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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젠의 자기증언
한스 켈젠 지음, 심헌섭 옮김 / 법문사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1. ... 나의 “법규의 이론에서 전개한 국법학이론의 주요문제”가 1911년(제2판으로는 1923년)에 출판되었다. 나는 이 연구에 대한 결정적 관점을 다음의 통찰, 즉 법이란 그 본질상 규범이며, 따라서 모든 법철학이론이란 규범이론, 법규들에 관한 이론 그리고 그래서 객관적인 법에 관한 이론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부터 획득했다. (30면)
2. 법은 필연적으로 규범이라는 통찰로부터 모든 주관적인 법(권리)이란 객관적인 법에로 환원되어야 하고 그리고 우리의 법체계화에 대해 그렇게 숙명적인 객관적인 법과 주관적인 법의 이원주의는 모두 지양되어야 한다는 것이 추론되었다. 객관적인 법의 체계와 주관적인 법의 체계라는 두 체계들의 대립은 하나의 체계내적 차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공법과 사법의 이원주의에 대해서도 이러한 점을 전적으로 유추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주요문제들’을 연구할 동안 나는 객관적인 법과 주관적인 법, 사법과 공법의 이원주의 배후에 숨어있는 전래적인 이론들의 정치적 경향들을 아직 명백히 의식하지 못했다. ... (31면)
3. 법학에 대해 불가결적인 방법순수성은 어느 철학자에 의해서도 칸트에 의해 강조된 당위와 존재의 대립보다 더 예리하게 보장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칸트의 철학은 아주 처음부터 나를 인도하는 별이었다. 나는 이를 처음은 서남독철학파, 특히 빈델반트를 통해 보존된 형태로 받아들였다. (32, 33면)
4. 극도의 방법순수성을 목표로 삼는 마르부르그학파의 칸트철학에 깊이 파고듦으로써 나는 법률학 이론이 저자들의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정치적 경향들을 통해 심히 우려스럽게 흐려지게 되는 것을 날카롭게 보게 되었다. 이러한 방향의 첫 결과는 공법논총 제31권(1919)에 실린 ‘공법적 법률행위에 관한 이론’이라는 논문이었다. 이제 나는 지배설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가장 의미 깊은 제3의 이원주의, 즉 주관적인 법과 객관적인 법, 사법과 공법이라는 앞에서 말한 두 대립의 바탕이 되는 법과 국가의 대립도 인식했다. (33면)
5. 제1차 대전 중에 썼던 법과 국가의 관계를 다룬 연구는 출간되지 못했다. 그것의 결과들은 본질적으로 국가와 법의 통일성의 통찰인데 - 여기서 법은 오직 실정법인 것으로 전제되었음 -, 이는 내가 국가 주권과 국제질서에 대한 개별 국가 법질서의 관계를 다룬 책 속에서 다듬어졌다. 이것이 “주권의 문제와 국제법의 이론”(1920)이라는 저서이다. (33, 34면)
6. 국가와 실정법의 동일성에 관한 나의 주장에 대한 강력한 반대는 나로 하여금 국가가 항상 주장되는 것처럼 모든 법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로서 사회학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물음을 탐구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사회학적 및 법률학적 국가개념”(1922)이라는 저서이다. (35면)
7. 법이론의 가장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는 - 비록 방법적 기초가 없어 이때까지 한 번도 명백히 되지 않았지만 - 이전부터 법질서가 그것이 규율하는 인간행위와 관련해서 지니게 되는 의심의 여지없는 규범적 의미가 마찬가지로 의심의 여지없는 다음의 사실, 즉 이 법질서에 어느 정도 일치하는 사실적 사태가 이 법질서를 당위적 효력을 갖는 법질서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필요조건이라는 사실과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느냐이다. 이것은 법개념에서의 당위와 존재의 관계의 문제이다. (36, 37면)
8. 내가 법을 규범으로 그리고 그것의 존재형식을 당위로 일컫고 그리고 이에 따라 규범적 법학과 존재설명에로 지향된 사회학 사이의 순수한 분리를 요구했을 때 나는 하나의 관계, 즉 효력 있는 법질서의 내용과 그것에 일치하는 사회적 존재의 내용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법실증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나의 시도는 - 나의 책 “주권의 문제”에서는 물론 “사회학적 및 법률학적 국가 개념”에서의 자세한 설명도 이에 관한 것이지만 - 이때까지의 이론들의 특징이었던 일면성을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법률로만 시야를 좁혔던 옛 저자들은 규범들의 당위 의미만을 고찰했고 그리고 이에 따라 실증성의 요소를 바르게 평가할 수 없었는 데 반해, 새로운 저자들, 즉 이른바 사회학적 법이론은 법을 존재로만 파악하려고 시도했고, 그 때문에 그것은 어떤 한 내용을 단순히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법적인 것으로 설명하게 될 때 나타나는 특수한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후자의 측에서 나의 이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가 나왔는데, 이는 특히 프리츠 잔더의 글 “법해석학이냐 그렇지 않으면 법경험의 이론이냐?”(공법잡지 제2권)와 그의 저서 “켈젠의 법이론, 1923”에서 표현되었다. 이러한 공격에 대한 나의 대결은 첫 번째로 언급한 잔더의 글을 상대로 한 나의 논문 “법학과 법, 1922”에서 전개되었다. 이는 규범적 법이론과 사회학적 법이론 사이에 뚜렷이 나타났던 일정한 인식론적 차이도 제거했다. (36, 37면)
9. 일반국가론을 전집에 담겠다는 법학 및 국가학 대백과전서 편찬자의 청이 나에게는 이때까지의 나의 연구의 총체적 결과를 종합적으로 서술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여기에서 나는 일반국가론의 종합적 문제들을 진정 체계적으로, 다시 말해서 하나의 유일한 근본원리로부터 서술하려고 노력했다. 국가를 하나의 규범적 강제질서로 파악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이 때까지 일반국가론의 이름 밑에 총괄된 모든 문제들이란 하나의 규범적 강제질서의 효력과 창설들이란 점을 밝히는 것을 통해 이러한 근본문제를 자연스럽게 제시했다는 데서 하나의 확실성을 갖게 되었다. 이 저서는 1925년 출판되었다. (37, 38면)
10. 나는 국가 및 법이론의 문제들 이외에 이미 벌써부터 정치이론의 문제들을 연구했다. 나는 1912년도에서 정치 및 입법을 위한 연보 제2권에서 정치적 세계관과 교육에 관한 긴 논문을 발표했다. 1920년 나는 전문연구서인 “민주주의의 본질과 가치”를 출간했으며, 이 속에서 나는 무엇보다 민주주의 이데올로기가 상대주의적-경험적 근본견해에 합치되고, 이에 반해 권위주의적 형태에로의 경향은 절대주의적-형이상학적 근본견해에 관계된다는 사상을 전개시켰다. (39면)
11. 이 시기에 나로 하여금 정말 정열적으로 문학을 사랑하게 만든 것은 슈필하겐의 소설 “문제적 성격의 사람들”이었다. 내가 2년 전 우연히 캘리포니아대학의 도서관에서 이 책 한 권을 다시 읽었을 때 나는 나의 젋은 시절의 인생관이 얼마나 많이 이 아주 평범한 소설의 염세적(세계고적) 분위기에 의해 영향받았던가를 놀랍게도 새삼 깨달았다. (45면)
12. 문학에서 학문으로의 추이는 이미 나의 문학애호기간 중 점점 철학적 문제에 관심을 갖고서부터 준비되었다. ... 나는 철학, 수학, 물리학을 연구할 의도를 갖고 김나지움을 떠났다. 나는 이러한 의도를 실현하지 못한 것을 일생 아쉬워했다. (47면)
13. 바이닝거의 인격과 그가 남긴 저작의 큰 성공은 학문하겠다는 나의 결심에 본질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50면)
14. ... 그러나 나는 겁내지 않았다. 그 주된 이유는 기존하는 단테-연구문헌 가운데 단테의 국가론에 대한 단행본이 없었고 또 단순한 시험공부로 법정학과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대신에 비록 출판되는 일이 아마도 결코 없을지라도 내가 관심 있는 연구를 시도하는 것이 나은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연구는 박사학위를 받기도 전에 1905년 빈의 국가학 연구총서로 출판되었고, 비교적 큰 학문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것은 내 책들 중 아무런 거부적 비판을 받지 않은 유일한 것이었다. (51면)
15. 나는 단테 알레기에리의 국가론을 연구하는 동안에도 법인, 주관적 법(권리), 그리고 특히 법명제(법규)의 개념과 같은 법이론의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 커져갔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보통의 설명에서 놀랐던 것은 엄정성과 체계적 근거지움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문제제기의 구제할 수 없는 혼동이 있었는데, 한편에서는 무엇이 실정법인 것과 무엇이 - 어떤 가치입장에서 보아 - 법이어야 하는 것과는 늘 혼합되었고, 그리고 주체가 실정법상 어떻게 행위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와 그가 사실상 어떻게 행위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 사이의 한계가 지워졌다. 실정법의 이론은 한편에서는 윤리학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학으로부터 날카롭게 분리하는 것이 절박하게 요청되는 것 같았다. 나중에 내가 헤르만 코헨의 저작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이 내가 바로 체계적인 고려를 근거로 해서가 아니라 보다 더 직감적으로 지향했던 “방법의 순수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51, 52면)
16. 장학금을 받은 후 내가 하이델베르그로 간다는 것을 알리려 베르나칙 교수에게 갔을 때 그는 꽤 명백히 내가 교수가 될 전망은 거의 없을 것이며 변호사나 은행원이 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암시했다. (57면)
17. 나는 옐리네크와도 가까운 개인적 관계를 맺지 못했다. 그는 그의 자만심을 부추겼던 그를 경모하는 학생들의 침투할 수 없는 서클로 둘러싸여 있었다. (57면)
18. 나는 하이델베르그로 오기 전에 그의 저서들을 아주 주의 깊게 읽었으며 그것에서 받은 인상은 그가 법률이론의 분야에서는 아주 약했고 독창적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는 역사적 및 철학적-사회학적 분야에서는 19세기의 국가론에 상당한 기여를 했던 것이다. (58면)
19. 그 밖에 나는 막스 베버를 중심으로 한 서클과는 가깝게 접촉하지 못했는데 그는 당시 하이델베르그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가르쳤고 나는 한참 지난 후에야 그의 저서와 가깝게 되었다. 나는 이 탁월한 사람을 그가 1차 대전 후 빈에서 가르쳤을 짧은 동안에야 알게 되었다. (58, 59면)
20. 이때 나의 유일한 기분전환은 때때로 몰켄쿠어 호텔 위로 산보하는 것과 저녁에는 페르케오 호텔에서 흑맥주 한 잔을 마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는 수년 간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또 가련한 아버지의 병상에서 크게 마음 아팠던 후 나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줄 것으로 소망했던 저서의 연구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었다. 나는 나의 학문분야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는 감정에 아주 도취해 있었다. 나는 여러 후에야 비로소 이미 반 세기 전에 영국의 대 법이론가 존 오스틴이 아주 비슷하게 법학을 근거짓는 시도를 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나는 영어를 하이델베르그에서 비로소 배우기 시작했고, 그리고 당시 영미의 저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59, 60면)
21. 그러나 나는 이 일자리를 곧 그만두었는데 그 이유는 내가 결코 변호사가 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직업은 학문연구를 위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60면)
22. 베르나칙 교수는 아마 나의 교수자격취득논문을 도대체 읽어 보지도 않았다. (62면)
23. 나는 1911년 여름에 국(헌)법학과 법철학의 (사)강사가 되었고 가을에 오스트리아, 헝가리 협정에 대한 강의로서 교수활동을 시작했다. 세계대전 발발까지 3년 동안 나는 몇 개의 부피 큰 연구서를 출간했으며 또 오스트리아 공법잡지를 창립했다. (63면)
24. 자이들러가 교수활동을 그만둔 후 세계대전이 터지기 바로 직전인 1914년에 나는 드디어 정식으로 공법전임이 되었다. 이는 나에게는 아주 의미 깊은 발걸음이었다. 왜냐하면 이제 나는 나의 학문적 연구가 필요한 대상에 전 시간을 바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결과에 대한 나의 기쁨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역아카데미에 전임으로 임명된 지 얼마 안 돼 전쟁이 터졌고 나는 예비역장교로서 내 부대로 소집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심한 폐렴에 걸려 “병역복무는 부적합”하고 “내각사무처 근무만 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나는 처음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육군성의 후생국에 그리고 나중에는 그 법무분과에서 근무했다. (67면)
25. 육군성에서의 나의 지위는 나의 학문적 진로에도 아주 본질적으로 이바지했다. 나는 1915년에 - 정해진 대로 - 정외교수의 ‘명칭’을 획득했고 이 지위는 유대인 출신으로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것으로 보아야만 했다. (78면)
26. 베르나칙이 - 대답으로서 - 내가 어떤 분야의 교수가 되려는지 물었을 때 나는 크게 놀랐다. 나는 군법을 특별히 고려하는 공법분야라고 대답했다. 그 즉시로 그는 그런 신청을 빠른 시일 안에 대학에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사실 그렇게 했고 대학은 즉시 받아들였다. 나는 베르나칙의 태도가 육군성에서의 나의 지위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 지위는 내가 그때까지 출판한 저서보다 더 큰 인상을 그에게 미쳤던 것이다. (78면)
27. 내가 육군성에서 활동한 3년 반은 나의 학문적 연구에 잃어버린 시간은 아니었다. 나는 주권문제라는 커다란 연구를 시작할 충분한 시간을 가졌고 이는 1920년에 “주권의 문제와 국제법의 이론”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나는 또한 1911년과 1914년 사이 내 강의를 들었던 젊은이들을 내 집에서 정규적으로 가졌던 개인세미나로 모이게 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뒤에 국가법과 행정법의 정교수가 된 아돌프 메르클과 뒤에 국제법 정교수가 된 알프레트 페어드로스라는 나의 가장 오래 된 두 제자가 있었고, 이들 둘은 빈 대학교 법과대학에서 근무했으며, 프란츠 잔더는 뒤에 프라하의 독일 대학의 국법학 교수가 되었고 또 발터 헨리히는 뒤에 브루노에 있는 독일공과대학 공법교수가 되었다. ... (80, 81면)
28. 1919년 베르나칙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고 대학에서는 국가법 및 행정법 제2정교수인 멘첼의 동의로 나를 제1순위로 그의 후임으로 건의했다. 그 후 곧 임명이 되었다. 그때 문교성 장관이 사회민주당원인 글뢰켈이었다. 나의 임명은 뜻밖이었다. (82면)
29. 나는 사회민주당에 가입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우선 내가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이론(프롤레타리아독재 - 국가의 고사)을 거부했고 - 나는 나의 책 “사회주의와 국가”에서 이를 자세히 비판했다 - 그리고 그 다음 사회과학 분야의 교수와 연구자는 정당소속이 학문적 독립성을 침해하기 때문에 어떠한 정당에도 가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83, 84면)
30. 내가 빈 대학 법과대학에 국가(헌)법 정교수로 활동한 10년 사이에 나는 특히 “사회과학 및 법률학적 국가개념”을 출간했는데 이는 1925년 베를린에 있는 슈프링어 출판사에서 나온 나의 “일반국가론”에 대한 준비서였다. 나는 국가의 이론을 - 처음부터 - 법이론의 통합적 구성부분으로 고찰했다. 나는 1934년에 발간된 “순수법학”과 나의 책 “법과 국가의 일반이론”(하버드대학교 출판부, 1945)에서 나의 법 및 국가이론을 체계적 통일체로 서술했다. (85면)
31. 즉 이러한 통일체를 구성시키는 것은 특수한 법질서이며, 이러한 통일체를 초-법률적으로, 즉 사회학적으로 근거지우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한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86면)
32. 아마도 내가 이러한 견해에 이른 것은 특히 나와 가장 가까이 놓여 있었고 또 내 개인적 경험으로 가장 잘 알았던 국가인 오스트리아 국가가 명백히 하나의 법적 통일체일 뿐이었다는 것에 연유되었을 것이다. 인종, 언어, 종교 그리고 역사로 보아 그렇게 많은 상이한 집단으로 이루어졌던 오스트리아 국가에 직면해 보면 국가의 통일성을 법률적으로 국가에 속하는 사람들의 특정한 사회심리학적 및 사회생물학적 통일성 위에 근거지우려 했던 이론들은 의제(허구)들이라는 것이 명명백백히 드러났다. (86면)
33. 나는 하나의 스승이 자기의 제자들로부터 자기만 따르는 제자이기만을 바라는 것보다 더 큰 잘못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법이론의 한 학파를 수립하기에 성공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무엇보다 나를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 내에 진실로 생산적인 인재들이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90면)
34. 그(프란츠 잔더)는 교수직을 차지한 것이 확실해지자마자 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대항했는데, 즉 나는 내 이론의 본질적 구성부분을 그로부터 가져왔지만, 이 점을 온당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표절의 비난이었다. 나는 즉시 나에 대한 징계 조사를 신청했고 이것이 나의 전적인 무죄를 밝혔다. (91면)
35. 레너 자신이 제1차 임시헌법의 초안을 만들어 놓았다. 이는 곧 보완이 필요하게 되었다. 나는 이와 관련된 헌법작업에는 때때로만 함께 했다. 나의 주임무는 최종헌법의 초안이었다. (95면)
36. 내가 가장 소중히 여겼고 또 내가 내 개인의 작품으로 고찰했던 부분인 헌법재판제도는 국회심의에서 조금도 변경되지 않았다. (97면)
37. 헌법재판소가 신 연방헌법에 의해 설립되자 나는 그 재판관으로 선임되었고 그리고 곧 재판소에 의해 그 상임담당관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나는 법과대학의 교수로서의 나의 지위를 계속 보유했기 때문에 이 직책을 부직으로만 수행했다. 1929년 헌법개정으로 헌법재판소가 와해되기까지 나는 재판관과 상임담당관으로 있었다. 이 헌법개정으로 인해 나는 오스트리아를 떠나 쾰른대학으로의 초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1929년의 헌법개정은 정치적으로 사회민주당에 대한 기독사회당의 반격이었다. (97, 98면)
38. 헌법재판소는 정부와 갈등관계를 빚었다. 우선은 하나의 판결 때문인데, 여기서 헌법재판소는 연방경찰에 불리한 결정을 내렸다. 그 다음은 - 그리고 이것이 헌법재판소의 제거에 대한 주근거인데 - 면제(특별허가)혼인의 사건에 대한 재판으로 갈등을 빚었다. (99면)
39. 이러한 일들로 나는 깊이 분격했으며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는 것이 싫어졌다. 우연히 원했는지 나는 바로 그 때 쾰른대학에서 초빙을 받았다. 초빙은 내가 이때까지 그리 강도 높게 다루지 않았던 국제법을 강의해 달라는 것이었지만 나는 이것을 수락했다. ... 실정국제법 강의를 하기 위해서는 나는 먼저 철저히 준비하여야 했다. 사실 실정국제법의 연구는 내가 쾰른에서 보낸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것은 1929년 가을에서 1933년 4월까지의 기간이었다. 이들 3년은 나에게는 매우 좋은 기억 속에 남아있다. (111면)
40. 나는 1932년에 쾰른 법과대학의 학장으로 선임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제국 수상이 되었고 나는 나치정부로부터 제1차로 해임된 교수들 중에 들어 있었다. (113면)
41. 제네바 ... 나의 원래 계획은 자연법론의 비판과 결부된 법실증주의의 체계적 이론이었다. 준비연구를 하는 동안 나는 자연법론사가 불가결하다고 보았다. 나는 고대의 자연법론을 대상으로 삼은 원고도 완성했다. 교정쇄를 교정보는 가운데 - 이 책은 빈에 있는 슈프링어 출판사에서 출판할 예정이었다 - 나는 희랍종교가 사회철학에 미친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는 고대 희랍의 자연법론이 서술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115, 116면)
42. 내가 제네바에 있는 동안 하버드대학과 위트레호트 왕립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고, 나아가 프라하 독일대학에서의 짧고 매우 행복스럽지 못한 초빙이 이루어졌다. (119면)
43. 나로서는 읽기는 했으나 말할 수도 또 쓸 수도 거의 몰랐던 영어로 전환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항구적인 교수자리를 찾는 것도 용이하지 않았다. 나는 처음 하버드대학교 로스쿨에서 올리버 웬델 홈즈강좌를 맡았다. (127면)
44. 이 실패는 특히 내가 하버드대학교의 명예박사로서 더 좋은 처우를 기대했기에 매우 마음 상하게 했다. 1942년 여름 나는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에서 1년간의 방문교수로 초청을 받았다. 나는 이를 수락했고 그 이후 이 대학의 로스쿨이 아니라 정치학과에서 국제법, 법철학 그리고 법제도의 기원을 가르쳤다. 1945년 이후 나는 정교수가 됐다. 나의 강의활동은 정말 만족스러웠다. 나의 순수법학은 사실 법과대학에 맞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로스쿨은 법의 학문적 이론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것은 트레이닝 스쿨이고 법직업학교이다. 그 기능은 실제적인 직업인 변호사의 준비이다. 거기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미국법만 가르치고 그것도 케이스 메소드에 의한다. 미국 법원이 판결을 본질적으로 선례에 따라 내리므로 로스쿨들이 강의목표를 학생들로 하여금 가능한 한 많이 케이스에 익숙토록 하는 데 두는 것은 이해된다. 변호사로서의 자기직업을 위해서는 미국의 법과대학생이 오스트리아나 독일 법률가보다 더 낫게 준비하는 것은 확실하다. 학문적 대상으로서의 법은 아마 철학과 역사학과, 사회학과에 더 잘 맞는다. 내가 여기 정치학과에 섭섭한 것은 똑똑하고 열심이고 개인적으로 모두가 매우 호감이 가는 학생들이 학문적 연구에는 비교적 낮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128, 129면)
45. 그러나 나의 교수활동은 나에게 학문연구를 위한 시간이 된다. 대학도서관은 훌륭하고 기후나 환경은 더 바랄 것이 없다. 나는 버클리에서 정원이 달린 조그마한 집을 장만했는데 이 정원에는 장미가 피어 나를 크게 기쁘게 한다. (129면)
46. 여기가 아마도 “유랑에 지친 자의 마지막 쉴 곳”일 것이다. (1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