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뒤바뀐 삶, 설명서는 없음
게일 콜드웰 지음, 이윤정 옮김 / 김영사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날 뒤바뀐 삶, 설명서는 없음><개와 나>의 게일 버전이다. 이 책을 이렇게 정의내리면 캐롤라인 냅게일 콜드웰의 사이를 잘 아는 독자들은 눈가가 촉촉해지며 셰퍼트 루실을 떠올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개와 나>의 캐롤라인 냅은 물론이거니와 게일 콜드웰도 금시초문이라는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어느날 뒤바뀐 삶, 설명서는 없음> 자체로 당연히 작품 가치가 있으며 이 책을 읽은 후 <개와 나>를 찾아보게 될 것임이 분명하기에 두 책을, 또한 두 작가를 같이 언급할 수밖에 없다.


역자 이윤정씨가 옮긴이의 말에서 요약한 아래 내용을 읽은 독자는 그들을 세트로 알고 싶다는 욕구가 생길 것이다.



게일이 마흔네 살 때 여러 공통점(독신 작가, 알코올중독, 반려견 등) 덕에 급속도로 가까워져 친밀히 교류했던 캐럴라인 냅과는 서로 명랑한 은둔자’ ‘쾌활한 우울증 환자라고 부르며 반려견을 데리고 네 시간씩 산책하고, 수영하고, 조정을 했다. 그렇게 7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단짝이었던 두 사람은 게일이 70, 캐럴라인이 60대가 되어도 세른세 살이 된 두 반려견을 데리고 함께 산책을 하자며 말도 안 되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그토록 찬란한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면서 게일은 혼자 남았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책으로 게일의 글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이 많아진다면 더할나위 없이 기쁘겠다고 썼다. 아마 게일 콜드웰을 아는 독자보다 처음 접하는 독자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이 책으로 그를 처음 만나는 독자들은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인상적인 지점이 다를 것이다. 자신이 어떤 질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면 작가의 소아마비와 관절재건수술치료 과정에, 사랑하는 사람의 병수발을 하고 있거나 떠나보낸 경험이 있다면 작가가 부모님의 죽음을 지켜보는 지점에서, 반려견을 키우고 있다면 작가의 개 튤라 이야기에 심취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독자마다 제각각 다른 지점에서 공감하며 읽을 만한 책이다.


나는 작가가 튤라로 인해 경험한 난폭한 기적에 빠져들어 읽었다. 작가는 반려견 클레멘타인을 떠나 보내고 3개월 만에 튤라를 데려온다. 어쩌면 성급한 결정일 수 있지만 그는 당시의 공허함을 견딜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 여겼다. 나는 우리 고양이들을 태어난 지 두 달 정도 되었을 때 데려왔는데 아깽이 시절이 너무 짧아 제발 시간이 천천히 가라고 기도했다. 그래서 강아지 사모예드가 작가의 집에 와서 온갖 사고를 치고 작가의 팔뚝 여기저기에 상처를 내던 때를 서술한 부분에선 그저 엄마미소를 지으며 읽었다


작가가 고관절 전치환술을 받고 퇴원해왔을 때 튤라는 작가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곧 튤라의 후각이 감지한 제 주인의 고통과 지독한 병원의 냄새는 튤라를 뒷걸음치게 만들었다.


p.195


이게 누구야, 내 새끼 왔네!”라고 소리치자, 뒷문으로 들어온 튤라가 듣고는 귀를 뒤집은 채 행복한 모습으로 내게 달려왔다. 처음에는 흥분해서 내 얼굴을 마구 핥더니, 내게서 어떤 냄새가 훅 하고 났는지 갑자기 겁에 질린 듯 다른 곳을 보면서 꼬리를 아래로 내리고 낸시 뒤로 숨었다. 내가 계속 말을 걸고 이름을 불러도 튤라는 귀를 납작하게 젖히고는 내 눈을 피하며 마치 포식자를 맞닥뜨린, 피와 트라우마의 냄새를 풍기는 만신창이 인간을 마주한 듯 굴었다. 그러더니 이내 뒷문으로 내뺐다.




가늠할수 없는 작가의 치료과정이 편하게 읽히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 튤라의 이야기에 미소지으며 읽었듯 작가의 삶에 튤라가 없었다면 이런 글을 써내지 못했으리라 감히 예상해 본다. 그리하여 웨스트포트의 파도를 능수능란하게 타는 튤라의 모습을 보며 작가가 계속 춤을 추겠다고 다짐했듯 나는 웨스트포트 해변에 함께 서있었다. 9월의 대서양을 바라보며 맨발의 발가락 사이로 전해오는 따뜻한 모래를 느끼면서...


이 책의 마지막에는 친절하게 더 생각해볼 거리들을 짚어주고 있다. 주어진 질문들은 게일 콜드웰처럼 지난 시간을 회고하며 추억을 떠올려 볼 수 있도록 한다. 독서모임에서 이 책을 읽는다면 따로 발문을 만들 필요 없이 주어진 10가지의 질문 중에 한 두 개만 골라 같이 이야기 나누어도 알찬 독서모임이 될 것이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드리 헵번처럼
멜리사 헬스턴 지음, 오현아 그림, 카일리 박 옮김 / FIKA(피카) / 2022년 6월
평점 :
절판




"나에겐 나의 진짜 이미지가 없어요내 이미지는 대중의 눈에 의해 결정되죠."

 

대중은 배우가 맡은 역할이, 만들어진 모습이, 배우 자신일 거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배우의 이미지와 실체가 동일하지 않음을 알 수 있지만 사람들은 그냥 믿고 싶다. 이것을 오드리 헵번은 잘 알고 있었기에 위처럼 말했을 것이다.

사망한지 30여 년이 지났어도 스크린에서는 영원히 살아있는 배우 오드리 헵번은 여전히 다양한 미디어로 재생산되고 있다. 책 <오드리 헵번처럼>은 그녀의 열혈 팬인 ‘멜리사 헬스턴’이 자서전 집필을 위해 5년간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출간했으며 부제는 ‘오드리 헵번이 들려주는 10가지 인생 조언’이다. 일종의 어록인 셈인데 ‘행복, 성공, 건강, 사랑, 가족, 우정, 성취, 스타일, 명성, 인간성’까지 모두 10개의 장으로 구성했고, 주위 인물들의 말도 실었다.

보통 배우의 이름을 언급했을 때의 반응에 호불호가 있기 마련이지만 오드리 헵번을 싫어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녀의 미모에 반해서, 맡은 역할이 마음에 들어서, 유니세프 친선대사 활동 때문에 등등 우호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대중들에게 각인된 그녀의 이미지가 긍정적이었다해도 그녀의 삶에 어찌 고난이 없었을까. 영화 <로마의 휴일>로 단숨에 세계적인 스타 자리에 오른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언론들이 뒤쫓았고 그녀는 일상의 자유를 제한받았다. 사실 그녀는 어렸을 때 전쟁이라는 큰 시련을 겪었다. 세계 2차대전의 참화를 몸소 겪었기에 노년에 유니세프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고통 받지 않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길 바랐다. 물론 자신의 두 아들을 끔찍이 사랑했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이라 여겼다.

이런 개인적인 일상에서 언급한 것을 포함하여 배우로서 활동하며 했던 언론 인터뷰, 지인들과 나눈 대화, 영화계 인물들의 평가 등에서 추려낸 말을 이 책에 10개의 키워드로 정리했다.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배우로서의 성공과 결혼으로 이어지기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일생을 만나볼 수 있다. 그녀의 팬이라면 책의 구성이 너무 듬성듬성하다는 불만을 가질 수 있겠으나 이름과 얼굴만 아는 정도의 독자라면 오드리 헵번의 생각과 가치관을 알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그림은 또 하나의 선물이 될 것이다. 일러스트 작가 오현아씨가 오드리 헵번의 미공개 사진 70여점을 그림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나는 오드리 헵번의 덕후까지는 아니어도 그녀의 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중학교 때 <로마의 휴일>로 그녀를 처음 만나 홀딱 반했고, <마이 페어 레이디>와 <사브리나>를 보며 남자주인공이 왜 이렇게 늙었냐며 투덜거렸다. 7년 전인가, 오드리 헵번 어린이 재단에서 했던 전시회 <BEAUTY beyond BEAUTY>를 통해 그녀의 삶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고 그녀 매력에 더욱 빠져들었다. 당시 굿즈로 발행된 사진집에는 그녀의 일생과 발언, 그간 접하지 못했던 사진들이 대거 수록되어 있다.


↑오드리 헵번 하우스 'LA PAISIBLE'

<오드리 헵번처럼>을 읽으며 다시 꺼내 비교하며 읽었다. 사실 <오드리 헵번처럼>에 나오는 일러스트는 모두 이 사진집에 있는 것들이라서 내게는 미공개 작품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진집을 본 적 없는 사람이나 그녀의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처음 보는 그림일 것이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오드리 헵번의 패션 동반자, 지방시


이제 그녀가 한 말을 옮긴다. 독자들은 자신의 상황에 딱 들어맞는 조언이라며 반가워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원하던 삶이었다며 그림 속 그녀에게 하이파이브를 할지도...

"나의 가장 큰 야망은 커리어 우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커리어 그 자체를 갖는 거예요."

"상대의 외모는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만약 상대가 ‘따뜻함’이나 ‘매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규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으로도 나는 사랑에 빠지고 그에게 편안함을 느낄 거예요."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은 내가 평생 동안 꿈꾸던 거였어요. 그리고 결국 그 순간이 내게 왔죠. 그 순간이 좀 더 빨리 찾아왔었다면 정말 멋졌을 거예요. 내가 서른 살이 됐을 때 그 멋진 순간이 찾아왔고, 오랜 기다림 후에 온 순간이라서 더 큰 기쁨이었어요."

"사람들이 진짜 두려워하는 건 노화나 죽음, 외로움이나 애정 결핍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진정으로 찾고 싶은 건 살면서 느끼는 애정, 외로움 그리고 놓친 것들의 균형 같은 거예요."

"즐거움을 주고, 아름다움을 창조하며, 양심을 깨우고,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고,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이 폭력적인 세상에서 잠시라도 안식을 주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사람들은 내가 나온 영화가 재미있을 때, 영화 속에서 여자들이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나올 때, 영화 속에서 좋은 배경 음악이 나올 때, 자신과 그 영화를 동일시하곤 해요. 사람들이 내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당신의 영화를 보고 기분전환이 됐어요.’라고 말할 때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어요."

"유니세프의 임무는 모든 어린이를 기아, 갈증, 질병, 학대, 사망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에요. 하지만 오늘 날 우리는 훨씬 더 큰 위협을 받고 있어요. 이기심, 탐욕, 공격성으로 우리는 하늘을 오염시키고, 바다에서 생물이 살지 못하도록 하며, 숲을 파괴하고, 수천마리의 아름다운 동물을 소멸시키고 있어요. 우리 아이들이 다음 희생자가 되는 건 아닐까요?"

[주위 사람들의 말]






🙀😱 마지막으로 그녀의 망언?으로 한 번 웃자!


"나의 스타일은 누구나 따라 할 수 있어요. 헤어스타일을 따라 하고, 알이 큰 선글라스를 끼고, 민소매 드레스를 입으면 누구나 오드리 헵번이 될 수 있어요."



그녀처럼 큰 선글라스 끼고 민소매 드레스 입었을 때 저런 비주얼 되는 사람?? 손!!

우리를 현실자각하게 해주시는 여신님의 발언!ㅎㅎㅎ



**위 리뷰는 네이버카페 문화충전200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재천의 공부 - 어떻게 배우며 살 것인가
최재천.안희경 지음 / 김영사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재천 교수의 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읽기에 김영사 서포터즈 도서로 올라온 것을 보고 당연히 신청했다. 교수라는 직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배우며 살 것인가라는 부제를 달고, 제목에도 떡하니 공부라는 단어를 집어넣은 책을 집필했는데 이렇게 재미있다니! 그는 10여 년 전부터 이런 책을 꼭 쓰고 싶었다고 했다.


"우리 아이들에게 삶을 즐길 권리를 되찾아줍시다.”

이땅의 모든 부모님들을 불러모아 촛불을 들고 싶다고 하면서 부모 세대가 받은 교육을 그대로 대물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걸맞는 교육을 하자고 주장했다.


이 책은 놈 촘스키, 재레드 다이아몬드, 장 지글러, 리베카 솔닛, 마사 누스바움, 이해인 수녀 등을 인터뷰한 안희경 저널리스트와 최재천 교수가 1년 여에 걸쳐 나눈 대담을 토대로 출간되었다. 여러 인터뷰집을 읽어봤지만 이렇게 몰입해서 단숨에 읽어 내린 책은 처음이었다. 안희경 작가의 밀도 높은 질문과 최재천 교수의 진솔하고 열정적인 답변이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 책으로 삶 전체가 공부임에도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최재천 교수의 인생관을 알게 되었다.


공부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쓰려니 오버하는 거 아니냐는 퉁박이 들리는 듯 하다. 그러나 나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시작하자마자 최교수는 교육부를 없애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며 교육부가 우리 사회의 교육 문제를 얽히고설키게 만든 주범이라고 했다. 이 내용을 읽는 순간 교육부를 없애겠다는 발언을 한 현 대통령이 떠올라 얼굴이 찌푸려졌다. 예전에 학생들을 산업 역군을 양성하던 시대로 되돌리려는 교육의 기역자도 모르는 자는 이런 책을 읽고 공부 좀 해야 한다. 어쨌든 시작부터 내 기분은 다운되었지만 그런 자 때문에 감정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최재천 교수가 말하는 아이들에게 삶을 즐길 권리를 어떻게 되찾아 줄 수 있을지 얼른 확인하고 싶었다.


수포자였던 그가 하버드에서 수학을 잘 하게 된 사연과 이화여대에서 15년째 인기 강좌인 환경과 인간을 수강한 학생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점점 기분이 업되어갔다. 내가 이대 학생이 된 듯 막 신이 났다. 나는 중학교 때 물상은 싫어했고 생물은 좋아했었다. 생물과 지리과목을 좋아했는데 나도 환경과 인간을 수강했다면 그 두 과목을 콜라보하여 분과위원회를 만들어서 즐겁게 참여했을 것 같았다. 미국과 한국의 교수집단이 중시하는 것의 차이점을 보니 두 사회가 중요한 가치를 어디에 두는지 명확하게 비교되었다. 코로나 이후로 우리 사회도 서서히 변화되어 가고 있지만 더디다.


최교수는 자신의 우선순위는 혼자 연구하는 시간이라고 했다. 안작가는 이에 긍정심리학자 칙센트미하이 선생의 말을 인용한다.


창의력은 혼자서 몰입한 시간이 만들어낸다.”

여기에 최교수는 행운을 보태고 싶다며 이렇게 말한다.


"운이 좋다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요, 혼자 있는 시간을 누릴 수 있다는 조건과 그 시간을 제법 잘 운용했다는 데 있어요. 혼자 생각하다 보면 완전히 엉뚱한 데로 빠지기 쉬운데 보편적 범주 안에서 남들이 생각하지 않는 조금 다른 발상을 했다는 것이 다행스럽고 고마움을 느낍니다."


이렇게 홀로 있으면서 창조적인 활동의 결과물을 낼 수 있었다는 말에 공감했지만 다음에 나오는 말, “1주일 앞서 한다!” 에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그는 계획하고 정돈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버드에서 튜터를 할 때 만난 학생을 보고 자신도 따라하면서 바뀌었다. 그 학생은 5일 후에 제출할 리포트를 써야하기 때문에 회식에 참여할 수 없다고 했다. 5일전에 미리 끝내고 틈날 때마다 리포트를 다시 들여다보며 조금씩 고치는데 그러면 질이 좋아질 뿐 아니라 돌발 변수가 생겨도 대처할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최교수는 미리 한다가 습관이 되도록 노력했고 35년 간 1주일 전에 미리 마감해둔 습관은 엄청난 생산성이 되어 돌아왔다.


나는 교수도 아니고 작가도 아니면서 책 리뷰를 쓰면서 늘 마감에 허덕인다. 그들만큼 일이 많진 않지만 책 욕심에 서평단용 책을 너무 많이 받아 놓았거나 집안 일이 생겨서 책 읽을 시간을 뺏기게 되면 리뷰는 자꾸 뒤로 밀리게 되면 마감일에 턱걸이 하게 된다. 미리미리 해두면 여유롭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앞의 변명적 상황들이 겹치다보니 마감 날짜까지 끌고 가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할 일이 어마무시하게 많은 교수도 1주일 전에 마감한다는데 난 뭔가 싶어 부끄러웠다. 이제 1주일 전 마감으로 습관을 들여야겠다.


최교수는 하버드에서 배운 리포트 쓰기를 자신의 수업에도 적용했는데 미국학생들과 달리 한국학생들은 너무 버거워했다. 우리나라는 고등학교 때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대학가서 설렁설렁 하는 문화가 있다는 게 여실히 확인되었다. 그의 수업에서는 쓰지 않으면 학점을 제대로 받을 수 없다. 에세이 11편을 써서 실수한 하나가 있다면 뺄 수 있다. 10편을 쓴 사람보다 11편을 쓴 사람이 더 여유로울 수밖에 없다. 그는 학생들에게 작은 인생을 한번 살아본다고 여기고 잘해보자고 독려한다.


교수라면 엄청난 양의 독서를 할 것 같은데 그는 아니라고 했다. 이 부분에서도 놀랐다. 나는 책 욕심과 지적 허영의 강박 때문에 다독하려고 애쓴다. 속독하게 되니 꼼꼼하게 읽지는 못하는 편이다. 물론 이번 책처럼 줄긋고 메모하며 읽는 경우도 있지만. 최교수는 입으로 읽기 때문에 속도가 느리다고 한다. 배우처럼 연기하며 읽기 때문에 잘 기억한다는 것이다. 10여 년 전 서고를 개방하면서부터는 책에 직접 메모하지 않고 포스트잇에 쓴 후 떼어낸단다. 엄선한 책을 숙독하며 깊게 소화한다. 이렇게 자신의 독서법을 소개한 후 독서는 빡세게 하는 거라고 말한다.


p.144~146


독서는 일입니다. 빡세게 하는 겁니다. 읽어도 되고 안 읽어도 되는 책을 그늘에 가서 편안하게 보는 건 시간 낭비이고 눈만 나빠져요. 책은 인류의 발명품 중에서도 최악의 발명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은 3차원을 보게끔 진화했어요. 책은 평면에 글자를 새겨서 만든 2차원 물건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눈이 아파요. 책은 눈을 망가뜨린 원흉이에요.

우리는 기획서를 작성해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치밀하게 기획해서 공략해야죠. 한 번도 배우지 않은 분야의 책을 공략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한 번도 배우지 않았는데 술술 읽힐까요? 난생처음 붙든 양자역학 책의 책장이 척척 넘어갑니까? 진화심리학이 하도 뜬다니까 좀 읽어 봐야지라고 생각하곤 붙잡았는데, ‘! 잘 읽히네!’ 하면 거짓말이에요. 당연히 안 읽힙니다. 그런데 그 책을 있는 힘을 다해서 끝까지 읽고, 또 비슷한 진화심리학 책을 사서 읽다보면, 세 번째 책은 참 신기하게 술술 넘어갑니다. 어느 순간 그 주제가 내 지식의 영토 안으로 들어와요

(……)

독서를 일처럼 하면서 지식의 영토를 계속 공략해 나가다보면 거짓말처럼, 새로운 분야를 공략할 때 수월하게 넘나드는 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날이 오면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우실 거예요. 100세 시대에 20대 초반에 배운 지식으로 수십 년 우려먹기가 불가능합니다. 학교를 다시 들어갈 게 아니라면, 결국 책을 보면서 새로운 분야에 진입해야 하죠. 취미 독서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독서는 기획해서 씨름하는 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책을 못 읽는다는 건 변명이고, 쉽고 가벼운 책만 읽겠다는 취미생활은 필요없다는 단호한 일성을 들으니 느슨해졌던 마음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일을 시작하며 그전보다 확연히 시간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나, 절대 시간을 채우고 있다는 합리화를 위해 말랑한 e-book을 읽던 짓이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기획해서 씨름하듯 읽는 일은 힘들고 피곤하다. 안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최교수의 말처럼 대학공부를 다시 시작하지 않을 거라면 책이 도구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지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가장 싸고 쉬운 방법이 독서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편하게 손에 쥐었던 책들보다는 전혀 접하지 않았던 책들을 기획하여 일처럼 읽어보기를 시도해야겠다. 그 시작은 물리학 서적으로! 좀 두렵지만 도전할 것이다.


동물 세계에는 선생님이 없다. 엄마 침팬지는 새끼 침팬지를 가르치지 않는다. 가르침은 없이 배움만 있다. 새끼 침팬지는 옆에서 그냥 보고 배운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를 너무 가르치려고 한다. 침팬지가 배우듯 몸으로 익히면 긴 인생에 훨씬 더 강력한 학습이 될 텐데, 급하게 욱여넣으려고 애쓰고 있다고 최교수는 말한다. 우리가 교육하는 이유는 사회에 진입할 사람들에게 이 정도는 최소한 알아야 원만히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 거라면 아주 기본적인 배움을 합의해내는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p.335


요샛말로 뭣이 중헌디예요. 늘 국영수만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의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학교에서 이 내용을 가르치지 않고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요? 코로나19같은 대재앙이 일어나지 않게끔 기본적 훈련을 교육이 담당하지 않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이런 재앙을 겪을 거예요. 국영수만 잘해서 잘 살다가 와장창 무너졌다가, 또 국영수를 하고 좀 잘 살다가 와장창 무너지는, 이런 방식으로 살아야 할까요? 우리가 정말 원하는 삶은 늘 평탄하게 즐겁게 사는 것 아닌가요.



출신 고등학교와 수능 성적이 한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고, 대학교 잠바가 마치 계급을 결정하는 옷처럼 된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안작가가 물었을 때 최교수는 자신의 학력 세탁을 이야기한다. 하버드 대학을 선택하게 된 드라마틱한 과정에 놀랐다가 하버드 졸업장이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는지를 재확인하며 공고한 학벌사회에 씁쓸했다. 문학작품도 아닌 책을 읽으며 이렇게 감정이 요란스레 널뛴 적은 없었다. 우리의 교육 현실과 답답한 교육 관료들의 모습을 보면 언짢았다가, 그래도 희망 담은 미래를 제시하면 머릿 속에 환하게 밝아졌다. 최교수가 공부했던 과정을 읽으며 마치 내가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것처럼 뿌듯했고, 교수로서 자신의 연구 성과보다 제자들을 위하는 모습에 감탄했다.


이 책의 제목에 공부가 들어갔다고 해서 학생들만 읽어야 한다고 여길까봐 살짝 걱정된다. 워낙 유명한 교수인 최재천이라는 이름이 들어있으니 학부모나 교사들은 읽어볼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은 아이어른 할 것 없이 누구나 읽으면 좋겠다. 산다는 건 무엇이든 알아가는 과정이고, 특히나 요즘은 나이가 들어도 계속계속 공부해야 하는 시대다. 공부라는 단어가 주는 거부감이 없진 않으나 새로운 것을 접하고 배우는 과정이 주는 기쁨도 분명 있다. 이 책을 통해 많은 이들이 공부하는 삶의 즐거움을 알길 바란다. 최교수는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먼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악착같이 찾으라고 말한다. 하다가 내 길이 아니라는 걸 발견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마지막으로 최교수 부부가 서로에게 활력을 주는 사이라고 한 부분은 부부관계를 너머 모든 인간관계에 해당되는 것 같아 인용하며 이 리뷰를 마친다.


p.293


서로의 뜻을 존중하며 살고자 하는, 삶이 지닌 본연의 가치를 배움 속에서 다져왔기 때문일 겁니다. 서로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데는 바로 그 존중이 바탕으로 자리 잡혀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상대를 바라보면 각자가 뿜어내는 가치가 보입니다. 현대 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다양성의 가치도, 바로 그곳에서 시작됩니다. , 저마다의 삶 속에 저마다의 공부가 있습니다.





**위 리뷰는 김영사 서포터즈로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좀비, 해방의 괴물 - 팬데믹, 종말, 그리고 유토피아에 대한 철학적 사유
김형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좀비, 해방의 괴물>은 문화연구자 김형식씨의 신간이다. 그는 2020년에 좀비를 혁명적으로 재사유한 <좀비학>을 출간했는데 이번 <좀비, 해방의 괴물>을 통해 팬데믹을 둘러싼 사회현상, 담론, 장르영화와 소설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이번에도 제목에 좀비가 들어간 것처럼 좀비 영화와 소설을 바탕에 두고 다양한 철학적 담론들을 끌어와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를 지나오는 우리 시대에 사유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한다.


1장에서 8장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긴 하나 각 장의 제목과 소제목을 보고 관심 가는 분야를 먼저 읽어도 괜찮다. 좀비 영화나 소설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저자가 다루는 작품들을 분석하는 내용에 공감하며 읽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좀비에서 가지를 뻗어 철학적 담론과 종말론으로 연결하는 필력에 감탄할 것이다. 나아가 현재의 위기가 무사유의 결과물로 돌아온 재난이라는 것과 종말을 끝장내기 위해서는 사유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끌어내는데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나는 좀비물에 관심이 없지만 부제와 책 소개에 끌려서 서평단에 신청했다. 나처럼 좀비물에 관심이 없더라도 이 시기에 한 번쯤 읽어볼만한 책으로 추천한다. 저자가 소개하고 해석하는 다양한 좀비물과 뱀파이어물들이 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는 좀비와 팬데믹, 재난을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자본주의와 종말을 천착한 후 사유를 강조한다. 우리는 코로나19로 일상이 무너졌다며 다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아니 꼭 일상을 회복해야만 한다고 염원했다. 그러나 저자는 일상의 회복을 향락주의의 유혹이라고 일갈했다. 우리가 겪은 재난을 그저 흘러간 고난이나 힘든 시절로 회상하지 말자며, 감상에 빠지는 대신 냉철하게 사태를 진단하고 근본적인 대응방법을 모색하자고 했다.


p.20


우리의 목표는 일상의 수호나 유지가 아니라 일상을 끝장내는 것이어야 한다. 일상의 폐허 위에서 다른 시작을 예비해야 한다. 오늘날 만연한 절망과 체념의 교설은 우리에게 애써봐야 소용없으며 상황은 바뀌지 않을 거라고 속삭인다. 세계는 우리에게 되지 않을 일을 시도하면서 헛되이 힘쓰지 말라고,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고 즐기는 삶을 향유하라고 유혹한다. 그러나 우리는 온갖 종류의 종말의 테제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현실의 가능한 열매들에게 만족하라는 달콤한 향락의 테제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 늦기 전에 보다 근본적인 대답을 찾아 나서야 한다. 실질적인 변화가 여전히 가능하며, 다른 삶은 얼마든지 실존한다고 선언해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주장을 책 전체로 설득하고 있다. 동의할지 부동의 할지는 독자의 몫이다.


나는 3장 자본주의를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으며 저자의 주장에 동의했다. 그는 자본주의 통치의 거스를 수 없는 지배력을 강조하는 지식인들에게서 체념어린 태도를 보았다. 지식인들은 결국 자본주의 권력을 넘어서지 못하고 패배할 것으로 전망하며 급진적인 사회운동들은 지속적인 변화를 창출하거나 창조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 채 기존 제도권 정치에 포섭되거나 패퇴해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이로써 자본주의는 역사상 가장 부강하고 훌륭한 체제로서 입증되었다.


산업자본주의에서 금융자본주의 형태로 발전하면서 자본 축적이 극적으로 편중되기 시작하여 생산의 전반적 과정이 탈영토화 되었다. 축적의 전 과정이 추상화되고 기호화되어 지역사회와 무관하게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끝없는 번영을 구가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글로벌 자본주의는 영토화라는 제약으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착취기계로 한 지역을 초토화한 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이윤 창출을 극대화한다.


저자는 자본주의 체제의 폭력성과 불완전성이 여실히 증명되었으므로 기존의 체제로부터 탈주해 다른 제체로 신속히 이동하자고 주장한다. 세계의 종말에 맞서기 위해 자본주의를 파괴해야 한다고. 재난을 끝장내기 위한 해결책은 자본주의 너머를 상상할 수 없도록 만드는 사유의 종말을 끝장내야 한다는 것이다.


4장 팬데믹 에서도 자본주의와 연결한다.


p. 167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한 생태계 파괴, 도시로의 인구 밀집, 모빌리티의 끝없는 연결은 지구를 전염성 질병이 창궐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으로 바꾸어놓았다. 어떠한 예외도 없이 모든 지역과 존재자에 도달해 기어이 착취하고야 마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팽창과 끝없는 탐욕이야말로 문제의 핵심이며, 팬데믹의 본질이다. 이것을 바꿀 수 없다면 사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 과학자들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일단락된다고 할지라도, 앞으로 더욱 치명적인 형태의 신종 질병이 반복적으로 유행하게 될 거라 경고한다.

 


저자는 좀비와 바이러스를 이렇게 비교했다.


p.199


좀비와 마찬가지로 바이러스 또한 주변 환경이나 대상에 관심을 두지 않고 미리 입력된 명령어를 끝없이 실행하고 재실행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무심한 컴퓨터와 같은 존재다. 그것은 새로운 명령어를 삽입하거나 코드를 수정할 수 없이, 사전에 설계된 방식으로만 작동하는 기계인 셈이다. 파괴되기 전까지 끝없이 인간에게 침투하고 감염시켜 숙주로 만든 뒤, 스스로를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좀비와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유사하다. 좀비는 스스로 번식하거나 개체 수를 늘리지 못한다. 그들은 오로지 인간을 매개로 경유해서만 수를 불리고 세력을 늘려나갈 수 있다. 단세포 생물에 해당하는 세균은 독립적으로 복제와 번식이 가능하다. 반면, 바이러스는 좀비와 마찬가지로 숙주가 되는 유기체가 없이는 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생체다.



저자는 이번 재난을 눈여겨보고 걱정해야 한다고 했다. 이전까지 없던 새로운 바이러스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개발과 팽창을 하루라도 끝장내야만 한다고. 또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사회적 재난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매우 빠른 속도로 전파되어 인류적 재난형태로 발전했다는 것이 현재 세계의 환경이 바이러스에 매우 취약한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이는 앞으로 새로운 바이러스가 등장하는 족족 언제든 인류적 재난이 또다시 도래하게 될 거라는 암울한 미래를 예시한다.


오늘날 세계는 모든 관심을 시장의 원활한 작동과 자본의 증식에만 두고, 다른 어떤 것도 신경쓰지 않는 글로벌 자본주의에 사로잡힌 인질이라 주장한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자신을 해친다면 세계 또한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 협박하고 있으므로 글로벌 자본주의를 추방해야만 세계의 안녕과 우리의 삶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일상은 재난이 종식되면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저자는 사태의 본질이 정반대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재난 이전에 일상은 이미 망가져 있었고 그동안 영위해온 자본주의적 일상이 팬데믹이라는 파국을 불러왔다는 주장에도 나는 동의한다. 종말을 끝장내기 위해 종말을 실행하는 결단이 필요하듯 일상의 회복을 위해서는 일상을 끝장내야 한다.


종말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실험의 세 단계를 저자는 이렇게 정리한다.


1. 가능성들의 스펙터클에 현혹되지 말 것 : 가능성들이 보여주는 거짓말과 환상에 속지 말자.

2. 환영들을 피해서 가장 어두운 곳으로 나아갈 것 : 자유로운 세계가 제안하는 선택지를 고를 자유를 거부하고 가능성들을 소진해 침묵에 빠뜨리자.

3. 소진의 끝에서 무엇이 떠오르는지 두고 볼 것 : 가능한 모든 것을 제거할 때 세계의 끝에 접근할 수 있다.


저자는 상황이 우리를 어떻게 예속하는지 이 책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이를 끝장내고 흐름을 바꿀 방법을 모색하고자 했다. 예측 불가능한 사건의 가능성에 열려 있지 않은 삶은 예속된 좀비의 삶이다. 틀에 박힌 일상의 반복으로 채워지는 삶이란 무의미하고 공허한 삶이다.


재난은 세계가 이대로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근본적인 혁명이 필요하다는 진실을 시시각각 일깨운다. 잠재된 세계는 가능성들 너머에 있다. 그것은 상황과 일상으로부터 해방될 때 떠오른다. 물론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하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스스로 사유하지 않는 인간에게 종말이란 마땅한 대가이며 자연스러운 종착지다. 사유하는 인간은 세계를 무너뜨려온 파괴력의 방향을 뒤집어 세계를 건설할 탁월한 역능으로 발현한다. 올바르게 사유하고, 불가능한 것을 욕망하고, 결단을 내리고 행동함으로써 끝내 현실화해야 한다. 그것만이 다가오는 종말의 운명을 거스를 방법이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 26가지 키워드로 다시 읽는 김수영
고봉준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시인 김수영을 잘 몰랐다. 나는 김수영을 국어 선생님이 아니라 철학자 강신주에게서 배웠다. 10여 년 전 <김수영을 위하여>라는 책을 통해서. 그 책을 읽은 후 김수영 시인의 시들을 통독하고 혼자 온몸으로 읽어냈더라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를 읽으며 강신주의 해석과 내가 느낀 바를 비교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강신주는 나를 김수영의 시 세계에 다가갈 수 있게 해주었지만 나는 시라는 매체의 매력을 제대로 터득하지 못했기에 김수영의 시집을 스스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김수영을 위하여> 이후 김수영의 아내 김현경이 쓴 <김수영의 연인>을 사서 읽었다. 자료에 기댄 제삼자의 시선보다 아내가 직접 회고한 글에서 김수영 시인은 어떻게 다를지 궁금했다.

 

그러나 지금 두 권의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오래 전에 읽기도 했거니와 그 때 김수영을 조금 알게 되었다는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것에 불과했음을 이제야 알겠다. 그렇다. 이 글은 변명이다.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가 어려웠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다말고 나는 책장을 뒤졌다. 10여 년 전에 읽고 한 번도 다시 꺼내보지 않았던 김수영에 관한 책 두 권을 찾아냈다. 그 때는 리뷰는 쓰지 않을 때라 당시 느낌을 찾아낼만한 흔적이 책에라도 남아있는지 펼쳐보았다.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로 돌아왔다.

 

이 책은 한겨레 신문사에서 2021년 김수영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거대한 100, 김수영이라는 타이틀로 연재된 평론 26편 모음집이다. 연재 글에 더해 육필 원고와 발표 지면 등 최초 공개되는 자료 및 특별 대담과 함께 엮어 출간되었다. 이러한 김수영 시인 관련 서적과 연구는 아직도 활발하며 시집 역시 꾸준히 팔리고 있다. 여전히 뜨거운 시인임이 분명하다. 시도 김수영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 신문을 구독하지 않아서 그런 연재가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한겨레 서포터즈 선정 책으로 올라온 것을 보고 반가워서 신청했다. 나처럼 김수영 시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나 한겨레 연재 글을 매번 읽지 못한 일반 독자들에게 이번 책은 유용할 것임에 틀림없지만 쉽게 읽히지만은 않는다. 그 이유는 모두에 했던 변명처럼 시인의 이름과 유명 시 몇 편만 읽어본 입장으로서 키워드로 조망한 김수영의 시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 김수영에 관심을 놓지 않고 더 알고 싶은 독자에게 일독을 권한다. 물론 김수영을 전공하려는 사람들은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관심 가는 키워드 먼저 읽어도 되지만 시인의 연대기 순으로 펼쳐놓았기에 순서대로 읽어도 무방하다. 마지막에 실린 대담을 먼저 읽는 것도 추천한다. 평론에 참여한 4명의 대담자가 자신의 키워드에서 못다 풀어낸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고 김수영 연구의 방향성에 대해 설명한다. 무수한 연구가 있어왔으나 번역 같은 시인의 저작물 중 아직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한 것들이 남아있다. 그를 연구함에 있어 해석도 중요하나 기록과 자료는 무엇보다 주요한 재료인데 백수를 바라보는 시인의 아내 김현경씨가 대부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맹문재 시인이 김현경씨와 함께 출간할 책들도 대기 중이고 시인의 발자취 답사 책도 예정되어 있다. 김수영 읽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 나아가 세계에 그를 알릴 과제도 우리에게 있다. 단순히 그의 시를 알리는 차원을 넘어 그의 시에는 우리 현대사가 오롯이 투영되어 있으므로 우리나라 역사를 함께 배울 수 있다. 소설 <파친코>OTT 드라마로 전 세계인들에게 일본과 한국의 역사를 알리는 미디어가 되었듯이 말이다.

 

또한 시인의 날카로운 비판 의식 역시 유효하다. 아직 김일성만세를 외치지 못하는 사회이고 우리는 포로민간억류인의 차이도 잘 모르며 그가 욕했던 언론은 지금 더 욕을 먹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책 말미의 대담 중 학계에서 김수영을 과대평가하거나 우상화신화화한다는 비판에 관한 내용은 눈여겨보아야 한다. 독자입장에서 시를 어렵다고 느끼게 한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 시어를 이해하고 주제의식을 파악하는 방식처럼 정답을 찾으려는 강박을 잠시 내려놓고 독자가 자유롭게 느낀 대로 감상하는 것도 필요하다.

 

가족을 키워드로 쓴 이경수 교수는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p.282

김수영이 앞으로 100년 뒤에도 계속 읽히려면, 김수영을 오래 읽어온 세대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도 자유롭게 김수영을 읽을 수 있는 자유, 발언권을 줘야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그럴 때에야 김수영 시의 어떤 유산이 계승되어야 하는지, 우리 시대에 왜 김수영을 읽어야 하는지, 김수영에게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강신주는 <김수영을 위하여>에서 진정한 시는 절대성 즉, 단독성을 가져야만 한다고 했다. 시를 쓰기에 앞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내려고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수영의 시론이 자기의 삶만 돌보고 있다는 비판도 없지는 않으나, 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를 인용하며 삶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시를 알고 싶거나 시를 쓰려는 이는 참고할 만한 내용이다. 물론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를 통해 김수영을 26가지 키워드로 접할 수 있으니 조금 어렵더라도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읽어보길 권한다.

 



시인의 생생한 육필 원고를 만날 수 있는 것은 덤이다.이 책을 통해 김수영의 시세계를 만난 후 비판적 사유나 토론의 장을 펼친다면 김수영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