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 개정판
김대중 지음 / 김영사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1. 그러나 나는 돈벌이에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도 전혀 즐겁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나는 나의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되든지 정치가가 되어야 했습니다. (17면)

 

2. 그러나 나의 정치 인생은 처음부터 순탄하지가 않았습니다. 국회의원 배지를 다는 데만 10년이란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10년에 걸쳐서 네 번 실패한 끝에 다섯 번째에야 제대로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국회의사당에 들어가 보기도 전에 5. 16으로 좌절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나의 기나긴 정치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17면)

 

3. 인생의 소중한 교훈을 얻은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버리면 얻는다'는 진리 말입니다. (35면)

 

4. 나는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백지를 내놓고 가운데에 줄을 긋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내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왼쪽에는 나에게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되는 가능성을 적습니다. ... 이렇게 나에게 남아 있는 가능성들을 하나하나 적다 보니 열 개나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는 갑자기 의욕이 솟아났습니다. (36, 37면)

 

5. 운명은 그를 다음 단계로 올라가라고 도전장을 던집니다. 그 단계에 이르면 다른 도전이 와서 또 다른 다음 단계로 올라가게 합니다. 그렇게 죽는 순간까지 인간은 도전을 받고 살아갑니다. 그 도전에 효과적으로 응전한 사람의 인생은 성공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낙오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37면)

 

6.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응전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기 때문에 참고 견디며 새로운 노력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는 끝이 없습니다. (39면)

 

7. 나는 유람을 떠난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하러 갔습니다. 실제로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연구실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40면)

 

8. 독일처럼 조급해서는 안 되고, 독일처럼 흡수 통합을 지향해서도 안 된다는 것, 이것이 내가 독일로부터 얻은 가장 큰 가훈이자 지혜입니다. 이떻게든 통일만 이룬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어떻게 통일하는가가 중요합니다. (47면)

 

9. 두렵지만, 나서야 하기 때문에 나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용기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아무리 약해도 강합니다. (69면)

 

10. 삶의 방식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무엇이 되느냐'에 의미를 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사느냐'를 중시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를 무시합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 되기만 하면 '어떻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72면)

 

11. 그런가 하면 무엇이 되는가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목표를 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 되느냐에도 관심이 있지만, 그것은 '어떻게' 사느냐를 통해서 이루어질 때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72면)

 

12. 에리히 포름 식으로 말하면, '소유냐, 존재냐'이고, 내 식으로 말하면 '무엇이냐, 어떻게냐'입니다. (74면)

 

13. 그 선택의 기로에서 방향을 지시해 준 것은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확고하고 선명한 인생관이었습니다.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행동하는 양심'으로 사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만 '어떻게'라는 참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76, 77면)

 

14. 나는, 바르게 사는 것이 곧 성공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르게 사는 것이 성공하는 길이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 자체가 바로 성공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그 결과로 무엇을 얻었는가, 무엇을 이루었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겼을 수도 있고, 졌을 수도 있습니다. (82면)

 

15. 큰 목적을 가진 사람일수록 정정당당해야 합니다. 멀리 내다보아야 하고, 눈앞의 이익에 연연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는 졸장부 신세를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85면)

 

16. 나는 감옥에 가기 전에는 철학에 대해 별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있으면서 수많은 철학서적을 읽고, 사색하고, 또 읽게 되었습니다.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칸트, 니체, 야스퍼스, 사르트르, 키에르케고르, 러셀 등을 읽어서 그 분야에 다소나마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 또 거기서 정독하게 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방향타를 제시해 주었습니다. 석학들의 명저들을 읽으면서 몇 번이고 "여기에 안 들어왔던들 이런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죽을 뻔했구나"하면서 무릎을 치며 감옥에 온 것을 감사했습니다. (89, 90면)

 

17. 그리고 바깥에서 접하지 못했던 세계 문학의 고전을 탐독할 수도 있었습니다. 특히 푸시킨, 레르몬도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루르게네프 등 러시아 문학과 헤밍웨이의 소설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으며 느꼈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90면)

 

18. 그리고 공자, 맹자 등 동양의 고전과 우리 나라의 실학 사상도 감옥에서 비로소 그 맛과 깊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의 영어 실력이 지금 정도 된 것도 순전히 감옥을 갔다 온 덕택입니다. (90면)

 

19. 사실 오늘의 김대중의 지적, 인격적 성숙에는 그 상당 부분이 감옥 생활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곳이야말로 나의 대학이었습니다. 출옥 후에도 일이 바빠 책을 볼 시간이 없을 때에는 정말이지 다시 감옥에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기도 했습니다. (91면)

 

20. 완전한 흑이나 절대적인 백을 고집하는 사람은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92면)

 

21. 우리 말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입니다. 또한 동양에서는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대응 여하에 따라 행과 불행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92면)

 

22. 정독을 하되, 자기 나름의 판단을 하는 사색이 꼭 필요합니다. (99면)

 

23. 흥미가 한 분야로 집중되면 그것을 관심이라고 합니다. 관심을 체계화시킨 것이 연구입니다. (99면)

 

24. 사실 나는 성격상, 누구를 오래 미워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결코 잊지 않습니다. (107면)

 

25. 다시 말하지만 용서하는 것은 인간의 권리가 아니라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용서가 큰 미덕이라기보다는 용서하지 않는 것이 큰 잘못입니다. 사실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 참용서요, 인간 승리의 극치입니다. 용서하는 삶, 그 삶은 바로 용서받는 삶이요,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삶입니다. (116면)

 

26. 민주주의를 하면, 국민들의 비판과 요구가 상부에 전달됩니다. 그리고 그 비판이 정당하게 수용되지 못하고, 요구가 실현되지 않으면 국민은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바꾸어 버립니다. 요새 흔히 말하는 정치의 피드백 작용이 원활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재하에서는 의사가 위에서 밑으로 내려올 뿐 밑에서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정권을 바꿀 길도 없습니다. (119면)

 

27. 다시 말합니다. 20세기의 역사는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독재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의 역사입니다. ... 당시의 총장인 로그노프 박사는 "이러한 생각은 처음 들어봤다. 우리의 눈을 새롭게 뜨게 한다. ..."고 말하며, ... (120면)

 

28. 나는 정체를 싫어합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가장 경계합니다.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 왔습니다. 그런 나의 습관은 철따라 가구의 위치를 바꾼다거나 중요한 생각을 할 때는 아예 구상의 공간을 옮기는 것 등에서도 드러납니다. (147면)

 

29. 학자는 책이 한 권이 안 팔려도 자기가 진리라고 믿으면 저서를 출판합니다. 그러나 운동은 다릅니다. 국민의 지지와 동참이 없는 운동은 이미 운동이 아닙니다. (173면)

 

30. 나는 6대 국회 때부터 정치인의 자세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바른 정치인이 되려면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 두 가지를 겸비해야 한다고 말해 왔습니다. 원칙에 대해서는 서생과 같이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되, 그 방법에 있어서는 상인과 같이 현실에 입각한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184면)

 

31. 셋째, 무엇보다 국민을 하늘로 알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국민을 무서워하지 않는 정치인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몇몇 사람을 일시적으로 속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링컨의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185면)

 

32. 나는 초선의원이나 재선의원들에게 언제나 말합니다. "서둘지 말라. 유명해지려고 초조해하지 말라. 우선 실력을 쌓아라. 그리하여 자기가 속한 상임위에서 제1인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열심히 배우고 생각하라. 더 큰 성공은 그 다음의 일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충고를 지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186, 187면)

 

33. 정치에는 손쉬운 왕도가 없습니다. 원칙을 충실하게 지키고 방법을 현실에 맞춰 유연하게 취해야 합니다. 언제나 국민과 역사를 의식하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눈을 바로 보면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노력해 나가야 합니다. 왕도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 왕도입니다. (190면)

 

34. 나의 경우, 감옥 안에서 네 가지 즐거움을 맛보았습니다. 그 첫째이자 가장 큰 것은 독서의 즐거움이었습니다. (195면)

 

35. 이리하여 나의 감옥 생활은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매우 충만한 것이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진리를 깨닫고 좋은 문학서적을 읽으면서 마음을 살찌게 했습니다. 가족과의 면회와 편지 왕래를 통해서 육친의 사랑을 확인했으며, 결코 혼자가 아님을 느끼며, 감옥 생활을 견뎌 내는 힘을 얻곤 했습니다. (201면)

 

36.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고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자기의 부족한 현재 상황을 직시하고 거기서부터 탈출하려는 의욕으로 연결되는 그런 류의 콤플렉스는 필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5면)

 

37. 삼상지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삼상은 마상, 침상, 그리고 측상입니다. 즉 말 위와 배개 위와 화장실에서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05면)

 

38. 문제는 그 콤플렉스에 져서 체념과 포기를 하느냐 아니면 열심히 노력해서 남 못지않는 실력을 쌓아 자기 발전의 방향으로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208면)

 

39. 나는 사물을 전체와 부분을 같이 보고,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서 예측하며, 시대의 흐름 속에서 내일의 변화를 보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자유롭고 구속받지 않는 상상력으로 문제를 보고,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비교적 사물을 제대로 보고 앞날을 예언해 왔습니다. (211면)

 

40. 용기있는 자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220면)

 

41. 그분(노구치 진로쿠 선생님)은 항상 "삶의 원칙을 확고히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원척을 포기하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원칙을 고수한다고 방법에서 유연하지 못하면 승리자가 되기 어렵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221면)

 

42. 그러나 나의 영어는 아직도 부족합니다. 특히 히어링(hearing)에 약합니다. 나는 이것을 극복하려고 지금도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266면)

 

43. 용서하지 않으면 전투에는 이기더라도 전쟁에는 집니다. (288면)

 

44. 나는 비판을 하면서 두 가지 원칙을 지켜 왔습니다. 하나는 먼저 상대방의 입장이나 장점을 인정해 주는 비판, 그리고 두 번째는 상대방의 인격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하는 비판이빈다. 상대방의 입장이나 장점을 인정해 주지 않으면, 상대방은 비판을 자기에 대한 비난으로 생각하고 수용해 주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 비판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06면)

 

45. 성공을 바라는 젊은이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성공하길 원한다면 먼저 목표를 바르게 세우시오. 그리고 목표가 서면 흔들리지 말고, 10년간 한 우물을 파겠다는 심정으로 밀고 나가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설사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더라도 그러한 당신의 자세만으로도 인생에 있어서 성공 이상의 값진 그 무엇을 얻은 것입니다. (3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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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 살아라
로타 J. 자이베르트 외 지음, 유혜자 옮김 / 김영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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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단순함은 절대 끝나지 않을 여행길의 목적지에서나 만날 수 있는 보석이다. 그 길은 외면 세계에서 내면 세계를 향해 뻗어있다. 단순하게 살아가는 길은 당신의 책상, 당신의 집 그리고 당신의 여가 시간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당신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 인생의 동반자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그리고 친구와 동료에게까지 이어진다. 그 길은 당신의 몸까지 이어져 당신에게 육체적, 정신적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15면)

 

2. 아이젠하워 법칙 ... 이 방법은 미국의 여러 대통령이 집무의 원칙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일명 '아이젠하워 원칙'이라고 알려져 있다. 어지러운 상태를 간단하게 정돈해 주는 방법이다. 옆에 있는 다른 빈 책상이나 바닥을 4등분으로 나눈다. 그런 다음 책상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4등분한 공간 중의 한곳에 놓는다. ... 4등분은 각각 이렇게 분리된다. 버려야 할 것,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지금 해야 할일, 그 외 (25, 26면)

 

3. 이 4분위 원칙은 아래의 원칙을 엄격히 지키기만 하면 100퍼센트 성공한다.

중간에 어설프게 걸쳐 놓은 것들이 없어야 한다.

각 서류를 딱 한 번만 손에 잡아라.

제5구역이나 제6구역 따위는 만들지 말라. (27면)

 

4. "각각의 종이를 딱 한 번씩만 손에 잡고 손에 잡은 즉시 곧바로 해결하라"는 것이 아이젠하워 원칙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의 그것은 아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그들 곁에는 직무가 주어지기만을 기다리는 훌륭한 직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한 채 중간에 걸쳐 놓은 서류들이 늘 생기게 마련이다. (28면)

 

5. 서류 정리함에 꽃아 둔 할 일들을 잊어버리지 않으려면 해야 할 일 목록에 적어 두는 것이 좋다. 그 목록은 탁상용 달력에 기록해 두는 방법이 제일 좋다. (29면)

 

6. 산더미처럼 쌓인 것들을 정리하기 위한 십계명: 중요 서류는 바인더에 최종 보관하라, 별도의 보관 장소를 만들어라, 탁상용 달력을 적어 놓아라, 좋은 이름을 지어라, 지속적으로 변화시켜라, 반응을 빠르게 하라, 결과에 따라 분류하라, 서류철의 앞면을 이용하라, 독창적이 되어라, 정기적으로 비어라 (31, 32, 33면)

 

7. 짜투리 시간을 이용하라. (34면)

 

8. 물건이 120퍼센트 꽉 차고 나서야 반응을 보일 것이 아니라, 75퍼센트 정도 차 있을 때 짐을 덜어 낼 준비를 하라. (37면)

 

9. 단순하게 살기 위한 제안을 하나 하자면, '흔히들 생각하는 행복과 부유함의 순서를 뒤바꾸라'는 것이다. 즉 지금 행복하면 돈을 많이 벌 기회가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이다. 재산에 대한 훌륭한 조언 중 '충분히 갖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부자다'라는 티베트 속담이 있다. 당신이 진실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즐겨라. 그리고 그것을 구입할 수 있는 돈이 있으면 그때 바로 구입하라. (75, 76면)

 

10. 이제 기분을 좋게 만들고, 분명한 그림을 눈앞에 그려라. 그리고 성공한 사람들처럼, 쟁취하고 싶은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삶의 목표를 세우라. (78면)

 

11. 많은 부자들은 설령 자기가 현금카드 광고 모델로 나섰다 하더라도 현금을 애용한다. 지갑이 꽉 차 있으면 부자가 된 듯 기분이 들어 좋고, 갖고 있는 돈 이상을 지출할 수도 없다. (86면)

 

12. 당신은 어떤 일을 제일 좋아하는가? 무엇을 하면 당신 가슴이 고동을 치는가? 바로 그 일을 시작하는 것이 제일 좋다. (100면)

 

13. 목표를 어중간하게 잡는 일을 절대로 하지 마라. 여러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되지 말고, 뚜렷하게 부각되는 최고가 되라. (101면)

 

14. 이익의 극대화가 아니라 고객에게 손에 잡히는 이익을 주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원하는 소득을 얻을 수 있다. (101면)

 

15. 윈스턴 처칠은 죽는 순간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절대, 절대, 절대,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102면)

 

16. 기부는 실제로 지출을 줄이는 효과를 준다. 당신의 무의식 세계가 당신에게 기부하고 난 후에 돈을 절약해서 쓰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105면)

 

17. 기관에만 기부하지 말고, 구체적인 사람을 정해서 기부하는 게 좋다. 다른 사람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것만큼 당신 자신에게 성공을 위한 동기 부여를 해주는 일도 없다. 속담에도 남을 가르쳐 주는 것이 최고의 학습 방법이라는 말이 있다. (105면)

 

18. 월초에 일정 금액을 저축하라. (110면)

 

19. 하루에 딱 한 가지만 1순위에 올려놓아라. (116면)

 

20. 실수하는 사람이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 (120면)

 

21. 자주 아니오!라고 말함으로써 부담에서 벗어나자. (131면)

 

22. 건강한 자신감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게 도와준다. (132면)

 

23. 컴퓨터 게임이나 인터넷 사용을 자제하라. (158면)

 

24.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두 번째 문장부터 시작하라. (158면)

 

25. 가장 흥미로운 자료 세 개만 건지고 나머지는 버려라. 기분이 분명히 나아질 것이다. 건진 자료는 그 날 당장 읽고, 가능한 한 버려라. (162면)

 

26. 잡지를 볼 때는 칼을 갖고 보라. 쓸 만한 기사를 보면 칼로 잘라 내라. (162면)

 

27. 책에 자기에게 맞는 목차를 만든다. 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부분을 읽게 되면 책 뒷장에 색인표를 만들어 놓는다. (163면)

 

28. 가장 큰 행복은 해변가에서 안락의자에 누워 있을 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삶의 최고의 순간은 수동적이거나 긴장을 푼 상태가 아니라, 육체와 정신이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을 때 다가온다. 행복은 당신의 마음속에 호기심의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느끼고 그 불꼿에서 열정이 불타오를 때 느껴진다. (177면)

 

29. 완벽한 외모를 머릿속으로 그려라. (185면)

 

30. 날마다 체중을 재보자. (186면)

 

31. 아침에는 과일만 먹어라. (187면)

 

32. 점심 식사는 원하는 만큼 마음껏 먹어라. (187면)

 

33. 저녁 식사량을 줄여라. (188면)

 

34. 긍정적인 사고를 하자. (196면)

 

35. 여유를 갖고 살아라. (200면)

 

36. 아침을 준비하자. (200면)

 

37. 시카고 대학교의 스포츠 의학 전문가가 아침에 마시는 음료를 조사한 결과, 녹차가 건강에 가장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201면)

 

38. 자신의 장례식을 준비하라. (216면)

 

39. 근엄한 죽음이 되도록 하라. (217면)

 

40.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에너지를 충전시켜라. (247면)

 

 

제1제안: 일터를 정리 정돈하라.

 

제2제안: 사무실에 서류가 쌓이지 않게 하라.

 

3. 주변에 있는 쓸데없는 것들을 없애라.\

 

4. 건망증을 무력화시켜라.

 

5. 돈의 흐름을 차단하는 요소를 제거하라.

 

6. 돈에 걸려 있는 마술을 풀어라.

 

7. 빚을 지지 마라.

 

8. 안전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버려라.

 

9. 부에 대한 나만의 기준을 정하라.

 

10. 같은 일을 두 번 하지 마라.

 

11. 삶을 완벽하게 만들지 마라.

 

12. 자주 아니오!라고 말함으로써 부담에서 벗어나자.

 

13. 속도를 높여라.

 

14. 가끔 잠적하라.

 

15. 육체적 행복의 원천을 찾아내라.

 

16. 열정에 불을 붙이자.

 

17. 몸매 이야기에 너무 기죽지 말라.

 

18. 몸에 군더더기가 붙지 않게 하라.

 

19. 긴장을 적절하게 풀자.

 

20. 네트워크를 통해 섬을 탈출하라.

 

21. 가족간의 연결 고리를 정돈하라.

 

22. 자신의 장례식을 간소하게 하라.

 

23. 질투심에서 벗어나라.

 

24. 화를 내지 말라.

 

25. 인간 관계를 넓게 가져라.

 

26. 대화에 극적인 요소를 제거하라.

 

27. 공과 사를 확실히 나누어라.

 

28. 성욕의 속박에서 벗어나라.

 

29. 노년의 계획을 배우자와 함께 오늘 당장 세우라.

 

30. 삶의 목표를 발견하라.

 

31. 자신의 장점을 발전시켜라.

 

32. 양심에 부담을 덜어 주자.

 

33.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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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 경제학 최대의 변수는 '애정'이다, 개정판
존 러스킨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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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음 네 편의 논문은 1년 반 전에 ‘콘힐 매거진’에 발표되고 나서, 내가 듣기로는 그 독자들 대다수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논문들이야말로 내가 지금까지 쓴 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글, 다시 말하면 가장 진실하고 가장 표현이 적절하고 가장 유익한 글이라고 믿는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논문은 특별히 공들여 쓴 글이어서, 아마 내 평생에 가장 뛰어난 명문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37면)




2. 그러므로 부에 관해 정확하고 확고부동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 다음 논문들의 첫 번째 목적이었고, 두 번째 목적은 부의 획득이란 궁극적으로 사회의 어떤 도덕적 조건 아래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조건들 가운데 첫째는 정직이 존재한다는 믿음과 실제로 정직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믿음인 것이다. (41면)




3. 즉, 정직한 인간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신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의 하나이고, 현재로서는 희귀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믿을 수 없거나 기적적인 존재는 결코 아니며, 비정상적인 존재는 더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정직은 경제의 궤도를 혼란시키는 불온한 힘이 아니라 일관된 지배력이다. 다른 힘에 복종하지 않고 오로지 그 힘에만 복종하면, 경제의 궤도는 계속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41면)




4. 우리나라 실업계의 거물들에게서 충분한 양의 정직성을 얻을 수 있다면 노동을 조직화하기는 쉽고, 노동 조직은 어떤 다툼이나 어려움도 없이 순조롭게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업계의 거물들에게 정직성을 얻지 못하면, 노동의 조직화란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43면)




5. 하지만 독자들에게 잊지 말고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바는, 인간성의 요소 같은 지극히 미묘한 요소를 다루는 학문에서는 계획의 직접적인 성공을 보증할 수 없고 다만 근본 원리들의 궁극적인 진리밖에 보증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가장 훌륭한 계획 중에서도 무엇을 당장 성취할 수 있는지는 항상 의문이고, 궁극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48면)




6. 다양한 시대를 통해 수많은 인류의 마음을 지배해 온 갖가지 망상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기묘한 - 어쩌면 가장 명예롭지 못한 - 망상은, 사회적 행동의 규범은 사회적 애정의 작용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결정되는 것이 유리하다는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는, 소위 경제학이라는 근대의 학문일 것이다. (51면)




7. 일치시킬 수 있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어떤 종류의 ‘학문’도 사람들의 의견을 일치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54면)




8. 이런 상호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은 한없이 다양하기 때문에, 득실의 균형에서 행동의 법칙을 연역하려는 노력은 모두 헛수고로 돌아간다. 아니, 그것은 본래 헛수고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 득실의 균형이 아니라 정의의 균형을 통해서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이 인간을 창조한 조물주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은 태초부터 득실을 확인하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을 헛수고로 만들어 왔다. (56면)




9.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인이 증기나 자력이나 중력처럼 계산할 수 있는 힘을 동력으로 삼는 기관이라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하인은 그와는 반대로 영혼을 동력으로 삼는 기관이다. 영혼이라는 이 특수한 힘은 경제학자들이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모든 방정식 속에 하나의 미지수로 들어와, 그들의 계산 결과를 모조리 그르쳐 버린다. (58면)




10. 주인이 하인에게 최대한 많은 일을 시키려고 애쓰지 않고, 하인이 하기로 약속되어 있고 꼭 필요한 일도 하인에게 도움이 되도록 애쓰고, 또한 정당하고 건전한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하인의 이익을 늘리려고 애쓴다면, 그런 애정을 받은 하인은 궁극적으로 최대한 많은 일을 해냄으로써 주인에게 최대한 많은 도움을 주어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이다. (59, 60면)




11. 나는 여기서 애정을 완전히 하나의 동력으로 생각하고 있고, 애정 그 자체를 바람직하거나 고귀한 것, 또는 추상적으로 좋은 것으로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 나는 애정을 단순히 하나의 변칙적인 힘, 평범한 경제학자의 계산을 모조리 만들어버리는 이상한 힘으로 보고 있다. (60, 61면)




12. 따라서 고용주가 고용인들을 정당하게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아들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고용인이 되었을 경우 그 아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생각해 보고, 지금 고용인들을 그렇게 다루고 있는지 엄숙하게 자문해 보는 것이다. (80면)




13. 강한 의지와 성실한 마음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은 우리 대다수가 배운 경제 원칙을 단호히 거부하고 경멸한다. (81, 82면)




14. 1기니가 가진 힘의 정도는 그 돈에 대한 이웃사람의 필요나 욕망에 정확하게 좌우된다. 따라서 보통의 상업적 경제학자가 말하는 부자 되는 기술은 필연적으로 여러분의 이웃을 계속 가난 속에 방치해 두는 기술인 것이다. (87면)




15. 정치적 경제학 - 국가의 경제학 또는 시민의 경제학 -은 단순히 유용하거나 쾌락을 줄 수 있는 사물을 가장 적당한 때에 장소에서 생산하고 보존하고 분배하는 것이다. (87면)




16.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상업적 경제학 - 메르케스즉 보수의 경제학 -은 타인의 노동에 대한 법률적 또는 도덕적 청구권이나 지배력을 개인의 수중에 축적하는 것을 의미한다. (88면)




17. ‘부’라는 명목 하에 사람들이 실제로 욕심내는 것은 본질적으로 타인에 대한 지배력이다. (90면)




18. 그리고 이 부의 힘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지배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가난에 정비례하고, 또한 우리만큼 부자이고 공급이 제한되어 있는 물품에 대해 우리와 동등한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에 반비례한다. (90면)




19. 신체에서 병든 부분에 혈액이 편향되면 필연적으로 온몸의 건강이 쇠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가 병적으로 일부에만 편향되면 결국 국가 전체의 자원이 쇠퇴하게 된다. (94면)




20. 그 부의 진정한 가치는 거기에 붙어 있는 도덕적 기호에 달려 있다. (100면)




21. ‘가장 값싼 시장에서 사고, 가장 비싼 시장에서 팔라’는 -또는 어느 상황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근대 사상 만큼 인간의 지성에 수치스러운 사상은 내가 아는 한 역사에 한 번도 기록된 적이 없다. (103면)




22. 그리고 빈자는 부자의 재산을 침해할 권리가 없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주지되고 공언되어 왔지만, 동시에 부자 역시 빈자의 재산을 침해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도 주지되고 공언되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 (144면)




23. 그(존 스튜어트 밀)가 많은 경제학자들 가운데서 특히 존경을 받는 까닭은 그가 무심결에 자기가 말하고 있는 원칙을 포기하고 자신의 학문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스스로 공언하고 있는 도덕적 고찰을 암암리에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저서 내용은 대부분 진리이고 귀중하다. 다만 그의 결론 가운데 내가 반박해야 하는 것은 그의 전제에서 당연히 나오는 결론뿐이다. (153면)




24. 밀의 생각에 따르면 유용성과 쾌락성은 교환가치의 근저에 있고, 어떤 물건이 그 두 가지 성질을 갖추고 있는 것이 확인되어야만 비로소 그 물건을 부의 물체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런데 물건의 경제적 유용성은 물건 자체의 성질만이 아니라 그 물건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과 사용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의 수에도 달려 있는 것이다. ... 따라서 모든 물질의 유용성은 하나하나가 그것과 상대적인 인간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물건의 쾌적성이란 것도 그 물건을 사람들이 좋아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의 수에도 달려 있다. (155면)




25. 즉, 그들도 이미 잘 알고 있는 ‘발로렘valrorem’(‘가치’라는 뜻의 라틴어)이라는 낱말의 주격은 ‘발로르valor’이고, 따라서 이 말도 그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발로르는 ‘발레레valere’에서 나온 말인데, 건강한 것 또는 강한 것 -(만약 인간이라면) 생명 안에서 강한 것, 즉 용기 있는 것, (만약 물건이라면) 생명을 위해 강한 것, 즉 가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치 있는’ 것은 ‘생명에 유익한’ 것이다. 진실로 가치 있는, 즉 유익한 것은 생명을 향해 온 힘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161면)




26. 독자들은 소유, 즉 ‘가지고 있다’는 것이 결코 절대적인 힘이 아니라 단계적인 힘이라는 것, 그리고 그 힘은 그 소유되는 물건의 분량이나 성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 대한 적합성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활력에도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165면)




27. 부는 단순히 ‘가진다’는 사실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다’는 사실에도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66면)




28. 따라서 어떤 물건이 유용할 수 있으려면, 물건 자체가 유용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의 손에 있어야 한다. 즉, 정확히 말하면 유용성이란 용기 있는 사람의 손에 있는 가치인 것이다. (168면)




29. 그러므로 부는 ‘용기있는 자에 의한 가치 있는 것의 소유’이고, 부를 한 나라 안에 존재하는 힘으로 고찰할 때는 물건의 가치와 그 소유자의 용기라는 두 가지 요소를 함께 평가해야 한다. (168면)




30. 확실히, 칭찬받을 만한 자격을 가진 자들 가운데 재산을 모으는 자보다 파산하는 자가 더 많다. (170면)




31. 교환에 관해 먼저 주의해야 할 점은, 교환에는 ‘이윤profit’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윤 - 영어 ‘profit’은 ‘앞서 만드는 것’ 또는 ‘...을 위해 만드는 것’이라는 뜻의 라틴어 ‘proficio’에서 나왔다-은 오로지 노동에만 존재할 수 있다. 교환에는 단지 이익이 존재할 뿐이다. 이익은 교환 당사자에게 편의나 힘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172면)




32. 이윤, 즉 물질적 이득은 건설과 발견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고 교환에 의해서는 얻을 수 없다. 교환으로 물질적 이득을 얻는 경우에는 언제나 그 ‘플러스’에 대해 정확히 똑같은 양의 ‘마이너스’가 반드시 존재한다. (173면)




33. 게다가 현명한 소비는 사실 현명한 생산보다 훨씬 어려운 기술이다.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 스무 명이라면 돈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뿐이다. 개인이나 국가에 중요한 문제는 결코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느냐?’가 아니라 ‘그 돈을 어떤 목적에 쓰느냐?’인 것이다. (185면)




34. 부자는 빈자에게 식량만 거절하고 있는 게 아니다. 지혜도 거절하고 미덕도 거절하고 구원도 거절하고 있다. (201면)




35. 먹고살 권리도 주장해야 하지만, 그보다 큰 소리로 주장해야 할 것은 거룩하고 완전하고 순수할 권리인 것이다. (201면)




36. 우리에게 필요한 인물의 본보기는, 세상에서 출세하고 안 하고는 하늘에 맡긴 채, 자기는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기로 작정하고, 더 많은 부보다는 더 소박한 쾌락을, 더 높은 지위보다는 더 깊은 행복을 추구하기로 마음먹고, 마음의 평정을 제일 중요한 재산으로 삼아, 평화로운 생활에 대해 무해한 자부심과 평온한 추구에서 명예심을 느끼는 사람들인 것이다. (209, 210면)




37. 돈을 더 많이 모으는 데 신경 쓰지 말고, 돈을 유용하게 쓰는 데 마음을 써야 한다. 그리고 명백하고 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 - 모든 경제의 규칙이자 근본 -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즉, 한 사람이 무언가를 소유하면 다른 사람은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 어떤 종류의 물건이든 사용되거나 소비된 물건에는 꼭 그만큼의 인간의 생명이 소비되었다는 것, 그렇게 사람의 생명을 소비한 결과 현재의 생명을 구하거나 더 많은 생명을 얻게 되면 그것은 좋게 소비된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그만큼 생명을 방해하거나 죽인 결과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211, 212면)




38. 대담하게 베일을 벗고 빛을 똑바로 보라. (2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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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회고록
디디에 에리봉 지음, 송태현 옮김 / 강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1. 어쨌거나 난 법학에 질려버렸고, 철학으로 방향 전환을 했어요. (21면)




2. 둘째 해에는 정말로 그랬어요. 싫증이 나기 시작했던 거죠. 거기다 무엇보다도, 떠나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어요. (28, 29면)




3. 나는 마르크스를 읽고 하나의 세계를 발견했고, 그 계시의 충격에 휩싸여 있었지요. (29면)




4. 고백하건대 당시 나는 내가 사회당의 철학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아주 강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30면)




5. 난 민족학자ethnologue가 되고 싶어했지요. 그런데 당시로선 사회학과 민족학 사이의 경계에 작은 구멍들이 많이 나 있었어요. (31면)




6. 유년기 이래로 나는 이국적인 것에 관한 호기심이 대단했어요. 조금씩 저축해놓은 돈을 골동품을 사는 데 써버리곤 했죠. 이러한 기질적인 요인 이외에도, 1930년경 민족학이라 명명된 학문 분야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학문이 공식적인 지위를 획득하기를 갈망하고 있음이 신진 철학자들 사이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31면)




7. 게다가 나는 그와 함께든 다른 이들과 함께든 내가 유능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늘 품고 있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죠. 난 감히 콜레주 드 프랑스College de France에 가서 청강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곳은 대단한 장소라고, 나보다 실력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33면)




8. 학생들은 지식에 대한 엄청난 갈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우리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과학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그들은 모든 주제의 책을 탐독했으니까요. 그러나 이차, 삼차 자료들을 통해서 얻은 것들이었죠. 우리의 임무는 그들이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기보다는 그들에게 지적인 훈련을 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35, 36면)




9. 나는 현장 연구가가 아니었던 뒤르켐에 대해 반란을 꾀하는 민족학에 마음이 끌리고 있었어요. 당시 나는 현장 민족학을 영국인들과 미국인들을 통해서 발견하고 있었죠. 그러니 나로서는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었던 거지요. 내가 부름 받은 것은 한편으론 프랑스의 영향력과 다른 한편으론 콩트-뒤르켐의 전통을 영속화시키기 위해서였지요. 그런데 내 자신은 앵글로색슨의 영향 아래에서 민족학에 끌리고 있었으니,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했던 겁니다. (37면)




10. 지적으로 엄청난 흥분 상태에 있었죠. 16세기 초창기 탐험가들의 모험을 다시 체험하는 기분이었어요. 나로서는 신세계Nouveau Monde를 발견한 셈이었습니다. (38면)




11. 그렇기 합니다. 하지만 그건 보잘것없는 내 재능 때문이라기보다는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준 것이었죠. 미국의 민족학자들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에 대해서는 상당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니 다른 지역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남반구 쪽으로 관심을 돌렸습니다. 내 작업이 때를 잘 만난 셈이었지요. (43면)




12. 하지만 내가 겪었던 과정으로 볼 때, 더 이상 대학 교수가 될 희망이 없다고 확신하고 나니, 내 머리에 떠올랐던 모든 것들을 이야기해보자는 계획이 생겨났어요. (96면)




13. ‘슬픈 열대’를 집필한다는 것이 학문에 죄를 짓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그 책은 최초한 초판에서는 조잡한 오류투성이였습니다. (97면)




14. 당시 내가 이루어놓은 모든 것의 종합이면서 동시에 내가 믿었던 모든 것 혹은 내가 꿈꾸었던 모든 것의 종합이지요. (98면)




15. 최초의 교수직이라고는 말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마르셀 모스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가 담당한 강좌명은 ‘사회학’이었지만 사실상 인류학적인 것이었지요. (102면)




16. 난 미국의 ‘미국인류학자’ 혹은 영국의 ‘인간’에 해당하는 잡지가 프랑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어요. (107면)




17. 나는 우리와는 매우 다르고 멀리 떨어져 있는 문화의 경험을 연구하기를 원했어요. 이는 오직 우리 문화에만, 그것도 과거에만 관심을 기울인 푸코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죠. (117면)




18. 더 많은 자유가 주어지고,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무규율의 정신으로 기울 수 있지요. 정확하고 규칙적인 의무들은 질색입니다. 프로그램에 따르고, 시험을 치르고, 박사 학위 논문을 심사하는 등의 일 말이죠(가끔씩 피할 수 없을 때도 있지만요). 콜레주의 교수에게는 해마다 새로운 주제의 강의를 하는 의무 이외의 의무는 없습니다. (123면)




19. 가장 큰 사건은 아마도 콜레주 건물에 사회인류학연구소를 창설한 일일 것입니다. (124면)




20. 그는 서양 문명의 절대적 우월성을 내세웠고, 나의 상대주의를 비난했어요. 짐작하겠죠. 내 대답은 매우 가혹했습니다. 그랬는데 내가 아카데미에 지원했을 때 그는 나보다 2년 앞서 입회해 있었죠. 그가 날 지지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난 감동을 받았지요. (137, 138면)




21. 오히려 민족학적 기질, 심지어는 고고학적 기질을 갖고 있는 편입니다. 그 때문에 내가 한국을 두루 돌아다닐 때 동행했던, 정치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이던 학생들이 내게 불만을 품었지요. 그들이 서로 이런 말을 나누었다고 누가 내게 전해주더군요. “저 레비스트로스란 사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만 관심을 갖는군.” 어떤 의미에서 그들이 옳았어요. (144면)




22. 1964년부터 1971년까지 당신은 네 권의 ‘신화론’을 발간했죠. ... 그땐 매일 아침 다섯시나 여섯시에 일어나고, 주말이라는 것을 몰랐던 시절이었어요. 진정으로 작업했다고 할 수 있지요. (145면)




23. 당신은 연구실에서 조용히 연구하는 것이 신문들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 그렇고말고요. (148면)




24. 내가 왜 그렇게 많은 작업을 했겠어요? 작업을 할 때면 난 불안한 순간들을 겪습니다. 하지만 작업하지 않을 때면 우울한 권태에 휩싸이고, 내 의식은 나를 괴롭힙니다. 작업하는 삶이 다른 것들보다 나를 더 기쁘게 해주지는 않지만, 최소한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게는 해줍니다. (153면)




25.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는 프로이트 사상이 나의 지적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와 동일한 정도의 역할을 했지요. 프로이트는 표면상 아무리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현상일지라도 합리적인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내게 가르쳐주었습니다. (169면)




26. 사르트르의 관점은, 자신들의 학문이 인간 정신의 기능을 이해하는 방식들 중 하나라고 간주하는 인류학자들의 관점과는 상반된 것으로 보였어요. 한편 사르트르는 인류학을 싫어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구실을 대며 인류학을 제거하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181면)




27. 거기서 사르트르는 민족학자들의 인류학과 철학적 인간학을 구분했습니다. 전자는 인간을 단지 객체로만 파악할 뿐이며, 후자는 사르트르 자신이 수립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서 인간을 객체-주체로 파악한다는 것입니다. (182면)




28. 사르트르는 철학을 닫힌 세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정치적 투쟁을 제외하고, 그는 외부, 특히 과학 영역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했어요. 반면에 메를로퐁티는 과학의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지요. 그는 사르트르에게 결핍되어 있는 호기심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185면)




29. 내가 사르트르를 비판한 것은 그가 역사에 특권을 부여했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 철학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앞서 말했듯이 역사는 신화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요. 사실 역사보다도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없어요. 그러한 열정은 오래 전부터 품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187면)




30.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이 내가 역사를 무시한다고 비판할 때, 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역사를 무시하거나 역사에 등을 돌리는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역사 대신에 당신들 사고 속에서만 존재하는 거대한 발전 법칙들을 설정하기 때문이오.” (195, 196면)




31. 변수와 매개 변수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신적인 오성만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 수 있을 겁니다. 인간은 항상 실수를 해요. 역사가 그걸 증명해주지요. 사람들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3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196면)




32. 그래서 나는 중앙 브라질의 신화 연구에 착수했습니다. 그 결과 나는 이들 인접 민족들의 신화들이 서로 일치하고, 서로 겹치고, 서로 화답하고 혹은 서로 모순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한 민족의 신화를 분석해보면 다른 민족들의 신화도 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 의미론적 전염병 -이렇게 불러도 좋다면-은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점점 확산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앞이 탁 트인 전망대에 올라서면, 넓게 펼쳐진 경치가 또 다른 전망대에 이르도록 자극하고, 거기서 시선이 새로운 방향으로 펼쳐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98, 199면)




33. 그 점을 분명히 해 둡시다. 수개월, 수년 혹은 수십 년을 하나의 민족만을 연구하는 데 헌신하는 민족학자들은 우리 모두의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들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별 볼일 없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이론을 만들어내려 할 때 발생합니다. 단일한 그리고 배타적인 경험을 기초로 하여 이론을 만드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경험은 수백 혹은 수천 가지 중에서 가능한 한 가지 경우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지요. (199면)




34. 우리가 그런 판단을 내릴 때, 우리는 우리 문화의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경우 가치 있는 유일한 기준은 판단하는 당사자의 기준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타문화와 구분되는 삶의 양식과 가치 체계를 지닌 문화에 소속되어 있기에, 나의 문화와 매우 다른 문화들이 자동적으로 내게 매혹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 민족학자로서 그런 문화들을 연구한다면 나는 최대한 공감하면서 객관적으로 연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문화들은 다른 문화들보다 내게 덜 어울립니다. (231면)




35. 가치와 삶의 방식이 자신의 공동체와 부딪히지 않는 공동체에 대해서는 우호적이고, 그렇지 않은 공동체에 대해서는 덜 우호적인 공동체는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덜 우호적인 공동체와도 평온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233면)




36. 단일 문화란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러한 사회가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태초의 시간에서부터 모든 문화는 끊임없이 섞이고, 빌려오고, 혼합하면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 진행 속도가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요. (233면)




37. 영국, 독일 등 모든 서양 사회는 불가능한 동화의 문제에 뚜렷이 직면해 있습니다.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서양 사회에서도 문화들 사이의 공존은 어려운 것으로 보입니다. (234면)




38. 나는 사람들보다는 신앙, 관습, 제도에 더 관심이 많아요. 따라서 나는 현대 세계를 나누는 분쟁들과 동떨어져 그들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 충실하기를 원하는 소수 민족들을 옹호합니다. (234면)




39. 식민주의colonialisme는 서양이 저지른 큰 죄악입니다. ... 민족학이 식민주의의 보호 아래서 태어나고 발전한 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식민주의의 계획과는 달리, 심지어는 그 계획과 반대로 민족학자들은 여러 문화들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기억을 잃어가는 신앙과 삶의 양식을 보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235면)




40. 관찰하려면 바깥에 있어야 합니다. (235면)




41. 그 상황은 역사에 의해 탄생되고 실제로 복잡해진 상황들 중의 하나-다른 상황들도 있습니다-입니다. 법과 정의라는 추상적인 개념의 이름으로는 분명하게 위치시키기가 힘듭니다. (239면)




42. 텔레비전은 거의 보지 않아요. 안 그러면 독서할 시간이 없거든요. 신문은 읽습니다. 나는 정치에서 진행되는 일들을 통해 교양인으로서 지식을 얻으려고 노력해요. 나는 일간지 두 종과 주간지 세 종을 구독합니다. (241면)




43. 각 사회는 자신의 원칙과 가치를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해줄 능력이 있을 때 유지됩니다. 어떤 사회가 아무것도 전달해줄 것이 없다고 느끼거나, 무엇을 전달해야 할지 더 이상 모른다거나, 다음 세대에 의지하게 되면 그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244면)




44. 그 글에서 내가 제안한 것은, 미국 독립과 프랑스 혁명 이래로 사람들이 해왔듯이 한 생명 종의 유일하고 특권적인 특성에 의거해서 인권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인권을 모든 종의 생물들의 권리 가운데 개별적인 하나의 권리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인권을 협소한 관념으로 이해할 때보다 더 넓은 합의를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이를 것이라고 나는 그 글에서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견해는 역사적으로 스토아 철학과 연결되고,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극동의 철학들과도 연결되기 때문이지요. (249면)




45. 내가 이 ‘주체’ 논쟁에서 참기 어려운 점은, 데카르트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 철학 전통의 신봉자들이 보여주는 불관용입니다. 모든 것이 주체에서 시작되고, 온통 주체뿐이지요. 나는 사물과 그와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려고 했으며, 사람들이 그러한 권리를 부인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249면)




46. 왜냐하면 전통 철학이 독점권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전통 철학으로부터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공공연히 싸워야 했지요. 전통 철학이 많은 접근 방식들 중 하나임을 인정하기만 하면 분쟁은 사라집니다. (249, 250면)




47. 문화상대주의는 한 문화가 이 구분을 다른 문화권의 작품에다 적용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할 따름입니다. 반면에 각각의 문화는 자신의 문화 내에서는 우열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고, 또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구성원들은 관찰자인 동시에 참여자이기 때문이지요. (252면)




48. 나와 루소의 관계는 애매합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나로 하여금 사유하게 합니다. 루소를 읽노라면 나는 열광합니다. 나의 인식 속에서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구분이 어려워집니다. (258면)




49. 그(제아미 모토기요)는 말하기를, 좋은 연기자가 되려면 관객이 연기자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했죠. 그러면서 그는 ‘멀리서 본 시선’이란 표현을 사용했어요. 나는 그 표현이 자신의 사회를 바라보는 민족학자의 태도를 대단히 잘 표현해준다고 생각했어요. 민족학자 자신이 그 사회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관찰자로서 그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지요. (27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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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젠의 자기증언
한스 켈젠 지음, 심헌섭 옮김 / 법문사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1. ... 나의 “법규의 이론에서 전개한 국법학이론의 주요문제”가 1911년(제2판으로는 1923년)에 출판되었다. 나는 이 연구에 대한 결정적 관점을 다음의 통찰, 즉 법이란 그 본질상 규범이며, 따라서 모든 법철학이론이란 규범이론, 법규들에 관한 이론 그리고 그래서 객관적인 법에 관한 이론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부터 획득했다. (30면)




2. 법은 필연적으로 규범이라는 통찰로부터 모든 주관적인 법(권리)이란 객관적인 법에로 환원되어야 하고 그리고 우리의 법체계화에 대해 그렇게 숙명적인 객관적인 법과 주관적인 법의 이원주의는 모두 지양되어야 한다는 것이 추론되었다. 객관적인 법의 체계와 주관적인 법의 체계라는 두 체계들의 대립은 하나의 체계내적 차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공법과 사법의 이원주의에 대해서도 이러한 점을 전적으로 유추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주요문제들’을 연구할 동안 나는 객관적인 법과 주관적인 법, 사법과 공법의 이원주의 배후에 숨어있는 전래적인 이론들의 정치적 경향들을 아직 명백히 의식하지 못했다. ... (31면)




3. 법학에 대해 불가결적인 방법순수성은 어느 철학자에 의해서도 칸트에 의해 강조된 당위와 존재의 대립보다 더 예리하게 보장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칸트의 철학은 아주 처음부터 나를 인도하는 별이었다. 나는 이를 처음은 서남독철학파, 특히 빈델반트를 통해 보존된 형태로 받아들였다. (32, 33면)




4. 극도의 방법순수성을 목표로 삼는 마르부르그학파의 칸트철학에 깊이 파고듦으로써 나는 법률학 이론이 저자들의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정치적 경향들을 통해 심히 우려스럽게 흐려지게 되는 것을 날카롭게 보게 되었다. 이러한 방향의 첫 결과는 공법논총 제31권(1919)에 실린 ‘공법적 법률행위에 관한 이론’이라는 논문이었다. 이제 나는 지배설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가장 의미 깊은 제3의 이원주의, 즉 주관적인 법과 객관적인 법, 사법과 공법이라는 앞에서 말한 두 대립의 바탕이 되는 법과 국가의 대립도 인식했다. (33면)




5. 제1차 대전 중에 썼던 법과 국가의 관계를 다룬 연구는 출간되지 못했다. 그것의 결과들은 본질적으로 국가와 법의 통일성의 통찰인데 - 여기서 법은 오직 실정법인 것으로 전제되었음 -, 이는 내가 국가 주권과 국제질서에 대한 개별 국가 법질서의 관계를 다룬 책 속에서 다듬어졌다. 이것이 “주권의 문제와 국제법의 이론”(1920)이라는 저서이다. (33, 34면)




6. 국가와 실정법의 동일성에 관한 나의 주장에 대한 강력한 반대는 나로 하여금 국가가 항상 주장되는 것처럼 모든 법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로서 사회학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물음을 탐구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사회학적 및 법률학적 국가개념”(1922)이라는 저서이다. (35면)




7. 법이론의 가장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는 - 비록 방법적 기초가 없어 이때까지 한 번도 명백히 되지 않았지만 - 이전부터 법질서가 그것이 규율하는 인간행위와 관련해서 지니게 되는 의심의 여지없는 규범적 의미가 마찬가지로 의심의 여지없는 다음의 사실, 즉 이 법질서에 어느 정도 일치하는 사실적 사태가 이 법질서를 당위적 효력을 갖는 법질서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필요조건이라는 사실과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느냐이다. 이것은 법개념에서의 당위와 존재의 관계의 문제이다. (36, 37면)




8. 내가 법을 규범으로 그리고 그것의 존재형식을 당위로 일컫고 그리고 이에 따라 규범적 법학과 존재설명에로 지향된 사회학 사이의 순수한 분리를 요구했을 때 나는 하나의 관계, 즉 효력 있는 법질서의 내용과 그것에 일치하는 사회적 존재의 내용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법실증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나의 시도는 - 나의 책 “주권의 문제”에서는 물론 “사회학적 및 법률학적 국가 개념”에서의 자세한 설명도 이에 관한 것이지만 - 이때까지의 이론들의 특징이었던 일면성을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법률로만 시야를 좁혔던 옛 저자들은 규범들의 당위 의미만을 고찰했고 그리고 이에 따라 실증성의 요소를 바르게 평가할 수 없었는 데 반해, 새로운 저자들, 즉 이른바 사회학적 법이론은 법을 존재로만 파악하려고 시도했고, 그 때문에 그것은 어떤 한 내용을 단순히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법적인 것으로 설명하게 될 때 나타나는 특수한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후자의 측에서 나의 이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가 나왔는데, 이는 특히 프리츠 잔더의 글 “법해석학이냐 그렇지 않으면 법경험의 이론이냐?”(공법잡지 제2권)와 그의 저서 “켈젠의 법이론, 1923”에서 표현되었다. 이러한 공격에 대한 나의 대결은 첫 번째로 언급한 잔더의 글을 상대로 한 나의 논문 “법학과 법, 1922”에서 전개되었다. 이는 규범적 법이론과 사회학적 법이론 사이에 뚜렷이 나타났던 일정한 인식론적 차이도 제거했다. (36, 37면)




9. 일반국가론을 전집에 담겠다는 법학 및 국가학 대백과전서 편찬자의 청이 나에게는 이때까지의 나의 연구의 총체적 결과를 종합적으로 서술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여기에서 나는 일반국가론의 종합적 문제들을 진정 체계적으로, 다시 말해서 하나의 유일한 근본원리로부터 서술하려고 노력했다. 국가를 하나의 규범적 강제질서로 파악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이 때까지 일반국가론의 이름 밑에 총괄된 모든 문제들이란 하나의 규범적 강제질서의 효력과 창설들이란 점을 밝히는 것을 통해 이러한 근본문제를 자연스럽게 제시했다는 데서 하나의 확실성을 갖게 되었다. 이 저서는 1925년 출판되었다. (37, 38면)




10. 나는 국가 및 법이론의 문제들 이외에 이미 벌써부터 정치이론의 문제들을 연구했다. 나는 1912년도에서 정치 및 입법을 위한 연보 제2권에서 정치적 세계관과 교육에 관한 긴 논문을 발표했다. 1920년 나는 전문연구서인 “민주주의의 본질과 가치”를 출간했으며, 이 속에서 나는 무엇보다 민주주의 이데올로기가 상대주의적-경험적 근본견해에 합치되고, 이에 반해 권위주의적 형태에로의 경향은 절대주의적-형이상학적 근본견해에 관계된다는 사상을 전개시켰다. (39면)




11. 이 시기에 나로 하여금 정말 정열적으로 문학을 사랑하게 만든 것은 슈필하겐의 소설 “문제적 성격의 사람들”이었다. 내가 2년 전 우연히 캘리포니아대학의 도서관에서 이 책 한 권을 다시 읽었을 때 나는 나의 젋은 시절의 인생관이 얼마나 많이 이 아주 평범한 소설의 염세적(세계고적) 분위기에 의해 영향받았던가를 놀랍게도 새삼 깨달았다. (45면)




12. 문학에서 학문으로의 추이는 이미 나의 문학애호기간 중 점점 철학적 문제에 관심을 갖고서부터 준비되었다. ... 나는 철학, 수학, 물리학을 연구할 의도를 갖고 김나지움을 떠났다. 나는 이러한 의도를 실현하지 못한 것을 일생 아쉬워했다. (47면)




13. 바이닝거의 인격과 그가 남긴 저작의 큰 성공은 학문하겠다는 나의 결심에 본질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50면)




14. ... 그러나 나는 겁내지 않았다. 그 주된 이유는 기존하는 단테-연구문헌 가운데 단테의 국가론에 대한 단행본이 없었고 또 단순한 시험공부로 법정학과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대신에 비록 출판되는 일이 아마도 결코 없을지라도 내가 관심 있는 연구를 시도하는 것이 나은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연구는 박사학위를 받기도 전에 1905년 빈의 국가학 연구총서로 출판되었고, 비교적 큰 학문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것은 내 책들 중 아무런 거부적 비판을 받지 않은 유일한 것이었다. (51면)




15. 나는 단테 알레기에리의 국가론을 연구하는 동안에도 법인, 주관적 법(권리), 그리고 특히 법명제(법규)의 개념과 같은 법이론의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 커져갔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보통의 설명에서 놀랐던 것은 엄정성과 체계적 근거지움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문제제기의 구제할 수 없는 혼동이 있었는데, 한편에서는 무엇이 실정법인 것과 무엇이 - 어떤 가치입장에서 보아 - 법이어야 하는 것과는 늘 혼합되었고, 그리고 주체가 실정법상 어떻게 행위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와 그가 사실상 어떻게 행위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 사이의 한계가 지워졌다. 실정법의 이론은 한편에서는 윤리학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학으로부터 날카롭게 분리하는 것이 절박하게 요청되는 것 같았다. 나중에 내가 헤르만 코헨의 저작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이 내가 바로 체계적인 고려를 근거로 해서가 아니라 보다 더 직감적으로 지향했던 “방법의 순수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51, 52면)




16. 장학금을 받은 후 내가 하이델베르그로 간다는 것을 알리려 베르나칙 교수에게 갔을 때 그는 꽤 명백히 내가 교수가 될 전망은 거의 없을 것이며 변호사나 은행원이 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암시했다. (57면)




17. 나는 옐리네크와도 가까운 개인적 관계를 맺지 못했다. 그는 그의 자만심을 부추겼던 그를 경모하는 학생들의 침투할 수 없는 서클로 둘러싸여 있었다. (57면)




18. 나는 하이델베르그로 오기 전에 그의 저서들을 아주 주의 깊게 읽었으며 그것에서 받은 인상은 그가 법률이론의 분야에서는 아주 약했고 독창적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는 역사적 및 철학적-사회학적 분야에서는 19세기의 국가론에 상당한 기여를 했던 것이다. (58면)




19. 그 밖에 나는 막스 베버를 중심으로 한 서클과는 가깝게 접촉하지 못했는데 그는 당시 하이델베르그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가르쳤고 나는 한참 지난 후에야 그의 저서와 가깝게 되었다. 나는 이 탁월한 사람을 그가 1차 대전 후 빈에서 가르쳤을 짧은 동안에야 알게 되었다. (58, 59면)




20. 이때 나의 유일한 기분전환은 때때로 몰켄쿠어 호텔 위로 산보하는 것과 저녁에는 페르케오 호텔에서 흑맥주 한 잔을 마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는 수년 간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또 가련한 아버지의 병상에서 크게 마음 아팠던 후 나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줄 것으로 소망했던 저서의 연구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었다. 나는 나의 학문분야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는 감정에 아주 도취해 있었다. 나는 여러 후에야 비로소 이미 반 세기 전에 영국의 대 법이론가 존 오스틴이 아주 비슷하게 법학을 근거짓는 시도를 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나는 영어를 하이델베르그에서 비로소 배우기 시작했고, 그리고 당시 영미의 저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59, 60면)




21. 그러나 나는 이 일자리를 곧 그만두었는데 그 이유는 내가 결코 변호사가 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직업은 학문연구를 위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60면)




22. 베르나칙 교수는 아마 나의 교수자격취득논문을 도대체 읽어 보지도 않았다. (62면)




23. 나는 1911년 여름에 국(헌)법학과 법철학의 (사)강사가 되었고 가을에 오스트리아, 헝가리 협정에 대한 강의로서 교수활동을 시작했다. 세계대전 발발까지 3년 동안 나는 몇 개의 부피 큰 연구서를 출간했으며 또 오스트리아 공법잡지를 창립했다. (63면)




24. 자이들러가 교수활동을 그만둔 후 세계대전이 터지기 바로 직전인 1914년에 나는 드디어 정식으로 공법전임이 되었다. 이는 나에게는 아주 의미 깊은 발걸음이었다. 왜냐하면 이제 나는 나의 학문적 연구가 필요한 대상에 전 시간을 바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결과에 대한 나의 기쁨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역아카데미에 전임으로 임명된 지 얼마 안 돼 전쟁이 터졌고 나는 예비역장교로서 내 부대로 소집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심한 폐렴에 걸려 “병역복무는 부적합”하고 “내각사무처 근무만 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나는 처음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육군성의 후생국에 그리고 나중에는 그 법무분과에서 근무했다. (67면)




25. 육군성에서의 나의 지위는 나의 학문적 진로에도 아주 본질적으로 이바지했다. 나는 1915년에 - 정해진 대로 - 정외교수의 ‘명칭’을 획득했고 이 지위는 유대인 출신으로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것으로 보아야만 했다. (78면)




26. 베르나칙이 - 대답으로서 - 내가 어떤 분야의 교수가 되려는지 물었을 때 나는 크게 놀랐다. 나는 군법을 특별히 고려하는 공법분야라고 대답했다. 그 즉시로 그는 그런 신청을 빠른 시일 안에 대학에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사실 그렇게 했고 대학은 즉시 받아들였다. 나는 베르나칙의 태도가 육군성에서의 나의 지위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 지위는 내가 그때까지 출판한 저서보다 더 큰 인상을 그에게 미쳤던 것이다. (78면)




27. 내가 육군성에서 활동한 3년 반은 나의 학문적 연구에 잃어버린 시간은 아니었다. 나는 주권문제라는 커다란 연구를 시작할 충분한 시간을 가졌고 이는 1920년에 “주권의 문제와 국제법의 이론”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나는 또한 1911년과 1914년 사이 내 강의를 들었던 젊은이들을 내 집에서 정규적으로 가졌던 개인세미나로 모이게 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뒤에 국가법과 행정법의 정교수가 된 아돌프 메르클과 뒤에 국제법 정교수가 된 알프레트 페어드로스라는 나의 가장 오래 된 두 제자가 있었고, 이들 둘은 빈 대학교 법과대학에서 근무했으며, 프란츠 잔더는 뒤에 프라하의 독일 대학의 국법학 교수가 되었고 또 발터 헨리히는 뒤에 브루노에 있는 독일공과대학 공법교수가 되었다. ... (80, 81면)




28. 1919년 베르나칙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고 대학에서는 국가법 및 행정법 제2정교수인 멘첼의 동의로 나를 제1순위로 그의 후임으로 건의했다. 그 후 곧 임명이 되었다. 그때 문교성 장관이 사회민주당원인 글뢰켈이었다. 나의 임명은 뜻밖이었다. (82면)




29. 나는 사회민주당에 가입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우선 내가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이론(프롤레타리아독재 - 국가의 고사)을 거부했고 - 나는 나의 책 “사회주의와 국가”에서 이를 자세히 비판했다 - 그리고 그 다음 사회과학 분야의 교수와 연구자는 정당소속이 학문적 독립성을 침해하기 때문에 어떠한 정당에도 가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83, 84면)




30. 내가 빈 대학 법과대학에 국가(헌)법 정교수로 활동한 10년 사이에 나는 특히 “사회과학 및 법률학적 국가개념”을 출간했는데 이는 1925년 베를린에 있는 슈프링어 출판사에서 나온 나의 “일반국가론”에 대한 준비서였다. 나는 국가의 이론을 - 처음부터 - 법이론의 통합적 구성부분으로 고찰했다. 나는 1934년에 발간된 “순수법학”과 나의 책 “법과 국가의 일반이론”(하버드대학교 출판부, 1945)에서 나의 법 및 국가이론을 체계적 통일체로 서술했다. (85면)




31. 즉 이러한 통일체를 구성시키는 것은 특수한 법질서이며, 이러한 통일체를 초-법률적으로, 즉 사회학적으로 근거지우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한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86면)




32. 아마도 내가 이러한 견해에 이른 것은 특히 나와 가장 가까이 놓여 있었고 또 내 개인적 경험으로 가장 잘 알았던 국가인 오스트리아 국가가 명백히 하나의 법적 통일체일 뿐이었다는 것에 연유되었을 것이다. 인종, 언어, 종교 그리고 역사로 보아 그렇게 많은 상이한 집단으로 이루어졌던 오스트리아 국가에 직면해 보면 국가의 통일성을 법률적으로 국가에 속하는 사람들의 특정한 사회심리학적 및 사회생물학적 통일성 위에 근거지우려 했던 이론들은 의제(허구)들이라는 것이 명명백백히 드러났다. (86면)




33. 나는 하나의 스승이 자기의 제자들로부터 자기만 따르는 제자이기만을 바라는 것보다 더 큰 잘못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법이론의 한 학파를 수립하기에 성공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무엇보다 나를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 내에 진실로 생산적인 인재들이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90면)




34. 그(프란츠 잔더)는 교수직을 차지한 것이 확실해지자마자 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대항했는데, 즉 나는 내 이론의 본질적 구성부분을 그로부터 가져왔지만, 이 점을 온당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표절의 비난이었다. 나는 즉시 나에 대한 징계 조사를 신청했고 이것이 나의 전적인 무죄를 밝혔다. (91면)




35. 레너 자신이 제1차 임시헌법의 초안을 만들어 놓았다. 이는 곧 보완이 필요하게 되었다. 나는 이와 관련된 헌법작업에는 때때로만 함께 했다. 나의 주임무는 최종헌법의 초안이었다. (95면)




36. 내가 가장 소중히 여겼고 또 내가 내 개인의 작품으로 고찰했던 부분인 헌법재판제도는 국회심의에서 조금도 변경되지 않았다. (97면)




37. 헌법재판소가 신 연방헌법에 의해 설립되자 나는 그 재판관으로 선임되었고 그리고 곧 재판소에 의해 그 상임담당관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나는 법과대학의 교수로서의 나의 지위를 계속 보유했기 때문에 이 직책을 부직으로만 수행했다. 1929년 헌법개정으로 헌법재판소가 와해되기까지 나는 재판관과 상임담당관으로 있었다. 이 헌법개정으로 인해 나는 오스트리아를 떠나 쾰른대학으로의 초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1929년의 헌법개정은 정치적으로 사회민주당에 대한 기독사회당의 반격이었다. (97, 98면)




38. 헌법재판소는 정부와 갈등관계를 빚었다. 우선은 하나의 판결 때문인데, 여기서 헌법재판소는 연방경찰에 불리한 결정을 내렸다. 그 다음은 - 그리고 이것이 헌법재판소의 제거에 대한 주근거인데 - 면제(특별허가)혼인의 사건에 대한 재판으로 갈등을 빚었다. (99면)




39. 이러한 일들로 나는 깊이 분격했으며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는 것이 싫어졌다. 우연히 원했는지 나는 바로 그 때 쾰른대학에서 초빙을 받았다. 초빙은 내가 이때까지 그리 강도 높게 다루지 않았던 국제법을 강의해 달라는 것이었지만 나는 이것을 수락했다. ... 실정국제법 강의를 하기 위해서는 나는 먼저 철저히 준비하여야 했다. 사실 실정국제법의 연구는 내가 쾰른에서 보낸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것은 1929년 가을에서 1933년 4월까지의 기간이었다. 이들 3년은 나에게는 매우 좋은 기억 속에 남아있다. (111면)




40. 나는 1932년에 쾰른 법과대학의 학장으로 선임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제국 수상이 되었고 나는 나치정부로부터 제1차로 해임된 교수들 중에 들어 있었다. (113면)




41. 제네바 ... 나의 원래 계획은 자연법론의 비판과 결부된 법실증주의의 체계적 이론이었다. 준비연구를 하는 동안 나는 자연법론사가 불가결하다고 보았다. 나는 고대의 자연법론을 대상으로 삼은 원고도 완성했다. 교정쇄를 교정보는 가운데 - 이 책은 빈에 있는 슈프링어 출판사에서 출판할 예정이었다 - 나는 희랍종교가 사회철학에 미친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는 고대 희랍의 자연법론이 서술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115, 116면)




42. 내가 제네바에 있는 동안 하버드대학과 위트레호트 왕립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고, 나아가 프라하 독일대학에서의 짧고 매우 행복스럽지 못한 초빙이 이루어졌다. (119면)




43. 나로서는 읽기는 했으나 말할 수도 또 쓸 수도 거의 몰랐던 영어로 전환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항구적인 교수자리를 찾는 것도 용이하지 않았다. 나는 처음 하버드대학교 로스쿨에서 올리버 웬델 홈즈강좌를 맡았다. (127면)




44. 이 실패는 특히 내가 하버드대학교의 명예박사로서 더 좋은 처우를 기대했기에 매우 마음 상하게 했다. 1942년 여름 나는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에서 1년간의 방문교수로 초청을 받았다. 나는 이를 수락했고 그 이후 이 대학의 로스쿨이 아니라 정치학과에서 국제법, 법철학 그리고 법제도의 기원을 가르쳤다. 1945년 이후 나는 정교수가 됐다. 나의 강의활동은 정말 만족스러웠다. 나의 순수법학은 사실 법과대학에 맞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로스쿨은 법의 학문적 이론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것은 트레이닝 스쿨이고 법직업학교이다. 그 기능은 실제적인 직업인 변호사의 준비이다. 거기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미국법만 가르치고 그것도 케이스 메소드에 의한다. 미국 법원이 판결을 본질적으로 선례에 따라 내리므로 로스쿨들이 강의목표를 학생들로 하여금 가능한 한 많이 케이스에 익숙토록 하는 데 두는 것은 이해된다. 변호사로서의 자기직업을 위해서는 미국의 법과대학생이 오스트리아나 독일 법률가보다 더 낫게 준비하는 것은 확실하다. 학문적 대상으로서의 법은 아마 철학과 역사학과, 사회학과에 더 잘 맞는다. 내가 여기 정치학과에 섭섭한 것은 똑똑하고 열심이고 개인적으로 모두가 매우 호감이 가는 학생들이 학문적 연구에는 비교적 낮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128, 129면)




45. 그러나 나의 교수활동은 나에게 학문연구를 위한 시간이 된다. 대학도서관은 훌륭하고 기후나 환경은 더 바랄 것이 없다. 나는 버클리에서 정원이 달린 조그마한 집을 장만했는데 이 정원에는 장미가 피어 나를 크게 기쁘게 한다. (129면)




46. 여기가 아마도 “유랑에 지친 자의 마지막 쉴 곳”일 것이다. (1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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