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다 (반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1. 김광일, 이홍록 등 부산에서 활동하던 동료 변호사들이 험한 고초를 겪었다는 소문이 들려도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 운명을 바꾸었던 ‘그 사건’을 만나고 나서야, 나는 판사로 변호사로 사는 동안 애써 억눌러 왔던 내면의 소리를 진지하게 듣게 되었다. 내 삶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자부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당한 삶이라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출세해서 좋은 일 하겠다고 혼자 다짐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삶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사회와 역사에 대해서 좀더 진지하게 공부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갓 세상에 발을 내디딘 청년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나에게 다가온 새로운 삶을 받아들였다. (71면)




2. 멀었던 눈이 한 번 떠지자, 비로소 힘없고 가난한 사람이 당하는 핍박과 설움이 뚜렷이 보였다. 그들의 아픔이 내 가슴에도 전해져 왔다.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겪어야 했던 고통과 그에 대한 울분이 되살아났다. 무엇인가 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80면)




3. ... 그렇지만 사회주의에 끌리지는 않았다. 마음이 좀 가다가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이름으로 일당독재를 합리화하는 문제에 부딪치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주의에 많은 문제가 있지만 사회주의가 대안이 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법률을 먼저 공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헌법에서 일반 법률까지, 내가 공부한 법률 체계는 모두 상대주의 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상대주의 철학은 전체주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나는 이 기초를 버릴 수 없었다. (88, 89면)




4. 3당 합당은 두 가지 충격을 주었다. 첫째, 호남이 정치적으로 고립되었고 영남은 보수 정치세력의 손아귀에 완전히 들어가고 말았다. 이것은 우리 정치사에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지역구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고착화되었다. 둘째, 우리 정치를 통째로 기회주의 문화에 빠뜨렸다. 철새 정치의 수준이 달라진 것이다. 정치적 야심을 가진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려고 당을 옮겨 다니는 일은 그 전에도 있었다. 그렇지만 정권을 놓고 자웅을 겨루던 정치 지도자가 그런 일을 한 적은 없었다. 3당합당으로 인해 한국 정치는 적나라한 기회주의 문화에 휩쓸려 들어갔다. (116면)




5. 부산은 넉넉하고 개방적이어서 젊은이들에게 도전할 기회를 제공하는 도시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부산은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곳이다. (137면)




6. 여당 소속이 되면서 예전에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 재야와 야당 시절 정치는 주로 투쟁이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독재권력과 싸웠다.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을 위해 정부와 싸웠다. 야권통합과 정당 민주화를 위해 분열주의, 기회주의와 투쟁했다. 그런데 여당이 되고 나니 전혀 다른 과제가 주어졌다. 국가와 국민을 위험에서 보호하는 일, 사회적 대립과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일이었다. 특히 법률과 제도가 미비한 상태에서 처음 겪는 갈들이 생겼을 때, 그것을 합리적으로 풀어 나감으로써 새로운 모범을 만드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그런 경험이 축적되어야 합리적 갈등 조정 시스템과 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153, 154면)




7. 나는 바보가 아니다. 내가 바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다만 눈앞의 이익보다는 멀리 볼 때 가치 있는 것을 선택했을 뿐이다. (163면)




8. ... 그러나 당의 이름을 걸고 부산에 출마해 거듭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김대중 대통령은 나를 기특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장관을 시킨 것 아닌가 싶다. (167면)




9. 보수 세력은 조직이 매우 크고 강하다. 이념적으로 튼튼하게 결속되어 있을 뿐 아니라 기득권의 결속력도 매우 강하다. 공동의 이익에 근거를 둔 네트워크를 감성적 네트워크로 재조직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어느 지역 어느 집단에서나 돈 많고 권력 있고 지위 높은 사람은 거의 다 보수의 네트워크에 가입되어 있다. 게다가 보수 세력은 인구가 많은 영남을 장악하고 있다. 큰 신문사, 큰 기업의 소유자, 큰 연구소를 모두 보수가 장악하고 있다. 법원, 검찰, 국정원 등 국가기관은 그 본질적 속성상 보수 쪽으로 편향되어 있다. 라이온스 클럽, 로터리클럽, JC(청년회의소) 등 경제적 여유가 있는 민간 자생 단체와 지역사회의 소위 관변 단체들도 모두 보수가 우세하다. 학술원과 각종 학회, 지식인 사회도 보수가 압도적이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보수의 나라이다. 반면 진보세력은 지역으로 갈라져 있고 이념으로 분화되어 있다. 돈 있는 사람이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단체가 별로 없다. 진보적 시민단체조차도 기업의 지원을 얻지 못하고 언론이 외면하면 힘을 쓰지 못한다. 튼튼한 정책연구소도 거의 없다. 그런데 보수의 나라에서 진보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얕게 뿌리 내린 작은 나무에 너무 많은 과실이 매달린 형국이다. 두 차례의 대선 승리와 10년의 집권도 보수와 진보의 불균형을 크게 바꾸지는 못했다. 보수와 진보의 격차는 ‘조선일보’와 ‘오마이뉴스’의 자산 규모 차이만큼이나 크다. 진보적인 대통령이라도 보수의 네트워크에 포위되어 고립당하면 힘을 쓰기 어렵다. 변명이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나는 그런 조건에서 대통령이 되었고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진보정당의 지지율이 낮은 것도 같은 원인 때문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데는 앞으로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204, 205면)




10. 퇴임한 후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과 토론을 보았다. 그는 사회적 소수파에 속한 시민운동가 출신의 정치인이지만 매우 품격 있는 언어를 구사했다. 나도 그렇게 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234, 235면)




11. 그런데 진보 보수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이 원칙을 아는 정치인인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 여부이다. 일관성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야, 진보든 보수든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92면)




12. 대통령을 하는 동안 국가균형발전을 이루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가는 것이다. (305면)




13.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3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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