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가호가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자, 갑시다!」 내가 일어서며 소리쳤다.
「하느님뿐만 아니라 악마도!」 조르바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39

그러나 때로 나는 연민에 휩싸였다. 형이상학적인 삼단 논법의 결론만큼이나 차가운 불교적 자비심 같은 것이었다. 인간만을 향한 자비심이 아니라, 발버둥치고 울고 소리치고 소망하며 만사 무상(無常)의 허깨비임을 알지 못하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향한 자비심이었다.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42

그래요, 아주 잘 지냈지요. 그런데 악마가 훼방을 시작했습니다. 크레타에 혁명이 일어난 거예요.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52

이해하다니 뭘? 내가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인이라고 부르는 것, 악행이라고 부르는 것도 세계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는 필요한 것이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57

「그 길고 긴 이야기를 꼭 해야 하는 거요?」 조르바의 말투가 퉁명스러워졌다. 「보세요, 내 말씀드립지요만, 이 세상은 수수께끼, 인간이란 야만스러운 짐승에 지나지 않아요. 야수이면서도 신이기도 하지요.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60

하나의 정열에서 풀려나와 다른 더 고상한 정열의 지배를 받는 것. 그러나 이 역시 예속의 한 형태가 아닌가? 이상을 위하여, 종족을 위하여,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한다? 우리의 지향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더 길어지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훨씬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의 한계에 이르지 않은 채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자유일까?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61

붓다의 노래가 내가 선 대지에서 솟아나 내 존재의 심연으로 들어왔다. 〈내 언제면 혼자, 친구도 없이, 기쁨과 슬픔도 없이, 오직 만사가 꿈이라는 신성한 확신 하나에만 의지한 채 고독에 들 수 있을까? 언제면 욕망을 털고 누더기 하나만으로 산속에 묻힐 수 있을까? 언제면 내 육신은 단지 병이며 죄악이며 늙음이며 죽음이란 확신을 얻고 두려움 없이 숲으로 은거할 수 있을까. 언제면, 오, 언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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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62

희끗희끗한 황갈색 머리카락에 키가 작고 몸집이 실팍한 여자가 안짱다리 걸음으로 아장거리며 포플러 밑을 걸어 나왔다. 턱에는 털까지 돋아난 점이 있었다. 목에는 붉은색이 짙은 벨벳 리본을 돌려 감고 있었고 쪼그라진 뺨에는 자줏빛 분 자국이 드러나 보였다. 조그만 머리 타래가 이마에서 찰랑거리는 품이 연극 「새끼 독수리」에 출연하던 만년의 사라 베르나르 같았다.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72

조르바는 뒤를 따르며 벌써 탐욕스러운 눈길로 뒷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가 속삭였다. 「두목, 저것 좀 보쇼. 저 잡년이 궁둥이 흔드는 것 좀 봐요, 삐뚤빼뚤! 꼬랑지에 기름이 잔뜩 오른 암양 같군그래!」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74

조르바는 실룩거리는 오르탕스 부인의 엉덩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수염만 쥐어뜯다가 갑자기 한숨을 쉬고는 웅얼거렸다

「하이고, 산다는 게 다 뭔지! 저 잡년이 끝내 사람 속을 뒤집어 놓네요.」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75

이윽고 내 가슴도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정체불명의 절박하고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가 내 내부에서 일었다. 나는 나를 소리쳐 부르는 존재가 누구인지 알았다. 혼자 있을 때면 어김없이 이 존재는 끔찍한 예감들과 견딜 수 없는 두려움과 격정에 사로잡혀 내가 해방해 주기만을 기다리며 내 안에서 울부짖었다.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80

나는 서둘러 내 길동무 단테를 폈다. 그 두려운 악마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80

수백 년 동안 단테의 시편은 시인의 조국에서 애송되어 왔다. 사랑의 노래가 소년 소녀에게 사랑을 준비하게 만드는 것처럼 이 뜨거운 피렌체 사람의 시구는 이탈리아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유의 날을 예비하게 했다. 대(代)를 이어 사람들은 시인의 혼과 대화를 나누었고 마침내 노예 생활을 자유로 바꾸어 왔다.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82

육체에는 영혼이란 게 있습니다. 그걸 가엾게 여겨야지요. 두목, 육체에 먹을 걸 좀 줘요. 뭘 좀 먹이셔야지. 아시겠어요? 육체란 짐 싣는 짐승과 같아요. 육체를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바닥에다 두목을 팽개치고 말 거라고요.」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83

나는 조용히 있었다. 두 갈래의 똑같이 험하고 가파른 길이 같은 봉우리로 이끌 수도 있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사는 거나, 금방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사는 것은 어쩌면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조르바가 물었을 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85

내 머릿속은 갓 쪄낸 육반처럼 김이 무럭무럭 납니다.
먼저 먹읍시다. 먼저 배를 채워 놓고 그다음에 생각해 봅시다.
모든 게 때가 있는 법이지요.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건 육반입니다.
우리 마음이 육반이 되게 해야 합니다.
내일이면 갈탄광이 우리 앞에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 마음은 갈탄광이 되어야 합니다.
어정쩡하다 보면 아무 짓도 못 하지요.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86

부인은 냄비를 들어다 우리 앞에 놓았다. 그러나 부인은 선 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접시가 세 개 놓인 걸 본 것이었다. 기쁜 나머지 얼굴이 빨개진 여자는 조르바를 바라보며 보랏빛 감도는 파란색 조그만 눈을 파르르 깜박였다.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89

우리는 영혼이라는 이름의 짐을 지고 다니는 육체라는 이름의 짐승을 실컷 먹이고 마른 목은 포도주로 축여 주었다.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90

영국 제독에게는 오드콜로뉴 냄새가 났고, 프랑스 제독은 바이올렛, 러시아 제독은 사향 냄새, 이탈리아 제독은, 아유, 그러니까 파촐리 냄새가 났어요. 세상에 그렇게 멋진 수염이 또 있을까.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95

「궐련을 끊게. 불을 붙여 반쯤 피우다 나머지를 내버리다니……. 담배에 대한 자네 사랑은 고작 1분간이야. 창피한 노릇이지. 파이프로 피우는 게 좋을 걸세. 충실한 마누라 같지. 자네가 집에 가면, 거기 조용히 자넬 기다리고 있거든. 불을 붙이고 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면, 내 생각이 날 걸세!」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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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 도시 피레에프스에서 조르바를 처음 만났다. 나는 그때 항구에서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밝기 직전인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북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시로코 바람이, 유리문을 닫았는데도 파도의 포말을 조그만 카페 안으로 날렸다. 카페 안은 발효시킨 샐비어술과 사람 냄새가 진동했다. 추운 날씨 탓에 사람들의 숨결은 김이 되어 유리창에 뽀얗게 서려 있었다. 밤을 거기에서 보낸 뱃사람 대여섯이 갈색 양피 리퍼 재킷 차림으로 앉아 커피나 샐비어 술을 들며 희끄무레한 창 저쪽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나운 물결에 놀란 물고기들은 아예 바다 깊숙이 몸을 숨기고 수면이 잔잔해질 때를 기다릴 즈음이었다. 카페에 북적거리고 있는 어부들은 폭풍이 자고 물고기들이 미끼를 쫓아 수면으로 올라올 때를 기다렸다. 서대, 놀래기, 홍어가 밤의 여로에서 돌아올 시각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날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11

사랑하는 친구와 서서히 헤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쓰라린 일인가! 단칼에 베듯 이별해 버리고서 고독 속에 남는 편이 훨씬 나으리라……. 고독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상태니까. 그러나 그 비 오던 새벽에 나는 친구를 놓아줄 수 없었다.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14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저 동방의 신성한 땅, 신들의 고향, 프로메테우스가 바위에 붙박인 채 울부짖던 높은 산을 생각했다. 우리 그리스 동포들이 바로 그 바위에 붙박힌 채 울부짖고 있었다. 그들은 또다시 위난에 처해, 그리스의 자손들을 향해 울부짖으며 구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호소를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마치 고통은 한갓 꿈이며, 인생은 재미있는 연극이어서 촌놈이나 바보만이 무대로 뛰어올라가 연기(演技)에 가담한다는 듯이…….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15

인간의 영혼은 육체라는 뻘 속에 갇혀 있어서 무디고 둔한 것이다. 영혼의 지각 능력이란 조잡하고 불확실한 법이다. 그래서 영혼은 아무것도 분명하고 확실하게는 예견할 수 없다.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우리 이별은 얼마나 다른 것일 수 있었을까.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20

나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리비아와 마주 보는 크레타 해안에 폐광이 된 갈탄광 한 자리를 임차했다. 이제 책벌레 족속들과는 거리가 먼 노동자, 농부 같은 단순한 사람들과 새 삶을 살기로 한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22

나는 주머니에서 단테 문고판 ─ 내 여행의 동반자 ─ 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벽에 기대어 편안하게 앉았다. 나는 한순간 망설였다. 어디를 읽는다? 「지옥편」의 불타오르는 역청? 「연옥편」의 정화(淨化)하는 불길? 아니면 인간의 희망이 최고의 감정 기준이 되는 대목으로 바로 들어가? 나에겐 선택권이 있었다. 문고판 단테를 손에 들고 나는 자유를 즐겼다. 아침 일찍 고르는 단테의 시행이 하루 전체에 그 리듬을 부여하게 될 터였다.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25

「알렉시스 조르바. 내가 꺽다리인 데다 대가리가 납작 케이크처럼 생겨 먹어 〈빵집 가래 삽〉이라고 부르는 친구들도 있지요. 한때 볶은 호박씨를 팔고 다녔다고 해서 〈심심풀이〉 라고 부르는 치들도 있었고…… 또 〈흰곰팡이〉라는 별호도 있습니다. 이렇게 부르는 놈들 말로는, 내가 가는 곳마다 장난질을 쳐서 그렇답니다. 모든 게 개판이 된다고. 그 밖에도 별호가 많지만 그건 다음으로 미루기로 합시다…….」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30

그래, 알겠다. 조르바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母胎)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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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고 싶은 것은 써지지 않고 내가 쓰는 건 뒤죽박죽이죠.

-알라딘 eBook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안현주 옮김) 중에서 - P114

도서(倒敍) 추리소설. 범인을 미리 알려 주고 범행을 저지른 과정을 밝히는 방식. 1912년 오스틴 프리먼의 『노래하는 백골The Singing Bone』이란 작품에서 처음 선보였다.

-알라딘 eBook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안현주 옮김) 중에서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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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인 비평을 쓰면서 소위 지식인들을 만족시키는 데는 흥미가 없어요. 예술로서의 문학적 비평이란 오늘날 그 반경이 너무 좁고 독자도 너무 제한적이에요. 마치 시처럼

-알라딘 eBook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안현주 옮김) 중에서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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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회가 아니라 전혀 다른 것, 사상과 개성의 교단에 입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교단은 어떤 식으로든 틀림없이 지상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나는 내 친구가 그 교단의 대표나 사절일 거라고 생각했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131

그렇게 똑똑한 말들은 아무 가치가 없어. 아무 가치도 없다고. 다만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질 뿐이야.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죄악이야. 거북이처럼 완전히 자기 자신 속으로 기어 들어갈 수 있어야 해.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133

지금 이 모습이 실제의 데미안이었다. 돌로 만들어진 듯하고 아주 늙고 짐승 같고 돌 같고 아름다우면서도 차갑고 죽어 있으면서도 전례 없는 생명으로 비밀스럽게 넘치는 것 같았다. 그 고요한 공허, 그 창공과 별들의 공간, 그 고독한 죽음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135

책들은 종이였고 음악은 소음이었다. 가을의 나무에서 잎새들이 그런 식으로 떨어진다. 나무는 그걸 느끼지 못한다. 비나 햇살이나 서리가 나무를 타고 흘러내린다. 나무 안에서 생명은 가장 좁고 가장 내밀한 곳으로 서서히 옴츠러든다. 나무는 죽지 않는다. 나무는 기다린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137

나는 외부 세계에 철저히 무관심했으며, 오로지 내 안에 귀를 기울이고 내 깊은 마음속에서 금지된 어두운 물살이 출렁이는 소리를 듣는 것으로 몇 날 며칠을 보냈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141

그날 저녁은 내 기억에 무척 또렷이 남아 있다. 그 서늘하고 축축하고 밤늦은 시간에 흐릿하게 타오르는 가스등을 지나 기숙사를 향해 우리 둘이 걸음을 옮겼을 때. 나는 처음으로 술에 취해 있었다. 근사하지는 않았다. 몹시 고통스러웠지만, 거기엔 자극이나 달콤함 같은 뭔가가 있었다. 그것은 반항이고 무절제였으며 삶이고 정신이었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149

나는 그 패거리의 제일 나이 어린 축에 속했다. 하지만 마지못해 얼렁뚱땅 끼워 주는 꼬마가 아니라 술자리를 이끄는 주동자, 스타로 머지않아 자리 잡았다. 대담하게 술집을 찾아다니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나는 또다시 완전히 어둠의 세계, 악마의 편이 되었고 그 세계에서 멋진 녀석으로 통했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153

나는 고독해져서, 나와 어린 시절 사이에 에덴동산의 문을 그처럼 별로 우아하지 않게 닫아 버리는 운명을 짊어졌다. 파수꾼들이 닫힌 문을 냉혹한 빛을 발하며 지키고 있었다. 그것은 시작이었고, 나 자신을 향한 향수의 깨어남이었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157

내 인생이 장차 어떻게 되든 나는 아무 상관 없었다. 나만의 독특하고 별로 근사하지 못한 방식으로, 술집에 앉아 거드름을 피우며 세상과 싸웠다. 그것은 세상에 항의하는 내 방식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스스로를 망가뜨렸고, 이따금 그 상황을 이런 식으로 보았다. 세상이 나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세상이 나 같은 사람들에게 더 좋은 자리, 더 숭고한 임무를 제시하지 않는다면, 나 같은 사람들은 망가져야지 별수 있어. 그래 봤자 세상만 손해지.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158

가을에 알폰스 베크를 만났던 바로 그 공원에서의 일이었다. 가시나무 울타리가 초록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이른 봄, 한 소녀가 내 눈길을 끌었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161

바로 그 봄날 그 공원에서 나는 내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젊은 숙녀와 마주쳤다. 그녀는 키가 크고 늘씬했으며 우아한 옷차림에 영리한 소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눈에 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었고 내 상상력을 활발하게 자극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나보다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훨씬 더 성숙해 보였으며, 윤곽이 우아하고 뚜렷한 것이 벌써 숙녀 티가 났다. 하지만 얼굴에 오만하고 소년 같은 면이 어려 있었는데, 나는 그 점이 무척 좋았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162

갑자기 내 앞에 다시 하나의 영상이 나타났다. 연모해 마지않는 고귀한 영상. 아, 숭배하고 숭상하고 싶은 소망이 그 어떤 욕구나 충동보다도 더 깊고 격렬하게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베아트리체[5]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단테의 글을 읽은 적은 없었지만, 어떤 영국 그림에서 그녀를 보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그림의 사본 하나를 간직하고 있었다. 영국 라파엘 전파[6]풍의 소녀 그림이었는데, 팔다리가 무척 길고 몸이 늘씬했으며 얼굴이 갸름하고 두 손과 표정에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내 아름답고 젊은 아가씨는 그 그림 속의 모습과 똑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늘씬함과 소년 같은 면모를 보여 주었고 얼굴에 정신이나 영혼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162

그 모든 것들 대신에 나는 베아트리체의 영상이 있는 나의 제단을 세웠다. 나 자신을 베아트리체에게 바침으로써 곧 정신과 신들에게 바친 것이다. 나는 어두운 힘들에게서 빼낸 삶의 부분을 밝은 힘들에게 제물로 바쳤다. 이제 나의 목적은 쾌락이 아니라 순결이었고, 행복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정신성이었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165

내 새로운 신념을 표현하려고 새롭게 훈련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가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게 있던 영국의 베아트리체 그림이 그 소녀와 그리 많이 닮지 않은 상황에서 연유했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166

어떻게 이제야 그것을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데미안의 얼굴이었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171

자신도 완전히 괴짜였던 피스토리우스는 내게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과 용기를 갖도록 가르쳤다. 그는 나의 말, 나의 꿈, 나의 상상과 생각에서 항상 가치 있는 것을 찾아내었으며 항상 그것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진중하게 논평함으로써 내게 모범을 보여 주었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226

우리의 종교는 마치 종교가 아닌 듯이 행해지고 있어요. 마치 이성의 일인 양 굴고 있어요.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229

나는 자연이 던진 주사위였다. 불확실성을 향해, 어쩌면 새로움을 향해, 어쩌면 무(無)를 향해 던진 주사위. 태고의 깊이에서 던진 이 주사위를 작용하게 하고 그 의지를 내 안에서 느끼고 완전히 나의 의지로 만드는 것, 오로지 그것만이 나의 소명이었다. 오로지 그것만이!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266

하지만 나는 자유로웠고 온종일 나 자신을 위해 살았다. 교외의 낡은 집에서 조용히 호젓하게 지냈으며, 내 책상 위에는 니체의 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나는 니체와 함께 살며 그의 영혼의 고독을 느끼고 그를 끊임없이 몰아친 운명을 냄새 맡고 그와 더불어 괴로워하고, 또 그토록 냉엄하게 자신의 길을 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에 행복해했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276

세계의 껍데기를 힘차게 뚫고 나오는, 황금빛 새매 머리의 내 새.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290

나는 이 세상에서 그 여인을 알게 되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이마시고 그녀 가까이에서 숨을 쉴 수 있어서 더없이 행복했다. 그녀가 내게 어머니이던 연인이던 여신이던 내 곁에 있기만 하다면야! 내 길이 그녀의 길 가까이에 있기만 하다면야!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293

우리는 종종 생각과 대화를 통해 세상 한복판에서 살았다. 다만 다른 차원에서 살았을 뿐이다. 우리를 대다수 사람들과 갈라놓는 것은 어떤 경계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다른 방식이었다. 우리의 과제는 세상에 하나의 섬, 어쩌면 하나의 본보기를 제시하는 것, 어쨌든 다른 가능성을 예고하는 삶을 사는 것이었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300

우리는 깨어난 사람들 아니면 깨어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우리의 노력은 점점 더 완벽하게 깨어 있음을 지향하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 행복 추구는 자신들의 의견, 자신들의 이상과 의무, 자신들의 삶과 행복을 집단의 것에 점점 더 단단히 옭아매는 것을 지향했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301

현재의 유럽은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인류의 막강한 새로운 무기들을 만들어 냈지만, 결국 정신을 심각하게 황폐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유럽은 전 세계를 얻은 대가로 영혼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304

두려움과 증오심을 일깨우며 당시의 인류를 비좁은 목가적 삶으로부터 위험한 넓은 세상으로 몰고 가기 위한 표식이 카인에게 새겨져 있던 것처럼 말이지. 인류의 행로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은 모두, 예외 없이 모두 오로지 운명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고 그런 행적을 남길 수 있었어. 모세와 부처님도 그랬고,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도 그랬어. 누군가 어떤 흐름에 이바지하고 어떤 좌표에 의해 움직일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어.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306

「사랑을 간구해서는 안 돼요.」 그녀는 말했다. 「사랑을 요구해서도 안 돼요. 사랑은 자기 자신 안에서 확신에 이를 수 있는 힘을 갖추어야 해요. 그러면 사랑은 더 이상 상대에게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끌어당기지요. 싱클레어의 사랑은 내게 끌려오고 있어요. 그 사랑이 언젠가 나를 끌어당기면, 그때 가겠어요. 나는 선물을 주지 않아요. 나를 가져가 주길 원해요.」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311

관능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 현실과 상징이 서서히 중첩되었다. 그러다 내 방에서 조용히 간절하게 그녀를 생각하면, 그녀의 손이 내 손안에 있고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을 스치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또는 그녀 곁에 앉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녀가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되지 않는 순간들도 있었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313

그녀는 바다였고, 나는 물살이 되어 그 바다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녀는 별이었고, 나 자신도 별이 되어 그녀를 향해 갔다. 우리는 만나서 서로에게 이끌렸다고 느꼈으며 서로의 곁에 머물렀다. 가까이에서 소리를 내며 원을 그리고 환희에 차서 영원히 서로의 주변을 맴돌았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315

근원적인 감정들, 극히 사나운 감정들조차 적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잔혹한 행위는 내면의 발산, 내적으로 분열된 영혼의 발산에 지나지 않았다. 그 영혼은 미친 듯이 날뛰며 죽이고 파괴하고 죽어서 새로 태어나기를 원했다. 거대한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 힘겹게 싸웠으며, 그 알은 세계였고 세계는 산산이 부서져야 했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340

하지만 이따금 열쇠를 찾아서 나 자신 안으로 침잠하면, 운명의 형상들이 어두운 거울 속에서 잠들어 있는 곳으로 완전히 침잠하면, 검은 거울 위로 몸을 굽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나의 친구이면서 인도자인 그와 똑같은 모습이.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346

특히 1917년 프랑스의 베르됭과 솜 강변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무참하게 목숨을 잃은 후,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을 집필하기에 이른다. 그해 9월과 10월 사이 불과 몇 주 만에 스위스 베른에서 쓰인 이 소설은 예술적인 창작력과 정신 분석의 만남이 빚어낸 값진 결실이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348

싱클레어는 〈모든 인간의 삶은 저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고, 길을 가려는 시도이며, 하나의 좁은 길에 대한 암시〉라고 말한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354

나는 오직 내 마음속에서 절로
우러나오는 삶을 살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리 어려웠을까?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355

〈모든 인간의 삶은 저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고, 길을 가려는 시도이며, 하나의 좁은 길에 대한 암시〉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인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6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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