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진리를 인식하는 중요한 방법으로 ‘실천’이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146/364p)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양재혁 옮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돌베개, 1992, 109쪽의 번역문을 조금 다듬었다.
(149/364p)
요약하면, 감성적 인식과 이성적 인식의 과정을 통해서 어떤 이론이 도출되고, 그러한 이론이 실천을 통해 검증되는 끊임없는 과정, 곧 이론과 실천의 무한한 변증법적 과정이 인간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죠. (151-152/364p)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진리란 인간이 절대로 파악할 수 없는 피안彼岸의 세계에 존재한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상대적 진리란 절대적 진리의 일부 측면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론과 실천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 우리는 절대적 진리를 조금씩 더 알게 되는 것이지요. (157/364p)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160/352p)
이렇게 사회의 구성원이 함께 공유하게 되는 의식을 ‘사회적 의식’이라고 합니다. 사회 구성원의 상당수가 ‘사회적 의식’을 공유하게 되는 까닭은 그들이 놓인 환경이 같기 때문입니다. (164/352p)
역사 유물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양한 변수들 가운데 역사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요인을 찾아내서, 거기서 출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입니다. (179/352p)
생산력 = 노동력 + 생산수단 생산수단 = 노동대상(원료) + 노동수단(기계) (182,184/352p)
생산관계란, 인간 사회에서 생산 활동이 이루어질 때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를 말합니다. Ex.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사회 (184/352p)
생산양식 = 생산력 + 생산관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역사 발전을 낳는다. (192/352p)
자본가 계급이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려면 더 많은 토지와 노동자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봉건적인 지주-농노 생산관계가 자신들의 이익을 가로막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생산력과 낡은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입니다. 상공업의 발달로 나타난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전과 기존의 봉건적인 생산관계 사이에 모순이 빚어진 것이지요. (194-195/352p)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에는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는 통일되어 존재하지만, 그 사이에 언제든지 모순과 갈등으로 자라날 수 있는 씨앗을 품고 있지요.
생산력의 점진적인 양적 변화가 생산관계의 질적 변화로 전환된다? 바로 ‘양질 전화의 법칙’이죠.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로 바뀌는 시기를 우리는 역사에서 ‘혁명’이라고 부르지요.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내는 ‘혁명’을 낳습니다. 그래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은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되죠.
(199-200/352p)
마르크스는 이런 주기적인 공황이 일어나는 원인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에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으로 보았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私的 성격 사이의 모순’이라고 얘기하지요. (207/352p)
마르크스는 기업이 자본가의 사적인 이윤 추구 욕망에 따라 움직이고 전체 사회 차원에서 계획되지 않는 ‘생산의 무정부성無政府性’ 때문에 과잉생산에 따른 공황이 발생한다고 본 것입니다. (215/352p)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변화 발전을 거쳐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생산력의 사회적 성격이 생산관계의 사회적 성격과 맞아떨어져서 공황이라는 파괴적 현상이 없어지고, 자본가가 노동자를 저임금으로 착취하는 일도 없어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222-223/35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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