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나‘에 대한 표상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지상의 다른 모든 생물보다 무한히 우위에 선다. 그 때문에 인간은 하나의 인격이며,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변화 
중에도 의식을 통일하여하나의 동일한 인격을 이룰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지위와 존엄성에 비추어볼 때, 우리가 
마음대로 처리하고 지배할 수 있는 이성없는 동물과 같은 
그런 사물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존재다. 이는 설령인간이 
아직 ‘나‘를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렇다. 그런 때에도 
인간은 ‘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수한 단어로 ‘나임‘을 
표현하지 않더라도 1인칭으로 이야기하는 경우 모든 
말에서 ‘나‘를 생각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능력(즉, 생각하는 능력)이 지성이다.

관찰에 따르면 어린아이는 생후 3개월이 지나서야 
울음이나 웃음을 표출하는데, 이는 이성을 암시할 수도 
있는 어떤 표상, 즉 모욕과 부당행위에 대한 표상의 발달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시기에 그 아이가 자신 앞에 놓인 반짝이는 대상을 눈으로 쫓기 시작하는 것은 
지각(감각 표상의 포착)이 감각 대상에 대한 인식, 
즉 경험으로 확장되기 위한 지각 발전의 서투른 출발점이다.

더구나 어린아이가 막 말하기를 시도할 때 단어를 더듬거리는 것은 어머니와 유모가 그 아이에게 친절하고 애정을 
갖도록 만든다. 그래서 그들은 그 아이를 끊임없이 껴안고 
그 아이에게 입 맞추게 되며, 모든 바람과 의지를 들어줌에 따라 그 아이를 작은 지배자로 잘못 키우게 된다. 인간성이 발현되기까지 그 시기에 이 피조물의 그런 사랑스러움은 
틀림없이, 한편으로는 이 피조물의 모든 표현에서 나타나는 천진난만함과 솔직함, 즉 아무런 숨김도 악의도 없지만 아직결함이 많은 모든 표현에서 나타나는 천진난만함과 솔직함 덕분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애교를 부리며 타인의 의사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이 피조물에 대해 친절을 베푸는 유모의 자연적성벽 덕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피조물에게는 모든 시간 중에서가장 행복한 
놀이시간이 허락되고, 그때 보육자 자신도 말하자면 아이가 됨으로써 이 [어린 시절의] 안락함을 다시 한번 즐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대한 보육자의 회상은 그 시절에 
결코 다다르지 못한다. 그 시절은 경험의 시절이 아니라 
단지 산만한 지각의 시절, 아직 대상의 개념 아래에서
통일되지 못한 지각의 시절일 뿐이다.

자신의 표상을 의식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내가 의식하는어떤 표상에 주의를 쏟거나 그 표상에서 주의를 돌리는 
것이다. 주의를 돌리는 것은 단지 주의를 쏟는 것을 
그만두거나 소홀히 하는 것(이런 것은 주의가 산만한 것일 테니)이 아니라 내가 의식한 어떤 표상이 하나의 의식 
안에서 다른 표상들과 결합하지 못하도록 인식능력이 
실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어떤 것을 
추상한다(추출한다고 말하지 않고 어떤 것에서 추상한다고, 즉 내 표상의 대상에 대한 어떤 규정에서 추상한다고 말한다.이렇게 추상함으로써그 표상은 하나의 개념으로서 
보편성을 얻게 되고, 그래서 그 표상은지성 안에 수용된다.

어떤 표상이 감각능력을 통해 인간에게 밀려올 때조차 
그 표상에서 추상할 수 있다는 것은 그 표상에 주의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능력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고 
능력의 자유를 그리고 자기 표상의 상태를 스스로 지배하는마음의 자주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를 고려해보면 감각 표상과 관련하여 추상 능력은 
주의 능력보다훨씬 더 힘들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 주목하는 것은 아직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후자는 우리 자신에게 일어난 지각들을 방법에 따라 취합하는것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관찰자의 일지에 소재를 제공하고, 쉽게 광신과 망상으로 인도한다.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쏟는 것은 사람들과 관계 맺을 때 
실제로 필BA 12 수적이지만 교제 중에 그것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에 그것은 거북하게 난처하게 만들거나 
과장되게 꾸미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둘 모두에 대해 반대되는 것은 꾸밈없음(편안한 태도)으로, 타인이자신의 태도를 좋지 않게 평가하지 않을 거라고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다. 마치 거울 앞에 있는 자신이 어떤지 스스로 평가하려는듯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 혹은 
마치 자기 말을 (단지 타인이 들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듣는 듯이 말하는 사람은 일종의 배우다. 그는 연기를 
하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의 인격을 가상으로 꾸민다. 
그리하여 만일 사람들이 이런 노력을 알아채면 그는 
타인의 판단에서 손해를 입는다. 이런 노력은 속이려고 
했다는 의심을 일으키니 말이다. -사람들은 이런 의심을 전혀 일으키지 않으면서 자신을 외적으로 내보이는 진솔한 태도를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한다(그렇다고 해서 이행동이 미적 기예와 취미 도야를 모두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행동은 단지 표현의 진실성만으로 호감을 준다. 
그러나 동시에 천진함에서 비롯된 솔직함, 즉 이미 규칙이
된 꾸밈 기술의 부족에서 비롯된 솔직함이 말에서 드러나는
경우, 그것은 소박함이라고 부른다.

"표상을 가지고 있지만 의식하지는 않는다"는 것에는 모순이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로크가 이미 이런 이의를 제기했으며, 바로 그 때문에 
로크는 그런 종류의 표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표상을 직접적으로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그 표상을 가지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의식할 수 있다. 
이때 그와 같은 표상은 모호한 표상이라고 부른다. 
그 외의 표상은 명확한 표상이고, 이 표상 전체의 부분 
표상들과 부분 표상들의 결합까지 명확하다면 이 표상은 
사고의 표상이건 직관의 표상이건 분명한 표상이다.

모호한 표상들의 영역은 이렇게 인간에게 가장 큰 영역이다. 그러나 이 영역은 단지 인간의 수동적인 부분에서 감각의
놀이로 인간에게 지각되므로 모호한 표상에 대한 이론은 
오직 생리학적 인간학에만 속할 뿐이지 우리가 여기서 목표로 삼는 실용적 인간학에는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모호한 표상들을 가지고 놀이하면서, 상상력에서 애호되거나 애호되지 않는 대상들을 압도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모호한 표상들의 놀이거리가 되는 경우가 더 잦으며, 그때 우리 지성은 모호한 표상들이 착각임을 인정하면서도 그런모호한 표상들의 영향으로 불합리에 빠져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의 표상에 관한 의식이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구별하기에 충분할 때 그 의식은 명확하다. 그러나 
의식에 의해 표상들의 합성도 역시 명확해진다면 
그 의식은 분명하다고 부른다. 이 분명한 의식만이 
표상들의 집합을 인식이 되게 만든다. 이때 인식 안에서는 
저다양한 표상들의 질서가 생각되는데, 의식적인 모든 
합성은 의식의통일을 따라서 합성의 규칙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표상과 반대되는 것은 혼란한 표상
(혼동된 지각)일 수 없다. 분명한 표상과 반대되는 것은 
오직 불분명한 (단지 명석하기만 한) 표상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런 능력들을 탁월하게 소유한 사람을 
수재라고 부르고, 이런 능력들을 아주 조금 타고난 
사람을 (그는 항상 다른 사람에의해 이끌려갈 필요가 
있으므로) 둔재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런 능력들을 
사용할 때 심지어 독창성을 발휘하는 사람은
(독창성 덕분에이 사람은 대개 남의 지도 아래에서 
배워야 하는 것을스스로 산출한다) 천재라고 부른다.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만약그 사람이 배운 사람으로 보이길 원하는 한, 
반드시 그것을 알아야했다면, 무지한 사람이라고 불린다. 
이런 요구가 없다면 그는 위대한천재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만 스스로 생각할 수없는 사람은 답답한(고루한) 사람이라고 불린다. -어떤 사람은 대단히 박식한 사람(자신이 배운 대로 타인을 가르치는 기계)이면서도 자신의 역사적 지식에 대한 
이성적 사용과 관련해서는 매우 고루할 수있다. -자신이 배운 것을 공개적으로 전달할 때 학교 식의 강제 
(그러므로 스스로 생각하는 자유의 결핍)가 드러나도록 
행동하는 사람은 완고한 사람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학자나 군인, 심지어 신하일 수도 있다. 
이 중에서 그나마 원칙상 가장 견딜 만한 사람은 완고한 
학자다. 그래도 그에게서 우리는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신하들이 격식을 차릴 때 드러내는 꼼꼼함
(완고함)은 단지쓸모없을 뿐만 아니라 완고한 사람에게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자만심 때문에 심지어 우스꽝스럽게 된다. 그런 것은 무지한 사람의 자만심이기 때문이다.

표상들의 상태와 관련해서 내 마음은 능동적이면서 능력을 내보이든가 아니면 수동적이면서 감수성(수용성)으로 존속한다. 하나의인식 안에서 이 양자는 결합되어 있고, 이런 
인식을 갖게 할 가능성은인식능력이라는 이름을 지니는데, 이 이름은 인식에서 가장 중요한부분, 즉 표상들을 결
합하거나 서로 분리하는 마음의 활동에서 가져온 것이다.

어떤 표상과 관련해서 마음이 수동적 태도를 취하고 따라서 그 표상을 통해 주관이 촉발된다면(그런데 주관은 자기 
자신에 의해 촉발되기도 하고 어떤 객관에 의해 촉발되기도 한다), 그 표상은 감성적 인식능력에 속한다. 그러나 오직 
행위(사고)만을 포함하는 표상들은 지성적 인식능력에 
속한다. 전자는 하위의 인식능력이라고 하지만 후자는 
상위의 인식능력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전자는 감각에 
대한 내감의 수동성을 특성으로 지니고 후자는 통각의 
자발성, 즉 활동에 대한 순수한 의식의 자발성을
특징으로 지닌다.

경험이란 경험적 인식이지만, 인식은 판단에 근거를 
둠으로 인식은 성찰(반성)을 필요로 하고, 따라서 의식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서 인식은 다양을 통일하는 규칙에 
따라 표상의 다양을 정돈하는 활동[의식], 즉 개념과 직관함과 구별되는 사고 일반을 필요로한다. 

그래서 의식은 논리적 의식으로서 규칙을 제공하기 때문에 우선해야 하는 추론적 의식과 직관적 의식으로 구분되고, 
전자(자기 마음의 작용에 대한 순수 통각)는 단순하다. 
반성의 ‘나‘는 자신 안에 어떤다양도 지니지 않으며, 
모든 판단에서 항상 하나이고 동일한데, 반성의 ‘나‘는 
의식에서 오직 형식적인 것만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적 경험은 의식에서 질료적인 것과 경험적인 
내적 직관의 다양,즉 포착의 ‘나‘ (따라서 경험적 통각)를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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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으로 조직된 절차가 법적으로 구속력을 갖는 결정의 
정당화에 이바지할 수 있고, 정당화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전제는 법, 국가 그리고 사회에 관한 유럽의 전통을 해체한 자유주의적 사고에 속한다.

이 전제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법원과 법적 문제의 
위계질서를 전제한 구유럽 모델을 대체하기 위한 목적에서 구상되었다. 즉 이러한 전제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기 위해 더 높은 개방성을 확보하고 법의 탄력성과 적응능력을 더 높이며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대비하는 잠재력을 더 강화할 수 있다고 예상했던 것 같다. ‘사회‘ 영역에서 계약이라는 개념이 마치 마술을 부리는 ‘주문‘ 역할을 했다면,
‘국가‘ 영역에서는 절차가 그러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절차라는 이주문을 통해 최대한의 자유와 안전을 조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욱이 절차는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제도로서 모든 결정과 규정을 미래에 맡겨둘 수 있는 장치로 여겨졌다.

계약과 절차가 그러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것이 과연 성공할 것인지가 극히 
불투명했던 개연성이 매우 낮은 성취에 해당한다. 
이러한 진화적 성취는 현재가 자신의 변경 가능성을 
확정하고 개방된 미래의 가능성을 충분히 견뎌낼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진화적 성취는 혁명가와 자본가의 이데올로기였다고 말할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진화적 성취가 실현 가능했던 조건 및 실현가능성의 정도를 파악하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이러한 시도에서는 아마도 계약의 비계약적 토대에 대한 뒤르켐의 물음이 모범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물음은 우리를 일반 사회이론이라는 험난한 문제에 봉착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펼쳐질 연구는 다른 길을 걷는다. 
즉 이 책은 정당화개념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는 생각이라는 사실적 측면과 관련을 맺는다는 점을 통해 이미 오래전부터 경험적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사정을 십분 활용한다. 
더 나아가 이 책은 절차에 대한 사회학적 이론을 통해 
자유주의이론의 타당성을 검토하기위한 또 다른 토대를 확보하려고 시도한다. 그 때문에 이 책은 절차를특수한 종류의 사회적 체계, 즉 사실상의 행위와 의미의 결합으로 파악한다. 
같은 맥락에서 정당화란 구속력을 갖는 결정을 사실상의 행위자체의 결정 구조로 수용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체계이론적 ·학습이론적 토대 위에서 절차를 통한 정당화라는 자유주의적 전제를 경험적으로 더 면밀하게 
검토해볼 가능성을 확보하게 된다.

정치적 선거의 공식적 목표는 국민의 의지에 따른다는 
의미에서 올바르게 결정하고, 이러한 의미에서 국민의 
의지를 진정으로 대표할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갖춘 
인물들이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기관을담당하도록 하는 
것이다. 선거제도의 주도적 사상에 따르면, 특히 공직을 
둘러싼 경쟁, 자유선거, 보통선거, 평등선거, 비밀선거 및 - 자주 언급되지는 않지만 역시 중요한 의미가 있는 - 표결과 관련된 커뮤니케이션의 특화와 사전 구조화 등 
선거를 조직하는 원칙들은 그러한 목적에 봉사한다고 한다. 유권자는 투표용지에 표시하는것 말고는 달리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런 식으로 해서 어떻게 그와 같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지는 일단 불확실하다. 공직을 둘러싼 경쟁이 가장 
탁월한 자격을 갖춘 자가 공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식의 가정은 이미 경험을 통해 반박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공직을 둘러싼 경쟁과 최상의 능력을 갖춘 인물의 
선출 간의 인과관계를사후적으로 구성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적 가정을 추가해야만 할것으로 보인다. 

법적용을 위한 법정절차의 경우 공식적 목적, 제도적 장치 
그리고 잠재적 기능 간의 불일치가 선거와 입법의 경우에 
비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사법부가 자기 자신을 
묘사하는 내용은 법이론과국가이론의 논의에서 상당 부분 인정되고 있고 어쨌든 민주적 선거와의회의 입법에서처럼 첨예하고 설득력 있는 폭로 대상은 아니다. 그이유는 아마도 사법의 결정 상황이 선거와 입법에 비해 더 잘 구조화되어 
있고 따라서 사법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경험적 조건을 
구체화하기가 더 쉽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지만 사법의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법으로 규율된 법정절차의 의미도 지배적인 소송이론에 
따르면 진리라는 가치, 즉 법으로서 효력을 갖고 개별 
사례에서 법적으로 타당한 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관련을 맺는다고 한다. 즉 법정절차 역시선거나 입법과 마찬가지로 결정을 통해 정당한 것을 실현하는 절차라고 전제한다. 
그에 따라 법정절차의 주요 목적은 권리보호라고 서술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개개의 소송법 제도를 정당화할 때도 
이러한 서술방식을 이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결정이 실질적으로 부정당할지라도 확정력을 갖는 문제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난점을 안게 된다.

정치적 기계의 조합은 언제나 한편으로는 사회가 가진 
이성, 정의, 진리를추출해 통치에 적용하려는 경향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통치를 통해 사회발전을 촉진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정당성이란 일정한 허용한계 내에서 
내용이 아직확실하지 않은 결정을 수용하고자 하는 
일반화된 자세로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정당성을 이렇게 
파악할지라도 이러한 자세가 비교적 단순한심리학적 동기 - 예컨대 복종에 대한 대가로 ‘민주적‘ 참여를 얻는것에 대한 내적 만족감 -에 기초하는지 아니면 극히 이질적인 상태의 동기들을 
획일화하는 다수의 사회적 메커니즘의 소산인지는 여전히 대답되지 않은 물음이다.

정당성개념과 관련해서는 우선 결정의 전제에 대한 승인과 결정자체에 대한 승인을 뚜렷이 구별해야 한다. 이러한 
구별은 정당화하는결정 과정이 ‘예/아니요‘라는 조건 아래 작동하기 때문에 특히 중요하다. 
이러한 조건이 오로지 결정의 전제에만 적용되는지 아니면 결정자체에도 적용되는지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즉 결정이 도출되는 원칙과 규범을 인정하면서도 결정이 
논리적으로 오류라거나 결정이 잘못된 해석이나 잘못된 
사실에 기초해 성립되었다는 이유로 결정 자체를 거부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결정 자체를 인정하면서도 결정의 기초가 
되는 가치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거나 완전히 
무관심할수도 있고, 심지어 결정근거들이 일반적 
결정규칙이 될 수 없다고 거부할 수도 있다. 
법의 실정화, 즉 모든 법은 결정을 통해 제정된다는
테제는 정당성개념을 결정의 구속력에 대한 승인으로 확정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하지만 이는 더 넓은 의미의 
정당성개념이다. 이개념은 결정의 전제에 대한 승인까지 
포함한다. 왜냐하면 (다른 시간대에 다른 곳에서)이 
결정의 전제에 대해서도 역시 결정이 내려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률, 행정행위, 판결 등은 구속력이 
있다고 여겨져야 하고, 각자의 행위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승인되는이상 결정으로서 정당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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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이 행해질 때, 필연으로 생기는 아주 희한한 결과는 
결백한 사람이 죄를 지은 사람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놓인다는 것이다. 결백한 사람의 경우,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를털어놓고 유죄 판결을 받거나, 받아서는 
안 되는 형벌을 치르고 나서 무죄를 선고받는다. 

반면에 죄를 저지른 사람은 유리한 상황에 놓인다. 
만일 그가 강인함과 결단력으로 고문을 버텨낸다면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큰 형벌을 작은 
형벌과 바꾸는 셈이 된다.

한 사람을 감옥에 보내기 위해 어떤 증거가 필요할지 
결정하는 것은 재판관의 권한에 속한다. 죄인이 무죄로 
판명될 수도 있지만, 우선은 유죄로 추정해야 한다. 
이것이 18세기인 오늘날 앞서간다는 유럽 전역에서 
형사절차의 전형적인 실상인 ‘공격적 기소‘ 다. 

고발에 대한 진정한 기소, 즉 이성이 명하는 사실에 대한 
공평한 심리는 군법에서 채택하고 있으며 아시아적 
전제정치에서도 경미한 소송의 경우 이를 따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유럽 법정에서는 거의 실행되고있지 않다. 

이는 참으로 황당하지 않은가. 우리보다 더 행복한 시대를 
살아야 할 후손들에게 이런 어리석은 절차는 믿을수 없을 
정도로 부조리할 것이다. 그나마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사람들만이 그 같은 어리석은 제도가 왜 가능했는지 밝혀낼 것이다.

왜 우리는 신을 화나게 하는 것과 우리 자신의 즉각적인 
파멸 중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하는가? 선서를 요구하는 
법률은 요구당한 당사자에게 나쁜 신자가 될지 순교자가 
될지 두 가지 선택지만 남겨둘 뿐이다. 그런 탓에 선서는 
단순히 의례적인 형식으로 변질되었으며, 그로써 정직함을 유일하게 보장하는모든 종교 감정은 무너졌다.

나는 선서가 얼마나 쓸모없는지 이미 경험한 바 있다. 
그래서 선서만이 범죄자의 입에서 진실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재판관이 있든 없든, 모든 재판관에게 이렇게 
호소하고싶다. 이성은 우리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그래야 하지만,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에 반하는 모든 법은 
쓸모가 없어지고 결국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이런 법은 
강의 본류와 맞부딪치는 제방과 같은 운명을 맞으며, 
곧 스스로 만든 소용돌이에 휘말려 점차 약해지다가 
사라질 것이다.

범죄가 발생한 후 곧바로 처벌이 가해질수록 그만큼 처벌은 공정하고 유용하다. 즉각적인 처벌은 불확실성이라는 잔인하고 불필요한 고통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이 불확실성은
범죄자의 상상력과 나약함에 비례해 증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유를 박탈하는 것도 일종의 형벌이기 때문에, 
형에 대한 선고가 있기 전에 가능한 한 짧은 기간에 
행해져야 한다.
구금은 피고인이 유죄를 선고받은 무죄를 선고받든 
피고인을 가두어 놓는 수단에 지나지 않으므로, 기간이 
짧아야 하고 최대한 가혹하지 않아야 한다. 구금 기간은 
재판에 필요한 준비 기간에 한해야 하며, 오랜 기간 구금된 피고인부터 순차적으로 재판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구금은 범죄자의 도주를방지하거나 범죄 증거를 인멸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 그 이상이어서는 안 되며, 재판은 최단 기일 안에 종결해야 한다.

타인의 명예를 손상하는 행위, 즉 개개인이 타인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사회적 평판에 해를 끼치는 행위는 
명예훼손죄로 처벌해야 한다. 명예훼손죄는 공적 반감의 
표시로 같은 주변 사람, 나라의 신뢰, 같은 사회 구성원 사이에 존재하는 우애심을 박탈하는 행위다. 다만, 불명예가 
항상 법의 테두리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법에서 말하는 
불명예는 대상의 관계, 보편적 도덕률, 또는 공통된 의견을 반영하는 특수한 도덕과 일치해야 한다. 법적 불명예가 
보편적 혹은 특수한 도덕과 상반된다면 법은 대중의 
존경을 상실하거나 도덕과 성실에 대한 기존 관념에서 
멀어질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도덕적으로 무관한 
행동을 불명예스럽다고 강조해도 결국은생생한 본보기의 
힘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재산몰수형을 반대하는 것은 앞서 말한 복잡한 
논지 때문이 아니다. 재산몰수가 사적 복수나 개인적인 
권력 남용을 억제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떤형벌이 유용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해서 반드시 
정당하다고말할 수는 없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형벌이 정당하려면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입법자는 아무리 폭정을 경계하는 유용한 법이라도 정당하지 못한 법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정당하지 못한 
법은 일시적인 이익을 구실로 영구적인 파괴의 원칙을 
세우고, 높은 지위에 있는 소수의 편익을 위해 수많은 
가난한 이들을 눈물 흘리게 할 것이다.

가족을 구성단위로 하는 국가에서는 나라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가장 유용한 자원인 자녀의 행동이 
가장의재량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개개인으로 이루어진 공화국에서는 자녀가 신성불가침한 상호원조라는 
의무감으로 부모에게 애착을 가지며, 부모에게 받은 
혜택에 감사해야 한다.

이런 의무감이라는 정서가 파괴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개개인의 사악함 때문이 아니라 법이 잘못 규정한 복종을 
맹목적으로 강요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법과 국가의 기본법 사이에서 생기는 이런 모순은 사적 도덕과 공적 도덕 사이에 혼재하는 많은 모순의 원천이 되며, 계속해서 정신적인 갈등의 원인이 된다.

범죄를 더 효과적으로 예방하는 길은 형벌의 엄중함이 
아니라 확실성이다. 따라서 치안관은 철저한 경계심을 
재판관은 냉정한 엄격함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이 덕목이 유익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받으려면 관대한 입법이 
뒷받침해야 한다.

아무리 작은 형벌이라도 확실하다면 처벌을 면할 수 있다는 요행수와 결부된 어떤 가혹한 형벌의 공포감보다 강력한
인상을 줄 수 있다. 반면에 하늘이 주신 최고의 선물, 즉 
요행히 처벌되지 않겠지 하는 희망은 더 가혹한 처벌에 
대한 공포감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특히 재판관의 나약함과 탐욕스러움 때문에 너무도 빈번하게 발생하는 형 면제 
사례들을 보면 이런 희망은 더욱 커진다.

형벌이 잔인해질수록 우리의 정신은 완강해지고 
둔감해진다. 액체가 주위를 둘러싼 물체와 같은 높이에 
도달하려는 것처럼 죄인의 사지를 벌린 상태에서 바퀴에 
묶어 처형하는 수레바퀴형과 같이 심한 형벌도 100년간 
이어지면 이전의 감옥보다 더 큰 공포감을 주지 못한다. 

형벌은 이를 통해 받은 해악이 범죄로부터 얻는 이익을 
넘어서는 정도이면 목적을 달성하기에 충분하다. 이를 
넘어서는 모든 가혹함은 필요하지않으며, 압제일 뿐이다.

잔혹한 형벌은 이 밖에도 다른 두 가지 해로운 결과를 
초래하며, 이는 범죄 예방이라는 법의 목적과 상반된다. 
첫째, 범죄와 처벌 사이의 정확한 균형을 유지하기 
어렵게 한다. 교묘한 잔혹함으로 고통이 매우 증가하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그 이상의 고통을 주는 형벌을 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형벌의 면제(불처벌)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의 본성은 한없이 선할 수있지만 한없이 악할 수도 있다.사람들에게 너무나 잔혹한 처형의 볼거리는 일시적인 걱정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어도 법적 당위에 부합하는 영구적인 제도의 일부가 될 수는 없다.
진정으로 잔혹한 법은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형벌 면제를 조장할 것이다.

사형은 우리를 더 낫게 한 적이 없는 무익한 형벌로, 
공정하고 제대로 통치되는 국가에서 실제로 유용한지 
묻고 싶다.
사람이 무슨 권리로 자기 이웃의 목을 벨 수 있단 말인가.
사형은 주권과 법의 근간에도 위배된다. 앞서 말했듯이, 
법은 각 개인의 사적 자유 중 가장 작은 부분의 합산일 
뿐이며, 각 개인의 의지가 총합한 일반의지를 나타낸다. 

자신의 생명을 앗아갈 권리를 타인에게 부여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희생된 각 개인의 
가장 작은 자유가 모든 선 가운데 가장 큰 생명을 앗아간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권리가 없다는 말과어떻게 양립할 수 있겠는가. 내게도 없는 권리를 남에게 양도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무리 강렬해도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인 망각의 힘은 이기지 못한다. 폭력에 대한 인상은 
우리를 놀라게 할 수는 있어도 그 효과는 오래가지 못한다.
이런 인상은 평범한 사람을 한순간에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인이나 페르시아인으로 바꾸는 혁명을 일으킬 
때나 통할 것이다.

하지만 자유롭고 평화로운 정부에서는 강한 인상보다 
지속적인 인상이 더 필요하다.
범죄자의 사형 집행은 일부 국민에게 분노가 뒤섞인 연민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분노와 연민은 법이 의도하는 유익한
공포보다 사람들의 정신을 훨씬 더 강하게 사로잡는다. 
반면에 계속되는 고통을 생각해보면 공포가 더 압도적으로 사람의 정신을 지배한다. 형벌의 가혹함은 관중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정도이면 충분하다. 형벌은 범죄자가 아닌 
국민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성애는 법으로 매우 엄하게 처벌되며, 범죄의 증거를 
찾기 위해, 그리고 결백한 자를 굴복시켜 유죄로 이끌기 
위해고문이 사용된다. 동성애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간의 욕구가 아닌, 사회적이고 예속된 상태에 있는 
인간의 욕구에서 비롯된다. 교육이 쾌락의 포만감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해, 동성애는 인간을 
다른 사람들에게 쓸모 있게만들기 위해 인간 스스로 
쓸모없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으로시작되는 교육 때문이다. 열정적인 청춘들의 모든 이성교제를 철저하게 차단하는 
교육시설은 자연적인 활력을 인류에게무익한 방식으로 
소모하게 하고, 청춘을 서둘러 늙게 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조국을 영원히 떠나는 사람보다 사회에 해를 덜 끼친다. 전자는 자신의 재산을 국가에 남겨 두지만, 후자는 재산 중 적어도 일부는 다른 곳으로 가져가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회의 힘은 국민의 수에서 나오기 때문에 한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사람은 사회에 두배로 손실을 끼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제기될 수있다. 한 국가의 구성원에게 자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사는
무한한 특권이 주어지는 것은 국가에 이익이 될까 아니면 
해가 될까?

힘으로 지배받거나 상황에 따라 효력이 사라지는 법률은
공포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을 지배하는 여론은 입법자의서서히 그리고 간접적으로 미치는 영향력에는 순종하지만,
폭력적이고 직접적인 인상을 받을 때는 반발한다. 그리고 
쓸모없는 법은 사람들이 유익한 법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게하며, 공익의 안전장치가 아닌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여기게한다. 우리의 통찰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명백히 
쓸모가 없는 법을 준수함으로써 진정으로 유익한 법의 
영향력을 파괴할 수 있다.

법에서는 유도적인 신문을 금한다. 법률가들에 의하면 유도신문이란 범죄 상황에 관한 일반적인 질문이 아닌, 범죄의
구체적인 내용에 관한 질문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범죄에 
직접적인 관련 있는 즉각적인 답변을 권하는 질문이다. 
법규에 따르면 신문할 때 간접적이고 우회적으로 질문해 
사실을 밝혀내야 하며, 직접적으로 질문해서는 절대 안 된다.

이런 방식을 사용하는 이유는 피고인의 혐의를 풀 수 
있는 즉각적인 답변을 피고인에게 암시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다른 이유는 그 반대의 경우로, 
피고인이 자신을 고발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반하기 
때문이다.

나는 형벌의 가혹한 정도는 그 국가의 상황에 비례해야 
한다고 결론짓고 싶다. 아직 야만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국가의 국민에게 형벌은 강력한 인상을 주어야 하므로 
극도로 가혹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가 활발해질수록 인간 정신은 부드러워진다. 
사람들 사이의 필연적인 관계가 일정하게 유지되려면 
형벌의 가혹함은 완화해야 한다.

정의의 칼이 우리 손에 쥐어져 있지만, 우리는 칼날을 
날카롭게 갈기보다는 무딘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왕이 있는 자리에서 칼집 안에 칼을 두는 것은 왕 
앞에서는 칼을 거의 뽑지말아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한 나라라도 고문이라는 관습을 폐지한다면,
그래서 그 나라에서 범죄가 다른 나라에 비해 줄어든다면, 
그리고 고문 폐지 이후 더 개화되고 더 번영한다면, 확실히 다른 나라들에 충분한 모범이 될 것이다. 영국의 사례가 
다른나라에 모범이 될 수 있지만, 영국만 모범을 보인 것은 아니다. 고문은 다른 나라에서도 성공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개화된 국가의 국민이라면 
인간애에 대한자부심을 품어야 하지 않을까. 단지 과거부터 내려온 관습이라는 이유만으로 고문이라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끝까지 고집할 것인가? 최소한 나의 부모, 아니 
나라의 아버지를 암살한무정한 철면피들을 처벌하기 
위해서라도 이 잔혹한 행위는 아껴두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은 잘못을 저지른 젊은이에게 살인과 같은 고통을 준다면 이것이야말로 쓸모없는 야만적인 행위가 아닌가.

자연이 우리 마음에 새겨준 정의를 지키기 위해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가르침을 주는 법규를 자연법이라고부른다. 예를 들면 절도, 폭력, 살인, 자비로운 부모에 
대한 배은망덕, 무죄에 반하는 거짓 증언, 조국에 대한 
배신과 같은 행위는 명백한 범죄로 다소 가혹하지만 
보편적으로 정당하게 처벌해야 한다.

그리고 정부에 안정을 주거나 불행을 방지하기 위해 현재의 필요로 만든 법을 정치법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도시의
주민들이 자신들의 정보가 적에게 새어나갈까 염려해 
성문을 닫고 아무도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데, 
이를 어기는 자에게는 사형이라는 형벌이 내려질 것이다.

보복에 대한 권리 역시 국가에서 채택한 법이다. 예를 들어 적군이 당신의 용감한 장군 중 한 명을 교수형에 처했다고 가정하자. 이 장군은 적의 군대 전체에 맞서 폐허가 된 
성을 끝까지 수호하려 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적의 
대장 중 한 명이 당신의 수중에 들어왔다. 당신은 그를 
존경하지만 보복의 일환으로 그를 교수형에 처한다.
그리고 당신은 이것이 법이 아니냐고 말한다. 나의 적이 
엄청나게 큰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나 역시 또 다른 
범죄를 저질러야 할까?

이런 정치적 피비린내 나는 법은 오래 존속되지 못한다. 
진리에 기초하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법이 아니다. 
이 법은 극심한 기근 상태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어야 하는 필요와 유사하다. 이 경우에는 빵만 주어지면 더이상 
인육을 먹지않을 것이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제정한 법은 다음과 같다. 
"형제나 아버지가 죄가 없기에 고통을 피하거나 삶에 
지치거나 절망해서, 혹은 광기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더라도 자살자의 유언은 유효하며 그의 상속자는 법에 
따라 유산을 물려받아야 한다."

고대 로마의 통치자들이 이런 인도적인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는데도 우리는 지금도 범죄자들을 화형대로 
불러 모으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범죄자들의 이름을 
욕되게 하면서 가족들에게 불명예를 안겨준다. 
아버지를 잃은 아들을 벌하고 남편을 잃었다는 이유로 
과부를 벌한다. 심지어 고인의 유품을 몰수하는데, 
이는 가족의 정당한 권리를 앗아가는 것이다. 
이런 관행은 다른 많은 관습과 함께 교회법에서 생겨났다. 
교회법은 자살한 사람에 대해 기독교식 매장을 거부하고
하늘에서 상속받지 못한 자로부터 땅을 상속받는 것은 
옳지않다고 결론 내린다. 교회법은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한 것보다 목을 매어 죽은 것이 더 큰 죄였음을 우리에게 확신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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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2019, 03. 21. 선고 201716593-1 
전원합의체 판결34] [약사법위반]

【판시사항]

[1] 이른바 ‘상고이유 제한에 관한 법리‘의 의의와 근거 / 상고심은 항소심에서 심판대상으로 되었던 사항에 한하여 상고이유의 범위 내에서 그 당부만을 심사하여야 하는지 
여부(적극) 및 항소인이 항소이유로 주장하거나 항소심이 
직권으로 심판대상으로 삼아 판단한 사항 이외의 사유를 
삼고이유로 삼아 다시 상고심의 심판범위에 포함시키는 
것은 상고심의 사후심 구조에 반하는지 여부(적극) /피고인이 유죄가 인정된 제1심판결에 대하여 항소하지 
않거나 양형부당만을 이유로 항소하고 검사는 
양형부당만을 이유로 항소하였는데, 항소심이 검사의 
항소를 받아들여제1심판결을 파기하고 그보다 높은 형을 
선고한 경우, 피고인이 항소심의 심판대상이 되지 않았던 
법령위반 등 새로운 사항을 상고이유로 삼아 상고하는 것이 적법한지 여부(소극)

[2] 피고인들이 약사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제1심에서 각각 벌금형을 선고받은 후 항소하지 않게나 양형부당만을 이유로 항소하였고 검사도 양형부당을 이유로 항소하였는데, 
항소심에서 검사의 항소이유가 인용됨으로써 제1심판결이 파기되고 피고인들에 대해 각각 그보다 높은 형이 선고되자, 피고인들이 항소심에서 심판대상이 되지 않았던 채증법칙위반, 심리미진 및 법리오해의 새로운 사유를 상고이유로 삼아 삼고한 사안에서, 피고인들의 위 상고이유 주장은항소심에서 심판대상이 되지 아니한 사항이므로 적법한 상고이유가 아니라고 한 사례

[주문]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이유]

상고이유를 판단한다.

1.사건의 개요 및 쟁점

가.피고인들은 한약사로서 공소외인과 공모하여 한약사 
자격이 없는 공소외인이 한약국을 개설하여다이어트 
한약을 판매할 수 있게 하였고, 피고인 1은 자신이 개설한 
한약국에서 보건복지부장관이정한 조제 방법을 따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의사의 처방전 없이 한약을 조제하고, 전화 상담만을 받고 고객들에게 이를 택배로 판매하였다는 사실에 대해 각 약사법 위반죄로 기소되었다.

나. 제1심은 피고인들에게 유죄를 인정하면서 각 벌금 
1,000만 원의 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대해 피고인 2는 
양형부당만을 이유로 항소하였으나 피고인 1은 항소하지 
않았고 검사는 피고인들에 대해 양형부담을 이유로 
항소하였다.

다. 원심은 검사의 항소이유를 받아들여 제1심판결을 
파기하고 피고인 1에 대해 징역 6월 및 집행유예1년, 
피고인 2에 대해 벌금 2,000만 원의 형을 각 선고하였다. 
피고인들은 원심판결에 대하여 논리와 경험칙에 반하여 
사실을 잘못 인정하고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아니하였거나 법리를 오해하였다는 점을, 피고인 2는 이에 덧붙여 양형이 부당하다는 점을 상고이유로 삼아 상고하였다.

라. 이 사건의 쟁점은, 피고인들은 항소하지 않거나 
양형부당만을 이유로 항소하고 검사는 양형부당을
이유로 항소하였는데 항소심이 검사의 항소이유만을 
받아들여 제1심판결을 파기자판하면서 형이
높아진 경우라도 피고인이 항소심에서 항소이유로 
주장하지 아니함으로써 심판대상이 되지 않았던
법령위반 등 새로운 사유는 이를 상고이유로 삼아 
상고할 수 없다고 하는 이른바 ‘상고이유 제한에 관한 
법리‘(이하 ‘상고이유 제한 법리‘라고 한다)를 선언하고 
있는 대법원의 확립된 판례의 변경여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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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2020.12. 10. 선고 2019 17879 판결
[위계공무집행방해·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허위공문서작성 · 허위작성공문서행사]

【판시사항】

지방자치단체장이 승진후보자명부 방식에 의한 5급 공무원 승진임용 절차에서 미리 승진후보자명부상 후보자들 중에서승진대상자를 실질적으로 결정한 다음 그 내용을 인사위원회 간사, 서기 등을 통해 인사위원회 위원들에게 ‘승진대상자 추천‘이라는 명목으로 제시하여 인사위원회로 하여금 
자신이 특정한 후보자들을 승진대상자로 의결하도록 
유도하는 행위가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구성요건인 
‘직권의 남용‘ 및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경우‘에 해당하는지 여부(소극)

[판결요지]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승진후보자명부 방식에 의한 5급 
공무원 승진임용 절차에서 인사위원회의 사전심의·의결 
결과를 참고하여 승진후보자명부상 후보자들에 대하여 
승진임용 여부를 심사하고서 최종적으로 승진대상자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승진후보자명부상 후보자들 
중에서 승진대상자를 실질적으로 결정한 다음 그 내용을
인사위원회 간사,서기 등을 통해 인사위원회 위윈들에게
‘승진대상자 추천‘ 이라는 명목으로 제시하여 인사위원회로
하여금 자신이 특정한 후보자들을 승진대상자로 의결하도록
유도하는 행위는 인사위원회 사전심의 제도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구성요건인 ‘직권의 남용‘ 및 ‘의무 없는 일을 하게 된
경우‘로 볼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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