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우연적이고 단편적인 행동으로만 나타날 뿐이며 사고체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발생하면, 그 암묵적인 도그마가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되면, 그 논리적 결말로 수용소가 도출된다. 수용소는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다. (6p)

하지만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밤을새워 정성스레 준비했고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꾸렸다. 새벽이 되자 바람에 말리려고 널어둔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었다. 기저귀, 장난감, 쿠션, 그리고 그 밖에 그녀들이 기억해낸 물건들, 아기들이 늘 필요로 하는 수백 가지 자잘한 물건들도 빠지지 않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 (15p)

거기에서 그들은 밤새 기도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우리들은 삼삼오오 그들의 막사 앞으로 모여들었다. 생소한 비탄이 우리의 영혼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것은 땅을 갖지못한 민족의 오래된 아픔, 엑소더스에 대한 희망을 잃은 채 매 세기 반복되는 아픔이었다. (1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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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월마트 슈퍼센터에만 최대 14만 2천 품목의 상품이 널려 있다. 다 둘러보는 데만도 꽤 시간이 걸린다. 미국 전역에 3504개 월마트 지점이 있으니, 집집마다 차로 15분 거리에 하 나씩은 있는 셈이다. (21p)

싼값으로 이룬 아메리칸 드림이라 할까? 월마트로선 최저가 야말로 큰 돈벌이다. 미국 전역의 월마트 금전등록기에 매일 약
10억 달러(1.2조 원)가 들어온다. 미국 외 글로벌 지점 수입은 하루 2.5억 달러다. 2016년 월마트는 세계 시장 합산 4,810억 달러(570조 원)의 매출을 올렸다. 24시간 영업한다고 가정하면, 11분에 90만 달러(10억 원)씩 번 셈이다. (22p)

월마트의 대對 중국 거래액은 미국이 중국산 제품에 지출하는 총액의 10퍼센트를 넘게 차지한다. 로렌은 자신의 월급 중 일부인 달러를 지불함으로써, 싸구려 전자제품과 교환하는 글로벌 계약을 체결한 셈이다. 2015년 한해에만 4,830억 달러(566조 원) 상당의 상품이 중국에서 미국으로 흘러들어갔지만, 고작1160억 달러(136조 원)어치만 반대로 들어갔다. 최근 들어 엎치락뒤치락하긴 했지만, 3,670억 달러(430조 원)에 달하는 이러한 무역수지 적자는 역대 최대로, 월마트의 구매 습관이 여기에 일조했다고 하겠다. (25p)

흥미롭게도 샘 월튼은 먼 나라에서 수입한 상품으로 매장 진열대를 채움으로써, 외국에서 들여온 산업의 기풍을 오롯이 지켜내려 애쓰는 셈이다. 18세기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가 영국에서 만들어낸 그 기풍 말이다. (28p)

과거의 산업체는 가격 경쟁에 밀려 사라지고, 한때 거기서 일했던 사람들은 돈을 아끼기 위해 저가 소매업체에 의존한다. 역설적으로 다른 나라들로 더 싼 물건을 찾아다니는 월마트의 전략 탓에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정작 지갑을 여는 것은 선진국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인데, 그 돈은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아간 경쟁자에게 돌아가는 셈이다. 이런 역설의 위험을 지적 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34p)

1995년, 드디어 세계무역기구WTO가 탄생했다. 단순히 로고만 바뀐 게 아니다. GATT가 무역을 위한 규정을 만드는 데 치중했다면, WTO는 이미 정해진 규칙을 바탕으로 더욱 자유로운무역을 관리, 촉진, 감시한다. WTO는 회원국들이 규칙을 엄수하도록 강제력을 발휘한다. 회원 가입은 자발적이지만, 회원국은 꾸준히 증가했다. 2001년, 중국이 143번째로 가입했다.
WTO 회원국은 160개를 넘었다. 뉴스 헤드라인에는 주로 강대국만 거론되지만, WTO 회원국의 3/4 이상은 산업 발전 도상에 있는 저소득 국가들이다. 그들이 무역장벽 너머로 거래를 하도록 허용한다. 사실상 WTO는 개발도상국 발전을 지원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왔다. (41p)

주변 고층건물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9층짜리 건물.
첸팡 스트리트 32번지가 바로 이 건물 지번이다. 그러나 1949년설립된 중국 인민은행의 왜소한 겉모습은 눈속임에 불과하다. 보기와 달리, 이곳은 전 세계 수십억의 경제 운명을 좌우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53p)

결국 1980년대, 인민은행의 상업 금융 부문이 4개(중국공상은행ICBC, 중국건설은행CCB, 중국은행BOC, 중국농업은행ABC)로 분리됐다. 이들 전문은행들은 독립적으로 운영되기는 하지만, 여전히 국가 소유다.
(54p)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상의 얘기다.
중국에선 모든 달러를 중앙은행을 통해서만 거래해야 하기 때문에, 중앙은행이 쉽게 가격을 정할 수 있다.
중국은 오랜 동안 달러 가격을 인위적으로 높게, 위안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낮게 책정해왔다.
이렇게하면 위안화를 사는 데 필요한 달러는 줄어들고, 무역 용도로 달러를 사고자 하는 기업은 더 많은 위안화를 지불해야 한다.
중앙은행은 달러 당 위안화 환율을 높임(위안화 절하)으로써, 이런 일을 가능케 했다.
(59p)

세계 시장에서는 환율을 시장 상황에 맡기는 변동 환율제가 일반적이다. 변동 환율이 적용된 통화는 그 가치가 정해지는 외환시장에서 합법적으로 거래된다.
(60p)

중국이 이토록 오래 자국 통화를 강박적으로 통제해온 이유는 분명해졌다. 그동안 벌어들인 수조 달러에 달하는 외환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달러는 첸팡 스트리트 지하의 어디 매트리스 밑에 숨겨져 있는 게 아니다. 다름 아닌, 중국의 미래를위해 투자되었다. (64p)

국채는 안전한 선택이다. 정부는 채권을 발행해 부족한 세원을 벌충한다. 채권 매입은 일종의 대출이라고 보면 된다. 정부가 발행한 종이, 즉 채권을 사면 여기에 이자가 붙는다. 대출 기간이 만료되면 원금은 돌려받는다. 채권은 리스크가 적지만 수익률도 낮다.
정부는 대체로 돈을 잘 갚기 때문에, 지루하긴 하지만 안전한 선택이다.
(67p)

달러는 어떻게 최고의 화폐가 되었을까?
1944년 뉴햄프셔 산악지대의 한 호텔에서 그 일은 시작되었 다. 그곳에서 국제 금융 안정을 꾀하는 회의가 열렸는데, 지명을따서 브레턴우즈Bretton Woods 협정이라 부른다. 미국 관리들이 주도한 이 회의에서 달러는 세계 표준 준비통화로 지정됐다. (68p)

미국이 발행하는 달러 총액과 흐름을 감시하는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도 이때 설립됐다.
국제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시스템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 (69p)

경제 성장의 척도는 국내총생산Gross Domestic Product, GDP이다.
GDP 란 1년 동안 한 국가가 생산한 모든 물자의 총합이다.
국가 소유냐 개인 소유냐 관계없이 모든 곳에서 생산되는 것을합한다.
GDP를 측정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지출 총액 합산, 생산 총액 합산, 국민 수입 합산이 그것이다.
(73p)

중국 정부는 중국인들이 미국인들처럼 행동하길 원한다.
꼭 필요한 물건만이 아니라 사치를 부리는 데도 돈을 쓰길 말이다. 경제 성장을 견인하는 것은 그런 지출이다.
많은 중국 가계가 불가피한 지출까지 감당할 만큼 충분히 성장했다. 꺼내 쓸 거대한 비축고도 있다.
중국의 가계 총수입은 연간 약 5조 달러(5,900조원) 정도 된다.
(75p)

중국 정부와 국민의 마인드가 크게 변하면서 2016년 상반기에이르러 전체 성장 중 3/4가량이 내수를 통해 이뤄졌다. 미국에값싼 물건을 팔아치워 달러를 벌어들이려는 경쟁은 뒷전으로 밀린 듯 보인다.
(75p)

세계 무역을 연결하는 힘 있는 주체, 이는 중국에게 낯선 역할이 아니다. 2천여 년 전 중국 한나라 때 서역과 동양을 잇는 실크로드를 만든 그들 아닌가.
시진핑 주석은 중국의 힘을 굳건히 하기 위한 뉴 실크로드 전략, 이른바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청사진을공개했다. 그는 평화와 포용, 자유무역의 길을 개척하고, 구시대적 무역전쟁을 혁파하고 새로운 형태의 경제외교를 도입하기 위한 것이라 주장한다. (7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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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가 자신의 일에 쏟아붓는 무소불위의 공정함으로 인해서 우리 시민들에게 평등 의식을 고취시켰을 수도 있었겠으나, 이와는 반대로 극단적이고 만성화된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사람들 마음속에 부당하다는 감정만을 더욱더 첨예하게 만들었다. 물론 죽음이라는 빈틈없는 평등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그것은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
(468/667p)

타루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하지만 가장 나쁜 것은 그들이 잊힌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을 알던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들을 잊어버렸는데,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말하자면, 그들을 수용소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단계를 밟느라 고생을 해야 했기에 마찬가지로 그들을 잊어버렸다. 수용소에서 끄집어내는 일에 급급하다 보니 정작 끄집어낼 사람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 역시 당연한 일이다. (476/667p)

그 오랜 세월 동안, 마음을 다 바쳐 페스트와 투쟁한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오랜 세월 동안 내가 끊임없이 페스트를 앓아 왔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내가 수천 명의 죽음에 간접적으로나마 동의했었다는 것, 숙명적으로 그런 죽음을 야기했던 행동들과 원칙들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함으로써 그 죽음을 부추겼다는 것을 알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런 것으로 마음 상해 하거나, 적어도 스스럼없이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절대로 없어요. 한데 나는 그야말로 슬픔에 목이 메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혼자였던 거죠.
(499/667p)

시간이 흐르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은 사람들조차 누군가를 죽이거나 누군가가 죽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으며, 그 이유는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섭리가 이미 그렇기 때문이고, 누군가를 죽도록 만드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몸 한 번 움직이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502/667p)

그래서 나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상관없이, 좋은 이유에서건 나쁜 이유에서건 상관없이, 사람을 죽이거나 또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죽이는 상황을 정당화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503/667p)

단언하건대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그렇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나는 인생 만사를 두루 알고 있지요) 각자 자신 안에 페스트를 가지고 있다는 건데, 왜냐하면 실제로 아무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무사하지 않으니까요. 또한 잠시 방심한 사이에 다른 사람 낯짝에 대고 숨을 내뱉어서 그자에게 병균이 들러붙도록 만들지 않으려면 늘 자기 자신을 제대로 단속해야 한다는 겁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바로 병균이기 때문입니다.
(503-504/667p)

「그렇지만 말이죠, 나는 성인들보다는 패배자들에게 더 많은 연대 의식을 느낍니다. 나는 영웅주의라든가 성스러움 따위에는 취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이 된다는 겁니다.」
(509/667p)

성당들은 하느님을 향한 감사 기도보다 탄식으로 가득 채워졌다. 우중충하고 얼어붙어 버린 우리 도시에는 몇몇 아이들만이 아직 자신들이 어떤 위험에 직면해 있는지도 모르는 채 뛰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감히 그 아이들에게 인류의 고통만큼이나 오래되고 떠오르는 희망만큼이나 새로운 선물들을 한가득 짊어진 그 옛날의 신이 찾아오신다는 것을 감히 알려 주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는 너무나 늙고 기력을 다해 버린 희망, 사람들로 하여금 그냥 그대로 죽지도 못하게 만드는 희망, 그저 바보같이 끈질기기만 할 뿐인 그런 희망밖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519-520/667p)

리유는 울고 있는 그 노인이 바로 그 순간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았고, 자신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사랑이 없는 이 세상은 마치 죽은 세상과 다를 바 없으며 사람들은 감옥이니 노동이니 패기니 하는 것들에 지쳐 버린 나머지 어떤 존재의 얼굴을 구하고 그 온유함에 마치 처음으로 눈뜨듯 경탄의 마음을 간절히 원하는 때가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오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521/667p)

숨을 헐떡거리거나 허둥지둥 서둘러 대는 그 꼴을 보자니 전염병은 짜증과 싫증을 내며 스스로 와해되고 있는 것 같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력뿐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힘이었던 무지막지한 능력마저도 상실한 듯 보였다.
(535/667p)

따라서 모두가 기쁨에 환호하는 가운데 빈사의 고통과 환희의 중간 지점에서 이렇듯 막연한 기다림, 이렇듯 말없이 지새우는 밤이란 그들에게 더욱더 잔인한 것 같았다.
(543/667p)

머지않은 해방은 웃음과 눈물로 뒤범벅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545/667p)

노인의 경우 어떤 〈증거〉가 있다고 평가했다. 수첩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어쩌면 우리는 성스러움의 근사치까지만 도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겸손하고 자애로운 악마주의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른다.〉
(547/667p)

끝으로 낮이든 밤이든 한 인간이 비겁해지는 때가 있기 마련이며,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로지 그 순간뿐이라는 말을 대답 대신 적어 놓았다. 그의 기록은 거기에서 끝나 있다.
(558/667p)

의지력을 계속해서 굳건히 할 수도, 그것을 끊임없이 단련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보면 투쟁을 위해 버들가지 묶듯 한 다발 엮어 놓은 긴장감들이 폭발하듯 마침내 풀어 헤쳐진다는 것은 분명 하나의 행복이었다.
(559/667p)

사실상 리유의 유일한 임무란, 흔히 자극을 받고서야 비로소 움직이는 우연이라는 것에 기회를 줘보는 것뿐이었다. 바로 그 우연이 움직여야 했다. 왜냐하면 리유는 자신을 좌절시키는 페스트의 얼굴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 번 더 그것은 상대가 세운 전략들을 무력화시키는 데 열중하고 있었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 나타나는가 하면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듯 보였던 곳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시 한 번 더 그것은 뒤흔들어 놓느라 열심이었다.
(566/667p)

비가 그치자 방에는 침묵이 짙게 깔렸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전쟁의 소리 없는 소란만이 가득했다. 수면 부족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의사는 페스트가 기승을 부리던 내내 자신을 따라다니던 그 휘파람 소리가 부드럽게 규칙적으로 흐르며 적막의 마지막 경계선에서 들려오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568/667p)

페스트에서 해방된 밤이었다. 그리고 전염병은 추위, 햇빛 그리고 군중에게 쫓겨나 도시의 어둡고 후미진 구석에 간신히 몸을 피해 있다가 이 따뜻한 방으로 숨어 들어와 무기력한 타루의 몸에다 대고 최후의 공격을 퍼부어 대고 있었다.
(569/667p)

그와 너무나도 가까웠던 한 인간의 형상이 이렇게 창끝에 찔리고,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악의 불구덩이에서 불태워지고, 하늘이 내린 증오로 가득 찬 바람에 온몸이 꺾이고 휘어져 그가 보는 바로 앞에서 페스트라는 강물에 가라앉고 있었지만, 이 난파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빈손에 비통한 마음뿐, 무기도 없고 대책도 없이 또다시 이렇듯 참담한 패배 앞에서 그는 그저 강 저편에 그대로 있어야 했다. 그리고 결국엔 자신의 무기력을 한탄하는 눈물이 그만 앞을 가려 느닷없이 벽을 향해 몸을 돌린 타루가 자기 몸 안 어디선가 가장 중요한 현 하나가 툭 끊어지기라도 한 듯 공허한 신음 소리를 내며 숨을 거두는 모습도 바라보지 못하고 말았다.
(576/667p)

리유는 어머니의 생각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렇게 대단치 않거나, 아니면 적어도 하나의 사랑이란 그 표현을 찾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머니와 그는 언제나 말없이 서로를 사랑할 것이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그녀는 ─ 아니면 그는 ─ 살아 있는 내내 자신의 애정을 한 치도 드러내지 못한 채 죽을 것이다.
(579/667p)

그는 단지 페스트를 경험했고 추억한다는 사실을, 우정을 경험했고 추억한다는 사실을, 인간의 정을 알게 되었고 언젠가는 추억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얻었을 뿐이었다. 인간이 페스트와 인생이라는 싸움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과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뿐이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타루가 말한 바 있었던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580/667p)

생명의 온기와 죽음의 모습, 거기에 바로 배움이 있었다.
(581/667p)

서술자에게 남은 것이 있다면 비록 그 자신이 거기에 완전히 합류할 자유가 없는 사람들에 속하긴 했지만, 도시 문들이 열린 후 이어진 환희의 시간들을 기록하는 일이다.
(583/667p)

지난 몇 달 동안 페스트가 추상적인 차원으로 축소시켜 버렸던 그 사랑과 그 애정을 든든하게 지켜 주던 존재, 실재하는 바로 그 존재와 맞대면하는 순간을 랑베르는 온몸을 떨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586/667p)

각자 자신의 영혼을 등잔 심지처럼 조금만 빼놓은 채로 조심스럽게 지내 왔던 지난 몇 달 동안 비축해 두었던 생명력을 마치 자신들이 살아남은 기념일이 바로 오늘이라는 듯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591/667p)

죽음 앞에서 실현되지 못했던 평등이 해방의 환희 속에서 단 몇 시간이나마 이루어지고 있었다.
(591/667p)

인간을 살해하는 것이 파리들을 죽이는 것만큼이나 흔한 일이던 그 미쳐 버린 세상을, 분명히 드러난 그 야만성을, 철저히 계산된 그 광란을, 그 밖에는 모두 오로지 구역질 나는 자유뿐이던 현재라는 그 감옥을, 죽지 못해 살아가던 모두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던 그 죽음의 냄새를, 그들은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게 부정하고 있었고 그렇게 그들은 결국 자신이 얼이 빠져 살아가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의 일부는 매일매일 화장터 아궁이 앞에 쌓였다가 기름이 잔뜩 낀 연기로 사라져 버리고, 그러는 동안 다른 한 무리는 무력감과 공포의 사슬에 매여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593/667p)

그렇다. 페스트는 공포와 함께 끝났고, 그래서 서로 얽히고설킨 저 팔들은 페스트란 실제로 유배와 생이별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594/667p)

반대로 인간에게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들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무언가에 호소하던 모든 사람들은 어떤 대답도 얻지 못했다. 타루는 스스로도 말한 바 있었던 불가능한 그 평화에 도달한 듯 보였지만, 죽음 안에서, 그러니까 평화가 그에게 아무런 쓸모도 없어져 버리고 난 뒤에야 비로소 평화를 찾았다.
(599/667p)

그래서 리유는 그랑과 코타르가 살고 있는 거리로 접어들면서 인간만으로,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잘것없으나 경이로운 사랑만으로 충분한 사람들에게는 이따금씩 기쁨이라는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600/6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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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닙니다.」 랑베르가 말했다. 「저는 이곳에서 제가 늘 이방인이고 여러분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겪을 만큼 겪고 보니 제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제가 여기 사람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411/667p)

바로 그런 어린아이 하나가 마치 창자를 물려뜯기기라도 하는 듯 가냘픈 신음 소리를 내면서 다시 한 번 자기 몸을 구부렸다. 그렇게 한참을 웅크리고 있다가 자신의 홀쭉한 몸뚱아리가 휘몰아치는 페스트의 광풍에 접히고 뜨거운 숨을 계속 내쉴 때마다 찢어지기라도 한다는 듯 오한과 경련으로 몸을 떨었다. 돌풍이 지나고 나자 몸이 잠시 축 늘어졌고, 신열이 물러가는 듯 축축하고 독을 품은 모래사장 위에 거친 숨을 내쉬는 아이는 내처졌는데, 그곳에서의 휴식이란 이미 죽음을 닮아 있었다. 다시 한 번 타는 듯한 신열이 파도처럼 세 번째로 밀려들어 아이를 잠시 들어 올리자 아이는 몸을 움츠렸고, 자신을 태워 버릴 듯 타오르는 무시무시한 불길에 그만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가 담요를 걷어차며 미친 듯이 머리를 뒤흔들어 댔다. 눈꺼풀 밑에서 굵은 눈물이 방울방울 솟아 나와 납빛 얼굴로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한고비가 지나자 기진맥진해진 아이는 뼈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다리와 꼬박 이틀 동안 살이 다 녹아내린 것 같은 두 팔에 경련을 일으키며 난장판이 되어 버린 침대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듯한 괴이한 자세를 취했다.
(422/667p)

오직 그 어린아이만이 온 힘을 다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따금씩 리유는 딱히 필요해서라기보다는 무력한 부동의 자세에서 벗어날 요량으로 아이의 맥을 짚어 보곤 했는데, 눈을 감고 있으면 아이의 그 불안한 맥박이 솟구쳐 오르는 자신의 피와 뒤섞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면 고통받는 아이와 하나가 되는 것 같았고, 아직 남아 있는 모든 힘을 아이에게 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서로 다른 그들의 심장 박동은 잠시 하나로 모였다가도 어긋나 버렸고, 어린아이는 그만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가녀린 아이의 손목을 제자리에 놔두고 자기 위치로 돌아왔다.
(424/667p)

바로 그때 아이가 처음으로 눈을 떠 자기 앞에 있는 리유를 바라보았다. 잿빛 진흙을 뒤집어쓰고 이제는 완전히 굳어 버린 듯한 그 얼굴의 움푹 파인 곳에서 입이 열리더니, 기다릴 사이도 없이 외마디 비명이, 호흡으로 생기는 미묘한 변화도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와 일순 병실 전체를 단조롭고도 음이 맞지 않는 저항으로 가득 채웠다. 그 비명은 도무지 사람이 내는 소리 같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오히려 모든 인간들에게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비명 같았다.
(426/667p)

그런데 갑자기 다른 환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의사는 순간적으로 아이의 비명 소리가 작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비명 소리는 서서히 작아지더니 급기야 뚝 그쳐 버리고 말았다. 아이 주변으로 신음 소리가, 이번에는 나지막하게 그리고 마치 지금 막 결판이 난 그 전투의 아득한 메아리와도 같이 다시 일어나고 있었다. 전투가 끝났기 때문이었다. 카스텔은 침대 반대편으로 가더니 이제 다 끝났다고 말했다. 아이는 입을 벌린 채 그러나 말없이, 갑자기 몸은 더 왜소해 보이고 얼굴 여기저기에 눈물 자국을 남긴 채로 흐트러진 시트의 옴폭 파인 곳에서 움직임이 없었다.
(427/667p)

가슴을 짓이기는 듯한 지독한 응어리를 풀어 버리기 위해 계속해서 소리를 내지르고 싶었다. 더운 열기가 무화과나무 가지들 사이로 천천히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파란 아침 하늘이 희끄무레한 얼룩 같은 것으로 순식간에 뒤덮여 대기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리유는 벤치에 털퍼덕 앉았다. 나뭇가지들이며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숨을 고르며 조금씩 자신의 피로감을 삼키고 있었다.
(429/667p)

「그게 바로 제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겁니다. 저도 압니다. 하지만 지금 신부님과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군요. 우리는 신을 모욕하는 말이건 신에게 올리는 기도건 모든 것을 뛰어넘어서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그 무언가를 위해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뿐입니다.」
(430-431/667p)

리유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인간의 구원이란 제게는 너무나 거창한 말이에요. 전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건 인간의 건강입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건강이죠.」

(431/6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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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든 영향을 미친다.
탈러thaler 홍은 달러daler는 16세기 보헤미아에서 처음 사용된 은화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영어 달러dollar로 변형된 이름은 셰익스피어의 소설 《맥베스》에도 등장한다. 달러는 스페인 정복자들과 함께 대안화폐로 신대륙에 진출했고, 멕시코 광산에서 채굴한 은으로 만든 주화 형태로 유통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독립한 미국인들은 1792년 영국 파운드 대신 달러를 미국의 공식 통화로 채택한다. (8p)

이제 우리는 달러의 뒤를 따라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그 힘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달러가 유로, 루피, 파운드 등 여러 통화로 바뀌는 동안, 세계 경제의 모든 측면을 구성하는 ‘거래의 본질‘이 무엇인지 꿰뚫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 세계가 어떻게 돌아 가는지, 누가 권력을 쥐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미치는지 배우게 될 것이다. (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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