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층인 3층에서 왼편의 문턱에 선 리외는 붉은 분필로 쓴 "들어오시오, 나는 목을 매달았소"라는 글을 읽었다. (50/871p)
이튿날인 4월 30일에는 벌써 푸르고 눅눅한 하늘에서 훈훈한 산들바람이 불고 있었다. 산들바람은 가장 먼 교외에서 오는 꽃향기를 실어다 주었다. 거리에서 들리는 아침의 소음은 여느 때보다 더 활발하고 더 즐겁게 들렸다. 한 주일 동안 겪었던 그 무거운 걱정에서 벗어나, 이 조그만 우리의 도시는 봄날을 맞았다. (59/871p)
"이제는 가망이 없나요, 선생님?" "죽었습니다." 리외가 말했다. (62/871p)
쥐 사건에 대해 그처럼 떠들어대던 신문이 이젠 아무 소리도 없었다. 쥐들은 눈에 띄는 거리에서 죽고 사람들은 방 안에서 죽었으니, 그것은 당연하다고나 할까. 어쨌든 신문은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관심을 둔다. 그러나 현청과 시청은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의사들이 제각기 두서너 건의 사례를 알고 있을 때만 해도 누구 하나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95/871p)
그러나 그런 망상은 이성 앞에서는 견뎌내지 못했다. ‘페스트’라는 말이 입 밖에 나온 것도 사실이고, 바로 그 순간에도 재화가 두서너 명의 희생자를 들볶아 쓰러뜨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대수롭잖게 그냥 내버려둘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인정해야 할 것은 단호히 인정하고, 결국에는 쓸데없는 공포감을 쫓아버려 적당한 대책을 강구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면 페스트는 멎을 것이다. (110/871p)
시장은 우리 도시의 거대한 실업가인데, 결국에는(그리고 시장은 자기 이론의 모든 비중이 걸려 있는 이 말에다 힘을 주었다) 여태껏 우리 시에서 배고픔으로 죽은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강력히 단언했다. 어쨌든 사실 조제프 그랑이 영위하고 있던 거의 회의적인 생활은 마침내 이런 계통의 모든 근심에서 그를 해방시켜주었다. 그는 여전히 자기가 할 말을 모색하고 있었다 (124/871p)
"장티푸스 같은 열병이지만, 멍울과 구토증이 동반됩니다. 저는 멍울 수술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병리 검사를 요청할 수 있었는데, 거기에 대해 연구소에서는 확실한 페스트균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좀 더 정확한 결과를 말씀드리면, 그래도 그 균의 어떤 특수한 변화들이 과거의 기록과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131/871p)
"어떤 세균이," 하고 잠시 잠잠하던 끝에 리외가 말했다. "사흘 동안에 비장(脾臟)을 네 배나 크게 하고 장간막(腸間膜)의 림프샘을 오렌지만 한 크기와 죽처럼 끈적끈적한 액체 상태로 만들었다면, 더는 주저할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전염의 중심은 점점 더 확대되고 있습니다. 병세가 전염되는 속도로 보아 만약 저지하지 못한다면 2개월 이내에 온 도시의 생명 반 이상이 위태롭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것을 페스트라고 부르건 전염성 열병이라고 부르건,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절반을 죽음에서 구하는 일입니다."
온종일 의사는 페스트 생각을 할 때마다 매번 일어나는 가벼운 현기증이 더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중에는 자기가 겁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앉은 카페에 두 번이나 들어갔다. 그도 역시 코타르처럼 인간적인 훈훈한 공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리외는 그 일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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