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는 잠시 망설였다. 에이, 학교 따위 가서 뭐해. 거기선 배울만큼 배웠어. 진짜 인생은 어차피 학교 밖에 있는걸! - P19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녀는 착각 속에 살았다. 사랑에 눈이 멀어 모든 걸 제멋대로 오해한 것이다. 디르크 아이젠후트에게 그녀는 그저일 시키기 좋은 조수였고, 연구소와 그에게 돈 벌어주는 수단이었다. 그가 찾을 때면 언제라도 달려오는 놀이 상대이자 섹스 파트너였을 뿐이다. - P244

"리키는 항상 거짓말을 했어요......" 마르크의 울먹이는 소리가들렸다. "가게에서는 손님들을 속이고 동물 보호소에서는 동물 보러온 사람들을 속이고・・・・・・ 그러다 나도 언제부턴가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건 전염병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옮아요....." - P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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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해서 나아질 것 같으면 얘기를 하는 게 좋아."
피아는 손으로 피자를 집어 들다 말고 크리스토프를 쳐다보았다.
그녀를 배려하는 그의 마음은 언제나 그녀를 감동시켰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는 것이 좋다. 아픔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대화를 통해 드러냄으로써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다. - P155

피아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할머니는 평생 일만 하다가 죽기 전 3년간 정신이 멀쩡한 채로 치매 환자와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 사이에서 보내야 했다. 하지만 가족들에게는 더 잘해드릴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피아는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 자주 찾아가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다 낡은 목욕 가운을 입고 공허한 눈빛으로 힘없이 앉아 있는 노인들을볼 때마다 너무 우울해져서 자주 찾아갈 수 없었다. 거기다 정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식사, 개성의 소멸, 불충분한 보호, 과로에지쳐 말 한마디 건넬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는 불친절한 간병인들. 사람의 삶이 그렇게 끝나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아마 타우누스블릭에 사는 사람들은 평생 호강하며 살았을 것이다. 불공평은끝이 없다. - P190

"왜 그런 말이 있잖아. 시샘은 노력해야 얻어지는 거고, 동정은공짜로 얻는 거라고."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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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누굴까?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려 했을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열차에 타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온몸의 뼈가 부러져 구급차로 실려 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인생은 그렇게순식간에 바뀐다. 잘못 디딘 한 걸음, 잘못된 사람과의 잘못된 만남, 그러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P64

눈처럼 희고, 피처럼 붉고, 흑단처럼 검어라……………… - P121

"난 누가 로라랑 스테파니를 죽였는지 몰라. 하지만 절대 내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어.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마치……… 머리에 구멍이 뻥 뚫린 것만같아. 그때 법정에서 심리학자가 말했어. 충격이 심하면 잠시 기억상실이 올 수도 있다고. 하지만 뭔가 흐릿하게라도 기억이 나야할 것 아냐. 로라를 트렁크에 싣고 어딘가로 갔다면 풍경이든 뭐든 조금이라도 기억이 나야 할 것 아니냐고. 정말 모르겠어. 내가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스테파니가 더 이상......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순간이야. 그러다 어느 순간 펠릭스랑 외르크가 문가에 서 있었어. 하지만 그때는 보드카 때문에 속이 너무 안 좋았던 기억밖에 없어. 그리고 갑자기 경찰이 찾아와서는 내가 로라랑 스테파니를 죽였다는 거야!" - P164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랫동안 혼자일 것이다. 낙엽이 흩날릴 때면어수선한 마음을 부여잡고 나무들 사이를 거닐 것이다. - P345

그는 그녀가 복도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았다. 순간 그는 예상치 못한 짜릿한 행복감에 젖었다. 맞바람을 피움으로써, 그것도 코지마가 그토록 싫어하는 그의 상관과 잠자리를 같이함으로써 드디어복수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한한 자유를 느꼈기 때문이다. 살면서 이렇게 자유롭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몇 주 동안 깊은 상처와 슬픔을 끌어안고 자기 연민에 시달렸던 그는 어젯밤 자신의 미래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가정에 매인 유부남은 꿈도 꾸지 못할 엄청난 가능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코지마에게매여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결혼 생활의 실패가 인생의 끝을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쉰이 다 되어 가는 나이에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니....... 그는 그것을 행운이라 여겼다. - P496

"사람은 체스 말이 아니에요." 피아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과연 그럴까요?" 테를린덴이 반박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스스로 내리기 힘든 결정을 대신 해주고 그들의 보잘것없는 인생을대신 책임져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아주 좋아합니다. 전체 그림을보고 필요할 때 조치를 취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납니다." 그의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목소리는 자긍심으로 가득했다.
"틀렸어요!" 전모를 파악한 피아가 냉정하게 말했다. "당신이아니라 다니엘라 라우터바흐죠. 당신 또한 체스판 위에서 그녀의뜻에 따라 움직이는 졸이었을 뿐이에요." - P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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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는 두 번째로 발트호프 목장을 방문했고 보덴슈타인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는 사건에 감정적으로 얽히는 일이 드문데, 이번만은 달랐다. 예상치 못한 과거와의 대면 때문일까? 어젯밤 그는 잉카한젠에 대해 생각하느라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케르스트너를체포함으로써 그녀에게 불이익을 주기는 싫었다. 케르스트너의 행동은 생각할수록 이해하기 힘들고, 이자벨의 주변 상황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어서 사건을 어디서부터 파고들어야 할지 막막하지만 그에게는 곧 나아지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강력계 형사라는 직업은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활기차고 모험적이지 않다. 오히려 지루하고 피곤할 때가 많다. 하지만 갖가지 정보를 모아 인과관계를 추리하고 범인을 찾아내는 일은 분명히 매력적이다. 그는 언젠가 상사에게서 훌륭한 형사는 범인과 똑같이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타인의 삶에 감정이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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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무사해.
거대하고 육중한 칼이 허공에서 나를 겨눈 것 같은 전율 속에서, 눈을 부릅뜸으로써 그 벌판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은 채 나는생각했다.
비탈진 능선부터 산머리까지 심겨 있는 위쪽의 나무들은 무사하다. 밀물이 그곳까지 밀고 올라갈 순 없으니까. 그 나무들 뒤의무덤들도 무사하다. 바다가 거기까지 차오를 리는 없으니까. 거기묻힌 수백 사람의 흰 뼈들은 깨끗이, 서늘하게 말라 있다. 그것들까지 바다가 휩쓸어갈 순 없으니까. 밑동이 젖지도, 썩어들어가지도 않은 검은 나무들이 눈을 맞으며 거기 서 있다. 수십 년, 아니수백 년 동안 내리는 눈을.
그때 알았다.
파도가 휩쓸어가버린 저 아래의 뼈들을 등지고 가야 한다. 무릎까지 퍼렇게 차오른 물을 가르며 걸어서, 더 늦기 전에 능선으로,
아무것도 기다리지 말고, 누구의 도움도 믿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등성이 끝까지. 거기 가장 높은 곳에 박힌 나무들 위로 부스러지는 흰 결정들이 보일 때까지.
시간이 없으니까.
단지 그것밖엔 길이 없으니까. 
그러니까계속하길 원한다면.
삶을. - P26

인내와 체념, 슬픔과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비슷해 보인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몸짓에서 그 감정들을 구별하는 건 어렵다고, 어쩌면 당사자도 그것들을 정확히 분리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105

죽으러 왔구나, 열에 들떠 나는 생각한다.
죽으려고 이곳에 왔어.
베어지고 구멍 뚫리려고, 목을 졸리고 불에 타려고 왔다.
불꽃을 뿜으며 무너져 앉을 이 집으로.
조각난 거인의 몸처럼 겹겹이 포개져 누운 나무들 곁으로. - P172

어떻게 지낼 수 있었어?
인선의 몸이 좀더 앞으로 기울어졌다.
이곳에서 혼자 말이야.
미소 띤 얼굴로 그녀가 되물었다.
이곳이 어떤데?
가로등도 이웃도 없는 집에서 말이야. 눈이 내리면 고립되고 전기와 물이 끊기는 집 말이야. 밤새 팔을 휘두르며 전진해오는 나무가 있는 곳, 내 하나만 건너면 몰살되고 불탄 마을이 있는 곳 말이야. - P195

그럼, 군이 데려간 사람들은?
P읍에 있는 국민학교에 한 달간 수용돼 있다가, 지금 해수욕장이 된 백사장에서 12월에 모두 총살됐어.
모두?
군경 직계가족을 제외한 모두.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 P220

여기쯤 멈춰 서서 엄마는 저 건너를 봤어. 기슭 바로 아래까지차오른 물이 폭포 같은 소리를 내면서 흘러갔어. 저렇게 가만히있는 게 물 구경인가 생각하며 엄마를 따라잡았던 기억이 나. 엄마가 쪼그려앉길래 나도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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