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나 교육자로서 아이들을 마주하다 보면 안타까운 순간이 있습니다. 아이가 분명 무언가 느끼고 있는데, 그것을 "짜증 나요" 혹은 "몰라요"라는 말 뒤에 숨겨버릴 때입니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면 그 감정에 휩쓸리게 되고, 결국 감정의 주인이 아닌 노예가 되고 맙니다.
김원아 작가는 이 지점을 정확히 파고듭니다. 20가지의 핵심 감정을 선정하여 이를 '도감' 형식으로 풀어낸 것은, 감정을 추상적인 상태가 아닌 '관찰하고 분류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매우 영리한 접근입니다. 우리가 식물 도감을 보며 꽃의 이름을 익히듯, 아이들은 이 책을 통해 내면에서 피어나는 마음의 이름을 하나씩 익히게 됩니다.
이 책이 특히 '학교생활'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은 교육 전문가로서 매우 높게 평가하는 부분입니다. 집은 부모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감정을 대신 해석해주고 다독여주는 공간이지만, 학교는 다릅니다. 아이는 낯선 친구, 선생님, 그리고 예기치 못한 경쟁과 갈등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홀로' 마주해야 합니다.
팀 대항 경기에서 이겼을 때의 뿌듯함
발표를 앞두고 느껴지는 두려움
지각했을 때 밀려오는 부끄러움
단짝 친구가 다른 친구와 놀 때 느끼는 서운함
이 책은 교실 안에서 벌어지는 20가지 상황을 통해, 감정이란 특정 개인의 유별난 상태가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보편적인 신호임을 알려줍니다. 학교라는 사회적 공간에서 아이가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낯선 감정들을 '미리 학습하고 연습해보는 경험'입니다.
저자는 감정을 단순히 "느껴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각 감정이 가진 장단점을 명확히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화'는 나를 보호하는 에너지가 되기도 하지만(장점), 관계를 망칠 수도 있음(단점)을 가르칩니다. 감정에 선악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특성을 이해하게 만드는 이 방식은 아이들이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더욱 의미 있는 부분은 "이럴 땐 이렇게!"라는 구체적인 조절 매뉴얼입니다.
알아차리기: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이 '불안'임을 인지하기
이해하기: 왜 이런 마음이 생겼는지 원인 살펴보기
조절하기: 상황에 맞는 건강한 반응 선택하기
이 단계별 노하우는 감정을 통제의 대상이 아닌 '관리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합니다. 이는 제가 늘 강조하는 '자기주도성'의 가장 깊은 뿌리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아이만이 학습과 삶의 태도 또한 스스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글을 읽는 것이 서툰 아이들에게 그림은 가장 강력한 언어입니다. 일러스트레이터 주쓰는 '다운타운믹스주쓰' 특유의 명랑하고 귀여운 화풍으로 감정의 미묘한 결을 살려냈습니다. 화려하면서도 따뜻한 색채는 자칫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 내면의 이야기를 아이들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놀이'처럼 느끼게 합니다. 아이가 글자를 다 읽지 못하더라도 그림 속 주인공의 표정과 상황을 보며 "나도 이런 적이 있어!"라고 말을 건넬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입니다.
리뷰를 작성하며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책 속에 마련된 '체크 란'입니다.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직접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고 기록하게 만드는 이 장치는 책을 하나의 '워크북'으로 기능하게 합니다. 독서가 지적 활동을 넘어 정서적 실천으로 이어지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흔히 인성 교육이 거창한 도덕적 훈화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인성 교육은 "내가 지금 서운하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친구에게 "나 조금 서운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에서 시작됩니다. 이 책은 그 용기의 씨앗을 심어주는 가장 친절한 농부와 같습니다.
AI 시대가 깊어질수록 인간 고유의 영역인 '공감'과 '자기 조절'은 대체 불가능한 핵심 역량이 될 것입니다. 《내 감정 도감》은 우리 아이들이 단순히 공부를 잘하는 아이를 넘어, 자신의 마음을 건강하게 돌보고 타인의 아픔에 기꺼이 손을 내밀 줄 아는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게 돕는 든든한 밑거름입니다.
부모님과 선생님들께 권합니다. 오늘 하루 아이와 함께 이 책장을 넘기며 물어봐 주세요. "아라의 하루 중에서 너의 마음과 닮은 페이지는 어디니?" 그 질문 하나가 아이의 닫힌 마음을 여는 마법의 열쇠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