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말씀 - 법구경 미니북
법정 엮음 / 이레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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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비록 백년을 살지라도 게으르고 정진하지 않는다면 부지런히 노력하며 사는 그 하루가 훨씬 낫다. (70면)




2. 젊었을 때 수행하지 않고 정신적인 재산을 모아 두지 못한 사람은 고기 없는 못가의 늙은 백로처럼 쓸쓸히 죽어갈 것이다. (91면)




3. 쾌락에서 근심이 생기고 쾌락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쾌락에서 벗어난 이는 근심이 없는데 어찌 두려움이 있겠는가. (121면)




4. 덕과 지혜를 갖추어 바르게 행동하고 진실을 말하고 자기 의무를 다하는 사람은 이웃에게서 사랑을 받는다. (122면)




5. 믿음이 있고 덕행을 갖추고 명성과 번영을 누리는 사람 그런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다. (160면)




6. 비록 적게 얻었더라도 얻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수행자는 신들도 칭찬할 것이다. 그의 깨끗하고 게으르지 않은 생활을 보고. (18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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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고병권 지음 / 소명출판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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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진리를 찾는 철학자들과 황금을 찾는 모험가들 사이에는 닮은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목표의 실존을 남들보다 크게 확신한다는 점이다. 엘도라도의 실존을 확신하고 황금을 찾아 남미의 정글로 떠나는 모험가들처럼, 전체를 설명해 주는 질서를 알아내고 싶어하는 철학자들도 ‘하나의 질서, 하나의 원리가 존재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 모험가들은 ‘어떤 곳’을 뒤지지만 철학자들은 ‘모든 곳’을 뒤진다. 모험가들에게 ‘모든 곳’에 있는 것은 무가치하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어떤 곳’에만 있는 것이 무가치하다. 만약 모험가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특정한 곳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개개의 요소들에 전체의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27면)


2. 철학자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생성과 소멸의 역동성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단순한 ‘현상’이나 ‘가상’으로 치부한다. 그리고는 ‘실재계’, 다시 말해 참된 세계가 따로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 ‘물 자체의 세계’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한다. (29면)


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조롱한다. “그들 역시 삶의 지푸라기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삶의 지푸라기에 매달려 있음을 비웃고 있다.” (30면)


4. 진리는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철학자들이 상상하는 세계 속에 존재한다. 진리는 무엇보다도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개별적인 것들로부터 충분히 멀어진다. 진리는 고딕의 첨탑보다도 더 높이 올라갔고 진리를 잃어버린 개별적 존재들은 한없이 낮아졌다. ‘너 자신의 초라함을 알라!’ (32, 33면)


5. 이 운동을 이끄는 대립적 항은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이다. 디오니소스는 개별적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거대한 충동을 나타내며 아폴론은 항상 절도와 자기 인식을 잃지 않는 이성을 나타낸다. (40면)


6. 그는 여기저기서 풍겨나는 헤겔의 냄새를 불쾌하게 생각했다. “변증법적인 무뚝뚝함”이 디오니소스의 참된 의미를 가리고 있다는 것이다. (40면)


7.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대상이었다. (41면)


8.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긍정의 신으로 이해함으로써 삶을 부정하는 기독교의 신과 대비시킨다. (41면)


9.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와 인생은 아무런 참된 만족도 줄 수 없다. 따라서 세계와 인생은 우리가 집착할 만한 것이 못된다는 인식이 획득되는 것이다. 이것이 비극적 정신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비극적 정신은 체념으로 향한다.” (43면)


10. “근대인들은 환희도 힘도 모르는 비평가가 되었으며, 결국은 도서관원이나 인쇄교정자 정도로 되고 말았다.” (45면)


11. 지배적 사상은 지배적 삶의 방식과 떨어져 존재하는 게 아니다. (49면)


12. 하버마스가 주목한 것은 바로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다. 상호주관성은 과학주의에 경도되지 않으면서도 주관성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이다. 행위자들은 의사소통 행위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수정해가고 결국에는 하나의 합의를 향해 점차 접근해간다. 그는 ‘이상적 조건의 담화 상황’ 안에서는 서로를 접근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물론 가다머는 이러한 ‘이상적 담화 상황’이라는 가정을 “충격적일 만큼 비현실적”이라고 비꼬았다. 하버마스는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언어에서 찾았다. 발화행위의 내부에는 서로의 정직성과 성실성, 이해가능성, 진리성에 대한 요구가 들어 있다. (99, 100면)


13. 캐나다의 퀘벡주 문제나 이슬람 문제를 언급하면서 테일러는 보편주의가 차이적 요소들을 ‘오인’하고 ‘억압’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자기 문화의 관점으로 다른 문화를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무조건적 승인을 위한 토대로 “모든 문화는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내세웠다. 그는 보편주의 자체는 거부하지만, 새로운 보편적 준거를 발견한다. “우리들 각자에 특수한 것을 (절대적으로 - 필자) 승인함으로써 우리는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그는 보편주의에 맞서 차이에 대한 승인과 보존을 요구한다. “현재뿐 아니라 여원히 차이를 유지하고 소중히 하자는 것이다. 결국 정체성에 관한 한 그것이 어떤 경우에도 상실되어서는 안된다는 열망보다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101, 102면)


14. 지난 시대 많은 사상가와 운동가들이 사회주의의 실패에 그토록 예민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아마도 ‘체제’ 자체를 문제삼은 거대한 비판과 새로운 체제에 대한 소중한 꿈이 깨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주의의 실패는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체제에 대한 실험의 실패로 받아들여졌다. 그 후로 급진적인 사회운동과 정치사상은 퇴장해 버렸다. (121면)


15.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122면)


16. 한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 니체가 미래를 낳을 능력을 상실한 근대 유럽 문명을 ‘허무주의’(nihilism)라고 명명했을 때, 그것은 철학적 용어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용어이다. (123면)


17. 국민들이 더 이상 군주적 본능을 가지지 못할 때, 다시 말해 주권자, 입법자, 가치의 창안자이기를 그칠 때, 정치 영역은 위축되고 만다. (123면)


18. 아렌트 역시 근대 사회를 ‘정치의 죽음’으로 이해했다. 정치란 ‘행위(프락시스, praxis)'의 영역인데, 행위란 항상 어떤 것을 ‘시작하는 것’, ‘주도하는 것’이며, 타자와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123, 124면)


19.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자신의 특성을 부각시키고자 했고, 독특한 행위와 업적을 통해 자신이 최고임을 보여주고자 했으나”, 근대 사회에서 이러한 독특한 행위나 사건들은 통계학이 예외들을 다룰 때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의 일탈이자 동요”일 뿐이다. 요컨대 순응주의 사회에서 제일 먼저 죽어나가는 것이 정치다. (124면)


20.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이 보여준 폭력성이 정치적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차이’를 억압하는 ‘동일성의 정치’가 된다. (125면)


21. 좋은 것과 나쁜 것, 친구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별해내는 기술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이다. 여기에는 가치의 창조와 평가,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 세력에 대한 물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126면)


22. “예속적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다만 타인들이 평가하는 대로 존재하는 인간들에 불과하다. 그 안에서 인정되었던 것, 또는 그들로 하여금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가치도 찾아내지 못한다.” (127면)


23. 가치 창조와 평가를 봉쇄했던 것이 근대 정치의 첫 번째 문제였다면, 두 번째 문제는 허무주의적 인간형을 산출하는 점에 있다.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는 잔인한 ‘길들이기’와 ‘길러내기’가 개입한다. (127면)


24. 니체는 우선 자유주의자들이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자유로운 개인’이라고 하는 기본 원리에 대해 비판한다. ‘자유로운 개인’이란 하나의 형이상학적 실체일 따름이다. (132면)


25. 더구나 ‘자유로운 개인’을 떠드는 자유주의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133면)


26. 1990년에 나온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정치의 영역에서 갈등을 몰아낼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찾고 있다. 그가 제시한 방안은 정치가 시민들 사이의 중첩적 합의가 가장 큰 곳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중첩적 합의를 키우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로티의 경우에는 롤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차이를 발생시키는 요소들을 철저히 사적 영역에 가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34면)


27. 니체는 사회주의를 루소와 관련시킨다. “루소적 인간의 상으로부터 격렬한 혁명으로 돌진하는 힘이 나왔다. 실로 모든 사회주의적 진동과 지진이 일어날 때 ... 움직이는 인간은 언제나 루소적 인간이다. ...” (135면)


28. 사회주의자들은 문화나 제도, 도덕이 갖고 있는 힘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 그들은 오직 소유물의 분배만을 본다. “사회주의자들은 소유물의 분배가 과다한 불공정과 폭력의 결과임을 지적하고 부당한 기반 위의 구축물에 대한 의무를 전체적으로 거부하는데, 이때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개개의 것만을 보고 있다.” (136면)


29.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사회주의는 전제주의를 닮아간다. (136, 137면)


30. 니체는 “사회주의가 원하는 국가가 달성된다면 생성의 강한 에너지는 파괴될 것”이라고 말하고 그때 국가는 새로운 생성적 힘을 상실하고 허무주의적 형태를 띠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137면)


31. 니체는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근대성에 대한 비판’으로 간주하였다. 사실상 민주주의야말로 근대 정치체제의 허무주의적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근대성 비판’이라는 제목의 소절에서 니체는 ‘서구 전체가 그 제도(민주주의)를 낳고 미래를 낳는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고 말한다. ... 현대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군주적 본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새로운 가치에 도전하기보다는 기존의 가치에 적응하려고 하며, 동일한 가치 아래 안주하고자 한다. 그래서 니체는 민주주의를 “능동성의 개념이 박탈되고 적응이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내세워진다. 삶 자체를 외적 환경에 대한 내적 환경의 적응이라고 정의한다”고 비판한다. 서구 민주주의에서 생성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138면)


32. 니체는 사람들을 복종시키기 위한 고도의 권위를 ‘윤리’라고 보았는데, 윤리는 관습에 의하여 규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141면)


33. 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항상 ‘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상 이것은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이 아니라 ‘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142면)


34. 길들이기의 주요한 수단이 군대였다면, 길러내기의 주요한 수단은 학교이다. (144면)


35. 하지만 ‘아곤’이 ‘안타곤’과 반대의 뜻을 가진 말이라고 해서 아무런 변화가 없는 평화 상태를 의미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아곤은 오히려 무시무시할 정도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사회의 항상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체계이다. (146면)


36. 그리스인들은 여러 진리들이 공존하고 경쟁하기를 바랬다. 경쟁이 없는 진리는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했다. (148면)


37. 그리스인들은 덕을 가치 평가를 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힘으로 이해했으므로 그것을 강자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149면)


38. 그리스인들은 아곤이라는 경쟁을 벌인 곳을 ‘아레나’라고 하는데, 이들은 자신의 덕에 기초하여 이곳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경쟁하였다. (149면)


39. 사회는 힘을 상실하고 정태적인 제도만이 안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안정성을 생성적 힘에 둘 것인지, 법과 제도에 둘 것인지는 그리스의 정치 체제와 오늘날 우리의 정치 체제를 가르는 중요한 구분이 될 것이다. (151면)


40. ‘무’에서 시작한 기독교의 창조론이 창조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유’에서 시작한 원자론은 세계의 목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154면)


41. 우주가 변화하게 될 지향점이란 없으며 ... 원자론은 세계에 대한 초월적인 것의 침투를 막는다. (154면)


42.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있는 것’, 다시 말해서 존재하는 것은 처음부터 있으며, 계속해서 변화하지 않은 채로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155면)


43.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물들의 영속성과 통일성을 비판했던 인물로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그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유명하다. 그는 모든 사물들이 변화한다는 것, 변화야말로 세계의 본질이라는 점을 주장했다. (156면)


44. “원자들은 그들 자신만의 대상이고, 스스로와만 관계할 수 있다.” (들뢰즈) (158, 159면)


45. 니체는 원자를 힘으로 대체한다. 힘의 첫 번째 속성은 그 자체로 단수로 존재할 수 없는 복수의 것이라는 점이다. 힘은 항상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만 작동한다.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그리고 다른 힘이 없다면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힘이 정의되기 위해서는 복수의 힘이 전제되어야 한다. 힘은 차이와 거리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하나의 힘은 다른 힘들의 종합이다. ... 힘의 두 번째 속성은 ‘표현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서 힘은 자신의 힘을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표현되는 것만이 힘이기 때문이다. (159면)


46. 힘의 세 번째 속성은 정지되어 있는 양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서 멈추어 있는 힘은 없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힘은 ‘정지’나 ‘불변’과 항쟁하고 있으며, 그 양이 고정되어 있다고 해도 그 본질은 유동적인 것이다.” 힘의 양이 고정된 것처럼 보일 때조차 그 성격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변화는 힘의 앞지를 수 없는 본질”이다. 이제 니체는 세계를 ‘힘들의 바다’로 본다. (161면)


47. 힘들의 싸움은 항상 승패가 가려진다.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다면 힘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긴 힘이 명령한다. 힘들의 양적 차이로부터 지배와 피지배가 생겨난다. (165면)


48.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 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166면)


49. 아렌트는 ‘Macht’가 그리스 정치의 공공 영역을 가능하게 했던 힘인 ‘디나미스(dinamis)’와 같은 뜻이며, 근대의 다양한 파생어를 가지고 있는 라틴어 ‘포텐샤(potentia)’와 통하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아렌트의 설명에 따르자면 그것은 ‘능력’이나 ‘가능성’이다. (170면)


50. 관계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관계를 통해 힘을 주고받으며, 힘은 그 자체로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다. (173면)


51. “권력의지가 해석한다.” 권력의지는 하나의 해석이고 평가이다. (177면)


52. 원자 자체가 가진 난점에 대해서는 에피쿠로스 역시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데모크리토스와 달리 원자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것들의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때문에 맑스는 데모크리트스와 에피쿠로스의 차이를 다룬 자신의 논문에서 에피쿠로스의 최종적 결론이 ‘원자론의 해체’라고 적고 있다. (182면)


53. 학자들은 주사위를 600번 정도를 던지면 1이 나오는 일이 100번 정도 반복될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도박사들은 1의 눈금이 여러 번 반복되었어도 동일한 상황은 단 한 번도 재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189면)


54. 영원회귀는 동일한 반복을 확인하는 문제가 아니라 ‘생성을 반복하는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니체의 저서 속에 등장하는 영원회귀가 항상 의지를 묻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원회귀를 시험하는 악마들은 ‘반복이란 새로울 것도 없는 피곤한 일인데 계속할 것인지, 그것을 원하는지’ 묻는다. 차라투스트라를 시험하는 난쟁이가 던진 문제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뿐인 주사위 던지기를 계속할 것인지, 그런 의지가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191면)


55. 생성이 시간을 필요로 하는 만큼이나 시간 역시 생성을 필요로 한다. 깨달음의 시간은 차라투스트라의 새로운 생성, 새로운 변신을 필요로 한다. (195면)


56. 용기는 가장 훌륭한 살해자다. 공격하는 용기 그것은 죽음까지도 살해한다. 왜냐하면 용기는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다시 한 번!’ 이렇게 외치기 때문이다. (196면)


57. 순간들을 통해 볼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순간들 속에 다른 시간과 공존하며 경쟁하고 있는 시간이다. (197면)


58. 생성이 반복될수록 양산되는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198면)


59. 니체는 “부정과 파괴야말로 긍정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203면)


60. 어떤 연구에 따르면 인간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 철학적 저작의 최초 사례는 1486년의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인간의 권위에 대하여’라고 한다. 그러나 이 시대도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존재로 등장하지는 못한다. 사람들은 사물들을 어떤 객관적 기준에 의해 구별하기보다는 유사한 것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에서 분리되어 자연에 자기 잣대를 들이댄 것도 17세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이나 신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 존재의 확실성을 끌어냈을 때, 데카르트가 드러낸 것은 존재의 확실성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분리와 독립에 대한 의지였다. 이 점에서 니체는 17세기를 “인간을 발견하고 질서를 세우고 발굴하려고 노력한 세기”라고 말한다. (213, 214면)


61. 니체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 사이에 끼어 있는 ‘과(und)’자를 바라보고 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자신들이 자연이나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과 대등하게 나열될 수 있는 존재나 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인간의 오만한 욕망이 그 한 글자를 통해서 들통났기 때문이다. (215면)


62.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제1부를 이 ‘변용’에 대한 가르침으로 시작한다. “내가 너희에게 세 가지 변용을 들겠다.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고, 사자가 마침내 아이가 되는 변용을.” 낙타는 잘 견디는 정신의 표상이다. 낙타는 모든 무거운 것들을 맡아진다. 주어진 가치를 묵묵히 수행하기만 하는 낙타가 “선악에 있어 창조자가 되고 싶은 자는 먼저 파괴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는 ‘이-아’라고 우는 나귀와 같은 족속으로, ‘야(긍정)’에 대한 잘못된 발음 즉 긍정의 정신에 대한 오해를 상징한다. 이에 비해 사자는 거대한 부정의 정신이다. 낙타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사자는 이해한다. 사자는 자유를 획득하고 자신의 터전에서 주인이 되고자 한다. 거대한 용이 나타나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었고, 모든 가치는 내 몸에서 빛난다. ... ‘너는 해야만 한다(당위와 의무)’만 존재한다”고 말할 때, 사자는 으르렁거리며 ‘나는 하고 싶다’를 외친다. 그러나 사자 역시 긍정을 알지 못했다. 사자는 부정조차 긍정하는 정신에 대해 알지 못했다. ‘나는 하고 싶다’보다 위에 있는 것은 ‘나는 존재한다’이다. 사자가 할 수 없는 일을 어린아이가 한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 그것은 사자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린아이는 존재 자체로 하나의 신성한 긍정이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한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하나의 놀이이며,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다. (218, 219면)


63. 니체는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메시지를 그렇게 요약했다. 신들이 죽었으므로 이제는 자신의 삶을 창조할 초인이 살기를 기대한다. (222면)


64. 디오니소스는 “생성 속으로 뛰어든 존재의 혼”이다. (233면)


65.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영원회귀의 의미를 깨닫는 과정이 긍정의 권력의지를 획득하는 과정이었으며, 또한 그것을 느끼는 새로운 신체를 생성시키는 과정이었다. 긍정의 권력의지는 영원회귀를 요청한다. (234면)


66. ‘이름 부르기(호명)’를 통해 계급이 재생산된다는 알튀세의 지적처럼 이름은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서 그 사회의 주체로 거듭나게 만드는 핵심적인 기제이다. (236면)


67. 니체의 이름은 하나의 가면이기도 하다. “무릇 심오한 인간은 가면을 좋아한다.” 그는 가면을 바꿔 쓰며 전투를 수행한다. 그러나 상형문자를 놓고 괴로워하는 이집트의 청년처럼 가면 뒤에 있는 진정한 얼굴에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진정한 얼굴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 가면 쓰기는 하나의 놀이이며 예술이다. (238, 239면)


68. ‘차라투스트라’에는 낡은 가치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가치에 대한 창조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 그러면서도 부정과 창조는 과거를 구제하는 긍정의 정신 속에 자리하고 있다. (246, 247면)


69.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 (247면)


70. ‘모든 가치의 전환’, 이것이 인류에 있어 최고의 자기 성찰의 행동을 위한 정식이고, 이것이 나의 살이 되고 나의 천재성이 된다. (248면)


71.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 - 프리드리히 니체” (250, 251면)


72. 힘들은 지배적 가치 외부에서 ‘가치 전환의 실험’을 위해 뛰어들고, 뛰어들어 온 힘들은 항상 전쟁을 만들어 낸다. (252면)


73. 그(베버)는 ‘책임 윤리’와 ‘신념 윤리’를 구분했다. 이 둘을 나누는 기준은 소명이 있느냐의 여부보다는 거리 두기의 능력과 그것에 대한 책임 문제다. 자신의 행동을 거리 두기를 통해서 올바르게 예측하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책임 윤리’다. (279면)


74. 니체는 ‘내적인 거리’가 ‘거리의 열정(pathos of distance)’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거리의 열정이란 (사회 신체이든 개인 신체이든) 신체에 내재하고 있는 힘과 능력을 긍정하고, 그 힘과 능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차이(거리)를 생산해내는 열정이다. 거리의 열정을 가진 자들을 니체는 가치의 신봉자가 아니라 가치의 생산자라고 말했다. 초월적인 존재나 신성한 가치를 신봉하기 위해 제 자신을 합리적 기계 속에 던져 버리는 프로테스탄트들과 달리 ‘내적인 거리’를 ‘거리의 열정’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제 스스로가 이용할 가치를 생산해 낸다. 단지 하나의 형이상학적 거리(차이)만이 유의미했던 프로테스탄트들과 달리 가치 생산자들에게 있어 거리는 다양화된다. 이전의 가치들과 새로 생산된 가치들 사이에 다양한 거리(차이)가 존재하며, 내 가치와 다른 사람의 가치 사이에 다양한 거리(차이)가 존재한다. (286, 287면)


75. 오웬은 이 책(Nietzsche, Politics and Modernity)에서 자유주의의 보편적 토대를 찾으려는 시도를 ‘철학적 자유주의’로 부르고, 그러한 시도가 불가능하다는 판단하에 정치적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것을 ‘정치적 자유주의’라고 부른다. ‘정의론’의 롤스가 전자에 해당한다면, ‘정치적 자유주의’의 롤스가 후자에 해당한다. (290면)


76. 다른 한편 공동체주의자들은 차이의 문제에 대한 훨씬 강력한 자신감을 보이며, 진정한 승자의 얼굴을 하고서 가치 투쟁의 장에 나온다. 자유주의자들이 위기를 차이의 아나키적 전쟁상태에서 찾았다면, 공동체주의자들은 그것을 서구 자유주의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병리적 상태에서 찾았다. ... 공동체주의자들에게 자유주의자들의 ‘회피의 방법’은 ‘위험스런 결벽성’이며, ‘삶의 기본 원리를 방어할 능력을 소진한 창백한 상대주의’로 보였다. (291, 292면)


77. 헤겔이 국가를 시민들의 이해의 조정이나 안전의 문제를 넘어서는 하나의 인륜성(Sittlichkeit)의 실체로 간주했던 것처럼 공동체주의자들은 국가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292면)


78. 인륜(Sittlichkeit)이라는 말은 막연한 보편성을 가장하는 도덕(Morality)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도덕이 현존하지 않는 것을 실현해야만 하는 어떤 의무를 부여하는 반면 인륜성은 실정성(positivity)을 갖는 것으로 그가 소속한 공동체 속에서 구체적인 도덕적 의무를 갖게 하는 것이다. (299면)


79. 우리는 (자유주의) 사회에 대해서 윤리의 합리적 정당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목적(telos)을 가져야 하며, 이것의 상실은 도덕적 정당화의 실패로 이어진다. 목적을 잃은 자유주의적 자아는 “그 주장의 여러 지점들에서 급진적으로 해체된 주체로 용해되거나 해체되거나 급진적으로 위치지워진 것으로 붕괴될 위험이 있다.” (310면)


80. 특히 포스트모던 흐름에 기대는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신)니체주의자들의 공격에 전혀 성공적으로 방어하지 못하고 있으며, 정체성을 상실한 무기력한 주체들만을 양산하고 있다는 게 공동체주의자들의 주장이다. (311면)


81. 동질화를 비판하고 차이의 소멸을 우려했던 공동체주의자들에게서 일종의 정치적 전제성(political totality)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공동체주의자들은 분명히 부분적이고 지역적인 공동체들을 활성화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그것만이 사회적 응집력을 확보하는 길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차이들은 도덕적으로 놀라운 응집력을 보인다. (313, 314면)


82. 자유주의 동질성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차이들은 그것을 가진 집단에서 의미와 가치를 갖지 못한다. (314면)


83. 오히려 생태학(ecology)은 다양성과 차이야말로 강함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317면)


84. 생태계에서 다양성과 차이를 파괴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죽음이다. (3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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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지혜 - 법학교양총서 28
G.라드브루흐 / 교육과학사 / 1993년 1월
평점 :
품절



1. 자칫하면 법학이 논리조작의 기술과 궤변으로 흐를 위험이 있는데, 항상 법의 정신을 되씹어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역자서문, 4면)


2. “어떤 촌언은 많은 숙고의 결실과 수확일 수 있다.” (니체) (5면)


3. 세계가 궁극에 있어서 모순이 아니고, 인생이 결단이 아니라면 삶이 얼마나 멋없는 것일까! (13면)


4. 세계는 단 하나의 진리에 감금시키기에는 너무나 풍부하고 생생한 것이다. (13면)


5. 사람은 각각 하나의 이중적 윤리 질서의 지배 아래 살고 있다. 하나는 의무, 평화, 사랑, 겸손 등 일련의 개념을 특징으로 삼고, 다른 하나는 권리, 투쟁, 명예, 교만 등의 가치 개념들로 특징을 삼는다. 전자는 주로 우리의 양심에 호소하고, 후자는 우리의 법감정에 표현된다. (15면)


6. 법은 양극의 긴장 속에서 불안정한, 항상 위협받는, 그러면서도 항상 새롭게 회복되어야 하는 균형 상태에 서 있다. (16면)


7. 내용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이 실정법의 과제인 것처럼, 실정적이다고 하는 것이 정당법의 개념에 필요한 것이다. (16면)


8. 의심할 여지없이 부정당하다고 인식된 실정법이 그 효력을 보장받는다는 근거는 생각할 수 없다. (17면)


9. 초국가적인 법이 유효한 것이 되기 위하여는 우리는 초월한 가치의 천상에 살아서는 아니 되며, 지상적이고 사회학적인 형상을 입지 않으면 아니된다. 법의 이러한 형상화는 법관이라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20면)


10. 도덕은 인간이 그 의무를 의무감에서부터 행할 것을 요구하고, 법은 다른 동기까지도 허용한다. (22면)


11. 정의와 합목적성 - 또는 정의의 공동 이익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은 결코 완전한 조화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긴장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 긴장은 오직 타협에 의하여서만, 상호의 희생에 의해서만 그때 그때 일치될 수 있는 것이다. (29면)


12. 우리는 정의를 추구하지 않으면 아니되며, 동시에 법적 안정성도 존중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왜냐하면 법적 안정성은 그 자체가 정의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30면)


13. 정의는 합목적성에 선행한다. 그리고 법적 안정성도 합목적성보다 우위에 있다. (30면)


14. ... 상대주의는 실증주의에로 유입한다. (32면)


15. 상대주의는 일반적인 관용이다. - 다만, 불관용에 대하여는 관용이 아닐 뿐. (33면)


16. 정당하지 못한 법의 효력을 지지해 줄 수 있는 것은 법적 안정성밖에 없지만, 법 내용의 부정당, 즉 그 부정의성 혹은 비합목적성의 정도가 너무 심하여 일단 제정된 법의 효력에 의하여 보장된 법적 안정성의 가치가 그것에 대하여 무게를 가질 수 없는 경우도 종종 생각할 수 있다. (37면)


17. 우리는 다시 한번 모든 법률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인권, 정의에 반하는 법률은 모두 무효라고 하는 자연법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38면)


18. 정의가 한 번도 추구되어지지 않은 경우, 정의의 핵심을 이루는 평등이 실정법의 규정에 의하여 의식적으로 부인되는 경우에는 그러한 법률은 단지 “악법”이 아니라 오히려 법의 본질을 송두리째 결하고 있는 것이다. (39면)


19. 실정법의 부정의가 극단적으로 되어 실정법에 의하여 보장되고 있는 법적 안정성이 이러한 부정의에 대하여 조금도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정도에 이를 경우에는, 부정의한 실정법은 정의에 길을 양보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39면)


20. 당위적 존재는 결코 존재자에서 연역될 수 없다. 현재 효력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법들을 고찰한다고 하여 우리가 바로 법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험적으로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으로 산출되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논란할 수 없는 인격적 확신이다. (41면)


21. ‘사실적인 것의 규범력’은 하나의 패러독스이다. 존재에서는 당위가 결코 발생될 수 없다. 어떤 일정한 시대의 견해와 같은 하나의 사실은 어떤 규범이 이것에 규범성을 부여했을 때에만 규범적으로 될 수 있다. (43면)


22. 사물의 본성은 존재와 당위, 현실과 가치의 날카로운 이원론을 완화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과 사물 속에서 이성을 찾으려는 사람들 모두의 암호이다. (43면)


23. 의미는 존재에서 실현된 당위, 현실 속에 출현하는 가치이다. (44면)


24. 많은 경우에 있어서 개인적 책임이 사회적 책임의 한 징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좋은 사회 정책이 곧 가장 효과적인 형사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50면)


25. 형법의 발전이 장래 형법을 뛰어 넘어 나아가, 그리하여 형법의 개정이 하나의 보다 좋은 형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형법보다 좋은 것, 형법보다 더 현명하고 보다 인간적인 하나의 개선법 및 방위법에 이르는 것이 구상된다. (50면)


26.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범죄자가 있다. (51면)


27. 우리에게 부여된 과제는 자의의 자리에 법적 안정성을, 사디즘의 자리에 휴머니즘을, 위하와 응보의 자리에 개선과 교육을 대치시키는 것이다. (56면)


28. 정의를 가지지 않은 국가는 거대한 강도집단으로 전락한다. (아우구스티누스) (62면)


29. 민주주의는 확실히 칭찬할 만한 재산이다. 그러나 법치 국가는 나날이 먹어야 할 빵, 마셔야 할 물, 숨쉬어야 할 공기와 같이 불가결한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만이 이러한 법치국가를 지켜 나갈 수 있고,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최대의 장점이다. (62면)


30. 민주주의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처럼 잘 고안되고 기름쳐진 기계와는 달리 서로 경쟁하는 다양한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조화를 위하여는 살아 있는 인간의 분별과 숙련이 때때로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만이 민주주의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다. (64면)


31. 민주주의는 하나의 세계관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 안의 세계관적 대립들을 조정하는 심리방법이다. (64, 65면)


32. 민주주의는 그 배후에 상대주의를 갖고 있다. 민주주의는 어떠한 견해에 대하여도 그것이 국가 안에서 다수를 이룰 수 있는 한 국가의 지도권을 넘겨 줄 준비가 되어 있다. (65면)


33. 민주주의의 본질은 지도자의 선택에 있으며, 그 근본 문제는 민주적 승인과 권위적인 지도자를 어떻게 연결하는가에 있다. (75면)


34. 민주주의란 위대한 인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오히려 천재가 필요없으며 선량한 평균적 인간들을 지도자로 하여 기능할 수 있는 정치 체제이다. 이에 반해 위대한 인물들은 종종 자기 민족을 역사적 불행 속에 빠뜨린다. 이것은 그들이 정치 기구를 바꾸어 그들 없이는 기능할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87면)


35. 내가 계속하여 발견한 사실은, 학자가 정치에 참여하면 더 나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균적으로 정당이나 노동 조합을 통하여 배운 노동자들보다도 더 무능했다는 것이다. (90면)


36. 힘을 다하여 개성을 얻고자 노력하는 자는 결코 개성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성실하게 또 정직하게 자기 일에 힘쓰고, 그 동안에 조금도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완성의 특징을 다시 발견할 수가 있다. (100면)


37. 신은 공평하게도 각 인간에게 무엇인가 한 가지는 내려 주신다. 어떤 사람은 예의바르고, 어떤 사람은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신다. 그러나 같은 한 사람의 인간을 친절한 동시에 취미가 풍부하게는 결코 만들어 주시지 않는다. (101면)


38. 인간의 존엄에 대한 외경은 인간의 존엄을 높여 준다. (105면)


39. 인간성의 사상은 세 방향으로 작용한다. 즉, 비인간적 잔인성에 대하여는 인간애로서, 비인간적 굴욕에 대하여는 인간의 존엄으로서, 비인간적인 문화 파괴에 대하여는 인간적 교양으로서. (105면)


40. ... 그러나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은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106면)


41. 문화는 비교될 수 있는 양이 아니라 비교될 수 없는 질이다. (123면)


42. 시는 평가받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부딪히고, 맞부딪치고, 뒤흔들고, 승화시켜 주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123면)


43. 안다는 것은 친근해지는 것이요, 기쁜 것이다. (133면)


44. 가장 중요한 것은 결코 중대 사건이나 국가 행사의 형태 속에서가 아니라 항상 전혀 알지 못하게 조용히 일어난다. (139면)


45. 광폭한 슬로건은 길거리에 풀어 놓은 말 못지않게 위험하다. 그것은 말을 타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공중에게도 위험하고, 쇼윈도 뿐만 아니라 그 뒤에 선 파괴되기 쉬운 도자기에게도 위험한 것이다. (139면)


46. 우리는 확신에 거슬려 설교하는 목사를 경멸하지만, 법감정에 거슬려서라도 법률에 충실하기 위하여 다른 길을 가지 아니하는 법관을 존경한다. (149면)


47. 재판관의 정신은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 생명을 걸고라도 정의를 지향해야 한다. (149면)


48. 숲을 보지 아니하고 나무만 보려고 하는 것이 법학의 끊을 수 없는 본질에 속한다. (151면)


49. 순전히 경험적인 일반법 이론은 법철학의 안락사이다. (152면)


50. 수학과 라틴어를 제하면 법학 이상으로 논리적 사고법을 가르치기에 적합한 학문은 없다. (152면)


51. 법학에 있어서 개략적 지식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152면)


52. 법학의 방법에 관한 연구는 점점 쌓이고 있다.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대개 병자이지만, 학문에 있어서도 방법론에 집착하는 학문은 대개 병환을 가진 학물이다. 건강한 인간, 건강한 학문은 자기 자신에 관하여 많은 것을 모르는 법이다. (152, 153면)


53. 해석은 그 결과의 결과이다. 해석의 수단은 결론이 이미 확정된 후에 비로소 선택되어지는 것이다. 소위 해석의 수단으로 되는 것은 실제로는 법문의 창조적인 보완에 의하여 이미 발견된 것에다 사후적으로 법문상의 근거를 주기 위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153면)


54. 해석자는 법률을 그 창조자가 이해한 것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법률은 그 제정자보다도 더 총명할 수 있다 - 오히려 그것은 제정자보다도 더 총명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153면)


55. 법률가는 직업 생활의 어떠한 순간에도 자기의 직업이 필연적으로 깊은 문제로 차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으면 좋은 법률가가 될 수 없다. (153, 154면)


56. 과거의 그것보다도 더 깊고 유능한 새로운 합리주의에 몸을 맡기는 구제를 바라는 이외에 우리에게 남은 것은 없는 것이다. 사고를 포기하는 것은 정신적 파산선고이다 (알버트 슈바이쳐) (192면)


57. 법률은 악마의 나라에도 적합할 것이다. 악마가 이해(Verstand)만 갖는다면. (니체) (196면)


58. 목적은 모든 법의 창조자이다. (예링) (198면)


59. 너는 투쟁에서 법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 (예링) (199면)


60. 법률은 약한 자의 친구이다. (쉴러) (215면)


61. 지식과 양심이 법률가를 만든다. (220면)


62. 양심의 가책을 받는 법률가만이 좋은 법률가이다. (구스타브 라드브루흐) (220면)


63. 다른 부분도 들어야 한다. (225면)


64. 형평(equity)은 우스꽝스런 것이다. 법에 대하여 우리는 믿을 수 있는 기준을 갖고 있다. 형평은 방금 대법관의 양심과 일치하는 것이며, 그만큼 넓거나 좁거나 한 것이 형평이다. 그것은 우리가 대법관의 발의 길이에 따라 피트를 맞추는 그런 기준이다. 이것은 얼마나 불안정한 기준이 될 것인가! 어떤 대법관의 발은 길고, 다른 대법관의 발을 짧고, 제3의 대법관의 발은 중간정도이다. 대법관의 양심도 이와 같은 것이다. (셀든) (229면)


65. 풍토의 변천에 따라 성질이 달라지지 않는 정의도 부정의도 거의 없다. 극에서 3도만 달라져도 모든 법학이 무너진다. 자오선이 진리를 결정하고, 몇 년이 소유를 결정한다. 기본법률은 바뀌고, 법은 시대를 가진다. 강과 산이 경계를 만드는 우스운 정의! 피레네 산맥 이쪽에서는 정의가 저쪽에서는 오류! (빠스칼) (230면)


66. 학문이 우연적인 것을 그 대상으로 삼을 때 그 스스로 우연성으로 되는 것이다. 입법자의 세마디만 고치면 모든 도서관이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 (키르히만) (230, 2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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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다 (반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1. 김광일, 이홍록 등 부산에서 활동하던 동료 변호사들이 험한 고초를 겪었다는 소문이 들려도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 운명을 바꾸었던 ‘그 사건’을 만나고 나서야, 나는 판사로 변호사로 사는 동안 애써 억눌러 왔던 내면의 소리를 진지하게 듣게 되었다. 내 삶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자부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당한 삶이라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출세해서 좋은 일 하겠다고 혼자 다짐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삶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사회와 역사에 대해서 좀더 진지하게 공부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갓 세상에 발을 내디딘 청년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나에게 다가온 새로운 삶을 받아들였다. (71면)




2. 멀었던 눈이 한 번 떠지자, 비로소 힘없고 가난한 사람이 당하는 핍박과 설움이 뚜렷이 보였다. 그들의 아픔이 내 가슴에도 전해져 왔다.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겪어야 했던 고통과 그에 대한 울분이 되살아났다. 무엇인가 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80면)




3. ... 그렇지만 사회주의에 끌리지는 않았다. 마음이 좀 가다가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이름으로 일당독재를 합리화하는 문제에 부딪치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주의에 많은 문제가 있지만 사회주의가 대안이 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법률을 먼저 공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헌법에서 일반 법률까지, 내가 공부한 법률 체계는 모두 상대주의 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상대주의 철학은 전체주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나는 이 기초를 버릴 수 없었다. (88, 89면)




4. 3당 합당은 두 가지 충격을 주었다. 첫째, 호남이 정치적으로 고립되었고 영남은 보수 정치세력의 손아귀에 완전히 들어가고 말았다. 이것은 우리 정치사에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지역구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고착화되었다. 둘째, 우리 정치를 통째로 기회주의 문화에 빠뜨렸다. 철새 정치의 수준이 달라진 것이다. 정치적 야심을 가진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려고 당을 옮겨 다니는 일은 그 전에도 있었다. 그렇지만 정권을 놓고 자웅을 겨루던 정치 지도자가 그런 일을 한 적은 없었다. 3당합당으로 인해 한국 정치는 적나라한 기회주의 문화에 휩쓸려 들어갔다. (116면)




5. 부산은 넉넉하고 개방적이어서 젊은이들에게 도전할 기회를 제공하는 도시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부산은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곳이다. (137면)




6. 여당 소속이 되면서 예전에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 재야와 야당 시절 정치는 주로 투쟁이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독재권력과 싸웠다.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을 위해 정부와 싸웠다. 야권통합과 정당 민주화를 위해 분열주의, 기회주의와 투쟁했다. 그런데 여당이 되고 나니 전혀 다른 과제가 주어졌다. 국가와 국민을 위험에서 보호하는 일, 사회적 대립과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일이었다. 특히 법률과 제도가 미비한 상태에서 처음 겪는 갈들이 생겼을 때, 그것을 합리적으로 풀어 나감으로써 새로운 모범을 만드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그런 경험이 축적되어야 합리적 갈등 조정 시스템과 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153, 154면)




7. 나는 바보가 아니다. 내가 바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다만 눈앞의 이익보다는 멀리 볼 때 가치 있는 것을 선택했을 뿐이다. (163면)




8. ... 그러나 당의 이름을 걸고 부산에 출마해 거듭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김대중 대통령은 나를 기특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장관을 시킨 것 아닌가 싶다. (167면)




9. 보수 세력은 조직이 매우 크고 강하다. 이념적으로 튼튼하게 결속되어 있을 뿐 아니라 기득권의 결속력도 매우 강하다. 공동의 이익에 근거를 둔 네트워크를 감성적 네트워크로 재조직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어느 지역 어느 집단에서나 돈 많고 권력 있고 지위 높은 사람은 거의 다 보수의 네트워크에 가입되어 있다. 게다가 보수 세력은 인구가 많은 영남을 장악하고 있다. 큰 신문사, 큰 기업의 소유자, 큰 연구소를 모두 보수가 장악하고 있다. 법원, 검찰, 국정원 등 국가기관은 그 본질적 속성상 보수 쪽으로 편향되어 있다. 라이온스 클럽, 로터리클럽, JC(청년회의소) 등 경제적 여유가 있는 민간 자생 단체와 지역사회의 소위 관변 단체들도 모두 보수가 우세하다. 학술원과 각종 학회, 지식인 사회도 보수가 압도적이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보수의 나라이다. 반면 진보세력은 지역으로 갈라져 있고 이념으로 분화되어 있다. 돈 있는 사람이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단체가 별로 없다. 진보적 시민단체조차도 기업의 지원을 얻지 못하고 언론이 외면하면 힘을 쓰지 못한다. 튼튼한 정책연구소도 거의 없다. 그런데 보수의 나라에서 진보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얕게 뿌리 내린 작은 나무에 너무 많은 과실이 매달린 형국이다. 두 차례의 대선 승리와 10년의 집권도 보수와 진보의 불균형을 크게 바꾸지는 못했다. 보수와 진보의 격차는 ‘조선일보’와 ‘오마이뉴스’의 자산 규모 차이만큼이나 크다. 진보적인 대통령이라도 보수의 네트워크에 포위되어 고립당하면 힘을 쓰기 어렵다. 변명이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나는 그런 조건에서 대통령이 되었고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진보정당의 지지율이 낮은 것도 같은 원인 때문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데는 앞으로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204, 205면)




10. 퇴임한 후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과 토론을 보았다. 그는 사회적 소수파에 속한 시민운동가 출신의 정치인이지만 매우 품격 있는 언어를 구사했다. 나도 그렇게 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234, 235면)




11. 그런데 진보 보수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이 원칙을 아는 정치인인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 여부이다. 일관성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야, 진보든 보수든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92면)




12. 대통령을 하는 동안 국가균형발전을 이루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가는 것이다. (305면)




13.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3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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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와 한국사회 - 이주노동자, 화교, 혼혈인, 민주주의총서 07
박경태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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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수자는 사회의 주류에 해당하는 다수자와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억압받아 본 사람의 시각, 불편함을 겪어 본 사람의 시각, 아픔을 느껴 본 사람의 시각이다. (8면)


2. 또한, 소수자들 스스로도 억압적인 구조에 대항해서 끊임없이 싸워 왔는데, 최근 들어 소수자들은 자기가 속한 개별 집단뿐만 아니라 소수자 전체의 문제와 소수자라는 집단 정체성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공동 행동을 하기도 한다. (12면)


3.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소수자로 분류되려면 다음의 네 가지 특성이 있어야 한다. 첫째는 식별 가능성이다. ... 둘째는 권력의 열세로, 여기서 말하는 권력은 정치권력만이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측면에서의 권력을 모두 포함한다. ... 셋째는 차별적 대우의 존재다. ... 마지막은 집단의식 또는 소속의식이다. 어떤 사람에게 위의 세 특징이 모두 있더라도 소수자 집단의 성원이라는 소속감이 없다면 그 사람은 그냥 차별받는 개인일 뿐이며, 스스로 개인 차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 자신이 차별받는 소수자 집단에 속한다는 것을 느낄 때에야 비로소 개인이 아닌 소수자가 된다. (14, 15면)


4. ... 이때 ‘성공한 PD’라는 캐머런의 사회적 지위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오직 중요한 것은 그가 흑인이라는 사실이다. (16면)


5. 사회적 약자인 가난한 사람 중에는 비슷한 사람들과 공감대를 가지며 ‘가난한 집단’에 속한다는 집단의식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고 대부분은 그냥 살아갈 뿐이다. 반면에 소수자는 집단으로서 차별받기 때문에 성원들이 집단의식을 가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18면)


6. ‘피 한 방울의 법칙’one drop rule (23면)


7. 그러나 범주화는 고정관념을 낳게 되고 어느 범주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속성을 갖는 것으로 과도하게 일반화하게 된다. (25면)


8. 그러나 고정관념은 부정적인 태도와 감정을 수반하는 편견이 되기 쉽고, 편견은 개인과 사회 차원에서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되는 인구 집단에 대한 배제와 차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더 나아가 그러한 배제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수 있다. (25면)


9. 이때 힘없는 소수자는 화풀이해도 괜찮은 매우 안전한 표적이며 적당한 희생양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화풀이를 하는 사람은 자신의 적개심, 공격적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들은 원래 나쁜 사람들이다, 당해도 싸다’는 식으로 부정적인 편견을 퍼뜨리게 된다(한규석 1995, 402). (26면)


10. 미국에서 초중 고등학교 교사 대부분은 중산층 백인이고 학교 교육이 추구하는 가치와 목표 역시 중산층 지향적이기 때문에 소수 인종 학생들이 종종 무시당하고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윤인진 2000). (29면)


11. 서구 중심의 세계화가 민족·인종차별을 낳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착취의 정당화 때문이었다. (31면)


12. 지배를 합리화할 때에는 언제나 지배당하는 사람들이 열등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이론이 등장하는데, 18세기 프랑스 철학자들은 그런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볼테르는 “흑인종은 사냥개와 똥개가 다른 것처럼 우리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다”라고 주장했고, 몽테스키외는 “어느 누구도 지극히 지혜로운 존재인 신께서 영혼을, 그것도 선량한 영혼을 완전히 새까만 그들의 몸뚱이에 불어넣어 주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폰타나 1999, 171-172). (31면)


13. 문제는 인종적·민족적 소수자를 바라보는 서구의 시각이 보편적인 시각이 되었다는 점이다. (32면)


14. 국가에 대한 애정과 이에 대한 강조가 클수록 배타성도 증대되며 이방인에 대한 배척도 증가할 것이다. (35면)


15. 인종주의는 ‘인종에 따른 생물학적 차이가 인간의 능력을 결정한다는 믿음’이다. 이 정의는 한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을 내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인종간의 불평등은 어쩔 수 없거나 당연하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인종주의는 우리와 다른 사람을 구별하는 개념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며,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인간이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다른 인간을 지배하는 것을 합리화한다. (40면)


16. 지금 우리가 보고 겪는 인종주의는 백인을 정점에 둔 서구 중심의 인종주의다. 그런데 이 같은 인종주의는 백인만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도 갖고 있어서, 백인을 정점에, 그리고 흑인을 바닥에 두고 우리를 그 가운데에 놓음으로써 백인에 대한 열등감과 흑인에 대한 우월감으로 나타난다. (41면)


17. 인종을 구별하는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열을 가리기 위해 인종이라는 개념을 동원하고, 차이가 있어서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하기 위해 차이를 만들어 낸다. (46면)


18. 예를 들어, 백인들의 미국 정착 초기인 1660 이전의 버지니아에서는 인종 편견과 계급 편견을 구별하는 것이 어려웠다. 가장 하층의 일을 하면서 멸시받았던 흑인 노예와 백인 계약 하인이 서로 동병상련의 심정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엘리트에 해당하는 백인 지배층은 흑인 노예와 백인 계약 하인이 제휴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48면)


19. 엘리트는 대중의 담론에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자기의 방식대로 합의를 유도해 내기에 유리한 자리를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특히 언로를 통제하는 엘리트는 이론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49면)


20. 그럼에도, 오늘날의 학문 세계는 여전히 백인 지배가 극적으로 드러나는 대표적인 분야다. 권위있는 학술지 대부분이 미국과 유럽에서 출판되고 있으며, 그것들은 바로 그 지역의 학자들에 의해서 심사되고 편집된다. ... 학문의 서구 종속성, 특히 미국 종속성은 심각하다. (51면)


21. 여기에서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구성원을 동질화시키려는 이데올로기와 차별화시키려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그것이다(이종영 2003, 53-55) (56면)


22. 근대를 규정하는 자본주의는 원래부터 경쟁과 적자생존을 원칙으로 하는 불평등한 체제이다. 적자생존과 경쟁의 원리는 우월한 자에게는 축복을, 열등한 자와 경쟁에서 낙오한 자에게는 가차없는 배제를 초래한다. (61면)


23. 현재 일어나는 문제의 본질은 한국인의 생물학적 특성 때문이 아니라 사회구조 때문이다. 잘못된 구조가 한국인으로 하여금 잘못 행동하도록, 또는 잘못 행동해도 되도록 한다는 말이다. (68면)


24. 한국에 와서 일하고 돌아가는 것은 괜찮지만 계속 사는 것은 안 된다. 한국인이 되는 것은 안 된다. (81면)


25. 실제로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생기는 ‘비백인’ 관련 문제 대부분은 백인들이 만드는 것이고, 문제의 핵심은 백인에 의한 인종차별에서 출발한다. 사회적 갈등의 근본 원인은 그들을 차별하고 빈곤 상태에 묶어 놓고 빈민층 집단 거주 지역에 한정시켜 놓은 데에 있는 셈이다. (82면)


26. 외국인과 어울려 산 경험이 적은 한국 사람들이 이주노동자들에게 갖는 어색함은 배타성으로 나타났고, 노동력의 도입에만 관심을 둔 정부의 자유방임에 가까운 정책은 그들을 빈 공간에 방치해 버렸다. 바로 이 공간을 시민단체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103면)


27. 기존의 산업연수 제도는 이주노동자들을 노동자가 아닌 연수생의 자격으로 도입함으로써 근로기준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으며 여러 측면에서 인권침해를 유발하는 요소가 있다. 꾸준한 입법 노력을 해 온 끝에 2003년 7월 31일에 드디어 고용허가제(외국인근로자고용 등에 관한 법률)가 통과하였지만, 이주노조는 고용허가제가 이주노동자들의 사업장 이동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하지 않는 악법이라는 이유로 거부하고 대신에 이것을 보장하는 노동허가제를 주장하고 있다. (109면)


28. 이주노조를 제외한 다른 지원 단체들은 과거에는 운동단체로서의 정체성이 강했다면, 이제는 복지기관의 성격이 강해지고 있다. (112면)


29. 운동적 시각과 복지적 시각 사이에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쁘다는 결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양자의 활동은 상호보완적이며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아예 단체 간의 역할 분담을 고려해 볼 수도 있다. (113면)


30. 운동적 시각과 복지적 시각이 반드시 대립적인 것이 아니고, 양자의 결합으로 오히려 새로운 영역이 개척될 수도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회복지운동’이다. (113면)


31. 당사자 운동의 좋은 예는 최근에 있었던 장애인들의 이동권 확보 투쟁이다. 기존의 장애인 복지가 국가나 비장애인의 도움에 의존했던 것이라면, 당사자 운동으로서의 장애인 운동은 장애인이 스스로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복지를 쟁취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소수자 운동에서 최근 제기되기 시작한 ‘당사자주의’와 같은 맥락에 있는 개념으로, 도움을 받되 당사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도움을 받겠다는 주체적인 의지가 표현된 것이다(윤수종 2005, 22). (114면)


32. 소수자 운동은 소수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고 자신들의 존립 공간과 자유의 공간을 만들어 나가려는 운동이다(윤수종 1999). 따라서 이주노동자 운동이 진정한 소수자 운동이 되려면 그들 자신이 스스로의 주변적인 정체성에 대해서 자각해야 하고 그것을 행동에 옮기려는 주체적인 실천 의지가 있어야 한다. (116, 117면)


33. 이러한 차이는 이 단체들의 기본적인 성격을 가르게 되는데, 민중 조직은 다분히 정치적 지향성을, 지원 조직은 경제적 또는 복지 지향적인 성격을 띤다. (134면)


34. 한국의 이주노동 관련 시민단체가 이주노동자에게 더 나은 사회적 자본이 되려면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방식에서 벗어나 그들 스스로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할 것이다. (135면)


35. 그렇지만, 차이가 자동으로 차별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며 인종주의를 거칠 때 비로소 차별이 된다. (137면)


36. 서양의 시각에서 동양을 미개하고 열등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오리엔탈리즘이라면, 열등한 이주노동자의 이미지는 서구를 중심이나 표준, 이상으로 보고 한국이 속해 있는 아시아를 스스로 주변이나 비정상, 이탈로 봄으로써 우리와 그들을 문명-야만의 구도로 보는 ‘역전된 오리엔탈리즘’(김원 2005, 8)에서 나오며, 아시아를 비하하고 타자화하는 서구인의 시각을 그대로 복제한 우리 안의 ‘복제 오리엔탈리즘’(이옥순 2002)에서 나온다. 그들을 비하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서구와 비슷한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게 되며, 그들과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우리의 동질성을 위협하는 이방인들을 제어할 수 있다고 믿는다. (138면)


37. 사회의 주도권을 가진 상층계급은 하층계급을 한 수 아래로 본다. 톰슨E. P. Thompon에 따르면 18세기 말 영국의 유산계급은 하층계급의 상당수가 살인자, 도둑, 주정꾼, 창녀 등이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 노동, 절제, 절약, 종교라고 보았다. (138면)


38. 노동자라고 다 같은 노동자가 아니다. 그레이Kevin Gray는 이런 상태에 놓인 이주노동자들을 ‘계급 이하의 계급’이라는 점에서 ‘저층계급’Underclass으로 규정한다(그레이 2004). (140면)


39. “한국인에게는 다른 민족의 피가 40퍼센트 정도는 섞여 있다.” 학계에서 존경받는 원로 학자인 재외동포재단의 이광규 당시 이사장이 언론과의 2006년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198면)


40. 좀 더 포괄적이고 중립적인 의미의 표현으로는 ‘이중 문화 가정 자녀’ 또는 ‘다문화 가정 자녀’가 있다. 이런 표현은 특히 국제결혼 가정이 이중의 문화 배경을 갖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본인의 정체성이 한쪽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양쪽에 걸쳐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202면)


41. ... 기지촌은 미군을 대상으로 한국 여자들이 술과 몸을 파는 동네였고, 서양 남자들의 남성성이 활개를 치는 곳인 동시에 한국 남자들의 무기력함이 증명되던 곳이었다. 거세당한 한국 남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그 여자들’을 상대화하고 손가락질하는 것밖에 없었다. (212면)


42. 원본에 가까워지려는 복사본의 노력은 결코 극복될 수 없는 열등감을 확인시켜 준다. ‘미8군’에 대한 그런 열등감은 그 주변에 기생하는 기지촌에 대한 멸시로 나타났다. (213면)


43. 아이들과 관련해서는 정체성 문제가 가장 큰 고민이었어요. “너는 한국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니다. 혼혈인이다. 그러나 (양쪽의) 좋은 점만 가지려고 노력하는 혼혈인이다”는 식의 자신감으로 정체성을 주려고 해요. 그래서 혼혈인 모임에 꼭 아이들을 데리고 가요. 아이들도 미국인 사회나 한국인 사회에서 느끼는 것과 다른 편안함을 느낀다고 해요. (251면)


44. 자녀들이 스스로 한국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은 각 민족, 인종 집단 간의 ‘정체성의 정치’가 작동하는 미국 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252면)


45. 그러다가 ‘소수자를 차별할 수 없다’는 소극적인 수준에서 ‘소수자를 얼마나 채용했는가’라는 결과를 보여줘야 하는 적극적인 수준으로 발전했다(Farley 2000, 491). 적극적 조치는 교육, 고용, 기업 경영의 세 분야에서 소수자에게 특혜를 주거나 지원을 하는 것이다. (261면)


46.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던 ‘사소한’ 차이가 특정한 상황에서 결정적인 차이로 인식되는 순간, 그 사람은 소수자가 된다. 그 차이가 차별의 정당한 원인으로 여겨질 때, 그 사람이 누리던 인권은 유보된다. 차이는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305면)


47. 소수자는 소외당한 객체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처한 현실과 문제를 해결하려고 적극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을 지닌 주체이기 때문이다. 운동의 주체로서 소수자는 표준화를 거부하는 사람이다. ... 표준적인 인간상에 대항하는 소수적인 인간상이 다양하게 표출되는 것은 차이를 강조하는 탈근대에 접어들면서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윤수종) (308면)


48. 사회의 다양성은 이제 사회운동의 다양성을 요구하고 있다. 기존의 사회운동이 ‘노동중심의 중심성’과 같은 하나의 가치를 추구하며 삭발, 단식, 점거, 투옥 등의 엄숙하고 심각한 운동이었다면 탈근대 시대의 사회운동은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다양한 방식의 운동을 낳고 있다. (308면)


49. 소수자는 하나의 특징을 갖는 사람들이 아니다. 소수자는 단순히 다수자에게 적대적이기 때문에 소수자인 것이 아니라 다수자의 작용 방식과는 다른 작용 방식을 지니기 때문에 소수자다(윤수종). 따라서 소수자운동은 다수자화하지 않는, 즉 지배장치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작동되어야 하며, 그럴 때에 비로소 거부와 부정이 아니라 긍정과 구성으로 나아가는 운동이 될 수 있다. (30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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