, 여자의 진술은 아예 믿지 
않거나 믿더라도 남자의 진술보다 덜 믿게 했다. 
이처럼 증거를 평가할 때 각각 완전한 증거, 절반의 증거, 
4분의 1의 증거로차이를 둔 것은 오랜 재판경험을 통해 
얻어낸 결론이었다.

증거제한법칙은 어떤 증인은 아예 증언대에 설 수 없게 한 
것이다. 재판 당사자나 그들의 친족, 이해관계인의 증언은 
기본적으로 믿을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언할 자격도 
주지 않은 것이다.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서 당사자 등이 
양심에 반하는 증언을 할 기회자체를 봉쇄하는 효과가 있다. 그들이 법정에 서면서 판사를 미리매수할 가능성도 없앨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서제도는 다음과 같이 재판이 진행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당사자 일방 A가 상대방 B와 다투고 있는 
쟁점 사실(가령돈을 빌린 적이 있는지)에 관해 선서하에 
사실대로 진술할 것을 요구한다. 만약 B가 선서를 거부하면 B에게 불리한 사실이 있었던 것으로간주된다. 

반면에 B가 선서하에 진술을 하면 B에게 유리한 사실이
있었던 것이 된다. 이때 B가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선서하에 거짓진술을 하면 B는 종교적으로도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형법상위증죄로 처벌받고, 그로 인하여 발생한 손해까지 배상할 책임이있다.

영국에서는 일찍부터 배심제도가 발달해서 대륙법에서 
이와 같이 증거의 제출 및 평가와 관련하여 만든 
증거제한법칙이 적용될여지가 없었다. 

여러 명의 배심원에게는 한 명의 판사에게 했던 것처럼 
협박하기가 쉽지 않고, 배심원이 외부 사람의 영향을 받는 
것이 제한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배심원을 
시민 가운데서 뽑았기 때문에 증거법정주의라는 이름으로 증거를 제한할 이유가 직업법관에 의한 재판보다는 훨씬 
적었다. 이해관계인을 증인으로 부르지 않고, 증인의 진술 
가운데 일부는 증거로 쓸 수 없게 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배심에 의한 재판이 사실확정에 유효한 수단이었던 점, 그리고 판사에 비해서 외부 영향을 덜 받는다는 점에서 영미의 배심제도는 대륙법의 다른 장치, 즉 증거법정주의나 선서제도보다 나은 제도라고 여겨졌다.



대륙법 세계에는 지금도 중세 시대 증거법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가령 증거법정주의는 현대 대륙법에서 추정의 법칙
(어떤 사실이 있으면 상대방이 반대로 입증하기 전까지 
사실로 추정된다는 법칙)으로 남아 있고, 몇몇 국가에서 
당사자에게는 지금도 증인자격이 주어지지 않으며,
선서제도가 공격방어 전략의 하나로 프랑스나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여전히 쓰이고 있다. 그런데 최근 대륙법이
 ‘자유심증주의‘라는새로운 증거법칙을 도입했다. 
기본적으로 능력이 부족하고, 국민들의 신뢰도가 높지 
않지만, 증거 판단을 판사에게 전적으로 맡기자는 취지에서 전향적으로 도입한 것이 바로 자유심증주의다. 판사가
자유로운 심증(마음의 확신)으로 증거를 평가해서 판결을 
하도록 하는 제도다. - P201

또 하나 대륙법의 민사소송제도에서 특이한 것은 변호사 
수임료다. 보통 미국에서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재판에서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자기 변호사에게 수임료를 낸다. 그런데 영국과 대륙법에서는 패소한 쪽이 승소한 
쪽의 수임료까지 내야 한다. 졌으니까 이긴 사람의 변호사 
비용까지 내는 것이 당연하고, 실무에서도 이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패소한자에게 너무 심한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법원이 수임료를
일정 금액으로 정한다는 점이다. 승소한 변호사는 보통 
자신이 투자한 비용 전부를 청구하지만, 법원은 조견표에 
따라 지불할 변호사 비용을 정한다. 의뢰인에게 더 많은 
돈을 받기로 약정했어도 별수 없다. 진 쪽으로부터는 
약정한 액수의 일부만 보전받고, 그 차액은 이긴 쪽 의뢰인이 직접 부담한다. 

또 대륙법은 소송 결과에 따라변호사의 금전적 이익이 
늘었다 줄었다 하는 것을 비윤리적이라고생각해서 
성공보수 약정을 금지하고 있다. 미국에서 공공연히 
성공보수를 받는 걸 보면 깜짝 놀란다. 성공보수를 받을 
자격이 있는 대룩법 변호사 자신들도 생각이 같다. 
변호사가 돈 때문에 일을 더 열심히 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것이다. - P202

원칙적으로 대륙법의 민사소송에서는 상소할 권리가 
보장된다. 이것이 또 미국법과 중요한 차이점이다. 
미국에서 상소란 1심 법원이 법적으로 잘못한 경우에만 
인정된다. 하지만 대륙법에서는 법를 문제뿐만 아니라 
사실관계를 다시 봐달라는 것도 항소 이유가된다. 

물론 사실관계를 검토할 때도 주로 1심이 봤던 기록에 
의하겠지만, 상소심에서 1심에서 내지 않았던 새로운 
증거를 제출할 수있게 하는 국가도 아주 많다. 상소법원이 
모든 증거를 다시 검토해서 사실이 무엇이고, 법적으로 
어떤 판단이 맞는지 처음부터 다시 정해도 된다. 
상소심 재판부도 판결문을 다시 쓰는데, 여기에는 법적 
쟁점뿐만 아니라 사실적 쟁점도 포함된다.

보통법(common law)에서는 배심재판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상소심에서 사실관계를 또 다시 판단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사실 1심에서조차 배심원은 어떤 사실을 발견해야 할 의무를 지는 게아니고, 당사자들의 태도나 여러 
가지 정황을 보고 평결을 내릴 뿐이다. 평결 내용을 설명할 의무도 없으며, 재판절차가 기록으로 남지도 않는다.

1심 평결문에 어떤 사실이 있다고 적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배심재판에 대해서 상소심이 다시 보겠다는 
이야기는 배심의 결정을 전부 무시하고 새로 판단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영미에서 사실에 대한 상소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반면에 대륙법에서는 사실에 대한 상소를 폭넓게 
인정할 뿐만 아니라, 법률 문제에 대한 상소를 따로 둔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파기제도나 독일의 파기환송제도가 
그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법적인 쟁점에 관하여 
상급법원이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려준다. 영미법에서는 
보통 상소라고 하면 법률 문제만을 다루기 때문에 
대륙법의 파기제도나 파기환송제도는 그와 기본적으로 
아주 비슷하다. 다만 이런 제도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적인 
경위가 조금 다르다.

우리는 제7장에서 혁명기의 이념은 법원의 법률해석권을 
전부 부정하는 데 있다고 했고, 그래서 프랑스의 파기원은 
엄밀히 말하면 법원이 아니라, 법원이 제기한 법률해석 
문제에 대하여 최종적인 유권해석을 해주던 별개의 기관이라고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프랑스와 프랑스의 
모델을 따른 국가들에서 파기원이 법원의 일부인 파기법원으로 성격이 변해갔다. 이름이 바뀌어 일반법원의 정점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임무도 당연히 법률의 정확한 해석에 
둔다. 프랑스처럼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스위스에서도 
법원은 법령의 통일된 해석을 책임지고 있고, 
이론적으로는 법원의 결정은자신이나 하급법원을 
기속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최고법원의 해석이 법원의 
해석으로 공인되고 있다. - P203

또 하나, 대륙법의 민사소송에서는 1심은 물론이고 
상소심에서도 반대의견이 없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원칙적으로 만장일치를 요구한다. 투표도 없다. 
판사가 자신이 속한 법원의 결정에 반대하는 것 자체를 
적절치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법은 모름지기 확실하거나 최소한 그렇게 보여야 하는데, 
반대의견을 적거나 따로 출간을 하게 되면 법의 확실성에 
흠이 생긴다고 믿는다. 다만 최근 들어 일부 국가에서 
헌법법원을 중심으로 반대의견과 보충의견을 적거나 
공표하기 시작한 것은 의미 있는 변화라고할 수 있다.

어떤 국가에서는 다수의견에 반대하는 판사들이 별도로 
학회지등에 논문을 출간함으로써 약한 의미의 항명을 
하는 사례가 있다. 본인들은 그것이 순전히 ‘이론적‘인 
목적이었다고 말하겠지만 동료판사와 다른 변호사는 
그것이 학문적 목적이 아니라 반대의견을 표명하기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 P204

집행 면에서도 대륙법과 영미법은 차이가 있다. 대륙법에서는 먼저, 영미법에서 말하는 ‘법정모독죄‘가 없다. 제8장에서 우리는 미국의 경우 법원이 개인에게 어떤 행위를 하라고 
명하거나 하지 말라고 명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그걸 어기면 법정모독죄, 즉법원의 명령을 어긴 죄로 징역형이나 벌금형에 처한다. 이처럼 영미법에서는 사람에 대한 
강제조치가 가능하다. 


그런데 대륙법은 그렇지 않다. 대륙법의 민사소송에서는 
법정모독죄도 없고, 사람이아닌 물건에 대한 강제조치만 
가능하다. 쉽게 말하면 상대방에 대해서 무엇을 청구하든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금전배상밖에없다. 이 차이는 
그대로 절차의 차이를 낳고, 계약의 정의 차이로귀결된다. 
가령 대륙법에서는 금전으로 배상이 가능한 것만 법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계약이라고 생각한다.

대인적 강제, 즉 사람에 대한 강제가 불가능하다는 점은 
절차 면에서 여러 가지 차이를 낳는다. 영업장부 같은 
서류나 기타 증거를내라고 하거나 재산을 조사하는 것도 
대륙법에서는 영미법만큼 단호하게 요구할 수 없다. 

민사소송에서 배상은 원칙적으로 피고 소유 재산의 경매, 
피고 물건의 인도, 주거로부터의 퇴거 같은 피고의 재산에 
대해 집행 가능한 배상만 가능하다. 아니면 불법건축물의
철거와 같이 피고가 아닌 제3자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것만 
요구할수 있다. 

민사소송에서 패소한 피고인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는 있지만 판사가 사람에 대해 형벌을 부과할 수는 없는 것이다.판사가 형사법원에 고발하는 것이 대륙법에서 아마도 
사람에 대해 할수 있는 최대한일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강제명령(amparo)‘이라고 해서, 
헌법적 권리를 침해하지 말라고 명했음에도 이를 어길 
경우 판사가 아주 예외적으로 피고를 체포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 역시 영미법에서 법정모독으로 판사가 직접 
형벌을 부과하는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와 같은 영미법과 대륙법의 차이를 약간 거리를 두고 
전체적으로 조망하면 그 바탕에 이념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영미법에서 판사는 법의 집행자이면서 도덕과 유사한 
성격을 갖는형평법의 집행자이기도 하다. 판사는 원고와 
피고의 이웃들로 구성된 배심원을 모아놓고 공동체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결과를 이끌어내고 집행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법정모독죄라는 것도 결국은피고가 
공동체의 결정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경우 피고를 처
벌하거나 피고에게 특정한 행위를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이다. 공동체 구성원인 배심원이 모인 자리에서 판사가 ‘어른‘으로서 여러 가지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반면 대륙법에서 판사는 영미법과 같은 어른은 아니다. 
판사의 결정에 반한다고 해서 당사자나 증인이 판사에게
혼난다는 생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륙법상 소송절차는 그만큼 윤리와 도덕의 색채가 옅은 
단순한 공적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차이는 손해배상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영미법에서 고의또는 중과실 책임이 있는 피고에게 형벌과 유사한 
징벌적 손해배상이나 피해 규모 이상의 삼배손해배상을 
부과하는 일이 흔히 있다.

하지만 대륙법에서는 이런 식의 배상이 최소한 민사에서는 있을 수없다. 민사와 형사의 차이가 분명하기 때문에 고의나 중과실은 형사가 다룰 문제지 민사가 다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민사에서 원고가 받을 수 있는 것은 정확하게 손해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피고가 도덕적으로 위반되는 행위를 했다고 해서 
공동체가 그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형벌은 행위 시 
법률에 따라서 범죄로 인정되는행위를 한 때에만 부과한다‘는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난다. 대륙법에서 형벌은 법에 
정한 것만 부과할 수 있다. 판사가 원한다고 할 수있는 일이 아니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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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권리는 단순히 추상적 법으로부터 생명과 힘을 
얻을뿐 아니라, 추상적인 법에 생명과 힘을 되돌려주기도 
한다. 법의 본질은 실제로 실행된다는 점에 있다. 
실행되지 않는 법규범, 실행되지 못하게 된 법규범은 
더 이상 법규범으로 불릴 자격이 없다. 그것은 법이라고 
하는 기계장치 속에서 작동하지 않게 된 나사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를 빼내버려도 아무런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실행을 수반하지 않는 법규범은 그렇게 불럴 가치가 
없다고 하는 이 명제는 어떤 법 분야에서도, 즉 헌법에서도 형사법에서도 민사법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 P94

로마법은 법률이 행해지지 않고 있는 경우, 그 폐지의
 원인을 통해 이 명제에 대해 명시적인 구속력을 부여했다. 이에 대응해 로마법에서는 구체적인 권리도 계속적으로 
불행사하면 소멸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공법과 
형법의 법적 실행이 국가기관의의무가 되는 것에 반해, 
사법의 사적 실행은 사인(私人)의 권리가 되었다. 
즉 사인의 발의와 자주성에 맡겨진다.

전자에서 법률은 국가의 관청과 관리가 자기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실행되지만, 후자에서 법률은 사인이 
자기의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실행된다. 사인이 어떤 
사정 때문에(즉 자신이 권리를 갖고있음을 모르거나 
안일하거나 비겁해서)언제까지라도 권리주장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면 법규는 실제로 위축된다.

공법상의 법규가 어떻게 실행되는가 하는 문제는 관리가 
어느정도로 의무에 충실한가에 달려 있고, 사법상의 법규가 어떻게 실행되는가 하는 문제는 권리자로 하여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게하는 동기의 강력함, 즉 그의 이익과 
권리감각의 정도에 달려 있다.

이러한 동기가 기능하지 않는 경우, 즉 권리감각이 둔해지고, 이익문제는 안일해지고 분쟁을 기피하게 만들며, 
소송의 두려움을 이겨낼 만큼 강력하게 되지 못한 경우, 
결국 그 법규는 적용되지 못하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왜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인가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권리자 자신을 제외한다면, 누구도 곤란한 사람은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대해 앞서 언급한 전선 이탈의 
예를 다시 사용하고자한다. 수천 명의 병사가 싸워야 하는 
곳에서 한 사람이 도망을 쳐도다른 사람들은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그러나 천 명 가운데 백 명이전선을 이탈한다면, 
충실하게 자기 자리를 계속 지킨 병사들의 상황은 점차 
악화되어 자신들만으로 모든 전선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그 좁은 범위 안에서 법 
일반을방위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그의 행동의 이익과 
결과는 그 개인에게 한정되지 않고, 훨씬 더 넓은 범위에 
미친다. 이러한 행동과 결합되는 공공의 이익은 단순히 
법률의 권위와 존엄이 유지된다는이념적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념적인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이익, 즉 누구나 나름 관심을 갖는, 확실한 
사회생활 질서가 보장되고 유지되는 이익이다. - P96

국가공동체가 개개인에게 생명과 신체를 걸고 외적과 
싸우라고 명령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즉 누구나 외적에 
대해 공동의 이익을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한다면, 
같은 말을 국내에서도 할 수 있지않은가? 

외부의 적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부의 적에 대해서도
모든 사려 깊은 사람과 용기 있는 사람이 결집해 단결해야만 하지 않는가? 

외적과의 투쟁 시에 비겁한 전선 이탈이 공동의 임무에 
대한 배신이라고 한다면, 국내의 마찬가지 행동에 대해서도 같은 비난을 해야 하지 않는가?

나라에서 법과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재판관이 
언제나재판관석에서 기다리거나, 경찰이 형사를 파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누구나 각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자의와 무법이라고 하는 히드라의 머리가 그 모습을 
나타낼 때, 누구나 그것을 베어야 할 사명과 의무가 있다. 
권리라는 혜택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법률의 힘과 위신을 
유지하기 위해 공헌해야 한다. 요약하자면 누구나 사회의 
이익을 위해 권리를 주장하도록 태어난 투사다. - P99

이러한 나의 견해에 따라, 자기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개인의 사명이 얼마나 고귀한 것이 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종래의 이론이 법률에 대해 전적으로 일방적이고 수동적일 뿐인 태도에 만족하라고 설명해온 것에 비해, 나는 여기서 
상호관계, 즉 권리자가 법률 서비스를 받는 대신 그것에 
대해 완전한 반응을 하는 관계에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커다란 국민적 임무에 대한 협력을 의미한다.
즉 국민적 임무가 개별 권리자에게 참여의 사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권리자 자신이 협력할 생각인지의 여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윤리적 사회질서가 위대하고 숭고한 이유는,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의 봉사만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 명령을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무의식중에 협력할 수 있도록 효과적인 수단을 충분히 갖는 데 
있기 때문이다. - P99

마침내 우리는 권리를 위한 투쟁의 이상적인 정점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익이라고 하는 낮은 동기로부터 
시작해 인격의 윤리적 자기보존이라고 하는 더 높은 
관점에까지 이르렀고, 마침내 국가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법과 권리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개인의
협력이라고 하는 최고의 지점에 도달했다.

나의 권리가 침해되고 부인되면 법 일반이 침해되고 
부인되며, 나의 권리가 방위되고 주장되고 회복되면 
법 일반이 방위고 주장되며 회복된다. 이를 통해 자기 
권리를 위한 권리주체의 투쟁은얼마나 큰 의의를 확보하는 것인가! 권리에 대한 이러한 보편성으로 인해 이념적인 
관심의 높이에서 바라볼 때 전적으로 개인적인 영역, 
즉 무지한 무리의 눈에는 권리분쟁의 유일한 원동력으로 
비치는 개인적인 이익과 목적과 정열의 들판은 얼마나 
낮은 곳에 있는 것인가!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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