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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 - 건축 너머의 세계를 향한 치열한 질문과 성찰 ㅣ 서가명강 시리즈 17
김광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4월
평점 :
"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 건축에 대해 어떤 말을 하려하나, 미래를 향하는 건축을 말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과거의 건축의 역사부터 미래까지를 말씀하시려는 것일까. 하면서 읽은 이 책은 먼저 소감을 밝히자면 내게는 어려웠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점을 나느 다음과 같이 이해햇다. "건축에 대해 알고, 원하는 바를 말하고, 간섭하라는 것."
"건축은 불순한 학문이다"라는 대제목이 붙은 챕터를 시작으로 마지막 "건축이 모두의 기쁨이 되려면"이라는 대제목으로 끝나는 이 책은 건축의 의미하는것과 건축이 나타내는 것을 시작으로 사회가 변화해감에 따라 인간의 행동과 생활변경으로 인해 변화하는 건축, 그리고 그 건축이 나타내는 것에 대한 변화, 그리고 앞으로(?) 아니면 진정 원하는(?) 건축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한다.
건축은 태생적으로 '배제'하는 학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타자로부터 나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구별짓기 위해 짓기 시작한 것이 건축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지금 선사시대부터 남아있다고 보는 유적터를 가보면 돌 세워놓은거며, 이스타문명의 모아이 석상이 떠오르는것 나뿐인가. 저자는 또 다른 의미로 건축은 모든 위험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고 사람들의 삶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가장 바깥에 있는 보호물이기도하고, 현대, 특히 우리나라의 건축은 말그대로 부동산이고 재산 형성을 위한 욕망의 산물이라고 말씀하시니 첫 대제목이 이해가 가는 바이다.
그렇다면 건축은 사회를 나타내는가? 아니면 사회가 건축을 그리 만든것인가. 이 부분에서 한나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 등장한다.(개인적으로 못읽어본책이다....)
"이소노미아는 법 앞에서 동등하다는 뜻이다. 평등은 우리가 흔히 이해하듯이 무릇 인간이기 때문에 추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날 때부터 불평등했기 때문에 법에 의해 시민이 됨으로써 인공적으로 약속한 사항에서 평등이 비롯됐다는 것이다." p.123
평등이라는 개념을 당시 도시들은 격자모양으로 구회함으로써 도시 전체의 체계를 통일했고, 그런 공간을 같이 누림으로써 공평한 권력으로부터 평등을 누리고 있다는 인식을 갖게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근대 산업화를 시작으로 노동자들을 위한 주택이 공급되고, 소위 특정 타운을 만들어 그들에게 대출을 통해 제공하고, 개인이 '사유'하는 사적인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제공되었다고도 한다. 그로인해 공적장소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음으로써 공적영역의 건축물의 권력은 당시의 지배계급, 요즘이라면 관료행정 계급이 그 권력을 가지고 주문함으로써 다양성을 고려한 건축이 아니라 표준화하고 단순화된 오로지 기능적인 요구, 다채로운 의견이 아닌 단순화되고 '사회적 요청'의 근거로써 건축물이 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건축이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사회의 요구에 따라 건축물이 세워지고, 그 건축물에서 사는 사람들의 생각이 획일화되고 표준화 됨으로써 다시 건축물의 형태로 나타날 수 밖에 없음을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를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여러 철학자의 말을 들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중 푸코의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상상해보니, 병원, 학교, 공장이 다 비슷하게 생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의 색깔만 다를뿐 다 비슷하게 생긴 건물에 내부도 거의 비슷하다. 전혀 다른 사람들이, 전혀 다른 목적으로 누리는 공간이 다 비슷한것이다. 이것을 '국가이데올로기정치'라 하며, 사람들에게 무의식적으로 국가와 사회에 복종하도록 만드는 장치들이라는 것이다. 소름이 끼쳤다.
다른 건축물로 "소유가 곧 자산의 정도"를 나타내는 요즘의 아파트 역시 복잡하고 다양한 내용이 나타난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 소유하는 주택이라는 개념은 근대 산업화와 함께 등장했고, 소위 지배계급이 노동계급에게 던지는 당근과 같은 개념이기도 했다. 개인의 내밀한 공간을 제공하고,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프라이빗한 곳, 깨끗하고, 쾌적한 '나', '우리가족'의 집이라는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환상을 '집'에 묶어두기 위한 수단으로써 제공되었고, 그것이 더 많은 일을, 더 많은 노동을 하게끔 만드는 방법이였던 것이다. 그렇게 지어진 뉴욕 롱아일래든의 레빗타운p.224가 등장하는데, 그 사진을 보고 있자니, 그 집들을 위로 쌓아 올리면 지금 대한민국의 아파트이겠구나.하는 생각에 미국이나 우리나, 비슷하다는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렇다면 지금 지어지는 우리의 집은 무엇이 목표가 되어야하는가?
"지속 가능성을 말할 때 종종 인용하는 문장이 있다.
'환경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 아니라 미래의 아이들에게서 빌린 것이다.'
레스터 브라운의 경구다. '대지를 잘 돌보라.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대지를 물려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아이들로부터 잠시 빌린 것이다'라는 인디언 격언에서 따온 말이다." p.253
과학, 기술등은 미래를 생각하고 연구되고 발전되어 가지만, 건축은 현재를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가장 보수적인 학문중 하나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 건축이 미래를 짓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개개인이 어떤 건축을 원하는지를 항상 생각하고 소리내어 말을 해서 그것을 건축가에게 사회에 반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40년전, 50년전에 만들어진 학교와 똑같은 학교를 또 만들고 앞으로 미래를 살아가야하는 아이들이 지내야 하는 공간에 대해 그저 전문가들이나 관료행정가들에게만 맡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공公이란 어떤 것일까? 아렌트는 그리스 광장을 떠올리며 '공적'이라는 용어가 세계 자체를 의미한다고 했다. 공이란 '세계'다 권력이나 행정이 아니다. 공은 개인과 사회에 잠재한 바를 확장해 이뤄지는 '세계'를 말한다. 우리는 공공은 많이 말하고 이것으로 정책의 타당성을 강조하지만 '세계'로서의 공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p. 282
건축은 기능적으로도 필요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 공간 속에서 기쁨을 누리고 행복해야 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공간을 활용하면서도, 그 공간을 가까이 또는 멀리서 바라봄으로써 누리는 기쁨도 포함해야 한다 말한다. 그렇다면 그런 공간을 누가 만들어내는 것일가. 그것을 저자는 그곳을 사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실천함으로써 그 건축이 만들어낸 공간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렌트가 말한 '세계'라는 공간이라고 한다. 그런 공간으로 말리의 젠네모스크라는 건축물이 등장하는데, 그 모스크는 1년에 한번 전 도시인들이 그 모스크에 보여 진흙을 칠한다고 한다. 말그대로 출현하는 공간으로 모든 시민들의 손으로 지켜지고 만들어지는 건축인 것이다. 그 모스크는 그곳에 사는 이들의 신념, 의지, 생각 그 모든것들이 모여 만들어진 흙으로써 만들어진 물화인것이다.
처음부터 말했든 책이 쉽지 않다. 건축이란 무엇일까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읽기시작했지만 생각보다 어려워 한번 읽고, 서가명강 교수님의 강연을 듣고, 다시 읽으며 이해한바는 '건축'을 사회속에 맡기지말고, 사회의 일원으로써 소리내어 만들어가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학교를 바라보면서는 적어도 40년,50년전과 같은 모습의 학교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기술이 발전하는데 고작 이런생각밖에 못하냐는 소리를 해선 안될거같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 정말 빠르게 변해사는 사회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 무엇을 생각했었는가를 깊게 고민해 봐야겠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한번 더 읽어봐야겠다.
Good! G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