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죽이는 것,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관찰하고, 감시하고, 숙고해야 한다, 아주 많이. 그리고 때를 보아 빈틈을 파고든다. 그렇다. 빈틈을 파고들어야 한다. 우주가 쪼그라들도록, 쪼그라들다 못해 총부리나 칼끝에 응집되도록 애를 써야 한다. 그게 전부다. 의문을 품지 말 것, 분노에 쓸려 가지 말 것, 매뉴얼을 선택할 것, 조직적으로 행동할 것. 블레이크는 이것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워낙 오래전부터 그래 왔기 때문에 언제부터 그렇게 됐는지조차 모른다. 나머지는 나중에, 그냥 저절로 할 수 있게 됐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6

살인, 그건 소명이 아니라 기질이다. 어떤 정신 상태라고 말해도 좋다. 블레이크는 열한 살이고 이름이 블레이크가 아니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7

재미있는 것은 기술적인 손놀림, 반복을 거듭해 물 샐 틈 없이 완벽해진 루틴이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8

그날 밤 블레이크는 블레이크를 만들어 낸다. 앤서니 홉킨스가 나오는 「레드 드래곤」을 보고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을 읽어 봤는데 마음에 드는 시가 한 편 있었기 때문이다. "위험한 세상으로 나는 뛰어들었지/무력하게, 벌거벗은 채, 빽빽 울면서/구름 속에 숨은 악마처럼." 게다가 블레이크는 블랙과 레이크, 검은색과 호수의 조합이다. 멋지지 않은가.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0

빅토르 미젤은 매력이 없지 않다. 각진 얼굴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인상이 유해졌다. 숱이 많은 머리칼, 매부리코, 가무잡잡한 피부는 카프카를 닮았다. 마흔을 넘기는 데 성공한, 좀 기운 넘치는 카프카랄까. 키와 체격이 크고, 장시간 앉아서 일하는 직업 탓에 살이 좀 붙긴 했어도 날씬한 편이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23

마흔세 살이 되기까지 작가로 십오 년을 살았지만, 문단이라는 좁은 바닥은 차표 없는 사기꾼들이 무능한 승무원들과 짜고 여봐란듯이 일등석을 차지한 우스꽝스러운 열차 같다. 겸손한 천재들은 플랫폼에 있다. 자신이 멸종해 가는 그 족속에 속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는 앙심을 품지 않았다. 마침내 마음 졸이지 않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23

미젤은 번역으로 먹고산다. 영어, 러시아어, 그리고 어렸을 때 할머니에게 배운 폴란드어까지. 블라디미르 오도옙스키, 니콜라이 레스코프, 그 외 일반 대중은 잘 읽지 않는 19세기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했다. 아무 일이나 받을 때도 있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24

문학을 미성년자를 위한 마이너 예술로 만드는 책들. 그 일은 명망 높거나 힘 있는 출판사들의 문을 열어 주었지만 정작 그 자신의 작품 원고는 그 출판사들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24

미젤은 아이가 없다. 그는 열정에 타격을 입지는 않은 채로 이 여자 저 여자를 전전하며 실패를 거듭해 왔다. 자주 거리를 두었고, 확신이 없었고, 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은 여자를 만난 적도 없다. 어쩌면 절대 그렇게 되지 않겠다 싶은 여자들만 만나 온 건지도.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25

이듬해, 그다음 해에도 그는 컨퍼런스에 갔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녀를 볼 수 있을까 싶어서 간 거다. 그때 이후로 — 직업적으로는 심각한 과오지만 — 그는 번역문에 애스콧 경마장이나 크렘 앙글레즈를 묘사하는 짧은 글을 슬쩍 끼워 넣곤 했다. 구레비치 선집에서부터 이 못된 짓이 시작되었다. 산문집 첫 장의 "Почему нужно дать женщинам все права и свободу?(왜 여성이 모든 자유와 권리를 누려야 하는가?)"라는 문장에 "자유는 초콜릿 케이크에 얹은 크렘 앙글레즈가 아니다. 그것은 권리다."라는 문장을 집어넣었다. 이목을 끌 만한 일은 아니었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27

그리고 아무 감흥 없는 목소리로 번역가의 역할은 "작품의 포로가 된 순수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겨 해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30

그는 파리에 돌아와 글쓰기에 돌입한다. 누가 불러 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쓰는 것처럼. 이 글쓰기의 통제 불가능한 메커니즘이 그를 깊은 불안에 빠뜨린다. 제목은 ‘아노말리’, 그의 일곱 번째 책이 될 것이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31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전부터 행동들이 나를 만들었지만, 어떤 움직임도 나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다. 내 몸은 내가 그리지도 않은 선들이 이끄는 대로 사는 데 만족했다. 우리는 가장 힘이 들지 않는 저항 곡선을 따라 살 뿐인데도 마치 공간을 지배하는 양 건방을 떤다. 한계 중의 한계. 어떤 비상(飛翔)도 우리의 하늘을 펼치지는 못하리."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31

"나는 내 존재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불멸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2021년 4월 22일 정오의 일이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33

어슴푸레한 새벽빛 속에서 각진 얼굴의 남자가 살그머니 침실 문을 연다. 그의 피곤한 눈길이 어렴풋이 보이는 침대에 가서 머문다. 한 여자가 거기 누워서 자고 있다. 삼 초짜리 컷이지만 뤼시 보게르가 보기엔 별로다. 너무 밝고, 너무 산만하고, 너무 정적이다. 촬영 감독이 졸면서 찍은 것 같다. 감마2)와 콘트라스트를 보정하고 배경의 그림을 좀 날려 줘야 한다는 메모를 특수 효과 팀에게 남긴다. 뱅상 카셀의 얼굴 주위로 프레임을 좁히고 살짝 줌 인으로 들어간다. 리듬감이 생기도록 장면 몇 개를 슬로 모션으로 처리한다. 뤼시에겐 일 분으로 충분하다. 됐다. 훨씬 낫다. 디테일에 대한 이런 감각, 이런 영화적 본능 덕분에 그녀는 많은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편집자가 되었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34

벽난로 위 커다란 거울에 훅 불면 날아갈 듯 소녀처럼 작고 가녀린 여자의 모습이 비친다. 창백한 피부, 섬세한 이목구비, 짧게 자른 갈색 머리칼. 우아한 그리스식 코에 얼룩무늬 뿔테 안경을 걸치면 대학생처럼 보인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35

하지만 그는 이미 말했다. 당신을 사랑해. 뤼시는 그 말을 경계한다. 그 말을 듣기엔 너무 이르다. 그녀가 사랑했던 다른 남자는 그 기만적인 말을 너무 자주, 너무 온당치 않게 사용했다. 그 남자는 그녀를 학대하고 모욕했다. 사라졌다가 돌아왔고, 그러다 또 잠수를 탔다. 그녀는 앙드레에게 말하고 싶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그녀의 고운 살결, 날씬한 다리, 창백한 입술, 그 행복의 기약 때문에 그녀를 원하는 남자들이 지겹다고. 사냥하듯 접근해 그녀를 트로피처럼 벽에 걸어 두고 싶어 하는 남자들이 지겹다고. 그녀는 충동적 욕망 이상을 누릴 자격이 있고, 누구의 노리개도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고 싶다고, 그래서 이렇게 그의 곁에 있는 거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그녀에게 시간을 주었기 때문에, 그녀가 그에게서 다정함을 느꼈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그녀를 존중해 주었기 때문에. 그녀도 그를 나이 많고 조용한 구애자 역할에서 구원해 줄 수 있기를 원한다. 칼처럼 자르든가, 완전히 항복하든가 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완고하고 때로는 잔인하리만치 무정하게 그를 대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점점 커져 가는 마음에 저항하는 데 그친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39

강제적인 구석 없이 관계가 천천히, 잔잔하게 흐르기를 바랐다. 남자의 갈망하는 손길은 겁이 난다. 남자들의 폭발하는 욕정을 마주하면 그녀 자신은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앙드레가 지금까지 잘 감춰 온 약점이 명백해진다. 아니다, 앙드레를 편안하게 달래 주는 여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의 압제적인 욕구에 맞춰 주고 싶지 않다. 나이 때문에 상처 입은 나르시시즘일지라도 그녀가 보듬어야 하는 건 싫다. 날 데려가 줘, 날 데려가 줘, 하며 애처롭게 쳐다보는 사육장의 강아지 같은 눈길도 이제 못 봐주겠다. 왜 그는 자기 품에, 침대에 그녀를 옭아매고 있다는 걸 알려 하지 않을까? 왜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일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 최소한의 의무감을 갖는 것에 그녀가 죄책감을 느껴야 하나?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42

그때 그가 작은 책 한 권을 내민다. 『아노말리』, 빅토르 미젤. 그 이름을 보니 뭔가 생각난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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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도통 남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사이였다. 누구의 험담을 하는 대신 우리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삶이 더 재밌을지, 그런 삶을 위해 지금 무얼 시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말과 생각을 나누는 데에 대부분 시간을 할애했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08

그러나 지금의 나는 H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지금은 비존재가 되었어도 나의 성장 과정에서 가장 커다랗게 존재하는 친구이기 때문이다. 꿈이 만발하던 시절의 꿈을 나누던 친구. H는 내겐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봄날 같은 친구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09

지금까지도 ‘현실 친구’들로 남은. 첫 번째 직장에서 만난 K는 엉뚱해서 좋았다. K는 늘 소소한 딴생각을 품으며 사는, 이를테면 ‘소심한 이단아’다. 쉽게 말해 일상이 무료해지는 걸 못 참는다. 회사 나갈 생각. 나가지 못하면 뭐라도 재밌는 걸 해볼 생각. 늘 그런 기발한 궁리들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조금만 만나지 않아도 도대체 뭘 생각하며 사는지 궁금해지는 그런 친구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0

주제도 모르고 큰 꿈만 꾸느라 잔구멍이 많던 내 삶은 K 덕분에 더 소소한 행복과 시시한 아름다움들로 가득 메워졌다. 지금도 우린 회사 때려치우고 뭘 할지를 궁리하다 ‘네가 먼저 안 그만두니까 나도 못 한다’며 서로를 탓하고, 인기 없는 팟캐스트도 3년째 같이 진행하며 ‘우린 재밌는데 왜 인기가 없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한다. 가끔 보고 싶다며. 술이나 마시자며.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0

누굴 훈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저 대화를 나누고 혼자 집에 돌아오면 나를 반성하게 하는 그런 친구. J의 백 마디 말속엔 99번의 공감과 한 번의 조심스러운 조언이 있다. 그 조언은 길게는 몇 년씩 내 가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곤 한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0

무엇보다 J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글 쓰고 싶다는 욕망이다. 담백하면서도 다 읽고 나면 행간의 여백을 오래 헤엄치게 만드는 J의 글은 내 질투심과 존경심을 동시에 자극했다. 그 자극이 마음속 어딘가에 씨앗을 뿌려 나는 지금도 이렇게 밭을 갈듯 글을 갈고 있는 것만 같다. 꾸준히 쓰다 보면 언젠가는 J처럼 깊고 우아한 사람이 될 것만 같아서.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1

이렇게 세 명의 여자사람친구 얘기를 꺼낸 이유는 단명하다. 그들이 내 친구라는 게 자랑스럽고 또 다행스럽기 때문이다. 이성사람친구가 있었기에 내가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세상의 영역들이 참 많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1

물론 애인도 만나봤지만, 사랑하는 사이(정확히 말해 성(性)을 나누는 사이)가 결코 메울 수 없는 ‘이성에 대한 공감’ 영역은 그들이 없었다면 텅 빈 채로 남아 있었을 테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1

어떤 집단에 대한 혐오감은 그 집단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즉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어린 친구’도 ‘이성사람친구’도 더 많이 사귀어야 한다고 믿는다. 보편적으로 나이가 들수록 생각은 굳기 마련이니까. 나와 다른 집단의 친구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삶을 간접 경험하는 일이야말로 딱딱하게 굳어가려는 편견 덩어리를 용해해줄 ‘생각유연제’가 될 터이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2

그래서 이미 오래된 친구인 저들은 내게 대체 불가능의 존재로 남았다. 그래서 참 다행이다. 내 일상에 그들이 이미 들어와 있어서.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있어줄 것 같아서. 나만 잘하면.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3

이렇게 지난날을 모아놓고 보니, 매해 뭘 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푸념만 하며 살아온 것만 같았다. ‘나이에 맞게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보편 지향의 삶에 왜 그리 스스로를 욱여넣고 살아왔을까.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매 나이마다 해야 할 일을 정해두고 그대로 살아내느라 정작 하고 싶은 걸 포기해버리는 패턴이 나이테처럼 폐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물론 정반대로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았다면 그 나이대에만 해볼 수 있는 것들을 놓쳤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험도 겪어봤어야 더 삶답지 않았을까.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23

늦었단 핑계로 내버렸던 꿈들을 내 손으로 다시 주워들이며 살고 싶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가장 원초적인 꿈이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마을을 만들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큰 빚을 내어 비어가는 동네의 작은 폐가를 샀다. 공유서재로 꾸며 책도 읽고 사람들을 불러 모을 거다. 나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사람이었다. 마흔다섯 살 즈음이 되면 영화 아카데미에 만학도로 지원해보려 한다. 일단 시나리오 쓰는 법부터 배우기 위해 책 한 권을 샀다. 그냥 살아지기엔 하고픈 게 너무 많은 삶이어왔다. 하나씩 해보려고 한다. 그 시간을 벌기 위해 일단 내년부터 긴 휴직에 들어간다. 더 이상 나이 핑계 대지 않을 거다. 살아지다 사라지고 싶지 않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24

"누군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냐’고 물어온다면, 내겐 올해야. 다시 살아가는 기분이거든. 다만 소망이 있다면 내년 이맘때쯤엔 ‘내년’이라고 답할 수 있기를. 늘 그런 삶이기를."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25

제 삶의 모양을 빼닮은 공간으로 차려놓아 그런지, 첫서재를 찾아주는 이들은 대개 저와 결이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딱히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골라 읽는 책에서, 차림새에서, 앉은 자세와 미지근한 눈빛에서, 떠난 뒷자리에서 그걸 느껴요. 그들 역시 저마다의 서투름을 여기 쌓아두고 돌아서는 듯합니다. 결이 닮은 사람과 정다운 무관심을 주고받고 내 손과 발이 닿는 범위에서 삶을 매만지는 하루. 이런 나날의 반복을 오래 꿈꿔 온 듯한 착각 속에서 평온하게 살고 있습니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28

다만 글쓰기가 저를 인도했다는 것만큼은 확신해요. 첫 글에서 썼듯이 저는 익숙함을 걷어내고 진짜 내 모습을 찾기로 어느 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정을 기록하거나 지난날을 돌아보는 글을 매주 일요일마다 꼬박꼬박 썼지요. 생각한 바를 쓰다 보니 쓴 대로 살고 싶다는 마음의 점성이 점차 늘었습니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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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과 책과 영화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들을 마주하며 흠모인지 질투인지 모를 감정을 끓였다. 닮고 싶어서, 넘고 싶어서.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5

더 잘나가기 위해 만나야 할 사람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부터 만나며 살기로 했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9

나는 쓰는 일을 멈춘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창피하든 자랑스럽든 그 찰나를 포집하는 일만큼은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미숙함은 언제나 가장 성숙한 글감이며, 불완전한 오늘을 삶의 좌표에 온전히 기록하는 일이야말로 먼 훗날의 나에게 건네는 최선의 유산일 테니까. 부디 미래의 내가 지금 이 책의 어느 대목을 보며 부끄러워하도록 한 치라도 더 자라고 성숙했으면 좋겠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11

H는 그 틈을 열어준 첫 ‘여사친’이다. 뽀뽀하고 싶지 않은데 늘 같이 있고 싶었다. 함께 길을 걷거나 전화 통화를 하고 나면 머리에 상쾌한 바람이 스미었다. H와 얘기하는 게 좋아서 그의 집까지 한 시간가량을 데려다주고 다시 한 시간 걸려 학교로 돌아온 적도 많았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08

우린 도통 남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사이였다. 누구의 험담을 하는 대신 우리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삶이 더 재밌을지, 그런 삶을 위해 지금 무얼 시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말과 생각을 나누는 데에 대부분 시간을 할애했다. 솔직히 말하면 H가 그런 사람이기에 내가 맞춰준 거였다. H와 함께 있으면 나도 그런 진취적인 사람 같아 보여서. 그러는 사이 나도, 아주 조금씩이나마 H를 닮아갔던 것도 같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08

스물일곱 살의 겨울, 한 달간 유럽 여행을 하면서 H가 머물던 그레노블에 들렀고 나흘간 함께 프랑스 남부 구석구석을 즐겁게 돌아다녔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09

누굴 훈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저 대화를 나누고 혼자 집에 돌아오면 나를 반성하게 하는 그런 친구. J의 백 마디 말속엔 99번의 공감과 한 번의 조심스러운 조언이 있다. 그 조언은 길게는 몇 년씩 내 가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곤 한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0

이렇게 세 명의 여자사람친구 얘기를 꺼낸 이유는 단명하다. 그들이 내 친구라는 게 자랑스럽고 또 다행스럽기 때문이다. 이성사람친구가 있었기에 내가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세상의 영역들이 참 많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1

어떤 집단에 대한 혐오감은 그 집단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즉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어린 친구’도 ‘이성사람친구’도 더 많이 사귀어야 한다고 믿는다. 보편적으로 나이가 들수록 생각은 굳기 마련이니까. 나와 다른 집단의 친구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삶을 간접 경험하는 일이야말로 딱딱하게 굳어가려는 편견 덩어리를 용해해줄 ‘생각유연제’가 될 터이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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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전역 군인의 자살률은 10만 명당 27.5명에 이른다.40 이는 2018년 미국 전체 인구 대비 평균 자살률(10만 명당14.2명)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다.41 같은 해 한국의 자살률은 10만 명 당 26.6명이었다.42 미국에서 자살 고위험군으로 분류되는 집단의 자살률과 한국 전체 인구의 자살률이 거의 비슷하다는 것은, 한국의 자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방증한다.

-알라딘 eBook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 (나종호 지음) 중에서 - P105

정신 건강 서비스로의 접근성을 높이는 일이 자살을 예방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항우울제 처방률은 최저 수준인 한국의 경우, 정신과 치료에 대한 낙인을 없애는 일이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알라딘 eBook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 (나종호 지음) 중에서 - P109

그들은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고 싶어서 병원을 찾는다. 자살에 실패해서 병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살을 다시 시도하지 못하도록 막아달라는 도움을 청하러 오는 것이다. 약물 과다 복용으로 실려 온 환자도, 스스로 손목을 칼로 그어서 온 환자도, 이렇게 말한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알라딘 eBook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 (나종호 지음) 중에서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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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태어났다는 재난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은 그 사실을 잊기 위해 분투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우리가 태어난 첫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공포가 미래에 투사된 것에 불과하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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