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게 여성을 죽이는 법 - 광고는 어떻게 생각과 감정을 조종하는가
진 킬본 지음, 한진영 옮김 / 갈라파고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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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정보는 공기와도 같습니다. 이 공기에는 여성을 대상화하는 콘텐츠들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무나도 쉽게 접근할 수 있기에 아무도 이를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그런 공기를 어떻게 비판했는지 꼭 알고 싶네요. 읽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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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서 숲을 보다 - 리처드 포티의 생태 관찰 기록
리처드 포티 지음, 조은영 옮김 / 소소의책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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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겠다. 리뷰어스 클럽 아니면 내가 이런 책을 볼 기회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책의 리뷰를 하기 전에 리뷰어스 클럽의 장점을 몇가지 언급하고 싶다. 리뷰어스 클럽은 과거에 내가 읽던 신문같다. 나는 지금 뉴스를 주로 페이스북이나 티비를 통해 보고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물론 신문을 봤다. 신문을 볼 때면 언제나 내가 굳이 알고싶지 않았던 정보와도 마주치게 된다. ! 여기에서 알고싶지 않았다는 것이 원하지 않았다는 것과 등치되는 것은 아니다. 뜻밖의 정보와 마주쳤다고 이야기하는게 좋지 않을까 싶다. 리뷰어스 클럽에 올라오는 책들도 이렇다. 나는 보통 사회과학쪽 책이나 과학분야의 책들을 읽는다. 나의 책꽃이에 가보면 대부분 그렇다. 이번에 리뷰어스 컬럽에서 온 책은 <나무에서 숲을보다>라는 책이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과학쪽이겠지만, 나는 전혀 이런 부분의 책을 산적도, 쳐다본적도 없다. 그래도 나에게 이렇게 배달되니 읽게 됐고, 나무를 통한 숲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숲속 12계절의 풍경

 

12계절이라고 하니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12계절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었다. ,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눌 수 없는 각 계월마다 나무가 갖고 있는 독특함을 나는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과거 숲이든 나무든 나는 그냥 좋은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한 종의 나무가 갖고 있는 독창적인 시스템을 몰랐던 것도 있고, 그 나무들이 만드는 숲의 풍경을 몰랐다는 이유도 있다.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인데, 한 그루의 나무가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과거 나무에 대해 추상적으로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과거 나무를 단순히 햇빛과 물 그리고 땅의 양분으로만 사는 존재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나무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고 할까. 보다 숲과 상호작용을 하며 복잡다단하게 사는 생물이었다. 숲속의 생물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그것을 나무 자기가 어떻게 상호작용 하는지, 또 숲의 여러 포식자(?)라 할 수 있는 존재들로부터 자신을 어떻게 지키는지 등. 책을 읽는 내내 나무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숲이라는 것이 단순히 나무들이 밀집되어 있는 땅이 아니라, 어찌나 다양한 생태계의 보고인지 도한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한 나무가 만들어내는 매일매일의 새로운 풍경들. 그것으로 하자면 이 글의 소제목을 365계절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것은 조금 오바인 것 같아서 12계절이라고 적었다. 어쨌든 이 책의 저자인 포티가 1개월 단위로 관찰한 숲의 모습들은, 숲에 대해 무심했고 무지했던 나를 깨워주었다고나 할까.

집 근처에 숲이 있다면 포티처럼 산책을 하며 이런 멋진 글을 적을 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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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는 건 멋진 거야 보고 또 보는 과학 그림책
아나카 해리스 지음, 존 로 그림, 공민희 옮김 / 아름다운사람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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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빛을 본다는 것과 어둠속에서 한줄기의 빛을 본다는 것은 인간에게 각각 다른 의미를 전달한다. 단순히 빛을 쬔다는 것은 빛을 공기처럼 당연한 것 이상으로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반면 어둠속에서 한 줄기의 빛을 본다는 것은 빛의 존재를 어둠속에서 제대로 인식한다는 것을 말한다. 만약, 아인슈타인이 어렸을 적, 이와같은 빛을 인식할 수 있는 빛 한줄기를 보지 못한 채, 단순히 많은 사람들처럼 빛을 받고만 살았다면, 우리는 우주에 관한 상상력을 현재처럼 확장시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과학이라는 것은 우리 주위에 널려 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과학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 뿐이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면서 어떻게 컴퓨터 화면에서 이러한 검은색의 빛들이 나타나는지, 그냥 당연하다 생각하면 이를 알지 못한다. 지금 내가 숨을 쉬며 살아있는 이유를 깊이 생각하지 못하면 이것 또한 과학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이러한 것을 지나치고 살아간다. 이것은 다행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일일수도 있다. 우리가 자연을 탐구한다며 매 순간을 놀라다간, 생각하는 방식은 엄청나게 느리지 않을까 싶다. 아마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일상이라는 것은 만들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안타깝다는 것은, 우리가 주위 사물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원시인(?)의 상태로 계속 머물러 있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멍때리고 삶을 위한 삶을 살고 있을 때, 아인슈타인은 생각한번으로 과학을 위한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면 왜 아인슈타인은 어렸을 적, “빛의 속도로 달리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라는 상상을 했을까? 그것은 내가 아까전에 말했던 아인슈타인이 봤던 한 줄기 빛에 답이 있지 않을까 싶다. 보통의 사람들이 과학이나 자연을 그냥 지나치는 이유는 그것이 흔하기 때문이다. 흔한 어던 것은 사람에게 어떠한 자극도 주지 못한다. 간단히 말하면 아드레날린을 분비시켜 흥분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그냥 빛을 본 것이 아니라, 한줄기 빛을 보았기 때문에 과학에 대해 당시 호기심이 갔던 것이다.

이와 같은 자극들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특히 어린 아이들이게 필요할 것이다. 3살 혹은 4살짜리 아이들에게 있어 세상에는 당연한 것 혹은 흔한 것이 없다. 그들은 엄마나 아빠에게 저건 뭐야라고 물어본다. 보든게 신기하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들은 조금만 더 크면 과거 자신이 저건 머야라고 했던 기럭은 잃어버린 채, 어른들처럼 멍때리는 삶을 단순히 살아갈 것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모른다는건 멋진 거야>가 조금의 자극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아이들에게는 언제나 적정 수준의 자극이 필요하다. 그들이 관심을 갖고 싶어 하는. 그냥 소비가 아니라 자신의 고민을 이어나가게 할 수 있는 추억이 될 만한 자극이 필요하다. 나는 이 책이 제법 훌륭하게 그 일을 수행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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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들 삽질하겠습니다 - 도시 아빠 4명의 고군분투 시골놀이터 제작기
이수진 외 지음 / 그루벌미디어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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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을 보고 싶었다. 말랑말랑한. 손가락으로 누르면 움푹 들어가고, 잡초도 나는 그런 흙이 있는 땅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콩크리트 정글이라는 서울에는 이런 흙도 땅도 없었다. 바닥은 새까만 아스팔트 아니면, 딱딱한 보도 블럭으로 깔린 곳이 대부분이었다. 서울의 번화한 곳은 번화한 곳 나름대로 세련된 블록이 깔렸고, 초라한 곳은 초라한 곳 나름대로 깨지고 더러워진 블록이 깔려 있었다. 선택권은 없었다. 발로 밟으면 푹신푹신한 땅은 서울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었다.

내가 찾는 곳은 잔디가 깔린 곳이 아니었다. 여러 풀벌레들이 서로를 잡아먹으며, 비가 오면 지렁이가 밖으로 나오고, 개구리가 울며, 날씨가 더워지면 다시 푸석푸석해지는 땅. 주어진 상황에 따라 사람의 마음이 나는 변덕스럽 게 변하는 땅을 보고 싶었다. 광화문 광장이나 서울시청 과장처럼 보도블럭과 아스팔트에 갇혀 간신이 그 초록 빛깔을 연명하는 곳이 아니라, 생명이 용광로처럼 꿈틀 거리는 초록이 있는 곳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서울에 올라와 하게 됐다.

나와 같은 생각을 이 책의 저자들도 갖고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시골에 살 때는 몰랐지만, 도시에서 살고 나니 그런 초록의 불편함과 지겨움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과거 내가 익숙했던 환경에 대한 그리움인지 아니면 정말 생명력이 있는 것은 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도시에서 매순간 콩크리트를 보는 것 보다는 나은 어떤 감정을 느끼게 했다. 한 인강 강사가 바닥은 끝이 아니다. 바닥 밑에는 언제나 지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 했는데, 이는 단순히 한 인간의 인생만이 아니라, 한 사람이 사는 환경에도 이러한 것이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나는 초록이 싫었지만, 그 싫은 것보다 내가 더 싫어할만한게 이 도시에는 지천에 널려있다. 콩크리트 정글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이 책의 글쓴이인 아빠들은 대부분 한 명을 제외하고 서울 출신은 없다. 적어도 나와 같이 풀을 그리워하고, 푸른 바다를 그리워하고, 졸졸 흐르는 냇가를 그리워 하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이들은 대도시에서 살아보니, 대도시가 자신들에게 줄 수 무언가를 느끼고 짬을 내어 삽질을 시작한 것이 아닐까 싶다.

솔직히 어린이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 또한, 인간이라면 그리워할 것이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먼 미래에, 마치 수만 키로미터를 비행하는 철새마냥, 자신은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자연을 그리워하며 찾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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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정부에서 감성정부로
박상언 지음 / 이음스토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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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서 세월호 4주기가 다가오고 있다. 300명의 넘는 아이들이 수장되는 동안,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다. 2014년 박근혜 정부는 그랬다. 정부가 조치를 해야 하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박근혜는 잤고, 그의 참모들은 세월호가 가라앉았을 때 즈음, 박근혜에게 보고를 하려고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박근혜는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참모들을 향해 대면보고가 필요하냐?”는 질문을 했다. 박근혜를 악마화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국민을 위해 한 줌의 이성을 갖고 있지 않은 권력욕에 취한 사람이 대통령이 됐을 때 어떠한 사건이 벌어질 수 있는지 박근혜는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런 그에게 세월호 유가족들을 보다듬어 달라는 것을 기대하기란 너무 힘든 것 이었다.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진상조사를 시켜달라는 세월호 가족들을 뒤로하고 박근혜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국회로 들어가는 길을. 세월호 가족들이 박근혜와 이야기 하고 싶어서 외쳤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을 말이다. 이것은 정부가 아니었다. 이성적이지도 않았고 감성적이지도 않았다. 감성의 다른 의미를 통해 박근혜 정부를 해석하면 그것은 탐욕적인 정부 그 이상 표현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이성정부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성정부보다 한단계 더 나아갔다는 감성정부란 무엇인가?

 

Upgrade?

 

감성가 이성을 두루 인지하면서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을 감성적 지성이라고 한다. 국민의 문화적인 삶에 기반을 둔 행복 그리고 이 행복을 꿈꾸는 감성적인 욕구는 지성으로써만 진정으로 다스려진다. 그러므로 관료들은 감성적 지성의 행정을 펼쳐야 하며, 이러한 행정부가 감성정부다.” 저자가 생각하는 감성정부에 대한 정의다.

솔직히 낡았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이런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을 딱히 없다. 하지만 대놓고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어쩌면 잘난척 하는 것일수도 있다. 그래서 저자의 의견에 동의를 하면서도 솔직히... 좀 꼰대가 쓴 느낌이 난다는 생각이 팍팍드는 책이다.

어쨌든. 우리가 정부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하나의 합법적 폭력을 가진 존재가 우리 모두를 보호해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신과 같이 가장 강력한 존재가, 모든 것을 제어할 때 우리 모두는 평등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탄생한 것이 우리의 정부다. 정부 자체는 우리 이성의 산물이다. 그런데 우리의 이성은 한편으로 감성적인 것을 업신 여기는 측면이 있다. 이성과 감성은 분명히 다른 것이지만, 이것에 서로에 대해 배타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느 순간 감성적인 것이 이성적을 더 옳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반대로 오느 순간 이성적인 것이 더 옳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국가는 어쨌든 인간들이 만들오 이끌어 가는 조직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다. 감성 정부를 이야기 하지만, 그것이 곳 이성을 모두 버리고 감성에 호소하라는 것이 아니다. 감성은 이성을 초월한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완벽히 시민들에게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그 겉을 감성으로 덮으라는 것 아닐까.

어쨌든. 감성정부라는 말을 배워서 재미있있었다.

현재 문재인 정부가 감성정부인건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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