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에 대한 찬반 양론의 주장을 비교하며
고찰해볼 수 있습니다.












공리주의의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은 그것의 이론적 토대를 발전시키는 데 머무르지 않고 행복을 증진하고 고통을 완화하는 실천적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대다수 사람들이 인간 존재의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조건이라고 받아들이는실천 관행들을 비판했다. 이런 도전들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벤담이 1770년대부터 1820년대까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서성적 자유를 옹호하는 수필과 소논문들을 썼다는 것은 비교적덜 알려져 있다. 그 당시는 새뮤얼 존슨 박사와 같이 대중들의칭송을 받는 사상가들이 비정상적인 성교의 ‘악‘을 방지하기위하여 엄격한 법률의 지속적 집행‘ 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벤담은 성의 쾌락은 부자와 가난한 자가 똑같이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비정상적인 것이라고지적하면서, 성적 쾌락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맹목적 편견‘에서 비롯된 제약들을 폐지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성적 취향에서의 차이는 그것이 해악을 야기한다는 것이 입증되는 경우에만 처벌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 처벌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성적 취향의 차이가 해악을 낳는다는 증거는 부족하다.
다양한 저술에서 벤담은 동성애를 범죄시하는 전통적 논증들을 제시하고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논박하였다. 그는 이런 저술들을 출판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그의 사후에라도출판이 가능해지는 시대가 오기를 고대하였다. 그러나 성에 관한 서구인의 관념이 벤담의 사상을 따라잡는 데는 한 세기 반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야만 했다.

우리의 직관적인 윤리적 판단은 그것들이 진화해 온 환경과는 다른 환경에 적용될 때 특별히 엄밀한 검사를 받을 필요가있다. 그러나 환경이 변화하지 않았을 때조차도 우리의 자동적 반응들은 종종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 결국 진화는 도덕적 지식이나 가능한 최고 수준의 행복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생식 적응도(reproductive fitness)를 선택한다. 자위,구강성교, 동성애처럼 생식과 무관한 성행위를 제재하는 집단은 그러한 태도를 가지지 않는 다른 집단보다 더 높은 출산율과 더 빠른 성장을 보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제재들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된다는 뜻은 아니다.

쾌락주의를 되살리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온 옥스퍼드 대학교의 현대 철학자인 로저 크리스프 (Roger Crisp)는 [돼지보다 계통수의 훨씬 아래까지 내려가서 다음과 같이 상상해 볼 것을요구한다. 매우 제한적 쾌락을 무한히 경험하는 불멸의 굴의삶과 77세까지밖에 못 살지만 다양한 강도의 다채로운 쾌락을 경험하는 작곡가 하이든(Joseph Haydn)의 삶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굴의 삶은 무한하기 때문에 하이든의 유한한 삶보다 더 큰 쾌락의 총합을 가져온다. 그러나 당신은 기꺼이 굴의 삶을 선택할 것인가?
‘돼지의 철학‘ 반론에 대한 밀의 대응은 쾌락을 평가함에 있어서 양뿐만 아니라 질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밀의 논의에 의하면, 만약 두 종류의 쾌락을 경험한 모든 또는 거의 모든 사람이 한 종류의 쾌락의 양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그것을 위해서 다른 종류의 쾌락을 포기하지 않을 만큼 그 다른 쾌락을 결정적으로 선호한다면, 그 쾌락은 질적으로 우월하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더 낫고, 만족한 바보보다는 불단족한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고 주장한다.

만약 우리가 지금 당신에게 당신은 이미 경험 기계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당신이 이 책을 읽고 있다는 믿음도 환상이고당신의 가족과 당신의 친구들을 포함해서 당신이 기억할 수있는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경험 기계 밖으로 나오길 원하는가? 일련의 실험들은 대다수 사람들이 지금의 삶이 실재하는 현실이건 컴퓨터로 프로그램 된 환상이건, 지금 살고 있는 삶에서 이탈하는 것을 꺼린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가 경험 기계 안에 들어가기를 꺼려 하는 것은우리가 내리는 많은 다른 결정들과 마찬가지로 ‘현상유지 편향(status quobias)‘에 영향 받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변화는 부가적인 노력을 요구하고 또 위험이 따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세계를 떠나서 경험 기계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것은 놀랄일이 아니다. 특히 그 기계가 완전하게 작동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경험 기계 안에 있다면, 우리는 아마 그 기계를 떠나는 것이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공리주의는 우리에게 최선의 결과를 낳는 것을 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최선의 결과‘란 불행을 제하고 난 가능한최대의 행복 또는 고통을 제하고 난 가능한 최대의 쾌락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심리 상태의 양을 측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단지 한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춘다고할지라도, 가령 나 자신만을 생각해 보더라도, 나는 오늘 나의 행복을 측정할 수 없다. 그리고 작년의 같은 날보다 오늘이 2.6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공리의 개인 간 비교는 훨씬 더 어렵다. 다음 주말에 나는 배우자와 함께 도보 여행을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둘 모두에게 즐거운 하루가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건강 유지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니면 나는 외로운 나의 할머니를 방문하여 그녀를 즐겁게 해 드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둘 중에 공리를 가장 많이 증가시키는 것은 어느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한계 공리 체감의 법칙은 평등한 사회가 불평등한 사회보다더 좋다는 널리 퍼져 있는 신념을 지지해 준다. 우리는 수입의 분배가 극히 불평등한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공리주의자들은 생산성의 감소가 초래하는 공리의 손실이 수입의재분배에서 얻는 이득을 능가할 정도로 전체 생산성을 감소시키지 않는 한에서 불평등을 감소시키는 조치들을 지지한다.
이 점에서 공리주의자들과 평등주의자들은 현재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관해서 견해를 같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등주의자들은 더 큰 평등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적 이유가 평등을 결과와 무관하게 본래적 가치를 가지는것으로 보지 않음으로써 평등에 적합한 비중을 부여하지 못한다고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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