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 아침, 나는 1kg 더 희미해졌다. 가벼워진 느낌은 아니었다. 희미해진 느낌이었다. 아무리 굶어도 평생 55kg 이하로 떨어져본 적 없는 몸무게가 불쑥 54kg이 되어 있었다. 운동을 시작한 지 서너 달 정도 된 것 같은데, 탄수화물을 줄인 지 몇 주 정도 된 것 같은데, 잠을 더 많이 자기 시작했는데, 뚜렷한 효과가 있나 보다. 나는 신이 나서 운동 일정을 일주일에 세 번으로 늘렸고 더욱더 엄격한 식단을 따르기 시작했다. 다이어트에 동기부여가 돼서 그런지, 이상하게 음식이 별로 당기지 않았다. 끼니를 건너 뛰어도 배가고프지 않았다. 체중 감량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로 가벼워져갔다. 아니 희미해져갔다. 뭔들 어떤가. 이대로라면 평생 가져본 적 없는 몸무게를 찍을 텐데. 30대중반에 이렇게 다이어트를 성공시키다니. - P12

오랜 기간 조금씩 문제가 쌓이다 보면 시작점이 어디였는지, 정상적인 상태가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이 희미해진다. 산소가 조금씩 줄어드는 어항에서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숨이 차기 시작하고 점점 나른해진다. 어딘가 특별히 아프지는 않지만 매일 조금씩 누군가 지우개로 내 경계선을 쓱쓱 지워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다 지워지면 그 끝은 어떻게 될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 P19

그렇게 지쳐갈 때쯤 Curie Oncology 라고 쓰여 있는 곳을 우연히 지나가게 되었다. 딱 봐도 마리 퀴리로 보이는 여자의 그림이 문 앞에 붙어 있었다. 노벨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 과학자. 그녀에 대해 학창 시절에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간판 밑에는 아주 작게 ‘Spring will come‘이라고 적혀 있었다. 봄을 찾아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갔다. - P29

모든 사람이 그렇듯 인간관계는 나에게도 늘 어려운 주제였다. 가벼운 인간관계에서 오는 허망함과 무거운 인간관계에서 오는 엄청난 중력 사이에서 아늑하게 오래 머무를 만한 위치를 찾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런 기대치는 사실 오래전에 버렸다. - P37

바닥에 있는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가장 쉬운 일이다. 오히려 가장 어려운 일은, 상대방이 바닥이 아닌 정상에 있을 때 진심으로 내 일처럼 축복해주는 것이다. 내가 바닥에 있을 때 손을 내밀어줬던 수많은 사람들 중, 내가 선택한 열다섯 명은 분명 내 인생의 정점에서 진심으로 함께 춤을 추던 사람들이다. - P40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는 합니다. 30년간 진료했던 수많은 환자들이 이런 상황에 놓이면 늘 책의 마지막 챕터로 바로 훅 넘어가려고 했죠. 책의 마지막 장에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만 알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 챕터로 가기까지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과 서사들이 있어요. 결말에 대한 통계를 알려드릴 수는 있지만 결말만이 의미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고 싶다면 알려드리죠. 알고 싶으세요?" - P59

상실을 겪어본 사람들만이 소통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언어가 존재한다. J는 그 언어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위로 덕분에 나는 철갑을 벗어던지고 가장 연약한 내 안의 알맹이를 드러냈다. 나는 강하지 않다. 그래도 괜찮다. 싸움이 목표가 아니라 완주가 목표이기 때문에 강하게 힘을 줄 필요가 없어졌다. - P73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항상 주위에 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힘들면 울어도 된다고 위로해주고 싶다. 아니, 오히려 강함을 잠시 내려놓고 온전히 울어야 다시 강해질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니까 완주만으로도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위로해주고 싶다. 원하는 결말이 아니더라도 그 결말을 마주하는 것만큼은 함께 해주겠다고 말해주고 싶다.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토핑 가득한 피자를 보내주고 싶다. 그렇게 같이 위로를 주고받고 싶다. 해줄 수 있는 것이 위로뿐이라 할지라도. - P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구도 누구를 치유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마음의 상호확증파괴다.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2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결정적 주문’이 어딘가에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모든 주문을 대체하는 마지막 주문. 나의 고장난 핵이 유발하는 지속적인 긴장과 불안과 회의에 대한 종전 선언. 해방이나 구원처럼 모호한 단어는 하나도 포함하지 않지만 그것들을 내 뇌에 감각시킬 하나의 문장.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228

내가 ‘나’를 버릴 수 있다면 나는 ‘그’도 버릴 수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요한복음의 첫 문장이다. 의미심장했지만 태초에 무엇이 있었든 말씀보다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며칠 있다.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231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232

어느 날 정부의 고위 관료가 반국가 세력의 음해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지키겠다면서 같은 문장을 인용했다. 그의 기준에 따르면 나는 반국가 세력이다.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232

폭발이란 급격한 화학적 변화로 큰 에너지와 많은 기체, 열과 빛이 방출되는 반응을 말한다.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233

상호확증파괴 원리에 따라 핵무기를 보유한 강대국 그리고 그들의 동맹국 사이에 전면적인 무력 충돌은 극히 어려워졌다.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234

그에 비하면 오늘날 ‘문명국가’의 다수 시민은 화요일 밤에는 실시간 중계되는 가자 지구의 화염을 보고 목요일 정오에는 총기 난사범의 프로필을 듣더라도 일요일 오전에는 애인에게 단검이 아니라 커피와 토스트를 건넬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차세계대전을 끝낸 폭발 이후 현재까지의 시대를 핵에 의한 평화, 즉 ‘팍스 아토미카Pax Atomica’라 부르기도 한다.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2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2월은 책장을 넘기기 어려운 시절이네요. 서평도 깜박할 정도로 안팎의 마음과 생각 공간이 꽉 차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 달의 발제책이 내가 선호하는 문학 장르에다 소설집이라 틈틈이 책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김기태라는 작가는 올해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의 수록작 “보편 교양“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다소 현학적인 소재를 주인공처럼 덤덤히 묘사하고 있는 게 동시대의 니즈를 관통하는 영리한 작가구나 싶었죠. 우연히 본 작가의 사진이 장강명 작가와 묘하게 닮아 있었는데, 기자 출신의 장강명 작가와 언론학부를 졸업한 김기태 작가 또 평행이론을 떠올리게 합니다.

총 9편의 수록작들 하나 하나가 독특했습니다.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고요. 물론 개인 취향으로 보면 서사가 풍부한 호흡의 작품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내겐 몰입감이 아주 크진 못했습니다.

표제작인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부터 읽었는데, 결과적으로 이 단편이 가장 마음에 들더군요. 썸을 타는 듯한 동창생의 우연한 만남, ‘보편 교양’도 사치인 젊은이, 38백만 원도 넘사벽인 이민자, 상위 몇 퍼센트가 아닌 밑에서 부터 세는 게 자연스런 사람들, 미래의 희망보단 오늘의 삶이 퍽퍽한 일상. 누구나 중산층, 보통사람을 꿈꾸고 또 그렇다고 자기 최면을 거는 게 상식인 사회속에서 덤덤히 삶을 끌어 안고 사는 젊은 군상들을 보면서 스스로의 짧지 않은 삶을 돌아보게 하더군요. 그리고 동시대 풍경을 엿보게 하는 다양한 소재들의 소환은 맛깔스런 양념 같았습니다. 라면봉지속 건조분말 스프처럼

“볼빨간사춘기가 1인 그룹이 되는 사이 맥도날드와 김밥천국으로부터 홍콩반점과 할매순댓국으로 혼자 갈 수 있는 음식점이 늘어났다.”(97쪽,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수백억을 두고 목숨을 건 게임을 한다는 줄거리의 한국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흥행했다. 어느새부터 힙합은 안 멋졌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으며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니콜라이에게는 투표권이 없었다. 진주에게는 투표권이 있었지만 어떤 쓸모가 있는지는 알기 어려웠다.”(103쪽, 같은 작품)

이야기가 전개되다 맥없이 툭 끊기는 것도 요즘 추세인가 싶기도 하지만 ‘열린 결말’도 어쩌면 작가가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모처럼 어깨에 힘 빼고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다루는 내용들이 결코 가볍지는 않았지만요.

“예쁘고 멋있고 촉감 좋은 물건들이 꼭 필요한 건 아니라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자아실현 같은 건 모르겠지만 견딜 만한 일을 하고, 지글지글 보글보글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삶. 가끔은 나란히 누워서 햇볕을 쬘 사람이 있는 삶. 이 정도면 괜찮다고 여기면서도 어두운 골목을 걸어 다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면 불안해졌다. 어느 날 흰 봉투가 날아와 계약 종료 통지서나 처음 들어보는 병명의 진단서를 덜컥 내놓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걸까.”(108쪽, 같은 작품)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에서 유래한 밈을 문자로 나누던 두 주인공, 진주와 니콜라이를 떠올리며 글을 마무리하렵니다. 다시 ’세모바‘ 같은 삶 속으로~ ‘로나, 우리의 별’을 위해 ‘전조등’ 대신 응원봉을 밝히며~

“‘16세의 봉제공 엠마 리스가 체르노비츠의 예심판사 앞에 섰을 때 그녀는 추궁받았다. 왜 혁명을 선동하는 삐라를 뿌렸냐고. 그 이유를 대라고. 그녀는 일어서더니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판사가 제지하자 그녀는 더욱 매섭게 외쳤다.기립하시오! 기립하시오 당신도! 이것이 인터내셔널이오!’”(110쪽, 같은 작품)

“미래는 여전히 닫힌 봉투 안에 있었고 몇몇 퇴근길에는 사는 게 형벌 같았다.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워 담았고 그게 도움이 안 될 때는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행복을 상상했다. 보일러를 아껴 트는 겨울. 설거지를 하고 식탁을 닦는 서로의 등을 보면 봄날의 교무실이 떠올랐다. 어떤 예언은 엉뚱한 형태로 전해지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것일지도 몰랐다.”(116쪽, 같은 작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에서 유래한 밈을 문자로 나누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진주와 니콜라이를 떠올리며, 다시 ’세모바‘ 같은 삶 속으로~ ‘로나, 우리의 별’을 위해 ‘전조등’ 대신 응원봉을 밝히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