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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사의 이단자들 - 현대 의학을 일군 개척자들의 열정과 삶
줄리 M. 펜스터 지음, 이경식 옮김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역사를 서술하는 데 영웅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대놓고 인물을 중심에 놓고 쓰면서 위인전이 빠질 수 있는 함정 - 즉, 위대한 업적을 이룬 자의 행위와 사상은 모두 위대하다 - 을 피해가는 동시에 인물이 속한 역사의 문맥을 파헤치는 데 성공한다면, 그건 대단한 능력이다. 아마 글에 대한 감각과 더불어 뛰어난 역사의식을 필요로 하겠지. 이 책의 지은이처럼 말이다.

책의 원제는 [괴짜들, 기적들, 그리고 의학 Mavericks, miracles and medicine]이다. 역사학자인 동시에 글잡이인 지은이는 베살리우스, 뢴트겐, 하비, 코흐, 레벤후크와 같은 의학사의 위인들을 등장시켜 그들이 의지와 노력으로 이뤄낸 업적과 그 업적이 의학사 속에서 갖는 의미를 되짚는다. 그리고 그 말하는 방식은 늘 흥미를 유발하고, 그러면서도 간결하고 날카롭다. 예를 들어 코흐를 다룬 장에서는 한 강연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강연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옮긴다. 이 강연은 그 때까지 -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 인류의 가장 큰 적 중 하나였던 결핵의 정체를 밝힌, 의학의 역사에서 가장 큰 진보를 이룬 사건 중 하나였다. 글을 읽다 보면 그 감동과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건 비르코프 - 혹은 비르효 혹은 피르효 - 의 몰락과 훗날 투베르클린으로 결핵을 치료하려던 코흐 자신의 실패다.

그런데 이 인물들의 스펙트럼은, 의외로 넓다. 이 중에는 코흐나 하비처럼 의학사의 한 페이지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사람도 있지만 제멜바이스와 같은 비운의 혁명가도 있다. 갈레노스의 전통을 깨뜨린 베살리우스가 있는 한 편 돌리를 복제한 윌머트 같은 사람도 있다. 뢴트겐처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름도, 프란츠 요셉 갈처럼 의학사 책을 몇 권 봤다는 나 같은 사람도 생전 처음 듣는 이름도 등장한다. 그리고 기본처럼 순진무구한 학자도, 또 마취제를 둘러싼 협잡과 공방을 벌인 장사꾼들도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 모두에게 공통점이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들은 모두 확고한 목적의식을 갖고, 불굴의 의지를 발휘했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무언가의 가치를 찾아내고 발휘할 줄 알았다. 그리고 제멜바이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어떤 식으로든 운이 좋았다. 이들은 완고하고 보수적인 학계 - 의사들이 얼마나 보수적인지, 의학이라는 학문이 얼마나 몽매한지 아는 사람은 안다 - 에 대항해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그 중 일부는 학계를 변화시켰고, 대부분은 무시당했지만. 이들이 아니었더라면 의학의 모습은 상당히 달라졌을 거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정말, 하비가 혈액이 순환한다는 걸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의학의 모습은 어땠을까? 정말 누군가 그걸 발견하기는 했을까?

책은 좋고, 번역 역시 훌륭하다. 긴 책에 오자는 - 내가 찾아낸 한 - 단 두 개 밖에 없었고, 어색한 용어도 단 하나도 등장하지 않았다. 인물 중심임에도 불구하고 책은 의학사의 대부분을 은근슬쩍 건드리고 지나간다. 오랜만에 만난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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