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수레바퀴 아래서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 최신 원전 완역본 ㅣ 코너스톤 착한 고전 시리즈 2
헤르만 헤세 지음, 박지희 옮김, 김선형 해설 / 코너스톤 / 2017년 1월
평점 :
해당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실제 독서 후 남기는 리얼 서평입니다
"과연 한 아이의 인생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 앞에서 많은 이들은 흔히 ‘좋은 대학’, ‘사회적 성공’, ‘안정적인 직업’ 같은 답을 떠올립니다. 이는 부모 세대에게도 익숙한 프레임이며, 쉽게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교육은 곧 경쟁이라는 등식을 당연시하며, 그 틀 안에 아이들을 자연스레 편입시키는 것이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의 풍경은 결코 근래에 나타난 현상만은 아닙니다.
헤르만 헤세의 장편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는 20세기 초 독일 사회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오늘날 한국 교육의 본질적인 문제까지 예리하게 투사하는 작품입니다. 약 100년 전의 이야기가 현재의 교육 현실을 날카롭게 비추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단순한 고전이 아닌 ‘경고의 문학’으로 읽힙니다.
이 작품은 고도로 체계화된 교육 시스템이 어떻게 한 인간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통찰력 있게 묘사합니다.
소설 속 주인공인 한스 기벤라트는 지적 능력이 뛰어난 청소년으로, 지역 사회와 가족의 전폭적인 기대를 받으며 성장합니다.

마치 오늘날의 ‘강남 8학군’처럼, 그에게 주어진 길은 명확합니다.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논리가 한스를 움직이는 유일한 기준이 되고, 마침내 그는 신학교 입학 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갈등은 그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신학교라는 공간은 획일화된 규범과 주입식 교육, 감정을 억압하는 질서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스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점차 내면이 무너져 내리며, 생기와 자율성을 잃어갑니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 하일너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로, 어른들의 시선에는 불온한 존재일 수 있으나, 청소년의 눈으로는 가장 진실하고 살아있는 인물입니다.
하일너와의 우정은 한스에게 유일한 숨통이 되어주지만,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그의 태도는 결국 ‘문제아’로 낙인찍히게 되고, 급기야 퇴학이라는 조치를 당하게 됩니다.
뒤이어 벌어지는 친구 힌딩어의 사망 사건은 한스를 심리적으로 붕괴 상태로 몰고 갑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그는 신경 쇠약에 시달리며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죠.
공장에 취직하고 연애도 해보지만, 연인의 이사로 인해 관계는 끝을 맺고, 인간관계는 단절됩니다.
그의 인생은 다시 아무도 없는 곳으로 미끄러져 가며, 마지막엔 술에 취한 채 강물에 빠져 생을 마감합니다.
이 비극적인 결말은 단순한 개인의 몰락이 아니라, 구조적 시스템에 의한 ‘한 인간의 붕괴’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처한 교육 환경은 얼마나 나아졌을까요?
표면적으로는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자는 메시지가 곳곳에 등장하지만, 실질적인 교육 현장은 여전히 성적과 등수 중심입니다.
아이의 성향이나 감정, 꿈, 정서적 안정 같은 요소들은 중요한 평가 기준에서 종종 배제되며, 경쟁 구도 속에서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취급되기 쉽습니다.
물론, 일정 수준의 훈련과 성취 경험은 아이가 사회를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성공 경험은 자기 효능감을 높이고, 도전의식이나 책임감을 길러주는 역할도 하니까요.
하지만 교육이 어느 순간부터 **'성과지상주의'**로 기울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오히려 성장의 가능성을 갉아먹는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적정한 긴장’과 ‘정서적 균형’ 사이의 조율입니다.
교육이 아이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성적이 아닌 ‘삶의 지속 가능성’을 중심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왜 공부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교육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며,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몰아가는 우리 사회에 날카로운 메시지를 전합니다.
결국, 이 책은 한 아이의 몰락을 그린 비극이자, 교육의 방향성을 되묻게 하는 진지한 성찰의 텍스트입니다.
100년 전 독일의 이야기가 지금의 한국 독자에게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은, 그만큼 우리가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반증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