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예술의 발전은 대규모로 행해지고 있던 전반적인 합리화 과정의 일부분으로 이루어지고, 비합리적인 것은 더이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개개의 부분이 전체와 논리적으로 합치되고, 관계가 수적으로 표현 될 수 있을 만큼 엄격한 조화를 이루며, 인물과 공간의 관계에서 모순이 배제되고, 그리고 공간의 부분들 상호간에도 모순이 배제될 때 비로소 사람들은 ‘아름답다’는 미적 감정을 갖게 된다. 투시도법이 공간의 수학화이고 비례의 원리가 하나의 묘사 속에 나타난 형상들의 체계화이듯이, 예술적 질을 말하는 일체의 규준들은 점차 이성적인 근거에 종속되고, 예술의법칙들은 하나같이 모두 합리화되었다. 이러한 합리주의는 물론 이딸리아예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북쪽지역에서도, 이딸리아에서보다는 좀 통속적인 양상을 띠기는 해도 더욱 명확하고 소박한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27p)
아무튼 피렌쩨의 경제제대립관계는 대부분의 독일 도시에서처럼 길드와 조직화되지 못한 도시 부호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직종이 상이한 길드 상호간에서 일어났다. 유럽 나라들에 비하면 피렌쩨의 부호들은 도시의 중산계층처럼 엄격하게 조직되어 있었다는 이점을 처음부터 갖고 있었다. 그들은 대규모의 상공업과 은행업을 통합하여 길드를 조직했고, 이러한 길드를 일종의 기업가연합으로 발전시켰으며, 나아가서는 트러스트를 만들어 시장을 통제하였다. 이러한 길드조직이 사회에서 그 우위를 차지하자 상층 시민계급은 길드조직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기구를 이용하여 하층계급을 억눌렀고, 무엇보다도 노동자의 임금을 내리는 데 성공했다. 14세기는 길드를 장악한 중산층과 길드 밖으로 밀려난 노동자들 사이에일어난 수많은 계급투쟁으로 점철된 시기이다. (32p)
이 시대 역사가 우리들에게 증명해주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이 부르즈와지의 이익과 병행할 수 없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미 노후한 길드 조직의 테두리 안에서 생산양식의 혁명적인 변화를 수행하려는 것이 노동 자계급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중대한 과오였는가 하는 점이다. 도시의 대상공업자들은 길드조직이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제도임을 훨씬 빨리 알아차렸고, 따라서 이들은 길드조직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그결과 지금까지의 길드의 정치적 역할은 점점 줄어드는 대신 문화적 역할은 갈수록 더 많이 맡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결국 길드는 자유경쟁의 희생물이 되어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다. (34p)
이 새로운 시대의 경제사상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바로 이런 비정한 물질주의적 사고방식인데 이 사고방식은 인간을 그의 성과로, 그의 성과를 화폐가치(임금)로 환산해서 이 양자를 동일시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노동자를 단순히 투자와 수익성, 이익 가능성과 손실 가능성, 그리고 차변(借邊)과 대변(貸邊)이라는 복잡한 체계 속의 일 부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합리주의를 가장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종전의 도시경제의 본질을 이루었던 수공업적 성격이 이제는 완전히 상업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업화 과정의 본질은 기업가의 활동에서 점차 손으로 하는 일이 적어지고 그 대신 계산적이고 추론적인 요소가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는 사실뿐 아니라, 기업가가 새로운 가치를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자본주의 경제원칙을 인식하고 있다는 데 있다. (37p)
즉 한 상품의 가치가 전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복이 있으며 상품의 가치가 오르내리는 것은 상인의 주관적인 선의나 악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정한 객관적인 상황정세에 따른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공정한 가격‘이라는 개념과 이자에 대한 그들의 회의에서 볼 수 있듯, 중세인들은 가치를 하나의 실제적이고 언제나 고정되어 있으며 상품에 이미 내재된 성질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경제의 상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르네쌍스인들은 비로소 상품가치의 실제적인 기준과 그 상대성, 그리고 도덕과 상관없는 가치의 성격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38p)
이와같이 시민계급이 점점 비합리적인 생활양식을 취하게 되는 바로 그 무렵에 봉건영주들은 점차 견실하고 신용있는 상인의 경영원칙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궁정사회와 시민사회가 길의 중간에서 서로 만나게 된 셈이다. 영주들은 점점 더 진보적이 되고 문화적인 면에서도 신흥 시민계급 못지않게 매우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 반면에, 시민계급은 점점 더 보수적이 되어 중세의 궁정적· 기사적 이상이나 중세의 고딕적·정신주의적 이상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민적 예술의 발전 속에서도 결코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던 그 이상들이 다시 전면에 드러나도록 후원·장려하게 된 것이다. (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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