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의 밤
블레이크 크라우치 지음, 이은주 옮김 / 푸른숲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베스트셀러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 블레이크 크라우치의 30일의 밤나에게 납치된 나라는 설정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양자역학, 다중우주 등 이런 과학적인 소재에 대한 상식은 부족하지만, 이 작품을 각색한 드라마 <다크매터> 시리즈가 방영 확정되었다는 것 때문에도 더 궁금증을 자아내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태어나서부터 줄곧 우리는 자신이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말을 듣는다. 나는 고유한 개인이라고. 지구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이것은 인류의 송가다.

그러나 이제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다. (p.460)

 

물리학과 교수 제이슨은 아내 다니엘라와 아들 찰리를 사랑하는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친구 라이언의 신경과학 분야 파비아상 수상을 축하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가면은 쓴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한다. 폐허가 된 건물 지하에서 납치범이 투여한 약물에 의해 의식을 잃었던 제이슨이 깨어난 곳은 자신이 알고 있던 세상이 아니었다. 과학자로 성공했지만 결혼한 적도 아들도 없는 이곳에서 제이슨은 자신이 정신 이상자 혹은 뇌종양이 아닌지 의심한다. 이곳은 15년 전 제이슨이 20대 후반 2달 만난 다니엘라의 임신에 결혼이 아닌 각자의 분야에 집중하기를 선택하고 지나온 또 다른 제이슨 즉, 제이슨 2가 살았던 또 다른 시공간이었다. 이곳에서 제이슨 2는 성공한 과학자로 다니엘라는 성공한 예술가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다중우주로 여행 후 귀환을 연구하던 연구소의 투자자는 14개월 만에 귀환한 제이슨의 연구 결과 때문에 다니엘라와 친구 라이언을 살해할 정도로 잔인했다. 정신과 의사 어맨다의 도움으로 다시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한 제이슨의 고군분투가 펼쳐진다. 다중우주의 다양한 버전의 문은 끝도 없고 이 문을 열 기회는 한정되어 있었다. 다시 사랑하는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한 고난은 끝도 없어 보이는데 제이슨 2만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또 다른 제이슨들이 수도 없이 등장하는데...

 

우리는 그 삶을 거시적으로, 하나의 큰 이야기로 바라보지만, 우리가 그 삶 속에 있을 때는 그저 하루하루의 일상일 뿐이잖아? 그리고 그 일상이야말로 우리가 다툼 없이 잘 지내야 할 대상이지 않을까?" (p.481)

 

책을 펼치는 순간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과연 제이슨이 가족에게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다중우주의 문을 열 수 있을지 궁금해 끝까지 정주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 순간 내가 하는 선택의 결과 그리고 선택하지 않았던 결과의 경우의 수가 무한으로 발생하는 다중우주라는 과학적 소재가 이토록 흥미롭게 펼쳐지니 드라마로 방영되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닌가 싶다. 제이슨이 좌절할 때는 나 또한 좌절하며 제이슨만 진정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제이슨들도 모두 가족을 사랑하는 진심을 담고 있으니 난감하기도 했다. 내가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지 상상만으로 정말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결국 이 이야기의 중심은 역시나 사랑이었고 그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또한 내가 선택한 이 현실을 하루하루 열심히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한편의 버라이어티한 영화를 보는 듯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어 읽었기에 드라마가 나오는 날이 너무 기다려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울어진 미술관 -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이야기
이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사는 사회는 강자가 있으면 약자가 있게 마련이다. 이런 약자에 대한 차별은 실생활에 깊이 자리 잡고 있기에 예술작품 속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 화가의 출세작, 화가의 마지막 그림, 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의 작가 이유리가 이번엔 그림 속 권력 이야기를 담은 기울어진 미술관을 출간했다. 예술품과 권력은 깊은 관계가 있고 그런 권력에 가려진 약자들에 관한 이야기 중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에두아르 마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올랭피아> 속엔 백인 창녀와 흑인 하인이 등장한다. 창녀가 정면을 응시하며 기존 누드화의 틀을 깨버린 이 작품은 프랑스 화단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런 색다른 시도와 관련되어 이 작품이 소개되는 경우가 많은데 흑인 하인이 이 그림에서의 역할을 살펴보자. 흑인 하인을 둔다는 것은 상류층 남성의 후원을 아낌없이 받는다는 의미이긴 하지만 굳이 이 그림에 등장시킨 것은 백인 여성의 미모를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한 도구로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이다.

작가 에밀 졸라는 마네가 올랭피아에서 흑인 하녀를 그린 것은 '검은 터치'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며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마네가 작품 속에 몇몇 오브제와 인물을 조합시켜 놓았다면, 그것은 마네의 철학적 사고 때문이 아니라 아름다운 색채와 대비를 이뤄내고 싶다는 그의 욕망이 표현된 것이다." 즉 별다른 역할 없는 흑인 하녀를 등장시킨 것은 두 인물의 피부색을 강하게 대비시켜 그림에 색채 감각을 더하려는 의도였다 는 것이다. (p.36~37)

 

후세페 테 리베라의 <내반족 소년> (1642, 캔버스에 유채)에는 발이 안쪽으로 휘는 내반족장애가 있고 낡은 옷을 입은 소년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가난과 장애에도 삶을 긍정하는 인간에의 경의를 표현한 작품으로 소개되곤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부자들이 천국에 가기 위한 수단으로 의뢰받아 만들어진 그림이다. ‘신은 우리의 행동을 보고 있으며, 가난한 이에게 자선을 베풀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천국을 가기 위한 티켓을 사 모으듯 그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목적의식을 가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부자는 왜 굳이 목돈을 들여 <내반족 소년>을 주문했을까. 바로 난한 사람의 존재는 부자들에게 천국을 보장하는 '보험'이었기 때문이다. (p.174)

 

 

요즘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에 관한 책이 많이 나오고 그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아 관심을 가지는 분야 중 하나가 이런 미술 관련 책이다. 그동안 유명한 작품들을 단순히 예술성과 작품성에만 초점을 맞춰 감상했던 것을 넘어 오늘날의 시각에 맞춰 비판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이젠 작품을 감상할 때 작품이 만들어지던 당시의 사회문화적 측면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함을 깨우친 색다른 책이었다.

 

물론, 그 시대가 배태한 예술작품을 지금의 관점으로 평가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 아니냐는 반론도 가능하겠다. 그러나 당대가 떠안아야 했던 시대적 한계가 과연 오늘날에는 시원하게 끊어졌는지, 우리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도전 과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기울어진 미술관읽기의 의 의가 있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본다. (작가의 말 중 - p.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화 속 뉴욕 산책 - 뉴욕을 배경으로 한 46편의 명화, 그 영화 속 명소를 걷다
정윤주 지음 / hummingbird(허밍버드)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뉴욕을 사랑한 정윤주 작가가 들려주는 뉴욕을 배경으로 한 46편의 명화, 그 영화 속 명소와 영화 OST를 만나볼 수 있는 영화 속 뉴욕 산책을 읽어보았다.

 

뉴욕에서는 사계절이 뜨겁다. (p.194)

 

장르를 불문하고 시대를 넘나들며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 이야기와 그 영화 속에 나온 뉴욕 곳곳의 명소가 사진과 함께 담겨있다. 영화 속 장면과 함께 작가가 직접 찍은 뉴욕 사진은 뉴욕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영화 이야기만으로도 흥미로운데 그 영화 속에 나온 뉴욕의 매력적인 공간에 대한 설명과 OST가 소개되어 있기에 더욱 흥미롭다.

 

한여름 밤 센트럴파크에서의 콘서트는 도심 속 오아시스를 맛볼 수 있는 뉴요커들만의 특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넓고 깊게 뿌리를 내린 웅장하고 푸른 나무들 사이로 울려 퍼지는 오케스트라와 여름 향기에 취해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낭만적인 순간을 꼭 경험해보면 좋겠다. 열정 가득한 세계적인 프로뮤지션들과 한마음으로 교감하고 감동을 느끼며 수많은 인파 속에서 힘차고 아름다운, 낭만적인 한여름 밤의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p.88)

현재 뉴욕에서 활동 중인 세계적인 작곡가가 내게 해준 말이 생각난다.

콜럼버스 서클, 센트럴파크를 따라 그곳과 근접한 카네기 홀을 거닐며, 그 옛날 '차이코프스키,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마에스트로 작곡가들도 자신이 걸었던 같은 길을 그 당시 걸었겠지'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졌다고 한다. (p.236)

 

6월의 바람이 부드럽고 따뜻하게 불어오던 날 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초록색 불빛만큼이나 상쾌한 느낌으로 내 마음을 흔들었다. 참 뉴요커들의 열정이란. 열정과 동시에 즐기는 여유는 사뭇 지나치는 여행자의 마음까지 설레게 한다.

아 뜨겁다.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이 행복도 선택이다. 행복하고 싶은 만큼 우린 행복할 수 있다. 온통 초록색 나무들 초록색 벤치에 몸을 기대고 앉아 초록색 빛깔로 반짝이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바라보며,

난 느낀다.

찰나의 순간,

도시의 빛을.. (p.243)

 

책의 후반부에 저자가 알려주는 뉴욕 명소 이용 팁, 맨해튼 거리 그리고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뉴욕의 명소 또한 이 책의 매력 중 하나이다. 미술관, 공원, 카페, 거리, 빌딩, 백화점 등 그 외 명소에 대한 역사와 의미에 관한 이야기는 친절한 가이드에게 뉴욕을 제대로 소개받은 느낌이다.

 

뉴욕의 매력을 잘 알고 사랑하는 작가의 애정이 깊이 담긴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나 또한 뉴욕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작가가 이끄는 대로 뉴욕 사계절을 산책하며 뉴욕 곳곳의 매력과 함께 한 낭만적인 시간을 보냈다. 요즘 QR코드로 바로 음악을 검색할 수 있는 책들이 대세인데 이 책은 OST 제목만 나와 있어 직접 검색해서 찾아 듣는 번거로움이 있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하지만 뉴욕의 번잡함과 웅장한 만큼 한여름 밤 센트럴파크에서 열리는 낭만적인 콘서트에 직접 참석해 뉴욕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보고 싶다.

 

뉴욕이 설레다.

뉴욕이 사랑스럽다

뉴욕에서 매일 산책하고 싶다. ( 에필로그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가올 날들을 위한 안내서
요아브 블룸 지음, 강동혁 옮김 / 푸른숲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아브 블룸의 다가올 날들을 위한 안내서는 제목도 흥미로웠지만, 눈에 띄는 표지로 인해 더 읽고 싶었던 책이다. 제목과 표지로만은 예상하지 못했던 판타지와 서스펜스의 만남이 어우러진 이야기여서 한 번 더 놀라움을 주었다. ‘내게 일어날 미래의 일을 알려주는 책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을 내 경험으로 느낄 수 있는 위스키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 발생하는 흥미로운 설정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직장생활에서도 연애에서도 뭐 하나 내세울 거 없고 자신도 패배자라고 여기는 벤. 기자가 되고 싶었지만, 타인의 기사에 한두 줄의 지식의 살을 좀 붙여주는 역할을 하며 괄호맨이라 불린다. 우연히 서점에서 벤 자신을 위한 책 다가올 날들을 위한 안내서를 발견한 후 종잡을 수 없는 일에 휘말리기 시작한다. 위급한 상황에 책을 펼치고 안내대로 따르다 보니 바 없는 바를 찾아가게 된다. 이 바는 평범한 술을 팔기도 하지만 비밀리에 특별한 위스키를 파는 곳이기도 하다. 벤이 양로원에서 알게 된 노인 울프는 이 바의 이전 주인이었고 그가 벤에게 남긴 위스키 한 병은 울프의 경험이 담긴 특별한 위스키였다. 울프가 또 다른 위스키 한 병을 바의 직원 오스나트에게 남겼고 이 두 병의 위스키를 빼앗으려는 스테판의 위협에 맞닥트린다. 경험자들의 경험을 위스키에 담아 특별한 경험을 원하는 사람에게 판매하는 이 시스템에서 개인적으로 고용되어 활동하는 스테판은 살인을 저지르는 잔인함과 함께 다른 경험자들을 없애 유일한 경험자가 되려는 야욕도 가지고 있다. 안내서와 위스키를 적절히 사용해 스테판의 위협에 맞서는 이들의 활약이 펼쳐진다.

 

"누가 그 음식을 먹거나 마시면, 그 경험을 얻는 거야. 마치 자기 경험인 것처럼 전달받은 경험을 떠올리게 되지. 그 사람은 상대의 경험 자체를 경험한 셈이 돼. 카니발에 갔던 게 되는 거야."

(p.130)

 

한때 그는 우리가 단 한 번의 인생을, 단 하나의 줄거리를 살아갈 뿐이라는 사실에 비극의 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만 그게 비극이 되는 건 우리가 이런 법칙 앞에 겸손하게 허리 숙이기를 거부할 때뿐이다. (p.395)

 

단 한 모금만 마셔도 술에 담긴 경험이 내가 직접 체험한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술이 있다면 난 어떤 경험이 담긴 술을 마시고 싶을까? 이런 상상만으로도 흥미롭게 책을 볼 수 있었다. 순수하고 짜릿한 스릴이나 따듯한 경험을 원하는 사람도 있지만 타인에게 해를 가하거나 금지된 쾌락의 경험을 원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경험을 술에 넣는 기술을 알아낸 울프는 타인에 대한 공감을 물에 넣어 모든 이들이 마시고 세상의 평화를 원했다. 이 기술이 성공했다면 정말 세상의 평화가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한 상상도 흐뭇했다. 미래를 알려주는 안내서는 누가, 왜 제작했는지와 그럼 미래를 알려주는 책이 있다면 결국 정해진 미래는 바뀌지 않는 건가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해석은 독자의 몫이라 생각된다. 이 위스키의 도움이 없더라도 무언가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은 이미 내 안에 잠재해 있음을 잊지 말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악마의 계약서는 만기 되지 않는다
리러하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악마의 계약서는 만기 되지 않는다는 제1K-스토리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지옥에 세를 줬다는 참신한 설정과 함께 로맨스도 복합된 이야기라니 호기심을 자극했다. 지옥에 세를 준 거면 집이 지옥이 되는 것인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지옥에 세를 준 것일까? 그 궁금증으로 들어가 보았다.

 

지옥이 원래 그런 건지, 아니면 적절한 크기의 부동산을 얻은 뒤에야 창의력을 발휘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옥의 형태는 정말 다양했다. 할머니가 나를 가르치기 위해 빌려 오면 동서고금의 지옥 이미지는 댈 것도 아니었다. (p.37)

낡은 주택에서 오래도록 하숙집을 하던 할머니는 악마와 계약해 하숙집 빈방을 지옥으로 사용하도록 허용한다. 할머니의 친손주가 아닌 서주는 10년 전 할머니의 도움으로 이곳에 머물며 하숙집 일을 돕는다. 대학교에 입학은 했지만, 등록금을 벌기 위해 현재는 휴학 후 아르바이트 중이다. 가끔 정신을 잃고 섬망을 경험하는 할머니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하기만 한데 할머니에게 쫓겨났던 둘째 아들이 주변을 서성이며 서주의 불안감은 더 커진다. 빈방에는 지옥의 다양한 모습이 펼쳐지고 벌을 받는 자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집안 곳곳에 울린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이 지옥을 상상했던 건, 지옥에 보내고 싶은 인간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주가 나 대신 복수해준다니 좋잖아. 세상 어딘가에는 나를 위한 지옥을 상상하는 사람도 있을까? 어디의 누구일지는 모르겠지만 소용없어요. 내 지옥은 여기 있으니까. (p.44~45)

 

할머니는 나를 이 집에 들여 아낌없이 먹였고, 그런 이유로 나는 '우리' 집을 쓸고 닦는다. 그리고 마침내 이 집을 '우리 집'처럼 여기게 된 악마는, 대체 무엇을 받아먹으며 홀린 것일까. 대추를 받아 먹은 건 아귀였잖아. 질문을 바꿔보자면, 악마는 대체 무엇에 굶주려 있을까. (p.172)

 

그런데 이 지옥의 담당자인 악마는 이상하리만치 친절하다. 악마는 남이 잘못되길 바라는 게 상식인데 이 악마는 먹을 것을 챙겨주고 서주의 심란한 마음을 다독이기까지 한다. 게다가 사랑 고백까지 하는 이 악마의 본심을 믿지 못한 서주는 악마의 마음을 거절한다. 돈 때문에 쫓기던 할머니의 둘째 아들의 사고사를 처리하기 위해 지옥에서 벌을 받는 자들에게 시체 처리 방법에 대해 자문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발생하는데 결국 악마와 서주의 합작으로 이 사건은 잘 해결되지만 할머니의 상태는 악화한다. 서주는 할머니와 혈연관계가 아니었기에 할머니의 부재 이후 그의 처지는 밝아보지 않는데 과연 서주는 이 암담한 미래와 악마와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직접 확인해 보길 바란다.

 

말로만 듣던 끔찍하고 살벌한 지옥을 만났다. 그런데 이 지옥을 담당하는 악마가 순수하고 진솔해 보이니 악마가 맞는지 의심스럽다. 지옥에 있는 이들에게 가혹행위를 가하는 걸 보니 악마가 맞긴 한 데 악마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의지하게 되니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살아서 먹는 거로 나쁜 짓을 했던 이가 하숙집 주방을 왔다 갔다 하며 먹는 정체불명의 복합적 먹거리는 구토 유발을 담당하니 이 하숙집에 있으면 절로 살이 빠질 것 같다. 스릴러, 코미디와 로맨스가 이 오래된 하숙집에서 펼쳐지는데 급기야 사망 사건까지 겹치며 이 하숙집 정말 어마어마하다. 서주는 괴팍스럽고 깐깐한 할머니 덕분에 나쁜 행동 하면 안 된다는 잔소리가 귀에 박히도록 들었지만 죽어서 지옥으로 갈지 안 갈지가 결정되는 나쁜 짓의 기준은 도대체 무엇일지 답을 구하기 어렵다. 지옥문 앞에서 당당하게 난 나쁜 짓 안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얼마나 노력해야 할까? 이 힘든 질문과 함께 악마와의 로맨스는 또한 감당이 안 되니 이 복합적인 요소를 두루 갖춘 스토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