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한국인 선을 긋는 일본인 - 심리학의 눈으로 보는 두 나라 이야기
한민 지음 / 부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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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한국인 선을 긋는 일본인>은 문화심리학자 한민씨의 신간이다. 2년 전 <우리가 지금 휘게를 몰라서 불행한가>를 인상 깊게 읽어서 이번 신간 서평단에 신청하게 되었다.<선을 넘는 한국인 선을 긋는 일본인>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일본과 우리나라를 비교하는 책이다. 문화심리학자이므로 두 나라의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사람들의 심리와 행동을 다루고 있다.


이번 책 역시 흥미롭게 읽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고 문화를 위시한 여러 분야에서 한마디로 잘나가고 있는데 비해 일본은 점점 쭈그리가 되어가는 것 같다. 우리나라는 2019년 일본의 무역제재를 가뿐히 넘겼다. 2020년 이후 코로나를 대처하는 일본정부의 무능함을 보니 좀 이상했고, 일본인들은 아베나 정부를 비판하지 않는지 궁금했다. 일어가 안 되니 일일이 일본 정보를 확인할 길이 없었는데 나의 이런 궁금증을 저자가 해결해주었다.


이 책은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한국 문화와 일본 문화의 차이를 비교하고, 2부는 민족의 특징적인 면을 비교한다. 3부는 양국 문화에 숨어있는 특이점을, 4부에서는 심층적인 심리를 비교한다. 저자는 일본을 전공하거나 일본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심리학에 기반하여 문화적 차이를 설명하고 다양한 일본 저자들의 책을 인용했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다.


1부 첫 챕터의 제목부터 시선을 끈다.

먹방의 나라 한국 VS 야동의 나라 일본

성생활 만족도가 낮다는 일본에서 성산업이 아직 활발한 이유가 뭘까? 저자는 일본인의 욕구를 이렇게 설명한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하고 싶은 욕구가 성으로 표현되는데 일본인에게 가장 문화적으로 보편화된 방식인 엿보기로 나타난다 는 것이다. 일본인은 자신과 타인, 내부와 외부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타인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싶다는 욕구를 가진다. 일본에 몰래카메라 형식의 예능이 많고 카메라 기술이 발달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현상이라고. 즉 야동은 교류와 엿보기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다.


반면 한국인에게는 밥이 중요하다. 누군가가 고마울 때 밥 한 번 살게.”라고 하고, 이성에게 작업을 걸 때도 저랑 밥 한 번 드실래요?”, 친구가 아프면 밥 꼭 챙겨 먹어.”라고 할 정도다. 밥을 함께 먹는 행위는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고 용서하는 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아무리 혼밥, 혼술의 시대이고 1인 가구가 늘어나도 함께 밥을 먹으며 충족해왔던 욕구가 사라진 건 아니다. 저자는 먹방이 관계에 대한 욕구가 가장 한국적으로 드러난 문화현상으로 본다. 즉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피드백하며 함께 뭔가를 만들어 가는 것이 한국인이 좋아하는 사회적 교류의 방법이다.


제목과 같은 챕터는 2부에 나온다. 한국인의 선 넘기는 오지라퍼들에게서 볼 수 있다. 저자는 오지랖의 긍정적 사례로 2001년 도쿄에서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고 목숨을 잃은 이수현씨를 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의 일에 참견하는 이유는 남이 남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가 원치 않는 참견은 사생활 침해나 갑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인의 삶을 지지해 줄 버팀목이 될 수도 있고, 공통의 문제에 대처하는 사회적 연대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예컨대 IMF 금모으기나 태안 유조선 사고, 코로나 사태 등 우리에게는 국난극복의 유전자가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일본인들은 참견을 극도로 꺼리는데 그 이유는 민폐를 저지르지 않으려는 동기에서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을 다하지 못한 데 대해서도 민폐라고 인식하는 것은 물론, 국가나 사회가 국민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해서도 자신이 민폐를 끼쳤다고 생각한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한 할머니는 자신을 구조해준 구조대원에게 민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또한 일본인들은 입은 은혜를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데, 이것을 온가에시라고 한다. (:태어나면서 주군, 천황, 국가, 일반적인 사회와 타인들의 존재로부터 받게 되는 사회적 의무를 뜻함) 따라서 일본인은 애초에 남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일 자체를 피하는 쪽으로 행동한다.


일본인은 수동적이고 변화를 회피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3부에서 찾았다

아버지면 죽이고 보는 한국 VS 아버지를 죽이지 못한 일본이다. 정신역동이론에서 부친살해는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근대는 아버지를 죽인 자식들이 새롭게 연 시대를 의미하는데 일본은 한 번도 기존의 권위를 타파하고 새 질서를 구축한 적이 없다


메이지유신으로 근대일본을 연 것은 기존 지배계급이었고 그들은 과거의 권위 위에서 새 시대를 원했다. 그 후손들은 아버지들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다. 2차 대전 패망 후 미군정에 의해 사회 개혁이 이루어질 때도 천황을 비롯한 기존의 권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결국 아버지를 죽이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의 주체로 서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안부, 강제 징용 등 과거의 역사를 부정하고 오히려 피해자로서 자신들의 모습만을 부각시키려는 행태는 일본이 주체로서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객체로서 자신들이 당한 일에만 민감한 경험 방식 때문인 것이다.


p. 271


아버지를 죽이지 못한 자식들은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강하고 잘난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편안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위에 의존해 버릇한 자식은 자신의 앞날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의지를 갖기 힘든 법이지요.

 

이에 비해 한국현대사는 계속해서 새로운 아버지가 나타나고 자식들은 그 아버지를 죽이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일제 강점기동안 독립 투쟁, 전쟁 분단이후 사상투쟁, 독재와 싸웠던 4.19, 5.18, 6월 항쟁, 2016년 촛불까지 우리의 역사는 부당하게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한 자들을 물리치고 주체로 서기 위한 자식들의 투쟁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워낙 빠른 시간 내에 많은 변화가 이루어지다보니 그만큼 해결해야할 문제도 많은 것이 한국인들에게 주어진 숙제이긴 하다.


이 책에서 짚어주는 비교는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에 딴죽을 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린 너무 정이 많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도 많아서 자꾸 참견을 한다지만 실제 내 주위에서 그런 사람은 많지 않다. 나 역시 남 참견하는 거 싫어한다. 일본사람들이 저자가 말하는 대로 다 저럴까 의심할 수도 있겠다. 이에 저자는 이렇게 이해하고 읽어주면 좋겠다고 했다.

 

인간의 종적 보편성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문화적 상대성을 만들어 내고 문화적 상대성은 개개인의 성향 및 생물학적 보편성과 만나 무수한 개별성을 만들어 냅니다. 개별성 차원에서 보자면 인간 개개인을 모두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모두 똑같다사람은 모두 다르다는 사람을 이해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닙니다. 그런 전제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죠. 우리가 진정 가져야할 의문은 보편성을 가지고 잇는 사람들에게서 왜 차이가 나타나는가’ ‘개개인의 행동들에서 왜 특정한 행동의 패턴이 관찰되는가같은 것들입니다.


문화는 사람들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그 환경에서 계속해서 잘 살아가려면 이러한 것들을 후속 세대에게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겠지요. 교육을 통해 후속 세대는 해당 문화에서의 요구에 부응하는 공통적인 삶의 방식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문화의 유형입니다. 저는 바로 이 관점, 상대성의 차원에서 문화의 유형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한국과 일본의 문화를 비교해 보고자 합니다. 인간의 행동은 보편성의 틀 안에서 규정되지만 문화에 따른 상대성으로 구분되고 개개인은 개별적 존재지만 문화는 사람들의 행동을 패턴화시키니까요.



일본 여행을 언제 갈지도 모르겠고, 일본인을 만날 일도 없는데 이 책은 일본인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리의 문화적 특징과 심리를 비교하며 설명해주어 더 재미있게 읽었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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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자꾸 책방
안미란 외 지음, 국민지 그림 / 사계절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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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자꾸 책방>은 부산에 있는 어린이청소년책 전문서점 책과 아이들을 모델로 한 작품집이다. 10편의 짧은 동화 속 배경인 자꾸자꾸 책방의 모델이 바로 책과 아이들이고등장인물인 잠잠이 선생님과 구름아저씨는 책과 아이들의 공동대표 둘의 별명이다. 2019년 이곳에서 열렸던 동화 창작 공부모임이 독립출판으로까지 이어져 동화로 완성된 것이다.


10편의 동화 속 배경은 가상의 공간이 아니라 책과 아이들의 실제 장소와 같고 이야기들은 실제 있었던 일에 기반한 것과 지어낸 이야기가 섞여있다책방에서 책을 매개로 한 다양한 사람들과 동물들의 이야기가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평범하기 그지 없는 내 이야기 같은어릴 때 상상해본 적 있는 그런 이야기 속에전래동화 속 인물 우렁각시와 실제 인물 소파 방정환 선생이 등장하기도 한다.


당연하다책방에는 책과 사람이 있고 어떤 꿈도 꿀 수 있는 장소이니 말이다자꾸자꾸 책방에 자꾸 가고 싶고자꾸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10편의 동화들은 어린이나 동화작가를 꿈꾸는 어른들 모두가 재미있게 읽을 것이다자녀와 같이 읽을 부모라면 아이의 취향에 맞춰 독후활동을 해보면 되겠다저학년이라면 이 책의 삽화를 참고삼아 책방을 그려보면 좋겠다그대로 따라 그려도 좋고 자신이 원하는 책방의 모습을 그려도 좋다가까이 산다면 책과 아이들을 직접 방문해도 된다.


중학년 이상은 마음에 들었던 동화의 뒷이야기를 이어 써보기를 추천한다자신이 원하는대로 이야기를 바꾸어보는 것도 재미있는 방법이다두 활동 모두 글 짓는 활동의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학년 구분 없이 부모가 읽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귀로 들으며 머릿 속에서 장면을 상상해 보게 하는 거다들은 이야기 중에 기억에 남는 문장이나 단어를 말하게 하면 집중해서 듣게 된다단 이 활동을 할 때 들려주는 분량은 한 장면이나 하나의 사건이 들어간 짧은 부분을 사용해야 한다.


이 책에는 동물들이 자주 등장한다책을 읽고 싶어하는 강아지와 몸이 바뀌는 이야기책방과 책 속에서 나온 먼지를 모아 책을 쓰는 쥐동화마다 배경처럼 자리를 차지하는 고양이까지 어린이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다마지막 동화 동백나무 책방은 마당에 있는 동백나무가 주인에게 말을 걸고 씨앗을 주는데 실제 책과 아이들 책방 마당에 있는 나무라고 한다서점 운영이 어려워 지친 주인에게 동백나무는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 알게 된 게 있어책방에 찾아온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따는 것그 이야기 속에는 책방도 있고 나도 있었어이야기에 나오는 기분나쁘지 않았어아니참 좋았어나만 그런 게 아니라 마당 식구들도 다 그랬나봐이제 이곳은 두 사람만의 책방이 아니야여기 오는 사람들처럼 우리도 이곳을 지키는 데 힘을 보태기로 했어.”


그리고 다음날 힘센 지킴이들이 책방으로 우르르 들어온다. 1학년 꼬맹이들이책방을 지켜줄 어린이가 있고 동화를 만드는 어른들이 있는 한 자꾸자꾸 책방에 오고 싶어질 것이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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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인연 - 외로움이 깊어 인연이 되었던 어느 젊은 날
이은주 지음 / 헤르츠나인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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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작가의 신간 <동경인연>의 출간소식을 보고 서평단 이벤트에 신청했다. 내게 작가는 대단한 사람, 본받고 싶은 사람이다. 작년에 친정엄마를 간호하며 끙끙댈 때 나를 위로해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도 모르고 만난 적도 없다. 하지만 <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로 만난 그는 천사였다


작년 엄마의 병실에서 나는 이은주 천사를 떠올렸었다. 설사가 넘쳐버린 기저귀를 갈고 뒤처리를 다한 후 땀범벅이 된 채 나는 보조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문득 <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가 생각났다. 휴대폰을 열어 내가 썼던 그 책의 리뷰를 읽어보았다. 화와 억울함, 연민으로 뒤범벅이 된 감정이 바닥으로 차분히 가라앉았다. 친정엄마 간호도 이렇게 힘든데 아무리 직업이라도 노인들을 어쩜 그리 살뜰하게 돌볼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감히 따라하기 어렵다.


처음 작가의 이력을 보면서 참 여러 가지 일을 하며 힘들게 살아왔겠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작가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직업으로 만나는 사람부터 가족과 조카들까지 진심으로 돌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책 <동경인연>은 일본 유학시절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했다. 작가의 20대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살짝 들뜬 마음으로 책을 열었다.

 

"쉰의 바다를 건넌 내가 <동경인연>을 끝으로 이은주 에세이 3부작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오래 울었으니까 힘들거야>, 그리고 <동경인연>은 돌봄과 인연의 변주곡이었다. 자신을 돌보고, 가족을 돌보고, 나아가서는 타인을 돌보는 과정에서 문학과의 인연이 힘이 되었다."

 

이은주 에세이 3부작의 마지막을 청춘의 이야기로 마무리하겠다고 했다. 이후의 행보 계획은 쓰지 않았으나 나는 바랐다. 예전에 했던 번역을 계속 하기를. 생활고와 현실 등 여러 문제로 현재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번역가로 다시 돌아가길...


사설이 너무 길었다. <동경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차례다. 이 책은 옥죄어오는 현실에 인공호흡기가 되어준 인연에 대한 이야기다. 그 사이에는 문학이, 작가의 문학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이었지만 일본대학 예술학부 문예학과에 입학했다. 문학가에 대한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꿈을 버리지 않게 해준 동경에서의 인연을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당시 작가의 모습을 시미즈 선생님은 황야의 이리라고 표현했다. 생활고에 찌든 거친 눈빛 안에 문학에 대한 애정만은 반짝이고 있었다.


p.25


문학을 공부하고자 하는데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싫었다. 책을 읽을 시간도 없고 비평수업에 제출할 레포트를 쓸 체력이 안 되니 나는 자꾸 병들어갔다. 무기력해지고 부정적이 되었다. 다 그만두고 싶었다. 지긋지긋한 아르바이트도, 학교도, 다 손을 놓으면 편해질 것 같았다. 그렇게 몸살을 앓으며 3학년을 보냈고 마침내 4학년이 되자 나는 학교가 가기 싫어졌다. 밤샘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처지가, 아니 말이 10시간이지 깨어있는 시간은 뇌가 긴장해서 아침까지 잠 못 이루다가 간신히 잠이 드는데 시간표를 아무리 오후수업으로 짜두어도 수업시간에 맞춰서 나간다는 건 불가능했다. 삶은 쓸데없는 농담 같았다.


이렇게 지쳐 있는 그를 깨워 수업에 나오게 하고 시작 시간도 배려해준 분이 시미즈 선생님이었다. 작가는 선생님을 주변 사람들 재능을 일깨우고 주목하여 하나의 완성으로 나아가게 해준다, 닮고 싶어 했다. 선생님이 별이라고 해준 단 한명의 작가가 제자였고, 귀국 후에도 시미즈 선생님과의 인연은 이어졌다.


시미즈 선생님의 관심과 격려와 배려 덕분에 작가는 유학생활을 벼텨냈다. 작가가 선생님에게 소개했다는 김영동의 멀리 있는 빛을 틀어놓고 작가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다. 작가가 한여름 밤, 오이차이 다다미 방에 누워 흘렸던 외로움이 한국의 겨울 밤에도 몸서리치게 휘감겨왔다.


일본여행에 대한 열망은 없지만 진보쵸는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일본 소설에서, 출판 관련 서적에서 늘 서점거리의 대명사처럼 등장하는 그 곳을 가보지는 못한 채 동경만 키우다보니 아스라이 멀리 있는 별이 되어 버렸다. 우리나라에서 헌책방 거리나 헌책방을 가보아도 책에서 읽은 진보쵸 거리와는 사뭇 다른 것만 같다. 직접 가보지 못한 폐해다. 작가도 진보쵸 에피소드가 있지 않을까 예상했다. 도쿄니까, 문학을 사랑하는 가난한 유학생이니까.


작가가 만난 헌책방 시바타 아저씨와는 도스토옙스키 전집으로 친구 사이가 되었다. 시바타 아저씨는 작가를 헌책 도매상에 데려갔고 그곳에서 도스토예스키 전집 18권을 발견한다. 두어 달이 걸려 전집이 도착했을 때 가격은 도매상에서 본 2천엔 그대로였다. 가난한 유학생에게 수수료 같은 이문은 붙이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좁은 다다미방에 아저씨를 초대한 후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고 했다. 시골에서 중학교만 졸업하고 진보초의 헌책방에 취직했다는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자기가 집을 떠나 동생들이 밥 한 공기를 더 먹을 수 있었다는 내용이 작가의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아저씨는 작가에게 한국어를 가르쳐달라고 했고 그 값으로 점심을 사주었다. 부담을 주는 것 같아 괜찮다고 해도, 진보쵸 헌책방 단골손님들이 찾는 고서적을 구해주면 돈이 꽤 된다고 걱정마라고 했다. 시바타 아저씨는 한국에서 온 가난한 유학생에게 책도 주고 밥도 주었다. 몸과 마음의 허기를 채워준 은인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친구에게서 아저씨의 소식을 듣게 되는데 헌책방 앞에 꽃이 놓여있더라며, 너처럼 아저씨를 생각하는 사람이 또 있더라고 전해주었다.


p.68


나는 늘 나이 차이가 나는 우정을 동경해왔다. 장 그르니에와 까뮈의 우정을. 헤어져 있어도 서로의 가슴에 별로 빛나는 만남을. 어떤 관계는 대부분 유효기간이라는 것이 있어서 영원하지 않았다.


작가의 말에 나도 공감한다. 나도 그런 우정어린 인연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만들지 못했다. 만남이 있어야 인연이 될 것인데 요 몇 년 사이 그나마 있던 만남도 속속 끊어지는 형국이다. 혈연으로 연결된 가족이 아니고서야 영원한 인간관계란 있을 수 없는 게 맞는 가보다. 평생 갈 거라고 장담했던 관계가 있었는데 코로나가 정리해주었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또또 코로나 타령이다.


작가의 동경인연 중에서 가장 마음 찡했던 이는 우체국의 마리 아줌마다. 마리 퀴리부인을 존경해서 닉네임을 마리라고 지었다는 그이와의 인연을 아직도 이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지속되는 인연도 있다. 20대 초반 여성의 눈에 비친 마리 아줌마는 독립적이고 멋진 여성이었다. 엄마로 아내로 주부로 직장인으로 진지하게 정성을 다해 삶을 대하는 태도에 반한 것이다. 또한 아줌마의 딸 안과 나나 덕분에 타국에서 가족의 사랑 안에 있는 것 같은 안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줌마의 라보모임에 초대를 받아서 겪은 일은 작가에게 일본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고민할 길을 열어주었다. 사진작가라고 한 남성이 작가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한 일이 있었다. 그 후 학교에서 배운 역사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후지타니 선생의 단편 <을지로 입구의 푸시킨>을 접하면서 향후 한일관계에 대한 고민을 했고, 이어 한국판 <을지로 입구의 푸시킨>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동경인연> 구상의 토대가 되었다고 밝혔다.


이상은 안과 나나의 언니, 이상은 나의 딸입니다.’


는 마리 아줌마가 쓴 편지 속 문구이며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유학을 가서도 한국에 돌아와서도 가족이나 지인은 작가에게 상처를 주었고, 어깨를 한없이 무겁게 했다. 그러나 가족을 버릴 수 없었고 한국에서 살아야만 했던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그들을 내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껏 고단한 삶을 살았다. 물론 때때로 행복한 나날들도 있었을 것이다. 허나 작가가 힘들고 외로울 때 옛 일기를 들춰보며 미소 지었을 것 같다. 사납게 번뜩이던 이리의 눈빛 속 별을 알아봐주고, 들썩거리던 어깨를 다독여준 인연들을 일기장 속에 가두어두는 것보다 한 권의 책에 갈무리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책은 그 동경인연들에게 소중한 선물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이제부터는 쓰기 싫은 부분을 기록하는 일이 남았다고 했다. 무엇을 쓰고 싶은지, 쓰고 싶지 않은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나는 작가에게 바란다. 오욕의 역사도 쓰라고! 지나온 시간을 정리하며 간간이 번역도 하라고! 꼬옥 문학가의 꿈을 이루시라!


물론 독자 입장에선 이미 문학가입니다! 작가님 책 두 권밖에 안 읽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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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수의 호르몬과 맛있는 것들의 비밀 - 면역력을 키우려면 가공식품을 버려라
안병수 지음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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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을 읽고 고민에 빠졌던 적이 있다. 당시에 집안 불화가 일어날 정도였다. 우리 가족은 1년 365일 간식으로 과자를 먹는 사람들이었는데 그 책을 읽고 과자를 끊자고 했더니 반란 아닌 반란이 일어났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단짠단짠 과자, 다디단 캐러멜을 갑자기 끊는 일은 정말이지 어려웠다. 서서히 줄여나가자고 합의를 봤다. 나아가 탄산음료와 라면도 줄이기로 했는데 쉽지 않았다. 그래도 저자의 책을 읽었기에 아이들에게 과자의 나쁜 점을 말할 수 있었다.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을 읽은 지 시간이 오래 된 것 같아 찾아봤더니 2005년에 출간된 책이다.

그 후로 나는 음식이나 건강 관련 책을 찾아 읽었다. 최근에도 비건, 자연식물식 관련 책들을 읽었는데 안병수 저자가 새 책을 냈다기에 관심이 생겼다. 신간 <안병수의 호르몬과 맛있는 것들의 비밀>의 서평이벤트에 신청해서 운좋게 당첨되어 읽었다. 이 책은 가전체로 쓰여졌다. 가전체란 사물을 의인화한 것인데, 이 책에선 인슐린이 1인칭 형식으로 말을 한다. 자신이 인간의 몸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려준다.

앞부분에서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을 인슐린이 직접 나서서 설명을 해주니 이해가 쉬웠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부터 충분히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학생들이 즐겨먹는 패스트푸드와 가공식품이 왜 몸에 안 좋은지, 몸 안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하나하나 일러주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중반부에는 나처럼 주부들에게 꼭 필요한 내용이었다. 책을 읽다말고 당장 집에 있는 양념부터 냉장고와 싱크대에 쌓여있는 음식들의 원재료를 확인하면 경악할 수도 있다. 이 책은 가족이 함께 읽으면서 맛있는 것들에 어떤 비밀이 숨어있는지, 자신들의 식생활 태도와 방식을 돌아보면 좋을 것이다.

1장에서는 인슐린이 인체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각종 성인병에 얼마나 관여되어 있는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2장은 우리 입에 맛있다고 길들여진, 한마디로 중독된 것들에 대해 하나씩 그 비밀을 밝힌다. 3장에서는 페이크 푸드, 즉 속는 줄도 모르고 속고 있는 음식들의 종류에 대해 알려주고, 4장은 앞에서도 지속적으로 나왔지만 알고 먹기 위해 필요한 정보와 음식 외에 생활습관에 대해 정리한다. 마지막 40여 페이지는 저자가 책에서 인용한 각종 논문과 책의 출처를 실었다. 저자가 주장한 내용에 대해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싶은 독자들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주장은 크게 세 가지다.

1. 페이크 푸드에 속지 마라!

2. 다시 보자! 식품 첨가물!

3. 저당지수 식품을 먹자!

이것은 결국 인슐린저항을 막는 방법인 셈이다.

책의 앞부분은 대부분 나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다시 확인하거나, 까먹고 있던 것을 상기시켜주었다. 예컨대 흑설탕은 페이크푸드라는 것이다. 정제당인 백설탕이 몸에 안 좋으니 흑설탕은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흑설탕은 비정제당이 아니다. 백설탕에 캐러멜 색소를 입힌 것이므로 백설탕보다 더 나쁘다. 각종 식품 첨가물에 대한 내용에선 이 책을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부이면서 너무 무관심했던 게 아닌가 싶어 부끄러웠다. 간장이나 식초를 고르면서 그저 메이커와 가격만 봤지 주재료나 첨가물에 대해선 아예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마트에서 흔히 사는 간장이 가짜 간장이었다니 놀랄 노자가 아닌가. 마트에 진열된 대표적인 두가지 간장은 산분해간장과 양조간장이다.



위 성분표처럼 탈지대두에 합성보존료(방부제)가 들어 있다. 산분해간장은 탈지대두에 염산을 부어 단백질을 강제로 분해한 것이고, 양조간장에 들어있는 종국은 정체가 불분명한 발효균이다. 결정적으로 두 간장에는 메주가 들어있지 않고 탈지대두가 주원료인데 이 탈지대두는 식용유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로 식품원료로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기름 추출할 때 쓰는 유기용매, 헥산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 헥산이 발암성이 있는 신경독성물질이다.



식초도 마찬가지다. 둘 다 천연 발효식초라고 적혀있지만 양조식초에는 주정이 들어있다. 주정은 소주의 원료로 고농도 에틸알코올이다. 주정에 초산균을 접종해 속성으로 발효한 것이 양조식초이다.

이 부분을 읽다말고 싱크대로 달려갔다. 우리 집에 있는 간장과 식초의 원료명을 봤더니 모두 산분해간장과 양조식초였다. 오 마이 갓! 내가 이런 걸로 가족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먹였다니!! 난 무슨 짓을 한 거지? 모르고, 확인도 안 하고 먹었던 게 너무 많다. 그동안 건강을 위해 음식을 가린다고 생각했는데 몹시 기초적인데서 구멍이 뻥뻥 뚫려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니... 이제 알았으니 하나하나 확인해야겠다. 그리고 페이크에 속지 않도록 해야겠다.

그나마 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 자연식물식과 이 책에서 주장하는 저당지수 식생활과 겹쳐서 다행이다. 저당지수 식품은 채소, 과일, 통곡류, 콩류, 견과류, 해산물, 유제품이다. 자연식물식에는 해산물과 유제품이 빠진다. 아직 자연식물식을 100프로 실천하고 있진 못하다. 멸치다시를 포기하기 어렵고, 냉장고에 들어있는 유제품도 먹어서 처리해야 한다. 금연도 단번에 해야지 서서히 끊기가 더 어렵듯이 식습관도 그러해야 한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나는 쉽지가 않다. 과자나 라면 역시 조금씩 줄이고 있는 중이다. 이런 책들을 계속 읽으면서 알람처럼 사용해야겠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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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 - 시베리아 숲의 호랑이, 꼬리와 나눈 생명과 우정의 이야기
박수용 지음 / 김영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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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0

어두운 숲속이라 얼굴이 자세히 보이진 않았다하지만 미약한 초승달 빛에 반사되어 눈동자가 은은한 인광을 뿜어내고 있다그런데 인광의 눈빛이 소의 주검이 아니라 헛간을 뚫어지게 노려본다나의 존재를 눈치챈 것 같다은은한 빛을 발하며 헛간을 노려보던 인광이 천천히 돌아가 소의 주검을 바라본다그리고 다시 헛간을 바라본다소의 주검과 헛간을 번갈아 보며 망설이고 있다그럴 만도 한 게 헛간 속의 내가 만약 포수였다면 저 호랑이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는 저 삭아빠진 나무 울타리 하나뿐이다.

 

위 서술을 읽어보라. 자연 다큐멘터리 영상의 한 장면 속에 있는 것 같지 않은가한밤중호랑이와 인간이 대치중이다헛간 속에 숨어 카메라를 켠 채 호랑이를 찍고 있는 인간그리고 낮에 인가 목장의 소를 습격했다가 다시 그 소를 먹으러 온 호랑이다호랑이는 울타리 안에서 나는 인간과 금속성 냄새에 신경이 몹시 쓰여 조심스럽다인간도 숨을 죽인채 뷰파인더를 통해 호랑이를 응시하고 있다.

 

p.51

두근거리는 심장박동과 등줄기를 예리하고 타고 오르다 정수리로 빠져나가는 서늘한 기운으로 서로의 존재를 느꼈다그것은 육체의 긴장만이 아니라 영혼의 교류 같았다렌즈를 사이에 두고 서로 응시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지만 그 정체를 알 수 없고정체는 알 수 없지만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게 어렴풋이 서로를 느꼈다그 느낌을 통해 위험한 기운이 전해졌는지 몸을 고정한 채 헛간을 바라보던 호랑이가 천천히 머리를 돌렸다은은하게 발산되던 인광이 꺼지고 구불거리는 어둠 덩어리가 멀어지더니 숲속으로 사라졌다.

 

이 호랑이의 이름은 책 제목의 그 <꼬리>인간과 호랑이 사이는 얼마나 멀까저 장면에서 지극히 가까운 물리적 거리에 비해 두 종간에 지켜야할 심리적 거리는 멀다그 거리를 유지하길 바라는 둘은 서로를 바라보지만 아는 체하지 않는다그러나 저자는 호랑이에게 꼬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이름 짓는다는 것은 이미 의미 부여가 된 것인데 그가 몰랐을 리 없다그에게글을 읽는 이에게 얼마나 큰 의미로 다가올 것인지를...

 

시베리아호랑이를 너무도 사랑한 박수용씨는 1997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처음으로 시베리아호랑이를 관찰한 후 아예 시베리아호랑이보호협회(STPS)’를 설립했다그가 만든 다큐멘터리는 세계 유수의 상을 받았고 그 후 수많은 작품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2011년에 NGO 단체를 설립해 시베리아호랑이를 보호연구하는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EBS 다큐멘터리 <시베리아 호랑이-3의 죽음>을 2011년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이라는 책으로 출간한 이후 이번 <꼬리>는 그의 두 번째 책이다작가의 말에서 연해주 원시림 속에서 일어나는 야생호랑이들의 애환과 인간과의 갈등그 현실들을 다큐로 보다는 글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그는 자신의 글을 논픽션 자연문학이라고 불렀다이 이름이 생소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다큐가 논픽션인데 논픽션과 문학이 어떻게 하나의 묶음이 되는지 의아할만 하다.

 

그러나 리뷰 앞부분에 인용한 두 문단을 읽으면 한 장면이 눈앞에 고스란히 떠오를 것이다글자로도 패닝(수평이동), 틸업과 틸다운(상하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책을 읽어본다면 글자에서 오감을 감각하게 될 것이다물론 저자가 다큐멘터리 PD라는 장점을 십분 활용했기 때문이겠지만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흡인력은 그 어떤 소설(문학)보다 강렬하다아무리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것을 글로 쓴다 해도 누구나 저자처럼 쓰지는 못한다읽는 내내 우리나라에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감격스러웠다.

 

p.65

 

수곰이 지나간 다음 날 꼬리가 왔다밝은 곳에선 처음 보는 꼬리의 모습이었다첫인상이 멀리서 보기에도 중장비 덩어리처럼 장대했고숲이 자신의 것인 양 편안해 보였다늙은 호박만 한 머리를 성성한 갈기가 둘러쌌고 우람한 어깨뼈는 불쑥 솟아올라 바위처럼 널찍한 등판으로 흘러내렸다그 뒤로 길게 내려뜨린 꼬리는 끝만 살짝 치켜세운 채 터벅터벅 걸어왔다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발걸음은 크고 묵직했으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좌우로 슬쩍슬쩍 흔들리는 얼굴과 그 속의 커다란 눈동자는 무심한 듯 깊었다꼬리의 풍모에는 깊이가 있었고 걸음에는 무게가 있었다.


 

이 책은 시베리아호랑이 '꼬리'의 일생과 연해주 '라조자연보호구'의 사계를 숨막히도록 아름답게 그려냈다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글로 표현한 것이 이토록 생생하고 경이로울 수 있다니 놀라웠고대자연 속에 살아도 돈에 찌든 인간의 모습을 확인하는 건 부끄러웠다이 모든 것을 관찰자적 입장에서 서술하는 저자의 눈길은 왕대호랑이 꼬리에게만큼은 깊이 감정이입한다.

 

살아 있는 생명은 누구나 불완전합니다사람도 호랑이도그래서 연민을 느낍니다연민은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까닭 없는 아픔이며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한 번 나면 죽어야 하는 불완전한 것들에 대한 막막한 슬픔입니다태어나 먹고살다 사라지는 것들이기만 하면아득히 다가오는 사랑입니다.”

 

그렇다그의 행동은 감정이입을 너머 사랑이었다영하 30도의 추위에도 비트 속에서 잠복하고눈밭에 찍힌 꼬리의 발자국을 뒤따르고그의 변을 뒤적여 무엇을 먹었는지 확인한다그리고 인간들 손에 죽게 된 꼬리를 살리려고 발을 동동 굴렸다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모든 걸 꽁꽁 얼리는 시베리아의 추위 속에서 호랑이의 사냥거리는 없다인가와의 거리를 유지하다가도 지독한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마을로 내려와 개나 소를 잡아먹는다호랑이가 인간을 먼저 공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하지만 인간의 섣부른 총질로 호랑이를 단번에 쓰러뜨리지 못하면 도리어 공격당하게 되고 인육을 맛본 호랑이는 재차 인간을 공격하게 된다그런 무참한 상황이 어떤 마을 양봉장에서 벌어졌고 그 호랑이는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꼬리가 다른 마을에서 건초창고에 갇히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마을 주민들은 인가에 들어온 호랑이를 사살하려 했고 저자는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설득을 했으나 통하지 않았다그러다가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양봉장 습격한 호랑이가 꼬리가 아니냐며 당장 죽이겠다고 난리를 쳤다잘 안 되는 러시아어로 계속 설득하던 저자는 번뜩하고 시간을 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꼬리가 양봉장을 습격한 그 호랑이라면 분명 총상이 있을 것이다그래서 마취를 시킨 후 확인하기로 했다이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과 의사, 전문가, 사냥꾼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저자에게 돈을 요구했다그가 꼬리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어떻게든 살리려고 한다는 것을 약점으로 잡은 것이다.

 

나는 그들의 뻔뻔함을 예상했다그들의 입장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최대한 많이 보상받고 싶었을 것이다이 내용이 나오는 책의 후반부에 이르자 난 이미 저자의 마음과 거의 같은 상태가 되어 있었다. 나도 어떻게든 꼬리를 살리고 싶었다저자는 꼬리가 인간의 손이 아닌자연에서 살다가 죽기를 바랐다그래서 얼마가 들더라도 값을 치르고 꼬리를 자연으로 보내주고 싶었다마취해 줄 사람이 오기 전까지 저자는 다시 꼬리와 눈을 마주하게 되었다.

 

p.219

 

꼬리는 눈을 천천히 내리깔며 살기를 누그러뜨리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둥근 빛무리가 떠 있는 눈빛 속에 마을 사람들을 노려볼 때의 거친 증오는 걷히고 없었다우리 둘은 적의도 의존도 없이 한동안 서로를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알 수 없는 뭔가를 갈망하듯 종이 다른 서로를 바라보았다꼬리가 눈을 부드럽게 껌뻑거리더니 작고 둥근 귀를 움찔거렸다뭉툭한 주둥이를 살짝 들어 작은 콧숨을 두어 번 들이켜 나의 냄새를 맡았다안개 낀 목장에서억새밭 산막 앞에서 나의 냄새를 맡았듯이 이 건초창고에서 나의 냄새를 맡았다그리고 꼬리를 좌우로 슬쩍 뒤척였다꼬리는 나를 알고 있었다.

 

마취 후 저자는 꼬리의 몸 구석구석을 살필 수 있었다눈을 마주한 적은 몇 번 있었으나 이렇게 꼬리의 몸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만지게 될 줄은 몰랐다송곳니보다 어금니가 먼저 썩었으니 아직 사냥하는 데는 무리가 없겠고혓바닥이 젊은 호랑이처럼 연분홍색은 아니었지만 나이에 비해 건강했다울퉁불퉁한 갈비뼈를 쓰다듬으며 옆구리에 난 20센티미터 가량의 흉터도 발견했지만 총상 자국은 없었다꼬리의 결백이 증명된 후 지프에 태워 용의 등뼈 북부로 올라가서 마취를 푸는 주사를 놓았다. 3월의 함박눈이 내린 숲속에서 꼬리는 깨어났다.

 

p.235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힘없이 둘러보다 고개를 돌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눈송이가 쌓여가는 털북숭이 얼굴의 아련한 눈빛이 안간힘을 다해 나에게 어떻게 된 거지?내가 어디 있는 거야?’라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야봄도 머지않았어이제 더 이상의 갈림길은 없을 거야그랬으면 좋겠어.’ 애써 무심한 눈빛으로 대답했다순간 나는 그가 미소를 흘렸다고 생각했다흔들리며 살다가 마지막 순간이 왔을 때그 순간을 흘낏 보고 안도하는다 안다는 듯한 미소 말이다.

(……)

나를 바라보던 꼬리가 다시 호흡을 가다듬었다앞발 하나를 들어 힘없이 휘젓다가 천천히 앞으로 내려놓았다한 발 한 발 흔들리며 내딛는 꼬리의 몸짓에서 늙어버린 육신이 주는 거북함이 느껴졌다그는 용의 등뼈로 향했다.

 


 

그 후로 꼬리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다가 14개월 후 어떤 산지기가 용의 등뼈를 오르다 호랑이 주검을 발견했다. 호랑이의 두개골 아래 목뼈에 와이어로 된 올가미가 감겨있었다숲으로 걸어들어가는 꼬리의 뒷모습을 보며 부디 자연의 품에서 생을 마감하게 해달라고 빌었건만 결국 인간의 손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자신이 태어난 바위굴에서 생을 마감한 호랑이가 꼬리였는지 저자는 어떻게 알았을까?

 

본 리뷰를 읽고 궁금하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길 권한다자연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사람영상보다 글을 좋아하는 사람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겪는 삶과 죽음의 애환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혹시 저자가 설립한 단체에 기부하기를 원한다면 책 구매를 하길 권한다작년에 '월말김어준'에 출연한 저자가 개인 기부는 받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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