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 크래시 2 - 메타버스의 시대
닐 스티븐슨 지음, 남명성 옮김 / 문학세계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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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 요즘 단연코 핫한 기술 중 하나이다. 영화를 통해서는 메타버스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이미 보여주고 있고, 실제로 이 기술이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정말 뜨거운 기술이다. 그런 메타버스에 관심을 가지던 요즘 이 소설을 알았다. 사실 메타버스라는 단어가 이 소설에서 처음등장했다는 사실을 알고 헉!했고, 더 놀라웠던건 이 소설이 1992년에 쓰여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역시 사람의 상상력이란. 1980년대 나왔던 영화 백투더퓨처가 그린 미래가 과거가 된지 이미 6년이나 지난 지금. 우리는 1992년의 소설에서 그린 세계가 시작되는것을 지금 보고 있다. 와우.


제목인 스노크래시는 메타버스 세계속에서 퍼지고 있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이름이다. 메타버스를 통해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그 영향은 리얼세계로 전달된다. 그 사람의 뇌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이다. 그 감염은 그 사람을 감염체로 만들어버린다. 그 감염체는 또다른 감염원으로 타인에게 퍼지는데... 주인공 히노는 단순한 피자배달부가 아닌, 그 메타버스를 만들어낸 개발자중 하나로 현재는 CIC의 해커로 일하고 있다. 그런 히노는 어떤 아바타가 준 하이퍼카드에, 같이 메타버스르 만든 다파이비드가 당하는 것을 보고 스노크래시에 대해 파고 들기 시작한다. 다음 내용은 책을 통해서~ ㅎ


이 책을 보고 있다보면, 어디가 현실인지, 어디가 메타버스인지 애매해지는 순간이 온다. 어디서나 메타버스에 연결할 수 있고, 메타버스 안에서 누군가 내게 돈을 건내면 실제 나의 계좌에 그 돈이 입금되는 등의 일들이 그려진다. 다만 다른것이 있다면 메타버스에서 나의 아바타가 죽으면 묘지의 데몬들이 나타나 그 시체를 블랙선의 지하로 가져간다. 그  때 나는 메타버스에서 튕겨져 나와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다. 물론  데몬들이 나의 아바타 시체를 가져가기 전까지는 다시 메타버스에 들어올수 없지만, 그래도 다른 아바타로 들어올 수 있다는 점 정도?!  그런 메타버스의 바이러스가 실제의 나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인데, 지금은 인간의 뇌에 대한 연구가 미진하지만,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인간 뇌의 완전한 연구가 이뤄진다면, 가능한 세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이 오싹했다. 진짜 내가 컴퓨터가 된 느낌이랄까.

그런 세상이 온다면 기계와 사람이 다른 것이 무엇일까. 인간의 생각 그 자체가 다 읽히는 세계인데.. 책은 이런 내용을 고대 수메르의 엔키와 아세라의 스토리와 접목 시킨다. 거기다 종교까지. 와~ 개인적으로 이 흐름이 굉장히 인상적이였다. 마치 인디아나존스와 레디플레이어원을 합쳐놓은 느낌?! 그리고 바이러스는 분명 '악'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그 바이러스를 통해 인간의 생각이 다양해지면서 외부 바이러스에 더 강해졌을 것이라는 전환도 놀라웠다. 여러모로 놀라운 책이다.


별개로 이 책에서 말하는 메타버스의 세계에서 아바타가 현실과의 괴리감이 클수록 그 속의 세상에서 나올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있자면 유튜브, SNS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요즘이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92년의 소설을 지금 읽고 있음에도 전혀 올드하지 않다. 점점더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지금. 어느 소설보다 현실적이지 않을까 싶다.


"잠깐만, 후아니타. 확실히 얘기해 봐. 이놈의 스노 크래시라는 거 말이야. 바이러스야? 아니면 마약이야? 그것도 아니면 종교야?" 

후아니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서로 다를게 뭔데?" p. 310


"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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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 크래시 1 - 메타버스의 시대
닐 스티븐슨 지음, 남명성 옮김 / 문학세계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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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 요즘 단연코 핫한 기술 중 하나이다. 영화를 통해서는 메타버스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이미 보여주고 있고, 실제로 이 기술이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정말 뜨거운 기술이다. 그런 메타버스에 관심을 가지던 요즘 이 소설을 알았다. 사실 메타버스라는 단어가 이 소설에서 처음등장했다는 사실을 알고 헉!했고, 더 놀라웠던건 이 소설이 1992년에 쓰여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역시 사람의 상상력이란. 1980년대 나왔던 영화 백투더퓨처가 그린 미래가 과거가 된지 이미 6년이나 지난 지금. 우리는 1992년의 소설에서 그린 세계가 시작되는것을 지금 보고 있다. 와우.


제목인 스노크래시는 메타버스 세계속에서 퍼지고 있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이름이다. 메타버스를 통해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그 영향은 리얼세계로 전달된다. 그 사람의 뇌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이다. 그 감염은 그 사람을 감염체로 만들어버린다. 그 감염체는 또다른 감염원으로 타인에게 퍼지는데... 주인공 히노는 단순한 피자배달부가 아닌, 그 메타버스를 만들어낸 개발자중 하나로 현재는 CIC의 해커로 일하고 있다. 그런 히노는 어떤 아바타가 준 하이퍼카드에, 같이 메타버스르 만든 다파이비드가 당하는 것을 보고 스노크래시에 대해 파고 들기 시작한다. 다음 내용은 책을 통해서~ ㅎ


이 책을 보고 있다보면, 어디가 현실인지, 어디가 메타버스인지 애매해지는 순간이 온다. 어디서나 메타버스에 연결할 수 있고, 메타버스 안에서 누군가 내게 돈을 건내면 실제 나의 계좌에 그 돈이 입금되는 등의 일들이 그려진다. 다만 다른것이 있다면 메타버스에서 나의 아바타가 죽으면 묘지의 데몬들이 나타나 그 시체를 블랙선의 지하로 가져간다. 그  때 나는 메타버스에서 튕겨져 나와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다. 물론  데몬들이 나의 아바타 시체를 가져가기 전까지는 다시 메타버스에 들어올수 없지만, 그래도 다른 아바타로 들어올 수 있다는 점 정도?!  그런 메타버스의 바이러스가 실제의 나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인데, 지금은 인간의 뇌에 대한 연구가 미진하지만,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인간 뇌의 완전한 연구가 이뤄진다면, 가능한 세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이 오싹했다. 진짜 내가 컴퓨터가 된 느낌이랄까.

그런 세상이 온다면 기계와 사람이 다른 것이 무엇일까. 인간의 생각 그 자체가 다 읽히는 세계인데.. 책은 이런 내용을 고대 수메르의 엔키와 아세라의 스토리와 접목 시킨다. 거기다 종교까지. 와~ 개인적으로 이 흐름이 굉장히 인상적이였다. 마치 인디아나존스와 레디플레이어원을 합쳐놓은 느낌?! 그리고 바이러스는 분명 '악'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그 바이러스를 통해 인간의 생각이 다양해지면서 외부 바이러스에 더 강해졌을 것이라는 전환도 놀라웠다. 여러모로 놀라운 책이다.


별개로 이 책에서 말하는 메타버스의 세계에서 아바타가 현실과의 괴리감이 클수록 그 속의 세상에서 나올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있자면 유튜브, SNS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요즘이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92년의 소설을 지금 읽고 있음에도 전혀 올드하지 않다. 점점더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지금. 어느 소설보다 현실적이지 않을까 싶다.


"잠깐만, 후아니타. 확실히 얘기해 봐. 이놈의 스노 크래시라는 거 말이야. 바이러스야? 아니면 마약이야? 그것도 아니면 종교야?" 

후아니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서로 다를게 뭔데?" p. 310


"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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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가 만드는 가상경제 시대가 온다
최형욱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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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 언제부터인가 이말이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대체 뭐지? 뭔데 이리 많은 이들이 이를 논하는지. 사실은 클럽하우스안에서 처음들었고, 꽤 유명한 사람들이 메타버스 얘기를 하고 있기에 궁금했다. 그래서 찾아보고 안 사실은 영화 "레디플레이어 원"이 말하는 세상이구나라는 것과 아직 멀었네, 시작 단계의 기술을 놓고 뭐 이리 말들이 많은가... 라는 것이였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초기가 아니라 이미 시작된 세계라는 것을 알았다.

대략적인 설명만으로는 아직 희미한 기술 같지만 사실 작년부터 시작된 펜데믹으로 우리는 물리적으로는 떨어져있지만 온라인을 통해 연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검증했다. 재택 근무, 재택 수업 등등 온라인을 이용한 전시회, 콘서트 등도 같은 맥락이다. 이미 메타버스 환경을 이용해 콘서트나 전시회는 열리기도 했다. VR, PC, 모바일 등 다양한 플랫폼을 반으로 말이다. 특히 최근의 오큘러스 퀘스트 같은 VR기기의 성능이 좋아지면서도 반대로 가격은 다운되어 사용자의 진입장벽이 낮아짐으로써, VR을 통한 또다른 가상세계로의 진입이 가능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콘서트나 전시회 같은 부분은 실사 이미지를 이용하여 VR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면 굳이 물리적으로 해당 장소를 가지 않아도 실제와 같은 느낌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도 현재 사용중이라고 한다. 와우, 써보고 싶군요.ㅎ)


그렇기에 실제로 메타버스의 세계를 선점하려는 각 유니콘기업들의 움직임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관련해서 구글, 애플 또한 AR, VR의 기술을 위해 관련 기업들을 인수하고, 자체적인 연구 및 데이터 축적에도 한창이라고 하니, 앞으로의 10년이 어떤 세상이 될지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일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메타버스라는 세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뒤안길로 사라진 기업 및 컨텐츠에 대한 부분도 있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싸이월드>. SNS의 초기 모델이였고, 도토리라는 가상경제 시스템도 가지고 있었고, 많은 유저들이 이용했음에도 왜 싸이월드는 그리 무너져야 했는지에 대해 폐쇠성, PC라는 플랫폼에서 모바일로의 전환이 늦은점, 그리고 그것이 곧 미니홈피였지만 미니홈피를 벗어날 수 없는 그 프레임 등 여러 요인에 관해 말한다. 관련하여  또다른 프로그램으로 개인적으로는 잘 모르나 <세컨드라이프>라는 컨텐츠도, 메타버스로 가기위한 노력은 하고 있으나, 메타버스로 가기에 기술력이나 동기부여 시스템이 부재한 상황이라 꽤나 고전중이라고 한다.


 이처럼 지금 핫한 기업이라도 사용자의 관심이 떨어지는 것은 한 순간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사용자의 니즈를 빠르게 판단하면서도 관심이 떨어지지 않도록 퀘스트나 적절한 보상이 뒤따라야 하며, 어떤 플랫폼에서 동작이 가능해야 하는 등의 수많은 요소가 필요함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이런 생태계가 생성되기 전에 상업화가 먼저이뤄진다면, 그 또한 더이상의 나아감을 저해하는 부분이라니, 그 안의 균형은 정말 현실을 닮았다는 느낌이다. 관련하여 물론 기술은 기본이다.

 지금의 휴대폰 또는 웨어러블 디바이스에 적용되고 있는 수많은 센서가 결국은 앞으로의 메타버스에 반드시 필요한 기술들이며, 여전히 부족함이 더 많지만 지금의 발전속도로 본다면, 와. 

꼭 이런 영화같은 일 뿐 아니라, PTSD 증후군을 치료하는 방법으로도 VR을 이용하기도 하고, 치매환자들의 진행도를 늦추게 만드는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도 있다고 한다.  (예전의 추억들을 이미지화 하여 계속해서 보여줌으로써 치매의 정도를 늦추는 효과 등) 또한 아주 오래전부터 논의되었지만, 사실상 힘들었던 수술시뮬레이션(실제 수술하는 느낌을 줄수 있는..) 프로그램 이야기도 거의 가시화 되고 있는 시점이라고 하니, 메타버스라는 세계가 가져올 수 있는 효과는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기술을 차치하고서라도 경제적인 부분이나 활용적부분 등에서 보완하고 사회적 합의점을 찾아가야 할 부분등 가상세계 및 가상경제의 이슈와 한계는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치 지금의 암호화폐처럼.? 신뢰성, 안정성, 변동성, 투명성, 보안, 규제와 사회 수용성 등등 그리고 우리는 현실세계에 발을 딪고 서있기에 현실과 가상 세계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지 등은 기술의 발전과 함께 사회적 합의가 반드시 필요한 부분도 있다. 그리고 그 세계 자체를 지배하려들고, 그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각종 범죄들에 대한 규범도 필요하다. 가상이면서 현실속에 녹아있는, 그러면서 현실이 가상화 되는 세계라. 영화속에서만 가능했을 법한 일들이 현실로 나오는 것을 보면 저런 논의 또한 기술만큼이나 빠르게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또한 책에서 언급되는 상업화와 관련된 메타버스 세계는 개인적으로 "감시"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머무는 시선, 나의 움직임. 나의 소리 등으로 판단되는 모든 데이터들을 수집하여 상업이라는 측면과 묶는다니, 말그대로 "감시자본주의"시대에 들어서는 초반이지 않나 하는 두려움이 든다. 관련해서 개인의 어떤 정보도 개인의 허락없이는 이용될 수 없음을 명시하는 법이 기술만큼 빠르게 뒷받침 되기를 바란다. 


중고등학교 시절만해도 생각치도 못한 세상이 지금 현실이 되어 있는 지금, 20-30년후의 현실이 내가 아는 지금의 현실일지. 사뭇 궁금해지게 만드는 책이다. Good!


새로운 구글이 그 안에서 탄생할 수도 있고 새로운 인류가 탄생할 수도 있다. 가상경제의 규모가 실물 경제에 뮥박할 수도 있고, 가상 세계의 인구가 지구 인구의 몇십 배가 될 수도 있다. 하루를 보내는 시간에서 가상세계에서의 비중이 점점 커지다가 역전되는 순간이 올 수도 있고 주말 내내 그곳에서 보내는 사람도 많아지게 될 것이다. 단순히 상상이라 치부하기에는 지금 변화의 속도가 급진적이고 가파르다. 하지만 분명한 것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의지와 노력에 달렸다는 것이다. 기술이 만들어온 변화와 영향은 늘 양날의 칼이었고, 인류는 이롭고 정의로운 목적으로 이를 이용하기 위해 노력을 해왔다는 것이다. 메타버스로의 여정도 같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변화의 크기만큼 기회의 크기도 크다. 기하급수적인 변화는 우리에게 어느 때보다 큰 기회의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주게 될 것이다. 제임스 할리데이가 지금 다시 메타버스를 바라본다면 이렇게 이야기할 것 같다.

"모든 현실은 진짜다. Every Reality is Real."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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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자격 - 도시계획학 1 : 역사 도시계획학 1
강명구 지음 / 서울연구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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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란 무엇일까? 그냥 사람이 많이 살면 도시인가? 얼마나 많이 살아야 도시인가? 도시는 언제부터 생겨난것일까? 등등에 대한 질문이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떠올랐다. "도시의 자격" 도시에 대한 자격이 왜 필요하지? 라는 질문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을 떠올리면서 책을 읽었다. 그런 질문들에 대해 이 책은 일단 도시의 시작과 그 역사를 말한다.

나는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한것은 농업혁명, 즉 농경의 시작에서 비롯되었다고 알고 있었다.(어떻게 이렇게 생각했는지는 기억이..) 그런데 이 책에서 그 전후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한다. 인간,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호모 사피엔스는 사회적 유대관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혈족들을 기반으로 군집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이 자신들의 생존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여살던 인간군집 속에서 공동체 의식을 깨우고, 그것을 하나로 묶기위해 종교가 생겨났으며, 그것을 기반으로 동료애가 탄생했다고 한다. 그렇게 모여살던 인간이 수렵채집에서 농업생산으로, 이동에서 정착생활로 생활 패턴이 변경되었고, 그로인해 인간의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그것이 농업이 활성화의 원인이였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정설이라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보는 측면이 요즘은 좀더 힘을 얻는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도시다.

이런 도시가 고대 그리스 아테네를 거치며 도시국가 형태로 발전했고, 그 속에서 민주주의가 태어났다. 물론 당시는 인구의 10%정도만이 참여 가능한 민주주의 였지만, 도시의 형태가 아고라를 통해 누구와도 의견을 나눌수 있는 개방된 공간으로써 모두의 공간이였다고 한다.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시장이 서기도 해 상업적인 공간이 되기도하는, 특정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모두의 필요에의해 자연스럽게 생겨난 공간이 도시라는 것이다. 그러다 중세에 들어오면서 왕과 영주, 그리고 성직자들이 도시를 점령하면서 지배권을 위한 도시로써만 존재하는 도시의 후퇴의 시기가 되었다. 이후 이 모든 억압으로부터 도망쳐나온 이들과 상업을 위한 이들이 모이는 곳이 도시로써 새로 탄생하게되었고, 이것은 피지배계층의 시민사회운동의 계기가 되는 장소로써의 도시가 되기도 했다. 중세 이후의 도시는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그들끼리 군락을 이루고, 서로의 이득을 도모하면서 자치정부 형태로써의 도시가 생성됨으로써 과학이 발전되고 사회적 시민의식이 고취됨으로써,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생각이 피어나면서 18세기 시민혁명의 기반이 되었다. 사람의 의지로 모인 장소가 또다른 의지를 만들어낸것이다.

이렇게 도시가 발전하는 중에 사회학, 과학의 발전으로 도시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된다. 도시의 구성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실 도시는 농촌에 비해 인구가 많이 모여들면서 자유롭지만 오염되고 혼잡스러운 이미지도 가지고 있었다 한다. 그래서 시작된 도시계획, 도시를 보다 살기 편하고 깨끗한 곳으로 만들기 위했던 여러 노력의 역사를 저자는 말하고 있다. 물론 시민을 위한 노력도 있었지만, 그저 보여주기식도 있었고, 또는 지배계층의 구미에 맞는 계획도 있었다. 물론 다 실패 였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도시를 계획하는 이의 생각만 반영된 도시의 이미지는 절대 그 이미지 그대로 만들어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자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말하는 것은 도시를 계획할때, 또는 도시가 만들어질때에는 그곳에 사는 이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부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시는 특정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장소가 아니라, 그곳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만들어가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서울은 조선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왕과 양반위주의 도시에서 벗어나지 못한 형태에서 6.25를 겪으며 무너진 도시를 세우기위해 국가위주의 개발이 중심이 되었기에 당시에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거추장스러운 규제가 대부분이고 사람이 있어야 할 곳에 건축만이 남고 소수의 건축업자에게만 유리한 도시가 되었다.

사실 이 부분은 왜?라는 질문이 든다. 서울의 어떤면이 저자에게 이리 아쉬움으로 남는지? 이 부분은 아마 다음책에 등장할 것 같다. 서울이 좋은 도시의 모습은 아니지만 도시공학자로써 바라보는 서울의 아쉬운 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지금 서울의 모습과 유럽도시, 미국도시에 비해 아쉬운 점은 무엇인지를 다음 편을 통해 꼭 알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개인적으로 책의 말미에 등장하는 헤세바르텍이 기록한 여행기 속의 서울은 조금 아쉽다. 물론 100년전의 서울은 당시 오스트리아에 비해 많이 뒤떨어진 모습이겠지만. 사실 그들도 그런 시대를 거쳐오지 않았는가?! 췌. 닥터후보니까 중세 영국으로 가니까 X밭이던데... 하던 생각에 잠시 울컥 하기도했지만.ㅎ 그때의 서울과 지금의 서울이 불과 100년밖에 차이나지 않는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발전에 으쓱해 지기도 한다.

사실 역사에는 관심이 있지만, 말그대로 세계사에 대한 부분이였지, 도시 관점 속에서 역사는 처음이였기에 책을 읽으며 신선했다. 아. 역사의 흐름을 이런 관점에서도 알 수 있구나. 하는 새로움. 저자의 다음 편을 기다리며. Good!

"도시의 공기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였다. 도시로 들어온 어떤 사람에 대하여 누군가가 아무런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은 채 1년 하고도 하루가 지나면 그는 농노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된다는 불문율이 독일에서 자리 잡았다. 이전에는 없었던 '독립된 개인'이 탄생한 것이다." p.82

"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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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 - 건축 너머의 세계를 향한 치열한 질문과 성찰 서가명강 시리즈 17
김광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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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 건축에 대해 어떤 말을 하려하나, 미래를 향하는 건축을 말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과거의 건축의 역사부터 미래까지를 말씀하시려는 것일까. 하면서 읽은 이 책은 먼저 소감을 밝히자면 내게는 어려웠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점을 나느 다음과 같이 이해햇다. "건축에 대해 알고, 원하는 바를 말하고, 간섭하라는 것."

 

"건축은 불순한 학문이다"라는 대제목이 붙은 챕터를 시작으로 마지막 "건축이 모두의 기쁨이 되려면"이라는 대제목으로 끝나는 이 책은 건축의 의미하는것과 건축이 나타내는 것을 시작으로 사회가 변화해감에 따라 인간의 행동과 생활변경으로 인해 변화하는 건축, 그리고 그 건축이 나타내는 것에 대한 변화, 그리고 앞으로(?) 아니면 진정 원하는(?) 건축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한다.

건축은 태생적으로 '배제'하는 학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타자로부터 나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구별짓기 위해 짓기 시작한 것이 건축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지금 선사시대부터 남아있다고 보는 유적터를 가보면 돌 세워놓은거며, 이스타문명의 모아이 석상이 떠오르는것 나뿐인가. 저자는 또 다른 의미로 건축은 모든 위험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고 사람들의 삶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가장 바깥에 있는 보호물이기도하고, 현대, 특히 우리나라의 건축은 말그대로 부동산이고 재산 형성을 위한 욕망의 산물이라고 말씀하시니 첫 대제목이 이해가 가는 바이다.

그렇다면 건축은 사회를 나타내는가? 아니면 사회가 건축을 그리 만든것인가. 이 부분에서 한나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 등장한다.(개인적으로 못읽어본책이다....)

 

"이소노미아는 법 앞에서 동등하다는 뜻이다. 평등은 우리가 흔히 이해하듯이 무릇 인간이기 때문에 추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날 때부터 불평등했기 때문에 법에 의해 시민이 됨으로써 인공적으로 약속한 사항에서 평등이 비롯됐다는 것이다." p.123

 

평등이라는 개념을 당시 도시들은 격자모양으로 구회함으로써 도시 전체의 체계를 통일했고, 그런 공간을 같이 누림으로써 공평한 권력으로부터 평등을 누리고 있다는 인식을 갖게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근대 산업화를 시작으로 노동자들을 위한 주택이 공급되고, 소위 특정 타운을 만들어 그들에게 대출을 통해 제공하고, 개인이 '사유'하는 사적인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제공되었다고도 한다. 그로인해 공적장소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음으로써 공적영역의 건축물의 권력은 당시의 지배계급, 요즘이라면 관료행정 계급이 그 권력을 가지고 주문함으로써 다양성을 고려한 건축이 아니라 표준화하고 단순화된 오로지 기능적인 요구, 다채로운 의견이 아닌 단순화되고 '사회적 요청'의 근거로써 건축물이 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건축이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사회의 요구에 따라 건축물이 세워지고, 그 건축물에서 사는 사람들의 생각이 획일화되고 표준화 됨으로써 다시 건축물의 형태로 나타날 수 밖에 없음을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를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여러 철학자의 말을 들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중 푸코의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상상해보니, 병원, 학교, 공장이 다 비슷하게 생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의 색깔만 다를뿐 다 비슷하게 생긴 건물에 내부도 거의 비슷하다. 전혀 다른 사람들이, 전혀 다른 목적으로 누리는 공간이 다 비슷한것이다. 이것을 '국가이데올로기정치'라 하며, 사람들에게 무의식적으로 국가와 사회에 복종하도록 만드는 장치들이라는 것이다. 소름이 끼쳤다.

 

다른 건축물로 "소유가 곧 자산의 정도"를 나타내는 요즘의 아파트 역시 복잡하고 다양한 내용이 나타난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  소유하는 주택이라는 개념은 근대 산업화와 함께 등장했고, 소위 지배계급이 노동계급에게 던지는 당근과 같은 개념이기도 했다.  개인의 내밀한 공간을 제공하고,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프라이빗한 곳, 깨끗하고, 쾌적한 '나', '우리가족'의 집이라는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환상을 '집'에 묶어두기 위한 수단으로써 제공되었고, 그것이 더 많은 일을, 더 많은 노동을 하게끔 만드는 방법이였던 것이다. 그렇게 지어진 뉴욕 롱아일래든의 레빗타운p.224가 등장하는데, 그 사진을 보고 있자니, 그 집들을 위로 쌓아 올리면 지금 대한민국의 아파트이겠구나.하는 생각에 미국이나 우리나, 비슷하다는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렇다면 지금 지어지는 우리의 집은 무엇이 목표가 되어야하는가?

 

"지속 가능성을 말할 때 종종 인용하는 문장이 있다.

'환경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 아니라 미래의 아이들에게서 빌린 것이다.'

레스터 브라운의 경구다. '대지를 잘 돌보라.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대지를 물려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아이들로부터 잠시 빌린 것이다'라는 인디언 격언에서 따온 말이다." p.253

 

과학, 기술등은 미래를 생각하고 연구되고 발전되어 가지만, 건축은 현재를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가장 보수적인 학문중 하나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 건축이 미래를 짓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개개인이 어떤 건축을 원하는지를 항상 생각하고 소리내어 말을 해서 그것을 건축가에게 사회에 반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40년전, 50년전에 만들어진 학교와 똑같은 학교를 또 만들고 앞으로 미래를 살아가야하는 아이들이 지내야 하는 공간에 대해 그저 전문가들이나 관료행정가들에게만 맡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공公이란 어떤 것일까? 아렌트는 그리스 광장을 떠올리며 '공적'이라는 용어가 세계 자체를 의미한다고 했다. 공이란 '세계'다 권력이나 행정이 아니다. 공은 개인과 사회에 잠재한 바를 확장해 이뤄지는 '세계'를 말한다. 우리는 공공은 많이 말하고 이것으로 정책의 타당성을 강조하지만 '세계'로서의 공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p. 282

 

건축은 기능적으로도 필요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 공간 속에서 기쁨을 누리고 행복해야 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공간을 활용하면서도, 그 공간을 가까이 또는 멀리서 바라봄으로써 누리는 기쁨도 포함해야 한다 말한다. 그렇다면 그런 공간을 누가 만들어내는 것일가. 그것을 저자는 그곳을 사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실천함으로써 그 건축이 만들어낸 공간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렌트가 말한 '세계'라는 공간이라고 한다. 그런 공간으로 말리의 젠네모스크라는 건축물이 등장하는데, 그 모스크는 1년에 한번 전 도시인들이 그 모스크에 보여 진흙을 칠한다고 한다. 말그대로 출현하는 공간으로 모든 시민들의 손으로 지켜지고 만들어지는 건축인 것이다. 그 모스크는 그곳에 사는 이들의 신념, 의지, 생각 그 모든것들이 모여 만들어진 흙으로써 만들어진 물화인것이다.

 

처음부터 말했든 책이 쉽지 않다. 건축이란 무엇일까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읽기시작했지만 생각보다 어려워 한번 읽고, 서가명강 교수님의 강연을 듣고, 다시 읽으며 이해한바는 '건축'을 사회속에 맡기지말고, 사회의 일원으로써 소리내어 만들어가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학교를 바라보면서는 적어도 40년,50년전과 같은 모습의 학교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기술이 발전하는데 고작 이런생각밖에 못하냐는 소리를 해선 안될거같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 정말 빠르게 변해사는 사회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 무엇을 생각했었는가를 깊게 고민해 봐야겠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한번 더 읽어봐야겠다.

Good!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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