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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권사상사 - 한국어 개정판 ㅣ 프런티어21 2
미셸린 이샤이 지음, 조효제 옮김 / 길(도서출판)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1. 이 책은 억압받는 사람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사서이다. (34면)
2. 인권은 인간이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가지는 권리를 뜻한다. 인권은 성, 인종, 국적, 경제적 배경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가 평등하게 가지는 권리이다. 인권은 그 내용에 있어 보편적이다. (36면)
3. 세계인권선언에 등장하는 권리들은 변화를 거듭했던 보편적 인권의 역사적 출현 순서와 밀접하게 대응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7면)
4. 하지만 인권 기획의 각 단계가 이러저러한 인권 세계관에 내재된 한계를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기획이 인권의 역사를 조금씩 전진시켰던 것은 사실이다. 이와 동시에 각 단계의 인권 기획이 민족주의와 문화적 권리의 등장을 촉진했던 모순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애초에 보편주의적 인권관에 반대하면서 등장했던 이들 예외주의적 관점이 나중에 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규약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인권 공동체 내에서 아직도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38면)
5. 나는 인권이 현실주의를 반대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권이 건전한 현실주의 정책을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40면)
6. 마르크스는 1850년 ‘뉴욕 데일리 트리뷴(New York Daily Tribune)'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영국의 보통선거권 정책은 유럽 대륙에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진 그 어떤 정책보다도 더 사회주의적인 조치이다.” (45면)
7. 자유주의자가 ‘자유’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차티스트와 사회주의자들은 경제적으로 불평등하면 자유가 공허한 개념이 될 수 있다는 심각한 가능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믿음은 당시 형성되고 있던 도시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45면)
8. 19세기 이래 급진 사회주의자들과 개혁 사회주의자 모두가 자유주의적 의제를 수정하여 경제적 평등, 노동조합 결성권, 어린이․청소년 복지, 보통선거권, 노동시간 단축, 교육 권리, 기타 사회복지 권리를 확대하라고 요구해왔다. 이러한 원칙 대부분이 1966년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 포함되었다. 이때쯤에 이르러 원래는 사회주의적 강령의 핵심이었던 요소들이 주류 자유주의 사상에 이미 오래전에 편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45면)
9. 극히 다양한 문화, 종교, 정치전통에서 공통된 인권의 표현방식을 도출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인권위원회의 수임 사명이었다. 인권위원회의 위원들은 새로운 보편 윤리를 찾는 과정에서, 인권철학 전통의 역사가 “좁은 서구 전통의 범위”를 벗어나 폭넓게 존재하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권의 탄생이 철학의 탄생과 함께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런 뜻에서 인권위원회는 선언문 기초 작업에 착수할 때부터 원칙을 세워 보편적 인권이 18세기 유럽 계몽주의에서 기원한 서구의 발명품이라는 가정을 거부하였다. 그 대신 위원들은 계몽주의 인권 사상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던 공동선에 대한 어떤 보편적 관념을 확인하기 위해 전세계에 위대한 종교, 문화 전통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56면)
10. 카생: 처음에는 의무라는 형식으로 제시되었다가 훗날 권리의 개념으로 정착되었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생명권으로 발전했으며, ‘훔치지 말라’는 계명은 재산권으로 진화한 것이다. (58면)
11. 그(폰탐베르그)는 마누와 붓다는 10가지 핵심적인 인간의 자유와 자기규율 또는 인생의 선덕을 위한 원리를 제시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중 5가지 사회적 평안은 ‘폭력으로부터의 자유’(아힘사, 불살생 또는 비폭력),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아스테야), ‘착취로부터의 자유’(아파리그라하, 무소유), ‘요절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암리타트바), 그리고 ‘질병으로부터의 자유’(아로기아)이다. 여기에 5가지 선덕 또는 규율이 더해지는데 그것은 ‘불관용의 억제’(아크로다), ‘자비’(부타디야, 아드로하), ‘지식’(즈나야, 비드야), 그리고 ‘양심의 자유’와 ‘공포, 좌절, 절망으로부터의 자유’(프라브르히, 아브하야, 드로티) 등이다. (60면)
12. 베다: 인간은 오히려 생의 도덕적 의무를 훌륭히 완수함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획득해가야 하는 존재이다. (60면)
13. 로이춘슈에 따르면 불교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윤리적 가르침은 다른 모든 인간에게도 내가 누리고자 하는 욕구와 같은 욕구, 즉 공통된 권리가 있음을 공감할 줄 아는 태도를 강조한다.” (62면)
14.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인간의 선함,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인권이 보편적임을 믿었고, 선함과 정의가 개별 사회마다 상대적이라고 믿었던 소피스트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었던 것은, 선함의 상대적 개념이 흔히 강자의 이익을 은폐하기 위해 제시되는 논리임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선함 속에 내포된 바로 그 같은 공통적인 요소를 깊이 이해하는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65면)
15. 아리스토텔레스: 덕성은 내재적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계발해야 하는 일종의 능력가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원래 내제적으로 정의로운 존재가 아니라) 옳은 행동을 함으로써 정의로워지고, 용기 있는 행동을 함으로써 용맹스러워진다. 어떤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다 보면 습관이 생긴다. 따라서 덕성이 있는 인간은 좋은 습관을 형성했기 때문에, 그리고 균형 잡힌 삶을 모색했기 때문에 존경받아야 한다. (66면)
16.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모든 덕성 중의 최고 덕성인 신중함은 행동 속에서 발현되어야 그것이 구체적인 형태를 띨 수가 있다고 한다. (67면)
17. 스토아 학파가 인간이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에 근거하여 도덕적 평등을 주장했다면, 그리스도교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줄 아는 능력에 근거하여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보았다. (69면)
18. 카비르: 이슬람교의 민주주의 개념은 전무후무할 정도로 철저하게 인종과 피부색의 차이를 뛰어넘었다. (70면)
19. 1864년 제네바협약은 사상 최초로 전쟁포로의 보호, 전쟁포로의 권리 인정, 그리고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부상자를 치료할 것을 규정하였다. (93면)
20. 헤겔: 만일 문명국가가 스스로 보기에, 또 타인이 보기에, 보편적인 법 그리고 보편적으로 타당한 법을 구현하지 못한다면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을 자격이 없다. (128면)
21. 한 시대에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은 흔히 다음 세대에 복수의 일념에 사로잡힌 가해자가 되거나 아니면 인권의 열렬한 주창자가 되곤 했다. (129면)
22. 이러한 자유주의적 세계관은 애초에 종교의 자유와 의사표현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으로부터 출현하였고, 이것은 그 이후 보편적 생명권(고문과 사형의 폐지를 포함한), 그리고 재산권(그리고 부의 공정한 분배를 반대하는 요구와 함께)의 주장을 위한 초석을 놓았다. ... 그리고 이 장의 후반부는 초기 자유주의 사상의 결함인 비일관성과 그 한계(여성, 무산계급, 흑인, 식민지 민중, 동성애자, 유대인, 타국적자의 배제와 같은)를 다룬다. 이러한 비일관성으로 인해 19세기에 자유주의적 인권관에 대한 도전이 촉발되었던 것을 기억해야만 하겠다. (130면)
23. 이렇게 인도 문명, 중국 문명, 이슬람 문명이 서구와 비교해 강성했던 점을 감안할 때 왜 이들 문명이 보편적 인권 윤리를 성공적으로 확산시키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예기치 않게 빠른 속도로 성장한 서구권은 자연히 많은 역사가들의 의문과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133면)
24. 인도, 중국, 이슬람권의 취약성과 대조적으로 서구의 경우 몇 가지 유리한 조건이 동시에 발생하면서 문명의 흥기를 자극하였고 근대적 인권담론이 발전하고 확산될 수 있는 역량을 일깨웠다. 이러한 유리한 조건을 들자면 종교개혁, 과학의 발전, 중상주의의 발흥, 국민국가의 공고화, 해상 원정 및 혁명적 중산층의 대두 등이 있다. ...이성의 추구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권, 과학적 계획 및 법치, 계약관계 및 경제적 상호의존성을 신보하는 새로운 보편적 권리담론이 자리를 잡아갔다. (136면)
25. 종교전쟁의 국제적 성격은, 계시된 진리 - 종교전쟁 기간 동안 그 분열적 성격이 잘 드러난 진리 원칙 - 가 아닌 이성적 사고에 기반을 둔, 세계 통합을 위한 새로운 비전의 발전에 자극을 주었다. (136면)
26.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과학자들은 카톨릭교회의 아성이던 대학사회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 독립적인 학술단체에 점점 더 많이 가입했다. (137면)
27. 서구가 다른 문명에 비해 융성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신세계의 ‘발견’, 식민지 개척, 그리고 중상주의적 수탈이었다. 16세기와 17세기에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에 의해 시작된 전지구적 경제체제는 18세기에 이르러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의 수중에서 발전해 나갔다. (138면)
28. 이런 식으로 노동이 전문 직종에 따라 여러 영역으로 분화되면서 봉건사회의 자족적인 특성이 허물어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생필품의 교환을 둘러싼, 그리고 권리에 기초한 계약적 담론(contractual discourse)의 필요성을 둘러싼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상호의존성을 창출해야 할 요구가 절실해졌다. (139면)
29. 인권과 시민의 권리선언: 이 선언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남성과 남성시민의 권리선언’이 될 것이다. (142면)
30. 자신의 재산을 철저히 지키려 했던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에 새삼 관심을 갖고 그 고통에 진정으로 동참하기 위해 새로운 영성을 요구하던 이단들의 견해를 수용할 의사가 없었다. (144면)
31.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 지역의 종교는 군주의 종교에 따른다. (147면)
32. 네델란드의 법학자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는 종교전쟁에서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만행에 공분을 느껴 분쟁 당사자들에게 종교적 관용의 정신을 견지하라고 촉구했다. “그리스도의 법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종교 외에 문제에 회의나 오류가 있다는 이유로 그를 처벌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147면)
33. 1648년 10월에 비준된 베스트팔렌조약: 자신의 종교가 군주의 종교와 다른 백성은 자기 종교와 같은 국가의 백성이 되기 위해 (타국으로) 이주할 특권이 허용된다. 또한 국가 간의 합의를 보존하기 위하여 군주는 다른 군주의 백성을 자기 종교로 유인하지 않기로 합의한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개인의 종교 자유를 (명시적으로) 보장하지는 않았지만, 종교적 망명의 권리 그리고 국가가 국교를 선택할 절대 권리를 확립하였다. (147, 148면)
34. 영국의 철학자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저 유명한 ‘관용에 대한 편지’(Letter concerning Toleration, 1690)에서 베스트팔렌 조약의 보수적인 성격에서 한 걸음 나아가, 국가가 종교를 선택할 권리가 아니라 개인이 종교를 선택할 권리를 요구했다. (148면)
35. 영국에서는 1689년 의회가 관용법을 제정하여 비국교도에게 자기 종교를 예배할 자유를 허용했지만 유대교도와 가톨릭교도는 여전히 이 법에서 제외되었다. 이러한 인권침해에 경악한 로크는 교회와 국가의 명백한 분리를 주장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정치사회를 설립하는 목적은 다름 아니라 모든 인간이 자기 삶에서 자신에게 속한 것들을 스스로 돌볼 수 있도록 보장하는 데 있다. 각자의 영혼을 돌볼 의무 그리고 천상에 속한 것을 돌볼 의무는 정치 공동체에 속하지 않고 그것에 예속될 수도 없으며, 온전히 각자의 자아에 달려 있다.” (148, 149면)
36. 밀턴: 다른 어떤 자유보다도 내게 ‘알 수 있는 자유’(right to know), '말할 자유‘(right to utter), 그리고 ’자유롭게 논쟁할 자유‘(right to argue freely)를 달라. ... 자유롭게 풀려난 진리는 모든 오류의 가능성을 극복하고 승리할 것이다. (149면)
37. 제퍼슨: 이성이 오류와 자유롭게 싸울 수 있는 조건이 보장되어 있는 이상, 오류로 가득 찬 의견이라도 우리는 관용해야 할 것입니다. (153면)
38. 볼테르: 톨레랑스(관용)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자유로운 속성이다. 우리 모두가 나약하고 오류에 가득 찬 존재들이다.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해주자. 이것이 바로 자연의 제1법칙이다. (153면)
39. 홉스는 생명권이야말로 가장 필수적인 권리이고 사회계약이 생명권을 방위하지 못한다면 그런 계약은 무효라고 보았다. 따라서 홉스에 있어서는 애초부터 인권담론이 현실정치(realpolitik)적 관심과 결부된 세계관으로서 출현했던 것이다. 국제정치에 있어 최초의 현실주의 이론가였던 홉스가 또한 인권의 옹호자였다는 사실은 역설적이 아닐 수 없다. (159면)
40. 볼테르와 베카리아의 호소가 18세기에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들의 주장이 20세기 들어 주요 국제인권법 문헌의 기초자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 분명하다. (162, 163면)
41. 그들(푸펜도르프, 주시, 바텔, 그로티우스)의 견해는 무엇보다도 중세의 국제법 체제와 근대 국제체제의 사이의 전환기, 그리고 로마교황과 황제의 관할 아래 성립된 체제와 베스트팔렌 조약이 확정한 국가주권 체제 사이의 전환기, 이러한 교차점의 시대정신을 포착했던 것이다. (183, 184면)
42. 푸펜도르프는 그로티우스의 가르침을 상당 부분 존중하면서도 네델란드 동료(그로티우스)의 견해에 부분적으로 동의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남이 나를 해치려는 의도를 도덕적으로 확고한 증거로써 입증하기 전까지는, 위협을 느낀다는 사실만으로는 정당한 전쟁을 벌일 근거가 없다.” (184면)
43. 스미스는 봉건제와 중상주의의 독점적 성격에 반대하여, 개인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가운데서 공동선이 제약 없이 발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 (187면)
44. 금융체제는 타락한 영혼을 만들어 낼 뿐이라고 했던 루소는 상업적 거래에만 의존하는 인권관에는 결함이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였다. (189면)
45. 생명권, 종교와 의사표현의 자유, 재산권을 위한 투쟁... (195면)
46. 영국, 아메리카, 프랑스의 권리선언에서 온갖 자유가 다 선포되었지만 자격이 미달된다는 이유로 그 자유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많았다. 무산계급의 남자 시민과 모든 여자가 2등 시민 또는 수동적 시민으로 간주되어 투표권과 참정권을 얻지 못했다. (195면)
47. 페인: 이 사회는 여성의 조건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절망의 원천이 되었다. (198면)
48. 19세기 인권논쟁의 형태는 주로 이들 집단이 사회적 불평등에 대항하여 표출했던 분노를 중심으로 그려졌다. 이러한 논쟁은 보수주의 세력이 자본주의의 행진 앞에 무릎을 꿇고, 급격한 산업화로 사회적 갈등이 깊어지면서 더욱 격화되었다. 자본주의가 심화되면서 사회주의가 19세기 인권투쟁의 선두에 나섰다. (212면)
49. 공산주의체제가 훗날 인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만으로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가 19세기의 인권발전에 역사적으로 공헌한 바를 간과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213면)
50. 자유주의자들이 ‘자유’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 사회주의자들은 자유의 개념이 경제적 불평등 앞에서는 속 빈 강정이 될 수 있다는 엄혹한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었다. ... 사회주의자들은 18세기에 자유주의자들이 상정한 것보다 더욱 포괄적인 (인권)의제를 수용하였고, 이렇게 확장된 19세기의 인권투쟁으로 인해 노예, 여성, 동성애자, 어린이․청소년, 소수민족, 식민지 인민들이 부분적으로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214, 215면)
51. 라틴아메리카와 그리스 민족주의자들의 성공은 1848년의 혁명으로 이어졌고... (218면)
52. 사실상 영국, 프랑스, 벨기에에서 1830-32년 사이에 벌어진 혁명적 사태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부유한 신흥 산업자본가 계급이 귀족들에 대해 완전히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이었다. (220면)
53. 노동계급은 열악한 노동조건, 불안정한 일자리, 정치참여 기회의 봉쇄 등으로 불만이 고조되어 1830년 이후 점점 더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정치적 급진화가 예술작품을 통해 강력하게 표출되었다. (220면)
54. 그러나 불운했던 1848년의 혁명이 단순히 무위로 끝난 것만은 아니었다. 차티스트 운동가들과 사회주의자들이 19세기의 인권투쟁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면서 정치개혁과 복지개혁 그리고 인권을 향한 열망이 더욱 뜨겁게 고조되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자들과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가들에게 영감을 얻은 많은 이들이 보통선거권 쟁취를 위한 결의를 새롭게 다지게 되었다. 유럽 전역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노예폐지운동에 가담하고, 여성의 정치적․사회적 권리를 지지하고, 어린이․청소년의 공장노동을 비난했으며, 모든 어린이․청소년이 공립교육을 받을 권리를 촉구했고, 산업안전 권리를 제시했으며, 하루 노동시간의 단축을 요구했다.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은 1864년 국제적인 사회주의 조직인 제1인터네셔널(First International, 1804-76)을 창설하였다. (221, 222면)
55. 처음에는 나폴레옹을 위대한 영웅으로 간주했던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와 같은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계몽주의의 기본 전제와 추상적인 이성에 기반을 둔 모든 보편성 개념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피히테와 같은 이들은 자유주의적 인권관에다 민족 사랑으로 뭉친 신비주의적인(또는 종교적인) 연대 개념을 섞은 색다른 민족자결권의 메시지를 설파하였다. 피히테와 여타 낭만파 사상가들은 유기적인 민족관을 옹호하면서 주관적 의지를 이상화하였다. 피히테는 과거의 전통을 회고하면서 동시에 문화발전을 위한 새로운 방도를 이상화하였다. (227면)
56. 동시대인들의 관념주의적 허구를 일깨워주겠다는 책무를 스스로 세웠다. ... ‘독일 이데올로기’... 주로 종교비판에 치중하여 자기들의 철학을 전개하던 독일의 철학자들을 공격함으로써 관념적 허구를 무너뜨리는 작업을 개시한 바 있다. (229면)
57.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인들이 노동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을 도와야 할 의무감을 가져야 한다는 견해를 개진하였다. ... 그러나 마르크스가 보기에 종교는 궁극적으로 지배 엘리트를 보존하는 데 언제나 도움이 될 뿐이었다. 종교는 민중에게 이 땅에서의 고통을 인내하라고 촉구하고 천상에서의 보상을 약속하면서 그들을 달래기 때문에 ‘인민의 아편’(Opium des Volkes)밖에 될 수 없다고도 했다. (229, 239면)
58. 역사 속에서 사회세력의 판도가 변함에 따라 각 시대별로 어떤 권리가 다른 권리보다 더 중시된다는 주장이다. (231면)
59.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헤겔의 사상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의 정치적 결론에는 반대했다. 역사는 시대정신을 비틀거리면서 전진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며, 사회현실의 실질적 변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는 그 무엇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을 헤겔의 역사변증법을 유물론으로 해석하면 역사적 교훈에 입각한 현실적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며, 신생 노동운동을 위해 새로운 인권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회적인 생산력과 관련된 삶의 물질적 조건들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대다수 사회주의자들의 교의를 다음과 같이 정확히 표현했다. “모든 인간 역사의 첫 번째 전제는 ... 살아있는 사람들의 존재이다. 따라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일은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생존할 수 있도록) 조직하는 것이며, 그 결과로서 이들이 나머지 자연과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이다.” (232, 233면)
60. 그(마르크스)는 또한 권리에 관한 도덕이론이 각 사회 경제발전 단계의 산물, 특히 지배계급의 산물이라고 했다. 따라서 자유와 권리의 개념이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논하지 않거나 물질적 정황과 가능성에 비추어 논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233면)
61. 헤겔만 하더라도 당대의 다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보편적 권리의 메시지를 설파하기 위해 중산계급에 의존했지만, 1848년 이후에는 마르크스, 블랑, 블랑키를 위시한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에게 이러한 사명을 위임하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가 “쇠사슬밖에는 잃을 것이 없으므로” 더욱 평등한 사회 - 사회의 경제적, 제도적 하부구조가 정당하게 조직되어 보편적 인권의 이상이 (모순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유지되는 -를 꿈꿀 수 있는, 독특하게 결정적인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다. (234, 235면)
62. 과거의 희망 위에서 (새로운 인권의 전망을) 구축한다. (235면)
63. 오늘날 흔히 시민적, 정치적 자유는 자유주의 전통과 연결되어 있고, 사회적, 경제적 권리는 통상 사회주의 이념과 연관된다는 게 통설이다. ... 하지만 19세기의 역사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대다수 사회주의자들이 정치적 권리와 경제적 권리를 위한 투쟁을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하나의 단일한) 투쟁으로 인식했음이 드러난다. (236면)
64. 투표권 거부로 불만이 고조된 많은 진보주의 사상가들은 한층 더 맹렬하게 불평등한 재산의 폐지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불평등한 재산이야말로 정치적 평등을 위한 투쟁에 있어 핵심적인 걸림돌이라고 본 것이다. (238면)
65. 헤스(Moses Hess)의 ‘행동의 철학“: ”정신의 철학이 행동의 철학을 탄생시킬 때가 드디어 도래했다.“ (238면)
66. 이보다 더 중요한 발전은 1833년 ‘공장법’(Factory Act)이 통과되어 9세 미만의 어린이가 방적공장에서 일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1842년에는 10세 이하의 남녀 어린이 그리고 여성의 탄광 노동이 금지되었다. 이 중에서도 노동계급에게 가장 큰 성공은 1847년 여성, 어린이, 남성의 하루 노동시간을 제한한 ‘10시간 노동법’(Ten Hours Act)의 제정이었다. (240면)
67. 프루동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기본권 -즉 자유, 평등, 안전에의 권리-을 지지했지만 재산이 빼앗길 수 없는 권리라는 사상은 거부하였다. 프루동은 재산이 반사회적인 권리이며 적절한 시정조치도 없이 불평등을 고착시킨다고 주장했다. “부자의 재산 욕구가 빈자의 재산 욕구에 대항하여 계속 방어되어야 한다니, 이 얼마나 당치 않은 모순인가!” (241면)
68. 블랑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동포들의 모순성을 부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그래, 너희는 가난한 자가 자기 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가?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그렇게 할 힘도 없는데 권리만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자기를 고쳐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병자에게 치료받을 권리가 있다고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말이다. 추상적으로 거론하는 권리는 1789년 이래 민중을 절망으로 몰아넣어온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 여기서 확실히 말해두자. 자유란 사람들이 합의하는 권리 속뿐만 아니라, 정의의 권위와 법의 보호 아래 인간이 자기 능력을 계발하고 행사할 수 있는 힘 속에도 들어 있다고 말이다.“ (243면)
69. 마르크스: “영국의 보통선거권 정책은 유럽 대륙에서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진 그 어떤 정책보다도 더 사회주의적 조치이다.” (244면)
70. 1832년 남성의 참정권을 확대한 제1차 선거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239면) ‘제2차 개정선거법’은 의회가 오랫동안 반대한 끝에 1867년에야 겨우 통과되었다. ‘제1차 개정선거법’이 선거인 명부에 20만명 정도의 유권자를 추가하는 데 그치는 반면, ‘제2차 개정선거법’으로 거의 백만 명의 유권자가 늘어났다. .... ‘제2차 개정선거법’은 그 후 추가입법으로 개선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중산계급과 상류계급의 정치적 입지가 축소되었다. ... 상류계급의 선거 관련 영향력은 1918년의 ‘선거법’으로 드디어 종언을 고했다. 이 법으로 아무런 제한규정없이 보통선거권이 인정되었고 차티스트와 사회주의자들의 선거권 투쟁이 마침내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245면)
71. 심지어 대의 민주주의를 지지했던 자유주의 진보사상가였던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조차도 1861년 당시에 문자 해독 능력을 고려해 투표권을 부여하자는 주장을 계속했다. “보편선거보다 보편교육을 먼저 실시해야 한다.” (245면)
72. 아나키스트들은 국가가 내재적으로 엘리트의 이익과 지배를 위한 도구라고 보았다. (252면)
73. 페이비언: 점진적인 개혁 사회주의를 추진하기 위해 1884년 창립된 정치협회. 적당한 시기가 올 때까지 전투를 지연시켜 승리를 얻어낸 것으로 유명한 로마의 파비우스 장군에서 따온 명칭이다. 영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중도좌파 싱크탱크이다. (255면)
74. 인터내셔널은 사회주의자가 식민지배를 지지할 수 있다고 강변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사상을 비난하였다. 전략을 둘러싼 논쟁, 그리고 식민지 문제와 전쟁을 놓고 벌어진 내분으로 제2인터내셔널은 존립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259면)
75. 실제로 뿌리 깊은 선입관이 없으면 노예무역의 처참한 실상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268면)
76. 체트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롤레타리아 여성을 위한 여성문제, 중산층 부르주아 지식인 여성을 위한 여성문제, 그리고 ‘만 명의 상류계급’을 위한 여성문제가 있다. 여성문제는 이런 각기 다른 계층의 계급적 조건에 따라 천차만별의 문제로 달라진다.” (274면)
77. 체트킨은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 “노동계급 여성은 인간으로도, 여성으로도, 아내로도 충만한 개인의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없다.” 따라서 체트킨은, 엥겔스와 베벨의 주장에 동조하여, 노동계급 여성은 같은 계급의 남성에 대항해 투쟁할 것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착취에 반대하는 프롤레타리아 투쟁에 연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76면)
78.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진정한 사랑의 결혼은 일종의 인권으로 선포되어야 한다. 실제로 남성의 권리로서만이 아니라, 분명히 여성의 권리로도 선포되어야 하는 것이다.” (276면)
79. 미국에서는 중산계급과 상류계급 여성들이 1848년 세니카폴스에서 열린 제1차 전국여성권리대회를 통해 여성과 남성의 평등원칙을 천명하였다. ... 그러나 이들은 세나카폴스 대회에서 흑인(남성)의 권리를 위해서는 그토록 열심히 토론했으면서도 빈곤층 여성의 권리 - 흑인 여성의 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에 대해 눈을 감았다. 1851년 개최된 제2차 대회에서 노예 출신의 트루스는 열정적인 연설을 통해 여권운동에서 흑인 여성을 누락시킨 사실을 지적하고 나섰다. (277면)
80. 드디어 서로 상충되는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입장들이 부딪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가 주변국들과 싸우는 형세가 되었고, 그에 따라 평화와 보편적 인권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노동자들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사회주의적 인권의 이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 속에 깊히 묻혀버렸다. (294면)
81. 민족주의가 19세기 초 계몽주의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포부를 거꾸로뜨렸던 것처럼, 이제는 그것이 사회주의적 인권의 비전을 파멸시킬 것이다. .. 또한 수많은 인권의 목소리들 - 여성, 피억압 민족, 식민지 민중, 흑인, 동성애자, 아동권의 옹호자 - 이 전쟁의 북소리 앞에 일시적으로 숨을 죽여야 했지만, 이들은 20세기 후반에 다시 일어나 인권의제를 형성하는 데 적극적인 기여를 하게 될 것이었다. (295면)
82. 이 시대는 실제 암울한 전운이 깔린 시기였는데, 이 같은 비극적 상황을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는 불안정하고 반음계적인 ‘6번 교향곡’ - 통상적인 음악의 조성을 파괴하는 것처럼 들리는 -을 통해 정확하게 표현하였다. (301면)
83.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민족주의가 더욱 기승을 부리면서 제2차인터내셔널의 보편주의적 희망이 무색해지자,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민족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초기 견해, 즉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거나 “민족적 구분과 인민들 간의 분쟁은 부르주아지의 발전과 동일한 생산양식에 힘입어 하루가 다르게 사라지고 있다”는 식의 주장을 반추해보기 시작했다. (310면)
84. 파리 강화회의 직후에 창립된 국제연맹은 호치민이나 윌슨의 희망과는 달리 식민지 인민들의 권리를 향상시켜주지 않았다. 연맹이 만들어지자마자 그것의 배타적인 성격만이 두드러지게 드러났을 뿐이었다. (318면)
85. 국제연맹이 초기의 기대를 금방 저버렸던 것처럼, 인권을 약속하면서 탄생한 유엔 역시 서구의 전승국들이 식민지를 계속 유지하려고 애쓰는 와중에서 그 창설원칙을 어느새 저버리게 되었다. (322면)
86. 전세계 모든 사람이 빈곤과 불안에서 오는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 사람들은 인권의 노력으로 힘들게 건설된 문명의 유산에 대해 - 그것의 모든 측면과 모든 차원에 있어서 - 완전한 접근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또한 과학과 예술이, 어떤 차별도 없이, 모든 사람의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평화와 복리에 봉사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나라들 사이에 선린우호가 있다면, 이제 그러한 복리를 그 어느 때보다 더 신속하게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믿는다. (369면)
87. 소련의 대표는 당연히 사회적, 경제적 권리 및 권리에 대응되는 시민적 의무에 우선순위를 두었고, 미국의 대표는 정치적, 시민적 권리를 선호하였다. 이 논쟁의 핵심에는 중앙계획(central planning)을 지지하는 사람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이 일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정책을 옹호하는 사람들 사이의 의견 차이가 놓여 있었다. (370면)
88. 미국은 입으로는 보편적 자유주의 인권에 대한 의지를 계속 천명했지만, 실제로는 국가권력과 사적 자본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 자유주의 인권요소들을 모조리 무시하였다. (377면)
89. 냉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에 복지국가 덕분에 사회경제적 권리는 향상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시민적 자유는 위협받았다. 더 넓게 보자면, 전쟁과 경제침체의 시기에는 통상적으로 국가가 시민적, 정치적 권리를 희생시키면서 사회경제 정의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379면)
90. 대공황이 일어난 뒤 1933년에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루스벨트는 자유방임형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중도노선을 대변한 뉴딜정책을 제시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뒤 여타 산업국가들도 그 정책의 효과를 확신하고 미국의 선례를 뒤쫓았다. (381, 382면)
91. 이러한 사회주의적 인권은 훗날 국제인권문헌을 통해 다시 강조되었는데 .. 사회주의적 인권관을 포섭했기 때문에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같은 나라에서 공산주의 정권의 성립이 불발에 그쳤고 냉전 당시 소련에 대항하는 서구의 동원이 가능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383면)
92. 그런데 집단적 사회운동이 퇴조하면서 새로운 ‘정체성의 정치(identity politics)’ 시대가 등장하여 흑인, 여성주의자, 라티노(중남미계 미국인), 그리고 동성애자들이 운동의 초점을 예외주의적 의제의 신장에 맞추기 시작했다. (418면)
93. 유앤개발계획의 최근보고서에 의하면 극빈국들은 상대적으로만 아니라 절대적으로도 더 빈곤해지고 있다. 약 12억명이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며, 28억 명이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이 중에서도 아프리카의 현실은 가장 열악하다. (431면)
94. 빈곤 감소는 도덕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이제 평화와 안보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으로 인정된다. (435면)
95. 자연을 정복할 때마다 자연은 우리에게 보복한다. ...오히려 살과 피와 두뇌로 이루어진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존재해왔고, 지금도 자연 속에서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가 다른 피조물에 비해 자연의 법칙을 알고 그 법칙을 올바르게 적용할 줄 아는 능력이 있기에 우리가 자연의 우위에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438면)
96. 권리가 없는 사람들(the rightless)의 비운은 그들이 생명, 자유, 행복추구권 또는 법 앞의 평등과 의사표현의 자유 -일정한 공동체 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방식-를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 이상 어떤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비극은 법 앞에서 평등하지 않다는 점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한 법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탄압받아서가 아니라, 아무도 탄압하려 들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443면. 한나 아렌트, 나라없는 인민의 권리, 전체주의의 기원, 1951, 295)
97. 미국은 비교적 방만한 이민정책을 유지해왔다. 한편으로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불법이민을 눈감아주고, 다른 한편으로, 이주자의 노동력이 필요 없어졌을 때 그들을 미국 사회 안에 계속 유지시켜주어야 할 부담을 지지 않기 위해, 불법 이주자에게는 정규 시민에게 제공하는 사회 서비스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447면)
98. 무슬림권으로부터 이주해온 집단들을 사회 안에 통합하려는 노력을 좀더 기울였더라면 서구사회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의 호소력이 크게 줄었을 것이다. 적대적인 이민정책, 게다가 함부르크, 마르세유, 브뤼셀이 거리에서 부쩍 늘어난 외국인 혐오 등이 알카에다와 같은 폭력적인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지지세를 키워놓은 셈이 되었다. (448면)
99. 풀푸리 인권단체들이 시애틀, 워싱턴, 프라하, 제노바의 길거리에서 그리고 그곳을 넘어서서 연대행동을 조율하고 있는 이때 우리는 단지 국제기구의 권력의 회랑과 전세계 엘리트들의 모임에서만이 아니라, 기업권력의 그림자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인권의 대화가 진전되기를 희망해야만 할 것이다. 계속되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보편적’인 어떤 인권은, 실증적인 인권법에 대해 새로운 국제주의적 인권의 정신을 불어넣어줄 인권이다. ... 새로운 인권은 9.11 사태 이후 “우리 편 아니면 반대 편”이라는 식의 이원적인 세계관에 대항하여 창조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권이다. (466면)
100. 저개발국에서는 여성이 남성 급여의 절반 또는 3분의 1 수준의 급여를 받고 있고, 서진국에서는 여성이 남성의 3분의 2 내지 5분의 4 수준으로 급여를 받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빈곤선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의 총수가 늘어나면서 빈곤층 내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남성보다 훨씬 늘어나고 있다. 여성이 부양하는 가구의 급증, 저임금 노동의 여성화, 일부 국가에서 여성의 낮은 교육수준 등으로 인해 ‘빈곤의 여성화(feminization of poverty('가 악화되었다. (48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