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장성주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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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대체 2000년이 오기나 올까 반신반의하는 심정이었다. 지구는 1999년을 끝으로 종말을 맞이할 것만 같았다. 실제 종말론을 펼치는 사이비종교도 있었고 Y2K바이러스가 컴퓨터를 오작동 시킬 거란 소문도 무성했다. 그러나 2000년의 해는 아무렇지도 않게 떠올랐고 우려했던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다. 1900년대 후반에 우리는 연도 앞에 붙을 2자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의 동의어라고 여겼다.


그런데 벌써 2000년이 시작된 지 21년이 지났고 지난 2년 동안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전염병의 시대를 살았다. 2년 후면 2024년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변이의 재창궐이 벌어지지 않는 한,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이 다른 지역으로 비화되지 않는 한, 2024년에도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는 세상일 것이다. 그런데 1993년에 2024년을 예상했다면 어땠을까?


1999년에 2000년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렸는데 1993년에 30년이나 지난 뒤의 지구를 예상한다는 건 SF적 상상력을 동원해야했을 것이다. 인간이 제 몸처럼 사용하는 스마트폰이라는 기계를 지금처럼 누구나 사용하게 된 것도 불과 10년 남짓이다. 미국 흑인 여성작가 옥타비아 버틀러(1947~2006)의 소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가 1993년에 2024년을 배경으로 쓴 작품이다. 그 당시에는 미래를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로 상상력을 자극할만한 소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김영사에서 출간된 이 소설을 읽으니 기분이 좀 묘했다.


기후 변화와 경제 위기로 무너진 국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거대 기업, 이방인을 차단하기 위해 장벽을 세우는 사람들, 신종 노예제도가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는 소설 속 2024년 미국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과 너무나 유사했기 때문이다. 작가의 전작 SF소설에 비해 이 작품은 현실적인 내용이라는 출판사의 설명을 보니 70~80년대에 쓰인 소설들이 어땠을지 궁금해졌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의 주인공 ‘로런 오야 올라미나’는 15살 흑인 소녀다. 로런은 ‘초공감증후군’이라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작가가 창작한 이 질병은 타인의 고통이 그대로 자신에게 느껴지는데 누군가가 칼에 찔리는 것을 보면 나도 그 통증을 그대로 느끼고 피가 흐를 정도가 되기도 한다. 목사인 아버지, 동생들과 함께 장벽 안에서 그나마 안전하게 지내던 로런은 어머니와 동생의 죽음, 다른 동생과 아버지의 실종으로 혼자가 되고 다른 소수자들과 연대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큰 줄거리이다. 2024년부터 2027년까지 4년의 시간을 로런의 일기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로런은 아버지의 종교를 떠나 ‘변화’를 신으로 믿는 ‘지구종Earthseed’의 창시자가 된다.


시적인 문장을 기록으로 남기는 로런의 글은 <지구종:산 자들의 책>에서 발췌한 것럼 인용되는데 아포리즘 같은 이 문장들이 지구종의 바이블의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그대가 손대는 모든 것을

그대는 변화시킨다

그대가 변화시킨 모든 것은

그대를 변화시킨다

변치 않는 진리는 오로지

변화뿐

변화가 곧

하느님이다


"스스로의 잿더미에서

날아오르려면

불사조는

반드시

먼저

불타야 한다."


"살아 있는 세상이

그대에게 요구하는 것에는

한계가 없다."



이 소설에서 로런이 추구하는 공동체가 농업으로 자급자족한다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지독한 양극화 시스템 안에서 부품화된 인간들이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먹는 것이다. 로런이 글쓰기 외에 가장 신경 쓰는 일은 씨앗을 챙기고 파종하여 먹거리를 확보하는 일이다. 소설 후반부에 만난 남자 반콜레가 넓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인 것도 그들의 공동체가 반콜레의 땅에서 완성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로런과 같은 초공감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이 그녀의 공동체에 합류하게 되고 이런저런 어려움을 극복한 후 반콜레의 땅에 당도한다. 만나리란 희망을 안고 왔으나 여동생 가족은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그들을 땅에 묻은 뒤 떡갈나무를 심는다. 로런은 그 땅을 도토리라는 뜻의 ‘에이콘(Acorn)'으로 정한다. 마지막에 이들이 행한 수목은 그곳에서 그들의 공동체가 번성하리라는 희망을 암시한다.


30년 전 작가가 했던 상상들 중에 현재 비슷한 부분이 많다. 그중에서 지금 의미깊게 받아들여야할 것은 바로 공동체의 복원이며 그 바탕이 땅과 씨앗, 즉 농업이다. 나아가 점점 파편화되어가는 인간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우리는 연대의 씨앗을 찾아 심고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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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Q 디지털 지능
박유현 지음, 한성희 옮김 / 김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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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감성지수를 키워야 한다며 교육 관련 상품들이 쏟아져 나온 적이 있었다. IQ(지능지수)보다 EQ(감성지수)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더니 어느 순간 다중지능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다중지능은 IQ EQ의 개념을 아우르고 단점을 극복하는 이론이다. 이제 4차산업혁명 시대에 어울리는 신조어 DQ(Digital Intelligence Quotient 디지털 지능)이 나왔다.


 DQ의 창시자이자 디지털 교육·윤리 전문가 박유현씨의 <DQ 디지털 지능>가 김영사에서 출간되었다. 저자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바이오통계학 박사학위를 받고, 보스턴컨설팅그룹에서 컨설턴트 및 디지털 미디어 애널리스트로 일했다. 2010년부터 지금까지 아이들을 디지털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디지털 역량을 교육하는 사회적 활동에 매진해오고 있다.


DQ란 보편적 윤리에 기반하여 개인이 디지털 생활을 성공적으로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적, 인지적, 메타인지적, 사회·정서적 역량을 포괄하는 역량을 말하며 DQ를 크게 세 단계로 나눈다.



 

우리 아이들이 AI와 경쟁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저자는, AI 시대에 성공하려면 DQ가 필요하며 DQ가 높은 사람은 자신의 이익은 물론 다른 사람과 사회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고 이를 향상시키기 위해 효과적으로 기술을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IQ가 높은 사람은 똑똑하다고 하고 EQ가 높은 사람은 공감적이라고 한다면 DQ가 높은 사람은 현명하다는 것이다. AI 시대에 인류가 계속 주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여덟 가지 DQ역량을 주창하고 있다.



 

저자는 또한 디지털 우리가 시민의식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한다. 디지털 시민의식은 디지털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개인의 기본 능력으로, 특히 어릴 때 이 역량을 키워야 한다. 아이들이 디지털 세계를 경험하기 시작할 때 초대한 빨리 시민의식을 배우기 시작해야 한다. 게임, 소셜미디어, 스마트폰 폰은 디지털 기기를 적극적으로 쓰기 시작할 때가 가장 좋은 시기다


개인에게 필요한 디지털 시민의식 역량 8가지는 아래와 같다.


- 디지털 시민 정체성: 현실뿐 아니라 디지털 세계에서도 자신의 잠재성과 정체성을 존중하는 역량

- 균형 잡힌 디지털 사용: 디지털 사용 시간을 스스로 자제하고 조절하는 역량

행동 디지털 위험 관리: 사이버불링, 악플 등 온라인 행동 속 위험에 주도적으로 대처하는 역량

- 개인 디지털 보안 관리: 스팸, 피싱, 해킹 등 디지털 보안 위협을 경계하고 개인정보를 보호하는 역량

- 디지털 공감: 디지털 세계에서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마음에 공감하는 역량.

- 디지털 발자국 관리: 디지털 발자국이 자신과 타인에게 미칠 수 영향을 이해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역량

- 미디어 및 정보 리터러시: 가짜 정보와 뉴스에 현혹되지 않고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참여하는 역량

- 사생활 관리: 사생활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자신 및 타인의 사생활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역량

 

어릴 때 디지털 문화를 경험하지 않은 부모나 교사들은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의 시대에서 성장한 세대와 디지털 세대차가 날 수밖에 없으며 아이들에게 디지털 역량을 어떻게 적절하게 준비시켜야 하는지 잘 모른다는 게 큰 문제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기술 중독, 사이버 불링(cyber bullying 인터넷상의 집단 괴롭힘), 온라인 그루밍 같은 디지털 위험에 자주 노출되고 있는데 이 위험은 오프라인으로 이어지는 심각한 결과가 발생하기도 한다.


저자는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 우리아이들에게 필요한 디지털 역량을 키우기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7장에서 디지털 시민의식에 대해 상술하며, 8장에서는 개인과 학교, 기업, 국가에 제언하고 있다. 저자는 특히 국가 단위의 노력이 절실하다고 했다. 그는 2020년 새로운 국가 수준의 지수인 아동온라인안전지수(COSI:Child Online Safety Index)를 개발했다. COSI는 국가가 자국 아이들의 온라인 안전과 디지털 시민의식 상황을 더욱 잘 살필 수 있도록 돕는 세계 최초의 실시간 분석 플랫폼이다. COSI는 특정 국가의 현재 디지털 생태계가 모든 아이들이 디지털 미래에 안전하게 확실히 잘 사는 동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는지를 평가한다. 모든 아이들을 위해 다음의 목표가 적용되어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다시, 첫 장의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면 교육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교육이란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진정한 자신의 정체성, 진자 잠재력, 바깥 세상에 숨겨진 새로운 기회를 볼 수 있는 것이 먼저라고! 디지털 기기를 제 몸처럼 사용하는 요즘 아이들을 위해 지난 10여 년 간 자신이 연구하고 만들어낸 것들을 이 책에 모두 실었다. 디지털 안전을 보장하는 디지털 윤리 원칙을 정하고, 국가는 디지털 세계에서 아이들을 보호하고 역량과 리터러시를 길러주는 교육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 책이 여러분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아이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그래서 우리가 함께 미래를 꿈꿀 수 있기를 바란다또 누가 알겠는가. 10년 뒤에 우리가 어디에 있을지." - 프롤로그 인용

 



**위 리뷰는 김영사 서포터즈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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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작 사부작 소녀의 드로잉
NARIM(나림)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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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튜토리얼 북은 드로잉을 위한 재료 소개와 그리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요.




완전 초보라도 색연필만 준비해서 나림 작가의 설명대로 죽죽 그려보면 됩니다.

기초연습이 끝나면 눈코입 연습해야겠지요?

직접 시연한 그림과 그 아래 설명이 있기 때문에 그대로 하면 되는데요... 눈동자 표현, 사실 초큼 어렵습니다. 책처럼 되려면 연습 많이 해야될듯요~~ 

​입술도 눈동자만큼 어려웠는데요, 볼륨감을 살리는 게 어렵더라구요.





눈코입에 메이크업 하는 과정도 세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요, 여자들은 화장을 해봤기 때문에 색연필로 재미있게 해볼 수 있을 거여요~~

⬇️ 저는 눈 메이크업만 해봤어요.



두상도 정면 측면 반측면 연습후, 반측면 소녀그리기에 도전해봤습니다.

헉... 눈이 몬가 어색? 아니 좀 못된 소녀같아요.ㅠ 비율을 맞추기가 생각보다 어렵더라구요.


헤어스타일과 액서세리도 다양하게 연습해볼 수 있어요.

튜터리얼북 4장에서는 컬리링하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요.



⬆️ 완성 그림 아래엔 색연필 색상을 소개하고요, 6단계에 거쳐 컬러링 방법을 설명합니다. 앞부분 드로잉에서도 그렇고 컬러링 파트에도 설명이 자세히 되어 있어서 쉽게 따라할 수 있어요.



주제별로 다양하게 안내하고 있는데요, 마음에 드는 것 먼저 따라 그려보거나 컬러링북으로 넘어가서 색칠해봐도 돼요.


컬러링북에는 39개의 소녀 그림이 있습니다. 매일 하나씩 한다면 한달은 넘게 걸리겠죠. 다 색칠하고나서 스케치북에 직접 드로잉한 후 색칠까지 해본다면 분명 실력이 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튜토리얼 북을 보며 눈코입 따로 연습을 더 해보면 더더 잘 그리게 될겁니다. 단, 꾸준히 계속 연습해야 한다는거~~ 저처럼 씅질 급한 사람들, 한두번 그려보고 확! 책 덮으심 안됩니다! 사실 저, 홍채 표현하다가 뒷목 몇번 잡았거든요~ 

저는 머리색깔 다른 것들로 골라 색칠해보았습니다. 컬러링북엔 스케치가 되어 있기 때문에 색칠만 하면 됩니다.(오른쪽이 제가 색칠한 것입니다)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며 색칠했네요. 예쁜 소녀얼굴 색칠하니까 기분도 좋아지라구요. 기분 좋아지는 몰입감을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 <사부작사부작 소녀의 드로잉>을 추천합니다!!





**위 리뷰는 컬처블룸 서평단에 당첨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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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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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영의 자리>1인칭 주인공 시점임에도 주인공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주인공의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 백수가 된 여자 주인공이 약국 전산원 자리의 면접을 보러 가면서 소설이 시작된다. 면접 당일, 주인공은 사장이랄 수 있는 김약사로부터 유령으로 지목당한다. 유력이 뭐냐고 묻자 김약사는 파안대소한다.




산사람도 유령이 될 수 있다는 김약사의 말은 주인공이 면접을 보러오기 전 승용차에 치었던 사건을 오버랩시킨다. 운전자가 다쳤냐고 물으면서 병원에 가자고 했지만 주인공은 면접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다친데 없다며 그냥 가려고 하자 운전자는 자신의 명함을 건네며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한다. 분명 차에 치었는데 찰과상이나 멍 하나 없이 멀쩡한 것은 김약사의 유령이란 명명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셈이다.


산 사람도 유령이 될 수 있다는 김약사의 단정은 소설을 읽는 내내 무엇이 유령의 조건에 부합가능한 것인지 찾게 만들었다. 유령의 과 제목의 영은 발음이 유사하나 뜻은 다르다. 소설 속에서 유령과 숫자 영의 상관관계를 찾아보며 읽는 것도 한 방법이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영에 어떤 숫자를 더하면 영은 사라지고 그 숫자만 남습니다. 영에 어떤 숫자를 곱하면 그 숫자를 영으로 바꿉니다. 아무리 많이 늘어놓아도 영은 영 외에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숫자에 기댈 때 영은 우주의 단위가 될 수 있습니다.”


영이 아무리 많아도 영은 영이 될 뿐이라는 말은 유령같은 존재들만 있다면 이 세상은 유령도시가 될 것이라는 뜻으로 읽혔다. 소설은 약국에 취직한 주인공의 생활을 세세하게 좇으며 약국에 근무하는 김약사, 조부장, 주인공 양실장의 모습, 손님들과 주인공 부모를 비춘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일상처럼 서술되지만 손님을 포함한 각 인물들의 미세한 삶이 보인다. 그들의 가치관은 행동과 대사를 통해 드러난다.


먼저 김약사는 아닌 것처럼 포장하지만 제약회사 영업사원과 직원들에겐 갑질하는 사람이다. 의사들이 영업사원에서 갑질한다는 사실은 개인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는 친구에게 들은 적이 있지만 약사도 그럴 줄은 몰랐다. 자신들의 갑질이 당연한 권리인양 착각하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 김약사의 갑질은 직원 조부장과 양실장에게도 유사하게 작동되는데 자신의 행동이나 말이 갑질이라는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김약사는 수다스럽다. 약국에 단골로 오는 손님들의 사생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김약사는 그들의 정보를 직원에게 말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일에 필요한 단순한 정보 제공으로 보이지만 평가와 비난을 교묘하게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조부장과 양실장에게도 거침없이 사생활을 묻고 조언을 가장한 지적질을 한다. 대장암에 걸린 조부장 아버지의 안부를 수차례 물으면서 아버지 위암 괜찮으시냐고 말한다. 영혼 없는 질문인 것이다. 김약사는 면접 보러온 주인공에게 대뜸 유령이라고 했지만 가장 유령 같은 존재는 김약사였다.


약국 외의 공간적 배경은 간헐적으로 나오는 주인공의 본가다. 주인공은 독립하여 원룸에 살고 있지만 주말이나 명절에는 부모님 집에 가서 지낸다. 부모님 집 방문에 효도 같은 의미 부여를 하진 않고 습관처럼 다녀오지만 감정적 소통은 없다. 즉 몸만 그곳에 머물 뿐 영혼 없는 행동에 가깝다. 특히 주인공은 엄마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버겁다.


p.135


어머니는 아버지와 다투고 나면 꼭 나에게 오서 하소연했다. 한때는 어머니와 같은 나라의 주민이라고 생각했다. 귀담아듣고 연민했으며 언젠가 상황이 나아지리라 믿었다. 몇 년쯤 똑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들은 뒤에야 어머니에게 딸이란 약국에서 구입하기 쉬운 약과 같다는 걸 알았다. 수시로 복용해도 병세의 원인이 다른 데 있었기에 차도는 없었다. 그저 진통제에 불과했던 약의 역할을 거부했더니 어머니의 한탄은 비난으로 바뀌었다. 나는 점차 침묵을 모국어처럼 사용했다.



딸에게 하는 말을 대화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딸과의 소통이라 여기지만 실은 딸을 배설창구로 사용하는 것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친구같이 가까운 사이라 여겨지는 모녀 지간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했는데 소통이 잘 안 되는 인간관계의 전형적인 모델이다. 이처럼 소통과 대화라는 그럴싸한 외피를 벗기면 관계의 우위에 있는 사람의 갑질이 들어있는 경우가 많다. 주인공이 습관처럼 부모를 만나고 와도 그 시간이 만족스러워 보이지 않는 이유다.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도 이러한데 다른 사회적 관계에서는 어떨까.


작가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관계를 맺고, 관계와 관계 속에 사람이 있다 고 표현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관계를 맺고 살아가며 자랄수록 관계의 수는 많아지고 복잡해진다. 작가는 관계 속에 사람이 있다고 했지만 유령 아닌 사람이 있는, 진심이 있는 관계는 얼마나 될까? 작가는 수많은 0들이 다른 숫자에 기댈 때 0이 우주의 단위가 될 수 있다고도 했다. 수많은 0.0000001들이 그 관계 속에서 기댈 수 있게 되길 바라며 이 소설을 쓴 듯하다.


몹시도 협소한 약국이라는 공간적 배경 속에서 뭐 그리 많은 이야기가 있을까 싶었지만 약국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속속들이 보여주었다. 평소 돈을 지불하고 처방약을 타거나 필요한 약품을 받아 나오는 시간이 짧기 때문에 그 공간 안에 숨은 이야기가 그리 많을 줄 몰랐다. 근무한 지 달 밖에 안 된 전산 직원이 조제를 하고, 영업사원이 약국에 컵라면 같은 소소한 것들을 사다 바치면서 결제를 받으려고 줄을 서서 굽신거려야 한다는 사실과 손으로 만지면 불임이 되는 약, 후시딘과 마데카솔의 효능 차 같은 깨알 정보도 알 수 있었다. 작가가 옮겨다닌 일곱 번의 직장 중 한 곳이 약국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쓸데없이 궁금한 것이 있었다. 작가가 시리에게 영 나누기 영은?” 이라고 물어봤을 때 정말 그렇게 답했을까? 내 폰이 아이폰은 아니지만 물어봤다. “영 나누기 영은?” 난센스 퀴즈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사칙연산까지 할 필요도 없이 더하기만 생각해보자. 내가 소수점 저 끝에 1이라도 달고 있다면 0과 더했을 때 0은 아니게 된다. 관계 속에 기댄다는 건 덧셈이고 나 자신이 0이 아닌 0.0000001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위 리뷰는 하니포터 자격으로 한겨레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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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책 읽기 - 책 좋아하는 당신과 나누고픈 열 가지 독서담
윤성근 지음 / 드루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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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가제본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책 읽기>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운영하는 작가 윤성근씨의 신간이다. 그는 모든 일상이 책인, 한마디로 책에 빠져 사는 사람이다. 내가 그를 만난 건 십 몇 년 전 쯤 한겨레 신문 기사를 통해서였다. 흥미로웠다. 그 후로 그가 출간하는 책들은 거의 섭렵했다. 나는 앨리스처럼 그의 읽기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그가 소개하는 책들을 찾아 읽느라 바빠졌고 지갑은 가벼워졌지만 내면의 충만감에 만족스러웠다.

 

이번 책은 절판된 자신의 책 <나는 이렇게 읽습니다>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서두에 밝혔다. 이번엔 새로운 방식으로 썼으니 굳이 전작을 찾아 읽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전작은 자신의 읽기 방법론에 대한 것이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당시 내가 하던 일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상한 나라의 책 읽기>는 가제본 서평단에 당첨되어 받았는데 책 전체 분량은 아니다. 크게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제본에는 4장까지만 들어있다.

 

사람을 읽는다’ ‘재미로 읽는다’ ‘빠르게 읽는다’ ‘느리게 읽는다

 

각 장마다 5개의 소챕터로 나누었고, 각 챕터는 대표 사유를 위한 책과 작가를 제목으로 내세운 후 더 다양한 책들로 확장시키거나 자신의 취향이나 책 읽는 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하나의 챕터만으로도 꽉 찬 느낌이 든다. 장서가요 다독가로서의 면모가 뽐을 낸다. 책 좀 읽었다 할 사람도 그가 소개하는 다양한 작가와 책의 세계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독일어 좋아하는 작가는 이번에도 독어권 작가를 꽤 다루었다. 하이데거의 <숲길> 강독회를 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아마 자신은 원서를 읽지 않았을까 싶다. (여담이지만) 그는 어느 책에서 독일어 사전 읽기가 취미라고 한 적이 있다. 만약 무인도에 간다면 가져갈 목록 중 하나가 독어 사전이라고 할 정도로.

 

4장 마지막 문장에서 그는, 느리게 읽는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재정리하면서 책에 빠진 사람은 책에 빠져봤던 사람이 잘 안다고 했다. 독자에게 자신의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알 것이며, 똑같은 경험도 있으리라고 했다.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이렇게 4장에서 딱 잘라버린 출판사가 원망스러웠다.

 

세상 모든 것은 유튜브에서 다 찾아볼 수 있는 요즘, 책 한 권도 읽지 않아도 사는데 하나 지장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여전히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 종이책을 사랑하고 읽는 사람이 아직 있다. 그들은 멸종 위기종으로 불린다. 그러나 윤성근이라는 사람과 그의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고, 종이책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멸종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번 책에서 최정우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철학자이자 작곡가, 비평가, 미학자, 기타리스트라고 했다. 그의 책 <사유의 악보>를 소개받았는데 검색하다보니 신작에 더 관심이 갔다. <드물고 남루한, 헤프고 고귀한>이라는 제목인데 미학과 정치와의 관계를 썼다고 한다. 미학자라는 타이틀을 쓰고 있던 어떤 관종과는 다른 면이 있을까 궁금하다.

 

이 책의 장점이 많지만 앞에 쓴 글에 중복이 될 듯 하여 단점을 하나 말할까 한다. 금전출혈이 있을거라는... 책을 읽다보면 홀린듯 작가가 언급한 책을 찾아 읽고 싶은 아니 사고 싶은 욕구가 불끈 불끈 솟아오르게 되어, 자동으로 온라인 서점을 뒤져 장바구니에 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담아둔 후 깜빡하고 결제까지 하지 않는다면 다행?이겠지만, 바로바로 결제해버리는 성질 급한 사람들이라면 다음 달 카드 결제일에 손이 좀 떨릴 수도 있다는 점! 은 참고하시길~~

 

, 작가는 이 책에 몇몇 독자들에게만 허락된 기막힌 보물을 숨겨놓았으니 힌트를 찾아보라고 했다. 가제본을 읽으면서 못 찾았다... 5장이후에 있을까? 1~4장 안에도 있었는데 내가 눈치를 못 챈걸까? 갑자기 맘이 급해진다! 어서 정식본을 읽고 싶다.

 

@ 내가 고른 문장들

 

"무턱대고 읽는 책은 고여서 썩은 물처럼 냄새 나는 신념을 더 견고히 할 뿐이다. 그 냄새를 자신은 향기롭다 여기고 끝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한다면 차라리 책을 읽지 않는 게 그와 그가 속한 공동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길이다."

 

"재미없는 책을 읽게 되는 이유, 뭘 읽어야 재미있을지 몰라서 망설이는 이유는 책을 고를 때 내가 중심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골라준 책에 지나치게 관심 둘 필요 없다. 나만의 재미를 알게 되면 책은 내가 찾지 않아도 저 스스로 다가온다."

 

"엄청나게 많은 책을 짊어지고 사는 사람이 생각 외로 꽤 있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매번 만날 때마다 '아아,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여러분 중에서도 집에 책을 너무 많이 쌓아두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불안한 분이 있을 거다. 이제부터 그런 걱정은 접어두길 바란다. 얼마나 많은 책을 가지고 있든지 나보다 책 많은 사람은 언제나 상상이상으로 많고, 그들도 다 나름대로 잘 살고 있다."

 

"책을 더 느긋하게 읽기 위해, 나는 어떤 책이라도 부정적인 면에 더 초점을 맞춰 읽기를 권한다. 우리 시대가 고전이라는 말로 소개한 대부분의 문학 작품은 절망적인 세계관을 그리고 있다. 긍정에는 힘이 있을지 몰라도 부정에는 위대한 철학이 태어날 수 있도록 돕는 자양분이 있다는 걸 명심하자. 독자는 책 속에 있는 부정적인 말들로부터, 절망적인 생각들로부터 시대와 삶을 통찰하는 철학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긍정의 힘을 압도하는 부정과 절망의 위대함이다."

 

"첵은 답을 찾기 위함이 아니라 질문하기 위해 읽어야 한다. 엉뚱한 질문 말고 야무진 질문을 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답이나 길은 오직 나 자신에게서 나온다. 그러므로 질문은 언제나 세상을 향해 나갔다가 나를 향해 돌아와야 한다. 책 속에서 질문을 찾고, 길은 삶을 통해 만들며 나아가야 한다. 한참 후에 돌아본 그 길은 온통 질문으로 가득한 숲길처럼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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