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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시인의 얼굴 - 윤동주·백석·이상, 시대의 언어를 담은 산문필사집
윤동주.백석.이상 지음 / 지식여행 / 2025년 9월
평점 :
문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해본 사람에게 이 세 이름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윤동주, 백석, 이상. 격랑의 시대를 저마다의 감수성과 언어로 건너온 이들은 삶 자체로 감동을 주었고, 남긴 문장으로 지금도 우리를 흔듭니다. 시집과 평전, 연구서는 많았지만, 정작 이들의 산문을 차분히 만나며 필사까지 해볼 기회는 흔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기획—시인이 남긴 산문을 ‘베껴 쓰며 읽게 하는’ 구성—이 반갑고도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책은 왼쪽 페이지에 세 시인의 산문을, 오른쪽 페이지에 넉넉한 필사 공간을 배치했습니다. 시가 여백과 호흡의 예술이라면, 산문은 생각의 흐름과 논리의 결을 보여줍니다. 완결된 문장들이 가지런히 놓인 왼쪽을 읽고, 오른쪽에서 그 문장을 따라 쓰다 보면, 독서는 머리에서 손으로, 다시 가슴으로 이동합니다. 글을 ‘이해했다’는 느낌이 ‘체화했다’는 감각으로 바뀌는 순간이 있습니다. 필사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바로 그 체화의 시간입니다.
우측 하단에 놓인 ‘필수 추천 문장’은 또 하나의 포인트입니다. 금쪽같은 문장들이 작은 깃발처럼 꽂혀 있어, 오늘의 키워드나 좌우명으로 삼기 좋습니다. 포스트잇에 옮겨 책상 모서리에 붙여두면, 하루의 리듬을 정돈해주는 주문처럼 작동합니다. 문장을 고르고, 베껴 쓰고, 소리 내어 한 번 더 읽으면 그날의 마음가짐이 달라집니다.
세 시인의 산문을 ‘함께’ 읽는 경험도 특별합니다. 윤동주에게서는 맑고 단단한 성찰의 톤이, 백석에게서는 생활의 온기와 말맛이, 이상에게서는 낯익은 세계를 낯설게 보는 시선이 드러납니다. 서로 다른 결의 문장을 연속해서 필사하다 보면, 내 손글씨에도 미묘한 변화가 생깁니다. 문장의 길이와 호흡이 바뀌고, 쉼표와 마침표를 더 신중히 고르게 됩니다. 필사는 문장을 닮아가려는 몸의 배움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이 책이 독자를 서둘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필사는 빠르게 읽는 독서와는 정반대의 기술입니다. 단어 하나, 조사 하나에 머무는 동안 그 시대의 공기와 작가의 숨이 스며듭니다. 그래서 필사는 성찰의 도구이자 마음 돌봄의 루틴이 됩니다. 바쁜 하루 속에서도 10분만 투자해 한 단락을 베껴 쓰면, 내면의 속도가 한 단 내려앉는 것을 체감합니다.
활용법도 간단합니다. (1) 왼쪽 산문을 소리 내어 한 번 읽고, (2) 오른쪽에 같은 속도로 필사한 뒤, (3) 하단의 추천 문장을 오늘의 문장으로 삼아 짧게 메모합니다. 가능하다면 다음 날 첫 줄은 전날의 마지막 문장에서 이어 써 보세요. 문장과 문장이 이어질수록, 나와 텍스트의 거리가 가까워집니다. 학생과 함께라면 받아쓰기처럼 속도를 재기보다, 의미 단위마다 멈추어 질문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진행하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화자는 무엇을 아꼈을까?”, “이 비유는 어떤 장면을 보여주지?” 같은 질문이 필사의 밀도를 높입니다.
이 책의 장점은 ‘구체적인 실천’을 가능하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단순한 명문장 컬렉션이 아니라, 손을 움직여 사유를 깊게 만드는 작법서에 가깝습니다. 읽기를 쓰기로, 감상을 사유로, 인용을 자기 언어로 옮겨가는 징검다리가 됩니다. 그래서 문학을 처음 만나는 독자에게도, 오랫동안 문학 곁에 있었던 독자에게도 모두 유효합니다. 필사의 매력은 수준이나 해석의 정답에 있지 않고, 머무름과 반복 자체에 있으니까요.
결국 이 책은 ‘시대의 언어’를 오늘의 나에게로 데려오는 통로입니다. 윤동주·백석·이상이 지나온 시간을 그대로 모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에 깃든 시선과 윤리를 내 일상으로 번역해보려는 시도입니다. 한 장, 또 한 장 넘길수록 문학은 먼 전시물이 아니라 내 필체로 새겨진 오늘의 기록이 됩니다. 필사를 좋아하는 분들, 글쓰기를 시작하고 싶은 분들, 수업이나 독서모임에서 텍스트를 깊이 다루고 싶은 분들 모두에게 기쁘게 추천합니다. 이 책은 당신에게 문장에 오래 머무를 권리를 선물합니다.
이런 분께 특히 추천
글의 리듬을 몸으로 익히고 싶은 초보·경험자 작가
수업·독서모임에서 ‘느리게 읽기’를 실천하고 싶은 교사·학부모
명문장을 일상 루틴으로 들이고 싶은 바쁜 직장인
활용 팁
하루 10분, 한 단락만이라도 꾸준히: ‘짧고 깊게’가 핵심입니다.
필사 후 한 줄 메모: 오늘의 단어·이미지·감정을 30자 이내로 기록하세요.
주 1회 낭독: 소리로 확인하는 리듬은 글의 결을 또렷하게 합니다.
세 시인의 이름을 한꺼번에 불러보는 일만으로도 마음이 다져집니다. 이 책은 그 이름들 사이를 천천히 걸을 수 있도록, 가장 좋은 방식—필사—으로 길을 내주었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우리의 속도를 낮추고, 한 문장씩 손끝으로 옮겨 적는 일뿐입니다. 문학은 그렇게,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