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고병권 지음 / 소명출판 / 2001년 8월
평점 :
품절
1. 진리를 찾는 철학자들과 황금을 찾는 모험가들 사이에는 닮은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목표의 실존을 남들보다 크게 확신한다는 점이다. 엘도라도의 실존을 확신하고 황금을 찾아 남미의 정글로 떠나는 모험가들처럼, 전체를 설명해 주는 질서를 알아내고 싶어하는 철학자들도 ‘하나의 질서, 하나의 원리가 존재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 모험가들은 ‘어떤 곳’을 뒤지지만 철학자들은 ‘모든 곳’을 뒤진다. 모험가들에게 ‘모든 곳’에 있는 것은 무가치하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어떤 곳’에만 있는 것이 무가치하다. 만약 모험가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특정한 곳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개개의 요소들에 전체의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27면)
2. 철학자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생성과 소멸의 역동성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단순한 ‘현상’이나 ‘가상’으로 치부한다. 그리고는 ‘실재계’, 다시 말해 참된 세계가 따로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 ‘물 자체의 세계’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한다. (29면)
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조롱한다. “그들 역시 삶의 지푸라기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삶의 지푸라기에 매달려 있음을 비웃고 있다.” (30면)
4. 진리는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철학자들이 상상하는 세계 속에 존재한다. 진리는 무엇보다도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개별적인 것들로부터 충분히 멀어진다. 진리는 고딕의 첨탑보다도 더 높이 올라갔고 진리를 잃어버린 개별적 존재들은 한없이 낮아졌다. ‘너 자신의 초라함을 알라!’ (32, 33면)
5. 이 운동을 이끄는 대립적 항은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이다. 디오니소스는 개별적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거대한 충동을 나타내며 아폴론은 항상 절도와 자기 인식을 잃지 않는 이성을 나타낸다. (40면)
6. 그는 여기저기서 풍겨나는 헤겔의 냄새를 불쾌하게 생각했다. “변증법적인 무뚝뚝함”이 디오니소스의 참된 의미를 가리고 있다는 것이다. (40면)
7.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대상이었다. (41면)
8.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긍정의 신으로 이해함으로써 삶을 부정하는 기독교의 신과 대비시킨다. (41면)
9.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와 인생은 아무런 참된 만족도 줄 수 없다. 따라서 세계와 인생은 우리가 집착할 만한 것이 못된다는 인식이 획득되는 것이다. 이것이 비극적 정신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비극적 정신은 체념으로 향한다.” (43면)
10. “근대인들은 환희도 힘도 모르는 비평가가 되었으며, 결국은 도서관원이나 인쇄교정자 정도로 되고 말았다.” (45면)
11. 지배적 사상은 지배적 삶의 방식과 떨어져 존재하는 게 아니다. (49면)
12. 하버마스가 주목한 것은 바로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다. 상호주관성은 과학주의에 경도되지 않으면서도 주관성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이다. 행위자들은 의사소통 행위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수정해가고 결국에는 하나의 합의를 향해 점차 접근해간다. 그는 ‘이상적 조건의 담화 상황’ 안에서는 서로를 접근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물론 가다머는 이러한 ‘이상적 담화 상황’이라는 가정을 “충격적일 만큼 비현실적”이라고 비꼬았다. 하버마스는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언어에서 찾았다. 발화행위의 내부에는 서로의 정직성과 성실성, 이해가능성, 진리성에 대한 요구가 들어 있다. (99, 100면)
13. 캐나다의 퀘벡주 문제나 이슬람 문제를 언급하면서 테일러는 보편주의가 차이적 요소들을 ‘오인’하고 ‘억압’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자기 문화의 관점으로 다른 문화를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무조건적 승인을 위한 토대로 “모든 문화는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내세웠다. 그는 보편주의 자체는 거부하지만, 새로운 보편적 준거를 발견한다. “우리들 각자에 특수한 것을 (절대적으로 - 필자) 승인함으로써 우리는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그는 보편주의에 맞서 차이에 대한 승인과 보존을 요구한다. “현재뿐 아니라 여원히 차이를 유지하고 소중히 하자는 것이다. 결국 정체성에 관한 한 그것이 어떤 경우에도 상실되어서는 안된다는 열망보다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101, 102면)
14. 지난 시대 많은 사상가와 운동가들이 사회주의의 실패에 그토록 예민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아마도 ‘체제’ 자체를 문제삼은 거대한 비판과 새로운 체제에 대한 소중한 꿈이 깨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주의의 실패는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체제에 대한 실험의 실패로 받아들여졌다. 그 후로 급진적인 사회운동과 정치사상은 퇴장해 버렸다. (121면)
15.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122면)
16. 한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 니체가 미래를 낳을 능력을 상실한 근대 유럽 문명을 ‘허무주의’(nihilism)라고 명명했을 때, 그것은 철학적 용어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용어이다. (123면)
17. 국민들이 더 이상 군주적 본능을 가지지 못할 때, 다시 말해 주권자, 입법자, 가치의 창안자이기를 그칠 때, 정치 영역은 위축되고 만다. (123면)
18. 아렌트 역시 근대 사회를 ‘정치의 죽음’으로 이해했다. 정치란 ‘행위(프락시스, praxis)'의 영역인데, 행위란 항상 어떤 것을 ‘시작하는 것’, ‘주도하는 것’이며, 타자와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123, 124면)
19.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자신의 특성을 부각시키고자 했고, 독특한 행위와 업적을 통해 자신이 최고임을 보여주고자 했으나”, 근대 사회에서 이러한 독특한 행위나 사건들은 통계학이 예외들을 다룰 때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의 일탈이자 동요”일 뿐이다. 요컨대 순응주의 사회에서 제일 먼저 죽어나가는 것이 정치다. (124면)
20.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이 보여준 폭력성이 정치적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차이’를 억압하는 ‘동일성의 정치’가 된다. (125면)
21. 좋은 것과 나쁜 것, 친구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별해내는 기술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이다. 여기에는 가치의 창조와 평가,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 세력에 대한 물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126면)
22. “예속적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다만 타인들이 평가하는 대로 존재하는 인간들에 불과하다. 그 안에서 인정되었던 것, 또는 그들로 하여금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가치도 찾아내지 못한다.” (127면)
23. 가치 창조와 평가를 봉쇄했던 것이 근대 정치의 첫 번째 문제였다면, 두 번째 문제는 허무주의적 인간형을 산출하는 점에 있다.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는 잔인한 ‘길들이기’와 ‘길러내기’가 개입한다. (127면)
24. 니체는 우선 자유주의자들이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자유로운 개인’이라고 하는 기본 원리에 대해 비판한다. ‘자유로운 개인’이란 하나의 형이상학적 실체일 따름이다. (132면)
25. 더구나 ‘자유로운 개인’을 떠드는 자유주의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133면)
26. 1990년에 나온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정치의 영역에서 갈등을 몰아낼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찾고 있다. 그가 제시한 방안은 정치가 시민들 사이의 중첩적 합의가 가장 큰 곳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중첩적 합의를 키우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로티의 경우에는 롤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차이를 발생시키는 요소들을 철저히 사적 영역에 가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34면)
27. 니체는 사회주의를 루소와 관련시킨다. “루소적 인간의 상으로부터 격렬한 혁명으로 돌진하는 힘이 나왔다. 실로 모든 사회주의적 진동과 지진이 일어날 때 ... 움직이는 인간은 언제나 루소적 인간이다. ...” (135면)
28. 사회주의자들은 문화나 제도, 도덕이 갖고 있는 힘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 그들은 오직 소유물의 분배만을 본다. “사회주의자들은 소유물의 분배가 과다한 불공정과 폭력의 결과임을 지적하고 부당한 기반 위의 구축물에 대한 의무를 전체적으로 거부하는데, 이때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개개의 것만을 보고 있다.” (136면)
29.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사회주의는 전제주의를 닮아간다. (136, 137면)
30. 니체는 “사회주의가 원하는 국가가 달성된다면 생성의 강한 에너지는 파괴될 것”이라고 말하고 그때 국가는 새로운 생성적 힘을 상실하고 허무주의적 형태를 띠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137면)
31. 니체는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근대성에 대한 비판’으로 간주하였다. 사실상 민주주의야말로 근대 정치체제의 허무주의적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근대성 비판’이라는 제목의 소절에서 니체는 ‘서구 전체가 그 제도(민주주의)를 낳고 미래를 낳는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고 말한다. ... 현대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군주적 본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새로운 가치에 도전하기보다는 기존의 가치에 적응하려고 하며, 동일한 가치 아래 안주하고자 한다. 그래서 니체는 민주주의를 “능동성의 개념이 박탈되고 적응이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내세워진다. 삶 자체를 외적 환경에 대한 내적 환경의 적응이라고 정의한다”고 비판한다. 서구 민주주의에서 생성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138면)
32. 니체는 사람들을 복종시키기 위한 고도의 권위를 ‘윤리’라고 보았는데, 윤리는 관습에 의하여 규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141면)
33. 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항상 ‘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상 이것은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이 아니라 ‘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142면)
34. 길들이기의 주요한 수단이 군대였다면, 길러내기의 주요한 수단은 학교이다. (144면)
35. 하지만 ‘아곤’이 ‘안타곤’과 반대의 뜻을 가진 말이라고 해서 아무런 변화가 없는 평화 상태를 의미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아곤은 오히려 무시무시할 정도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사회의 항상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체계이다. (146면)
36. 그리스인들은 여러 진리들이 공존하고 경쟁하기를 바랬다. 경쟁이 없는 진리는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했다. (148면)
37. 그리스인들은 덕을 가치 평가를 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힘으로 이해했으므로 그것을 강자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149면)
38. 그리스인들은 아곤이라는 경쟁을 벌인 곳을 ‘아레나’라고 하는데, 이들은 자신의 덕에 기초하여 이곳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경쟁하였다. (149면)
39. 사회는 힘을 상실하고 정태적인 제도만이 안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안정성을 생성적 힘에 둘 것인지, 법과 제도에 둘 것인지는 그리스의 정치 체제와 오늘날 우리의 정치 체제를 가르는 중요한 구분이 될 것이다. (151면)
40. ‘무’에서 시작한 기독교의 창조론이 창조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유’에서 시작한 원자론은 세계의 목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154면)
41. 우주가 변화하게 될 지향점이란 없으며 ... 원자론은 세계에 대한 초월적인 것의 침투를 막는다. (154면)
42.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있는 것’, 다시 말해서 존재하는 것은 처음부터 있으며, 계속해서 변화하지 않은 채로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155면)
43.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물들의 영속성과 통일성을 비판했던 인물로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그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유명하다. 그는 모든 사물들이 변화한다는 것, 변화야말로 세계의 본질이라는 점을 주장했다. (156면)
44. “원자들은 그들 자신만의 대상이고, 스스로와만 관계할 수 있다.” (들뢰즈) (158, 159면)
45. 니체는 원자를 힘으로 대체한다. 힘의 첫 번째 속성은 그 자체로 단수로 존재할 수 없는 복수의 것이라는 점이다. 힘은 항상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만 작동한다.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그리고 다른 힘이 없다면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힘이 정의되기 위해서는 복수의 힘이 전제되어야 한다. 힘은 차이와 거리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하나의 힘은 다른 힘들의 종합이다. ... 힘의 두 번째 속성은 ‘표현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서 힘은 자신의 힘을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표현되는 것만이 힘이기 때문이다. (159면)
46. 힘의 세 번째 속성은 정지되어 있는 양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서 멈추어 있는 힘은 없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힘은 ‘정지’나 ‘불변’과 항쟁하고 있으며, 그 양이 고정되어 있다고 해도 그 본질은 유동적인 것이다.” 힘의 양이 고정된 것처럼 보일 때조차 그 성격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변화는 힘의 앞지를 수 없는 본질”이다. 이제 니체는 세계를 ‘힘들의 바다’로 본다. (161면)
47. 힘들의 싸움은 항상 승패가 가려진다.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다면 힘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긴 힘이 명령한다. 힘들의 양적 차이로부터 지배와 피지배가 생겨난다. (165면)
48.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 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166면)
49. 아렌트는 ‘Macht’가 그리스 정치의 공공 영역을 가능하게 했던 힘인 ‘디나미스(dinamis)’와 같은 뜻이며, 근대의 다양한 파생어를 가지고 있는 라틴어 ‘포텐샤(potentia)’와 통하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아렌트의 설명에 따르자면 그것은 ‘능력’이나 ‘가능성’이다. (170면)
50. 관계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관계를 통해 힘을 주고받으며, 힘은 그 자체로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다. (173면)
51. “권력의지가 해석한다.” 권력의지는 하나의 해석이고 평가이다. (177면)
52. 원자 자체가 가진 난점에 대해서는 에피쿠로스 역시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데모크리토스와 달리 원자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것들의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때문에 맑스는 데모크리트스와 에피쿠로스의 차이를 다룬 자신의 논문에서 에피쿠로스의 최종적 결론이 ‘원자론의 해체’라고 적고 있다. (182면)
53. 학자들은 주사위를 600번 정도를 던지면 1이 나오는 일이 100번 정도 반복될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도박사들은 1의 눈금이 여러 번 반복되었어도 동일한 상황은 단 한 번도 재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189면)
54. 영원회귀는 동일한 반복을 확인하는 문제가 아니라 ‘생성을 반복하는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니체의 저서 속에 등장하는 영원회귀가 항상 의지를 묻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원회귀를 시험하는 악마들은 ‘반복이란 새로울 것도 없는 피곤한 일인데 계속할 것인지, 그것을 원하는지’ 묻는다. 차라투스트라를 시험하는 난쟁이가 던진 문제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뿐인 주사위 던지기를 계속할 것인지, 그런 의지가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191면)
55. 생성이 시간을 필요로 하는 만큼이나 시간 역시 생성을 필요로 한다. 깨달음의 시간은 차라투스트라의 새로운 생성, 새로운 변신을 필요로 한다. (195면)
56. 용기는 가장 훌륭한 살해자다. 공격하는 용기 그것은 죽음까지도 살해한다. 왜냐하면 용기는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다시 한 번!’ 이렇게 외치기 때문이다. (196면)
57. 순간들을 통해 볼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순간들 속에 다른 시간과 공존하며 경쟁하고 있는 시간이다. (197면)
58. 생성이 반복될수록 양산되는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198면)
59. 니체는 “부정과 파괴야말로 긍정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203면)
60. 어떤 연구에 따르면 인간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 철학적 저작의 최초 사례는 1486년의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인간의 권위에 대하여’라고 한다. 그러나 이 시대도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존재로 등장하지는 못한다. 사람들은 사물들을 어떤 객관적 기준에 의해 구별하기보다는 유사한 것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에서 분리되어 자연에 자기 잣대를 들이댄 것도 17세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이나 신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 존재의 확실성을 끌어냈을 때, 데카르트가 드러낸 것은 존재의 확실성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분리와 독립에 대한 의지였다. 이 점에서 니체는 17세기를 “인간을 발견하고 질서를 세우고 발굴하려고 노력한 세기”라고 말한다. (213, 214면)
61. 니체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 사이에 끼어 있는 ‘과(und)’자를 바라보고 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자신들이 자연이나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과 대등하게 나열될 수 있는 존재나 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인간의 오만한 욕망이 그 한 글자를 통해서 들통났기 때문이다. (215면)
62.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제1부를 이 ‘변용’에 대한 가르침으로 시작한다. “내가 너희에게 세 가지 변용을 들겠다.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고, 사자가 마침내 아이가 되는 변용을.” 낙타는 잘 견디는 정신의 표상이다. 낙타는 모든 무거운 것들을 맡아진다. 주어진 가치를 묵묵히 수행하기만 하는 낙타가 “선악에 있어 창조자가 되고 싶은 자는 먼저 파괴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는 ‘이-아’라고 우는 나귀와 같은 족속으로, ‘야(긍정)’에 대한 잘못된 발음 즉 긍정의 정신에 대한 오해를 상징한다. 이에 비해 사자는 거대한 부정의 정신이다. 낙타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사자는 이해한다. 사자는 자유를 획득하고 자신의 터전에서 주인이 되고자 한다. 거대한 용이 나타나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었고, 모든 가치는 내 몸에서 빛난다. ... ‘너는 해야만 한다(당위와 의무)’만 존재한다”고 말할 때, 사자는 으르렁거리며 ‘나는 하고 싶다’를 외친다. 그러나 사자 역시 긍정을 알지 못했다. 사자는 부정조차 긍정하는 정신에 대해 알지 못했다. ‘나는 하고 싶다’보다 위에 있는 것은 ‘나는 존재한다’이다. 사자가 할 수 없는 일을 어린아이가 한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 그것은 사자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린아이는 존재 자체로 하나의 신성한 긍정이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한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하나의 놀이이며,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다. (218, 219면)
63. 니체는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메시지를 그렇게 요약했다. 신들이 죽었으므로 이제는 자신의 삶을 창조할 초인이 살기를 기대한다. (222면)
64. 디오니소스는 “생성 속으로 뛰어든 존재의 혼”이다. (233면)
65.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영원회귀의 의미를 깨닫는 과정이 긍정의 권력의지를 획득하는 과정이었으며, 또한 그것을 느끼는 새로운 신체를 생성시키는 과정이었다. 긍정의 권력의지는 영원회귀를 요청한다. (234면)
66. ‘이름 부르기(호명)’를 통해 계급이 재생산된다는 알튀세의 지적처럼 이름은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서 그 사회의 주체로 거듭나게 만드는 핵심적인 기제이다. (236면)
67. 니체의 이름은 하나의 가면이기도 하다. “무릇 심오한 인간은 가면을 좋아한다.” 그는 가면을 바꿔 쓰며 전투를 수행한다. 그러나 상형문자를 놓고 괴로워하는 이집트의 청년처럼 가면 뒤에 있는 진정한 얼굴에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진정한 얼굴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 가면 쓰기는 하나의 놀이이며 예술이다. (238, 239면)
68. ‘차라투스트라’에는 낡은 가치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가치에 대한 창조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 그러면서도 부정과 창조는 과거를 구제하는 긍정의 정신 속에 자리하고 있다. (246, 247면)
69.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 (247면)
70. ‘모든 가치의 전환’, 이것이 인류에 있어 최고의 자기 성찰의 행동을 위한 정식이고, 이것이 나의 살이 되고 나의 천재성이 된다. (248면)
71.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 - 프리드리히 니체” (250, 251면)
72. 힘들은 지배적 가치 외부에서 ‘가치 전환의 실험’을 위해 뛰어들고, 뛰어들어 온 힘들은 항상 전쟁을 만들어 낸다. (252면)
73. 그(베버)는 ‘책임 윤리’와 ‘신념 윤리’를 구분했다. 이 둘을 나누는 기준은 소명이 있느냐의 여부보다는 거리 두기의 능력과 그것에 대한 책임 문제다. 자신의 행동을 거리 두기를 통해서 올바르게 예측하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책임 윤리’다. (279면)
74. 니체는 ‘내적인 거리’가 ‘거리의 열정(pathos of distance)’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거리의 열정이란 (사회 신체이든 개인 신체이든) 신체에 내재하고 있는 힘과 능력을 긍정하고, 그 힘과 능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차이(거리)를 생산해내는 열정이다. 거리의 열정을 가진 자들을 니체는 가치의 신봉자가 아니라 가치의 생산자라고 말했다. 초월적인 존재나 신성한 가치를 신봉하기 위해 제 자신을 합리적 기계 속에 던져 버리는 프로테스탄트들과 달리 ‘내적인 거리’를 ‘거리의 열정’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제 스스로가 이용할 가치를 생산해 낸다. 단지 하나의 형이상학적 거리(차이)만이 유의미했던 프로테스탄트들과 달리 가치 생산자들에게 있어 거리는 다양화된다. 이전의 가치들과 새로 생산된 가치들 사이에 다양한 거리(차이)가 존재하며, 내 가치와 다른 사람의 가치 사이에 다양한 거리(차이)가 존재한다. (286, 287면)
75. 오웬은 이 책(Nietzsche, Politics and Modernity)에서 자유주의의 보편적 토대를 찾으려는 시도를 ‘철학적 자유주의’로 부르고, 그러한 시도가 불가능하다는 판단하에 정치적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것을 ‘정치적 자유주의’라고 부른다. ‘정의론’의 롤스가 전자에 해당한다면, ‘정치적 자유주의’의 롤스가 후자에 해당한다. (290면)
76. 다른 한편 공동체주의자들은 차이의 문제에 대한 훨씬 강력한 자신감을 보이며, 진정한 승자의 얼굴을 하고서 가치 투쟁의 장에 나온다. 자유주의자들이 위기를 차이의 아나키적 전쟁상태에서 찾았다면, 공동체주의자들은 그것을 서구 자유주의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병리적 상태에서 찾았다. ... 공동체주의자들에게 자유주의자들의 ‘회피의 방법’은 ‘위험스런 결벽성’이며, ‘삶의 기본 원리를 방어할 능력을 소진한 창백한 상대주의’로 보였다. (291, 292면)
77. 헤겔이 국가를 시민들의 이해의 조정이나 안전의 문제를 넘어서는 하나의 인륜성(Sittlichkeit)의 실체로 간주했던 것처럼 공동체주의자들은 국가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292면)
78. 인륜(Sittlichkeit)이라는 말은 막연한 보편성을 가장하는 도덕(Morality)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도덕이 현존하지 않는 것을 실현해야만 하는 어떤 의무를 부여하는 반면 인륜성은 실정성(positivity)을 갖는 것으로 그가 소속한 공동체 속에서 구체적인 도덕적 의무를 갖게 하는 것이다. (299면)
79. 우리는 (자유주의) 사회에 대해서 윤리의 합리적 정당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목적(telos)을 가져야 하며, 이것의 상실은 도덕적 정당화의 실패로 이어진다. 목적을 잃은 자유주의적 자아는 “그 주장의 여러 지점들에서 급진적으로 해체된 주체로 용해되거나 해체되거나 급진적으로 위치지워진 것으로 붕괴될 위험이 있다.” (310면)
80. 특히 포스트모던 흐름에 기대는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신)니체주의자들의 공격에 전혀 성공적으로 방어하지 못하고 있으며, 정체성을 상실한 무기력한 주체들만을 양산하고 있다는 게 공동체주의자들의 주장이다. (311면)
81. 동질화를 비판하고 차이의 소멸을 우려했던 공동체주의자들에게서 일종의 정치적 전제성(political totality)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공동체주의자들은 분명히 부분적이고 지역적인 공동체들을 활성화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그것만이 사회적 응집력을 확보하는 길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차이들은 도덕적으로 놀라운 응집력을 보인다. (313, 314면)
82. 자유주의 동질성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차이들은 그것을 가진 집단에서 의미와 가치를 갖지 못한다. (314면)
83. 오히려 생태학(ecology)은 다양성과 차이야말로 강함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317면)
84. 생태계에서 다양성과 차이를 파괴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죽음이다. (3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