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또는 1337년에 죽었고, 1339년부터 큰 가문들이 잇따라 도산함으로써 재정위기가 시작되었으며, 아테네 공에 의한 살벌한 전제정치는 1342~43년에 걸쳐 있고, 1346년에는 대반 란이 일어났으며, 1348년은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피렌쩨에서 가장 맹위를 떨친 ‘페스트(흑사병)의 대창궐‘이 있던 해이다. 페스트 창궐과 치옴삐 반란 사이의 이 시기는 온통 폭동과 소요, 반란으로 점철되어 있다. 따라서 이 시대는 조형예술에서는 매우 비생산적인 시기였다. 씨에나에서는 하층 시민계급이 피렌쩨에서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사회적·종교적, 전통에 더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적 발전은 위기나 정세변동에 방해를 받지 않고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또한 종교적 감정은 아직도 그들의 생생한 생활감정의 일부였던만큼 시대감각에 맞게 그리고 앞으로 계속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형태로 표현될 수 있었다. (42p)

그러나 꾸아뜨로첸또 초기에는 궁정화의 경향이 아직도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다. 이 세기 최초의 세대에 속하는 거장들, 특히 마자치오와 도나뗄로는 지나치게 세련된 궁정풍의 취미는 물론이요 뜨레첸또 회화의 장식적이고 무절제한 형식보다도 공간형식이 집중되어 있고 인물묘사가 조 상(像)처럼 품위가 있는 지오또의 엄격한 예술양식에 오히려 더 가깝다.
그러나 대대적인 재정위기, 페스트, 그리고 치옴삐 반란이라는 대혼란을 겪고 난 이 세대는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입장에 놓여 있었다. 시민계급은 도덕적인 면에서나 예술적 취향에서나 이전보다 더 단순해지고 냉정 해졌으며 더 청교도적으로 되었다. (4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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