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국가와 법치국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독일의 헌법학자 콘라드 헤세 (Konrad Hesse)교수는 "국가의 시대가 이제 끝나가고 있다"는 말로써 당대의 헌법학에서 쟁점이 되었던 국가와 사회의 구별 여부에 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으려 했다.‘ ‘국가와 사회‘ 양자 구별을 주장하는 이론진영에 서 있는 뵈켄푀르데(Böckenförde) 교수에 의하면 국가는 기능적으로 사회와 관련을맺고 있지만 사회로부터 독립한 조직된 작용통일체인 반면, 사회는 스스로 규율할 수 없는 작용통일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사회는 조직된 기관으로서 국가, 개인적 자유의 보장자로서의 국가, 외부조종과 타율적 조종의 요소로서의 국가를 필요로 하며, 국가와 사회의 구별이 개인적 자유의 기본조건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해 헤세(Hesse) 교수는 개인의 자유 보장을위하여 국가와 사회를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은 양자를 동일시해야 한다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위험성을 내포한다고 본다. 현대국가와 현대사회의 문제는 양자동일시 또는 양자구별 같이 택일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국가와 사회의 문제는 양자를 국가의 과제, 국가의 작용, 사회적 행위에 대한 국가의 영향과 질서형성 등의 측면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정서하는가의 문제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 본래의 문제는 헌법과 법률에 의한 국가와 사회의 구체적이고 세밀한 정서에 있다고 한다. 요체가 되는 것은 결국 어떻게 양자를 적당한 정도로 분리하고 또 결합시킬 것인가에 귀착된다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는 국가와 사회 양자를 분리하거나 통일시킴으로써만 실효성 있게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적 침해뿐만 아니라 사회적 침해로부터도 보호될 필요가 있다. 자유롭지 못한 사회로부터 자유로운 국가가 생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국가는 국가를 지탱하고 또 방어하기도 해 주는 사회적 세력에 의존하고 있는 반면, 사회의 발전 또한 국가의 체제와 기능 및 그 한계와도 밀접한 상관관계 속에 놓여있는 것이 사실이다. 국가를 유지해 주는 사회적 세력들에 의하여 버림받은 국가는 행정부와 사법부가 제대로 작동하더라도 결국 자유의 파괴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세기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 구체제 해체기의 혼란 속에서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지난 세기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국가질서와 법질서에서최고의 규범으로 새롭게 등장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저질러진 인간모멸의 역사적 사실을 딛고 출범한 신생국가들의헌법뿐만 아니라 유엔헌장과 세계인권선언에서 천명된 최고의 가치는 바로 인간의 존엄이었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짓밟고 인간존재에게서 인간성을 빼앗고 유린하며 심지어 말살하려고 하는 국가체제가 바로 불법국가, 폭력국가, 전체주의국가, 권위주의국가, 독재국가라고 한다면 법치국가, 민주국가, 자유국가, 안전국가, 사회국가는 바로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이념으로 고백하고 그에 경도되고 그의 실현에 지향된 국가인 것이다.
전자에 속하는 불법국가를 국가라는 이름으로 지칭하는 데 대해서는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헌법적인 의미에서 국가란 도무지 불법이나악을 저지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정법상 국가배상책임의 전제가 되는 불법행위는 원칙적으로 국가기능을 수행하는 공무원 개인의 불법행위를 의미하는 것이지, 국가체제가 총체적으로 또한 체계적인 불법을 자행하는 경우와 구별되기 때문이다.
국가가 변질되어 강도 집단처럼 체계적인 불법을 자행하는 경우는 법적인 의미의 정상국가가 아니라국가의 탈을 쓴 레비아탄(Leviathan)에 불과한 것이다. 토마스 홉스의 말대로 그것은 사실상으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곧 죽어야 할 신‘(sterblicher Gott)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법치국가는 철저히 헌법과 법에 기초하여 규범의 정향에 스스로 복종하고 따르는 국가를 지칭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열쇠는 바로 헌법질서를 포함한 전체 법질서의 정향규범적 지시이다.
오늘날 모든 법질서가 지향하는 인간의 존엄성은 헌법상의 기본권 조항과 여타의 인권 목록 가운데서 최고의 인권으로서 자리매김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이 조건은 인간이냐 비인간이냐 하는 근본적인 상황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의 공존질서를 깨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행해지는 크고 작은 형사범죄에 의해서는 직접 침해되지 않는다. 단지 간접적인 침해가 일어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는 원칙적으로 피해자의 정당방위나 긴급피난의 가능성이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긴급구조를 요청할 수 있는 가능성도 원칙적으로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개인이나 집단이 인종적 이데올로기적, 문화적인 이유로 다른 집단으로부터 차별대우를 받고 배제당하거나 고문이나 학대를 당하면서 스스로 방어할 수도 없고, 외부세계로부터 구조를 기대할 수도 없는 한계상황하에서 시달리고 있다면, 그 상황은 인간이 인간성을 일방적으로 유린당하여 사실상 단순한 물건이나 수단으로 전락한 것과같은 참담한 상황인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최고의 근본규범은 바로 이런 한계상황에서 직접 침해당하고 있는 것이다.
법치국가는 이런 비극적인 한계상황을 예방하고, 인간이 정말 인간다움을 실현할 수 있는 직접 · 간접의 조건들을 마련하고 또 그것을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법치국가는 법공동체 내에서 이 임무를 이행하기 위한 공조의 중심체로서 필요할 경우 최종적이고도 최강의 권력을 투입하거나 행사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필요불가결한 조건으로 개인과 사회의 자유와 안전을 들 수 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는 개인의 삶에서나 사회생활 가운데서 자유와 안전은 다양한 측면에서 서로 얽히고 충돌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존엄성의 주체인 인간은 개인이면서 동시에 타인과 공존하는 사회적 존재이므로 개인의 자유와 안전 및 사회의 자유와 안전이 서로 충돌하여 어느 것을 우선할지 불분명한 상황에서는 원칙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안전에 우선권을 두어야 한다. 이것이 모든 현대헌법이 기초로 삼고 있는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대강령이다.
더 나아가 법치국가의 법질서 내에서 자유와 안전이 서로 충돌하는 상황에서는 어느 것을 우선해야 할 것인가? 오늘날과 같이 사회체계의복잡성이 상존하는 상황 가운데서는 양자택일이 문제의 해결책이 되는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유냐 안전이냐 하는 양자택일보다는 적정한 자유와 적정한 안전 사이의 실천적 조화를 추구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 실현에 어느 것이 더 본질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에 따라 양자의 비중을 저울질할 수 있는 원칙적인 방도를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유는 인간존엄성을 실현하는 삶의 발전조건인 반면, 안전은 그것을 유지하는 보전조건이다. 자유는 인간의 윤리적인 자기발전의 조건인 반면, 안전은 인간의 윤리적인 자기보전의 조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윤리적인 자기보전의 조건은 인간의 윤리적인 자기발전조건의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이렇게 보면 안전은 자유라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고, 자유는 인간의 존엄이라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인 셈이다. 따라서 자유는 인간의 존엄이라는 최고의 법 가치에 안전보다 실제 더 가까운 의미 연관성을 지님을 알 수 있다. 왜냐, 인간의 존엄성은 개념상 "자유를 통해 활력을 얻게 되고 동시에 자유를 더욱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존엄을 위한 투쟁의 동인은 제1차적으로자유의 정신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법치국가는 인간의 존엄성 실현을 위한 목적 합리적 가치 합리적 관점으로부터 안전보다 자유에 원칙적인 우위를 부여한다고 말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