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가 자신의 일에 쏟아붓는 무소불위의 공정함으로 인해서 우리 시민들에게 평등 의식을 고취시켰을 수도 있었겠으나, 이와는 반대로 극단적이고 만성화된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사람들 마음속에 부당하다는 감정만을 더욱더 첨예하게 만들었다. 물론 죽음이라는 빈틈없는 평등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그것은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 (468/667p)
타루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하지만 가장 나쁜 것은 그들이 잊힌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을 알던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들을 잊어버렸는데,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말하자면, 그들을 수용소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단계를 밟느라 고생을 해야 했기에 마찬가지로 그들을 잊어버렸다. 수용소에서 끄집어내는 일에 급급하다 보니 정작 끄집어낼 사람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 역시 당연한 일이다. (476/667p)
그 오랜 세월 동안, 마음을 다 바쳐 페스트와 투쟁한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오랜 세월 동안 내가 끊임없이 페스트를 앓아 왔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내가 수천 명의 죽음에 간접적으로나마 동의했었다는 것, 숙명적으로 그런 죽음을 야기했던 행동들과 원칙들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함으로써 그 죽음을 부추겼다는 것을 알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런 것으로 마음 상해 하거나, 적어도 스스럼없이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절대로 없어요. 한데 나는 그야말로 슬픔에 목이 메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혼자였던 거죠. (499/667p)
시간이 흐르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은 사람들조차 누군가를 죽이거나 누군가가 죽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으며, 그 이유는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섭리가 이미 그렇기 때문이고, 누군가를 죽도록 만드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몸 한 번 움직이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502/667p)
그래서 나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상관없이, 좋은 이유에서건 나쁜 이유에서건 상관없이, 사람을 죽이거나 또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죽이는 상황을 정당화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503/667p)
단언하건대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그렇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나는 인생 만사를 두루 알고 있지요) 각자 자신 안에 페스트를 가지고 있다는 건데, 왜냐하면 실제로 아무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무사하지 않으니까요. 또한 잠시 방심한 사이에 다른 사람 낯짝에 대고 숨을 내뱉어서 그자에게 병균이 들러붙도록 만들지 않으려면 늘 자기 자신을 제대로 단속해야 한다는 겁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바로 병균이기 때문입니다. (503-504/667p)
「그렇지만 말이죠, 나는 성인들보다는 패배자들에게 더 많은 연대 의식을 느낍니다. 나는 영웅주의라든가 성스러움 따위에는 취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이 된다는 겁니다.」 (509/667p)
성당들은 하느님을 향한 감사 기도보다 탄식으로 가득 채워졌다. 우중충하고 얼어붙어 버린 우리 도시에는 몇몇 아이들만이 아직 자신들이 어떤 위험에 직면해 있는지도 모르는 채 뛰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감히 그 아이들에게 인류의 고통만큼이나 오래되고 떠오르는 희망만큼이나 새로운 선물들을 한가득 짊어진 그 옛날의 신이 찾아오신다는 것을 감히 알려 주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는 너무나 늙고 기력을 다해 버린 희망, 사람들로 하여금 그냥 그대로 죽지도 못하게 만드는 희망, 그저 바보같이 끈질기기만 할 뿐인 그런 희망밖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519-520/667p)
리유는 울고 있는 그 노인이 바로 그 순간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았고, 자신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사랑이 없는 이 세상은 마치 죽은 세상과 다를 바 없으며 사람들은 감옥이니 노동이니 패기니 하는 것들에 지쳐 버린 나머지 어떤 존재의 얼굴을 구하고 그 온유함에 마치 처음으로 눈뜨듯 경탄의 마음을 간절히 원하는 때가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오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521/667p)
숨을 헐떡거리거나 허둥지둥 서둘러 대는 그 꼴을 보자니 전염병은 짜증과 싫증을 내며 스스로 와해되고 있는 것 같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력뿐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힘이었던 무지막지한 능력마저도 상실한 듯 보였다. (535/667p)
따라서 모두가 기쁨에 환호하는 가운데 빈사의 고통과 환희의 중간 지점에서 이렇듯 막연한 기다림, 이렇듯 말없이 지새우는 밤이란 그들에게 더욱더 잔인한 것 같았다. (543/667p)
머지않은 해방은 웃음과 눈물로 뒤범벅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545/667p)
노인의 경우 어떤 〈증거〉가 있다고 평가했다. 수첩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어쩌면 우리는 성스러움의 근사치까지만 도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겸손하고 자애로운 악마주의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른다.〉 (547/667p)
끝으로 낮이든 밤이든 한 인간이 비겁해지는 때가 있기 마련이며,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로지 그 순간뿐이라는 말을 대답 대신 적어 놓았다. 그의 기록은 거기에서 끝나 있다. (558/667p)
의지력을 계속해서 굳건히 할 수도, 그것을 끊임없이 단련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보면 투쟁을 위해 버들가지 묶듯 한 다발 엮어 놓은 긴장감들이 폭발하듯 마침내 풀어 헤쳐진다는 것은 분명 하나의 행복이었다. (559/667p)
사실상 리유의 유일한 임무란, 흔히 자극을 받고서야 비로소 움직이는 우연이라는 것에 기회를 줘보는 것뿐이었다. 바로 그 우연이 움직여야 했다. 왜냐하면 리유는 자신을 좌절시키는 페스트의 얼굴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 번 더 그것은 상대가 세운 전략들을 무력화시키는 데 열중하고 있었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 나타나는가 하면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듯 보였던 곳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시 한 번 더 그것은 뒤흔들어 놓느라 열심이었다. (566/667p)
비가 그치자 방에는 침묵이 짙게 깔렸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전쟁의 소리 없는 소란만이 가득했다. 수면 부족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의사는 페스트가 기승을 부리던 내내 자신을 따라다니던 그 휘파람 소리가 부드럽게 규칙적으로 흐르며 적막의 마지막 경계선에서 들려오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568/667p)
페스트에서 해방된 밤이었다. 그리고 전염병은 추위, 햇빛 그리고 군중에게 쫓겨나 도시의 어둡고 후미진 구석에 간신히 몸을 피해 있다가 이 따뜻한 방으로 숨어 들어와 무기력한 타루의 몸에다 대고 최후의 공격을 퍼부어 대고 있었다. (569/667p)
그와 너무나도 가까웠던 한 인간의 형상이 이렇게 창끝에 찔리고,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악의 불구덩이에서 불태워지고, 하늘이 내린 증오로 가득 찬 바람에 온몸이 꺾이고 휘어져 그가 보는 바로 앞에서 페스트라는 강물에 가라앉고 있었지만, 이 난파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빈손에 비통한 마음뿐, 무기도 없고 대책도 없이 또다시 이렇듯 참담한 패배 앞에서 그는 그저 강 저편에 그대로 있어야 했다. 그리고 결국엔 자신의 무기력을 한탄하는 눈물이 그만 앞을 가려 느닷없이 벽을 향해 몸을 돌린 타루가 자기 몸 안 어디선가 가장 중요한 현 하나가 툭 끊어지기라도 한 듯 공허한 신음 소리를 내며 숨을 거두는 모습도 바라보지 못하고 말았다. (576/667p)
리유는 어머니의 생각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렇게 대단치 않거나, 아니면 적어도 하나의 사랑이란 그 표현을 찾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머니와 그는 언제나 말없이 서로를 사랑할 것이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그녀는 ─ 아니면 그는 ─ 살아 있는 내내 자신의 애정을 한 치도 드러내지 못한 채 죽을 것이다. (579/667p)
그는 단지 페스트를 경험했고 추억한다는 사실을, 우정을 경험했고 추억한다는 사실을, 인간의 정을 알게 되었고 언젠가는 추억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얻었을 뿐이었다. 인간이 페스트와 인생이라는 싸움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과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뿐이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타루가 말한 바 있었던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580/667p)
생명의 온기와 죽음의 모습, 거기에 바로 배움이 있었다. (581/667p)
서술자에게 남은 것이 있다면 비록 그 자신이 거기에 완전히 합류할 자유가 없는 사람들에 속하긴 했지만, 도시 문들이 열린 후 이어진 환희의 시간들을 기록하는 일이다. (583/667p)
지난 몇 달 동안 페스트가 추상적인 차원으로 축소시켜 버렸던 그 사랑과 그 애정을 든든하게 지켜 주던 존재, 실재하는 바로 그 존재와 맞대면하는 순간을 랑베르는 온몸을 떨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586/667p)
각자 자신의 영혼을 등잔 심지처럼 조금만 빼놓은 채로 조심스럽게 지내 왔던 지난 몇 달 동안 비축해 두었던 생명력을 마치 자신들이 살아남은 기념일이 바로 오늘이라는 듯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591/667p)
죽음 앞에서 실현되지 못했던 평등이 해방의 환희 속에서 단 몇 시간이나마 이루어지고 있었다. (591/667p)
인간을 살해하는 것이 파리들을 죽이는 것만큼이나 흔한 일이던 그 미쳐 버린 세상을, 분명히 드러난 그 야만성을, 철저히 계산된 그 광란을, 그 밖에는 모두 오로지 구역질 나는 자유뿐이던 현재라는 그 감옥을, 죽지 못해 살아가던 모두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던 그 죽음의 냄새를, 그들은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게 부정하고 있었고 그렇게 그들은 결국 자신이 얼이 빠져 살아가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의 일부는 매일매일 화장터 아궁이 앞에 쌓였다가 기름이 잔뜩 낀 연기로 사라져 버리고, 그러는 동안 다른 한 무리는 무력감과 공포의 사슬에 매여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593/667p)
그렇다. 페스트는 공포와 함께 끝났고, 그래서 서로 얽히고설킨 저 팔들은 페스트란 실제로 유배와 생이별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594/667p)
반대로 인간에게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들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무언가에 호소하던 모든 사람들은 어떤 대답도 얻지 못했다. 타루는 스스로도 말한 바 있었던 불가능한 그 평화에 도달한 듯 보였지만, 죽음 안에서, 그러니까 평화가 그에게 아무런 쓸모도 없어져 버리고 난 뒤에야 비로소 평화를 찾았다. (599/667p)
그래서 리유는 그랑과 코타르가 살고 있는 거리로 접어들면서 인간만으로,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잘것없으나 경이로운 사랑만으로 충분한 사람들에게는 이따금씩 기쁨이라는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600/6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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