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인연 - 외로움이 깊어 인연이 되었던 어느 젊은 날
이은주 지음 / 헤르츠나인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은주 작가의 신간 <동경인연>의 출간소식을 보고 서평단 이벤트에 신청했다. 내게 작가는 대단한 사람, 본받고 싶은 사람이다. 작년에 친정엄마를 간호하며 끙끙댈 때 나를 위로해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도 모르고 만난 적도 없다. 하지만 <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로 만난 그는 천사였다


작년 엄마의 병실에서 나는 이은주 천사를 떠올렸었다. 설사가 넘쳐버린 기저귀를 갈고 뒤처리를 다한 후 땀범벅이 된 채 나는 보조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문득 <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가 생각났다. 휴대폰을 열어 내가 썼던 그 책의 리뷰를 읽어보았다. 화와 억울함, 연민으로 뒤범벅이 된 감정이 바닥으로 차분히 가라앉았다. 친정엄마 간호도 이렇게 힘든데 아무리 직업이라도 노인들을 어쩜 그리 살뜰하게 돌볼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감히 따라하기 어렵다.


처음 작가의 이력을 보면서 참 여러 가지 일을 하며 힘들게 살아왔겠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작가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직업으로 만나는 사람부터 가족과 조카들까지 진심으로 돌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책 <동경인연>은 일본 유학시절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했다. 작가의 20대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살짝 들뜬 마음으로 책을 열었다.

 

"쉰의 바다를 건넌 내가 <동경인연>을 끝으로 이은주 에세이 3부작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오래 울었으니까 힘들거야>, 그리고 <동경인연>은 돌봄과 인연의 변주곡이었다. 자신을 돌보고, 가족을 돌보고, 나아가서는 타인을 돌보는 과정에서 문학과의 인연이 힘이 되었다."

 

이은주 에세이 3부작의 마지막을 청춘의 이야기로 마무리하겠다고 했다. 이후의 행보 계획은 쓰지 않았으나 나는 바랐다. 예전에 했던 번역을 계속 하기를. 생활고와 현실 등 여러 문제로 현재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번역가로 다시 돌아가길...


사설이 너무 길었다. <동경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차례다. 이 책은 옥죄어오는 현실에 인공호흡기가 되어준 인연에 대한 이야기다. 그 사이에는 문학이, 작가의 문학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이었지만 일본대학 예술학부 문예학과에 입학했다. 문학가에 대한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꿈을 버리지 않게 해준 동경에서의 인연을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당시 작가의 모습을 시미즈 선생님은 황야의 이리라고 표현했다. 생활고에 찌든 거친 눈빛 안에 문학에 대한 애정만은 반짝이고 있었다.


p.25


문학을 공부하고자 하는데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싫었다. 책을 읽을 시간도 없고 비평수업에 제출할 레포트를 쓸 체력이 안 되니 나는 자꾸 병들어갔다. 무기력해지고 부정적이 되었다. 다 그만두고 싶었다. 지긋지긋한 아르바이트도, 학교도, 다 손을 놓으면 편해질 것 같았다. 그렇게 몸살을 앓으며 3학년을 보냈고 마침내 4학년이 되자 나는 학교가 가기 싫어졌다. 밤샘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처지가, 아니 말이 10시간이지 깨어있는 시간은 뇌가 긴장해서 아침까지 잠 못 이루다가 간신히 잠이 드는데 시간표를 아무리 오후수업으로 짜두어도 수업시간에 맞춰서 나간다는 건 불가능했다. 삶은 쓸데없는 농담 같았다.


이렇게 지쳐 있는 그를 깨워 수업에 나오게 하고 시작 시간도 배려해준 분이 시미즈 선생님이었다. 작가는 선생님을 주변 사람들 재능을 일깨우고 주목하여 하나의 완성으로 나아가게 해준다, 닮고 싶어 했다. 선생님이 별이라고 해준 단 한명의 작가가 제자였고, 귀국 후에도 시미즈 선생님과의 인연은 이어졌다.


시미즈 선생님의 관심과 격려와 배려 덕분에 작가는 유학생활을 벼텨냈다. 작가가 선생님에게 소개했다는 김영동의 멀리 있는 빛을 틀어놓고 작가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다. 작가가 한여름 밤, 오이차이 다다미 방에 누워 흘렸던 외로움이 한국의 겨울 밤에도 몸서리치게 휘감겨왔다.


일본여행에 대한 열망은 없지만 진보쵸는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일본 소설에서, 출판 관련 서적에서 늘 서점거리의 대명사처럼 등장하는 그 곳을 가보지는 못한 채 동경만 키우다보니 아스라이 멀리 있는 별이 되어 버렸다. 우리나라에서 헌책방 거리나 헌책방을 가보아도 책에서 읽은 진보쵸 거리와는 사뭇 다른 것만 같다. 직접 가보지 못한 폐해다. 작가도 진보쵸 에피소드가 있지 않을까 예상했다. 도쿄니까, 문학을 사랑하는 가난한 유학생이니까.


작가가 만난 헌책방 시바타 아저씨와는 도스토옙스키 전집으로 친구 사이가 되었다. 시바타 아저씨는 작가를 헌책 도매상에 데려갔고 그곳에서 도스토예스키 전집 18권을 발견한다. 두어 달이 걸려 전집이 도착했을 때 가격은 도매상에서 본 2천엔 그대로였다. 가난한 유학생에게 수수료 같은 이문은 붙이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좁은 다다미방에 아저씨를 초대한 후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고 했다. 시골에서 중학교만 졸업하고 진보초의 헌책방에 취직했다는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자기가 집을 떠나 동생들이 밥 한 공기를 더 먹을 수 있었다는 내용이 작가의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아저씨는 작가에게 한국어를 가르쳐달라고 했고 그 값으로 점심을 사주었다. 부담을 주는 것 같아 괜찮다고 해도, 진보쵸 헌책방 단골손님들이 찾는 고서적을 구해주면 돈이 꽤 된다고 걱정마라고 했다. 시바타 아저씨는 한국에서 온 가난한 유학생에게 책도 주고 밥도 주었다. 몸과 마음의 허기를 채워준 은인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친구에게서 아저씨의 소식을 듣게 되는데 헌책방 앞에 꽃이 놓여있더라며, 너처럼 아저씨를 생각하는 사람이 또 있더라고 전해주었다.


p.68


나는 늘 나이 차이가 나는 우정을 동경해왔다. 장 그르니에와 까뮈의 우정을. 헤어져 있어도 서로의 가슴에 별로 빛나는 만남을. 어떤 관계는 대부분 유효기간이라는 것이 있어서 영원하지 않았다.


작가의 말에 나도 공감한다. 나도 그런 우정어린 인연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만들지 못했다. 만남이 있어야 인연이 될 것인데 요 몇 년 사이 그나마 있던 만남도 속속 끊어지는 형국이다. 혈연으로 연결된 가족이 아니고서야 영원한 인간관계란 있을 수 없는 게 맞는 가보다. 평생 갈 거라고 장담했던 관계가 있었는데 코로나가 정리해주었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또또 코로나 타령이다.


작가의 동경인연 중에서 가장 마음 찡했던 이는 우체국의 마리 아줌마다. 마리 퀴리부인을 존경해서 닉네임을 마리라고 지었다는 그이와의 인연을 아직도 이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지속되는 인연도 있다. 20대 초반 여성의 눈에 비친 마리 아줌마는 독립적이고 멋진 여성이었다. 엄마로 아내로 주부로 직장인으로 진지하게 정성을 다해 삶을 대하는 태도에 반한 것이다. 또한 아줌마의 딸 안과 나나 덕분에 타국에서 가족의 사랑 안에 있는 것 같은 안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줌마의 라보모임에 초대를 받아서 겪은 일은 작가에게 일본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고민할 길을 열어주었다. 사진작가라고 한 남성이 작가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한 일이 있었다. 그 후 학교에서 배운 역사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후지타니 선생의 단편 <을지로 입구의 푸시킨>을 접하면서 향후 한일관계에 대한 고민을 했고, 이어 한국판 <을지로 입구의 푸시킨>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동경인연> 구상의 토대가 되었다고 밝혔다.


이상은 안과 나나의 언니, 이상은 나의 딸입니다.’


는 마리 아줌마가 쓴 편지 속 문구이며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유학을 가서도 한국에 돌아와서도 가족이나 지인은 작가에게 상처를 주었고, 어깨를 한없이 무겁게 했다. 그러나 가족을 버릴 수 없었고 한국에서 살아야만 했던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그들을 내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껏 고단한 삶을 살았다. 물론 때때로 행복한 나날들도 있었을 것이다. 허나 작가가 힘들고 외로울 때 옛 일기를 들춰보며 미소 지었을 것 같다. 사납게 번뜩이던 이리의 눈빛 속 별을 알아봐주고, 들썩거리던 어깨를 다독여준 인연들을 일기장 속에 가두어두는 것보다 한 권의 책에 갈무리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책은 그 동경인연들에게 소중한 선물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이제부터는 쓰기 싫은 부분을 기록하는 일이 남았다고 했다. 무엇을 쓰고 싶은지, 쓰고 싶지 않은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나는 작가에게 바란다. 오욕의 역사도 쓰라고! 지나온 시간을 정리하며 간간이 번역도 하라고! 꼬옥 문학가의 꿈을 이루시라!


물론 독자 입장에선 이미 문학가입니다! 작가님 책 두 권밖에 안 읽었지만요~~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