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도통 남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사이였다. 누구의 험담을 하는 대신 우리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삶이 더 재밌을지, 그런 삶을 위해 지금 무얼 시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말과 생각을 나누는 데에 대부분 시간을 할애했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08
그러나 지금의 나는 H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지금은 비존재가 되었어도 나의 성장 과정에서 가장 커다랗게 존재하는 친구이기 때문이다. 꿈이 만발하던 시절의 꿈을 나누던 친구. H는 내겐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봄날 같은 친구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09
지금까지도 ‘현실 친구’들로 남은. 첫 번째 직장에서 만난 K는 엉뚱해서 좋았다. K는 늘 소소한 딴생각을 품으며 사는, 이를테면 ‘소심한 이단아’다. 쉽게 말해 일상이 무료해지는 걸 못 참는다. 회사 나갈 생각. 나가지 못하면 뭐라도 재밌는 걸 해볼 생각. 늘 그런 기발한 궁리들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조금만 만나지 않아도 도대체 뭘 생각하며 사는지 궁금해지는 그런 친구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0
주제도 모르고 큰 꿈만 꾸느라 잔구멍이 많던 내 삶은 K 덕분에 더 소소한 행복과 시시한 아름다움들로 가득 메워졌다. 지금도 우린 회사 때려치우고 뭘 할지를 궁리하다 ‘네가 먼저 안 그만두니까 나도 못 한다’며 서로를 탓하고, 인기 없는 팟캐스트도 3년째 같이 진행하며 ‘우린 재밌는데 왜 인기가 없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한다. 가끔 보고 싶다며. 술이나 마시자며.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0
누굴 훈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저 대화를 나누고 혼자 집에 돌아오면 나를 반성하게 하는 그런 친구. J의 백 마디 말속엔 99번의 공감과 한 번의 조심스러운 조언이 있다. 그 조언은 길게는 몇 년씩 내 가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곤 한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0
무엇보다 J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글 쓰고 싶다는 욕망이다. 담백하면서도 다 읽고 나면 행간의 여백을 오래 헤엄치게 만드는 J의 글은 내 질투심과 존경심을 동시에 자극했다. 그 자극이 마음속 어딘가에 씨앗을 뿌려 나는 지금도 이렇게 밭을 갈듯 글을 갈고 있는 것만 같다. 꾸준히 쓰다 보면 언젠가는 J처럼 깊고 우아한 사람이 될 것만 같아서.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1
이렇게 세 명의 여자사람친구 얘기를 꺼낸 이유는 단명하다. 그들이 내 친구라는 게 자랑스럽고 또 다행스럽기 때문이다. 이성사람친구가 있었기에 내가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세상의 영역들이 참 많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1
물론 애인도 만나봤지만, 사랑하는 사이(정확히 말해 성(性)을 나누는 사이)가 결코 메울 수 없는 ‘이성에 대한 공감’ 영역은 그들이 없었다면 텅 빈 채로 남아 있었을 테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1
어떤 집단에 대한 혐오감은 그 집단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즉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어린 친구’도 ‘이성사람친구’도 더 많이 사귀어야 한다고 믿는다. 보편적으로 나이가 들수록 생각은 굳기 마련이니까. 나와 다른 집단의 친구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삶을 간접 경험하는 일이야말로 딱딱하게 굳어가려는 편견 덩어리를 용해해줄 ‘생각유연제’가 될 터이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2
그래서 이미 오래된 친구인 저들은 내게 대체 불가능의 존재로 남았다. 그래서 참 다행이다. 내 일상에 그들이 이미 들어와 있어서.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있어줄 것 같아서. 나만 잘하면.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3
이렇게 지난날을 모아놓고 보니, 매해 뭘 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푸념만 하며 살아온 것만 같았다. ‘나이에 맞게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보편 지향의 삶에 왜 그리 스스로를 욱여넣고 살아왔을까.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매 나이마다 해야 할 일을 정해두고 그대로 살아내느라 정작 하고 싶은 걸 포기해버리는 패턴이 나이테처럼 폐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물론 정반대로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았다면 그 나이대에만 해볼 수 있는 것들을 놓쳤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험도 겪어봤어야 더 삶답지 않았을까.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23
늦었단 핑계로 내버렸던 꿈들을 내 손으로 다시 주워들이며 살고 싶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가장 원초적인 꿈이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마을을 만들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큰 빚을 내어 비어가는 동네의 작은 폐가를 샀다. 공유서재로 꾸며 책도 읽고 사람들을 불러 모을 거다. 나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사람이었다. 마흔다섯 살 즈음이 되면 영화 아카데미에 만학도로 지원해보려 한다. 일단 시나리오 쓰는 법부터 배우기 위해 책 한 권을 샀다. 그냥 살아지기엔 하고픈 게 너무 많은 삶이어왔다. 하나씩 해보려고 한다. 그 시간을 벌기 위해 일단 내년부터 긴 휴직에 들어간다. 더 이상 나이 핑계 대지 않을 거다. 살아지다 사라지고 싶지 않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24
"누군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냐’고 물어온다면, 내겐 올해야. 다시 살아가는 기분이거든. 다만 소망이 있다면 내년 이맘때쯤엔 ‘내년’이라고 답할 수 있기를. 늘 그런 삶이기를."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25
제 삶의 모양을 빼닮은 공간으로 차려놓아 그런지, 첫서재를 찾아주는 이들은 대개 저와 결이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딱히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골라 읽는 책에서, 차림새에서, 앉은 자세와 미지근한 눈빛에서, 떠난 뒷자리에서 그걸 느껴요. 그들 역시 저마다의 서투름을 여기 쌓아두고 돌아서는 듯합니다. 결이 닮은 사람과 정다운 무관심을 주고받고 내 손과 발이 닿는 범위에서 삶을 매만지는 하루. 이런 나날의 반복을 오래 꿈꿔 온 듯한 착각 속에서 평온하게 살고 있습니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28
다만 글쓰기가 저를 인도했다는 것만큼은 확신해요. 첫 글에서 썼듯이 저는 익숙함을 걷어내고 진짜 내 모습을 찾기로 어느 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정을 기록하거나 지난날을 돌아보는 글을 매주 일요일마다 꼬박꼬박 썼지요. 생각한 바를 쓰다 보니 쓴 대로 살고 싶다는 마음의 점성이 점차 늘었습니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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