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사

강영안 박사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전 미국 칼빈신학교 철학신학과 교수

윤리학은 철학의 3대 영역 속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영역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윤리학은 개인의 경험 
세계관 종교와 같은 내부적 요소는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역사 전통과 같은 외부적 요소에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또한, 최근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윤리학은 더욱 혼란스러운 카오스의 
상태가 되었다. 그러므로 윤리학이 보다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윤리학이 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기준을 
필요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양성모 교수는 다양하고 복잡한 윤리적 
질문들을 다룰 때에 종교개가와 같은 마음으로 그러한 
절대적인 기준을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 두고 
논의를진행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단지 성경이 
기독교의 경전이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성경이 윤리의 
절대적인 기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성경의 무오성과 절대성을 굳게 붙잡고 복잡한 
윤리적 이슈를 성경 안으로끌어들여와 성경의 텍스트가 
무엇을 암시하며 무엇을 지향하는지 정확히 보여 준다.
게다가 사변적이며 난해한 용어 대신 논리적이며 쉬운 
언어로 풀어 설명해 준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그러한 암시와 지향성을 보고, 또한 
이해하기 쉬운 설명을 들으면서 무릎을 탁 치게 되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또한, 컨텍스트의 문제를 텍스트와
연결시켜 기독교 윤리의 적실성과 우월성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이 책에서 많은 유익합과 통찰력을 발견할 것이다.

이렇게 쉬운 언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논리, 논증의 
유기적 상관성, 호기심을불러 일으키는 수사법, 적당한 
분량과 난이도, 핵심을 꿰뚫는 통찰력 등은 이 책의 
가치를 높여 준다. 윤리적으로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하는모든 이에게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윤리의 전제는 무엇인가요?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화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요 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말함인지 알리라 - P22

윤리학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윤리의 전제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윤리학의 성립 조건이 
먼저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윤리학의 존재 
이유는 사람들에게 윤리적인 삶을 사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우슈비츠 학살과 같은 예를 들면서 
인간에게 과연 윤리나 도덕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합니다. 아우슈비츠수용소는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을 집단 학살하기 위해 만들었던 강제 수용소입니다.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들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나치즘에 
반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1945년 기준으로 유럽 전체 
유대인의 80퍼센트에 해당하는 약 600만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나치는 학살 피해자들을 가축 
수송 차량에 태워 이동시키고, 가축과 같이 내려지면 샤워실에 들어가 옷을 벗게 하고 독가스로 처참히 살해했습니다.

이러한 참혹한 장소를 가보게 되면 과연 인간에게 윤리나 
도덕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에게 윤리나 도덕이 존재할까요?
존재한다면 윤리의 전제는 무엇일까요?

윤리의 첫 번째 전제는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도덕적 인간은 도덕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얼마나 도덕적이며 윤리적일까요?
위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예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비도덕적이며 잔인한가를 보여 주는 극명한 사례입니다. 
이러한 예는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에게 재판해 달라고 찾아온 친자확인소송입니다(왕상 3:16-28). 이 소송에서 갓난아기의 가짜 어머니는 솔로몬이 갓난아기를 반씩 갈라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에게 주라고 
했을 때 그렇게 해 달라고주장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이 가짜 어머니의 반응을 보면 인간에게 윤리나도덕이 존재할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라인홀드 니버 (Reinhold Nicbuhr, 1892~1971)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가 주는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은 1932년도에 출판된 책으로 그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30년대는 정치적으로 근대 역사에서 가장 파멸적인 
전쟁 중 하나였던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폭력과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시기였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 
1929년도의 증시 대폭락으로 촉발된 세계대공황으로 
고통받던 시기였습니다.그러한 시대에 니버는 국가를 
위해서라면 참혹한 살상도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권장되고, 산업사회에서 비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살아남는 도덕적 괴리 현상을 목격하였습니다. 

즉, 개인이 아무리 타인의 이익을이해하고 존중하는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타인의 이익을 이해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집단이기주의(collective egoism) 사회에서는 군중심리에의한 충동을 통제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결국,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인 사람들도 비도덕적인 사회에 속하면 집단적 이기주의자로 변모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비도덕적이라고 여겨질 만한 본성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로마서 3:10-12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3:10-12]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또한, 로마서 3:23 을 보면 이렇게 선언합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런 의미에서 성선설과 성악설 중 하나를 택하라면 
성악설이 좀 더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은 도덕적 인간이어야 한다는 윤리의 
전제조건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도덕적 인간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위의 성경 구절들은 그러한 도덕적 인간들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를 보여 주는 것이지, 우리 인간이 
도덕적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보여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윤리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도덕적 인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주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선악과는 금단의 열매입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러한 명령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명령이자 생명과 죽음을 가져오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도덕적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장치이자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자신의 
형상(image)대로 창조하셨습니다(창 1:27). 
그것은 우리 인간이 도덕적인 존재로 지음받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윤리학의 두 번째 전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윤리학의 입장에서 자유의지의 존재는 
너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윤리학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철학적으로자유의지는 "반대선택의 능력"이라는 말로 
정의됩니다. 자유의지는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며, 특히, 반대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자유의지와 관련하여 인간이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가지고 있는지,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는지에 대해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 논란은 네 가지의 종류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정론, 자유의지론, 양립가능론, 양립 
불가능론입니다.

이런 논란은 특히, 결정론에 있어서 격화됩니다. 왜냐하면, 하이퍼칼비니즘(Hyper-Calvinism)을 포함한 결정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자유의지의 문제는 성가신 문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정론자들은 "일어날 일은무슨 일이든 일어날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갤른 스트로손(Galen Strawson, 1952~현재)과 같은 
영국의 분석철학자는 자유의지는 단지 우발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급진적인 선험적 논증을 
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결정론자들은 성경을 읽어도 그런 방식으로 읽습니다. 

인류의 시조가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큰그림 
속에서 결정된 것이며, 그 결과 인류 구속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가 진행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에베소서 1:4-5 의 말씀은 그러한 결정론을 지지하는 구절이라고 믿습니다.

[엡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러나 우리 인류의 시조가 선악과를 따먹는 비윤리적인 
행위를 하도록결정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 인류의 
시조의 잘못을 하나님께로 돌리는악한 시도입니다. 또한, 
그것이 결정론을 지지하는 증거로 사용될 수는 없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자유의지론이 맞다고 하면 인간의 구원 
문제를 해결하기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면 그러한 공로가 인간에게 조금이나마 돌려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변증학적인 측면에서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은 양립이 가능하며, 
양립 가능이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윤리학적인 측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셨을 때 윤리적으로 
악한 결정을 하도록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그렇게 
만드셨다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전선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류의 시조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그들 자신의 자유의지의 행사의 결과입니다. 

즉, 그들에게는 반대선택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뒤집어서 이야기하자면, 인간이 비윤리적 행위를 하도록 
결정되었다면 인간에게는 반대선택의 능력이 없습니다.

이는 윤리적 결정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결정론이 맞다고 하면 인간에게는 반대선택의 
능력이 없으며, 결국 인간은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로봇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거나,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놓여 있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을 도덕적인 간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훼손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성경 구절은 여호수아 24:15의 말씀입니다.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제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이 말씀은 여호수아가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신앙을 선택하겠다는의지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결정론을 옹호하는 성경 구절 또한, 
많습니다.
잠언 16:9 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잠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드라마틱한 회심을 보면 
하나님의 의지가 얼마나 강력한가를 알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반대선택의 능력이 있지만, 그것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이끄실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이 윤리학적으로도 양립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윤리학의 세 번째 전제는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민주국가에서는 윤리나 도덕을 
결정하는 최종적인 권위로 법률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윤리적인지 아닌지를 법에 의존하고 법의 판단을 
받습니다.

예를 들면, 대체적으로 의도적인 살인자에게는 법정 최고형이 내려집니다.그것은 의도적인 살인만큼 나쁜 것은 없다는 것을 법률이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법률이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로 기능합니다.

하지만 법률의 그러한 기능이 법률을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법률이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에게는 양심과 도덕과 같은 것이 있어서 윤리를 
판단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양심과 도덕이 자연법의 
관점에서 규범의 역할을 한다고생각합니다. 법률은 그러한 규범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양심은 
개인의 도덕적 기준과 규범 가치로, 법률은 국가적인 
도덕적 기준과 규범 가치라고 말합니다.즉, 양심이 옳고 
그름에 대한 내면적 인식이라고 한다면 법률은 개인의 
양심과 도덕 가치에 대한 집단적인 합의입니다.
하지만 법률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법률을 만드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논리에 의하면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를 사람에게 두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저마다의 판단 기준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심도 선한양심이 있는 반면, 악한 
양심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어느 한 행동이 어떤 
공동체에서는 죄가 되지 않는 반면, 다른 공동체에서는 
큰 죄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공동체에서는 성폭행을 당한 여성은 자살해야 합니다. 자살하지 않을 
경우 그 여성을 죽이는 명예살인을 죄로 보지 않지만, 
다른 공동체에서는 그와 같은 명예살인을 극악무도한 
죄로 봅니다. 그러므로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를 사람에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가 존재한다는 것은 윤리의 전제조건입니다. 왜냐하면, 비윤리적인 행위에 대한 처벌이 없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고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덕 법칙을 굳이 지켜야 할 근거가 사라집니다.

성경에서는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범죄하는그 영혼은 죽을지라"(겔 18:20)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비윤리적인 행위에대한 처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러한 점으로부터 우리는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과 그 권위는 
절대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 윤리의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는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를 상대주의적인 사람에게 두지않고, 절대적이며 전선하신 하나님께 
두기 때문입니다.

윤리학을 시작하기에 앞서 윤리학의 전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왜냐하면,아우슈비츠 학살과 같은 예를 들면서 인간에게 
과연 윤리나 도덕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윤리학은 인간은 도덕적인 인간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전제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도덕적으로 
창조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냉소주의, 허무주의, 감상주의와 같은 것은 잘못된 윤리관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결정론과 이를 추종하는 범신론은 죄를 전가시키는 
사악한 윤리관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왜나하면, 도덕의 최종적인 권위를 
무시하는 윤리관은 자신의 죄(비윤리)를 합리화시키는 
사악한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윤리의 전제조건을 만족하지 않는 윤리는 윤리로서 기능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윤리의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는데, 기독교 윤리는 이러한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윤리관이기 때문입니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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