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類)는 자기의 개적 현실(個的 現實)의 불균형에 대한 하나의 결과로서 자기 속에 생겨나는 것이며, 자기와 같은 종류의 다른 개체 속에 자기를 결합시킴으로써 자기 자신의 감정을 발견하고, 자기를 보완(補完)하고, 또 그렇게함으로써 유(類)를 자기의 본성 속에 포함시켜 그 유를 존재로 이끌어가려는 욕망으로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이 교접(交接)이다."
(자연철학(自然哲學)〉 제 3부 369 장)
좀더 나아가면 이렇게 씌어져 있다.
"그과정은 다음과 같다. 즉 양자(兩者)의 자연의 모습, 다시 말해 유일한 유, 하나의 같은 주체적 생명이라는 것, 그것을 또 양자는 이와 같이 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헤겔은 계속해서, 양성 접근의 과정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선 양성의 차이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밝히고있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거기에는 온갖 사물 속에서 삼단 논법의 3요소를 찾아내려는 그의 선입관이 지나치게 작용한것 같다.
종(種)을 향한 개체의 초월은, 그에 의해서 개체와 종이 각각 참된 완성을 이룩한다해도 그것이 제3단계 없이 번식자와 그 자식과의 단순한 관계 속에서도 실현될 것임에 틀림없다.
곧 번식은 무성(無性)일 수도 있다. 혹은 또 양성을 가진 종(種)의 경우처럼, 분화(分化)는 동일형(同一型)의 개체의 특이성 속에 존재할 뿐이고, 번식자와 그자식과의 관계는 두 동류(同類)의 관계일 수도 있다.
헤겔의 설명은 성의 중요한 의미를 이끌어 내고 있지만, 그의 오류는 언제나 의미를 이유로 착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들이 수행해 가는 모든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나가는 것처럼, 성적 활동을 통해 양성과 그 상호간의 관계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성적 활동은 인간 본성 속에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 P36
사르트르는 <존재(存在)와 무(無)> 속에서 인간의 현실은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죽음에 바쳐지고 있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을 비판하고 있다.
즉 사르트르는 이렇게 증명하고 있다.
유한하지만 시간적으로 무한한 그런 실존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에 죽음이 있지 않다면 세계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전복되어, 그 결과 ‘인간은 죽는 것이다’의 정의는 경험적 진실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될 것이다. 죽지 않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그것을 인간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 숙명의 본질적인 특징의 하나는 일시적인 생명의 활동이 그 전후에서 무한한 과거와 미래를창조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種)의 영속화(永續化)라는 것은 개체의 한계라는 것과 상관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번식의 현상은 존재론적으로 근거가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종(種)의 존속이 곧 성의 분화(分化)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대신 성의 분화가 존재를 구체적으로 밝히도록 존재자에 의하여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괜찮은 일이다.
그러나 역시육체 없는 의식(意識)이나, 죽지 않는 인간은 엄밀히 말해서 여전히 생각될 수 없으나, 한편 단성 생식(單性生殖)으로 번식되는 사회나 혹은양성을 갖춘 자들로 구성된 사회는 상상할 수 있다. - P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