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궁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시공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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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에드거 앨런 포 어워드 수상작. 이런 상 이름 같은 건 잘 알지 못 해서, 그저 그런가보다 싶다. 오히려 그런 것보다 날 설레게 한 건 ‘사라진 소녀들의 숲’ 작가라는 설명이었다! 워낙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었다. 아무래도 이 작가는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추리물 전문으로 자리매김할 모양이다. 아주 좋다!


​<사라진 소녀들의 숲>도 그러했지만, 이 책 <붉은 궁> 역시 조선 시대 여인들이 주축이 된다. 비운의 사도 세자는 그저 시대적 배경을 위한 장치일 뿐, 어디까지나 핵심인물은 의녀 현이었다. 똑똑하고 현명하며 상승 욕구도 강하지만, 여인, 심지어 첩의 딸이다. 어디 현 뿐일까. 지은, 인영, 정수, 그 외에도 숱한 여인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모두 의녀이다. 한때는 기생이나 다를 바 없이 취급되던, 궁녀보다 못한 신분의 여인들이다. 제아무리 재주가 뛰어난들, ‘너 따위 천한 계집’이라는 말 밖엔 들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취급에 익숙해진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받아들이고 순응한다. 나름의 의지는 있겠으나 제가 갇힌 상자 높이 이상으로 뛰지 못 하는 벼룩처럼, 그저 운명이라는 변명을 하며 테두리 밖으로 벗어날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한다. 그러나 언제나 세상을 바꾸는 이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을 어쩔 수 있는 것으로 어떻게든- 무엇이든 해보는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켜 왔다.


​나는 그래서 이 작가가 좋다. 소재도 좋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좋다. 그리 어렵지 않게 몰입할 수 있는 필력도 훌륭하다. 하지만 가장 좋은 건, 숱한 어려움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끝끝내 ‘천한 계집’의 신분으로 일을 해결해내는 인물의 설정이다. 이야기의 결말에 이를 때쯤엔 속이 후련해진다. “바로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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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스강의 작은 서점
프리다 쉬베크 지음, 심연희 옮김 / 열림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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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쇠한 원 주인이 사정상 운영에서 손을 떼고, 새롭게 서점에 발을 들인 외부인이 기존의 직원들과 갈등과 화해를 거듭하며 폐업 위기에 몰린 서점을 정상화시키려 노력한다는 이야기는 사실 새롭지 않다. (예를 들면, 오후도 서점이라던가) 이야기는 여기에 한 가지 흥미로운 장치를 더한다. 바로 사라와, 샬로테의 어머니 크리스티나의 과거이다. 서로만을 의지하며 런던까지 떠나온 자매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수십 년간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지냈던 걸까? 둘은 세상을 떠났고, 샬로테에게 남은 건 둘의 편지와 일기 정도이다.


성공 혹은 실패, 어차피 이야기의 결말은 둘 중 하나이지만 이런 류의 소설은 결말이 뭐가 됐건 주요 인물들이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며 성장해가는지를 지켜보는 것이 가장 큰 재미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과제를 아주 훌륭하게 수행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상처가 있다. 아픔을 겪었다. 결국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리버사이드 서점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작은 기적들은 여러 아픔들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


갈수록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고, 가뜩이나 출판 시장이 불황인데 전자북의 출현으로 서점들은 날마다 위기인 시간을 보내고 있다. 크건 작건 여러 행사를 유치하고 좋은 책을 들여 살아남으려 애쓰지만, 안타깝게도 전망이 썩 밝아 보이진 않는다. 당장 나만 해도 서점을 찾지 않고 인터넷 검색으로 읽을 책을 고른지 오래다. (죄송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판타지라 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판타지라는 이름보다 '희망의 책'이라 이름 붙이고 싶다. 여러 요인과의 전쟁에서 결국 서점이 이길 것이고, 사람들은 영상이나 SNS보다 책을 찾을 것이며, 오래전- 스마트폰이 출현하기 이전처럼 종이 냄새 맡으며 책장을 넘기는 일이 당연한 날이 계속될 것이라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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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마음 시인동네 시인선 205
이제야 지음 / 시인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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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디얇은 책 한 권이 몇 배나 두꺼운 책보다 더 오랜 시간을 채어간다.

조급해지는 마음으로는 행 하나를 다 읽어내지 못한다.

쉬이 호로록 넘길 수 있는 식은 숭늉 같지 않아서 천천히 꼭꼭 씹어야 한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을 때는 잠시 덮었다 한참 후에 다시 열어본다.

신기하게도 그러면 받아들여진다.

내 마음이 그새 이만큼 열렸나 싶다.





어느 날은 눈 딱 감고 아무 페이지나 열어 거기에서부터 읽는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해도 그건 내 마음이니까.


속도가 생명 같은 시대에 시는 역행자다.

시를 읽는 나도, 시를 읽으라 권한 그대도.


그러나 가을은 참으로 역행자의 계절이다.


해의 마지막 분기가 시작된 시점에서 해의 첫 마음이 어떠했나 고민해 본다.

깊어가는 가을에 <일종의 마음>을 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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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이 별건가? - 이탈리아를 입고 먹고 마시는 남자 오세호의 쉬운 와인 이야기
오세호 지음 / 책담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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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술을 안 마시니 와인이라고 알 리가 없다만, 확실히 와인은 다른 술에 비해 뭔가 '알아야' 한다는 선입견이 있다. 꽤 유명했던 '신의 물방울'이라는 만화책은 일반인을 와인의 세계에 끌어들인 한편 와인에 대한 환상을 더 퍼트린 면도 없잖아 있다. 101 이야기는 본 책에도 잠시 언급된다.) 대중화되었지만 오히려 더 마시기 어려워진 와인. 어딘가 모순된다.

사실, 와인이 뭐 별건가? 저자 말마따나 맛있게 먹고 마시는 게 가장 중요한 것 아니겠나. 하지만 더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역시 공부가 필요하긴 하다. 디켄팅이니 스월링이니 하는 외우기도 어려운 용어 이야기가 아니다. 제일 인상적인 말은 <조화>였다. 음식과 와인의 조화. (와인 페어링이란 말보다 조화가 더 친숙하다.) 특히 같은 지역 올리브오일을 뿌린 음식에 같은 지역 와인을 마시는 게 최고의 페어링(P.122)이라는 말은 미스터 초밥왕에서도 읽었던 건데, 과연 진리라는 건 지역을 따지지 않는구나 싶었다.

와인을 맛있게 마시는 방법보다도 와인을 만드는 과정이라던가 와인 산지에 대한 이야기가 개인적으로 퍽 흥미로웠다. 스파게티를 쉽게 먹으려고 포크까지 업그레이드시켰다는 다빈치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음식을 향한 이탈리아 사람의 열정에 혀가 내둘러졌다.

살면서 와인을 마실 일은 거의 없을 듯 하지만, 그런 순간이 오더라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겠다. "와인이 별건가? 맛있게 먹으면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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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사적인 우리를 잇는 버크만 안내서 - 별별 사람이 모여도 별 탈 없이 행복해지는 비밀
김태형 지음 / 크루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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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크만이라는 이름부터 생소했다. 뭔가 내가 생각했던 책이 아닌데 싶어 막막했다. 책장을 넘겼다 닫았다 들썩들썩. 그러다 마음 단단히 먹고 읽기 시작했다. 오늘은 제법 시간 여유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웬걸, 읽을 수록 재밌다. 낯선 개념이다보니 초반엔 좀 헤맸는데, 항목마다 예시가 있어 한결 이해하기 좋았다.

이 책은 버크만 검사를 해볼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제목처럼 버크만 검사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는 <안내서>이다. 보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버크만 코리아 홍보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책을 읽는 내내 무릎을 치게 만드는 문장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무엇보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와 남은 다르다'는 사실은 누구나 머리로 알고 있지만 실제 그것을 염두에 두고 살기는 쉽지 않다. 버크만 검사의 궁극적인 목표는 여기에 있는 듯 하다. '다름'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Do not judge your neighbor until you walk two moons in his moccasins.

나는 그와 다르고, 그도 또한 나와 다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기에 내가 틀렸나 전전긍긍할 필요도, 나와 다른 그에게 분노할 이유도 없다.

대부분의 예시가 기업이라는 조직에 속한 사람들 이야기이긴 하지만, 모든 인간 관계에 적용해볼 법 하다. 그야말로 별별 사람이 모여도 별탈 없이 행복해지는 비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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