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아시아 제47호 2017.겨울 - 이 사람 An Asian Profile : 한국 근대 최초의 여성 소설가 - 나쁜 피
아시아 편집부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7년 11월
평점 :
품절


유럽이나 북아메리카 그리고 넓게 봐서 오세아니아를 제외한 대륙들은 나름 아픔을 갖고 있다모드 유럽에 있는 국가들에게 착취를 당한 경험이다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의 기술력에 뒤쳐져 유럽인들의 노예농장시장공장 등으로 됐다어떠한 면에서 식민지가 사라진 오늘날에도 딱히 변한 것은 없는 것 같기도 하다국가가 대대적으로 한 나라를 자신의 권력아래에 두진 않지만다국적 기업이라는 존재는 여전히 대놓고 식민지였던 나라들의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기 때문이다어떤 나라에서는 반도체 공정을 하다가 푹푹 쓰러지고어떤 나라에서는 아이들의 노동력이 착취되며어떤 나라에서는 아직도 주민들과의 상의도 없이 숲이 베어진다유럽 혹은 북아메리카와 대륙의 다국적회사들에게 착취를 당하는 것은 아프라카아시아 그리고 남아메리카가 모두 같은 상황인 것 같지만잘 들여다보면 미세한 차이점 하나 정도는 있다.


아시아는 옛날부터 많은 국가들이 계속 세워지고 무너지길 반복했고한 때는 가장 문명이 발달하기도 했다아프라카나 남아메리카와 다르게 나름의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고그것이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갖고 있었던 땅이었다그리고 이러한 문명들은 어느 순간 교류가 끊기고중앙에 의해 통제되면서 그 성장을 멈췄다오직 모든 것을 받아들인 일본만이 현재의 패권국가가 됐다.


아마 아시아가 폐쇄적인 대륙이 된 이유에는 단순히 다른 지역의 기술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 만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특정 나라의 노래특정 나라의 시특정 나라의 소설특정 나라의 사상 등사람들의 감성을 미묘하게 건드릴 수 있는 것부터 막고그러한 이를 토대로 다른 나라들의 기술과 물질들을 모두 배척해야 한다는 전략을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이것은 오래된 전략이기도 하고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재등장하는 전략이기도 하다아시아 전체를 망하게 만들었던 이러한 생각은 그로부터 수 백 년이 흐른 후우리나라에서 문화계 예술인 블랙리스트로 부활 아닌 부활을 맞기도 했으니까 말이다물론대상은 서양인이 아닌 국내 좌파단체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문학 작품이 퍼져 나간다는 것을 막는다는 것은 매우 후천적이고 인류 문명의 진보를 막는 행위이다그리고 반대로 문학 작품이 퍼져나가게 만드는 것은 매우 진보적인 행위이고인류 문명을 발전시키는 행위다.


나는 계간 아시아를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멀리 떨어져 있는그리고 알지도 못하는 언어로 소통하는 사람들과이러한 잡지 한 권을 통해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 나라에서 펼쳐지고 있는 사건을 피상적인 뉴스로만 읽는 게 아니라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라고그래서 너무나 좋았다거대의 진솔한 스토리가이 책 한권을 통해 이어진다는 게 말이다. 인류의 진보를 느슨하게 그리고 미묘하게 경험한다는 생각이 드는 책인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을 바꾸는 언어 - 민주주의로 가는 말과 글의 힘
양정철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1월
평점 :
품절




 장면 하나. 이낙연 총리가 대정부질문에서 자유한국당 의원들을 대하던 태도가 뉴스가 된 적이 있었다. 이낙연 총리는 품격으로 어떻게 사람을 압도하고 압살할 수 있는지를 당시에 잘 보여주었다.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대답을 하면서도,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어떤 꼬투리를 잡을만한 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낙연 총리의 말에 꼬투리를 잡거나, 동문서답을 했던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대중들의 눈에 비상식적이고 신사 같지도 않은 사람들로 비쳐졌다.

 장면 둘. 똑같은 대정부질문 현장이다. 당시 야당의 이재정 의원은 황교안 총리에게 국정논당 사태와 관련된 질의를 받는다. 둘의 목소리는 계속 커지기만 했고, 이재정 의원은 이상한 목걸이와 증거 자료를 황교안 총리에게 던지듯 가져다주었고, 둘 간의 신경전은 계속됐다. 품격 없는 대정부질문의 끝판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당시에 나는 받았다.

 나는 솔직히 황교안 총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황교안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여우같은 인간이며 국정농단 사건 당시 박근혜 정권을 지키기 위해 열을 보였는지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재정 의원의 행동과 말이 정당하고 옳았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일반화해서 말하긴 어렵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가장 생산성도 없고, 가장 추악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비추어진다. 정치인들은 말과 글로 싸움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는 어떠한 품격을 찾아볼 수 없다. 지지층결집? 상대방에게 창피? 자신이 우월하다는 욕구? 그 어떤 것도 상관없다. 이 모든 것들이 수렴하는 곳은 같으니까 밀이다. 그러한 점에서 국정농단 사태당시 분노했던 이재정 의원이나, 현 정부를 어떻게 해서든 괴롭히려는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대동소이하다.

 양정철씨가 쓴 <세상을 바꾸는 언어: 민주주의로 가는 말과 글의 힘>을 읽으며 우리나라 정치에 문제가 됐던 이런 장면들이 떠올랐다. 한순간의 불을 지르기 위해 정치인들은 과감해 보이는 듯 한 말과 글을 사용했고, 그 불은 상대당이 아닌 정치에 대한 혐오의 불씨가 됐다. 어쩌면 정치가 발전하지 않는 것도, 국회에서 제대로 된 숙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이러한 이유가 아닐까.


 민주주의의 말과 글


 책을 읽으며 가장 공감했던 부분을 꼽으라하면 나는 당연히 외국 정치인들이 하는 위트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솔직히 나는 현재 한국의 정치인들로부터 이런 위트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정치인들이 하는 막말이 영상으로 편집되어 인터넷을 돌아다니는 모습은 많이 봤지만, 여유롭게 위트나 유머를 통해 상대 당을 공격하는 정치인의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비유법을 혹은 반어법을 통해 반대세력을 공격하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그저 쓴웃음만 짓게 만드는 아무런 재미없는 무미건조한 공세에 불과했다. 상대방이 깨닫기보다, 더욱 강한 강도로 반대세력에 대해 비판할뿐이다. 정치인들이 하는 말들을 볼 때면 우리말이 저렇게 재미없었나, 우리말이 저렇게 험악했나와 같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아무리 국가의 갈등이 모두 모여지는 공간이라고는 하지만, 그곳에서의 말들은 언제나 눈살을 찌푸리고 채널을 돌리게 만들었다.

 이런 위트를 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상대방을 더욱 철저하게 헐뜯는 말과 글로 위협적하는 것이다. 정치적 반대세력에게 얼마나 폭언과 욕설 그리고 모욕을 할 수 있는지를 계산적으로 사용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말이 사용 될 때마다 앞에서 말했던 불필요한 논쟁들은 계속해서 생산된다. 재미없는 말과 글이 국회에서 이렇게 엄중하게 포장하는 모습을 볼 때면 우리나라의 정치와 정치인들 얼마나 세련되지 못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언어가 만드는 제한과 분열


 말과 글은 사람들의 생각을 담는다고 한다. “담는다”는 말을 “통제된다”라고 바꾸면 우리의 말과 글은 앞 문단에서 이야기한 것에 덧붙여 “혐오나 차별을 일으키는 말에 통제를 받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에 대한, 학력에 대한, 정치에 대한, 권력자에 대한, 지방에 대한. 결국 이러한 말들이 계속해서 재생산되면서 확산된다는 것은 우리 공동체를 어떠한 근거나 이유없이 분열로 이끌 수 있는 요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말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누군가의 생각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그 말을 비판할 혹은 의심할 능력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 말에 지배를 받게 된다. 그래서일까. 저자 양정철은 책에서 기자들이 사용하는 말과 글을 많이 탓했다.

 맞는 말이다. 현대인들에게 정보를 담고 있는 말과 글은 공기와도 같다. 사람들은 그것을 습관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흡입한다. 자신에게 익숙한 정보를 통해 세상을 보는 관점을 갖고, 그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분열하는 언어만을 사용하게 되면, 우리 사회는 과연 유지될 수 있을까? 넓게 봐서 민주주의라는 것은 유지될 수 있을까? 톡 까놓고 이야기해서 정치인들이 가장 분열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사용하던 노무현 정부 때, 우리는 가장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자를 대통령으로 뽑은 기억이 있다. 그리고 가장 통합적인 말들이 사용되고, 사람들의 공감이 한군데로 모아졌을 때 우리는 민주 정부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보수 세력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이런 분열의 언어를 계속해서 재생산하는지도 모르겠다. 자신들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말이다. 혼란스러워야, 분열돼야 자신들이 살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양정철씨가 책에서 이야기했듯 공감의 언어를 사용할수록 그리고 소통의 언어를 사용할수록 민주사회는 튼튼해지고 공동체 분열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간에 소통을 늘리는 시간, 서로간에 공감을 할 수 있을만한 시간이 나오기 위해서는 쌍방이 그런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그 언어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민주적 체력과 인내심도 뒷받침 돼야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가 민주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1-22 0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안녕, 내 뻐끔거리는 단어들 VivaVivo (비바비보) 36
샤론 M. 드레이퍼 지음, 최제니 옮김 / 뜨인돌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술에 취한 것. 장애인들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저 사람들은 술에 취한 일반인일 뿐이다라고.

보통 술에 취한 사람들은 자신이 취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말은 맞을 것이다. 생각하는데 있어 어떠한 장애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말을 제대로 못하고, 자신이 짚고 싶은 것이 있는데 제대로 짚어지지 않는다. 술에 완전히 취해 넉다운 된 사람의 경우를 보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 사람들을 대게 보면 침을 흘리거나 완전히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그들의 어떠한 움직임도 그를 도우려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방해하고 행패를 부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장애인들은 술애 취해 있는 사람일 뿐이다. 다만, 이들은 자발적으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똑같은 사람일뿐인데 어떠한 이유 때문에 어떤 부분의 발달이 가로막혀 있을 뿐이다.

멜로디는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말도 제대로 할 수 없고,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다. 하지만 멜로디에게는 한 가지 재능이 있다. 수백만 개의 단어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멜로디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뇌성마비라는 벽에 가로막혀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책에서는 뇌성마비 장애인인 멜로디가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1인칭 시점으로 자신들이 겪는 일상을 말해주고 있다. 자신의 신체적 한계에 갇힌 멜로디를 볼 때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운전자가 생각이 났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이해하고, 무엇이 문제인지도 충분히 아는 대도 불구하고 하드웨어인 자신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멜로디의 심정이 글에서는 절절히 배어있다. 우리가 누군가의 몸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될 수는 없지만, 멜로디의 이야기를 통해 뇌성마비 장애인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불편함에 대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다.

이 책은 해피엔딩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베드엔딩이라고 할 것도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장애아동을 키우는 사람들이면 모두다 공감할만한 그런 엔딩이라고 해야 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명은 부산물이다 - 문명의 시원을 둘러싼 해묵은 관점을 변화시킬 경이로운 발상
정예푸 지음, 오한나 옮김 / 378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것이 의도적인 산물이냐 아니면 부산물이냐어쩌면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권력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만 중요할 뿐그것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진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닌지는 부차적인 문제가 될 가능성이 언제나 농후하다권력을 가진 무언가라면 그것은 아무리 의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도의도적인 산물처럼 둔갑이 될 수 있다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었다고 사람들에게 강요하고그것에 대한 합리성을 부여하면 그것은 합리적은 통로를 통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이러한 일들은 우주선 개발과 같은 것들을 보면 오늘날에도 이런 비의도적인 산물들이 의도적인 것으로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신분제도가 고착화된 과거라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저자 정예푸는 혼인농업문자종이조판인쇄와 활자인쇄라는 여섯 가지 카테고리를 통해 오늘날 인류 문명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이들에 대한 것들의 탄생을 조명했다우리는 흔히 족이혼인의 경우 신체적으로 열등한 사람이 탄생할 확률을 낮추게 하기 위해농업의 경우 정착을 통해 안정된 공동체 형성을 위해문자의 경우 지식의 전달과 축적을 위해종이의 경우 이런 지식의 이동과 전파를 위해인쇄 또한 보다 빠른 정보의 전파를 위해 의도적으로 사람들에 의해 기획된 것이라고 알려졌다사실 이것들이 모두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는 비판적으로 봤을 때 우리 인류가 다른 생물들과 다르게 매우 차별화된 존재였다.”라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이런 결과론적인 해석은 우리의 잠정적인 발전의도적으로 무언가를 더 만들겠다의 의욕을 저하시키고현재 그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온 것들에 대해 만족함만을 키울 수 있다물론 현실에서는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말이다.

다른 이야기를 조금만 하면 이는 주로 미래를 설계하는 데 있어 미래에 대한 대안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아닌과거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영광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힘을 키우려는 사람들일 것이다대표적인 사람이 박근혜나 이명박과 같은 사람이었고국가적으로 보면 중국이 대표적일 것이다이들에게 미래를 설계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처럼 과거의 영광을 갖고 현실 정치에 이용하려는 욕구는 상당할 것이다그리고 책을 읽어보면 이러한 어리석은 자들의 행태는 이 책에 나오는 어리석은 자들과도 비슷한 행태를 보인다자신들이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그것을 의도적으로 만들었다 이야기하고거기게 권력을 부여하는 사람들 말이다.

<문영은 부산물이다>라는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이 책의 맨 처음 부분을 나는 잊을 수 없었다그 부분은 과거 이명박을 지지하고 박근혜에 투표했던 나와 같은 사람이 세겨 들어야 할 말이기 때문이다정예푸는 책에서 선조의 위대함은 후대의 위대함을 조금도 증명해줄 수 없으니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신화와 선조를 끌어들이는 수작은 그만뒀으면 싶었습니다.” 나는 이런 말을 중국인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놀랍고역시 천박한 지식인이 아니라 진정한 지식인에게는 그 어떠한 구속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을 만드는 사람
마윤제 지음 / 특별한서재 / 201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바람을 만드는 사람

 

우리 모두에게 웨나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 정확히 언제 존재하고, 어디에 존재하며,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르는 웨나이지만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고있는 웨나같은 존재들은 하나씩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것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지 않을까 싶다. 웨나를 갖고 있으면서도 찾지 않는 것은, 자신의 웨날를 잊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요, 이러한 의지는 자기 안에 존재하는 웨나에 대한 부정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웨나를 찾겠다는 의지는 한 사람에게 상당한 것들을 요구한다. 웨나가 언제, 어디에,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알 수 없듯, 모든 사람들의 웨나 또한 언제 어디에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지 모른다. 여기에서 오는 불안감은 언제 어디에서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을 웨나를 찾기 위해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전부를 쏟아 부어야 한다는 것이다. 네레오가 웨나를 찾기 위해 쏟아 부었던 시간은 30세 전후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네레오는 어쩌면 자신의 평생을 가도 찾지 못하는 것을 찾을 각오를 하고, 끊임없이 떠돌아다녀야만 했을 수도 있다. 자신의 웨나를 찾겠다고 생각하는 것, 웨나가 있겠다고 믿기만 하는 것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지 정도의 작은 차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어쩌면 운 좋게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었던 한 생명이 자신의 운을 최대한 활용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로 보여 질 수 있다.

하지만 보이지도 않고,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것에 대해 자신의 시간을 바칠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자신의 웨나를 잊고 그저 남들처럼 속세에 묻혀 사는 것도 한 사람의 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네레오 또한 세속적인 욕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루이사와 결혼을 하고 (나름)행복하게 살다가 아이까지 낳았다. 그리고 자신의 전공을 살려 수많은 가축들을 키우는 일을 했다. 그런 점에 있어서 네레오 또한 평범하게 가정을 짓고, 그 가정 속에서 한평생을 보내며 자신의 웨나를 잊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네레오는 자신이 키우던 소를 보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여행을하며 자신이 찾던 웨나를 다시 한 번 찾아보기로 했다. 네레오는 진짜 존재하는지 아닌지 모를 웨나를 찾기 위해 다시 한 번 끝나지 않을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속세에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과연 네레오의 이러한 선택이 맞을지 모르겠다. 네레오의 마지막 여행지에서 그 오카 인형을 만드는 사람을 만난 뒤 웨나에 대한 모든 실마리가 풀렸다면, 다시 루이사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모든 것을 정리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네레오가 자신의 루이사와 딱히 좋게 지낸 것도 아니고, 그만 두어도 괜찮을 일이었긴 했지만 말이다. 이야기의 흐름상 네레오의 이러한 행동은 커다른 의미를 부여할 것이 못 되긴 하지만, 현실에 살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조금 아쉽긴 했다.

조금 이야기가 세어 나간 것 같다. 하지만 만약 사람들이 웨나를 잊을 준비 혹은 잊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그 사람들은 그들의 웨나가 자신의 기억 속에서 다시 되살아났을 때의 고통받을 준비를 해야하지 않을까싶다. 이렇게 평범하게 살려고, 누구나 하는 일을 하며 살기 위해 100년 이라는 시간을 하나에 종속되어 살아야 했으니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연금술사라는 책이 기억났다. 연금술사의 산티아고를 생각해보면 네레오보다는 조금 깔끔하게 자신의 웨나(연금술사 책에서는 보물이긴 했다)를 찾았던 것 같다. 어쨌든, 이 책은 나름 재미있었던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