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성의 명령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해결이 필요한 유일한 물음이다. 왜냐하면 
이 명령은 전혀 가적이지 않으며, 그러므로 그 객관적으로 
표상된 필연성이 가적인 명령들에서처럼 어떤 전제에 
기댈 수가 없으니 말이다. 이 경우 언제나 주의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단 한 가지 것은, 과연 도대체 그 같은 어떤 
명령이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어떤 실례에 의해서, 
그러니까 경험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정언적인 것처럼 보이는 명령들도 남몰래는 
가언적일지도 모르는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정언명령은 오로지 유일한즉, 그것은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는 것이다.

돈을 빌릴 수 밖에 없는 곤경에 놓인 또 다른 사람이 있다. 
그는 자신이 갚을 수 없을 것임을 잘 알지만, 또한 정해진 
시간에 갚을 것을 화실하게 약속하지 않는다면, 한 푼도 
빌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는 그러한 약속을 할 뜻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나 그는 그러한 방식으로 곤경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일이고 의무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하고 자문하는 정도의 양심은 아직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그렇게 하기로 결심한다면, 그의 행위의 준칙인즉, ‘만약 내가 돈이 없는 곤경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돈을 빌리면서 갚겠다고 약속할 것이다. 비록 내가 
돈을 갚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해도 말이다‘라는 것이겠다. 무릇 이 자기사랑, 내지 자신의 유리함의 원리는 나의 전 장래의 안녕과 어쩌면 잘 합일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문제인 것은, 과연 그런 일이 옳은 것이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기사랑의 부당한 요구를 
보편적 법칙으로 변환시켜, ‘만약 나의 준칙이보편적 법칙이 된다면, 사태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물음을 세운다.
그때 나는 이내, 나의 준칙은 결코 보편적 자연법칙으로 
타당할 수가 없고, 자기 자신과 합치할 수가 없으며, 
오히려 필연적으로 자기모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누구든 그가 곤경에 처해 있다고 생각한 연후에는 그것을 지킬 결의도 없이, 그에게 생각나는 것을 약속할 수
있다는 것이 법칙의 보편성이 되면, 그것은 약속 및 사람들이 그와 함께갖는 목적 자신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어느누구도 그에게 약속된 것을 믿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모든 그러한 표명을 허황한 구실이라고 
조소할 것이니 말이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확보하는 것은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의무이다. 무룻 많은 걱정거리와 충족되지 못한 필요에 
휩싸여 있는 자기 상태에대한 만족의 결여는 대단히 큰, 
의무 위반의 유혹이 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의무에 주의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인간은 
이미 스스로행복에 대한 매우 강렬하고 내적인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바로이 이념 안에 모든 경향성들이 
하나의 합계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지 행복을 위한 
훈계의 대개의 성질은, 그것이 몇몇 경향성들에게는 큰 방해가 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행복이라는 이름 아래서의 
모든경향성들의 만족의 합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확정적인 확실한 개념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 하나의 
경향성이, 그것이 약속하는 것과그것이 충족을 얻을 수 있는 시기가 확정된 단 하나의 경향성이 어떻게 흔들리는 
이념(행복)을 능가할 수 있는가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모든 명령은 당위 (해야 한다)를 통해 표현되며, 그에 의해 
이성의 객관적 법칙의 주관적 성질상 그에 의해 필연적으로 규정되지는 않는 의지에 대한 관계(즉 강요를 고지한다. 
명령들은 어떤 것을 하거나 또는 하지않는 것이 선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명령들이 그 말을 하는 상대는,
어떤 것을 하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그 앞에 제시된다고 
해서 언제나 그어떤 것을 하는 것은 아닌 의지이다. 
그러나 실천적으로 선한 좋은 것은 이성의 표상들에 의해, 
그러니까 주관적 원인에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다시 말해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그 자체로서 타당한 근거들에서 
의지를 규정하는 것이다. 

이성에 의해실천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주관주체에 
대해서는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하기 때문에, 
모든 명령들은 어떤 방식에서든 선한 의지의 원리에
따라 필연적인 행위를 규정하는 정식들이다. 
그런데 행위가 한낱무엇인가 다른 것을 위해, 
즉 수단으로서 선하다면, 그 명령은 가언적인것이다.
반면에 행위가 자체로서 선한 것으로 표상되면, 그러니까 
자체로서 이성에 알맞은 의지에서 필연적인 것으로, 
즉 의지의 원리로 표상되면, 그 명령은 정언적인 것이다.

정언명령만이 실천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나머지 것들은 모두 의지의 원리들이라고 일컬을 수는 
있겠으되, 법칙들이라고 일컬을 수는 없다는 것 정도는 
통찰되어 있어야 한다. 

정언명령은 오로지 유일한즉, 그것은 ‘그 준칙이 보편적 법
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는 것이다.

결과들이 일어나는 법칙의 보편성이 본래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 (즉 형식의 면에서) 자연이라고 일컬어지는 것, 
다시 말해, 그것이보편적 법칙들에 따라 규정되어 있는 
한에서, 사물들의 현존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형성하므로, 의무의 보편적 명령도, "마치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의지란 어떤 법칙의 표상에 맞게 행위하게끔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능력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은 오직 
이성적 존재자들에서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의지에게서 
그것의 자기규정의 객관적 근거로 쓰이는 것이 목적이다. 
이 목적은, 그것이 순전한 이성에 의해 주어진다면,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똑같이 타당함에 틀림없다. 

이에 반해 그것의결과가 목적인 행위의 가능 근거만을 
함유하는 것은 수단이라 일컫는다.
욕구의 주관적 근거는 동기이며, 의욕의 객관적 근거는 
동인이다. 그래서 동기들에 의거한 주관적 목적들과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타당한 동인들에 달려 있는 객관적 목
적들이 구별된다. 실천적 원리들이 모든 주관적 목적들을 
도외시한다면, 그것들은 형식적이다. 

이제 나는 말한다. 인간은,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목적 그 자체로 실존하며, 한낱 이런저런 의지의 
임의적 사용을 위한 수단으로서 실존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그의 모든, 자기 자신을 향한 행위에 있어서 그리고 
다른 이성적 존재자를 향한 행위에 있어서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서 보아야 한다.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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