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나‘에 대한 표상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지상의 다른 모든 생물보다 무한히 우위에 선다. 그 때문에 인간은 하나의 인격이며,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변화 중에도 의식을 통일하여하나의 동일한 인격을 이룰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지위와 존엄성에 비추어볼 때, 우리가 마음대로 처리하고 지배할 수 있는 이성없는 동물과 같은 그런 사물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존재다. 이는 설령인간이 아직 ‘나‘를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렇다. 그런 때에도 인간은 ‘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수한 단어로 ‘나임‘을 표현하지 않더라도 1인칭으로 이야기하는 경우 모든 말에서 ‘나‘를 생각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능력(즉, 생각하는 능력)이 지성이다.
관찰에 따르면 어린아이는 생후 3개월이 지나서야 울음이나 웃음을 표출하는데, 이는 이성을 암시할 수도 있는 어떤 표상, 즉 모욕과 부당행위에 대한 표상의 발달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시기에 그 아이가 자신 앞에 놓인 반짝이는 대상을 눈으로 쫓기 시작하는 것은 지각(감각 표상의 포착)이 감각 대상에 대한 인식, 즉 경험으로 확장되기 위한 지각 발전의 서투른 출발점이다.
더구나 어린아이가 막 말하기를 시도할 때 단어를 더듬거리는 것은 어머니와 유모가 그 아이에게 친절하고 애정을 갖도록 만든다. 그래서 그들은 그 아이를 끊임없이 껴안고 그 아이에게 입 맞추게 되며, 모든 바람과 의지를 들어줌에 따라 그 아이를 작은 지배자로 잘못 키우게 된다. 인간성이 발현되기까지 그 시기에 이 피조물의 그런 사랑스러움은 틀림없이, 한편으로는 이 피조물의 모든 표현에서 나타나는 천진난만함과 솔직함, 즉 아무런 숨김도 악의도 없지만 아직결함이 많은 모든 표현에서 나타나는 천진난만함과 솔직함 덕분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애교를 부리며 타인의 의사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이 피조물에 대해 친절을 베푸는 유모의 자연적성벽 덕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피조물에게는 모든 시간 중에서가장 행복한 놀이시간이 허락되고, 그때 보육자 자신도 말하자면 아이가 됨으로써 이 [어린 시절의] 안락함을 다시 한번 즐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대한 보육자의 회상은 그 시절에 결코 다다르지 못한다. 그 시절은 경험의 시절이 아니라 단지 산만한 지각의 시절, 아직 대상의 개념 아래에서 통일되지 못한 지각의 시절일 뿐이다.
자신의 표상을 의식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내가 의식하는어떤 표상에 주의를 쏟거나 그 표상에서 주의를 돌리는 것이다. 주의를 돌리는 것은 단지 주의를 쏟는 것을 그만두거나 소홀히 하는 것(이런 것은 주의가 산만한 것일 테니)이 아니라 내가 의식한 어떤 표상이 하나의 의식 안에서 다른 표상들과 결합하지 못하도록 인식능력이 실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어떤 것을 추상한다(추출한다고 말하지 않고 어떤 것에서 추상한다고, 즉 내 표상의 대상에 대한 어떤 규정에서 추상한다고 말한다.이렇게 추상함으로써그 표상은 하나의 개념으로서 보편성을 얻게 되고, 그래서 그 표상은지성 안에 수용된다.
어떤 표상이 감각능력을 통해 인간에게 밀려올 때조차 그 표상에서 추상할 수 있다는 것은 그 표상에 주의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능력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고 능력의 자유를 그리고 자기 표상의 상태를 스스로 지배하는마음의 자주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를 고려해보면 감각 표상과 관련하여 추상 능력은 주의 능력보다훨씬 더 힘들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 주목하는 것은 아직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후자는 우리 자신에게 일어난 지각들을 방법에 따라 취합하는것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관찰자의 일지에 소재를 제공하고, 쉽게 광신과 망상으로 인도한다.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쏟는 것은 사람들과 관계 맺을 때 실제로 필BA 12 수적이지만 교제 중에 그것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에 그것은 거북하게 난처하게 만들거나 과장되게 꾸미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둘 모두에 대해 반대되는 것은 꾸밈없음(편안한 태도)으로, 타인이자신의 태도를 좋지 않게 평가하지 않을 거라고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다. 마치 거울 앞에 있는 자신이 어떤지 스스로 평가하려는듯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 혹은 마치 자기 말을 (단지 타인이 들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듣는 듯이 말하는 사람은 일종의 배우다. 그는 연기를 하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의 인격을 가상으로 꾸민다. 그리하여 만일 사람들이 이런 노력을 알아채면 그는 타인의 판단에서 손해를 입는다. 이런 노력은 속이려고 했다는 의심을 일으키니 말이다. -사람들은 이런 의심을 전혀 일으키지 않으면서 자신을 외적으로 내보이는 진솔한 태도를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한다(그렇다고 해서 이행동이 미적 기예와 취미 도야를 모두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행동은 단지 표현의 진실성만으로 호감을 준다. 그러나 동시에 천진함에서 비롯된 솔직함, 즉 이미 규칙이 된 꾸밈 기술의 부족에서 비롯된 솔직함이 말에서 드러나는 경우, 그것은 소박함이라고 부른다.
"표상을 가지고 있지만 의식하지는 않는다"는 것에는 모순이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로크가 이미 이런 이의를 제기했으며, 바로 그 때문에 로크는 그런 종류의 표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표상을 직접적으로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그 표상을 가지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의식할 수 있다. 이때 그와 같은 표상은 모호한 표상이라고 부른다. 그 외의 표상은 명확한 표상이고, 이 표상 전체의 부분 표상들과 부분 표상들의 결합까지 명확하다면 이 표상은 사고의 표상이건 직관의 표상이건 분명한 표상이다.
모호한 표상들의 영역은 이렇게 인간에게 가장 큰 영역이다. 그러나 이 영역은 단지 인간의 수동적인 부분에서 감각의 놀이로 인간에게 지각되므로 모호한 표상에 대한 이론은 오직 생리학적 인간학에만 속할 뿐이지 우리가 여기서 목표로 삼는 실용적 인간학에는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모호한 표상들을 가지고 놀이하면서, 상상력에서 애호되거나 애호되지 않는 대상들을 압도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모호한 표상들의 놀이거리가 되는 경우가 더 잦으며, 그때 우리 지성은 모호한 표상들이 착각임을 인정하면서도 그런모호한 표상들의 영향으로 불합리에 빠져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의 표상에 관한 의식이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구별하기에 충분할 때 그 의식은 명확하다. 그러나 의식에 의해 표상들의 합성도 역시 명확해진다면 그 의식은 분명하다고 부른다. 이 분명한 의식만이 표상들의 집합을 인식이 되게 만든다. 이때 인식 안에서는 저다양한 표상들의 질서가 생각되는데, 의식적인 모든 합성은 의식의통일을 따라서 합성의 규칙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표상과 반대되는 것은 혼란한 표상 (혼동된 지각)일 수 없다. 분명한 표상과 반대되는 것은 오직 불분명한 (단지 명석하기만 한) 표상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런 능력들을 탁월하게 소유한 사람을 수재라고 부르고, 이런 능력들을 아주 조금 타고난 사람을 (그는 항상 다른 사람에의해 이끌려갈 필요가 있으므로) 둔재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런 능력들을 사용할 때 심지어 독창성을 발휘하는 사람은 (독창성 덕분에이 사람은 대개 남의 지도 아래에서 배워야 하는 것을스스로 산출한다) 천재라고 부른다.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만약그 사람이 배운 사람으로 보이길 원하는 한, 반드시 그것을 알아야했다면, 무지한 사람이라고 불린다. 이런 요구가 없다면 그는 위대한천재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만 스스로 생각할 수없는 사람은 답답한(고루한) 사람이라고 불린다. -어떤 사람은 대단히 박식한 사람(자신이 배운 대로 타인을 가르치는 기계)이면서도 자신의 역사적 지식에 대한 이성적 사용과 관련해서는 매우 고루할 수있다. -자신이 배운 것을 공개적으로 전달할 때 학교 식의 강제 (그러므로 스스로 생각하는 자유의 결핍)가 드러나도록 행동하는 사람은 완고한 사람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학자나 군인, 심지어 신하일 수도 있다. 이 중에서 그나마 원칙상 가장 견딜 만한 사람은 완고한 학자다. 그래도 그에게서 우리는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신하들이 격식을 차릴 때 드러내는 꼼꼼함 (완고함)은 단지쓸모없을 뿐만 아니라 완고한 사람에게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자만심 때문에 심지어 우스꽝스럽게 된다. 그런 것은 무지한 사람의 자만심이기 때문이다.
표상들의 상태와 관련해서 내 마음은 능동적이면서 능력을 내보이든가 아니면 수동적이면서 감수성(수용성)으로 존속한다. 하나의인식 안에서 이 양자는 결합되어 있고, 이런 인식을 갖게 할 가능성은인식능력이라는 이름을 지니는데, 이 이름은 인식에서 가장 중요한부분, 즉 표상들을 결 합하거나 서로 분리하는 마음의 활동에서 가져온 것이다.
어떤 표상과 관련해서 마음이 수동적 태도를 취하고 따라서 그 표상을 통해 주관이 촉발된다면(그런데 주관은 자기 자신에 의해 촉발되기도 하고 어떤 객관에 의해 촉발되기도 한다), 그 표상은 감성적 인식능력에 속한다. 그러나 오직 행위(사고)만을 포함하는 표상들은 지성적 인식능력에 속한다. 전자는 하위의 인식능력이라고 하지만 후자는 상위의 인식능력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전자는 감각에 대한 내감의 수동성을 특성으로 지니고 후자는 통각의 자발성, 즉 활동에 대한 순수한 의식의 자발성을 특징으로 지닌다.
경험이란 경험적 인식이지만, 인식은 판단에 근거를 둠으로 인식은 성찰(반성)을 필요로 하고, 따라서 의식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서 인식은 다양을 통일하는 규칙에 따라 표상의 다양을 정돈하는 활동[의식], 즉 개념과 직관함과 구별되는 사고 일반을 필요로한다.
그래서 의식은 논리적 의식으로서 규칙을 제공하기 때문에 우선해야 하는 추론적 의식과 직관적 의식으로 구분되고, 전자(자기 마음의 작용에 대한 순수 통각)는 단순하다. 반성의 ‘나‘는 자신 안에 어떤다양도 지니지 않으며, 모든 판단에서 항상 하나이고 동일한데, 반성의 ‘나‘는 의식에서 오직 형식적인 것만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적 경험은 의식에서 질료적인 것과 경험적인 내적 직관의 다양,즉 포착의 ‘나‘ (따라서 경험적 통각)를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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