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사회가 존재하고 발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개인들이 본성상 사회적이고 협동적인 삶을 원하기 때문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30

스미스는 그 유명한 저서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1776)에서 정치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경제의 원리를 보여주었다. 즉 노동의 분업을 통해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증대된 효율성으로 산출한 더 많은 재화를 서로 교환함으로써 사람들은 각자 더 많은 부를 향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거기서 국가가 할 일은 거의 없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32

이러한 ‘의도치 않은 결과’의 법칙이야말로 스미스 이론의 핵심이며 그것을 작동하게 만드는 것은 경쟁을 통해 개인의 이윤 동기를 공공선의 원동력으로 만드는 시장이다.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는 자기 규제적 메커니즘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34

물론 국가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국가의 개입을 유도하는 정치 철학도 존재했다. 특히 공리주의 내지 벤담주의로 알려진 일련의 사상들은 자유방임과는 명백히 다른 종류에 속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넬슨은 트라팔가르 전투 직전에 신호로 그의 함대를 즐겁게 해주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넬슨은 모든 병사가 의무를 다할 것을 믿는다Nelson confide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라는 신호를 보낼 것을 명했다.
부하 지휘관 가운데 누군가가 ‘넬슨’ 대신 ‘영국’을 제안하자 넬슨이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신호 담당자는 ‘confides’가 시그널 어휘록에 없어서 스펠링을 일일이 적어야 한다며 대신 ‘expects’는 목록에 있음을 알렸다.
그 결과 ‘영국은 모든 병사가 각자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라는 유명한 메시지가 탄생했다.
수십 척의 전함에 타고 있던 병사들은 이 신호를 듣는 순간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90

트라팔가르 해전 후 영국 해군의 우위가 도전받지 않았다면 나폴레옹 역시 유럽 대륙에서 도전받지 않는 지배력을 즐겼다.
‘고래와 코끼리는 서로 맞붙어 싸우기가 어렵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었다.
해군력만으로는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확실했다.
나폴레옹을 격파하려면 해양 전략을 대륙 전략과 혼합할 필요가 있었고, 나폴레옹의 운명이 판결나기까지 그 후 10년이 더 걸렸다.
그럼에도 궁극적으로 영국이 온 세상의 바다를 제패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나폴레옹이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92

프랑스혁명 전쟁과 나폴레옹전쟁은 영국이 해상력을 장악하기 위해 성장하면서 마주쳐야 했던 가장 큰 시련이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93

몽테스키외는 영국인들이 "자유에 대해 매우 열정적"이고 그 나라의 법체계와 관습은 개인의 자유에 이롭게 작용한다고 관찰하면서 "법으로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데 성공한 영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민"이라고 감탄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97

볼테르는 영국의 자유와 부와 권력의 상호 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즉 무역은 영국인들을 부유하게 만들고 그들의 부는 그들을 자유롭게 만들며, 그렇게 얻은 자유는 그들의 상업을 확대시키고, 무역으로 번 돈으로 해군력을 강화시키면 그 해군력을 기반으로 영국은 다시 해상권을 장악하고 국가의 위신을 드높인다고 관찰했던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98

사실상 잉글랜드의 왕권은 앵글로색슨의 전사들 무리와 더불어 시작되었는데, 5세기경 대륙으로부터 브리튼섬을 침략해 들어온 앵글로색슨 부족들은 9세기까지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군웅할거의 양상을 띠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99

1,000년에 걸친 로마와 앵글로색슨 왕국들의 지배는 ‘분산된 지배’라는 구조를 낳았고 수많은 내부 전쟁과 위기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00

왕권은 바이킹의 침략을 물리치고 웨식스 왕가를 강화시켜 잉글랜드 통일의 초석을 놓은 알프레드 대왕(재위 877∼891) 시기에 잠시 강화되었지만, 곧 다시 약화되었다.
두 번째 바이킹족의 지배가 끝나고 웨식스 가문의 에드워드 고해왕이 즉위했을 때(1042) 그의 즉위를 도운 유력한 귀족들이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 결과 왕권은 다시 약화되고 귀족들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앵글로색슨 국가의 마지막 왕인 에드워드 고해왕이 죽은 후 브리튼섬을 침공하여 노르만 왕조를 연 윌리엄의 치세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윌리엄은 ‘정복왕’이라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잉글랜드 왕권의 약화에 적잖이 기여했다.
윌리엄을 도와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그에게서 봉토를 받은 노르만 기사들은 아마 2,000명 미만이었을 것이다.
로마 시대와 마찬가지로 소수 이민족 지배자가 다수 원주민들을 통치해야 하는 상황이 야기되었으며, 그 결과 지배자는 바뀌었지만 앵글로색슨의 제도들은 유지되었다.
즉 분권적 통치 제도가 지속되었던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01

1201년에는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려는 존 왕(재위 1199∼1216)에게 귀족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해협을 건너지 않겠다고 도전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런 과정들이 모여 그 유명한 대헌장Magna Carta(1215)으로 귀결되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05

14세기 초에 이르면 잉글랜드 왕은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국가적·지역적 행정을 유력 가문들과 공유한다는 매우 독특한 정치 제도가 만들어졌다. 즉 왕은 국가 엘리트와 통치를 나눠야 한다는 원칙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07

16세기에 이르면 잉글랜드는 왕국이기보다 마치 오늘날의 국민 국가와 유사한 정치 공동체라는 의식이 나타났다. 즉 왕과 신민들 사이는 일종의 ‘정치 계약’에 의한 관계라는 의식이 생겨났던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08

‘계약에 기초한 동등한 사람들의 동맹’으로 표현했다.6 그러한 계약설은 후에 홉스와 로크의 사회 계약설로 연결된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09

잉글랜드 왕권을 제약한 요인들 가운데 관습법인 보통법Common Law도 매우 중요하다.
유럽 대륙과 달리 잉글랜드에서는 보통법 체제가 발달했는데 그것은 앵글로색슨 시대의 구습에서 유래했다.
12∼13세기에 유럽 대륙에서는 로마법이 부활하여 기존 관습법을 국왕의 사법권으로 대체하면서 절대 왕정의 수립을 돕고 신민들이 누리던 관습적 권리들을 앗아가 버렸다.
그러나 잉글랜드에는 이미 11세기에 보통법 체제가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로마법과 무관한 색슨 시대의 관습법이 유지되었다.
특히 보통법은 신민의 재산권을 보호해주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09

1640년대 영국혁명 시기에 보통법은 소유권뿐 아니라 더 광범위한 의미에서 왕의 자의적 통치로부터 신민들의 자유를 지켜주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11

로크는 자유를 자신에게 허용된 법의 한도 안에서 자기 자신, 행위, 소유물, 그리고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관리할 자유로 정의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11

인간이 정치 공동체를 형성하고 스스로를 정부 아래 두는 가장 중요하고 주된 목적은 ‘사유 재산의 보호’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잉글랜드를 자유의 땅으로 만든 데 기여한 요인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고려할 것은 개신교 신앙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12

그랬던 헨리가 왕비와의 이혼이라는 개인적인 이유로 교회를 로마로부터 분리하여 잉글랜드 국교회Church of England를 세우게 된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12

로마를 설득하려는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헨리는 결국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로부터 독립시켜 자신이 수장인 국교회를 만들어 로마의 허락 없이 이혼하는 길을 택했다.
대륙의 여러 곳에서 벌어진 전쟁에 연루되어 있던 왕에게 교회와 수도원 소유의 막대한 재산도 매력적이었다.
그런 연유로 잉글랜드는 1534년에 개신교 국가로 탈바꿈하게 되는데 그것이 잉글랜드를 자유의 땅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13

프랑스의 정치가이며 역사가인 기조(François Guizot, 1787~1874)는 종교개혁을 자유로운 인간 정신이 이뤄낸 ‘위대한 도약’이며 인간의 사유를 해방시킨 ‘쾌거’로 정의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14

이처럼 왕권이 일찍부터 제한받게 되자 직접적 결과물로 의회가 발달했다.
영국 의회는 ‘모든 의회의 어머니Mother of all the parliaments’로 불린다.
그 별칭이 말해주듯 의회 제도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먼저 발달했다.
의회의 전신인 정기 자문 회의는 앵글로색슨 시대의 유물이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게르만 부족 시대의 유물이었다.
그 전통이 유럽 대륙에서는 거의 사라져버렸는 데 반해 섬나라인 잉글랜드에는 남아 있었던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15

잉글랜드 의회는 원래 왕이 소집한 자문 회의로부터 발달했는데, 13세기 말부터 귀족만이 아니라 평민 대표가 참석하는 회의가 소집되었고, 그 후 귀족원(상원)과 평민원(하원)으로 나뉘면서 오늘날과 흡사한 형태로 존재하게 되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17

하원의 권력이 크게 강화된 결정적 사건은 1642년에 시작된 영국혁명(혹은 내전)이었다.
세금과 군대 통솔권 문제로 의회와 갈등을 벌이던 찰스 1세가 의회 지도자들 5명을 체포하려 했지만 실패하면서 혁명이 시작되었다.
6년여에 걸친 전쟁 끝에 찰스는 항복했고 1649년 1월에 처형되었다.
그때 왕정과 더불어 상원이 폐지되면서 하원이 전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크롬웰의 독재 정치를 겪으며 공화정에 환멸을 느낀 잉글랜드인들이 다시 왕정을 복구시켰을 때(1660) 상원도 다시 살아났고 예전 권력을 회복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20

1688년 잉글랜드에는 또다시 혁명이 일어났지만 이번에는 피를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명예혁명으로 불린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20

결국 정파에 상관없이 거의 모든 의회 지도자는 왕을 몰아내고 개신교도인 그의 딸 메리와 메리의 남편인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 빌렘을 왕으로 옹립하는 데 합의했다.
윌리엄(빌렘의 잉글랜드식 이름)은 의회의 요청대로 1만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공했는데 공황 상태에 빠진 제임스 2세가 프랑스로 도주하자 무혈 혁명이 되었다.
이것이 명예혁명이라는 사건이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22

윌리엄은 의회가 제시한 여러 조건을 수락하고서야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고 의회는 그 조건들을 다음 해에 권리장전(1689)으로 공포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22

이처럼 명예혁명이 남긴 유산은 ‘의회 주권과 관용’이었고, 이 전통은 그 후 영국 역사에서 한 번도 포기되지 않았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23

‘국가 영역의 바깥’을 지칭하는 시민 사회는 개인들의 합이며 개인의 사적 욕구가 교환되고 충돌하는 장을 의미하는데, 방점은 ‘개인’에 있다. 시민 사회는 명예혁명 후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유럽 대륙의 국가들이 신민들에게 국가에 대한 종속을 요구한 데 반해 잉글랜드의 정치 철학은 시민 사회를 인간 삶에서 최상급의 영역으로 높이 평가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25

개인과 시민 사회를 정치적 간섭에서 해방시키려는 이념은 자유주의인데 17세기 말에 로크로부터 그 토대가 마련되었다.1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26

로크의 정치 철학은 정부의 목표는 개인의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며 국가보다 사회가 우선이라는 원칙에 서 있다. 즉 국가와 시민 사회는 서로 대등한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시민 사회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크의 이 철학이 그때부터 20세기 초까지 영국 역사가 실제로 나아간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26

시민 사회의 주인공은 보통 부르주아지라고 말하지만 흥미롭게도 영국의 경우 초기 시민 사회 발달의 주역은 지주층이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27

이를 일부 연구자들은 ‘토지와 화폐의 결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토지와 상업·금융 간에 맺어진 동맹의 매개는 주식회사였다. 토지를 소유한 엘리트는 자신의 돈을 직접 운용할 필요 없이 주식에 투자하고 이윤을 배당받았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28

영국의 특성은 대륙에서와 같은 부르주아지의 토지 귀족화가 아니라 반대로 ‘지주층의 부르주아화’였던 것이다.1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534년에 헨리 8세가 로마 가톨릭교회를 떠나 잉글랜드 국교회를 설립한 후 잉글랜드는 개신교 신앙을 수호하는 주도적인 나라로 인식되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51

프랑스와 스페인이라는 두 강대국들이 있는 세계에서는 잉글랜드가 생존할 수 있지만 하나일 경우에는 생존할 수 없을 것이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65

헨리 8세 때 잉글랜드 국교회를 수립하면서 몰수한 수도원 재산이 해군 확장 기금으로 사용되었듯, 영국혁명 기간 중 해군 기금의 대부분은 몰수된 왕당파의 토지에서 나왔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69

해군의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항해법Navigation Act 제정이었다(1651). 항해법은 당시 네덜란드 사람들이 무역을 독점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크롬웰 정부가 그들로부터 무역을 빼앗아 오려는 목적에서 추진한 중상주의적인 보호무역 정책이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70

결국 프랑스와 스페인이 한 국왕 밑에서 통일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게 만든 위트레흐트조약(1713)은 영국이 이 전쟁의 진정한 승자임을 보여주었다.*
 
*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중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병합하여 정식으로 영국, 즉 브리튼 연합 왕국이 탄생했다. 박지향, 『클래식 영국사』(김영사, 2012) 참조.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77

18세기를 통해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은 제해권을 둘러싸고 승부 겨루기를 했는데, 그 절정은 프랑스혁명 전쟁과 나폴레옹전쟁의 격동기(1793∼1815)였다. 이 겨루기에서 영국 해군은 압승을 거두었다. 누구보다도 결정적인 공을 남긴 인물은 말할 것도 없이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이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80

넬슨과 트라팔가르 해전은 영국 해군의 불패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으며 나폴레옹전쟁이 종결된 세상에서 영국은 어느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세상의 패권자였다. 그리고 영국 해군은 1920년대 미국 해군이 전함 수에서 그들을 앞설 때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94

그것은 정복자 로마인들 수가 원주민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5세기에 로마가 떠나고 앵글로색슨 시대에 들어서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잉글랜드의 왕권은 앵글로색슨의 전사들 무리와 더불어 시작되었는데, 5세기경 대륙으로부터 브리튼섬을 침략해 들어온 앵글로색슨 부족들은 9세기까지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군웅할거의 양상을 띠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제는 심리적 안정감이 높은 것보다 이를 통제할 규율이 없다는 데 있다.

-알라딘 eBook <두려움 없는 조직 : 심리적 안정감은 어떻게 조직의 학습, 혁신, 성장을 일으키는가> (에이미 에드먼슨 지음, 최윤영 옮김) 중에서 - P222

심리적 안정감은 결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오늘날 기업이 성공하는 데 필요한 요소 중 하나다. 앞서도 말했듯이 심리적 안정감은 구성원의 동기나 자신감, 다양성과 같은 여러 가지 요소가 좀 더 원활하게 작동해 성공적인 결과를 낳는 데 바탕이 된다. 요컨대, 심리적 안정감은 기업의 성공 요인(구성원의 역량, 진실성, 생각의 다양성 등)이 좀 더 효과적으로 발현되도록 돕는 매개체다.

-알라딘 eBook <두려움 없는 조직 : 심리적 안정감은 어떻게 조직의 학습, 혁신, 성장을 일으키는가> (에이미 에드먼슨 지음, 최윤영 옮김) 중에서 - P224

효과적인 조직 운영을 위해서는 적절한 규칙이 필요하다.

-알라딘 eBook <두려움 없는 조직 : 심리적 안정감은 어떻게 조직의 학습, 혁신, 성장을 일으키는가> (에이미 에드먼슨 지음, 최윤영 옮김) 중에서 - P225

따라서 리더가 반드시 수행해야 할 역할은 개개인이 특정 산업이나 조직 안에서 업무 효율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어느 정도의 투명성을 실현해야 좋을지 분명히 파악하는 일이다.

-알라딘 eBook <두려움 없는 조직 : 심리적 안정감은 어떻게 조직의 학습, 혁신, 성장을 일으키는가> (에이미 에드먼슨 지음, 최윤영 옮김) 중에서 - P227

좋은 질문을 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질문하기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진심 어린 호기심이 생겨날 때, 혹은 누군가에게 의견을 전달하고 싶을 때 비로소 좋은 질문이 나온다. 그리고 이 질문은 대답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질문함으로써 상대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기회를 제공하는 셈이다. 특히 질문이 특정 개인을 향하는 경우, 일종의 작은 안전지대가 확보된다. 질문하는 행위 자체가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다’는 의미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즉, 질문을 통해 다른 사람이 자기 생각과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안전지대를 제공해야 한다. 이와 함께 질문을 받는 쪽에서는 질문자의 의견을 먼저 귀 기울여 듣고, 관심 있게 반응하며, 적절하게 대답해주면서 심리적 안정감을 구축할 수 있다.

-알라딘 eBook <두려움 없는 조직 : 심리적 안정감은 어떻게 조직의 학습, 혁신, 성장을 일으키는가> (에이미 에드먼슨 지음, 최윤영 옮김) 중에서 - P228

조직 구성원의 호의도가 ‘평균’ 정도라고 가정했을 때, 자신의 약점을 고백하거나 진심으로 관심을 표현하면 그 정도는 ‘평균 이상’이 된다.

-알라딘 eBook <두려움 없는 조직 : 심리적 안정감은 어떻게 조직의 학습, 혁신, 성장을 일으키는가> (에이미 에드먼슨 지음, 최윤영 옮김) 중에서 - P231

리더에게 주어진 역할은 구성원이 최선을 다해 일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고 이를 키워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과정에 기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순간만큼은 ‘리더’였다고 인정해줘야 마땅하다.

-알라딘 eBook <두려움 없는 조직 : 심리적 안정감은 어떻게 조직의 학습, 혁신, 성장을 일으키는가> (에이미 에드먼슨 지음, 최윤영 옮김) 중에서 - P231

Q. 심리적 안정감과 다양성, 포용성, 소속감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A. 이 질문의 답은 이미 질문에 포함돼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직 구성원의 포용성과 소속감이 두드러진 조직일수록 심리적으로 안전하다.

-알라딘 eBook <두려움 없는 조직 : 심리적 안정감은 어떻게 조직의 학습, 혁신, 성장을 일으키는가> (에이미 에드먼슨 지음, 최윤영 옮김) 중에서 - P231

다양성과 포용성, 소속감 이 세 가지는 오늘날 거의 모든 기업에서 추구하는 성취 목표다.
다양성은 다소 객관적인 성질의 목표인 반면 소속감은 매우 주관적인 성질의 목표다.
한편 포용성은 그 중간쯤에 있어, 심리적 안정감이 보장된 여건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그래야만 다양한 의견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두려움 없는 조직 : 심리적 안정감은 어떻게 조직의 학습, 혁신, 성장을 일으키는가> (에이미 에드먼슨 지음, 최윤영 옮김) 중에서 - P232

두려움 없는 조직은 구성원의 포용성과 소속감을 증진해 다양성이 제공하는 혜택을 누리게 한다.

-알라딘 eBook <두려움 없는 조직 : 심리적 안정감은 어떻게 조직의 학습, 혁신, 성장을 일으키는가> (에이미 에드먼슨 지음, 최윤영 옮김) 중에서 - P233

건강한 조직이 가진 두 가지 특징인 ‘문제 제기’와 ‘경청’은 조직의 전문성과 완전성을 더욱 강화한다.

-알라딘 eBook <두려움 없는 조직 : 심리적 안정감은 어떻게 조직의 학습, 혁신, 성장을 일으키는가> (에이미 에드먼슨 지음, 최윤영 옮김) 중에서 - P234

첫째, 위에서도 말했지만 당신의 의견이 생각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할 수 있다. 이런 경우라면 동료들에게 피드백을 받아보라. 조직 구성원은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는 존재다. 내가 제안한 생각과 행동에서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학습하는 기회로 삼으면 된다.

-알라딘 eBook <두려움 없는 조직 : 심리적 안정감은 어떻게 조직의 학습, 혁신, 성장을 일으키는가> (에이미 에드먼슨 지음, 최윤영 옮김) 중에서 - P239

두 번째 가능성은 지금 당신의 업무가 개인적인 가치와 목표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걸 주변 동료나 조직의 반응을 살피며 알아채는 거다. 조직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진지하게 표현했는데도 주변에서 무시하거나 폄하하며 냉담하게 반응한다면, 당신의 제안 가치를 진심으로 인정해주는 동료가 있는 곳으로 떠나면 된다.

-알라딘 eBook <두려움 없는 조직 : 심리적 안정감은 어떻게 조직의 학습, 혁신, 성장을 일으키는가> (에이미 에드먼슨 지음, 최윤영 옮김) 중에서 - P2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러나 아무리 기술이 발달했더라도 인간의 의지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대항해 시대는 금에 대한 욕망, 하나님 말씀의 전파라는 강한 의지에 덧붙여 기술 발전이 결합한 결과였다.
‘하나님, 대포, 배’가 유럽 문명의 세 기둥이 되었던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34

섬나라이기 때문에 영국의 대외적 팽창은 바다를 통해 달성되어야 했다. 그 사실이 명확히 인식된 것은 튜더 시대(1485∼1603)에 들어서면서였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30

헨리 7세(재위 1485∼1509)의 즉위는 영국 해상력의 역사에서 첫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튜더 왕조의 왕들은 섬나라 잉글랜드의 운명은 결국 바다에, 그것도 먼바다로의 진출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튜더 왕조는 돛을 만드는 데 필요한 아마와 대마의 재배를 장려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35

그러나 해군의 진정한 시작은 헨리 8세(재위 1509∼1547)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헨리 8세는 아버지보다 활발하게 선박 건조 장려금을 시행하고, 해군 보유 선박 수를 84척으로 크게 늘렸으며, 왕궁이 있는 그리니치 가까운 곳에 조선소를 건설했다. 나아가 왕은 함선과 해군 정비창의 관리 업무를 담당할 해군위원회Navy Board를 창설하여 제도적 영속성을 부여했다. 어떤 사람들은 해군에 속한 배의 선장으로 활동하면서 일생을 보냈는데, 이는 전문적인 해군 장교 부대의 시초였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37

엘리자베스 시대를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것은 뛰어난 바다 사나이들의 등장이었다. 프란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2?∼1596), 월터 롤리(Walter Raleigh, 1554∼1618) 등 해상의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이때 등장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41

이때 등장한 바다 사나이들은 사실 일종의 해적이었는데, 사략선을 이용한 해적 행위는 그 시대 해상 전투의 특징적인 형태였다. 사략선 업자는 정부와 계약을 맺고 약탈 면허장을 얻어 전시에 적선을 공격할 권리를 허가받은 민간업자들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41

바다 사나이들이 사략 행위에 몰려든 이유는 무엇보다도 전리품과 전리 분배금을 받을 기회 때문이지만 사략 행위가 주는 재미와 자극도 무시할 수 없었다.
1587년에 드레이크가 나포한 산 펠리페 호에 실린 화물과 금은보화의 가치는 자그마치 11만 파운드가 넘었다.
이런 위험한 활동을 통해 얻는 이익은 국가 수입 전체의 10~15퍼센트에 이르렀는데, 그 덕분에 자본 공급이 늘고 해운이 성장했으며 무역에서 발생하는 손실을 메우고도 남았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