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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링 ㅣ 오에 겐자부로 장편 3부작 1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어느 날 고기토의 처남이자 친구인 고로가 자살을 했다. 고로의 죽음 이후 그간 그가 보내온 녹음테이프들을 들으며 추억을 곱씹고, 다시 듣는 테이프 속에서 그 안에 숨겨진 어떤 메시지들을 깨닫게 되는 고기토. 프롤로그부터 등장하는 고기토와 물장군과의 대화는 매우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고로와의 추억을 얽어가며 풀어내는 고기토의 삶. 과거에 있었던 일들과 대화들을 계속해서 되새김질 하면서,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무게를 다시금 느끼게 되는 고기토. 고로의 죽음이 중심은 잡지만 특별히 하나의 흐름과 맥이 있는 게 아니라, 고기토의 생각은 과거와 현재, 베를린과 일본을 오고간다. 거의 탐구에 가까운 상념들. 그리고 ‘이제 나는 기진맥진해졌다’는 고로의 말과 함께 떠오르는, 50년전 그들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었던 추억.
그들이 열일곱 시절에 겪은 ‘그것’. 고기토는 그것을 쓰기위해 소설가가 되었고, 고로가 영화감독이 된 것은 언젠가 그것을 주제로 길고 긴 영화를 찍기 위해서라고 할 정도로 그들의 그 이후의 삶을 거의 지배하다시피 한 그것.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드디어 끄집어내기로 결심하게 해주었던 다카무라씨의 죽음 이후, 고기토가 그것을 쓰기를 독려하듯이 보내져온 30개의 물장군 테이프. 관련없어 보이던 추억의 조각들도 점차 은근한 연관성을 드러내면서 결국엔 모든 것이 ‘그것’을 향해 집중되는 느낌이다. 그냥 일상적이고 소소한 이야기인듯 하면서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는 미스터리한 분위기는 아주 조금씩 얼굴을 드러내고, 이야기의 중반이 훨씬 지나서야 ‘그것’과도, 고로와도 연관된 비밀이 담겨있는 가죽케이스 가방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었을 ‘그것’의 정체가 생각보다는 덜 충격적으로 느껴지고, 왠지 그들의 절망감이 크게 공감이 되지 않아 아쉬웠다.
묵직하고 무거운 느낌의 작품 분위기는 쉽게 술술 익히는 편도 아니고, 지금껏 읽어온 일본소설과도 또다른 느낌을 갖게 한다. 진중하면서 고민의 깊이와 삶의 울림이 느껴지는, 가볍게 감상을 얘기하기가 주저되는 작품. 작품소개만으로는 독특하고도 환상적인 분위기일 거 같았는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상상에 의해 심화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본인에게 실제로 닥친 비극적인 가족사를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인지라, 판타지적인 요소도 느껴지는 한편 엄청 현실적이면서 리얼리티가 살아있다. 작가의 실제 삶에 너무 밀착된 이야기가 사뭇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등장인물이나 작품 전체에 대해 이 작품만으로는 명쾌하게 해설이 되지 않는 것만 같다. 그 이전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어서 작가가 꾸준히 작품 내에서 보여주는 색깔이나 이야기들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작품들을 읽으면 좀 더 확실히 전체적인 맥락이 잡힐 거 같은 기분. 말이나 표현도 어려워서 착 붙는 느낌이 아닌데, 번역의 문제라기보단 원래 이런 느낌인 게 아닐까 싶고, 그래서인지 고로가 고기토의 작품에 대한 비평을 하는 부분에선 왠지 마음속 힘겨운 구석을 긁어주는 기분이 들 정도다.
요정이 자신의 아이와 인간의 아이를 몰래 뒤바꾸는 것을 가리키는 말 체인지링. 모리스 센닥의 그림책이 담고 있는 체인지링과 관련한 이야기 자체도 흥미롭지만 고기토의 아내 치카시가 그것을 자신의 얘기라 느끼는 부분에서는 더욱 그렇다. 유년기의 아름다운 고로를 다시 낳고 싶었던 치카시. 그림책 이야기와 절묘하게 겹쳐지는 치카시의 삶과 생각, 그리고 체인지링에 대한 도전. 죽은 아이를 위해 한 번 더 아이를 낳아 그 삶을 이어가게 해주겠다는 이야기가 등장하는 고기토의 글과, 초반 고로와 고기토가 죽음에 대해 나눈 '육체는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몸에서 떠난 혼은 나중에 새로운 육체로 태어난다'는 이야기는 마지막 체인지링과 만나면서 생명을 가지고 재생된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끝이라고 받아들여 절망하기 보단 어떻게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려고 애쓰는 남겨진 이들. 그들이 사랑하는 이에 대해 가진 그리움과 애절함이 가득 묻어나는 작품 <체인지링>은, 현실적이고 서글프면서도 환상기담과 같은 묘한 인상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