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나는 깨달았다. ‘이번에는 다를 거야’라고 믿을 때마다 그것은 예전과 똑같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장담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 <본즈 앤 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6288 - P71

그날 밤에 나는 세상에 두 가지 허기가 있다는 걸 배웠다. 첫 번째 허기는 치즈버거와 초콜릿 우유로 채울 수 있지만 두 번째 허기는 내 안에서 때를 기다린다. 몇 달, 심지어는 몇 년이고 미룰 수 있어도 언젠가 난 거기에 굴복할 것이다. 마치 내 안에 거대한 구멍이 있고, 일단 그 구멍이 어떤 사람의 형태를 갖추면 오로지 그 사람만이 구멍을 채울 수 있는 듯했다. - <본즈 앤 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6288 - P93

소매를 걷어 올린 빨간색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나이 든 남자였는데 — 그래도 하먼 부인보다는 젊었다 — 딱히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바라보지도 않는 듯했다. 버스가 지나가자 그는 차창을 올려다보며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 승객들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나를 찾고 있었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 순간 위쪽 절반이 비스듬하게 잘려 나간 그의 한쪽 귀가 눈에 들어왔다. 귀 때문에 남자는 길고양이 같아 보였다. 나는 자리에 앉은 채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날 계속 바라보더니 버스가 모퉁이를 돌자 손을 들었다. - <본즈 앤 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6288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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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난 믿기지 않아, 엄마가 이런다는 게. 엄마는 어디 데이트하러 나가지도 않잖아. 하물며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한 주씩이나 보내러 가다니. 그 사람이 도끼 살인마인지 뭔지 모르잖아."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306

"그 사람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사람은 아니잖아. 그 사람은 내 시를 좋아했어. 그래서 자기 책을 스페인어로 번역해달라고 했던 거고. 그러면서 몇 년 동안 편지도 교환하고 전화 통화도 했잖니. 우리는 공통점이 많아. 그 사람도 홀로 네 아들을 키웠어. 나는 원예를 좋아하고 그 사람은 농장을 갖고 있고. 난 초대를 받아 우쭐한 기분이야……. 그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사람인데."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306

"너 그래서 그러는구나. 이 엄마가, 아니 50대 여자가 남자랑 잘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쨌든 그 사람은 ‘우리 바람이나 피웁시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 그냥 그랬지. ‘우리 농장에 한 주 다녀가시는 건 어때요? 블루보닛이 만발하기 시작했어요. 내 새 책 원고를 보여드릴 수도 있어요. 낚시도 하고 숲으로 산책도 나가고.’ 닉, 나 좀 봐줘라. 엄마는 오클랜드 카운티 도심의 병원에서 일하잖아. 한 주 동안 숲속을 거닐 생각을 하는 엄마 기분이 어떻겠어? 게다가 블루보닛! 이 엄마한텐 천국일 거야."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307

그녀의 존 외삼촌처럼 콧소리 섞인 남부 특유의 느린 말투로 계속 개인적인 질문을 던졌다. 텍사스는 어떻게 알아요? 그 옛날 노래를 어떻게 알아요? 이혼은 언제 했어요? 아들들은 어때요? 술은 왜 안 마셔요? 왜 알코올중독이 되었었죠? 왜 다른 사람들의 책을 번역해요? 곤란하고 괴로운 질문들이었지만, 그렇게 관심을 받으니 마사지를 받는 것처럼 위로가 되었다.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308

그녀는 소음이 없는 도시를 보니 어린 시절, 다른 시대가 생각났다. 사이렌 소리도, 교통 소음도, 라디오 소리도 없었다. 말파리가 유리창에 부딪치며 윙윙거렸다. 가위질 소리. 두 남자의 대화 리듬. 더러운 리본을 휘날리는 선풍기 바람에 오래된 잡지책이 바스락거렸다. 이발사는 그녀를 못 본 척했다. 무례해서가 아니라 예의 때문이었다.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309

"오클랜드에서라면 지금 뭘 하실 시간이에요?" 그가 트럭에 타면서 물었다. 오늘은 소아과에서 일하는 날이었다. 코카인 중독자가 낳은 아기들, 총상 입은 아이들, 에이즈에 감염된 아기들. 탈장과 종기. 대부분 자포자기 상태의 성난 빈민들 상처를 돌보는 일이었다.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310

"이 계절, 우리 집에 가는 길. 이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픽업트럭은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길을 따라 달렸다. 아무도 없는 그 길은 꽃이 무성하고 공기가 향기로웠다. 분홍, 파랑, 자홍, 빨강. 그 가운데 노란색과 연보라색 꽃들이 흐드러졌다. 향기롭고 더운 바람이 차 안에 가득했다. 엄청난 뇌운이 형성되면서 천지가 노란빛에 휩싸였다. 이 빛을 받은 꽃들이 아득히 이어지며 무지갯빛 광휘를 발했다. 종달새, 들종달새, 붉은깃찌르레기가 길 옆 수로 위로 쏜살같이 날아다녔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트럭 엔진 소리보다 높았다. 마리아는 창턱에 팔뚝을 대고 습한 머리를 내밀어 얼굴을 괴었다. 이제 아직 4월인데 텍사스의 후텁지근한 열기가 온몸에 번졌다. 꽃향기는 마약처럼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310

그녀는 목욕을 하고 자리에 누웠다. 피곤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나뭇잎들이 소용돌이치자 주위의 은은한 색채가 흐려졌다. 양철 지붕에 비 내리는 소리. 그녀가 자고 있을 때 딕슨이 와서 그녀가 깰 때까지 옆에 누워 있다가 그들은 사랑을 나누었다. 그게 전부였다.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313

그들은 갈퀴 모양의 발이 달린 욕조 안이나 배 안, 또는 숲속에 들어가 사랑을 나누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비 온 뒤 포치에 아롱거리는 초록빛 속에서 서로를 안았다.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313

사랑은 무엇일까? 마리아는 자고 있는 그의 반듯한 얼굴선을 보며 자문했다. 사랑한다는 것. 무엇이 우리를 가로막을 수 있을까?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314

그 책이란 테이블 위에 널린 수백 장의 카드를 말하는 것이었다. 왜 이제야 자기 원고를 읽으라는 걸까? 말하기 힘들어서 그러는지 모른다. 그녀도 그럴 때가 있다. 그녀도 자신의 감정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데 말하는 게 너무 힘들면, 그냥 시를 보여줄 때가 있다. 그럴 때 사람들은 대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316

곧 성큼성큼 뒤따라온 딕슨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 기슭에서 밀려나가고 있는 배 위에 올랐다. 그는 키스를 하다 축축한 바닥에 그녀를 내리누르고 그녀의 몸을 나체밀었다. 그들이 서로 껴안고 요동치는 동안 배가 아래위로 출렁이며 빙빙 돌다가 물가의 갈대숲에 흘러들어가 정지했다. 그들은 뜨거운 햇볕 속에서 배와 함께 흔들거리며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녀는 그런 넘치는 격정이 단순한 분노에서 오는지 상실감에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일광욕실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그날 밤이 거의 다 새도록 말없이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비가 오기 전에 코요테 우는 소리, 닭들이 나무에 올라앉아 우는 소리를 들었다.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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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종종 회자되는 ‘오야가차’라는 말이 있다. 부모를 뜻하는 ‘오야‘에, 장난감 캡슐을 자동판매기에서 무작위로 뽑는게임을 지칭하는 ‘가차’가 붙어 ‘오야가차‘이다. 한국어로 ‘부모 뽑기 게임‘ 정도로 옮겨지는 젊은이의 은어이다. 부모를 뽑기장난감에 비교하는 표현에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말은 "오야가차에서 꽝이 나왔다"라는식의 자학적 뉘앙스로 자주 쓰인다. "부모를 잘못 만난 탓에 인생이 꼬였다"라고 한탄하는 일종의 풍자인 것이다. 뽑기 게임의 승패는 오로지 운에 달려 있다. 모두 선망하는 ‘레어템‘을 뽑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몇몇 운 좋은 아이들뿐, 대다수의 아이들은 흔해빠지고 변변치 않은 장난감을 뽑고 자신의 불운을 탓한다. - P35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사회학자 울리히 벡 Ulrich Beck이 주장한 ‘위험사회risk society‘라는 개념을 자주 떠올린다. 그는 근대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에게 윤택하고 안락한 삶을 선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 경험한 적 없는 위기에 인류를 노출시켰다고 주장한다. - P42

한국과 일본은 OECD 가입국 중 성별 임금 격차가 매우 큰 두나라(2017~2020년 기준 OECD 성별 임금 격차는 한국이 31.5퍼센트로 꼴찌, 일본이 22.5퍼센트로 꼴찌에서 세 번째)이다. 다른 선진국과 비교하면 일하는 여성의 노동 조건이 남성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뜻이다. - P58

일본의 디지털 대사전에 당당하게 수록된 ‘여자력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여성이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는 능력, 혹은 여성이 자신의 존재를 나타낼 줄 아는 능력‘이라고 그럴싸하게 정의되어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참으로 난감하다. 자신을 아름답게 가꿀 줄 아는 미의식‘, ‘철저한 자기관리‘, ‘부드러운 말솜씨‘, ‘요리 솜씨를 가꾸는 것‘ 등 남성의 구미에 맞는 여성을 묘사하는 항목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 P61

사실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차별로 볼 것인가, 혹은 차이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정답‘은 없다. 관점에 따라 이렇게 볼 수도 저렇게 볼 수도 있다. 어찌 보면 그것이 차별인가 차이인가 하는 추상적 논란보다,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개인을 억압하지 않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구체적 방법론을 찾아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양성평등 문제는 ‘정답‘보다는 ‘해답‘이 필요하다. 일본도 한국도 아직 그 해답을 찾지는 못한 것 같다. - P62

종교적 신념이나 가치관 등에 따라 성정체성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판단과 평가가 있을 수 있다. 다만 이러한 판단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LGBT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서의 개인적 선택을 문제 삼아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해도 좋은가‘라는 점이야말로 이 문제의 본질이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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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 가장 한국적인 계급 지도 / 유령들의 패자부활전
장석준.김민섭 지음 / 갈라파고스 / 2022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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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과 픽션의 구성이 독특하네요.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에서 다룬 능력주의(meritocracy)와 우리네 상황을 연관지어 읽어보면 좋을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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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작아진 세상과 관련된 새로운 경험에서 긴밀한 역할을 하는 것은 ‘트리스테 포스트 이테룸(Triste post iterum)’, 여행이 끝난 뒤의 슬픔, 그러니까 우리가 먼 길을 떠나 강렬한 체험을 한 뒤 집으로 돌아올 때 맛보는 슬픔이다. 여행이 특권이나 저주였던 시절에서 진일보하여 일종의 짜릿한 모험으로 여겨지는 오늘날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도달하지 못했을 경계선에 이르렀다고, 아니면 과거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체험을 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여행 가방을 현관에 내려놓는 순간,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이게 다인가? 바로 이것이었나? 내가 바란 게 이것이었을까?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2

또한 우리는 지구상 거의 모든 거주민이 여섯 명 건너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며(예컨대 나는 누군가를 아는데 그 누군가는 또 누군가를 알고, 또 그 누군가는 다른 또 누군가를 아는데 그 다른 또 누군가는 X를 아는 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이후 지금까지 약 70세대가 탄생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5

이미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우리가 오감으로 느끼는 세상은 작아졌다. 한편으로 우주에서 인간이 촬영한 사진 속 지구의 풍경은 숨 막힐 만큼 아찔하고 감동적이다. 심연 속에 매달려 있는 조그만 청록빛 구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는 행성으로서의 우리 위치를 유한하고 한정적인 것으로, 그리고 부서지기 쉽고 파괴되기 쉬운 것으로 보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6

세계의 축소 및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네트워크의 연결과 보편화된 원격 감시 체계에 의해 더욱 강렬해진다. 그렇다, 우리는 이미 파놉티콘5)에 갇혀 살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노출되고, 관찰되고, 분석된다.
유한하다는 느낌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하찮게 여기게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대상들만이 그 놀라운 미지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우리의 관심과 열정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7

오늘날 누군가가 무한성과 교감하고 싶다면 네트워크에 접속하면 된다. ‘세상이 너무 크고 많다.’라는 압도적인 느낌은 우리에게 일종의 자제력과 포기를 가르쳐 준다. — 나는 그저 나의 길을 갈 뿐이다.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온갖 호기심의 대상들을 무시하는 법을 배우면서. 나는 불타는 소돔에서 탈출 중인 롯과 같은 처지이지만 호기심 많은 그의 아내와 달리 절대 뒤돌아보지 않을 굳건한 의지가 있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8

오늘날 모니터 앞에서 마비라도 된 것처럼 꼼짝도 못 하는 네티즌의 습관을 가리켜 ‘롯의 아내 증후군’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이것은 거의 ‘긴장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증후군은 특히 팬데믹 시기에 경고를 무시한 채, 불타는 도시를 바라보며, 거기서 눈을 떼지 못하는 수백만의 십 대 청소년들과 인셀6)들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8

정보를 검색하다 보면 나는 종종 거대한 데이터의 바닷속을 유영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그 데이터들은 이미 스스로 형성되고 스스로 논평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정보 검색 활동을 ‘서핑’이라는 동사로 맨 처음 표현한 사람은 천재임에 틀림없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8

결국 파동은 나름의 방식에 의해 존재를 불가사의한 무력감으로 인도하며 ‘운명’이라는 오래된 개념을 우리의 망각으로부터 끄집어낸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운명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타인에게 의존하는 네트워크로서의 운명, 생물학적 의미뿐 아니라 문화적 의미에서 전승되는 행동 패턴으로서의 운명이다. 그 결과 우리 정체성에 관한 활발하고도 발전적인 토론이 벌어지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9

무한성은 ‘호모 콘수멘스(homo consumens)’, 즉 ‘소비하는 인간’의 세계로 침투하기 시작했는데 그 세계는 『천일야화』 속의 ‘참깨’를 연상시켰다. 우리는 "열려라, 참깨!"라고 외쳤고, 주문은 이루어졌다! 문이 열렸고, 각종 서비스와 다양한 상품, 다채로운 패턴과 디자인, 품종, 변형, 유행, 패션, 트렌드가 난무하면서 우리를 압도했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9

무한성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생산하며 확산되고 있지만 우리 인간에게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을 제공하기 위해 취약하고 보잘것없는 검색 엔진 도구를 전면에 내세웠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1

나와 같은 세대는 그러한 엔진을 다루는 데 특히 문제가 많다. 결핍과 부족의 시대에 성장했으므로 우리 중 대다수는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혹은 ‘인플레이션에 대처하려고’ 뭔가를 자꾸 비축해 두려는 본능을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내 남편은 신문을 계속 모으고 스크랩하면서, 동시에 노아의 사명감으로 종이책을 보관하기 위해 서재의 책꽂이를 만든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1

유기체 간의 공생과 상호 연결이 진화와 종의 탄생을 촉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린 마굴리스8)의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시작으로 현대의 다양한 연구 결과에 이르기까지 생물학과 의학이 이루어 낸 발견 덕분에 우리 인간은 개별적 존재가 아닌 집단적 존재이며, 단일체가 아니라 다양한 유기체의 공화국, 즉 위계적으로 구조화된 일종의 군주제와 같은 구조를 가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2

"당신의 몸은 당신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인간의 몸에서 인간 세포는 43퍼센트에 불과하다." 대중적인 언론 매체의 헤드라인에 실렸던 이 문장은 아마도 수많은 사람에게 불안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아무리 자주 몸을 씻는다 해도 우리 몸은 박테리아나 곰팡이, 바이러스, 고세균9) 같은 ‘이웃들’의 무리로 뒤덮여 있다. 그중 대부분은 우리 내장 속 어둡고 구석진 곳에서 서식한다. 현재 창궐하는 코로나바이러스 전염병은 공포 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끔찍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인간 몸속에서 대량의 바이러스가 공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3

‘존재 속에 내던져진’ 단일 개체, 모나드10)적인 인간, ‘창조의 왕관’을 쓴 채 동물과 식물의 왕국에서 군림하듯 우뚝 서 있는 모습. 우리의 상상력,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우리 자신의 인식을 지배하는 대표적인 인간의 이미지는 바로 이것이었다. 거울을 보면서 우리는 세상과 동떨어진 고독하면서도 비극적인 존재, 자아 성찰에 능하고 생각할 줄 아는 정복자의 모습을 찾곤 했다. 그럴 때 거울 속에는 백인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고, 우리는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인해 ‘인간’이라는 단어가 자랑스럽게 들린다는 사실을 인정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날 나는 이 멋진 호모 사피엔스가 내 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단지 43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머지는 항생제나 살충제로 얼마든지 손쉽게 죽일 수 있었던 하찮은 피조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4

자신의 복합성과 다른 생물들에 대한 의존성을 깨닫고, 나아가 스스로가 생물학적으로 ‘다(多)생물체’임을 인식하게 되면서 우리는 유기론적 관점에 근거해 우리 사고에 ‘무리’, ‘공생’, ‘협력’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4

우리는 더 이상 ‘비온트(biont, 생리적 개체)’가 아니라 ‘홀로비온트(holobiont)’,13) 즉 전 생명체다. 다시 말해 서로 공생하는 다양한 유기체의 결합물인 것이다. 복합성, 다중성, 다양성, 상호 작용, 메타 공생 — 이러한 키워드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5

복합성에 기반한 이 새로운 관점은 세상을 계층에 따라 정렬된 통합체로 보지 않고, 그 안에 내포된 다중성과 다양성, 그리고 느슨한 유기적 네트워크 구조에 주목한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관점 덕분에 우리가 처음으로 자신을 복합적이면서 각양각색인 유기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생리적 개체나 미생물총14)의 존재에 눈을 뜨기 시작했으며, 그것들이 우리 육체와 정신, 나아가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총체적 결합물에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6

2020년, 이상하기 짝이 없는 여름을 지내고 있는 오늘, 우리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고 있다. 전문가들조차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지만 그들은 난기류 때문에 더 이상 날씨를 예측할 수 없다고 변명하는 기상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30

플라마리옹의 목각화는 카이로스(kairos)적인 순간을 보여 주고 있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34

카이로스가 다가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메타노이아(metanoia), 즉 기나긴 과정이 아니라 순간의 결정이 만들어 내는 중대한 전환점을 놓치게 된다. 그리스의 전통에 따르면 시간을 정의하는 건 ‘크로노스’로 알려진 거대한 단선적 흐름이 아니라 카이로스다. 그것은 특별한 시간, 모든 것을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을 의미한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34

나에게 카이로스는 기벽의 신, 즉 괴상함의 신이다. 여기서 ‘괴상함’이란 ‘중심적’ 관점을 과감히 포기하는 탈중심주의, 익숙한 사고방식이나 뻔한 행동 반경을 벗어나려는 경향, 고질적인 의식이나 사고방식, 안정적인 세계관에 부합하는 공동체적 관습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한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35

내게 문학이란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직조하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상호 간의 영향과 연결이라는 통합적 관점으로 세상을 조망하는 에너지가 문학만큼 강력한 장르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능한 한 폭넓게 이해된다는 점에서 문학은 본질적으로 ‘네트워크’와 유사하다. 네트워크 덕분에 하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개체 사이에 광범위한 교감과 연결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정교하고 특별한 인간의 소통 수단이며, 그 수단은 명확하면서 동시에 총체적이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38

하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문학은 타인의 시각, 그리고 개인의 고유한 정신을 통해 여과된 세계관을 이해하게 해 주는 ‘참깨’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구비 문학을 필두로 문학은 아이디어를 만들고, 관점을 설정하며,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 정신에 깊숙이 스며들어 그 형태를 완성한다. 문학은 철학의 모체이기도 하다.(플라톤의 『향연』이 뛰어난 문학 작품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문학으로부터 철학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38

‘인류세’21)라는 용어가 통용되기 시작한 건 이제 겨우 삼십 년 남짓이지만 이 용어 덕분에 우리는 우리와 우리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널리 알려진 두 개의 그리스어 단어인 ‘안트로포스(ánthropōs, 사람)’와 ‘카이노스(kainós, 새로운)’가 결합한 이 단어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자연과 환경의 기능에 인간이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드러낸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39

오그노즈야(폴란드어 ognozja, 영어 ognosia, 프랑스어 ognosie)는 내러티브 지향적인 초현실적 인지 과정으로 대상과 상태, 현상을 반영하며, 그것들을 보다 고차원적인 상호 의존적 의미로 배열하려는 시도.[참조]→ 충만함. 전체성. [구어]내러티브 자체는 물론이고 그 일부나 세부 항목에서도 질서를 발견하여 종합적인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능력을 말한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40

‘서양인의 여행’이라는 19세기 패러다임은 현대 사회의 관광업에 의해 산업화되고 대중화되었다. 오늘날 필리어스 포그25)와 인디아나 존스의 계승자들은 십이 일 동안 대형 버스로 멕시코를 둘러보다 흉물스러운 호텔과 외딴 해수욕장이 즐비한, 지금껏 내가 본 가장 혐오스러운 장소인 칸쿤에서 여정을 끝마치는 여행자들이다. 아니면 터키의 ‘올인클루시브(all-inclusive)’ 리조트에서 휴가를 즐기며 거기서 불과 수백 미터 떨어진 바닷가에 난민의 시체가 던져지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휴양객들이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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