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 나는 더 이상 어머니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최선을 다해 어머니를 미워할 구실을 찾았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33
원치 않는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 그런 상황과 왜 마주하게 됐는지 반성하기보다 그 상황을 적으로 만드는 게 더 쉽고 빠른 해결책이니까.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33
어머니를 향한 연민보다 원망이 커질수록 괴로움의 크기도 줄어들었다. 나는 기일까지 일부러 무시하면서 어머니를 철저히 잊어버리기 위해 애를 썼다. 기일이 몇 차례 아무 일 없이 흘러간 이후, 어머니는 더 이상 내 꿈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34
내겐 스위스까지 날아갈 비행기 티켓 값이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데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죽음은 모두에게 평등하지만, 죽음에 이르는 과정까지 평등하지는 않았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36
남 좋은 일만 한 꼴이지만, 저 차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 몸속에는 과연 팔아먹을 만한 장기가 있기나 할까. 어쩌면 나는 저 망가진 차보다도 가치 없는 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41
1일이 새해 첫날이자 휴일이었으므로 자동이체는 오늘 중에 이뤄질 예정이었다. 사발면이 익는 동안 나는 편의점에 설치된 현금자동입출금기에서 카센터 사장이 송금한 100만 원을 포함한 잔액을 모두 인출해 지갑에 갈무리했다. 자동이체의 손길을 피해 조금이라도 현금을 많이 챙기는 게 수수료 1,200원을 지불하는 일보다 급했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42
고민 해결의 실마리가 돼준 것은 연구실에서 접한 모성애에 관한 다양한 연구 결과들이었다. 연구에 따르면 상당히 많은 여성이 자식에게 모성애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모성애 결핍을 느꼈지만, 자식이 자라는 동안에 모성애가 커진 여성도 많았다. 엄마도 사람이니 힘이 들면 스트레스를 받고, 자식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사람마다 인내심에 차이가 있으니, 엄마의 인내심에도 저마다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게 인간다움이란 게 경선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성애 결핍을 죄책감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아이와 함께 유대를 쌓는 시간을 가지면 모성애를 느낄 수 있는지 시험해보기로 했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66
어머니에게도 다른 삶을 살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생의 마지막에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꿈속에서 본 어머니의 모습은 내게 무거운 의문을 남겼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73
가족이 된 AI를 버리기는 어렵다는 경선의 말에 반발심이 일었다. 그렇다면 가족이나 다름없었던 유민은 왜 주저 없이 나를 버리고 떠났으며, 진짜 가족인 어머니는 왜 그토록 험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 오래도록 나를 괴롭힌다는 말인가.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76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선 디지털 사후세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미 죽은 사람도 훌륭한 사업 아이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씁쓸했다. 그런데도 나는 어머니를 AI로라도 다시 만나 자살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아니, 그 이유가 내가 아님을 확인받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류가 지구 위를 돌아다닌 이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후세계의 존재 여부를 알 수 없으므로, 내가 죽은 뒤에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나는 살아서 꼭 어머니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78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우울하고 경솔했으며, 과격하고 괴팍했다. 또한 소심하고 신경질적이었으며, 이기적이고 독선적이었다. 관대하기보다 옹졸했고, 게을렀으며 말이 많았다. 겸손한 성격이었는지 오만한 성격이었는지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대체로 냉정했지만 온후할 때는 더없이 온후했다. 한쪽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성격은 중립에 놓았다. 설정을 마쳐놓고 보니 내가 어머니를 너무 형편없는 사람으로 몰아붙인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80
퇴근 후 나는 귀가하자마자 노트북을 펼치고, 내가 아는 어머니에 관한 정보를 출생부터 사망까지 연대순으로 정리해봤다. 1959년생 돼지띠. 태어난 달은 여름인 7월이다. 이제 환갑이 노인 소리를 듣지 못하는 세상이니, 어머니는 지금 살아 있어도 할머니보다는 아줌마로 불렸을 것이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83
엄마. 내겐 쓰고 읽을 수는 있으나 부를 수는 없는 단어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85
어머니를 기록하는 과정은 내가 어머니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나 마찬가지였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87
어머니는 며칠 동안 나와 동생에게 세끼 모두 간장에 비빈 밥을 줬다. 반찬은커녕 김치도 없었다. 밥의 양도 점점 줄어들었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마가린을 밥에 함께 비벼줬지만, 나중에는 매 끼니 간장만 비빈 밥이 나왔다. 매를 맞을까 두려워 칭얼거리지 못했던 나는 참지 못하고 밥그릇을 엎으며 울었다. 어머니는 내 온몸에 매질하다가 함께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봤다. 놀란 나는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빌었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껴안으며 더 큰 소리로 울었다. 그 이후로 간장에 비빈 밥을 먹는 일은 없었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98
난 항상 우리 큰아들을 보면 미안하다. 화를 풀 곳이 없어서 큰아들을 너무 많이 때리고 마음고생을 시켰다. 큰아들을 생각하면 미안하고 불쌍하고 속상하다. 어렸을 때 많이 사랑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121
스무 살 혜진은 세상을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고 싶었던 어린 새였다. 어린 새는 날개를 채 펴기도 전에 붙잡혀 오랜 세월 새장 속에 갇혀 있었다. 어머니의 자살은 갑작스러운 충동에서 나온 선택도, 누군가를 미워해서 벌인 선택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삶에서 벗어나는 길을 선택했다. 어머니가 살면서 오직 자신만을 위해 결정한 처음이자 마지막 선택이었다. 온몸으로 새장과 부딪쳤던 어린 새는 죽음으로써 새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125
"지금까지 살면서 주변을 돌아보니까 그래요. 많은 사람이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대체로 인생의 허무함을 느껴요. 그런데 말이죠, 죽음이 자신과 가까워졌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태도는 조금 달라요. 죽기 전에 무언가를 자꾸 하려고 조바심을 내요. 낯선 곳을 여행하든, 그동안 못 만난 사람을 만나든, 맛있는 음식을 먹든."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129
서운했다. 내가 아버지 수술 소식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에게 뭔가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을 거라는 걸 잘 안다. 그래도 내게 수술 소식을 알려주는 게 그토록 어려웠던 걸까. 아버지에게 한마디를 하려다가 내 몸 상태를 알리지 않은 나 또한 아버지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자문하며 입을 닫았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136
나는 지금까지 강가에 서서 흘러내려오는 강물과 이미 흘러내려간 강물만 바라보다가 내 앞에 흐르는 강물을 지나쳐버리는 삶을 살아온 건 아닐까. 강이 수많은 지류와 만나듯, 사람도 살아가며 수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는다. 나는 나와 인연을 맺은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오랫동안 세월의 강물에서 느리게 흘러갈 수 있기를 바랐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222
"남편이요? 그런 사람 제 옆에서 없어진 지 오래예요." 수연은 오 년 전에 이혼하고 홀로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이혼 원인은 남편의 외도였다. 처음에는 남편을 용서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도 남편이 외도를 멈추지 않자 그녀도 더는 참지 않았다. "그대로 더 참았다가는 평생 마음고생을 하다가 화병으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빨리 이혼을 선택했어요. 그런 아빠와 같이 살면 아이 교육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 같아서. 대신 양육비는 꼬박꼬박 받아내고 있어요. 아이와 제게 최소한의 책임은 져야죠."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218
할미꽃이었다. 아직 봄이 오지도 않았는데 꽃이 피다니. 신기한 마음에 나는 쪼그려 앉아 꽃과 줄기를 덮은 하얀 솜털을 쓰다듬었다. 할미꽃처럼 등이 굽으며 늙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AI로 되살아난 어머니도 나와 함께 늙어갈 수 있을까. 나는 문득 오래 살아서 그런 미래가 가능한지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꿈에서 자장가를 불러주며 내 배를 쓰다듬던 어머니의 손길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랫배가 따뜻해졌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234
"굳이 만나서 감정 소모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살아보니까 미워하는 감정이 남아 있으면 이별해도 이별한 게 아니더라. 이별한 이유를 몰라도 제대로 이별한 게 아니고."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240
역사에 관한 평가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듯, 인간관계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재정립된다. 과거에 중요했던 관계가 현재는 그렇지 않을 수 있고, 현재 가벼워 보이는 관계가 미래에 돌아보면 인생을 바꾼 중요한 인연일 수도 있다. 내가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 떠난 여정은 과거의 어머니와 제대로 이별하는 동시에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유민과의 만남이 과거에 매몰돼 오랫동안 허우적거렸던 나를 현재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241
이유를 알 수 없는 후련함이 느껴졌다. 버스가 정류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버스카드가 들어 있는 지갑을 꺼냈다. 버스가 흙먼지를 몰고 오며 멈춰 섰다. 단 한 명의 승객도 없었다. 나는 버스 맨 뒤쪽 운전석 반대 방향 창가 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점점 속도를 냈다. 자리가 심하게 덜컹거렸지만, 창밖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이 마음을 들뜨게 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유민이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242
사실 작가 정진영이 이 작품에서 궁극적으로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주해야 할 현실의 문제인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이다. 따지고 보면, 경이로운 기술 혁신의 산물인 작고 편리한 휴대전화기가 일반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은 여전히 해결이 요원한 문제다.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타인과의 관계망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섬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모와 자식 사이의 대화의 단절은 핵가족 시대에도 여전하다. 아니, 더욱 심각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보면 주인공 범우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의 어머니 사이에 영상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설정한 작품의 구도 역시 바로 이 문제를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다루기 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247
"사랑해요, 엄마"보다 더 쉬운 말이 어디 있겠냐만, 그 말을 입에 올리기가 우리 시대의 자식들—적어도 소설의 주인공 범우 또래이거나 그보다 나이가 든 세대의 자식들—에게는 어찌 그리도 어려운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지극하지만 공연히 쑥스러워서 그 말을 쉽게 입에 올리지 못하는 인간들이 적어도 우리 세대의 자식들이 아닌지? 아니, 어머니의 삶과 마음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이에 아예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어머니는 지극히 당연한 현존재(現存在)—즉 과거가 없이 오로지 현재적으로만 ‘나’에게 의미를 갖는 존재—로 여기는 인간들이 우리 시대의 자식들이 아닐지? 범우가 그러하듯, "지금까지" "어머니와 이렇게 길게 대화를 나눴던 일이 있었던가"를 자문하며 "뒤늦은 후회"를 하는 존재들이 다름 아닌 우리 시대의 자식들이 아닐지? 혹시 자식들이란 어느 시대나 다 그런 존재들이 아닐지?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257
엉뚱하게도 나는 그 차를 보고 용기를 얻었다. 겉보기엔 폼이 나지만, 변속할 때마다 엔진에서 충격음과 함께 쇠가 갈리는 소리가 들리고 방음과 단열도 취약했던 차. 속 빈 강정 같은 모양새가 나를 닮아 쓴웃음이 흘러나오게 만들었던 차. 장기기증을 앞둔 뇌사자처럼 멀쩡한 부품은 다른 차의 부품으로 쓰인 뒤 폐차될 줄 알았던 차. 그 차가 더 말끔해진 모습으로 되살아나 새 주인을 만나 다시 도로를 달릴 수 있게 됐다. 카센터 사장은 중고차 판매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중요한 부품인 엔진과 미션을 일 년이나 무상 보증을 하겠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나도 저 차처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내게 자전거 캐리어를 중고로 팔았던 회원에게 문자메시지로 답했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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