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패스는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며 자신의
감정과 고통에는 매우 예민하지만 타인에 대한 공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구와도 정서적 유대감을 맺지 못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 가공할 죄를 저지르고도 자신의 잘못을 전혀
느끼지 못하며, 거짓말과 속임수에 능하고 충동적이며, 
자신의 행동을 잘 제어하지 못하며, 자극을 추구한다. 
유년기와 청소년기에는 끊임없는 거짓말, 사기, 도둑질, 방화, 무단결석, 약물남용, 폭력, 급우 괴롭히기, 가출, 이른 
성행위 등의 문제행동을 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형제나 
다른 아이들에게 잔인하게 구는 경우도 많다. 청소년기 
이후에는 반사회적 행동이 나타나는데, 다양한 범법행위와 성적 문란 채무불이행이 나타나며, 가정생활에서도 무책임한 모습을 보인다. 이들의 정신병질은 평소에는 내부에 
잠재되어 있다가 범행을 통해서만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범행 사건이 알려졌을 때 주변의 친지나 이웃들은 전혀 알지 못했으며,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가정폭력이란 남편과 아내 (사실혼 포함),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 및 기타 동거가족을 포함한 가족구성원 중의 
한사람이 다른 구성원에게 의도적으로 물리적인힘을 
사용하거나, 정신적인 학대를 통하여 고통을 주는 행위를 
말한다.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서는 가정폭력의 범위를 신체적, 정신적 또는재산상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로 보고 있어 신체적 폭력에 국한하지 않고 정신적학대와 
재산상의 손해 및 손괴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폭력 개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의 경우는 ‘가정 내 폭력 (domestic violence)‘ 이라고 하여 법률혼과 사실혼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 외에 데이트 관계에서의 폭력도 가정폭력의 한 유형으로 포섭하여 넓게 이해하고 있다.

데이트폭력에 대해서는 명확한 법적 정의가 존재하지 않고, 폭력의 범위를 어디까지인정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일반적으로 데이트폭력이란 친밀한 관계
내지는 연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으로서 신체적 폭력 
이외에 언어적·정신적 폭력도 포함되며, 해당 관계가 종료된 이후에 결별 등을 이유로 자행되는 폭력도 이에 포섭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물리적 폭력 이외에 상대방의 일상을 
통제하는 것도 그 자체가 폭력일 수 있으나, 연인 관계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통제 행위는 남다른 ‘애정‘이나
‘보호‘로 자연스럽게 수용되고, 물리적 폭력이 있을 때 
비로소 문제 상황으로 인식되는경향이 있다. 
즉 데이트폭력은 결별과 같은 특정 상황에서 갑자기 
발생하기보다는 물리적 폭력이 행사되기 전에 이미 
일방이 타방을 통제하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부모 또는 아동을 돌보는 사람이 아동에게 극히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며 언어적 또는 정서적으로 공격하거나 공격의 위협을 가하는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아동의 행동이 ‘부모의 죽음 또는 자살까지 
불러올 수 있다"고 위협하는 것, 아동을 어두운 곳에 
가둬두는 등의 위협 또는 처벌로 무서움에 떨게 하는 것, 
아동을 아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사랑이나 애정을 
주지 않는 것, 아동이 정상적인 취약점을 표하거나 사랑을 
구할 때 주거나 놀려주는 것 등이다. 이런 행위는 아동에게 당장 심각한 손상을 가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아동을 
정서적으로 불안하게 함으로써 아동의 대인관계나 사회 
적음에 장애를 불러일으키게 된다는 점에서 그 문제가 
심각하다.

정서적 학대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아동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정서발달장애와자존감결여)에 있다. 그 영향은 성질상 
그 존재와 인과관계 입증이 매우 어렵다. 또정서적 학대는 
다른 유형의 학대가 있을 때 거의 언제나 부수적으로 
수반되는 현상이다.

부모만이 정서적 학대의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동에 
대하여 일정한 보호교육책임이 있는 어른들도 정서적 
학대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또 다른 아동이다른 아동을 
정서적으로 확대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왕따(bullying) 라고 부른다. 학교에서의 지속적인 왕따는 피해아동에게 치명적인 해악을 가하기 때문에왕따의 존재가 인지되면 
아동보호체제는 능동적이고 신속하게 개입해야 한다.

아동복지법은 특례법상의 아동학대범죄에 살인죄를 
추가하였다(제1장 제3조제8호). 또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로 아동보호자의 양육교육 지원을 추가(제1장제4조 
제6항) 하였다. 3장에서는 아동에 대한 보호서비스 및 
아동학대의 예방 및 방지에 대한 관련기관의 역할 및 
책임내용도 구체화하였다. 경찰관이 직무상 아동학대의
의심사례를 발견하면 아동보호전문기관에 통보하도록 
의무화(제27조의2)하였다. 아동학대 관련 보호시설 및 
의료기관은 정당한 사유 없이 아동의 인수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하였고(제27조의3), 피해아동, 
그 가족 및 학대행위자에 대한정보와 아동학대예방사업에 대한 정보를 관리할 아동학대정보시스템을 구축·운영(제28조의2)하도록 하였다.

죄형법정주의란 범죄가 되는 행위는 무엇인지, 그 행위에 
대하여 어떠한 형벌이 과해지는지를 법률에 미리 정해놓아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다. 독일의 형법학자인 포이어바흐는 이것을 "법률이 없으면 범죄도 없고, 형벌도 없다(nullum cri-men, nullapoena sine lege)"는 표현으로 설명했다. 

우리의 경우 죄형법정주의의 법적근거는 헌법 제12조, 
제13조 및 형법 제1조이다. 즉 헌법 제12조 제1항 후단에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구속 · 압수수색 또는 심문을 받지아니하며, 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 · 보안처분 또는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제13조 제1항에 "모든 국민은 행위시의법률에 의하여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는 행위로 소추되지 아니하며, 동일한 범죄에 대하여 거듭 처벌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헌법 이념에 따라 형법 제1조 제1항은 "범죄의 성립과 처벌은 행위시의 법률에 의한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형법에는 어떠한 행위가 범죄에 해당하는지, 그러한 행위에 대해서는 어떠한 형벌이 과해지는지 규정되어 있다. 
범죄에 대응해서 발생하는 주된 법적 효과는 형벌이지만, 
형사적 제재수단에는 형벌 이외에 보안처분이라는 
것도 있다. 
치료감호나 보호관찰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보안처분 
제도이다. 형벌의 주된 목적이 응보라면 보안처분의 
그것은 재범방지라는 점에서 둘은 다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 오래된 범죄 제재수단은 형벌이므로 형벌 및 
보안처분에 관한 법을형법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그러므로 형법을 범죄와 형벌에 관한 법이라 정의하는 
것이나, 그것을 범죄와 형벌 및 보안처분에 관한 법이라 
정의하는 것은 모두옳다.

한편 형법이란 용어는 좁은 의미로 쓰일 때도 있고 넓은 
의미로 쓰일 때도있다. 협의의 형법은 형법전을 가리킨다. 
형법전은 1953년 9월 18일에 제정된 형법이라는 제목의 
법전을 뜻한다. 형법전은 총칙과 각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범죄와 형벌에 관련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협의의 형법을 형식적 의미의 형법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에 반해 광의의 형법은 범죄행위와 그에 상응한
형사제재에 관한 모든 법규범을 뜻한다. 즉 그러한 내용의 
것이라면 그 존재형식은 형법전이어도 좋고 다른 법률이더라도 무방하다. 예를 들어, 상법에는 특별배임죄가 규정되어 있다(제622조), 상법은 범죄와 형벌을 정하기 위한 법규범은 아니지만, 그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형벌이라는 
강력한 제재가 필요할 수도있을 것이기 때문에 특별배임죄와 같은 형벌조항을 마련하고 있다. 특별배임죄는협의의 
형법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광의의 형법에는 포함된다. 
광의의 형법을 실질적 의미의 형법이라 부르기도 한다.

예비·음모는 목적하는 범죄를 실현하기 위해 행하는 일체의 준비행위를 가리킨다. 준비행위를 통해 실현하려는 범죄를 본범이라 한다. 형법상 범죄는 원칙적으로 본범이며, 그 준비행위가 별개의 범죄가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즉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에만 예비 · 음모를 처벌하며(제28조), 이 특별한 규정의 죄를 보통 예비죄라 부른다. 엄밀한 의미에서 예비와 음모는 서로 구별되는개념이지만, 형법의 규정은 예비와 음모를 늘 병렬적으로 규정하여 같이 취급하고 있으므로 구별의 실익은 없다.

미수란 범죄의 실행에 착수하여 행위를 종료하지 못하였거나 결과가 발생하지 않은 때를 말한다. 미수는 실행의 착수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예비와 다르다. 미수범도 예비와 마찬가지로 모든 경우에 다 처벌되는 것이 아니라 법률에
특별히 정해진 경우에만 처벌된다(제29조). 
이러한 경우를 미수범이라 하며, 예비죄에 비해 처벌범위가 상대적으로 더 넓다. 미수는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우선 ① 장애미수는 행위자가 범죄를 실현하고자 했으나 
의외의 장애로 인하여 기수에 이르지 못한 경우를 의미한다. 이 경우에는 기수범보다 형을 감경할 수 있다(제25조). 
다음 ② 중지미수는 실행의 착수 이후에 행위자가 스스로 
행위를 중지하거나 결과의 발생을 저지한 경우를 의미한다. 이 경우에는 기수범보다 형을 감경하거나 면제해줘야 한다(제26조).
마지막으로 ③ 불능미수는 범죄의 수단이나대상의 착오로 인해 결과의 발생이 애초에 불가능이었지만, 행위 자체가 
위험한경우를 의미한다. 불능미수는 기수범보다 형을 
감경하거나 면제해 줄 수 있다(제27조). 살인미수를 예로 
들면, 형법 제254조에 "전 4조(살인 및 존속살해죄, 영아살해죄촉탁 승낙살인죄, 위계·위력에 의한 살인죄의 미수범은 처벌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모든 미수범의 규정 형식은 
이와 같다. 예비죄와 다른 점은 미수범 조항에 별도의
형벌을 정해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수범의 유형 중 
어디에 해당하느냐에 따라제25조에서 제27조의 규정을 
적용하여 형벌을 정하면 되기 때문이다.

구성요건이란 위법한 행위 가운데 특히 범죄로 하여 처벌할 필요가 있는 행위를 추상적으로 유형화해 놓은 것으로, 
금지의 실질 내지 자료를 말한다(추상화된위법유형).
즉 구성요건은 금지된 행위의 정형적 불법내용을 형성하고 다른 범죄와구별되는 특수한 범죄정형의 형태와 내용이 
되는 모든 요소를 결합해 놓은 것이다. 다만 구성요건과 구성요건해당성은 구별되어야 한다. 구성요건은 추상화된
위법행위의 유형임에 반하여 구성요건해당성이란 구체적인 행위가 불법유형인구성요건에 부합하는 것을 말한다.

위법성은 범죄성립요소의 하나로서 법질서 전체의 입장에서 내려지는 행위에 대한 부정적 가치판단이다. 다만 위법성은 불법과는 형법상 상이한 개념으로이해되고 있다. 즉 위법성은 전체 법질서에 준거하여 행위가 전체 법질서와 충돌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불법은 위법한 행위가 갖는 내용적 측면에서의 실질적인 반가치내용이다. 
예컨대, 절도와 살인은 각각 절도죄와 살인죄에 해당하는 
행위로서 동일하게 위법하지만, 절도와 살인의 무게는 달리하며, 이때 그 무게가 불법의 질과 양이라 할 수 있다. 
즉 불법은 반가치성의 무게에 따라 그 크기가 다르며, 이는 결국 형벌의 종류와 크기로 나타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위법성단계에서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의 위법 여부에 대한최종적인 판단이 이루어진다. 
다만 구성요건은 위법한 행위를 유형화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는 법이 허용하는 특별한 사유(위법성조각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한 위법하다. 
따라서 형법은 위법성의 내용을 별도로 규정하지않고 
위법성조각사유만을 예외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책임이란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위법행위를 한 행위자에 
대한 비난가능성을의미한다. 즉 행위자가 위법행위를 
하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을 결의하고 
위법하게 행위하였다는 점에 대하여 가해지는 비난 내지 
비난가능성이책임이다. 책임은 행위의 위법성이 확정된 
후에 비로소 제기되는 문제이므로 "책임 없는 불법"은 있을 수 있으나 "불법 없는 책임" 은 생각할 수 없다. 

어떤 행위가 구성요건에 해당한다는 것과 위법하다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구성요건에 해당한다는 것은 그 행위가 형벌법규의 개개 
구성요건(불법내용에 합치함을 말하고, 위법하다는 것은 
그러한 불법 내용에 합치한 행위가 법질서 전체의 입장에서 허용되지 아니함을 말한다. 
다만 구성요건이란 위법한 행위를 유형화해 놓은 것이므로,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위법한것으로 되며(구성요건은 위법성을 징표함),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의 위법성을 배제시켜 주는 특별한 사유가 있는 때 위법성이 조각될 뿐이다.

위법성은 법질서 전체의 입장에서 내리는 행위에 대한 
객관적 판단이다. 여기서 "객관적 판단"이란 평가방법의 
객관성, 즉 일반적 가치판단 내지 보편타당한 가치판단이라는 의미일 뿐, 평가대상이 객관적인 것에 한정된다는 것은 
아니다. 위법성판단에서의 평가대상에는 주관적 요소를 내용으로 하는 행위반가치도포함된다. 이에 반하여 책임은 
행위자의 행위의사에 대한 비난가능성 유무를 판단하는 
주관적 판단이다. 이와 같이 주관적 요소는 위법성과 
책임에 있어서 그평가대상이 되지만, 그 의미는 상이하다. 
즉 위법성판단에서는 행위자가 무엇을 의욕하고 
실현하였느냐가 문제되고, 책임판단에서는 행위의사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이를 비난할 수 있느냐가 문제된다.

정당방위는 현재의 침해에 대해서만 허용된다. 여기서 침해란 사람에 의한공격이나 위험을 의미한다. 즉 법에 의해 보호되는 법익에 대한 공격이면 그 침해가 목적이나 고의에 의한 것이든 과실이나 책임 없는 자의 행위에 의한 것이든묻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의 행위가 아닌 자연현상이나 동물에 의한 침해에 대해서는 정당방위를 할 수 없다. 다만, 동물에 의한 침해에 대하여는 긴급피난이 가능할 뿐이고, 만약 동물에 의한 침해가 사람에 의해 사주된 경우라면 이는 사람이 동물을 도구로 이용한 것에 불과하므로 결국 사람에 의한 침해가 되어 그에대한 정당방위가 가능하다. 또한 침해는 적극적인 움직임 (작위)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렇지 않는 매도 있다. 예컨대 부부간에는 부양의무(민법 제826조)가 있는데, 일방의 배우자가 생명이 위급한 때 상대 배우자가 적극적으로 구조행위를 하지 않음 (부작위)으로써 생명에 대한 침해가 발생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즉 부작위에 의한 침해도 가능하다.

그러나 침해가 존재한다고 하여 무조건 정당방위가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즉 정당방위에서 침해는 현재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과거의 침해나 장래에 나타날 침해에 대해서는 정당방위를 할 수 없다. 여기서 ‘현재‘란 법익에 대한 침해가급박한 상태 즉 침해가 발생하기 직전인 경우, 바로 발생하거나 아직 침해가 계속되고 있는 때 즉 침해 발생 이후 종료나 그 직후까지를 포함한다. 침해가 바로발생한 때 정당방위가 가능한 것은 당연하며, 침해가 발생하기 직전이라도 방어를 지체하여 침해가 발생하게 되면 이미 방어의 기회를 놓치게 되므로 이때에도정당방위가 허용된다. 따라서 그 침해행위가 반드시 실행에 착수하여 미수에 이를 것을 요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범죄가 이미 기수에 달하였더라도 그 침해행위가 범죄현장에서 계속되고 있는 한 정당방위는 가능하다. 따라서 전날 밤 도둑을 맞았는데 다음날 길에서 도둑을 만난 경우에는 정당방위를 할 수 없지만, 현행범인 절도범을 추격하여 도난당한 물품을 가져오는 것은 정당방위에 해당할수 있다.

한편, 가정폭력의 경우처럼 과거에 계속적으로 법익침해가 있고 앞으로도계속될 것이라고 예상되는 경우에 현재의 침해에 해당하여 정당방위를 할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즉 ‘예방적 정당방위‘가 허용될 수 있는가이다. 이에 대하여 가정폭력이나 아동학대의 경우 예외적으로 예방적 정당방위를 허용하는 입법안이제시된 바도 있으나 형법상 정당방위 규정상으로는 이를 인정하기는 어렵다. 정당방위는 예외적으로 자기법을 허용하는 것이므로 침해의 현재성은 엄격히 해석되어야 하고, 예방적 정당방위는 침해의 현재성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침해의 현재성이 있는가는 피침해자의 주관이 아닌 객관적인 상황에 따라결정되어야 하며, 이는 급박한 침해가 이루어진 때를 기준으로 한다. 따라서 담위에 철조망을 설치하는 경우처럼 미래의 도둑으로부터의 침해를 대비하기 위한조치는 설치한 당시에 정당방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침해가 발생한 때, 즉 도둑이 담을 넘는 때를 기준으로 보아 현재의 침해에 대한 정당방위가 되는 것이다.

정당방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자기 또는 타인의 법칙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이어야 한다. 
방위행위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행위자에게 방위의사(주관적 정당화요소)가 있어야 한다. 다만 방위의사는 그것이 
방위행위의 동기 또는 유일한 요소가 될 것을 요하는 것은 
아니므로 중오나 분노, 복수와 같은 다른 동기가 있는 때에도 방위의사가 주된 기능을 하는 한 정당방위가성립하는 데 
문제되지 않는다.

방위행위란 그 침해가 계속되지 못하도록 침해를 배제하는 모든 행위를 포함하므로 침해에 대한 순수한 방어적 방위인 보호방위뿐만 아니라 침해자에 대한 적극적 반격인 반격 
방어도 이에 해당한다. 다만 제3자에 대하여 반격하는 경우에는 그것이 침해자에 대한 방위의 일부분이 되는 경우에 
한하여 정당방위로 허용될 뿐이다.

정당방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방위행위에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상당한 이유란 침해에 대한 방위가 사회상규에 비추어 상당한 정도를 넘지 아니하고 당연시되는 것을 의미한다. 정당방위는 자기보호뿐만 아니라 법질서 수호를
위해 인정되는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다른 피난방법이 없었을 것, 즉 방위행위가최후수단이어야 하며 필요최소한의 범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보충성을 요하지아니하고, 침해된 법익이 방위된 법익을 가치적으로 초과하지 않을 것, 
즉 엄격한 법익균형성도 요하지 않는다. 결국 방위행위의 상당성이 인정되기 위해서는방위행위의 필요성이 요구된다.
 방위행위는 침해의 즉각적인 배제가 확실히 기대되고 
위험의 제거가 보장되는 때에 그 필요성이 인정되므로, 
정당방위의 객관적요건이 충족되면 방위행위의 필요성은 
당연히 인정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방위행위가 방어를 
위한 적합한 수단이고 그것이 상대적으로 경미한 피해를 
입힌 경우뿐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는 때에는 보다 
큰 피해를 주더라도 방위행위의 필요성이 인정되며, 
따라서 상당성을 충족한다. 다만, 방위행위에 상당한 
이유가있는가는 객관적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위한 방위행위
(대법원 1989, B. 8. 선고 89358 판결)

갑과 을이 공동으로 인적이 드문 심야에 혼자 귀가중인 
병녀에게 뒤에서 느닷없이 달려들어양팔을 붙잡고 어두운 골목길로 끌고 들어가 담벽에 쓰러뜨린 후 같이 음부를 
만지며 반항하는 병녀의 옆구리를 무릎으로 차고 억지로 
키스를 함으로 빙녀가 정조와 신체를 지키려는일념에서 
엉겁결에 갇의 혀를 깨물어 절단상을 입혔다면, 병녀의 
범행은 자기의 신체에대한 현재의 부담한 침해에서 벗어나려고 한 행위로서 그 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와 그 목적및 
수단 행위자의 의사 등 제반 사정에 비추어 위법성이 결여된 행위이다.

일방적 공격에 대한 방위행위
(대법원 1989, 10. 10. 선고 89623 판결)

피고인이 방안에서 피해자로부터 깨진 병으로 찔리고 이유 없이 폭행을 당하여 이를 피하여빙밖 홀로 도망쳐 나오자 
피해자가 피고인을 쫓아 나와서까지 폭행을 하였다면, 
이때 피고민이 방안에서 피해자를 껴안거나 두 손으로 멱
살부분을 잡아 흔든 일이 있고 홀 밖에서 서로 붙잡고 밀고 당긴 일이 있다고 하여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는 
피해자에 대항하여 폭행을 가한 것이라기보다는 피해자의 
부당한 공격에서 벗어나거나 이를 방어하려고 한 행위였다고 보는 것이 상당하고 그 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 목적, 수단, 의사 등 제반 사정에비추어 위법성이 결여된 행위라고 볼 것이다.

현재 신상공개제도는 성범죄자 신상정보 등록과 등록정보의 공개 및 고지로 이원화되어 있는데, 전자에 관한 사항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하 ‘성폭력처벌법‘이라 함)에 근거하여 법무부장관이 집행하고, 후자에 관한 사항은「아동ㆍ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청소년성보호법‘이라 함)에 근거하여 여성가족부장관이 집행하고 있다.

우선, 등록대상 성범죄로 유죄판결이 확정된 자나 등록정보의 공개명령이확정된 자가 신상정보 등록대상자가 되는데 
(성폭력처벌법 제42조), 이들은 판결이 확정된 날부터 30일 이내에 ① 성명, ② 주민등록번호, ⑧ 주소 및 실제거주지, 
④직업 및 직장 등의 소재지 ⑥ 연락처(전화번호, 전자우편주소를 말함), ⑥ 신체정보 (키와 몸무게) ⑦ 소유차량의 
등록번호를 자신의 주소지를 관할하는 경찰관서의 장에게 제출하여야 한다. 다만, 등록대상자가 교정시설 또는 
치료감호시설에 수용된경우에는 그 교정시설의 장이나 
치료감호시설의 장에게 신상정보를 제출함으로써 이를 
갈음할 수 있다(동법 제43조 제1항). 등록대상자는 
기본신상정보를 제출한그 다음 해부터 매년 주소지를 
관할하는 경찰관서에 출석하여 사진을 촬영해야하며(동조 제4항), 제출한 신상정보가 변경된 경우에는 그 사유가 
발생한 날로부터20일 이내에 해당 사유와 변경내용을 
제출해야 한다(동조 제3항).

미투운동이 확대되는 가운데 성폭력범죄의 가해자가 
피해자를 무고죄나 명예훼손죄 등으로 고소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키고자 하는 이른바 역고소가 문제되고 있다. 억울하게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무고나명예훼손 등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으나, 일부 가해자들은 피해자에 대한 심리적 
압박이나 보복의 용도로 역고소를 남용하고 있다. 
이경우 역고소 사건의 피의자로서 범죄혐의를 벗어야 하는 성폭력 피해자는 자신이 피해를 입은 성폭력 사건에 주력할 수 없고, 역고소 사건의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성폭력 
상황을 또 다시 진술해야 하는 고통을 겪게 된다. 
이로 인해 일부피해자들은 성폭력범죄의 실체를 밝히고 
피해구제를 받는 것을 포기하기도 하는바, 성폭력범죄 
가해자 측은 역고소를 법적 대응 전략 중 하나로 악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이 제시되고 있는데, 우선 역고소를 제기한 가해자가 성폭력범죄로 
유죄가 인정되면 가중해서 처벌해야 한다는의견이 나오고 있다. 또한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의 적용을 축소 
내지는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무고죄의 고소가 있는경우에는 성폭력 
사건의 사실관계가 정리된 이후로 무고 사건의 수사 및 
재판을 유예하는 방안도 모색되고 있다.

N번방을 통한 디지털 성폭력의 실체가 알려지면서 
피의자의 신상공개 및 엄벌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2020년 4월 23일 정부는 관계부처 합동으로
‘디지털 성범죄 근절대책‘을 발표했는데, 해당 대책을 통해 처벌의 실효성 강화, 아동·청소년에 대한 확실한 보호, 
수요 차단 및 인식 개선, 피해자 지원내실화를 위한 
분야별 과제들이 제시되었다. 뒤이어 국회는 이른바 ‘N번방 방지법‘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개정된 법률의 주요 내용으로는 피해자의 동의가 
범죄 성립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형법상 미성년자 의제강간죄의 연령기준이 13세에서 16세로 올라갔고(형법 제305조 제2항), 강간이나 유사강간 등의 예비 · 음모죄를 처벌하는 규정이 마련되었다(형법 제305조의3). 

형벌과 보안처분

범죄에 대한 형사제재로는 형벌과 보안처분이 있다. 
우선 형벌이란 국가가 범죄자에대하여 책임을 전제로 
과하는 법익의 박탈을 일컫는바, 우리 형법이 규정하고 
있는 형벌에는 사형, 징역, 금고, 자격상실, 자격정지, 벌금, 
구류, 과료, 몰수의 9종이 있다.

한편 보안처분이란 형벌로는 행위자의 사회복귀나 범죄 
예방을 도모할 수 없거나 행위자의 특수한 위험성으로 인해 형벌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경우에 과해지는 예방적
성질의 목적적 조치를 말한다. 형벌은 책임을 전제로 하고, 책임의 양을 넘을 수 없기때문에 책임무능력자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그 적용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특별한 위험성이 있는 행위자로 인한 보안이나 그 개선의 필요성도 고려하지 않는다. 이에 행위자를 사회에 복귀시키고 장래의 범죄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 할 형사정책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보안처분이 또 다른 형사제재로 기능하고 있다. 

요컨대 형벌은 책임을 전제로 책임주의의 범위 내에서 
과하여지는 것임에 반해 보안처분은 행위자의 사회적 
위험성을 전제로 특별예방의 관점에서 선고된다. 
또한 형벌이 행위의 사회윤리적 비난을표현하는 과거를 
대상으로 하는 제재라면 보안처분은 장래에 대한 예방적 
성격을 가진 제재라는 점에서 양자는 구분된다.

우리 형사체계에서 검사의 지위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유일하게 수사 종결권을 가지고 
사법경찰관리를 지휘·감독한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지위를 지녀왔다. 경찰은 검사의 지휘에 복종하고, 내사와 
구별되는 의미로서 수사를 거친 모든 사건은 검사에게 
송치해왔다. 검사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하고, 수사와 
기소를 분리시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함이 타당하다는 
점에서 경찰수사권 독립론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왔고, 
2018.6. 사법제도개혁 논의에 따라검경간 수사권 조정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에 따라 2020.2. 형사소송법이 일부 개정 되었으며(법률 제16924호),
그 시행시기와 구체적인 내용을정하는 대통령령(가칭 ‘일반적 수사에 관한 준칙)을 제정하기 위해 2020.7. 현재 
관련부처의 의견을 수렴 중이다.

개정 형사소송법은 수사와 기소를 완벽하게 분리하지는 
못하였으나, 경찰에일부 수사종결권을 인정하고, 검사의 
포괄적 지휘권을 폐지하고 개별적 . 구체적통제범위를 
마련하여 상호간 견제가 가능하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권력분립의 측면에서 보다 진일보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를 통해 향후 사법경찰관리와 검사양 수사기관이 견제와 협력 속에서 국민을 위한 민주적이고 효율적 수사권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되고 있다.

형사소송에서 검사 및 피고인, 법원을 소송주체라고 하고, 특히 검사와 피고인을 당사자라 지칭하기도 한다. 소송주체 간의 역할과 관계를 즉, 이들의 구조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 형사절차의 모습이 달라진다. 이를 ‘소송구조‘라고 한다.

형사소송의 구조는 크게 직권주의(Inquisitorial System)와 당사자주의(Adversary system)두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흔히 대륙법계는 직권주의, 영미법계는 당사자주의로
연결되지만 반드시 논리 일관된 것은 아니다. 직권주의는 
소송절차의 진행을 법원이 직접 주도되면서 심증을 형성해 나아가는 형태다. 반면, 당사자주의에서 소송절차는 당사자로 지칭되는 검사와 피고인 간의 공격·방어활동에 의해 
주도되고, 법원은 이 과정에서 심증을 형성하고 최종적인 
유, 무죄의 판단을 내리게 된다. 
일반적으로 공소장일본주의, 공소장변경제도, 상호신문제도 등은 당사자주의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직권주의나 당사자주의의 구분은 현재는 어디까지나 이론적 의미에 제한되고, 대부분 국가의 형사소송절차는 
양 구조의 특징을모두 갖고 있는 예가 대부분이다.

형사소송에서 적법절차원칙은 형벌권의 대상이 된 피고인을 보호하기 위한장치다. 이상적으로 본다면, 최종적인 결론이 자신에게 불이익하더라도 받아들수 있을 정도로 공정한 
절차를 의미한다. 결국 최종적 결론을 판단하고 제시하는
자가 공정하고(공정한 법원), 불이익을 받게 되는 자가 자신을 옹호하고 반박할 수있는 기회가 충분히 보장된 절차를 
말한다(피고인의 방어권 보장). 형사소송법은 전체 절차에 걸쳐 적법절차원칙을 실현하기 위한 장치를 곳곳에 설정하고 있다. 법원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법관에 대한 제척·기피·회피제도(뽕사소송법 제17조 이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역량이 부족한 피고인을 보호하기
위한 변호인제도(동법 제30조 이하), 체포·구속 등 수사기관의 강제처분에 대한 명장주의원칙 적용(동법 제200조의2 이하),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를 사실인정에 활용할수 없도록 하는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 (동법 제308조의2) 등은 그 
대표적 예이다.

형사소송법은 체포·구속이나 압수수색과 같이 형사소송절차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강제처분은 원칙적으로 영장에 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헌법 제12조 3항).
특히 수사기관의 강제처분에 대해서는 영장주의와 함께 
명시적인 법적 근거가전제될 것을 요구한다(강제수사법정주의, 형사소송법 제199조 1항). 이것은 임의적 수단에 비하여 신체의 자유나 재산권, 프라이버시 등 기본권에 대한 
침해강도가 높은강제처분을 보다 강력히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소송절차를 통해 증명하려는 또는 증명이 필요한 사실을 
‘요증사실‘이라고 한다. 가령, 갑의 살인죄와 관련하여
 ‘갑이 음을 살해하였다."는 것이 요증사실이고,
검사는 증거에 의하여 이를 증명 또는 입증하여야 한다
(거증책임 또는 입증책임의 부담).

이른바 무죄추정원칙에 따라 피고인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갑이 을을 살해하였다.‘는 요즘사실에 대해 법원이 
피고인의무죄에 대한 합리적 의문을 해소하여 (beyond reasorable doubts) 유죄의 확신에 이를 정도로 검사가 
증명하지 못하였다면, 피고인이 자신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특별한 증명을 하지 않더라도 무죄가 될 수밖에 없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다만, 모든 사실에 증명을 요하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다.‘
와 같이 누구나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은(공지의 사실) 증명이 필요없다. 증명이 금지되는 경우도 있다. 증인은 증언으로 
인하여 자기 또는 친족 등이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는 
사실이 노출될 수 있다면, 증인을 거부할 수 있다(증인의 증언거부권, 형사소송법 제148조), 실체적 진실보다 더욱 
중요한 가치를 보호할 필요가 있기 때문으로 증언거부권이 인정되는 범위에서 증명은 금지된다.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은 증거의 획득절차에 위법행위가 
게재된 경우, 증거능력을 부정하여 사실인정자료에서 배제하는 증거법적 원칙으로 정의된다. 

그 이론적 근거로, 헌법이 규정한 적법절차원칙을 구체적 
형사소송절차에서 관철하기위한 것이라거나(헌법적 보장설 또는 규범설), 장래의 위법수사를 억지하기 위한 수단(억지효설) 또는 형사사법절차에 대한 시민의 신뢰와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사법의 염결성설, Judicial Integrity)
으로 이해하는 견해 등이 있다. 

위법수사의 억지효과에 착안한 억지효설도 설득력 있는 
중요한 논거는 맞지만, 만일 억지효설을 지나치게 
부각시킨다면 수사기관의 위법이 아닌 사인의 위법행위를 통해 획득된 증거는 배제할 수 없다는 논리적 귀결에 
도달하게 된다.

법원 또는 법관의 의사표시인 재판에 대해 불복하여 상급법원의 판단을 요구하는 것을 ‘상소‘라고 한다. 상소가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신속한 절차진행 등을 고려하여 처음부터 상소가 불가능한 재판도 있고, 상소가 가능하여도 일정기간(상소제기기간 내) 또는 적어도 당사자가 상소를 통해 구제받을 이익이 상소의이의 남아있어야 가능하다.

상소제도는 통해 법원 간 판단의 통일성을 확보할 수 있고, 법령해석이나 사실인정과 관련한 오류를 수정할 기회를 갖음으로써 당사자의 불이익을 구제할수 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상소를 담당하는 법원을 상소심이라고 하는데, 상소심의 기능과 관련하여 이론적으로 법률심과 사실심의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법률심은 법령해석의 통일성에 중점을 두었다면 사실심 법령해석의 통일성 확보도 목적으로 하지만 사실오인으로 인한 당사자의 피해구제에 중점을 둔다. 보통 어느 국가나 최고법원은 하급심의 사실심리가 충실할 것을 전제로 상급법원에 대한 상소남발을 제한하여 법령해석의 통일성 확보와 중요한 사법정책적 판단에 최고법원이 보다 집중할 수 있도록 법률심에 가까운 형태를 갖는 예가 많다. 한편 상소심으로서의 사실심도 복심과 속심의 두 종류로 다시 세분된다. 복심은 말 그대로 하급심의 판단을 완전히 뒤엎고 다시 재판하는 구조를말한다. 따라서 복심인 상소심은 논리적으로 항시 하급심 결과를 파기하고 자기스스로 다시 재판을 하게 된다(기자). 반면, 속심은 하급심의 연장선에서 심리를 속행하는 형태로, 파기자판을 원칙으로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상소이유가없다면 그대로 상소기각판결을 할 수도 있다. 아무래도 속심구조를 취하면, 동일한 사실심으로서 상소심이라도 하급심의 사실심리결과를 인용하는 등으로 반복적 절차를 회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상소 등 어떠한 수단에 의하더라도 더 이상 재판결과에 대하여 불복할 수 없는 상태를 ‘확정‘이라고 한다. 특히 종국재판으로서 유죄판결이 확정되면, 이제남은 것은 선고된 형의 집행절차 밖에는 없게 된다. 이처럼 재판이 확정단계에도달하면, 그에 따른 효력이 발생하는데 이를 확정력이라고 한다.

실체재판에는 일사부재리효가 발생하지만, 형식재판에는 
일사부재리효가 발생하지 않는다. 가령 검사가 공소를 제기하면서 법원을 잘못 지정한 경우, 해당 법원은 유, 무죄와 
같은 사건의 실체에 대하여 판단할 필요도 없이 관할위반판결으로 기소된 사건의 절차를 종결한다. 관할위반판결이 
확정되더라도 검사는 다시 법원을 정확히 지정하여 공소제기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공소제기와관련한 형식적 하자가 발생한 것에 불과하고, 사건의 실체에 대해서는 전혀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검사는 형식적 하자를 수정할 수 
있다면 이를 수정하여 다시 기소하여 법원에 대하여
얼마든지 사건의 실체에 대한 판단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죄 또는 무죄판결이 선고되어 사건에 대한 최종적 판단이 내려졌고, 더 이상 다툴 수 없는 상태인 확정에 도달하였다면, 검사는 동일한 사건을다시 기소하여 그 실체에 
대한 판단을 요구할 수 없다. 만일 이를 허용한다면, 사건의 실체에 대한 최종적 판단은 무한히 반복되고, 피고인은 
동일한 사건으로 거듭 처벌될 수 있게 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가 바로 ‘일사부재리효‘다. 실제 이런 일이발생한다면, 검사의 공소제기에 대하여 
법원은 형식재판의 한 형태인 면소판결을 하게 된다.

재심은 그 결과가 피고인에게 이익이 되는 경우로 
한정되는가 아니면 불이익한 경우도 포함되는가에 따라 
이익재심과 불이익재심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입법례에 
따라서는 실체재판의 무오류성을 강조하는 시각에서 
불이익재심을 허용하는 예도 있지만 한국은 이익재심만을 허용하고 있다(참고로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후현행 
형사소송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적용되었던 구 형사소송법에서는 불이익재심도 가능하였다).

재심절차는 크게 2단계로 진행된다. 먼저 정당한 재심사유가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재심개시절차가 있고, 이 과정에서 재심이유가 있다면 재심개시결정에따라 재심이 청구된 심급에 따라 재심심판절차가 이어지게 된다. 재심심판절차의성격은 본질적으로 확정 전 심급에 따른 공판절차와 
차이가 없다. 재심청구는 유죄의 선고를 받은 자나 그 
법정대리인(만일 유죄의 선고를 받은 자가 사망한 때는 
그 배우자, 직계친족, 형제자매도 청구가능)이 유죄의 
확정판결 또는 그와 관련한 항소나 상고기각판결에 대하여 선고받은 자의 이익을 위해 할 수 있다. 검사도 청구가 가능하다. 재심심판절차에서도 유죄판결과 그에 따른 형이 선고될 수도 있다. 그러나항소나 상고의 예와 같이 재심심판절차에서도 불이익변경금지원칙이 적용되기때문에 피고인에게 결과적으로 불이익한 결과는 발생하지 않는다. 재심심판절차에서 판결이 확정된 때에 그 이전 원판결은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검사동일체원칙이란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모든 검사가 
마치 단일한 기관처럼 직무를 수행한다는 것을 말한다. 
검찰청법 제7조 1항은 검사에게 검찰사무와 관련하여 
소속 상급자의 지휘 감독에 따를 것을 요구하고(상명하복원칙), 동법 제7조의2에서는 검찰총장, 각급 검찰청의 검사자 및 지청장이 자신의 권한에 속하는 직무를 소속 검사에게
위임하거나(직무위임권), 소속 검사의 직무를 자신이 
승계하거나 다른 검사에게 이전시킬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직무승계 및 직무이전권). 이러한 규정에 의하여 독
임제 관청으로서 독립성이 보장된 검사지만, 검찰조직 내
부의 통제에 의하여 검찰사무의 통일성을확보함과 동시에 강력한 재량권을 갖는 검사의 권한을 통제하여 검찰권 
남용을 막을수 있다는 것이다.

성매매에 대한 수요는 성매매 시장을 형성, 유지, 확대하는 주요한 원인인바, 우리 사회는 잘못된 접대문화 등으로 인하여 성매매에 대한 관대한 인식이팽배해 있으며, 성매매 집결지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유형의 성매매뿐만 아니라 산업형(겸업형) 성매매, 신·변종 성매매 등 다양한 유형의 성매매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고, 불법체류자나 이주노동자들의 성매매, 청소년·노인의 성매매 등 성매매의 양상도 점차 복잡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매매에 대한 지속적인수요를 억제하지 않는다면, 성인뿐만 아니라 청소년이나 저개발국의 여성들까지성매매시장에 유입되어 그 규모가 비약적으로 확대될 우려가 있고, 재범방지 교육이나 성매매 예방교육 등이 형사처벌과 유사하거나 더 높은 효과를 갖는다고볼 수 없으므로 성구매자에 대한 형사처벌이 과도하다고 볼 수 없다.

스토킹의 개념에서 보듯이 스토킹이 다른 범죄행위와 구별되는 특징은 그것이 반복적 지속적으로 되풀이하여 행해지고, 그 결과 스토킹대상인 피해자 자신이나 그 가족은 지속적인 위협이나 괴롭힘을 당한다. 그리고 스토커는 반복적인
스토킹 행위로 인하여 자신이 행하는 스토킹행위를 내재적으로 정당화함으로써논리적인 대화나 이성적인 소통이 불가능하게 되며, 여기에서 피해자는 더 좌절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해자는 법률적인 대응도 쉽지 않고 주위의 친지나수사기관의 무관심이 겹치는 경우에는 피해자의 고립심은 더욱 커지게 된다. 또한 극단적인 경우에는 스토커는 피해자에게 혐오감이나 공포심을 주는 것은 물론 그 행위형태에 따라서는 피해자나 그 친지 등에 대해서 상해를 가하거나 심한경우에는 그 생명을 박탈하는 경우까지 나타난다.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볼 때 스토킹행위에 대한 법적 규제가 필요하다고 할 것이고, 일정한 유형의 스토킹행위에 대해서는 형벌로서 처벌할 것이 요청된다(범죄화의 필요성). 예컨대 스토킹의 개념을 단계별로 규정하여 보다 넓은 개념의 스토킹인 ‘괴롭히기‘
전반에 대하여는 임시조치나 보호처분 등의 규제로 대응하고, 좁은 개념의 ‘스토킹‘ 내지 ‘가중된 스토킹‘에 대하여는 그에 상응한 형사적 제재를 차등 있게 부과하는 방안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사회에서 특정한 행위를 처벌하여 왔으나 더 이상 처벌
필요성이 없거나 또는 그 행위를처벌함으로써 보호할 
법적인 이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이를 불처벌되는 행위로 전환하며 이를 비범죄화라고 한다. 이에 반하여 그 역으로 사회에서 특정 행위를 처벌하지 
않았으나 그 행위의 처벌필요성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이를 법률로서 처벌하도록 규정하는 작업을 한다. 
이러한 입법작업을 범죄라고 한다.

과잉금지원칙은 기본권의 최대보장이라는 이념에 근거하여, 국가가 기본권을 제한할수밖에 없는 예외적인 경우에서도 그 제한은 과잉적인 것이 되어서는 아니 되고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는 원칙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본권 제한의 
한계로서 과잉금지원칙은기본권의 구체적 내용이 존재하고 그에 대한 제한이 있는 경우에 그 제한 정도를 심사하는 
기준으로서의 기능을 갖는다. 과잉금지원칙에 대한 헌법상의 명시적 규정은 없으나, 동 원칙이 헌법적 지위를 가진다는 점에서는 다툼이 없다. 

과잉금지의 원칙은국가의 기본권 보장이념 내지 기본권 
그 자체로부터 당연히 도출되는 것으로서 국가의기본권 
제한에 있어서 기본권의 공동화를 방어하는 중요한 
수단중의 하나라고 할 수있다. 과잉금지원칙의 구체적 내용으로서는 목적의 정당성, 방법(수단)의 적절성, 피해의
최소성과 법익의 균형성이 요구되고 있으며, 
이러한 요건들이 충족될 때 국가의 입법작용에 비로소 
그 정당성이 인정되고, 그에 따라 국민의 수인의무가 
생겨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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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이 행복인가? 
강한 쾌락은 사실상 강한 고통에 불과하다. ‘쾌락주의의 역설‘에 근거해서 많은 반론들이 제기된다. 이에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주장을 가다듬는다. 따라서 그의 기본 주장의 해석에는 주의가필요하다.

에피쿠로스는 보통 말하는 모든 종류의 달콤한 감각적 
경험을 쾌락‘이라 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쾌락은 특수한 어떤 것, 즉 육체적 무고통과 영혼의 무자극(atarxia 아타락시아)의 상태이다. 다시 말해서, 영혼의 안정 상태이다. 
쾌락은 욕망과 욕구 충동의 무제한적 충족이 아니다.
영혼이 완벽한 평온에 이르기까지 진정시키고 차분해짐이 쾌락이다. 여기에서 쾌락이 성립한다. 이것은 사실상 일반적으로 말하는 ‘쾌락‘이 없는 상태이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감성에서, 스토아학파는 이성에서 출발했다. 서로 정반대이다. 스토아학파는 이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옥죄는감성을 소멸시키라 한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완전한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성적 사유를 중시한다. 그런 점에서 둘은 다 이성의 발휘로 수렴된다.

물론 중요한 차이도 있다. 사람의 행동의 목표가 쾌락이다. 쾌락은인생을 성공적인 삶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삶을 쾌락 속에서 보낼때 행복한 것이지, 우리가 정의롭거나(플라톤) 혹은 명상에 헌신할 때(아리스토텔레스) 행복한 것이 아니다.

행복이 쾌락이라는 것은 에피쿠로스에게 명백해 보인다. 아이들이본능적으로 쾌락을 주는 것을 선택하고, 고통스러운 것을 피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건다. 그는 이 사실을 가지고 자기 주장을 증명한다. 이러한 행동은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서도 관찰된다. 모든 인간은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한다. 인간이 각자 최종적으로 추구하는것은 행복이다. 그러므로 쾌락이 행복이다.

이 주장은 근대에 영국의 흄 등의 공리주의로 계승된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 따르면 삶의 목표는 쾌락이다. 
이 쾌락은감각적 향락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쾌락은 ‘영혼의 안정‘이라는 담담한 쾌락이다. 어린이가 본능적으로 쾌락을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쾌락주의가 맞다. 
이에 대해서 반론이 많다. 에피쿠로스의 논증은 존재에서 
당위를 이끌어내는 오류와 애매어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쾌락주의는 행복한 삶을 충분하게 규정하지 않았는다. 또한 예컨대 살인자가 행복하다는 것과 같은 잘못된 
판단을 초래한다.

도대체 왜 결정론을 옹호하는가? 고대에 많은 사람들은 
만물의 흐름을 예정하는 운명(fatum)을 믿었다. 
운명이 있다면, 세계는 결정론적이다. 결정론은 고대의 
학자들에 의해 지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연과학을 참조하면서 유지된다. 우리 인간은
자연적 존재이다. 사람의 몸은 물리적인 원소들로써 
구성된다. 이러한소립자와 원자 분자들은 기계적 방식으로 통합된다. 기계론적 법칙들은결정론적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도 미리 정해져 있다.

이 논증은 몇 가지 취약점이 있다. 그 여러 전제들 중의 
하나가 기계론이다. 세계가 기계론적 법칙들에 의해 
지배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이 세계가 기계론적이라는 
것은 자명한 것이 아니다. 먼저 입증되어야할 것이다. 
물론 자연과학은 기계론적 법칙들을 자명한 것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결정론을 지지하기 위한 강력한 근거로 
쓴다. 그러나 자연과학의 대상인 물질적 사물은 자유 
의지가 없다. 반면 사람은 자유 의지가있다. 기계론이 
적용되기 어렵다.

우리는 자유로운가? 아니다. 이 세계는 결정론적이거나 
비결정론적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결정론적이라면 
우리는 부자유하고, 비결정론적이어도 우리는 부자유하다. 여기서 결론은 우리가 어쨌든 부자유하다는 것이다.

이런 논증에 반대해서 결정론과 자유‘의 비양립주의자들은 비결정론적인 세계에서는 자유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사람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연쇄 운동의 첫 운동자, 즉 ‘부동의 운동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론 - 이러한 자유는 현실적인 인간의 자유와 맞지 않는다. 
이는 자유에 대해서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또한 이는 물리적인 것의 닫힘 원칙에 모순된다.

‘결정론과 자유‘의 양립론은 지적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는 종류의 자유는 이 세계가 결정론적일 때에도 
주어진다.

비관주의는 "의지의 자유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문제는 의지의 자유가 없으면, 행위의 책임도 없다는 점이다.비관주의에 따르면,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귀속시킬 수 
없다.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무신론자는 ‘신‘이라는 말의 대상(G)은 오직 자신의 의식 
속에서만 존재할 뿐, 객관적으로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할 것이다. ‘신이 없음)의 의미가 그것이다. 
여기서 무신론자의 주장에는 하나의 문제가 모순이 
발생한다. 만일 사람의 의식 속에만 있는 존재(G1)를 
생각한다면, 실제로 현실에 있는 똑같은 존재(G2)를 
생각할 수 있다.

신은 존재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은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되어 왔다.

기적 논증은 잘 증언된 초자연적 사건들을 참조하라고 
알려 준다. 그러나 그 사건들이 기적일 수 있는 개연성을 
확인해 보면, 기적 논증은설득력을 잃고 만다.

목적론적 증명은 생명체와 인공물의 유비를 통해서 지적인 기술자의 존재를 추론한다. 그러나, 이 유비는 그러한 결론을 이끌어 내기에는너무 약하다. 게다가 진화론과 같이 더 큰 설명력을 가진 이론이 있다.

인과론적 증명은 질서잡힌 우주의 존재로부터,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일반적인 사실로부터 최초 원인으로서의 신을
그러나 최초의 원인이 반드시 신이어야 한다는 근거가 없다.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은 ‘신‘이라는 개념에서 신의 존재를 도출해낸다. 주어와 술어를 연결하는 말인 ‘이다‘는 
실재함을 뜻하는 ‘있다‘와다르다. 이 증명은 언어적인 
혼동에 기초해 있다.
변신론은 신의 존재에 반대하여, 세계 내에 악이 있다는 
것을 들어 논증한다. 신은 전능하고 선하기 때문에, 
그 어떤 악도 창조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세계에는 악이 있다. 따라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만일 신 존재에 대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거나, 신이라는 가정이 
설명상에 아무런 차이도 가져오지 못한다면, 파스칼이 
제안한 내기를 해 보거나, ‘오컴의 면도날‘에 따라 ‘신‘이라는 개념을 우리의 이론에서 삭제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삶이 감각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나무를 볼 때, 우리가 지각하는 것처럼 
나무가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고 믿는다. 
감각으로 지각한 것을 그대로 믿어도되는가? 아니다. 
우리는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감각은
종종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물속에 담긴 곧은 막대기는 구부러진 것처럼 
보인다. 해가 땅의 공기를 뜨겁게 달굴 때, 우리는 신기루를 본다. 고속도로 위에물이 없는데, 물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신기루를 본 것이다. 이처럼 감각이 우리를 속인다. 따라서 감각 경험은 학문을 위한 확실한 기초를 제공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가 감각하는 것처럼 세계가 그렇게 보이는지 
확신할 수 없다해도, 우리의 지각이 실재하는 대상에서 
나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대상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가? 실재한다면, 우리는대상의 
존재를 학문의 기초로 끌어들일 수 있다.

하지만 외부세계의 대상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꿈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많은 이미지들을 보게 된다. 이것들은 외부 세계의 객관적 대상들을 지각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이 만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깨어 있을 때와 꿈꿀 때가 같다고 의심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이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 꿈을 꾸고 
있는지 아닌지를 판정할 기준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플라톤 이래 데카르트 등은 가장 확실한 인식의 대상을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관념‘(idea)이라고 한다. 
토마스 리드(Thormas Reid, 1710-1796)는 대상과 
우리 사이에 관념들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거부한다. 
우리는 관념이 아니라, 대상을 직접 지각한다. 
"내가 이 나무를 보고 있다"라고 할 때, 세계 속의 한 대상을 지각하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이는 우리 지성 (상식)의 발로이다.

로크는 사람이 눈코입귀의 다섯 감각 기관으로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세세하게 탐구한다. 그는 이 지각을 외적 지각과 
내적인 자기 지각으로 나눈다. 외적 지각은 대상에 대한 인상(impression)이다. 내적 지각은내 마음의 감정 욕망의 자각이다. 이렇게 들어온 지각 내용들은 다시 관념(ideas)이 된다. 관념은 우리가 마음속에 가지는 심상들이다. 이처럼 우리가 어떤 나무를 볼 때, 이 나무의 심상 또는 관념을 가지게 된다.

이 관념은 결국 나무의 단순 모사이기 때문에, 나무의 존재를 확인해 주는 것이다. 지각에 의해서 우리 마음에 관념이 형성되는 것은 외부대상 사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로크는 다시 관념을 단순 관념 복합 관념, 추상 관념으로 
나눈다. 단순 관념 (simple ideas)은 앞에서 말한 것으로, 
감각 지각을 통해 마음에직접적으로 만들어지는 관념이다. 여기에는 형태, 색, 소리의 관념이 속한다. 따라서 내가 나무를 지각한다면, 다양한 단순 관념들의 다발을 가지게 된다. 나무는 여러 색 형태를 가지기 때문이다.

마음은 단순 관념들을 결합하거나 불려서 복합 관념과 
추상적 관념을 만든다. 복합적 관념의 예가
 ‘금으로 이루어진 산‘이라는 관념이다.
이러한 산은 존재하지 않지만, 나의 마음속에서 ‘황금‘이라는 단순 관념과 ‘산‘이라는 단순 관념을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러면 ‘황금 산‘이라는 복합 관념이 생긴다.

지각과 독립적인 ‘물질적 사물 그 자체는 인식 불가능하다. 인식이불가능하다면, 왜 ‘물질적 사물‘(실체)의 존재를 
가정해야 하는가? 그런것은 없다. 

버클리는 그것을 삭제해도 세계에 대한 우리의 삶을 잃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대상 사물‘(실체)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을인식한다.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지각된 
내용‘ 관념일 뿐, ‘사물 그 자체는 아니다. 그래서 버클리는 
단언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됨이다!" (Esse est percipi)

 ‘선험‘이란 ‘경험 이전‘이라는 뜻이다. 선험론은 마음 안에 
경험을 초월하고 넘어서 있으면서, 경험적 지각이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는 이론이다. 감성의 형식, 
오성의 12범주, 이성의 안티노미가 바로 그런 조건이다. 
이를 통해서 선험론적 관념론은 실재론과 관념 실재론을 연결시키려고 노력한다.

칸트는 대상 사물을 ‘현상‘과 ‘사물 그 자체‘ (자체)로 
구별한다. 물자체가 현상을 우리 마음에 보내면, 
우리는 현상을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물 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이는 관념 실재론과 대상 실재론을 결합한 것이다. 우리의 
감각 지각과 독립된 물 자체가 존재한다. 물 자체가 바로 
대상 사물의 실체이다.이는 실재론과 같다. 우리의 마음이 
현상만을 지각한다. 이는 관념만을 지각한다는 버클리의 
관념 실재론과 같다.

칸트는 선험론적 관념론을 주장한다. 관념실재론의 
비상식적 결론을 배제하고, 그 장점만을 수용하려 한다. 
그는 현상과 물 자체를 구별한다. 물 자체는 현상을 
내보낸다. 우리는 현상은 지각하지만, 물 자체는지각할 수 
없다. 물 자체가 어떠한지를 알 수 없다면, 우리는 물 자체를아무런 손해 없이 삭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칸트의 입장은 관념 실재론과 다름 없게 되고, 관념 실재론이 받는 반박에 그대로 노출된다.

회의주의로부터의 출구: 이들은 외부 세계의 실재 문제보다, 회의주의 자체를 문제 삼는다. 비트겐슈타인과 스트로슨은 일상 언어의 기초를 파괴하지 않으면서 회의주의를 표현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주려한다. 일상 언어는 외부 세계의 
실재를 기초로 해서 성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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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만이 취미에 속하는 것이다. 숭고한 것도 미감적 
판정에 속하기는 하지만 취미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숭고한 것의 표상은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고 
아름다워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그 표상은 거칠고 야만적이며 취미에 역행하는 것이다. 

재능(천부적 자질)은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고 주체의 
자연적 경향성에 의존하는 인식능력의 탁월함이라고 
이해된다. 생산적 기지(엄밀하게 혹은 실질적으로 말하는 
재주), 총명함 그리고 사고의 독창적(천재)이 그런 것들이다.

천재를 위한 본래적 영역은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창조적이고 다른 능력들보다 규칙에 덜 구속되지만 그 덕분에 더욱더 독창적일 수있기 때문이다. - 가르침은 항상 학생들에게 모방할 것을 강요하므로 가르침의 기제는 천재의 독창성을 고려하면 천재의 발아에 분명히 불리하기는 하다. 그러나 모든 기예는 그럼에도 어떤 기계적인 근본 규칙을, 즉 그 산물이 기초에 놓인 이념과 부합함을, 다시 말해서생각된 대상을 현시할 때의 진리성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런 것은수업의 엄격함으로 습득되어야 하고 분명히 모방의 결과다. 하지만상상력을 이런 강제에서조차 해방시키고 그 특유의 재능을 심지어자유에 어긋나게 규칙 없이 행동하도록 그리고 열광하도록 두는 것은 아마 진정한 실성을 낳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19) 이런 실성은 물론 모범적이지 않을 테고, 따라서 천재 축에 들지도 않을 것이다.

자살도 용기를 전제하는지 혹은 언제나 그저 낙담한 
상태만 전제하는지는 도덕적 물음이 아니라 단지 심리학적 물음이다. 만약 자살이 오로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생존하지 않으려고 실행된다면, 그래서 분노에서 
실행된다면 용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인내를 
천천히 고갈하는 그런 슬픔에 의해 고통 중에서 인내가 
고갈된 것이라면, 이것은 하나의 단념이다. 

인간이 더는 삶을 사랑하지않을 때 죽음을 직시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그에게 일종의 영웅주의로 보인다. 
하지만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함에도 어떤 조건에서라도 
삶을 사랑하는 것을 언제나 중지할 수 있고, 그래서 자살하기 위해서는 불안에서 오는 마음의 혼란이 앞서야만 한다면 
그는 겁이 많아서 죽는 것이다. 그는 삶의 고뇌를 더는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다. 

단순한 동물에게서는 가장 격렬한 경향성(예컨대 성교의 
경향성)도 열정이라고 하지 않는다. 단순한 동물들은 
이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성만이 자유의 개념에 토대를 
제공하고, 이 개념을 가지고 열정과 충돌한다. 그러므로 
열정은 인간에게서만 폭발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인간에 대해 인간은 열정적으로 어떤 
것들을(즉 음주, 놀이, 사냥을) 사랑하거나 (사향, 화주를)
혐오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여러 가지 경향성이나 기피성을 그렇다고 여러가지 열정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단지 여러 가지 본능, 즉 욕구능력에 
있는 단순히 수동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욕구능력의 객체들에 따라 물건으로서가 (이러한 
것들은 무수하다) 아니라 인간이 다른 인간을 단지 자기 
목적들의 수단으로 삼음으로써 인간이 서로 그들의 인격과 자유를 사용하거나 오용하는 원리에 따라 분류되어 마땅한 것이다. - 
열정들은 원래 오직 인간과 관련되며 오로지 인간을 
통해서만 충족될 수 있다.
이러한 열정들이 명예욕, 지배욕, 소유욕이다.

다혈질적인 사람의 성격은 다음과 같은 표시로 알려진다. 
그는 걱정이 없고 낙관적이다. 그는 모든 것에 그 순간에는 중요성을 크게부여하지만 그다음 순간에는 그것에 대해서 더는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진심으로 약속은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과연 그가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는 
미리 깊게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을 
도울 만큼 충분히 선량하지만 나쁜 채무자여서 상환 연기를 늘 요청한다. 그는 사교적이라서 농담을 잘하고, 유쾌하고, 그 어떤 것에도 중요한 의미를 기꺼이 부여하지 않고 
(사소한 일 만세!) 모든 사람을 친구로 삼는다. 보통 그는 
악인은 아니지만, 회개하는 죄인이 되기는 거의 어렵고, 
무엇인가를 매우 후회하더라도 (후회가 결코 번민이 되지는 않고) 금방 잊는다.

그는 업무 중에는 피곤해하지만 그저 놀기만 할 때는 쉬지 
않고 몰두한다. 놀이는 그에게 변화를 가져다주지만 
지속하는 것은 그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 대하여 "그는 하나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단적으로말할 수 있다면, 이것은 그에 대해서 아주 많은 것을 말한 것일 뿐만아니라 칭송한 것이다. 이것은 그에 대한 존경과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드문 일이다.

사람들이 이러한 명칭을 쏠 경우는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그에대해서 확실하게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면, 사람들은 곧잘 "그는 이러한 성격을 또는 저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덧붙이면서 그때 그런 표현으로 기질을 표시한다. 그러나 하나의 성격을 단적으로 갖는다는 것은 
주체가 자기 자신의 이성에 의해 변함없이 지시 규정했던 
확실한 실천 원리들에 자기 자신을 묶는 의지의속성을 말한다. 이러한 원칙들은 가끔 잘못된 것일 수도 있고 결함이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모기떼처럼 이쪽이나 저쪽으로돌아다니지 않고 확고한 원칙들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의욕 일반으정식은 그 속에서 소중한 것, 칭찬하고 감탄할 
만한 것을 가지고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일은 실제로는 
드물다.

민족이라는 말은 한 지역 안에 통합된 다수가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경우를 뜻한다. 국민이란 공통적 계통에 따라 어떤 
하나의 시민적전체로 통합된 것으로 인정되는 다수의 일부를 뜻한다. 이 규정들에서 예외가 되는 일부(이러한 민족 중 야만적인 다수)는 천민이라 불린다. 천민들이 반법률적으로 뭉치는 일은 폭동(소요를 일으키는 자들의 행동)이다. 
이런 행동은 천민을 국가시민의 자질에서 배제한다.

한 민족의 기질을 표현하는 준칙들은 그것이 대대로 내려온 것이거나 오랜 관습에 의해 말하자면 본성이 되고, 본성에 
접목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모든 민족의 자연적 성향 중 변형태들을 철학자를 위해 이성적 원리에 따라서 
분류하기보다는 지리학자를 위해경험적으로 분류하려는 
대담한 시도들일 뿐이다.

인간의 자연본성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도록 하지만 이성은 행복할 만한 자격에, 즉 윤리성의 조건에 
인간을 제한하므로 이런 행복에 관해서도 인류는 자기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연상태에서 탈출을 감행하는 인류에 대해 자연 상태인 숲으로 되돌아갈 것을 추천하는 루소의 우울한(기분이 언짢은) 묘사를 그의 진정한 의견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런 묘사로 루소는인류가 자기 사명에 단절 없이 접근하는 궤도에 진입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이런 
묘사를 허무맹랑하게 파악해서는 안 된다. 
인류가 언젠가는 더 좋은 상태에 있을지는 과거와 현재의 
경험으로 볼 때 어느 사상가나 당혹스럽게 만들고 의심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공화제만을 참된 시민적 체제로 부를 만하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은 세 가지 국가형식 중 
하나(민주제)를목 표로 하지 않고, 공화제를 유일하고 
일반적인 국가로 이해한다. 옛브로카르드법전의 "시민이 아니라 국가의 복지가 최고 법이다"라는명제는 보통 사람의 
감각복지(즉 시민들의 행복)가 국가체제의 최상의원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자기의 
사적 경향성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구상하는 번영은 보편성이 요구하는 것과 같은 어떤 객관적 원리로는 전혀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저 명제는 다름 아니라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지성복지의 유지가다시 말해서 일단 현존하는 국가 헌법체제의 유지가 시민사회체제일반의 최고 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저것에 의해서 존속하기 때문이다.

모든 시대의 경험에서 알려지고 모든 민족 사이에서 
알려진 것처럼 인류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즉 인류 전체로서 집합적으로 파악해볼 때 인류는 
선후좌우에 실제로 존재하는 인격들의 하나의 집합이며, 
이 인격들은 평화적인 공존을 결여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서로 대립하며 지내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 결과 그들은 그들 자신에서 나온 법칙들의 지배를 받으며 서로 영향을 주는 강제로 끊임없이 분열의 위협을 받지만 
전체적으로는 진보하는 연합체가 본성적으로 하나의 세계시민 사회(세계국가주의)가 되도록 정해져있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이 세계시민 사회 자체는 완수될 수 없는 이념이기에 (인간의 활발한 작용과 반작용 중에 유지되는 평화를 기대하는) 구성적 원리는 아니고 단지 하나의 규제적 원리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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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들의 모든 도덕적 가치의 본질적인 면은 도덕법칙이 
의지를 직접적으로 규정한다는 점에 있다. 의지 규정이 
비록 도덕법칙을 좇아서 일어난다고 해도, 그러나 어떤 
종류의 것이 됐든 감정-이것은 도덕법칙이 의지의 충분한 규정 근거가 되기 위해서는 전제되어야만 하는바-매개로 해서만 일어난다면, 그러니까 법칙을 위해서 법칙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면, 그 행위는 적법성은 
포함하겠지만, 그러나 도덕성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무릇 동기라는 말이 그의 이성이 본성상이미 객관적 법칙을 반드시 좋지는 않는 어떤 존재자의 의지를 주관적으로 
규정하는 근거를 뜻한다면, 첫째로 이로부터 다음의 결론이 나올 것이다. 

이성적 자연 (존재자)은 자기 자신에게 목적을 세움으로써 여타의 것들보다 자신을 두드러지게 한다. 이 목적이 각 
선의지의 질료가 될 터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목적 달성의) 제한적인 조건 없이 단적으로 선한 의지라는 이념에서는, 
모든 성취되어야 할 목적은 각각의 의지를 단지 상대적으로 선한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서 철저히 무시되어야 하기 때문에, 목적은 여기서 성취되어야 할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자립적 목적으로, 그러니까 단지 소극적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에 결코 반해서 행위해서는 안 되며,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한낱 수단이 아니라,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서 각각의 의욕에서 존중되어야만 한다. 
이 목적은 무릇 모든 가능한 목적들의 주체 자신 외의 
다른 것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주체는 동시에 가능한 
단적으로 선한 의지의 주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의지의 자율이란 의지가 그 자신에게 의욕의 대상들의 
모든 성질로부터 독립적으로 법칙인 그런 의지의 
성질이다. 그러므로 자율의 원리는 선택의 준칙들이 동일한 의욕에서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으로서 함께 포섭되는 그러한 방식 외에는 아무런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실천적 규칙이 하나의 명령이라는 것, 다시 말해 각 이
성적 존재자의 의지가 조건으로서의 이 규칙에 
필연적으로 묶여 있다는 것은 명령에서 나타나는 개념들의 순전한 분해에 의해서는 증명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합 명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객관들의 
인식을 넘어주관, 다시 말해 순수 실천이성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것이다. 명증적으로 지시명령하는 
이 종합 명제는 온전히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이런 일은 이 절의 과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자율의 원리만이 도덕의 유일한 원리임은 윤리성의 
개념들을 순전히 분해만 해보아도 충분히 밝혀지는 바이다. 왜냐하면 이 분해를 통해, 윤리성의 원리는 정언명령이어야만 하며, 그러나 이 정언명령은 더도 덜도 아닌 바로 이
자율을 지시명령하는 것임이 드러나니 말이다.

순수 실천이성의 법칙들 중 판단력의 규칙은 "네가 의도하고 있는 행위가 너 자신도 그 일부일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행위를 네 의지에 의해 가능한 것이라고 과연 볼 수 있겠는가를 네 자신에게 물어보라"는 것이다.

광신이라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원칙에 따라 
꾀해진 인간이성의 한계로부터의 벗어남이라 한다면, 
도덕적 광신이란 실천적 순수이성이 인간성에 지정해준 
한계를 벗어남을 말한다. 이 한계에 의해 이성은 의무에 
맞는 행위들의 주관적 규정 근거를 다시 말해 그런 
행위들의 도덕적 동기를 법칙 자체 외의 다른 어디에 두는 
것을 금지하고, 법칙에 의해 준칙들 안에 집어넣어지는 
마음씨를 이 법칙에 대한 존경 외의다른 것에 두는 것을 
금지한다. 그러니까 모든 자만과 허영심 많은 자애를 
굴복시키는 의무 사상을 인간에 있어서 모든 도덕(성)의 
최상의 생활 원리로 삼을 것을 지시명령한다.

도덕법칙은 순수 의지의 유일한 규정 근거이다. 
그러나 도덕법칙은 순전히 형식적이므로 (곧, 준칙의 
형식만을 보편적으로 법칙 수립적인 것으로요구하므로) 
그것은 규정 근거로서 모든 질료를, 그러니까 의욕의 
모든객관을 도외시한다. 그러니까 최고선은 항상 순수 
실천이성의, 다시 말해 순수 의지의 전 대상이겠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순수 의지의 규정근거로 간주될 수는 없다. 
도덕법칙만이 저 최고선과 그것의 영향 내지촉진을 
객관으로 삼게 하는 근거로 여겨져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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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의 자율이란 의지가 그 자신에게 
(의욕의 대상들의 모든 성질로부터 독립적으로) 법칙인 그런 의지의 성질이다. 
그러므로 자율의 원리는 선택의 준칙들이 동일한 
의욕에서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으로서 함께 
포섭되는 그러한 방식 외에는 아무런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실천적 규칙이 하나의 명령이라는 것, 다시 말해 각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가조건으로서의 이 규칙에 필연적으로 묶여 있다는 것은 명령에서 나타나는 개념들의 순전한 
분해에 의해서는 증명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합 
명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객관들의 인식을 
넘어주관, 다시 말해 순수 실천이성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것이다. 명증적으로 지시명령하는 
이 종합 명제는 온전히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이 질의 과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자율의 원리만이 도덕의 유일한 원리임은 윤리성의 개념들을 순전히 분해만 해보아도 충분히 밝혀지는 바이다. 
왜냐하면 이 분해를 통해, 윤리성의 원리는 정언명령이어야만 하며, 그러나 이 정언명령은 더도 덜도 아닌 바로 이
자율을 지시명령하는 것임이 드러나니 말이다.

이성적 존재자는 예지자로서 자신을 오성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이에 속하는 작용 원인으로서만 그의 
원인성을 의지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다른 측면에서 이성적 존재자는 자기가 감성세계의 일부임을 의식하는바, 
감성세계 안에서 그의 행위들은 저 원인성의 순전한 
현상들로서만 마주치게 되지만, 그 행위들의 가능성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 원인성으로부터는 통찰될 수가 없고, 그 대신에 저 행위들은 다른 현상들, 곧욕구들과 경향성들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즉 감성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통찰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오성세계의 순전한 성원으로서 나의모든 행위들은 순수의지의 자율의 원리에 완전히 적합할 것이나, 한낱
감성세계의 일부로서 나의 행위들은 전적으로 욕구들과 
경향성들의 자연법칙에, 그러니까 자연의 타율에 알맞게 
취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자들은 윤리성의 최상 원칙에, 후자들은 행복의 최상 원칙에 의거할 터이다.)

그러나 오성세계는 감성세계의 근거를, 그러니까 또한 감성세계의 법칙들의 근거를 함유하고, 그러므로 전적으로 오성세계에 속하는 나의 의지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법칙수립적이고, 그러므로 또한 그러한 것으로생각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나는 예지자로서 나를, 비록 다른 측면에서는 
감성세계에 속하는 존재자같이 봄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오성세계의 법칙에 다시 말해 자유의 이념 중에 그것의 
법칙을 함유하는 이성에, 그러므로 의지의 자율에 복종하는 것으로 인식하며, 따라서 오성세계의 법칙들을 나에 대한 
명령들로, 그리고 이 원리에 알맞은 행위들을의무들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해서, 자유의 이념이 나를 예지 세계의 성원으로 
만듦으로써 정언명령들은 가능하다. 즉 그로써, 만약 내가 
예지 세계의 성원이기만하다면, 나의 모든 행위들은 의지의 자율에 항상 알맞을 터인데, 그러나나는 나를 동시에 
감성세계의 성원으로서도 보기 때문에, 의지의 자율에 알맞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 정언적 당위는 선험적 종합 명제를 표상하는 것인바, 왜 그런가 하면, 감성적 욕구들에 의해 
촉발되는 나의 의지위에 동일하지만 오성세계에 속하는 순수한, 그것 자체로 실천적인 의지의 이념이 덧붙여지고, 
이 의지는 저 의지가 이성에 따르는 최상의 조건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감성세계에 대한 직관들에
그것 자체로는 법칙적 형식 일반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지성의 개념들이 덧붙여지고, 그럼으로써 그것에 
자연에 대한 모든 인식들이의거하는 선험적 종합 명제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과 대체로 같다.

모든 사람들은 의지의 면에서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록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일어났어야만 하는 
그런 행위들에 대한 모든판단들이 내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유는 경험 개념이 아니고,
또한 경험 개념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설령 경험이 자유의조건 아래서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되는 그런 요구들과 반대되는 것을 보여준다 해도, 언제나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정언명령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은, 오로지 그 아래서만 이 명령이 가능한 유일한 전제, 곧 자유의 이념을 우리가 제시할 수있는 한에서, 또한 우리가 이 전제의 필연성을 통찰할 수 있는 한에서만대답될 수 있다. 이성의 실천적 
사용을 위해서는, 다시 말해, 이 명령의,
그러니까 윤리 법칙의 타당성에 대한 확신을 위해서는 이
것으로 충분하다. 

‘선의‘는 옳은 행위를 오로지 그것이 옳다는 이유에서 
택하는 의지를말한다. 그것은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는
마음이나 또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경향성에 따라 옳은 
행위를 지향하는 의지가 아니라, 단적으로 어떤 행위가 
옳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 그 행위를 택하는 의지이다. 

그러므로 이 의지 작용에는 어떤 것이 옳다‘, 무엇이 선하다‘는 판단이 선행해야 하고, ‘옳음‘과 ‘선함‘은 결코 경험으로부터는 얻을 수 없는 순수 이성의 이념이므로, 선의지는 
오직 이성적 존재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으로서 다름 아닌 
순수한 이성적 존재자의 실천을 지향하는 이성, 
곧 ‘순수실천이성‘이다. 

선의 개념은 "이미 자연적인 건전한 지성에 내재해 있고, 
가르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단지 계발될 필요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한 의지가 자연적으로 발동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우리인간에게 더 이상 악행이라든지 ‘당위‘의 문제는 없을 것이다. 선의지는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이념의 실천이 이성적 존재자의 ‘의무‘라고 납득하는 데서 생긴다.

그래서 윤리 규정은 당위로서 ‘~하라!‘는 ‘명령‘으로 나타나며, 그것도무조건적으로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그것에 
준거해서 행위해야만 하는필연적 실천명령으로 다가온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명령은 이성적 존재자에게는 ‘실천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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