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터 2020.1
샘터 편집부 지음 / 샘터사(잡지)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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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샘터 20201월호의 표지는 빨강으로 강렬하다. 정중앙에 자리잡은 월척을 낚아올리는 낚싯대의 포물선이 2020이라는 숫자가 주는 둥그런 이미지와 샘터 창간 50주년을 맞아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역동성을 표현하는 듯하다. 창간 49년만에 찾아온 폐간 위기를 많은 이들의 격려와 후원으로 다시 출발하는 샘터 편집장 이종원씨는 이렇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기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 자체로는 회사의 경영난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없지만 다시 일어설 용기를 일깨워 주었음은 분명합니다. 아직도 샘터가 해야 할 역할이 남아 있다는 걸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긴 세월 변함없이 샘터와 함께 해주신 독자들의 응원 덕분에 이제 다시 미래를 준비하려 합니다. (……) 내려놓은 짐의 무게만큼 보다 멀리 갈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이렇게나마 2019년 한 해를 십시일반의 기적으로 갈무리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2020년 새해에는 보다 좋은 소식만 전해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월호는 내지의 디자인도 조금씩 수정하여 새로운 느낌이고 바탕색은 이전보다 미색 컬러를 더 넣어서 보기에 편했다.

 

샘터에 사연이나 수기가 실린 일반인들의 글 아래에는 글쓴이의 소개가 있는데 작가를 꿈꾸는 이들이 많다. 이번호 특집 사연의 주제는 “10년 후의 내 모습이다.

 

10년 후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사연들이 많았다. 나이도 지긋한 분들이 작가의 꿈을 꾸고 있고 지금도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는 사연을 읽으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나는 최근 늙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할 수 있는 것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푸념을 했는데 말이다. 이렇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면서 살고 싶다는 이들의 사연을 보며 나의 10년 후는 어떤 모습일지 그려보았다 당장 내년에는 지금보다 덜 자학하고 덜 닦달하며 살고 싶다. 올 초에도 이런 다짐을 했는데 오히려 반대로 행동하며 자신을 괴롭혔다. 특집 사연 덕분에 2019년의 내 모습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이번에는 새해를 맞이하는 호라서 그런지 장애인을 위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기사가 두 개였다. 먼저 뮤지컬 공연기획자 고은령씨다.

 

그는 시청각장애인들도 편하게 관람할 수 있는 배리어프리 뮤지컬을 제작하고 있다. 2012년부터 제작해온 창작뮤지컬은 일곱여 편에 이른다. 그는 공연관람을 불가능한 일로 여겼던 관객들이 처음 접할지도 모를 공연을 보고 즐거운 기억을 가지고 돌아가 꾸준히 문화생활을 이어갔으면 하고 바란다고 했다. 직접 쓴 대본에는 따스함이 전해진다. 사실 그는  2005년에 KBS아나운서가 되었지만 대본대로 전달하는 일에 답답함을 느끼고 5년만에 미련없이 퇴직하고 한예종에 들어가 예술공연을 공부했다. 시각장애인들도 공연을 보고싶어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알고 오디오극을 넘어 배리어뮤지컬을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더 열심히 뛰면 장애인을 차별의 대상이 아닌 동등한 이웃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아지겠다는 기대가 커졌어요.”

 

또 다른 한 사람은 배리어프리 사진관인 바라봄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는 나종민씨이다.

 

그는 장애인들도 마음 편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2012년 사진관을 오픈했다. 뇌병변 장애아동 체육대회에 사진 촬영 자원봉사를 갔다가 거기서 만난 장애아동의 어머니가 우리 아이도 사진관에 한 번 데리고 가서 사진을 찍어주고 싶다고 하는 말을 듣고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끌고 사진관에 가는 것부터 쉽지 않고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 움츠러들게 되는데 바라봄 사진관은 휠체어 사용자를 위한 엘리베이터와 경사로가 설치되어 촬영 스튜디오까지 편안하게 입장할 수 있다. 바라봄 사진관은 국내 최초 장애인을 위한 전문사진관이지만 누구나 이용가능하다. 일반인이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1+1로 장애인에게 사진 촬영권이 기부된다. 장애인 뿐아니라 이주여성, 미혼모, 독거노인들의 사진도 찍고 해외로까지 활동반경을 넓히고 있다. 장애인들의 사진을 찍으며 어려운 점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없습니다. 카메라 앞에 서면 딱딱하게 얼어버리는 사람도 있고 포즈나 표정을 아주 잘 잡는 사람도 있잖아요. 장애의 유무가 아니라 결국 개인의 차이일 뿐이에요.”

 

이 두 사람은 장애라는 편견 없이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누구에게나 행복을 맛보게 해준다. 그들이 허문 장벽을 더 많은 장애인들이 넘어서는 경험을 할 수 있으면 좋겠고 더 이상 허물 벽이 없는 세상이 오길 바래본다.

 

신설된 꼭지 다시 읽는 반세기 샘터”는 꼭 소개하고 싶다. ‘엄마, 개가부해?’라는 외계어 같은 제목이다. 이것은 가계부를 열심히 쓰고 있는 엄마를 보며 말을 배우기 시작한 딸이 한 말이었다. 19791월호에 실렸던 독자의 글로 친정어머니의 꼼꼼한 가계부 쓰는 실력을 이어받아 자신도 가계부를 몇 년 째 쓰고 있다는 내용이다. 사연의 주인공은 가계부에 단지 돈의 출납만을 쓴 것이 아니라 비고난에 소소한 일들을 기록해 두었다. 가계부가 가정사가 되는 셈이다. 요즘엔 가계부를 쓰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40여 년전에 씌여진 가계부를 보니 격세지감을 느꼈다. 이것이야말로 샘터가 50년간 우리와 함께 해온 산 증거가 아닐까. 앞으로 지난 독자투고 글을 매달 한 편씩 소개한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지난 시절 이웃들의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다.

 

이 외 1월호에는 가슴 찡한 글들이 많았다. 동물을 소재로 한 쫑아가 좋아했던 양말공과 천강 문학상 수필 부문 우수상인 슬픔의 무게가 그것이다. 평생 고생한 아내에게 바치는 글인 명태를 닮은 여자 내 아내가 파랑새의 희망수기에 실렸다. 점점 더 추워지는 날씨에 가슴 뭉클해지는 사연들이었다.

 

지난 50년 간 그래왔듯 내년에도 이웃들의 따뜻한 사연들을 계속 만나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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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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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을 한번만 더 보내게 해주세요. 제가 그 생일을 잘 보낼게요. 누구도 잊지 못할 생일을 만들 거랍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영원히 기억하겠죠. 하느님께서 베푸신 그 모든 기적을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그렇죠? 저처럼요. 그러니 저에게 하루만 더 주십쇼. 들으셨죠. 하느님. 하실 수 있잖아요.’

 

지금 하느님과 협상중인 이 남자는 데 라 크루즈 집안의 장남 미겔이다. 별명은 빅 엔젤. <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의 주인공이다. 그는 70세 생일을 앞두고 암선고를 받았고 이번 생일이 아마 생의 마지막 생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흩어져 살고 있는 가족들을 모두 불러모은 것이다.

 

인간은 살면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산다. 만약 당신에게 살 날이 한 달뿐이라면 무엇을 할 것인가? 곧 생일이고 그 생일이 지나면 죽을거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빅 엔젤처럼 조금만 더 살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빌었다가, 내가 왜 이렇게 일찍 죽어야하냐며 억울해 하다가, 남은 시간 의미있게 보내기 위한 방법을 궁리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래서 빅 엔젤은 어머니의 장례식까지 일주일을 미뤄 자신의 생일 전날에 하고 그 다음날에 생일파티를 하려고 한다. 일타쌍피 작전이다. 그렇게 한다고해서 집안의 큰 어른 빅엔젤의 말에 반기를 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두 번 움직이려면 돈도 두 배로 드니까 모두들 군말없이 참석한 것이다. 우리 상식으론 호로자식이라고 욕먹을 상황인데 멕시코에서는 장례식을 편의에 따라 미루어도 괜찮은 모양이다. 아니면 빅 엔젤네 집안이니까 가능한 것인지도.

 

이 책으로 멕시코 소설을 처음 만났다. 다산북스에서 가제본 서평단으로 받은 책이다. 기존 북딩스 서평단과 다르게 '완독이'라는 이름으로 서평단을 많이 모집했다. 멕시코 소설은 처음이니 이 책의 작가도 처음 듣는 이름이다.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 작가는 팩트인 본인 가족사와 픽션을 적절히 섞어서 책을 완성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건의 모티브를 차용했지 우레아 가족의 실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한다. 아래는 이 소설 등장인물들의 가계도이다.

 

 

가계도를 보면 짐작가능하다시피 이 집 핏줄이 좀 복잡하다. 빅 엔젤의 동생 리틀 엔젤은 이복동생이고 아내 페를라는 결혼전에 아들이 둘이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콩가루 집안이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그것도 우리 상식으로나 그런 것일 뿐이다. 그들이 장례식과 생일파티를 위해 모여서 복닥복닥, 아웅다웅, 치고 받는 걸 보면 아주 가관이다. 욕질과 야한 말투는 기본이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소리를 낄낄대며 해대는데 처음엔 적응이 좀 안됐다. 멕시코 소설을 처음 읽어서 그런가 싶다가 아니 멕시코 사람들이라고 다 저러진 않겠지 싶었다가,

, 작가가 표현하고 싶었던 편안한 가족의 이미지가 이런 스타일이었나 보다.’ 하고 이해했다. 계속 읽어나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큭큭 웃고 있었다. 되도 않은 농담은 서로의 친밀감을 확인하는 것이었고 욕설과 야한 말투는 애정표현이었다. 그 속에는 가족간의 끈끈한 애정이 흐르고 있었고 빅 엔젤의 생일을 맞아 모두 모여 지난 날을 추억하며 사랑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 소설은 장례식과 생일파티 이틀 동안 벌어진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사이사이에 등장인물 소개와 그들의 지난 역사와 사건들을 촘촘히 배치해 두어서 시간적 배경이 헷갈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구성이 이 소설의 가지를 뻗어나가 풍성한 잎들을 피워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나처럼 멕시코 소설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처음에 좀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읽어나가다보면 시트콤의 한 장면 같은 대사에 웃게 되고 미워할 수 없는 빅 엔젤의 어리광에 애잔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는 아버지처럼 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미국에서 살고 싶어 어릴 때부터 고생도 많이 했다. 아내 페를라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사랑에 빠진 것처럼 살고 있는 로맨티스트이고, 막냇동생 리틀 엔젤에겐 아버지같은 존재다. 그랬던 빅 엔젤이 이제 늙고 병들어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다.

생일파티 날 목욕을 시켜주는 아내와 딸 앞에서는 투정을 부리는 아이가 되었어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딸에게 자신의 주요 부위는 보지 마라는 말을 할 정도다.

그러고는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날 용서해주겠니?”

뭘요?”

그는 허공에 손을 저었다.

미안하다.”
그러니까 뭐가요 아빠?”

다 미안해.”

그는 눈을 뜨고 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네가 아기였을 적에, 내가 널 씻겨주었는데.”

미니는 눈이 따갑지 않은 베이비 샴푸를 짜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네 아버지였어. 그런데 지금은 네 아기가 되었구나.”

빅 엔젤은 훌쩍였다. 물론 딱 한 번뿐이었다.

 

자식을 키울 때 아버지는 누구보다 큰 사람이었는데 불과 몇 십 년만에 아기가 되어 도리어 보살핌을 받아야하는 존재가 되다니... 그것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힘겨운 현실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섭리인 것을. 이 장면을 읽다가 내 경험이 떠올랐다. 친정엄마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다쳐서 우리 집으로 모셔왔고 내가 목욕을 시켜드릴 때였다. 늙으니 딸한테 도움은 못주고 이런 거나 시키고 미안하다고 하시는데 내 맘도 좋지 않았다.

괜찮아요. 어릴 때 엄마가 저를 많이 씻겨 주셨잖아요.” 라고 했지만,

그래도...”라면서 계속 미안해 하셨다.

그 상황을 견디기 어려우셨던 듯 하다. 어린 자식을 씻기고 먹일 때만해도 팔팔했던 부모는, 자신이 나중에 돌봄을 받을 처지가 되리라는 건 상상도 못하니까 말이다.

 

빅 엔젤이 리틀 엔젤에게 아버지의 경찰용 오버코트를 건네줄 때 그들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들에게 아버지는 정말 큰 사람이었는데 옷을 보니 너무나 작은 것이었다. 아들은 어릴 때 아버지가 세상의 전부이고 가장 커보였지만 자신이 어른이 되어 보니 실제로 아버지는 그리 크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리틀 엔젤은 형에게 본심을 커밍아웃하기에 이른다.

 

난 평생 살아남기 위해서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어쩌면 형에게서조차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그런데 이제 형이 날 떠나려 하고, 나는 형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할 수가 없어. 난 언제나 생각했어. 내가 원했던 아버지를 가졌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그리고 이제껏 내가 원했던 아버지는 사실 형이었어.”

 

서로 못잡아먹어 안달하듯 으르렁 댔었지만 그에게 형은 큰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소설은 마지막 생일을 맞아 가족이 모두 모여 지지고 볶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지난 날을 회상하며 추억에 젖고 사랑을 확인하고 곧 떠날 모두의 아버지 빅 엔젤을 마음 속에 더 꼭꼭 담아두는 의식을 치르는 것이었다. 작가는 생일파티를 위해 모인 데 라 크루스네 가족들의 좌충우돌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이렇게 말하려는 것 같다. 인생은, 가족은, 그리 아름답고 평화로운 것만은 아니라고. 하지만 공유하고 있는 기억들이 있기에 우리네 삶이 풍요로웠음을, 추억할 거리가 있고 살아갈 힘이 난다는 것을. 떠나는 사람은 가고 싶지 않고 보내는 사람도 힘겹지만 그 또한 인생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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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달님만이
장아미 지음 / 황금가지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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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형태의 한국형 환타지 소설"

 

장아미 작가의 신간 <오직 달님만이>의 출판사 소개 문구이다.

환타지 장르는 그리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우리나라 옛이야기를 새로운 형식으로 탄생시킨 작품이라는 소개를 보고 서평단에 당첨되어 받은 책이다.

 

옛이야기를 읽은 적에 언제였던가 가물가물했다. 민담, 설화, 전래동화! 비슷비슷한 이름들이 떠오르지만 뭐니뭐니해도 예전 드라마 전설의 고향이 옛이야기에 가장 어울리는 것 같다. 그 드라마의 소재는 은혜를 갚은 짐승이거나 한을 품을 짐승 혹은 여자였다. 물론 권선징악이 주제이고. 오싹하면서도 드라마적 재미를 주던 전설의 고향을 보려고 이불 뒤집어쓰고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전설의 고향 시청하던 때를 떠올리며 소설 <오직 달님만이>를 읽었다.

 

가히 민담과 상상력의 조화라고 하겠다. 호랑이와 이무기, 무당등이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고 여기에 환타지적 요소도 가미되어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신기한 이야기가 400여페이지에 거쳐 서술되는데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우리나라 옛날 이야기를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풀어낼 수도 있구나~~ 싶어 작가소개를 다시 봤는데 나이는 나와있지 않고, 마법사와 용, 변신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거의 모든 환상적인 이야기를 사랑한다  고 소개하고 있다. 젊은 감성으로 풀어낸 새로운 형식의 소설, 재미있게 읽었다.

 

간단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역모죄로 몰락한 집안의 여식 희현과 모현 자매가 유배되어 당도한 곳은 외딴 섬마을. 둘이 겨우겨우 목숨 부지하며 살아가던 그 마을에 호환이 일어난다. 산에 있는 호랑이가 자꾸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이다. 이에 마을 무당 천이는 산군이 노해서 그런 것이니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하는데 당연히 여자다. 몇 명이나 바쳐도 흉흉한 일은 그칠줄 모르는데... 당연한 수순대로 아무런 연고 없이 가난한 희현이 제물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언니 희현은 돌봐야할 자식이 있다며 거부하다가 동생 모현을 애절하게 쳐다보고, 동생이 언니를 대신하여 제물로 바쳐지게 된다. 형부인 단오가 길잡이를 하여 모현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는데 처제를 겁탈하려고 한다. 모현은 품고 있던 장도로 위기를 모면하려하지만 역부족. 이 때 어디선가 호랑이가 나타나 단오를 물리치고 모현은 호랑이에게 어깨를 물려 혼절한다.

 

앞부분에서 이미 이렇게 사건이 팍팍 터진다. 까무러쳤던 모현이 정신을 차려보니 관아. 호랑이 잡으러 떠났다가 돌아오지 않아 모두가 죽었을 거라고 여기던 사또 홍옥이 모현을 구해 산에서 내려온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기이한 일이 생긴다. 호랑이에게 물린 모현의 어깨 상처는 하루만에 다 낫고, 잘생겼지만 무능했던 홍옥은 눈빛이 현현해진 늠름한 장부로 돌아온 것이었다. 여기에 무당 천이의 계략과 음모가 점점 수위가 높아지고, 희현은 악의 손길로 빠져들고, 홍옥과 모현, 이방인 과의 삼각 러브라인까지 더해지면서,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고 촘촘하게 잘 구성되었다권선징악으로 끝날 걸 알기에 천이는 벌을 받을 것이고 모현과 홍옥이 잘 먹고 잘 살았다~로 끝날 것으로 예상했는데 조금 달랐다. 숨겨진 호랑이와 이무기의 이야기가 들어있지만 리뷰에 모든 걸 다 쓸 순 없다.

 

단 캐릭터 설정에서 조금 아쉬운 부분을 말하고 싶다. 희현이 어릴 때부터 모든 걸 동생에게 양보하고 뺏기는 장면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한다는 것이 설득이 잘 안됐다. 물론 뒤에 가서는 악령이 씌여 저주의 행동을 하긴 하지만 희현의 행동을 이해하긴 힘들었다. 무당 천이는 처음부터 악의 존재처럼 묘사되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모현은 발랄하고 자신감있는 캐릭터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당당하게 헤쳐나가는 인물이라서 질투심과 악의 지배를 받는 언니와는 대조된다. 모현의 대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에 동네사람들이 몰려와 마을에 액운을 가져왔다며 닦달할 때 모현은 이렇게 일갈한다.

아니, 마을에 불행을 가져온 건 그대들 자신 아닌가! 무고한 소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 역시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지. 그대들은 겁쟁이야. 누구 하나 자기 힘으로 구해내지 못했어. 떠올려봐. 이 비극 속에서도 손끝 하나 다치지 않은 자들이 누구인지. 그대들의 진정한 적이란 과연 누구인지. 마을에 증오라는 독을 풀어놓은 이들의 정체를 헤아려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 그대들에게 이르노니 더는 인신공양을 올리지 말기를.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약한 이를 바쳐 목숨을 부지하려 하지 말지니 다만 서로를 도와 마을을 구원하도록 해라.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인 바.”

라고 말한 뒤 조카 미유와 함께 호랑이 등에 올라탄. 보름달이 환한 밤, 호랑이를 타고 떠나는 두 여자의 모습 뒤로 청룡의 비늘이 푸른빛을 뽐내고 있었다.

 

환타지로 마무리가 되는 소설이었지만 나쁜 이들이 모두 벌을 받았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모현이 홍옥, 명 중에 누군가와 인연을 맺기를 바라는 것이 전래동화의 공식인데 그렇지 않으니 살짝 아쉽긴 했지만 그 부분은 또 현대적 결말로 해석해야할 것 같다. 이방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집단이 가진 갈등을 투사하려고 하는 짓은 언제든 있어왔다. 소설의 배경이 옛날이지만 소설속 인신공양은 오늘날 난민을 대하는 배타적 태도, 자신의 이익이나 권력유지를 위해 힘없는 사람들의 삶은 내팽겨치는 태도와 닮았다. 소설에서는 호랑이와 용이 해결에 도움을 많이 주지만 현실에서는 호랑이도 용도 없다. 모현같은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져서 연대해야 하는 수밖에...

 

, 처음에 책표지 언급하는 것을 깜빡했다. 표지의 제목 글자와 그림 호랑이, 자매의 머리가 붉은 색인데 빛을 비추면(빛 아래에서 책을 움직이면) 금박이다. 어떤 기술인지 신통방통했고 요리조리 돌려가며 금장호랑이 찾느라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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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나가 될 거야! 작은 곰자리 41
신지 가토 지음, 윤수정 옮김 / 책읽는곰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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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본 그림책 작가 '신지 가토'의 책 <발레리나가 될거야!>가 책읽는곰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작가 소개]

일본 구마모토 출신.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로 잡화, 문구, 신발, 옷, 액세서리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 걸쳐 사랑스러운 제품을 선보여 온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전 세계에서 널리 사랑받고 있으며 디즈니, 포켓몬스터, 영국 해러즈 백화점 같은 다양한 기업과 협업하고 있다. 북극곰 형제 '하늘이'와 '곰곰이' 캐릭터를 내세워 어린이들에게 환경 교육을 하고 신재생 에너지를 개발 보급하는 민간 비영리 단체 "하늘 곰"을 만들어 2010년 일본 환경 대산상을 수상했다. 그동안 쓰거 그린 그림책으로 <북극곰 형제의 첫 모험> <뭘까? 뭘까?> <주머니 가득> 등이 있다.

그림책의 등장인물은 발레리나가 되고싶은 여섯 살 라미와 라미의 단짝 고양이 찰떡이, 그리고 언니 소미이다.

 

언니 소미의 발레발표회 전날, 엄마가 언니의 발레복을 준비하고, 라미는 고양이 찰떡이와 발레복을 만들겠다며 난리 법석이다.

 

 

그러다가 언니의 옛날 발레복을 입고 잠이 들면서 라미의 꿈이 시작된다. 인사를 하고 나가는 언니의 뒤를 따라 나서는 라미와 찰떡이. 언니를 뒤쫓아 가다가 문이 닫혀 깜깜해진다. 발레의 막이 바뀔 때 암전 상태가 되듯 검정 바탕이었다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발레 무대가 나타난다. 그곳에서 라미와 찰떡이는 발레를 같이 추며 신나는 시간을 보낸다. 라미가 함께 한 발레는 “코펠리아”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이다.

 

 

 

 

한바탕 발레를 추다가 언니를 만난다. 마지막은 웃는 얼굴로 잠든 라미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이 그림책의 매력은 그림이다. 라미와 찰떡이가 사랑스럽게 표현되고, 발레 장면의 그림들도 귀여우면서 역동적이다. 그림이기 때문에 평면이라는 한계도 있지만 라미와 언니가 만나는 장면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각도로 처리되어 그 한계는 어느 정도 극복하고 있다. 발레 공연이든 영상이든 무대 위에서 아래로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어떻게 보여지는지에 대한 감각을 키워준다.

라미도 그렇지만 고양이 찰떡이의 표정 변화가 다채로웠다. 내가 고양이를 좋아해서 그런지 사실은 라미보다 고양이에게 눈길이 더 오래 머물렀다. 찰떡이와 라미의 행동을 보며 절로 엄마미소 지었다.

이처럼 그림이 중심이 되는 그림책은 나이불문하고 빠져들게 만든다. 이 책의 주인공이 6세라고 해서 유아만 읽으라는 법은 없다. 소재가 발레니까 아무래도 남아보다는 여아들에게 선택받을 가능성이 높기는 하다. 발레에 관심있거나 좋아하는 아이들, 혹은 배우고 있는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책이다. 발레는 직접 보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이 그림책으로 먼저 만났다면 발레에 흥미를 가지는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유아나 초등 저학년이 그림책을 읽고 할 수 있는 활동은 마음에 드는 장면을 그려보거나 직접 한 장면을 연기해보는 것이다. 이 책은 발레가 소재이므로 더욱 다양한 방식의 독후활동을 할 수 있다.

책에서 소개되는 발레를 직접 보러 가면 가장 좋다. 하지만 사전 정보 없이 바로 공연을 보러 가는 것보다는 집에서 영상으로 먼저 보면서 내용을 숙지한 다음에 실제 공연을 보는 것이 좋다. 유튜브를 적극 활용해서 아이에게 단계별로 보여주면 좋겠다. 단 유튜브에 제목만 검색해서 올라와 있는 영상들을 바로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흥미를 떨어뜨릴 수 있다. 전편은 길기도 하거니와 처음 발레를 보는 아이들이 바로 발레의 맛을 느끼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수많은 영상들을 선별하는 것도 큰 일이다. 양육자가 발레에 대해 지식이 없다면 줄거리나 요약 영상을 먼저 보고 숙지한 다음 아이의 연령과 관심도에 따라서 골라야 한다.

세 편의 발레 중에 아이들에게 가장 유명한 것은 “호두까기 인형”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늘 공연되는 것이 “호두까기 인형”이고 아이들과 같이 관람하는 부모들도 많다. “호두까기 인형” 2막에는 다양한 나라의 춤이 나온다. 스페인 춤, 아라비아 춤, 중국 춤, 러시아 춤이 화려한 복장과 익살스러운 춤으로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유명한 꽃의 왈츠까지. 유아에게 두 시간 가까이 되는 전편을 보여줄 수는 없으므로 주요 장면위주로 보여주고 음악은 평소에 BGM처럼 계속 틀어주면 음악적 소양을 키우기에 좋다. 알다시피 차이코프스키 발레음악은 음악만으로도 완성도가 높다.

“백조의 호수”도 1막에서 백조 군무 도중 4마리 백조가 추는 춤은 음악도 아주 유명하다. “백조의 호수”는 전체가 다 아름답지만 2막에서 백조떼의 군무, 백조와 흑조의 파드되(발레에서 2인무)도 선별 감상용으로 좋다.

비교적 덜 유명한 “코펠리아”에도 3막에 ‘기쁨 파드되’의 군무 ‘시간의 춤’등 요약영상으로 볼 만하다.

발레를 배우고 있다면 이미 이런 영상들은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아직 영상으로 접하지 못했다면 그림책 한 권 읽고 그냥 끝내지 말고 다른 장르로 넘어갈 수 있는 기회를 주면 좋겠다. 이런 활동들을 해봄으로써 아이에게 책이라는 매체가 재미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 요즘은 책이 인기가 없다. 책보다 더 재미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아이고 어른이고 책을 손에 들기보다는 휴대폰을 든다. 어제 tvN에서 방영된 <책의 운명>에서 독일 학자는, “책이 아닌 매체에서 얻은 지식은 깊이가 없다”고 말했다. 무조건 책만 봐야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책과 관련된 의미있는 활동을 한 아이는 책을 멀리하지 않는다. 책과 영상, 직접하는 활동이 적절히 배합되도록 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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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글쓰기 - 혐오와 소외의 시대에 자신의 언어를 찾는 일에 관하여
이고은 지음 / 생각의힘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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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여성의 글쓰기>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에게 기대하는 대부분의 과제를 모두 해내고 있음에도 도무지 만족하고 행복해질 수 없었던 전직 전문직 여성이 어떻게 글쓰기에서 그것을 이루어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가 여성이므로 ‘여성의 글쓰기’이기도 하거니와 모든 여성은 자신을 알기 위해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무엇을 위해, 왜 글을 써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무엇을 위해, 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과도 같으므로 정치적 글쓰기가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것은 곧 삶을 향한 글쓰기이기 때문이므로.

삶을 향한 글쓰기는 이 책의 부제와도 연결된다고 볼 수 있는데, 부제는 ‘혐오와 소외의 시대에 자신의 언어를 찾는 일에 관하여’다. 여성이 자신의 언어를 삶을 향한 글쓰기로 드러낼 때 살아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책은 4장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장의 제목은 아래와 같다.

1장 자아를 찾아가는 글쓰기

2장 진실을 찾는 글쓰기

3장 결핍과 충족의 글쓰기

4장 사회, 연대, 글쓰기

각 장의 마지막에는 ‘어떻게 쓸 것인가’ 라는 제목으로 글쓰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순서로 쓸 것인지에 대한 코칭이라 하겠다. 그 제목은 다음과 같다.

# 구조와 흐름

# 호흡과 리듬

# 정확성과 표현

# 시작과 끝맺음

저자 이고은씨는 경향신문에서 사회부, 정치부에서 기자로 근무하다가 출산과 육아를 위해 기자 일을 그만두었다.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퇴사했지만 자신의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의 일과 멀어지는 불안감을 느꼈다. 전업주부로 있으면서도 계속 할 수 있는 일이란 글쓰기 뿐이었다. 자신의 일터로 돌아가지 않은 채 글을 쓸 수 있는 팩트체크 전문 미디어 뉴스톱에 기사를 쓰기 시작한다. 정치하는 엄마들의 창립에 함께 하기도 했고 현재는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하고 있다.

리뷰의 첫 문단에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요약했지만 기실 나는 앞부분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1장 2장을 읽는데 기자의 일과 미디어에 대한 이야기, 저자가 퇴사 후 힘들었던 것에 대한 내용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에게 질문했다. 이 책에서 기대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를. 내가 원했던 것은 3, 4장에서 찾을 수 있었다.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 그래서 얻을 수 있는, 얻고자 하는 것!에 대한 답들이 나와서 고개를 끄덕였다.

각 장마다 부록처럼 끼워진 글쓰는 방법 코칭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동안 읽어온 글쓰기 관련 책과 겹치는 부분이 많았지만 읽었다고 해서 다 알고 그대로 하고 있는 건 아니므로 복습이 되기도 하고 볼 때마다 새로운 것도 있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은 글 안에 큰따옴표와 작은따옴표가 빈번하게 사용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자주 쓰는데 그 이유는 이름이나 지명같은 고유명사를 구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나혼자...

그런데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큰 따옴표가 많으면 내용을 자기 언어로 소화할 수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고, 작은따옴표가 많으면 논리적으로 서술할 능력이 부족해 인위적으로 강조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내 의도가 저렇게 인식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이 리뷰에서는 평소 같으면 작은따옴표를 썼을 부분에서 생략하고 써보았는데,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 왠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자신의 전직이나 미디어의 문제를 앞부분에 배치한 것은 뒷부분에서 여성에게 글쓰기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지 강조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해석했다. 나아가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페미니즘으로 연결되는 내용들이 나온다.

읽기는 하지만 쓰기는 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만한 내용을 인용한다.

P. 47~48

보통의 세계에서 특별함을 발견하고 글로 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현상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유의미한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며, 그중 거시적이고 통시적은 굵은 주제와의 연결고리를 찾아 세밀하고 친절하게 묘사하는 일. 모든 과정에 글쓴이의 날카로운 렌즈가 작동해야 한다. 어떤 현상을 관찰할 것인가. 그중 무엇을 골라낼 것인가. 그것은 어떤 이야기의 한 단면인가, 어떻게 표현해낼 것인가. 이 모두가 쓰는 이가 홀로 감당해야 할 외로운 숙제가 된다.

하지만 이 과제의 무게를 견뎌내는 방법이 있다. 혼자만 감당하지 않는 것이다. 비슷한 고민을 해온 앞선 이들의 글을 탐독하고, 같은 숙제를 안은 이들과 함께 생각을 나누는 일이다. 그것은 현상에 대한 취재일 수도 있고, 하나의 주제에 대해 사람들과 나누는 진지한 논의일 수도 있따. 그 과정을 통해 이야기에는 구체성이 더해지고 깊은 사유가 담긴다. 나의 고뇌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유사한 고민을 안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 그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하는 요구가 있다는 사실, 실존하는 수요를 확인하고 나면 글을 써야 할 이유가 보다 확고해진다. 이 과정이 없다면 글 속에 허세와 관념이 가득 찰 위험이 크다.

그래서 저자는 정치하는 엄마들의 활동을 하게 되었고, 주부이자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의 해소로 글쓰기를 계속 하게 된다. 저자는 기자로서의 필력을 요구하며 어느 정도의 보수가 있는 글을 쓰면서도 책 쓰기에도 힘을 쏟았다.

나의 글쓰기를 돌아보았다. 책 쓰기를 시도하다가 잠정 중단 상태이다. 올 일 년 간 쓴 글은 대부분이 책 리뷰였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는 것을 포함 나의 느낌을 일정부분 포함하는 글쓰기였다. 저자가 쓰는 글의 종류와 차이가 있는데 위 인용글에서 말하는 글을 써야하는 이유와 유사하지는 않은 것 같다. 너무 많은 책들의 리뷰를 기한 내에 써내야하는 압박으로 저런 고민보다는 마감일에 제때 써내는 것에만 급급했다. 서평단 활동을 과하게 한 결과이다.

내년부터는 나의 글을 써야한다. 중단된 책쓰기의 마감이 사실상 내년 여름이다. 그리고 책 리뷰보다는 수필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눈물이 마르는 시간>에서 이은정씨는 수필을 희망적인 문학이라고 했다. 그는 수필을 쓰면서 “나 자신에게 위로 받은 내가 비로소 타인의 잘못을 이해하고 용서하게 만들어주었다”고 하면서 “수필의 진실함으로 우울증을 씻어냈고 상처받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내가 책 리뷰 쓰기에만 몰두했던 것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두려워서였을까? 진실한 글을 쓰기에 주저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남은 2019년 동안 이 두 질문을 더 깊이 파고들어 내년에는 그 답을 찾고 글로 풀어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저자가 말한 삶을 향한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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