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인 권리는 단순히 추상적 법으로부터 생명과 힘을 얻을뿐 아니라, 추상적인 법에 생명과 힘을 되돌려주기도 한다. 법의 본질은 실제로 실행된다는 점에 있다. 실행되지 않는 법규범, 실행되지 못하게 된 법규범은 더 이상 법규범으로 불릴 자격이 없다. 그것은 법이라고 하는 기계장치 속에서 작동하지 않게 된 나사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를 빼내버려도 아무런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실행을 수반하지 않는 법규범은 그렇게 불럴 가치가 없다고 하는 이 명제는 어떤 법 분야에서도, 즉 헌법에서도 형사법에서도 민사법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 P94
로마법은 법률이 행해지지 않고 있는 경우, 그 폐지의 원인을 통해 이 명제에 대해 명시적인 구속력을 부여했다. 이에 대응해 로마법에서는 구체적인 권리도 계속적으로 불행사하면 소멸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공법과 형법의 법적 실행이 국가기관의의무가 되는 것에 반해, 사법의 사적 실행은 사인(私人)의 권리가 되었다. 즉 사인의 발의와 자주성에 맡겨진다.
전자에서 법률은 국가의 관청과 관리가 자기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실행되지만, 후자에서 법률은 사인이 자기의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실행된다. 사인이 어떤 사정 때문에(즉 자신이 권리를 갖고있음을 모르거나 안일하거나 비겁해서)언제까지라도 권리주장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면 법규는 실제로 위축된다.
공법상의 법규가 어떻게 실행되는가 하는 문제는 관리가 어느정도로 의무에 충실한가에 달려 있고, 사법상의 법규가 어떻게 실행되는가 하는 문제는 권리자로 하여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게하는 동기의 강력함, 즉 그의 이익과 권리감각의 정도에 달려 있다.
이러한 동기가 기능하지 않는 경우, 즉 권리감각이 둔해지고, 이익문제는 안일해지고 분쟁을 기피하게 만들며, 소송의 두려움을 이겨낼 만큼 강력하게 되지 못한 경우, 결국 그 법규는 적용되지 못하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왜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인가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권리자 자신을 제외한다면, 누구도 곤란한 사람은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대해 앞서 언급한 전선 이탈의 예를 다시 사용하고자한다. 수천 명의 병사가 싸워야 하는 곳에서 한 사람이 도망을 쳐도다른 사람들은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그러나 천 명 가운데 백 명이전선을 이탈한다면, 충실하게 자기 자리를 계속 지킨 병사들의 상황은 점차 악화되어 자신들만으로 모든 전선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그 좁은 범위 안에서 법 일반을방위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그의 행동의 이익과 결과는 그 개인에게 한정되지 않고, 훨씬 더 넓은 범위에 미친다. 이러한 행동과 결합되는 공공의 이익은 단순히 법률의 권위와 존엄이 유지된다는이념적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념적인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이익, 즉 누구나 나름 관심을 갖는, 확실한 사회생활 질서가 보장되고 유지되는 이익이다. - P96
국가공동체가 개개인에게 생명과 신체를 걸고 외적과 싸우라고 명령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즉 누구나 외적에 대해 공동의 이익을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한다면, 같은 말을 국내에서도 할 수 있지않은가?
외부의 적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부의 적에 대해서도 모든 사려 깊은 사람과 용기 있는 사람이 결집해 단결해야만 하지 않는가?
외적과의 투쟁 시에 비겁한 전선 이탈이 공동의 임무에 대한 배신이라고 한다면, 국내의 마찬가지 행동에 대해서도 같은 비난을 해야 하지 않는가?
나라에서 법과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재판관이 언제나재판관석에서 기다리거나, 경찰이 형사를 파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누구나 각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자의와 무법이라고 하는 히드라의 머리가 그 모습을 나타낼 때, 누구나 그것을 베어야 할 사명과 의무가 있다. 권리라는 혜택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법률의 힘과 위신을 유지하기 위해 공헌해야 한다. 요약하자면 누구나 사회의 이익을 위해 권리를 주장하도록 태어난 투사다. - P99
이러한 나의 견해에 따라, 자기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개인의 사명이 얼마나 고귀한 것이 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종래의 이론이 법률에 대해 전적으로 일방적이고 수동적일 뿐인 태도에 만족하라고 설명해온 것에 비해, 나는 여기서 상호관계, 즉 권리자가 법률 서비스를 받는 대신 그것에 대해 완전한 반응을 하는 관계에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커다란 국민적 임무에 대한 협력을 의미한다. 즉 국민적 임무가 개별 권리자에게 참여의 사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권리자 자신이 협력할 생각인지의 여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윤리적 사회질서가 위대하고 숭고한 이유는,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의 봉사만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 명령을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무의식중에 협력할 수 있도록 효과적인 수단을 충분히 갖는 데 있기 때문이다. - P99
마침내 우리는 권리를 위한 투쟁의 이상적인 정점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익이라고 하는 낮은 동기로부터 시작해 인격의 윤리적 자기보존이라고 하는 더 높은 관점에까지 이르렀고, 마침내 국가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법과 권리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개인의 협력이라고 하는 최고의 지점에 도달했다.
나의 권리가 침해되고 부인되면 법 일반이 침해되고 부인되며, 나의 권리가 방위되고 주장되고 회복되면 법 일반이 방위고 주장되며 회복된다. 이를 통해 자기 권리를 위한 권리주체의 투쟁은얼마나 큰 의의를 확보하는 것인가! 권리에 대한 이러한 보편성으로 인해 이념적인 관심의 높이에서 바라볼 때 전적으로 개인적인 영역, 즉 무지한 무리의 눈에는 권리분쟁의 유일한 원동력으로 비치는 개인적인 이익과 목적과 정열의 들판은 얼마나 낮은 곳에 있는 것인가!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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