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기계보다 특별할까? - 포스트휴먼의 시대, 우리가 생각해야 할 9가지 질문
인문브릿지연구소 지음 / 갈라파고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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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기계.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미래와 관련된 영화를 많이 보긴 했지만, 많은 생각을 해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꼭 이 책으로 한번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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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이 만든 세계사
함규진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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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 벽 그리고 장벽


 집에는 담이 있었다. 서울의 그것과 그렇게 다르진 않다. 까치발을 서면 그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그런 집에 살았다. 하지만 우리 집의 담은 도시 집의 담과는 달랐다. 도시 집의 담이 대개 네모반듯한 벽돌에 시멘트를 발라 만들어 졌다면, 우리집 담의 경우 흙과 울퉁불퉁한 돌들 그리고 그 위에는 자그마한 기와가 씌어져 있는 조선식(?) 담이었다. 어쩌면 싸리나무로 담을 만들었던 조선식보다는 나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집 담은 아름답다. 그리고 내가 살던 시골집을 멋있게 만들어주었다. 여름에는 넝쿨들이 담을 타고 올라와, 담의 흙에 뿌리를 박으며, 담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화려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덩굴이 차가운 바람을 맞아 시들어지는 가을과 겨울의 담은 한 없이 으스스한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담은 단순히 눈요기만은 아니었다. 담은 명확한 우리 집과 그 바깥세상을 분리하는 존재였다. 우리 집에는 특이하게 집 앞에는 담이 있고, 뒤에는 논이 있었는데, 누군가의 침입 혹은 침해와 같은 것은 담이 있는 쪽에서나 가능하고, 담이 없는 뒤쪽에서는 ‘침입’이나 ‘침해’와 같은 배타성이 드러나 보이는 말을 별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 가끔가다 논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급한 볼일을 보러 담이 있는 쪽으로 갑자기 들어오면 집안 사람들은 모두 적대적으로 대했는데, 그 반대쪽으로 들어오면 우리집 사람들이 “무슨 일 때문에 오셨습니까”로 응대했던 것 같다.

 160cm밖에 되지 않았던 작음 담. 그것은 어쩌면 나와 우리집 사람들 그리고 담있는 쪽이 아니라 반대쪽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인식을 지배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담이 우리 7식구의 인식을 지배했듯, 이 책에 나왔던 만리장성에서부터 시작해 DMZ까지의 벽들은 7명이 아닌 한 나라 사람들의 인식을 지배했던 게 아닐까 싶다.


 함규진 작가 그리고 장벽


 이번엔 장벽이다. 함규직 작가의 ‘그것’시리즈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함규진 작가 혹은 교수님은 세계사를 잘 아시는 분 같다. 과거에 나는 그가 쓴 조약을 통해 본 세계사도 읽었고, 개와 늑대의 정치학 또한 읽었다. 현재 21세기가 만들어지기까지 영향을 미친 과거의 조약에 대해서 설명해준 책이 바로 <조약으로 본 세계사>였다. 그리고 과연 선거를 통해 선출된 권력, 저들이 과연 역사 속에서 현재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때는 왜 그들이 나쁜 세력인지 혹은 좋은 세력인지 몰랐을 땅거미같은 시간의 정치적 정동에 대개 이야기 한 책이 개와 늑대의 정치학 이었다.

 함규진 작가는 이와 같은 류. 조약이든 선거든 그리고 이번에는 장벽과 같이 어떤 하나의 키워드를 통해서 세상을 설명하고 정치적 정동에 대한 설명을 잘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번에는 구 주제가 장벽인 듯 싶다.

 어떻게 보면 몇몇 사람들은 함 작가의 이와 같은 글들을 단순히 “Reshuffle”이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좋은 평가를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왜? 어쩌면 인터넷에 있는 내용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넷에 있는 일고나성 없게 혹은 얕게 깔린 정보에 비교해 한규진 작가의 손으로 쓰여진 이 책들은 다소 차이가 있다. 즉, 단순히 하나에 대한 피상적인 소개를 넘어서 우리 인류가 장벽을 왜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나 정동을 만들고 일상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함 작가는 과거에는 조약과 선거를 통해 그리고 이번에는 장벽을 통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야기 한다. 이렇게.


“이 책은 모든 역사를 다루지는 않는다. 그러나 반복되어 온 역사를 다룬다. 모든 장벽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억할 가치가 있는 장벽들을 이야기한다. 이 내용에서 무엇을 인식하고, 아마도 자신의 눈앞이나 손 끝에, 또는 마음속에서 자리 잡고 있는 장벽에 대해 어떻게 바라볼지는 독자의 몫이다. 장벽을 새롭게 세울 것인가, 아니면 장벽을 무너뜨릴 것인가? 장벽 ‘이편’과 ‘저편’ 중 무엇을 선택 할 것인가” - 007pp


 어쩌면 이 부분은 저자의 실수가 아닌지 싶기도 한 부분이다. 어쩌면 프롤로그이니 당연할 수도 있긴 한데,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이야기 하고 싶은 내용은 이 책에 압축적으로 들어있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이 문장은 내가 앞에서도 이야기 했던. 이 책을 단순히 여러 벽들에 대해서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는 부분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저자의 이야기처럼 모든 장벽에 대해서 다루지 않는다. 저자가 이 벽을 통해서 이야기 하려는 것은 분리다. 그리고 그 벽에 의해서 어떻게 단순히 물리적 분리를 넘어 정치적 분리가 만들어지는지 이야기 한다. 물리적 분리는 사람들을 자극해 정치적 분리를 자극하고 또 정치적 분리는 물리적 분리를 강화시키는 것들을 자극한다. 그렇게 이들은 상호작용 하면서 점점 그 괴리를 혹은 각열을 넚혀 나간다.

 이 책의 여러 챕터 중에 저자가 이야기하는 분리가 가장 잘 쓰여진 부분은 바로 dmz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욱 나에게 와 닿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한동안 웃지 못할 ‘자존심 전쟁’이 휴전선의 작은 마을에서 펼쳐진 것이다. 물론 마을 주민들의 손으로 펼쳐진 일은 아니었고, 그들의 의사도 아랑곳없었다.

 …

 이 땅에 언제까지 이런 희비극이 되풀이되어야 할까?” - 225pp


 DMZ그리고 그 주변에서 벌어진 정동을 쓴 한 부분이다. 과거 내가 봤던 또 다른 텍스트들과 결합하여 저자의 한반도 장벽에 대한 생각을 덧붙일 때, 나느 이런 생각을 할 수박에 없다. 철책이 없던 시절 국군 아저씨들은 북한군과 담배도 바꿔 피고, 술도 마시고 했다고 한다. 뿐만인가. 도끼만행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북한군과 JSA에서 사진을 찍었다는 사람들 또한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장벽이 만들어 진 것에서 심리적 거리는 생겼고, 그것이 만들어진 상황에서 지속된 정동의 발현은 서로에 대한 불신과 거리를 키울 뿐이다. 나는 이 책에 나온 다른 장벽들 또한 이와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이 책은 내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풍부한 텍스트들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장벽의 세계사


 얇은 책이다. 그리고 쉽게 읽힌다. 하지만 가벼운 텍스트는 아니다. 적어도 이 책의 앞부분은 가볍게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와 다른 시간대의 이야기이고 다른 세상의 이야기 였으니 말이다. 단순히 그 장벽들이 그 사람들에게 가졌던 정동을 우리는 재미있게 읽으면 될 일이다. 하지만 과거의 장벽의 정동은 오늘날에게 그 쓰임새를 인정받고 이어지고 있다. 민주주의의 효시인 국가에서는 멕시코와의 분리 장벽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쓰임새는 분명히 작동하고 있다. 미국 내에서 말이다. 그리고 우리의 분단 상황 또한 마찬가지다. 한 정치 평론가의 이야기처럼 단순히 낭만론적 민족주의만으로는 우리의 분단 현실을 해소할 길이 없어 보인다. 장벽이 트리거가 돼, 생긴 심리적 거리감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고 정치적으로 계속해서 이용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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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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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미래가 디스토피아일까? 아니면 유토피아일까?” 미래를 상상하는 이들이 매번 마주하는 질문이지 않을까.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언제나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 우리가 사는 현재는 과거의 미래다. 시계 바늘을 뒤로 돌리면 돌릴수록, 우리는 과거 사람들의 상상할 수 없는 미래에 살고 있는 미래인이 된다. 앞에서 한 질문에 대한 답은 약간의 사고실험만 하면 간단하게 답을 얻을 수 있다. 굳이 힘들게 논문을 찾을 필요도 없다. 당신이 과거에 비해 상당부분 기술이 발달한 현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바라보는지에 따라 디스토피아에 가까운지 유토피아에 가까운지 판단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혹시나 해서 이야기 하는데, 한 인간이 처한 환경이나 받아들이는 지식은 언제나 유한하기 때문에 모두가 디스토피아라 불리는 곳에 살면서도 섬처럼 유토피아에 살 수도 있고, 그 역 또한 성립할 수 있다. 어쨌든 디스토피아냐 유토피아냐의 기준을 자신에게 맞추면 된다는 소리다. 사회 전체의 부가 증가하든 아니면 기술이 발달하든 말이다.

 그렇다면 미래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는 우리는 굳이 SF소설을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일까?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기 전에 나라면 이런 질문에 대해 간단하게 “% %”이란 답을 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돌이켜 보면 내 대답은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또 180도 방향 전환을 하게 됐다.



 김초엽의 SF를 통해 보여준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


 김초엽 작가가 이 책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미래에도 변하지 않는 여성문제? 정상성의 문제? 변하지 않은 경제적 효율성의 문제? 나는 이것 모두 맞다고 생각하고, 무엇보다 나는 인아영 평론가가 해설에 써놓은 의견에 공감한다.


 “김초엽이 그려내는 소설 세계는 지금 여기의 사회 문제들을 예리하게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여성, 장애인, 이주민, 비혼모를 비롯해 약자와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은 선명하고, 성과 위주의 시스템 속에서 비경제적인 가치는 배제되며, 정상성이라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은 존재들은 역사의 기록에서 배제된다. 첨단 과학기술로 인류가 도달한 세계는 정말로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을까?” 322pp


 모두 맞지만 내가 이 책에서 마주한 것은 미래에도 여전히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들이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 나온 데이지와 릴리 그리고 올리브는 그들이 상처 받을 고향별 지구로 향한다. ‘스펙트럼’에서 희진은 지구로 돌아와 어떤 사람도 인정하거나 공감해 주지 않을 루이의 그림을 분석하고,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안나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자살의 길을 선택하고, ‘관내분실’에선 가슴이 아플 수밖에 없는 엄마를 다시 만나는 선택을 그리고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서 가윤은 자유를 찾아 바다로 향한 재경과는 다른 선택을 하는 등.

 김초엽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숱하게 경험하고 또 실행하는 합리적 선택을 모두 전복시키는 결정을 마지막 순간에 혹은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내린다. 기술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의해 끝도 없이 진화하는데, 기술을 지배하고 이용하는 인간들은 이와는 반대되는 답을 내놓는 선택을 어김없이 한다. 우리가 기술에 의존하고 또 기술의 발전을 무한히 긍정하는 이유는 우리가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더 많은 정보에 우리의 접근도가 높아졌을 때 우리는 더욱 현명해 질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그렇다면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현명한 선택을 포기한 것으로 봐도 좋은가? 그리고 나와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소설속의 주인공이 바보같아지고 미운가? 부정하는가? 그 반대다! 기술에 의해 인간 개개인 삶에서의 문제가 해결되고, 인간 사회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것과 같은 기술결정론에 입각한 사람들의 기대는 이 소설 속 주인공들에 의해 보기 좋게 무너진다. 그리고 우린 책 속에서 기술결정론에 입각한 사고들이 무너지고, 무시될 때마다 주인공들을 걱정하면서도, 응원한다.

 그러면 소설 속 주인공들의 선택에 나는 왜 이해가 가고 또 공감하는가. 그리고 이를 넘어 응원하는 단계까지 가는 것일까. 물론 김초엽 작가가 SF라는 과학 영역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상황들을 세련되게 잘 이용했다는 점 또한 있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이 소설 속 주인공들이 여전히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불완전성에 답이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호메로스와 같은 대서사에서 오디세우스와 그 주변 인물들이 한 잘못 또한 바보같은 결정에 대해 “당할 짓을 했다”, “저래도 싸다”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결국에는 “오디세우스가 제발 고향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공감하는 것에 답이 있지 않을까. 주인공들은 불완전하고, 잘못된 선택을 계속해서 할 수 있다. 그런 가여움 때문에 내가 수많은 소설책을 읽으며 바보 같은 주인공들을 혹은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선택을 했던 인물들을 응원했던 게 아닌지 싶다. 인간이 신의 존재에 의해 영향을 받는 서사든, 인간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지라 생각했던 기술의 발전에 의한 것이든. 불완전한 인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은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아닌가 싶다.

 특히, ‘관내분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엄마를 만나려는 지민의 선택 하나하나에서 나는 무거움을 느꼈다. 엄마를 찾는다는 것은 그 동안 엄마의 무관심했던 자신에 대한 성찰을 하는 의식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는 엄마의 유품을 찾을 때마다, 우리가 그동안 잊고 살았던 존재들에 대해서 스스로 고통에 쳐하게 만들어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의식처럼, 나는 지민이 엄마의 유품 하나하나를 찾았을 때마다 각기 다른 모양의 비수가 자신의 가슴에 꽂히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나 또한 그 고통에 공감하면서도 지민을 응원했던 것은 그녀가 인간으로서 좋은 선택을 했기 때문이란 확인 때문이다(물론, 여기서 인간으로서 옳은 선택은 용기있게 사람과의 관계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비단, 나의 경험만이 아니라, 한 사람에 대한 입체적 이해와 공감을 하지 못하고, 그 혹은 그녀의 고통을 나누는데 있어 회피하려 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보고 있기 때문이다(아마, 최근에 이모의 말을 안 듣는 사촌 때문에 더 그런 것이 아닌지 싶다. 이모의 아들인 이 녀석은 만약 ‘관내분실’과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과연 이모를 다시 만나러 갈까? 그 녀석은 자신의 초라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도망치지 않을까 싶다). 김초엽 작가는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그리고 갈등을 겪는 정치적인 문제들을 SF라는 세련된 틀에 잘 담아 이야기 해 주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책 바깥에서 본 책의 이야기


 돌이켜 보면, 인간이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존재가 되려 할 때. 혹은 불완전한 특정한 상황을 피하려 할 때 어떤 상황이 발생하는지 SF를 통해 본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과장된 점 또한 적지 않았지만 크리스찬 베일 주연의 <이퀄리브리엄>이 그랬던 것 같다. 불완전하지 않는 인간들이 모인 세계가 얼마나 삭막한지 2시간 내내 느꼈던 것 같다. 뿐만인가.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는 기술에 의해 범죄를 단죄하는 세상이 됐을 때, 얼마나 경찰국가가 등장해 시민들의 기본권을 어찌나 가벼이 여기는지 잘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는 모두 기술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 인간 또한 더 나아지리라는 전제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들 아니었던가. 모두 인간의 불완전성이 거세된 세계에서 나타났던 디스토피아였다.

 그래서 한번 생각해 봤다. 만약 이 책의 주인공들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읽었을지 말이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 데이지가 지구로 향하지 않고 그 자신의 별에 남아 순례 또한 금지해야 한다고 했으면 나는 과연 공감할 수 있었을까? 현재 우리는 지구에 가면 더 큰 차별을 받고 상처 입을 수밖에 없다고 외치며, 아이에 유토피아 같은 행성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면? ‘공생가설’에서 수빈과 한나가 돈도 안 될 것이며 학계에서 자신들이 영원히 묻힐 수도 있는 류드밀라와의 공생가설을 그냥 장난삼아 이야기하다가 바로 파기했다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안나가 순순히 기업에서 나온 남자의 말을 듣거나 아니면 가족을 아이에 잊고 지구에서 번 돈으로 편안한 노후를 보냈다면? ‘관내분실’에서 지민이 마지막 순간에 엄마를 만나지 않을 선택을 하거나 마지막 순간에 회피하는 태도를 취했다면?

 흔들리는 모습. 무모한 모습. 정상적이지 않은 모습. 불완전한 모습과 선택. 등등등. 소설 속에서 언제나 내가 그들에게서 공감했던 부분들은 내가 일상에서 그리고 하고 싶었던 주인공들의 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들이 등장했을 때 나는 소설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또한 그들을 응원했다.

 어찌 보면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클리셰  투성이다. 저자는 “기술이 인간의 선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는 명제를 기분 좋게 비틀어서 “우린 인간이기에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작가가 보여주는 인간의 한계 그리고 불완전한 주인공들의 모습은 모두 나에게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작가가 사용한 클리셰들이 밉지 않았다. 한계가 있기에 연민의 대상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김초엽 작가가 사용한 클리셰는 우리가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과 함께 공감하게 만듬으로서 우리가 인간임을 일상에서 느끼게 해준다. 먼 미래에도 인간이기 위해서 그리고 인간답기 위해서 말이다. 마치 유빌 히라리의 <호모 데우스>가 그린 미래를 대해서 여러 편의 소설을 통해서 다시 인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히라리도 기술이 아무리 발달하도 인간은 인간의 한계를 갖기 위한 선택을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인간임을 끊임없이 잊게 하는 만드는 세상에서, 그리고 더 망각하게 만들지 모를 미래가 와도 나는 인간이 되고 싶다. 



 디스토피아 or 유토피아? 답은 소설 속에


 답이란 것은 흔히 우리가 보편적으로 느끼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모두가 똑같은 답에 도달했을 때 논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기술이 발달한 미래에 주인공들이 겪었을 상황에 공감하고 그 선택을 존중한다(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러면 그 선택 또한 한 개인이 만드는 것 아니겠나. 난 데이지의 용기 있는 선택을 응원하고 싶다. 미래에 이 책에서와 같은 상황이 누가 있든 말이다. 뿐만인가. 소설 속 다른 주인공들의 작지만 찬란했던 선택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은 유토피아에 만족하지 않고, 디스토피아의 걱정에 굴복하지 않았던 그들의 인생에서의 선택들 말이다. 우리에겐 매 선택의 순간에 중요한 것은 상황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겠는가. 데이지가 했던 말로 마무리를 초엽님의 소설에 대한 마무리를 하고 싶다.


 “나는 알았어.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소피, 이제 내가 먼저 떠나는 이유를 이해해줄 거라고 믿어. 그럼 언젠가 지구에서 만나자. 그날을 고대하며, 데이지가” 54pp



작가에게 하는 투정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할 것 같다. 물론 인아영 평론가 또한 마찬가지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모두 여자다. 그리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대상들은 대개 소수자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서는 특이한 가족이 나오고, ‘관내 분실’에서는 한부모 가정(?)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이,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는 지구에서는 차별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존재가 나오고, ‘스펙트럼’에서는 루이와 그 친구들을 통해서 타자와의 공존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어쩌면 이 책은 요즘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PC를 문학적으로 잘 풀어낸 것 같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초엽님이 타자를 바라보는 그리고 우리 사회의 소수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다는 것을 이 책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쩌면 그 따뜻한 시선의 한계 또한 이 책에 들어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해봤다. 이 책은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만 계급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못한다. 계급이 중심이 된 SF서사는 적지 않았다. <알리타> 또한 계급문제를 다루고 있었고, <엘리시움>과 같은 영화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다루었다. 하지만 이 책의 8편의 단편 중에서는 계급이란 화두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 책의 주인공들은 계급적으로 봤을 때 상당히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우주여행을 할 수 있고, 실험실의 연구자로 지내며, 기자 등. 이 책의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기술이 주는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이지, 기술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감히 발칙한 상상을 하나 해봤다. 사회에 대한 저자의 시선이 여기에서 멈춘게 아닐까 하고. 페미니즘 또한 계급문제로 들어가면 불편해 하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 딱 자신에게 유리한 정도의 페미니즘을 이야기 할 뿐이다. 다른 소수자 문제들 또한 계급론의 문제로 들어갔을 때에 그렇게 다르지 않다. 나는 절대로 저자가 계급론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실력이 없어서 이 문제를 다루지 못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저자 또한 계급적으로 다른 계급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기에, 상상력이 미치지 못한 게 아닐까 한다. 다음에는 저자의 우리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계급의 단계로까지 성장한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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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생각한다
존 코널 지음, 노승영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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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생각하며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어쩌면 현대 사람들에게 특히 서울과 같이 도시에 있는 사람들에겐 먼 이야기가 아닐지 모르겠다. 왜 소인가? 또 우리에게 소는 무엇인가?


 보통 TV에서 소에 관해서 나올 때를 보면 “스테이크” 혹은 “한우”와 같이 소와 관련된 것들은 먹는 것과 연결된다. 맞다. 소는 최종적으로 우리의 입속으로 간다. 스테이크 그리고 한우 구이만이 아니라 소의 머리는 소머리국밥으로 꼬리는 꼬리곰탕으로 소의 족은 우족탕으로 등등등. 소는 우리에게 정말 아낌없이 주는 짐승이다.


 하지만 소는 우리에게 있어서 먹는 존재이기만 한 것인가. 이제는 농업인들을 스스로 농민이라고 부르기보다 농업경영자라고 부르는 시대다. 신 자유주의가 이제는 첨단 금융의 분야만이 아니라 시골에 있는 농민들에게까지 번지며 그들에게 스스로 신자유주의의 원리가 체화돼도록 하고 있다. 솔직히 이제는 농민들조차 소를 하나의 동만자나 가축으로 호명하기보다는 짐승으로 그리고 출하해야 하는 아직 살아있는 식품으로 보기 일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지난날 집에 있던 소를 그리고 지금도 축사에서 기르고 있는 소에 대한 추억과 기억을 소환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소를 다시 가축으로 혹은 삶의 하나의 동반자로 생각했던 지난날을 생각게 했다. 아버지는 비록 송아지의 출산 순간에 송아지가 너무 커서 송아지와 그리고 암소 모두 죽자, 좋은 상품이 죽었다고 슬퍼하셨지만, 나와 엄마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새 생명이 죽어서 슬펐고, 엄마는 왠지 자신과는 다른 존재이긴 하지만 출산의 아픔을 해소하지 못하고 그 상태에서 죽은 암소를 보며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아빠 옆에서 소의 출산을 돕던 무능한 수의사에게 욕 한 바가지를 조용히 내 귓속에 내뱉었다.


 <소를 생각한다>는 우리의 소만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의 가치라고 했던 지난날의 여러 가치들 또한 소환한다. 저자 존 코널은 소를 중심으로 사유와 성찰을 보이지만, 그 성찰이 비록 자신이 키우는 축사와 소에서만 멈추지 않는다. 소를 중심으로 그리고 소와 함께하는 삶을 통해 우리가 잊었던 인간적 가치들을 다시 회상케 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서울에 있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자그마한 목장이 하나 생기고, 그 안에서 소를 키우며 시골에 있는 듯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 나쁘지 않은 책이다. 도시의 콩크리트와 우리가 너무 가까이있고 만만한 동물인 고양이와 개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소‘간지(느낌)’를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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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 시간 - 스탠딩에그 커피에세이
에그 2호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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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커피인가? 이 세상에는 적지 않은 차들이 있다. 하지만 커피만큼 많이 소비되고 대중적인 음료는 또 없을 것이다. 딱히 커피의 빛깔이 좋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왜 사람들은 커피인가? 그리고 이 책 <서로 섞이고 완벽히 녹아든 시간>은 감각적으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


 이 책은 어떻게 이야기 해야 할까. 한 편으로 여행 에시이이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커피 에세이이기도 하다. 그래서 재미있다. 커피라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마신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음료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딸려온 작가가 찍은 사진 그리고 감미로운 글들은 어쩌면 커피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저자의 통찰을 보여주기도 한다. 단순히 커피를 설명하기 위한 소몰리에들의 잡스럽고 휘양찬란한 것이 아닌, 일상적이면서도 친근한 언어들을 사용해서 저자는 자신이 커피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들을 차례차례 전달한다.


 이 책 전에 커피와 관련된 책들을 몇 권 읽은 적이 있다. 물론 요즘 20대들 말대로 케바케라 할 수 있겠으나, 대개 커피와 관련된 책들은 상당히 기계적이고 기능적인 면들이 있다. 커피가 어떻게 전 세계로 퍼졌는지에 대하여 지식을 전달할 수단 혹은 어떻게 하면 커피를 맛있게 먹을 수 있는지 알려주는 책 혹은 커피와 관련하요 넓으면서도 얕은 지식을 전달해주는 책. 하지만 커피를 이해한 사람이 이와 같은 감각적인 글을 쓴 것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한 에세이도 아니고, 단순히 커피에 대해 다룬것도 아닌, 실력있는 글쟁이가 커피라는 오늘날의 독특한 음료에 대해서 가벼우면서도 싱그럽게 썼기 때문에 좋은 게 아닐까 싶다.


 고맙다. 흐름출판. 오늘도 좋은 저자를 발굴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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