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대체 2000년이 오기나 올까 반신반의하는 심정이었다. 지구는 1999년을 끝으로 종말을 맞이할 것만 같았다. 실제 종말론을 펼치는 사이비종교도 있었고 Y2K바이러스가 컴퓨터를 오작동 시킬 거란 소문도 무성했다. 그러나 2000년의 해는 아무렇지도 않게 떠올랐고 우려했던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다. 1900년대 후반에 우리는 연도 앞에 붙을 2자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의 동의어라고 여겼다.
그런데 벌써 2000년이 시작된 지 21년이 지났고 지난 2년 동안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전염병의 시대를 살았다. 2년 후면 2024년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변이의 재창궐이 벌어지지 않는 한,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이 다른 지역으로 비화되지 않는 한, 2024년에도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는 세상일 것이다. 그런데 1993년에 2024년을 예상했다면 어땠을까?
1999년에 2000년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렸는데 1993년에 30년이나 지난 뒤의 지구를 예상한다는 건 SF적 상상력을 동원해야했을 것이다. 인간이 제 몸처럼 사용하는 스마트폰이라는 기계를 지금처럼 누구나 사용하게 된 것도 불과 10년 남짓이다. 미국 흑인 여성작가 옥타비아 버틀러(1947~2006)의 소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가 1993년에 2024년을 배경으로 쓴 작품이다. 그 당시에는 미래를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로 상상력을 자극할만한 소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김영사에서 출간된 이 소설을 읽으니 기분이 좀 묘했다.
기후 변화와 경제 위기로 무너진 국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거대 기업, 이방인을 차단하기 위해 장벽을 세우는 사람들, 신종 노예제도가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는 소설 속 2024년 미국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과 너무나 유사했기 때문이다. 작가의 전작 SF소설에 비해 이 작품은 현실적인 내용이라는 출판사의 설명을 보니 70~80년대에 쓰인 소설들이 어땠을지 궁금해졌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의 주인공 ‘로런 오야 올라미나’는 15살 흑인 소녀다. 로런은 ‘초공감증후군’이라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작가가 창작한 이 질병은 타인의 고통이 그대로 자신에게 느껴지는데 누군가가 칼에 찔리는 것을 보면 나도 그 통증을 그대로 느끼고 피가 흐를 정도가 되기도 한다. 목사인 아버지, 동생들과 함께 장벽 안에서 그나마 안전하게 지내던 로런은 어머니와 동생의 죽음, 다른 동생과 아버지의 실종으로 혼자가 되고 다른 소수자들과 연대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큰 줄거리이다. 2024년부터 2027년까지 4년의 시간을 로런의 일기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로런은 아버지의 종교를 떠나 ‘변화’를 신으로 믿는 ‘지구종Earthseed’의 창시자가 된다.
시적인 문장을 기록으로 남기는 로런의 글은 <지구종:산 자들의 책>에서 발췌한 것럼 인용되는데 아포리즘 같은 이 문장들이 지구종의 바이블의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그대가 손대는 모든 것을
그대는 변화시킨다
그대가 변화시킨 모든 것은
그대를 변화시킨다
변치 않는 진리는 오로지
변화뿐
변화가 곧
하느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