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과거 인류의 성년식에 관한 문서를 읽은 적이 있어. 역사상 수많은 곳에서 수많은 방식으로 행해진 성년식을 비교한 책이었는데, 그중에는 우리 마을처럼 먼 곳으로 성년이 되는 소녀, 소년들을 보내는 관습들도 있었어. 그들은 아이가 어른이 되었다는 증명을 위해 가혹한 시험을 했어. 혼자서 맹수를 잡아 오라고 요구하기도 했고, 날카로운 칼날 위를 걷게 하기도 했지. 엄격한 시험에 응하고 살아남은 이들만이 제대로 된 어른으로 받아들여졌어. 이전까지는 그런 관습들이 과거의 야만성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건 성년식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시험의 속성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던 거야. (17p)
델피는 자신이 실패한 개조인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부모는 딸을 뛰어난 음악가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건 그들의 이루지 못한 꿈이었다. 그러나 델피의 부모는 거금을 내고 유전자 시술을 맡길 재정적 여유가 없었다. 저렴한 값에 시술을 맡았던 해커는 델피의 배아를 풍부한 예술적 재능을 가지도록 개조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다른 태생적 문제와 성격 결함을 안겨주었다. (34p)
이타사는 분리주의 정책을 고수하는 도시 중 하나였다. 도심은 개조인들의 구역으로, 도시 외곽은 비개조인들의구역으로 철저하게 구분되었다. 도심은 화려하고 단정하고 아름다웠고, 외곽은 버려진 이들의 세계였다. 외곽에서는 다툼과 시비가 자주 일어났다. (35p)
당시는 바이오해커 집단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던무렵이었다. 간편한 유전자 편집 기술의 보급, 지구상의 거의 모든 종에 관한 유전체 지식과 ‘미니 랩‘의 보편화로 약간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집에 실험실을 차리고 유전자 조작 생물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대부분은 처참하게 실패했지만, 어떤 이들은 유전체에 관한 직감과 지식으로 기업체에서도 실패한 유전 퍼즐들을 풀어냈다. 그중 일부는 프리랜서 바이오해커로 수많은 기업체들의 러브콜을 받으면서도 독립적인 활동을 했다. 릴리 다우드나가 다시 나타난 건 익명의 프리랜서 바이오해커 ‘디엔’ 으로서였다. 보스턴 어딘가에 인간배아 디자인을 해주는 해커가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처음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유전자 편집 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간배아디자인을 시도해본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것은 거의 항상 실패했기 때문이다. (40p)
설계된 아이들이 한 세대를 이룰 만큼 많아졌다. 사람들은 디자인에 의해 만들어진 아름답고 유능하고 질병이 없고 수명이 긴 새로운 인류를 ‘신인류‘라고 통칭했다. 캘리포니아 대지진으로 서부 도시들이 황폐화되자, 신인류로 태어나지 못한 비개조인들이 서부로 밀려났다. 재앙 이후에도 굳건했던 동부의 도시는 대부분 개조인들의 거점이 되었다. (42p)
이민자의 딸, 그리고 흉측한 외모를 가진 음침하고 삐쩍마른 소녀. 릴리는 생애 초반기에 어느 누구와도 제대로된 관계를 맺지 못한 듯했다. 릴리는 스스로를 괴물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병을 가지고도 그대로 태어난 것은 부모의 잘못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릴리의 부모는 가난했고 병원에서 권유하는 유전병 사전 진단을 전혀 받지 않았다. 사전 진단에서 해당 질환이 정말로 발견되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릴리는 모든 문제가 자신이 태어나기로 결정된 그 순간에 있다고 생각했다. (45p)
릴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로써 나는 태어날 가치가 없었던 삶임을 증명하는가?’ 릴리는 나에게서 스스로를 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원치 않았던 존재로 태어난 릴리. 세계에서 배제된 릴리. 그러나 악착같이 살아남아 어떤 방식으로든 삶의 가능성을 입증한 릴리 다우드나. 그녀의 결정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직도 나는 모르겠다. 릴리는 자신의 삶을 증오했지만, 자신의 존재를 증오하지는 못했다. (47p)
아름답고 뛰어난 지성을 가진 신인류가 아니라, 서로를 밟고 그 위에 서지 않는 신인류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로만 구성된 세계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지구 밖에 ‘마을‘이 존재하는 것은 그녀의 연구가 성공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내가 마을에 살았을 때, 나는 사람들이 나의 얼룩에 관해 무어라고 흉보는 것을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다. 나는 나의 독특한 얼룩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마을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결점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때로 어떤 결점들은 결점으로도 여겨지지 않았다. 마을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결코 배제하지 않았다. (49p)
그들은 왜 지구에 남을까? 이 아름다운 마을을 떠나, 보호와 평화를 벗어나, 그렇게 끔찍하고 외롭고 쓸쓸한 풍경을 보고도 왜 여기가 아닌 그 세계를 선택할까? 소피. 우리가 왜 ‘서로’ 사랑에 빠지지 않는지를 생각해본 적 있어? 시초지의 역사를 배우며 그렇게 많은 과거의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는 이 마을에서 자란 이들이 서로 연인이 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 지 않았지. 같은 자궁에서 태어나 자매처럼 자란 우리가서로에게 어떤 낭만적 감정도 성애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단지 우연이기만 할까? (52p)
그리고 그들이 맞서는 세계를 보겠지. 우리의 원죄. 우리를 너무 사랑했던 릴리가 만든 또 다른 세계. 가장 아름다운 마을과 가장 비참한 시초지의 간극. 그 세계를 바꾸지 않는다면 누군가와 함께 완전한 행복을 찾을 수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순례자들은 알게 되겠지. 지구에 남는 이유는 단 한 사람으로 충분했을 거야. (53p)
유리를 모으는 이유를 할머니가 직접 말해준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해보곤 했다. 빛을 모으고, 분리하고, 보통의 감각으로 볼 수 없는 대상을 보게 하는 도구. 할머니가 행성에 머물며 가장 절실히 원했던 것들은 아마 그런 도구들이었을 것이다. (79p)
그렇지만 희진은 이 행성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남기는 일에 지구의 도구들 없이 행성 자체를 감각으로만 받아들이는 일에 천천히 익숙해져갔다. 오랜 시간동안 희진은 볼수도 들을 수도 없는 것, 관념적인 것, 감각의 바깥에 있는것들을 다루어왔다. 원래 희진의 세계는 현미경 속에, 정량화된 데이터 속에, 그래프와 숫자 속에 있었다. 그러나 이 행성은 오직 희진을 둘러싼 풍경으로만 존재했고 희진은 그 사실을 수용해야 했다. (83p)
희진은 네 번째 루이가 다음 행동을 하기를 기다렸다. 네 번째 루이는 무관심하게 희진을 스쳐 지나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루이는 흩어진 그림들을 주워 들었고, 익숙 하게 그림들을 정리했다. 루이는 평평한 바위 앞에 앉아천천히 그림을 살피기 시작했다. 바위 위로 비스듬하게 쏟아지던 햇빛이 점점 더 면적을 키웠다가, 다시 좁아졌다. 루이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그림들을 살폈다. 동굴 안의 모든 그림을 빠짐없이 읽으려는 것처럼, 희진은 루이를 지켜보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87p)
그러나 그들은 결국 같은 루이가 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는 어떤 초자연적인 힘도 작용하지 않는다. 루이들은 단지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들은 기록된 루이로서의 자의식과 루이로서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경험, 감정, 가치, 희진과의 관계까지도. 그렇다면 희진도 그들을 같은 영혼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91p)
그 세계에 관한 기억은 어린 시절부터 생애가 끝나는 순간까지 류드밀라를 지배한 강렬한 이미지였다.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 류드밀라는 평생 그곳의 풍경을 그렸다. 그 세계 자체가 류드밀라의 머릿속에 그대로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모든 그림은 매번 다른 풍경을 묘사했지만 부분의 조합은 전체 세계를 생생하고 치밀하게 직조했다. (101p)
그런데도 행성 연작은 사람들에게 특정한 종류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류드밀라의 행성을 볼 때 사람들은 무언가 놓고 온 것, 아주 오래되고 아득한 것, 떠나온 것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모르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평론가들은 류드밀라의 작품이 어디에도 없는 세계를 묘사해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존재하는 세계를 자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04p)
브레인 머신 인터페이스 연구팀은 생각-표현 전환 기술을 연구하고 있었다. 단분자 추적 이미징 기술을 이용해활성화된 뉴런의 패턴을 읽고, 피험자의 생각을 언어 표현으로 옮기거나 반대로 표현된 언어를 역추적하여 원래 피험자의 생각을 추측하는 기술이었다. (110p)
패러다임 변화는 2년 전 새로운 단분자 추적 기술이 등장하면서 일어났다. 뉴런 단위로 뇌 활동을 분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연구팀은 새 기술을 활용하여 뇌에서 만들어내는 전기적 신호와 패턴을 분석했다. 아직 어떤 특정한언어로 옮겨지지 않은, 사고언어라고 불리는 순수한 생각의 형태였다. 그리고 이제 연구는 사고언어를 역으로 표현에 맞추어 연결하는 작업에 접어들었다. (111p)
아기들은 생후 14개월경부터 일상의 언어들을 습득하기시작하고 간단한 동작어에 반응한다. 아기들이 어린이가 될 때까지, 그리고 어린이가 청소년으로 자라날 때까지 언어구사력은 그들의 사고력과 함께 발달한다. 상식적으로아기들의 사고내용은 아기들의 발달 단계를 넘어설 수 없다. 사고는 언어 이해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114p)
그러나 중요한 건 인간 보육자의 유무가 아닐 수도 있다. 인간 보육자가 아니라 ‘그들‘이 아기들을 피와 눈물이있는 존재로 키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특성은 인간 밖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빈은 그 증거를 확인하려 하고 있었다. (126p)
워프 항법이 널리 쓰이던 시기에 관해서라면 남자도 배운 적이 있었다. 인류가 고작해야 달이나 화성에 발을 내디디고 태양계 밖으로는 무인 탐사선만 날려 보내던 시기를 지나, 진정한 의미에서 우주 곳곳을 개척하게 된 계기가 바로 워프 항법의 발명이었다. 우주선은 비록 빛의 속도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이동하는 우주선을 둘러싼 공간을 왜곡하는 워프 버블을 만들어서 빛보다 빠르게 다른 은하로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지구에서 가까운 항성계의 자원이 많거나 지구와 비슷한환경의 행성들부터 개척이 시작되었다. (156p)
"물론 아쉽기도 했지. 실제로 우리의 연구에 대한 주목도도 예전보다는 떨어졌다네. 딥프리징이 그렇게 많은 연구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던 건 역시 우주 개척의 마지막희망이라는 상징성이 컸는데, 웜홀 통로의 발견으로 성간항해 기술의 주축이 완전히 이동했으니까." (164p)
우주 여행의 역사가 다시 쓰였지. 슬렌포니아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어. 한때 슬렌포니아는 우리에게 가까운 우주였는데, 웜홀 항법이 도입되면서 순식간에 ‘먼 우주‘가 되어버렸다네. 그곳에는 통로가없었던 거지. 슬렌포니아 행성계로 향하는 통로도, 심지어그 근처로 가는 통로도. 항해 기간이 길어야 한 달로 압축되어버린 새로운 개척 시대에 이미 존재하는 통로만으로도 모두 가볼 수 없을 만큼 많은 별과 행성이 있는데, 이제 뭣하러 몇 년도 넘게 잠을 자야만 갈 수 있는 곳에 우주선을 보내겠는가? (168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