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에 대한 찬반 양론의 주장을 비교하며
고찰해볼 수 있습니다.












공리주의의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은 그것의 이론적 토대를 발전시키는 데 머무르지 않고 행복을 증진하고 고통을 완화하는 실천적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대다수 사람들이 인간 존재의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조건이라고 받아들이는실천 관행들을 비판했다. 이런 도전들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벤담이 1770년대부터 1820년대까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서성적 자유를 옹호하는 수필과 소논문들을 썼다는 것은 비교적덜 알려져 있다. 그 당시는 새뮤얼 존슨 박사와 같이 대중들의칭송을 받는 사상가들이 비정상적인 성교의 ‘악‘을 방지하기위하여 엄격한 법률의 지속적 집행‘ 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벤담은 성의 쾌락은 부자와 가난한 자가 똑같이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비정상적인 것이라고지적하면서, 성적 쾌락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맹목적 편견‘에서 비롯된 제약들을 폐지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성적 취향에서의 차이는 그것이 해악을 야기한다는 것이 입증되는 경우에만 처벌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 처벌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성적 취향의 차이가 해악을 낳는다는 증거는 부족하다.
다양한 저술에서 벤담은 동성애를 범죄시하는 전통적 논증들을 제시하고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논박하였다. 그는 이런 저술들을 출판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그의 사후에라도출판이 가능해지는 시대가 오기를 고대하였다. 그러나 성에 관한 서구인의 관념이 벤담의 사상을 따라잡는 데는 한 세기 반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야만 했다.

우리의 직관적인 윤리적 판단은 그것들이 진화해 온 환경과는 다른 환경에 적용될 때 특별히 엄밀한 검사를 받을 필요가있다. 그러나 환경이 변화하지 않았을 때조차도 우리의 자동적 반응들은 종종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 결국 진화는 도덕적 지식이나 가능한 최고 수준의 행복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생식 적응도(reproductive fitness)를 선택한다. 자위,구강성교, 동성애처럼 생식과 무관한 성행위를 제재하는 집단은 그러한 태도를 가지지 않는 다른 집단보다 더 높은 출산율과 더 빠른 성장을 보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제재들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된다는 뜻은 아니다.

쾌락주의를 되살리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온 옥스퍼드 대학교의 현대 철학자인 로저 크리스프 (Roger Crisp)는 [돼지보다 계통수의 훨씬 아래까지 내려가서 다음과 같이 상상해 볼 것을요구한다. 매우 제한적 쾌락을 무한히 경험하는 불멸의 굴의삶과 77세까지밖에 못 살지만 다양한 강도의 다채로운 쾌락을 경험하는 작곡가 하이든(Joseph Haydn)의 삶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굴의 삶은 무한하기 때문에 하이든의 유한한 삶보다 더 큰 쾌락의 총합을 가져온다. 그러나 당신은 기꺼이 굴의 삶을 선택할 것인가?
‘돼지의 철학‘ 반론에 대한 밀의 대응은 쾌락을 평가함에 있어서 양뿐만 아니라 질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밀의 논의에 의하면, 만약 두 종류의 쾌락을 경험한 모든 또는 거의 모든 사람이 한 종류의 쾌락의 양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그것을 위해서 다른 종류의 쾌락을 포기하지 않을 만큼 그 다른 쾌락을 결정적으로 선호한다면, 그 쾌락은 질적으로 우월하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더 낫고, 만족한 바보보다는 불단족한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고 주장한다.

만약 우리가 지금 당신에게 당신은 이미 경험 기계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당신이 이 책을 읽고 있다는 믿음도 환상이고당신의 가족과 당신의 친구들을 포함해서 당신이 기억할 수있는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경험 기계 밖으로 나오길 원하는가? 일련의 실험들은 대다수 사람들이 지금의 삶이 실재하는 현실이건 컴퓨터로 프로그램 된 환상이건, 지금 살고 있는 삶에서 이탈하는 것을 꺼린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가 경험 기계 안에 들어가기를 꺼려 하는 것은우리가 내리는 많은 다른 결정들과 마찬가지로 ‘현상유지 편향(status quobias)‘에 영향 받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변화는 부가적인 노력을 요구하고 또 위험이 따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세계를 떠나서 경험 기계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것은 놀랄일이 아니다. 특히 그 기계가 완전하게 작동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경험 기계 안에 있다면, 우리는 아마 그 기계를 떠나는 것이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공리주의는 우리에게 최선의 결과를 낳는 것을 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최선의 결과‘란 불행을 제하고 난 가능한최대의 행복 또는 고통을 제하고 난 가능한 최대의 쾌락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심리 상태의 양을 측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단지 한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춘다고할지라도, 가령 나 자신만을 생각해 보더라도, 나는 오늘 나의 행복을 측정할 수 없다. 그리고 작년의 같은 날보다 오늘이 2.6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공리의 개인 간 비교는 훨씬 더 어렵다. 다음 주말에 나는 배우자와 함께 도보 여행을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둘 모두에게 즐거운 하루가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건강 유지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니면 나는 외로운 나의 할머니를 방문하여 그녀를 즐겁게 해 드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둘 중에 공리를 가장 많이 증가시키는 것은 어느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한계 공리 체감의 법칙은 평등한 사회가 불평등한 사회보다더 좋다는 널리 퍼져 있는 신념을 지지해 준다. 우리는 수입의 분배가 극히 불평등한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공리주의자들은 생산성의 감소가 초래하는 공리의 손실이 수입의재분배에서 얻는 이득을 능가할 정도로 전체 생산성을 감소시키지 않는 한에서 불평등을 감소시키는 조치들을 지지한다.
이 점에서 공리주의자들과 평등주의자들은 현재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관해서 견해를 같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등주의자들은 더 큰 평등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적 이유가 평등을 결과와 무관하게 본래적 가치를 가지는것으로 보지 않음으로써 평등에 적합한 비중을 부여하지 못한다고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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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이론가들은 포스트모더니즘 분위기를 백분 활용하면서다원주의와 도덕적 허무주의 그리고 무신론과 좌파 이데올로기에적극 편승하여, 동성애가 정상으로부터 일탈이나 비행 또는 비난받을 만한 불법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즉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적기호의 차이일 뿐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선택되고 결정된 부도덕한 변태행위가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난 다른 성적 지향일 뿐이라고 강변한다. 더욱이 그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닌 바에는 이성애와 비교하여 
차별대우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던 사상가로 널리 추앙받는 미셀 푸코는 그 자신이 동성애자였던 만큼, 
동성애가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사회 제도와 생명 권력과 생명정치의 문제라고 규정했다. 다시 말해서 동성애자가 비정상인과 같이 취급되는 것은 그들이 변태성욕자 
또는 정신병자이기 때문이아니라 단지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며 출산을전제로 
한 가족제도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그대로 추종한다면, 전통적 가치관이나 
기본적인 윤리, 결혼과 가족제도에 관한 기존의 관념들은 뒤죽박죽이 될 것이고, 인간의 성관계는 동물과 다른
4계절 전천 후 성생활에서뿐만 아니라 동물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성적 지향성을 가진 종으로
특징지어질 것이다.

더 나아가 동성애와 포스트모더니즘이 연관된 증거로 이른바성 정치학을 들 수 있다. 이 분야의 이론가 제프리 웍스(JeffreyWeeks)는 성 정치를 성차와 성적 분화의 현재와 미래를 둘러싼 투쟁"이라고 정의한다. 이 용어는 1970년 초기페미니즘 이론가인 Kate Millett의 성정치 (Sexual Politics) 에서 유래한 것으로사회구조를 성차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도구였으나, 그 후 성 정치운동의 투쟁도구로 확산되었다. 한국에서 이 운동을 전개한 서동진은 "누가 성 정치학을 두려워하랴!"라는 글에서 ‘이성애 중심, 성인 중심, 생식 중심의 성‘을 지배적인 성의 3대 이데올로기로 규정하고, 이것을 정상적, 보편적인 것으로 단정하고 다른 형태의 성을변태적, 퇴폐적인 것으로 단정하는 기존관념을 분쇄하는 데 성 정치학이 나서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성을 사회적 억압도구를 읽는 열쇠로 본다.

어느새 우리 사회에서 커밍아웃은 일부 언론에 칭송을 받는 
행위가 되었고,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발언을 규제하는 인권보도준칙이나 
혐오표현규제법안도 우후죽순처럼 돋아나고 있다. 
지금까지 정신장애인이나 지체아, 한센병 환자, 전과자, 
이주민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 부류에 속한 소수자는 
권력과 물질의 향유에서 뒤쳐진 그래서 사회적 보살핌과 
동정이 필요한 대상이었다. 그들은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도식에서 처음부터 배제된 자들이거나 애당초 보편성의 무산 밑에 들 수 없는 부류의 사람에 불과했다. 그들은 지배집단에 의해 억압받아 왔으며 그 분위기속에서 형성된 차별과 편견의 대상으로 전락되기 일쑤였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 성적 소수자 문제는 서구에 비해 조금 복잡한 양상을 띤다. 1990년대까지 미국에서는 동성애를 처벌했지만, 한국의 법은 어느 곳에서도 동성애를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에이들이 폐쇄된 곳에서 은밀히 자기들의 문화를 누리는 것에 만족해 하는 경향이 있었다. 1995년에 이르러 한국에서도 사정의 급격한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국제 볼셰비키 그룹에서 동성애와자본주의의 억압이란 글이 나오고, 신좌파가 한국에도 수입되면서서구처럼 동성애자 권리운동을 주장하는 그룹들이 만들어지고 거리로 뛰쳐나온 동성애자들이 적극적인 활동을 펴면서 점점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자발적 소수자들은 보편적인 윤리와 전래되어 온 문화전통이나 제도를 거부하고 아울러 집단 속의 표준화된 개인으로존재하기를 거부한다. 현존재의 삶의 방식은 자신이 선택한 실존적 결단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면서까지 동질화와 규범적 정형화를 요구하는 사회 속에 편입되기를 거부한다. 같은 맥락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거부하면서까지정상성의 일원으로 복귀하도록 강요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공동체나 집단 속의 개인이 아닌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요구하는 것이 성적 소수자들의 외침이다. 내 현재적 삶의 주인은 자기 자신일 뿐이며, "보편적이 되라 (Werde Allgemein!)"는 칸트의 정언명령 대신 "자기 자신이 되라 (Wercle Selbst!)"는 니체의 경구가 그들의 삶의 모토가 되어 있는 셈이다.
문제는 더불어 공유할수 있는 가치와 윤리의 지평이 이러한 그들과 공동체의 삶 사이에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느범위에까지 미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서구사회의 유명인 중에서 동성애자인 사람들에게 다른 동성애자들이 커밍아웃을 요구하거나 강요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자 미국에서 2015년 동성결혼이 법제화된 이후에 연예인들 중에서 게이라고 커밍아웃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동성애자들 사이에서는 정작 ‘유리하니까 커밍아웃 한다‘는 냉소적인 반응이 나왔다는소 문도 들린다.

커밍아웃에 의한 소수자들의 성정체성 추구는 사회적 약자에대한 보호와 다른 논리를 갖는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성정체성은 인간의 정체성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의 정체성, 즉 신과 자연과 사회와 자아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될 인간존재의 독특한 의미는 한 개인의 성정체성으로써 대체하거나 환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의 성정체성은 사회의 중심축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특이성향을 운명이나 현실로받아들임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자각 위에서 자신들의 존재와 실존을 위한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편견과 차별적 시스템에대항하여 안티운동을 벌여나가는 데 필요한 자기의식화가 바로 커밍아웃인 셈이다. 

주목할 대목은 동성애 단체측은 성적 지향이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고, 버틀러의 젠더 이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성은 유동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해, 개인의 판단에 따라 선택하는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특정 성향으로고정되어 있다는 성적 지향론을 부정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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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차별금지법의 문제에 대한 다른 시각이 돋보입니다.








인권은 아주 오래된 묵은 주제이면서 동시에 항상 새로운 주제이기도 하다. 인권은 인간의 의식과 정신현상의 진보에서 때로는 혁명투쟁적인 공격수단이었던 반면, 때로는 자기 방어적이면서도 강제력을 지닌 보장수단이라는 다른 일면도 포함한 이중성을지녀 왔다. 18세기 미국의 독립투쟁과 프랑스 시민혁명의 시기에는 인권이 구체제에 대항하는 돌격나팔이었다. 그러나 독립의 쟁취와 구체제의 붕괴 이후에는 인권이 일단 쟁취된 입지, 즉 자기존재가치를 보전하고 어떤 반동으로부터도 자기입지를 수호하기 위한 방어체제로 전환했다. 그 일환으로 인권은 단지 역사적인 인권선언문서 형식으로 남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근대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국가헌법과 그 하위규범들 속에서 ‘포기할 수 없는 규범 ‘처분할 수 없는 신성한 권리‘로서의 지위를 확보했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은 항상 변화하기 마련이다. 인간의 의식이 변화하면 그에 따라 생활양식도 변화한다. 또 생활양식이 변화하면 더불어 법과 제도도 변화해 왔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역사적 · 사회문화적 경험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주목할 점은 오늘날 인권이 한 국가 내의 국지적 영역을 뛰어넘어 국제적인 정치이념 내지 규범으로까지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인권사상은 원래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존재의 올바른 자리매김과 자유롭고 안전한 인격실현을 위한 투쟁 및 방어기제였다. 그러나 서구기독교사회에서 세속화과정을 거쳐 근대 후기에 접어들어,
특히 무신론과 실존주의의 세례를 받으면서, 근대인권사상은 종종신(神) 없는 세상에서 인간을 신 노릇하는 존재로 우상화하는 제도적 장치로 남용될 소지를 잉태하게 되었다. 인간과 인권을 우상화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인권독재 내지 인권만능주의의 상황으로 치우쳐 흐를 수 있다. 인간이성의 자율적 조화와 진보는 이념적으로 상정 가능하지만, 그것만을 절대화할 경우, 그것이 도리어 인간의 생활세계를 식민지화할 수 있는 변태적 이성으로 도구화하듯 말이다.

현대 그리고 후기현대사회에 들어오면서 개인 위주의 근대적보편인권은 좌파 성향의 사회주의, 페미니즘, 문화상대주의, 탈근대주의 사상에 의한 비판에 직면하여 새로운 변모를 시도하고 있다. 사회정의와 공동선과 같은 이념의 틀 속에서 사회적 약자와소수자의 인권이 강조되고 있다.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 정의(justice for all)가 아니라 일부, 즉 피해자 또는 사회적 약자로서 유색인종, 유태인, 여성, 빈민, 동성애자 등 특정부류에 속한 이들을위한 정의(justice for some)에 초점을 맞추는 시각도 눈길을 끈다. 

현대 인권의 역사적 진행에서 가장 어려운 난제 중 하나가 ‘소수자 권리‘의 문제이다. 모든 사람을 위한 인권의 보편성의 구도가특정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수정 내지 해체 위기를 맞을 수도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제도학적 관심사는 어떤 제도나 정책이 강성이나 연성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과연 현명한 일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짓인가에 쏠려 있다. 만약 어떤 제도와 정책이 시민의 이익(utilitascivitas)에 보다 잘 합치한다면 그 정책을 추구해야 하며, 그것이 공동선(bonum commune)과도 합치한다면 더욱 그러해야 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제도의 다양한 기능 중 가치중립성이나 도구적 성격에 대한지나친 강조는 반성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개인의 권리만을 강조하다 보니 공공의 이익이 침해되고, 다수의 권리나 이익이 침해되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간주되어 역차별 논란을 낳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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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법학 에세이
























영미법학과 독일법학에서 인과관계를 사실적 측면과 법률적 측면을 모두 고려하여 판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래 인과관계의 개념은 책임 귀attribution of responsibility 과 관련된 것이고, 책임 귀속의 근거로부터 아주단절될 수는 없다. 인과관계가 규범적 분석보다는 사실상의 분석이라고 하여, 인과관계의 개념을 자연과학적 개념과 연결시켰던 초기의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법학에서 인과관계의 문제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야기했는지 여부와 전혀 다른 문제다. 철학적 또는 과학적 인과관계의 분석과는 대조적으로, 법학에 있어서 인과관계의 분석은 자연이나 세상의 작동에 대한 기본적이고 경험적인 사실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법학에서 인과관계론의 목적은 사회적 해악의 발생에 대해 누가 어느범위에서 책임을 져야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사실상의 인과관계는 법적 원인을 찾아내기 위한 풀pool을 만드는 기능을 하는것이며, 사실상의 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것들 중에서 법적 원인을 찾아내야하는 것이다. 영미법상 법적 인과관계와 독일의 객관적 귀속의 판단기준은 사실 모호한 측면이 있다. 사실상 인과관계와 달리 법적 인과관계의 분석에 있어서는 통일된 그리고 신뢰할 만한 결과를 도출해 낼 과학적 공식이 존재하지않기 때문이다. 행위와 결과 사이의 법적 인과관계는 발견되는 discover 것이아니라, 선택되는 select 것이다. 법적 인과관계의 문제는 현실세계에서 과학적 검토를 통하여 밝혀질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이에 대한 답은 광범위하게 공공 정책과 피고인의 책임과 관련하여 내려지는 가치판단valuejudgment 및 특정 사건에서의 직관적 정의감에 따른 판단에 의존하게 된다. 법적 인과관계나 객관적 귀속의 판단은 다양한 정책적 고려를 포함하는 신축적인 분석이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정책의 문제로서 피고인이 특정한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형법학에서 법적 판단의 기준을 엄격히 객관적 사실에
두는 경우와 적극적으로 평가적 관점을 반영하는 경우는 각각 장단점을 갖고 있다. 이 중 객관적 사실에 기초한 방법론이 더 과학적이고 
법치국가적 안정성의 요정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형법학도 규범학이고, 갈수록 복잡다기해져가는 사회현상이 법해석과 판결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규범적 또는 가치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방법론도 
의미를 갖는다.
대법원 판례의 경향도 객관적 사실에 기초한 판단기준을 취하는 것에서 다양한 평가적 관점을 고려하여 변화하는 사회현상에 대응하여 구체적 타당성을 기하려는 방향으로 변모하고 있다. 행위사실Tatsache에 기초하지 않은규범적인 형법 도그마틱 normative Strafrechtsdogmatik은 공허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형법이론학에서도 존재론적 해석이 한계에 부딪치는 경우 규법적 내지 평가적 관점을 고려하는 해석론으로 변화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규범적 판단으로서 법적 판단은 실증적 분석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며,
실증적 분석과 가치관에 입각한 판단이 함께 적용되어야 한다. 법적 판단에는 객관적 사실과 규범적 요소가 모두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법학은가치관련적 사실을 다루는 학문이며, 평가적 관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없기 때문이다. 법관도 판결을 기계처럼 찍어낼 수는 없으며, 법적 결론을도출하는 과정에 있어 항상 다양한 가치적 판단 사이에서 고뇌할 수밖에없다. 기계적 법리학mechanical jurisprudence 이 가능하다면 법적 생활에 있어법적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이 확보될 수 있겠지만, 구체적 타당성과 법적용의 신축성이 희생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법적 판단에 평가적 관점은필요한 것이다. 다만 다양한 정책적 요소와 가치관련적 요소를 고려할 때는 유형화와 세분화를 통하여 합당한 판단의 기준을 정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는 상황적 맥락을 고려한 가치판단을 하면서도, 법의 보편성을 잃지 않기 위함이다. 법적 판단에서 사실과 가치의 딜레마는 일도양단하듯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구체적인 사안을 놓고 양자 사이에서 끝없는 고민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존엄의 형량가능 여부를 둘러싼 위의 제반 논의는 일종의 법의 딜레마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이는 인간존엄 법리의 구체적 타당성과 법체계내에서 그것이 수행하는 일반적 기능 사이의 딜레마이기도 하면서, 동시에현대 현정국가의 성격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 의견차에 기인한 딜레마이기도 하다. 존중의무와 보호의무 중 무엇이 우선하는지, 예외상태론이얼마나 인정될 수 있는지, 합헌적 국가권력작용의 범위는 어디인지, 기본권의 법률유보의 한계가 무엇인지 등의 물음은 모두 헌정국가에 대해 어떤 규범적 자기이해를 갖고 있는가라는 근본적 문제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현대 헌정국가가 그냥 국가가 아니라, 이념과 가치를 지향하는국가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가피한 귀결이기도 하다. 이렇게 근본적 문제들이 결부되어 있는 이상, 그러한 딜레마를 극복하고자 제안된 최근의 제3의 시도들 역시 완전한 것일 수 없다. 예컨대 ‘법적 가치평가로부터 자유로운 영역‘과 같은 개념이나 법체계와 도덕체계의 원칙적 분기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들의 상호보충성을 활용해 보고자 하는 이론구성‘ 등이 
그것이다. 이들 제안이 갖는 고도의 이론적 성격은 이들이 법철학적 논쟁과 깊숙이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잘 확인되는데, 결과적으로 딜레마를 해소한다기보다 딜레마의 위치를 바꾸는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곧잘 직면하고있다.

사람에 의한 통치(인치주의)가 아닌 법과 제도에 의한 통치를 내용으로 하는 법치주의는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세워졌다. 특히 형사사법제도는 그 운용을 담당하는 주체에게 엄청난권력을 쥐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한계에 매우 취약하다. 그러므로수사구조를 재편하려는 개혁입법이 그 우아한 목적대로 국민의 인권을 옹호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여부를 생각함에 있어, 형사사법제도의 운용에 관여하는 사람이나 집단이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든지, 투철한인권의식을 가지고 있다든지 하는 인간적 선량함에 근거를 두어서는 안 된다. 수사를 담당하는 검사, 경찰이든, 나아가 민주적 통제를 한다는 정치권력이든, 그들의 선량함에 제도의 성패를 맡겨서는 아니 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가장 악독한 검사와 경찰이 수사를 맡더라도 인권이 침해되지않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제도설계자의 이상이다.
물론 제도는 이를 실제로 운용하는 사람의 자질과 자세와 가치관에 따라 그 결과가 천차만별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제도개혁이 성공할지 여부는제도의 내용에 더하여 운용주체의 성격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리하여 운용주체의 행동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개혁입법의 성패를 예측하는 일은 단지 확률적으로만 말할 수 있다. 제도의 예상현실은 그 운용주체가 인간적 한계의 범위 내에서 통상적인 인간처럼 행동할 경우 예상되= 양상이 가장 높은 확률로 전개될 것이다.

한편, 정치권력은 다수의 대표로 여겨지지만, 정치권력의 의사가 언제나다수의 의사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간접민주제하에서 선거에 의한 위임은포괄적이기 때문에 정치권력이 가지는 회사는 다수의 의사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를 이유로 언제나 정치권력의 의사가 다수의 의사라고 한다면 이는
‘민주주의를 형식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가령 국민이 A에 투표하였다고하여 그의 모든 정책에 찬성하는 것도 아니고 선출 후 A의 모든 정책결정에 찬성하는 것도 아니다. 나이가 A를 선택한 선출표나 선출 후 A에 대한 지지의사 자체가 실체와 다른 주장에 기망담한 결과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 정치권력의 의사는 실제로는 다수의사를 반영하고 있지 않아, 정치권력에 의한 통제는 실질적인 민주적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다. 정치권력에 의한 검찰통제가 실질적인 국민의시에 반하는 경우는 민주적 통제라 할주권자인 국민은 헌법을 제정하였다. 헌법은 국민의 기초의사이다. 헌법이 민주주의를 채택함으로써 다수의 지배를 구조화하였으나 그 다수의 의사는 헌법의 테두리를 넘어서지 않는 한도에서 정당성을 가진다. 헌법가치를 침해하는 다수의사는 민주적 정당성이 없다. 헌법은 민주주의와 동시에법치주의를 채택하였다. 헌법가치는 법치주의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헌법가치는 인류가 오랫동안 쌓아온 지혜를 바탕으로 한 인간이성의 산물이다.
민주주의가 다수의사에 정당성의 근거를 둔다면 법치주의는 인류의 지혜에정당성의 근거를 둔다. 인류의 지혜는 시·공간적으로 확대된 국민의 의사라고 할 수 있다. 법치주의는 결국 민주주의와 만난다.
특히 법치주의가 강조되는 형사사법영역에서 정치권력의 의사는 단지정치권력의 의사라는 이유만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고 헌법가치에 부합할때 비로소 정당화된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헌법 제10조). 우리 헌법은 형사사법절차에서의 개인의 인권 보장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제12조 등), 형사사법제도의국민 인권 보장은 바로 국민의 절대적 의사이다.
개혁입법의 민주적 정당성은 다수의 국회의원이 찬성하여 의결하였다는형식적인 면에 있지 아니하다. 진정한 민주적 정당성은 개혁입법이 국민의 인권과 권익을 신장시키는가 하는 점에 있다.

인간은 항상 인지오류와 판단오류의 위험에 직면하여 있다. 형사사법기관을 구성하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형사사법기관은 또한 개인이나 집단적인 사익을 추구하여 의식적인 오류에 빠질 위험도 있다. 형사사법제도의 목표는 이러한 오류로부터 국민의 인권을 지켜주는 데에 있다.
오류를 수정하는 방법은 인지 판단에 대한 검증에 있다. 자기 검증도 오류의 수정에 기여하지만 제3자의 검증이 훨씬 효과가 크다. 경찰의 수사에대하여 검사가 기소단계에서 오류를 검증한다는 면에서 개혁입법의 수사·기소 분리론은 수사절차에 대한 일종의 제3자 검증제도를 설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검증방법은 실질에서는 큰 효과를 보기 어렵다.
국민이 수사에서 억울함을 당하는 것은 최종적인 결론에서만이 아니다. 오히려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억울함을 당하는 경우가 더 많고 과정의억울함은 결론의 억울함으로 이어질 확률이 크다. 경찰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수사의 방향(기소 쪽이든 불기소이든) 이나 방법에 대한 제3자 검증은전혀 없고 수사가 일단락된 뒤에 비로소 검증이 시작된다면, 효과적인 검즘의 시기를 놓치고 사건은 어느 한쪽으로 고착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경찰 내부의 통제 시스템을 확충하여 부당함이 없도록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너무 순진하다. 사기업인 주식회사에서조차 상장법인 등 통제의 필요가큰 경우는 외부감사를 받도록 하고 있다. 이는 내부통제가 그만큼 효과성이작기 때문이다. 
제3자 검증, 즉 당해 수사기관이 아닌 외부에 의한 감시와
통제가 의미 있는 보호책이 된다. 개혁입법은 기존에 있던 검찰의 수사지휘를 제한함으로써 오히려 제3자 검증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수사와 기소의 형식적 분리는 형사사법의 기능에 역효과를 초래한다.
변론을 주재하고 나아가 판결까지 함으로써 재판권을 남용할 위험이 있다고 하여 사실을 심리하는 판사와 판결을 선고하는 관사를 분리하는 것이 이상한 것처럼, 수사와 기소를 분리하는 것은 본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할 두 절차를 억지로 절단한 것으로서, 
사람의 효과성도, 효율성도 적법성도 모두 위협하게 된다. 

개혁입법은 검찰의 직접수사 범위를 축소하였다. 그동안 검찰이 비판을받아온 주된 분야가 바로 직접수사이다. 이 점에서 직접수사를 제한하는 개혁입법은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직접수사를 완전히 금지하지않고 일부 범위에서 
남겨놓았다. 이는 아마도 검찰 직접수사 권력의 진로도 
고려되었을 터이지만 무엇보다 일면에서 효과적인 
수사기능을 수행해온 검찰의 수사용량을 그대로 
폐기함으로써 오는 국가 수사기능의 약화도
고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검찰의 직접수사가 문제되었던 것은 그 수사가 검찰이 
행했다는 사실때문이라기보다는 그에 대한 통제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즉, 경찰수사는검사의 수사지휘하에 
있었지만, 검사의 수사는 내부통제 외에 제3자 검증이 
없었기 때문에 오류와 독단에 빠질 위험이 컸던 것이고 
이 때문에 늘
직접수사가 문제되어 왔던 것이다.
개혁입법이 직접수사를 유지한 부분은 종래 직접수사의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개혁입법이 직접수시를 금지한 부분은 검찰에 의한 폐해는 사라질 것이지만, 그 직접수사를 맡은
다른 수사기관이 그 폐해를 이어받을 것이다. 
공수처는 외부통제 없는 수사와 기소를하므로 종래 검찰의 직접수사의 문제점이 전혀 개선되지 않은 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이고, 경찰은 간접적이나마 검사의 통제를
받으므로 문제의 강도는 약화되지만 상대적으로 자율성이 강조된 제도 아래에서 유사한 문제점은 그대로 존재한다.
직접수사권의 분산은 또 정치적 중립성 문제도 악화시켰다. 사실 그동안 검찰에 대한 비판은 주로 정치적 사건에 대한 직접수사에서 검찰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점에 있었다. 이제 이 부분에 대한 직접수사를 금지한다면 검찰의 중립 문제는 해소될 것이다. 그런데 개혁입법이 검찰의 직접수사 영역으로 남겨 둔 분야는 여전히 정치적 
사건과 연관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그 구체적인 범위를 대통령령으로 위임함으로써 대통령이 정치적 고려에 의하여 수사범위를 정할 가능성을 열어주어, 오히려 종전보다 더욱 정치적인 영향에
취약하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절대군주 시대에 "특별사면 없는 법은 불법이다 Bocht chaeGnite ist Unreche" 라는 법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 국민은 더 이상 절대군주 시대가 아닌 법치주의가 지배하는 민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은 ‘절대군주 시대의낡은 유물인 특별사면을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지속적으로 
남용해 왔다. 헌정질서파괴범죄자인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특별사면과 같이 대다수 국민의동의를 얻지 못한 
‘사이비 국민화합형 특별사면‘과 정략적 차원의 ‘끼워넣기형 특별사면 내지 ‘셀프형 특별사면‘이 그것이다. 
특히 판결문의 씽크가바르기도 전에, 그리고 시민들의 
경악과 분노가 가라앉기도 전에 단행된특별사면, 
범죄의 종류나 형의 경중, 혐기 및 반성유무, 
그리고 피해에 대한 배상 여부를 불문하고 국민적 공감대와는 거리가 멀게 행해진 무분별한 특별사면이 역대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행사됨으로써 
우리나라에서 특별사면의 역사는 오·남용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처럼 뿌리깊은 특별사면의 오.남용의 적폐 헌정질서파괴범죄자 등에 대한 특별사면 대상자의 제한 등의 요건통제, 공정하고 
투명한 사면심사위원회의 구성 등의 절차통제, 
사법부의 의견 청취 등의 외부통제 및 헌법소원심제도의 이용과 같은 사후통제에 의해서는 해결될 수 없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절대군주 시대의 유물‘에 지나지 않는 대통령에 의한 특별사건은 사면법에서 관련 조항을 삭제함으로써 폐지되어야 하며,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만큼은 "특별사면 없는 법이 진정한 법이다."라고 법언이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실체적 진실을 발견한다는 형사소송법의 이념은 사실을 오판하지 않는다는 이념이다. 이 이념을 구현할 목적으로 구성된 형사소송법에 의해 형사절차를 진행하면 죄지은 자를 무죄로 잘못 판단하는 무죄판과 무고한자를 유죄로 잘못 판단하는 유죄오관은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윌리엄 블랙스톤william Blackstone 판사는 유죄와 무죄의 판단을 정확히 해서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이 고통 받는것보다 10명의 죄인이 도망하는 것이 더 좋다It is better that ten guilty persorySscapy than that one innocent suffer"고 말하였다. 법학자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지성인들을 감동시킨 이 유명한 경우에는 무죄판과 유죄오관 중 하나는 불가피하다는 전제가 내재한다. 오판의 불가피성을 전제했을 때 "합리적 의심이 없는 증명" 기준(법 제307조)이 합리성을 가진다. 형사재판에서사실인정을 위해 사용되는 "합리적 의심이 없는 증명" 기준은 유죄판을범하지 않기 위한 엄격한 기준이다. 이 기준을 성실하게 일관되게 사용해서 사실인정을 하면 무고한 사람이 고통 받는 유죄오판은 최소화될 것으로기대된다.

판례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위에 있는 측에게 실질적 자기결정이 이루어있음을 증명할 책임을 지우곤 한다. 그러나 이는 문제가 될 만한, 어떻든결정주체에게 최선은 아닌 자기결정 대부분을 의심스럽게 한다. 불편하고불리한 선택을 자발적으로 심사숙고하여 하였음을 직접 증명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안에서 불가능하다. 결정체가 이제와 결정의 질을 문제 삼고 있는 상황에서 그 결정주체의 내심의 의사형성과정을 증명하여야 하기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실질적 자기결정의 증명은 결정과정에서 상대방의결정을 더 배려하는 외관을 취함으로써 행해질 수밖에 없다.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거래조건을 교섭할 수 있게 배려하고, 사직서를 내는 경우 어떠한 결과가 초래될지 심사숙고하여 편안한 분위기에서 결정하게 하는 식이다. 그러나 그 결정이 그 자체 불리하고 불편한 결정인 이상, 그리고 시간과 공간, 상황의 제약 하에서 이루어지는 결정인 이상, 위와 같은 절차나외관이 자기결정의 질(質)을 충분히 확보해준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위와 같은 외관을 넘어 자기결정의 질을 확인할 방법도 마땅치 아니하다. 선택지는 대개의 경우 결국 위와 같은 외관이 갖추어지면 실실적자기결정이 있다고 보는 것과 위와 같은 외관만으로는 실질적 자기결정이증명되었다고 보지 않는 것 둘로 축소된다. 어느 쪽이든 현재로서는 상당한 위양성false positive 또는 위음성 false negative 을 감수하여야 한다. 그러한위험은 그로 인하여 상당한 손해를 감수하여야 하는 경우에는, 결정주체의 상대방의 행동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민주적 과정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국가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국가와 사회의 분리는 하나의 절대적인 명제로 받아들여지며,
그들은 민주주의적 과정에 의하여 매개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주주의적 의지형성은 절대적이지 않고, 헌법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헌법은법치주의(기본권, 권력분립, 법률에 따른 권력행사 등)를 통하여 국가권력을 제한한다. 
이것을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법치주의(인권)와 민주주의(국민주권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재기술해보면 다음과 같다. 자유주의적 견해는 ‘다수의 횡포‘를 경계하면서 인권의 우선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인권은 자연상태부터 개인에게 주어져 있는 것으로서 우리의 도덕적고찰에 있어서 회피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견해는 민주주의보다는 입법자의 결정이라고 할지라도 개입할 수 없는한계를 제시하는 법치주의를 더 중요시한다.반면에 공화주의적 견해에 따르면 민주적 과정은 그러한 역할에 국한되지 않는다. 민주적 과정은 윤리적-정치적 자기이해의 형식 속에서 이루어진다. 시민들의 사이에 이루어지는 토론은 이미 주어져 있는 배후합의, 즉시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문화적 배후합의에 기초한다는 사실에 의하여 올바른 결과를 제시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즉, 정치는 "자연발생적인 연대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상호의존관계에 있음을 인식하고, 또 기존의 상호인정의 관계를 자유롭고 평등한 법적 동료들의 연합체로 확대발전시키는 매체로서 이해된다.

하버마스는 자유주의적 견해와 공화주의적 견해가 가지는 장단점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면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담론적 민주주의"
를 제시한다.

내가 보기에 공화주의 모델의 장점은 그것이 의사소통적으로 단합된 시민들에 의한 사회의 자율조직이라는 급진민주주의적 의의를 고수하고 집단적 목표를 단지 대립하는 사적 이해관계들 간의 ‘거래‘deal만 축소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단점은 그것이 너무 이상주의적이며민주적 과정을 공공복지 지향적인 시민들의 덕성에 의존하는 것으로만든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정치는 윤리적 자기이해의 문제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더구나 그러한 문제들이 일차적인 문제들인 것도아니기 때문이다. 공화주의 모델의 오류는 정치적 논의를 윤리적인 것으로 협소화시킨 것에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뿐만 아니라, 정립된 경험과학과 법정책에서는 고정관념을 통해 사태를 이해하고 정보를 획득하며, 장래의 가능성을 전망한다. 범죄학의 ‘프로파일링‘은 고정관념을 활용한 대표적인 예이다. 사건 현장의 여러 단서를 통해 용의자의 사회인구학적 특성을 추론하는 프로파일링 작업은 먼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사회인구학적 특성의 도출을 전제로 한다.
즉 통계적으로 타당한 특성 내지 속성을 도출해서 일반화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반화된 사회인구학적 특성을 통해 범죄 행위자‘의 범위를 좁히는추론이 가능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행위‘의 특성을 찾아내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오류가능성이 있기 마련이며, 따라서 프로파일링 작업은여전히 정립 중에 있는 수사 방법이다. 요컨대 고정관념은 실증적 근거를통해 개인이나 집단의 특성 내지 속성을 추론한다는 점에서 ‘사태‘라는 텍스트를 이해하는 지평일 뿐만 아니라 일반화의 계기를 마련해준다.
고정관념화 혹은 프로파일링이 통계적으로 지지 가능한 일반화의 산물이라면, 다시 말해 실증적 근거를 갖춘 추론의 한 형식이라면, 그에 따른분류와 일반화는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타당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여전히 일반화에는 오류가 내포되어 있다는 점은 한계이며, 이 때 추른 형식으로서 가추abduction 가 실천성을 갖는 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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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헌법해석에 따르면 인간의 존엄을 존중해야 할 모든 국가권력의 의무는 부작위청구권, 즉 국가가 개인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침해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한 소극적 행위의무에 국한된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인간의 존엄을 보호해야 할 의무로부터는 국가에 대한 행위요청, 즉 국가의 적극적 행위의무가 도출된다고 보지만, 이 적극적 행위의무는 국가 외적 영역에서 발생하는 인간존엄의 침해를 방어하는 것에 국한된다고 한다.
"국가 외적 영역에서 인간존엄의 존중요청이 침해 (그것이 개인에 의한 것이든, 사회집단이나 외국에 의한 것이든)되는 모든 경우에 "국가에대한 인간존엄의 존중 요청에는 당연히 그러한 침해를 방어하는,
국가에 대한 적극적 행위요청도 포함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일반적해석에 따르면 인간존엄의 침해에 대한 법익주체의 방어권 - 이는인간존엄의 불가침성을 선언하고 있는 기본법 제1조 제1항 1문에서도출된다 - 에는 인간의 존엄을 존중해야 할 국가권력의 의무를규정하고 있는 2문에 비추어 볼 때, 국가권력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부작위청구권도 포함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부작위청구권에는 인간의 존엄을 보호해야 할 국가권력의 의무를통해 국가 이외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모든 침해를 방어해야 한다는, 국가권력에 대한 방어청구권이 추가된다고 한다. 하지만 ‘보호‘
라는 적극적 행동은 ‘적극적 형성‘이 아니라 ‘단순히 침해의 방어‘,
즉 ‘방어적 국가활동‘으로 파악한다.

우리가 인간존재를 추상적인 사유에 의해 극단적으로 관념화된존재 그 자체로 파악하지 않고, 일상 속에서 실제로 살아가면서 다른 인간과 관계를 맺는 인간존재의 측면에서 파악한다면 인간의 전체 모습은 각각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인간의 인격성과 연대성을 구성하고 규정하는 다양한 측면과 차원의 연관성으로 나타난다. 이 경우 존엄성이 달성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는 이 인간존재는 때로는다른 인간존재와 같게 때로는 같지 않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를 인간존재 일반으로 규정하는 것, 즉 개개의 인간을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본성이나 이성을통해 인간으로 규정하는 측면에서는 모두 똑같다. 그러나 다른 인간과의 일상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의 인간은 그의 존재를특정한 어느 누구로서 규정하고 있는 것의 측면에서는 때로는 같고 때로는 같지 않기도 하다. 예컨대 자식과의 관계에서 어머니로서 또는 학생과의 관계에서 선생으로서 인간은 서로 같지 않지만,
여러 아이들 가운데 한 아이, 여러 손님들 가운데 한 손님, 여러 구매자들 가운데 한 구매자는 서로 똑같다. 나는 이러한 특정한 어느누구로서의 인간존재를 ‘로서의 존재 (Alssein)‘라고 부른다.

인간은 모든 행동과 모든 상황에서 그의 사회성에 따른 구체적인상황의 특정한 어느 누구(예컨대 의사 또는 환자 선생 또는 학생, 사는사람 또는 파는 사람, 남편 또는 아내로서 인간답게 존재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남을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그 자신으로서의 개별성및 인간 일반으로서의 인간성 그 자체도 인간답게 실현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대한 침해는 인간의개별적인 욕구와 능력에 따라 자기 자신을 자기에게 귀속시키거나자기를 처분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발생할 수도 있고, 남편이나 아내와 같은 특정한 어느 누구로서 특수하고 유형적인 방식에 따라 자기 및 타인에게 귀속시키거나 타인을 위해 자기를 처분하는 것 - 물론 이때도 그러한 남편 또는 아내로서의 그들 자신의존엄은 침해되지 않아야 한다-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발생할수도 있다. 또한 인간의 존엄은 인간 일반으로서 스스로를 실현시키는 것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침해될 수도 있다.

모든 국가가 그렇듯이 법치국가, 사회국가, 민주주의도 근본적으로 인간을 목적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국가성 (Stantlichker)의 측면이나 차원 역시 인간에 대한 봉사의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또한 이 인간에 대한 봉사 자체의 존재론적, 인간학적 근거도 오로지 인간의 특정한 측면과 차원에서만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잠정적인 명제는 이것이다. 즉 법치국가, 사회국가, 민주주의의 궁극적 의미와 최고목적은 이러한 수단과 방법을 통해 만들어진 국가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보존조건과 발전조건의 창출이다. 이 인간의 보존조건과 발전조건은 - 우리의 오늘날의 이해에 따르면 - 예속과 착취로부터 벗어나고, 공포와 궁핍으로부더 자유로운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우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즉 기본법 제1조에 의해 국가 전체의 원칙과 목적을 규정하고 있는 인간의 존엄만이 법치국가, 사회국가, 민주주의의 형식적 원칙과 실질적 목적을 진정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헌법원칙의 궁극적 전제와최고의 목표는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한 보존조건과 발전조건을 보장하는 것이다. 즉 법치국가를 통해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안전을 보장하고, 사회국가를 통해 사회적 복지와 인간 상호간의 정의를 보장하며, 민주주의를 통해 인간의 정치적 자기입법과 공동결정을 보장하는것이다. 그러나 법치국가와 민주주의의 원칙과 목적을 순전히 형식적으로만 해석하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입장을 감안할 때, 우리는 어떻게 인간의 존엄이라는 원칙규범으로부터 헌법체계를 실질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을 견지할 수 있을까? 인간의 존엄에 대한 헌법적 보장은 기본권체계와 법체계 일반의 토대 이상의 것이 아닐까?

법실증주의는 그 자체 법에 대한 순수 형식적 구성과 해석을 의피할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또한 효력을 발휘하는것, 즉 절대적 권위로 정립된 실정법을 옹호하려는 실질적 결정을의미한다. 따라서 법실증주의는 기존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모든개혁적 혁명적 변경을 거부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국가에 대한 순수 형식적 구성과 해석도 부지불식간에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지배적인 것, 즉 절대적 권위로 정립된 실정적인 국가를 옹호하려는실질적 결정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형식적 입장에 따른다면 인간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인간을 위해존재한다는 기본법 제1조의 근본결점은 원칙적으로 평가 절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실증주의적 국가관에서는 국가가 인간을 존재핵심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신을 존재핵심으로삼는다. 이러한 국가관에 따른다면 법치국가의 의미와 목적은 국가 자체가 마찰이나 장애가 없이 기능하도록 보장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국가가 인간성을 실현하는가 아니면 실현하지 못하는가는이와 같은 ‘순수한‘ 국가관에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형식적 개념의 법치국가는 독일 헌법의근간을 이루고 있고 또한 인간의 존엄을 지향하는 실질적 개념의자유 법치국가와는 정반대되는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형식적법치국가는 그 형식적 성격으로 인해 국가활동의 다양한 내용규정에 대해 개방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단지 외관에 불과하다. 한 세기에 걸친 형식적 법치국가의 역사가 보여 주고 있듯이 형식적 법치국가는 사실상 국가에 대한 순수 국가주의적 구성과 해석을 옹호하는 편파성을 드러낸다.

"인간의 인격을 존중한다는 것, 즉 윤리적 생활형성에 대한 인간의요청을 인정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유의 인정으로 귀착된다. 하지만 이 말은 자유의 범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국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소극적 자유는 개인의 자기발현을 위해필수적인 조건이다. 자유가 인간의 자기발현을 위해 봉사하는 기능을 갖는다는 점으로부터 자유는 법치국가와 관련된 독자적 가치가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법치국가는 인간의 존엄이라는 이념과 결부국가로서 법질서를 통해 인간존엄의 존중을 보장한다. "

오늘날 우리가 자유 법치국가라고 부르는 국가에 대한 칸트의철학적 구상은 일종의 신조(Glaubensartikel)로 이미 묵시적으로 헙법상의 법치국가원칙뿐만 아니라,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모든정치적 국가에 대한 법적 개념의 바탕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국가형태의 가치와 생명력에 대한 믿음의 기초는 권위적 색채의 전체주의 국가에서와는 달리 바로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즉 자유 법칙국가를 통해서만 사회적 토대나 상부구조에서 창조적 자유, 즉 대립과 경쟁을 통한 쌍방적이고 전면적인 자유의 활동이 전개될 수있으며, 이러한 자유가 없다면 한 사회나 인류 전체의 점진적인 변화와 개선을 위한 지속적 진보과정이 보장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자유 법치국가는 사회의 경제적 토대의 측면에서 이른바 자유경쟁경제를 통해 개인의 물질적 이해관계의 충돌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다시 말해 자유경쟁 경제는 ‘합법적 자유‘의 질서를 보장하여 물질적 이해관계가 최대한으로 작용할 수 있게 하면서도, 그것이 자연적 자유‘로 전락하거나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도록 한다. 또한 자유법치국가는 경쟁을 통해 생산방법과 생산기술을 지속적으로 향상시킴으로써 우리 문명의 경제적 발전이 최대한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보장한다.

자유 법치국가는 분명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향한 ‘정의의 길‘로발전하기 위한 조건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이 정신적 독자성과 윤리적 자기결정을 위해 떨쳐 일어난 것은 계몽주의에 의해 사상적으로 준비되었고, 프랑스혁명을 통해 구체적 사실로 전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 법치국가는 단순히 발전질서에 불과한것만은 아니다. 즉 자유 법치국가는 인간존엄의 필수적 전제조건인 개인의 정신적 독자성과 윤리적 자기결정이 위협받고 침해당하는 경우 - 그것이 개인에 의한 것이든, 사회나 국가에 의한 것이든 - 에 이에 대항하여 인간다운 삶이 보존될 수 있게 만드는 질서이기도 하다.
따라서 국가 외적 영역이나 국가적 영역에서 이루어진 어떤 행동에 의해 인간존엄의 존중요청이 침해될 경우에는 언제나 자유법치국가가 (소극적) 형성기능에서 탈피하여 (소극적 보호기능을행사하게 된다. 즉 이 경우 자유 법치국가는 정신적 독자성과 윤리적 자기결정에 따른 인간다운 삶이 개별적으로 형성될 수 있도록개인 및 사회의 창조적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형성기능에 국한되지 않고, 보호기능도 담당하게 된다. 기본법 제1조 제1항 2문은인간존엄의 존중뿐만 아니라 인간존엄의 보호 역시 ‘모든 국가권력의의무‘로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최대한의 자유와 평등한 자유의질서인 자유 법치국가가 각 개인이 정신적 독자성과 윤리적 자기결정에 따라 삶을 형성하도록 보장하는 것은 곧 인간의 존엄을 존중해야 할 국가의 의무로부터 도출되는 필연적 결론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최대한의 안전과 평등한 안전의 소극적 보장 역시 기본법제1조 제1항이 모든 국가권력에 부과하고 있는 인간존엄의 보호의무로부터 도출되는 필연적 결론이다.

법질서를 "의심스러울 때는 자유를 위하여!"라는 자유 법치국가의 원칙에 따라 형성하기 위한 일반적 헌법위임과 일정한 원칙들에 따라 법질서를 변경하고 새롭게 형성하기 위한 개별적 헌법위임을 통해 법치국가 - 다른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할 사회국가와는 달리 - 로서의 현대국가는 단순한 보호기능을 넘어 - 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 인간의 목적을 위한 형성기능을 갖게 된다. 즉법치국가는 개인의 보존뿐만 아니라, 개인의 발전을 위한 일정한조건도 보장하며 또한 사회의 보호와 유지뿐만 아니라, 더욱더 자유롭고 더욱더 평등한 사회로의 발전을 위한 일정한 조건까지도보장한다. 

개인과 국가의 최대한의 그리고 평등한 자유와 안전을 보장하는 질서인이 최후의 단계에서 비로소 우리가 대내외적 자유 법치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달성될 수 있다. 오늘날 ‘시민사회‘와 ‘세계시민사회‘라는 창조적 법 유토피아를 통해 철학적 이론과 정치적 실천을 규정하기 시작하고 있는 자유 법치국가의 원칙에 따라 포괄적질서가 수립될 때 비로소 국가의 내적 관계와 국가 상호간의 관계에서 법을 수단으로 삼아 국가 - 그것이 개별 국가이든 ‘인류국가‘
로의 포괄적 통합이든 - 를 통해 인간의 발전 및 인간존엄의 보존을위한 네 가지 조건이 보장되고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개인의윤리적 발전과 보존을 위한 조건 및 ‘사회적 인류 전체의 윤리적 발전과보존을 위한 조건이 보장되고 유지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질서와 국가조직이 제일의 전제로 삼고 있는 원칙, 즉 기본전제와 목표설정은 무엇일까? 또한 궁극적으로 어떠한 결과를 지향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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