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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지기 쉬운 영혼들 - 우리가 무너진 삶을 회복하는 방식에 관하여
에리카 산체스 지음, 장상미 옮김 / 동녘 / 2024년 1월
평점 :
재밌고, 충격적이고, 와 닿는 이야기다. 글을 쓴 에리카 산체스는 그냥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자기 자신을 “강경하고 예리한 성질 더러운 페미니스트”라고 칭하는 사람이다. 유머 감각 없는 페미니즘에 염증을 느끼면서, 다산의 아이콘 더거네 엄마의 헐렁한 질을 소재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는 페미니스트다. “우리가 무너진 삶을 회복하는 방식에 관하여”라는 진지한 한국어판 부제를 보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도파민 자극하는 문장이 책 속에 가득하다. 진짜 중에 진짜 이야기꾼인 에리카 산체스의 자전적 에세이의 제목, 부제 그리고 표지로는 도통 예상 불가한 그의 솔직함과 raw함에 한국어 번역판 독자들이 느낄 충격이 눈에 선하다.
지난 과거에 작가가 겪은 혼란, 고통, 슬픔, 우울 등과 같이 전혀 웃기지 않았을 것들을 되돌아보며 유머를 섞어 독자에게 전달한다. 찐 이야기꾼, 에세이스트라고 느끼는 지점이다. 어린 시절 만성적 통증이 이어지던 중, 극도의 고통을 느끼며 찾은 응급실에 누워 장학금 수혜 축하를 받는 장면, 자신의 외모를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희화화하는 부분들, 이어지는 문장 사이 괄호 안에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 등에서 예상치 못한 재미와 황당함을 내내 느낄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쉽게 꺼내기 힘든 얘기를 이렇게 낯설지 않게 독자에게 전달하는 에리카 산체스의 능력에 누구나 감탄할 것 같다.
진짜로 나는 입술이 엄청나게 크고 치아도 그에 못지않다. 한번은 오빠에게 숟가락 좀 달라고 했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국자를 건네주었다. 나쁜 새끼가 한 방 제대로 먹였다.
p.63
내가 안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런 시각이나 예민함, 뭐라 부르든 간에 하여간 그런 나의 특성이 질병처럼 느껴질 때도 많다. (중략) 길가에 버려진 딜도가 몇 시간이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p.71
책 초반에 ‘너무 백인 대 유색인 구도로 단순하게 보는 것은 아닌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인종 외에도 고려할 필요 있는 사회적, 경제적 지위 등 다양한 요소에 독자들이 눈과 귀를 닫지는 않을지 걱정했다. 물론 이어지는 작가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 이분법적 인종 구분을 전면에 말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백인의 맥락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할 수밖에 없던 일련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의 경험의 특수성과 주변 상황 맥락을 이해하게 되고, 이후 에리카 산체스의 인종 인식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피부색을 더 희게 만들려고 했던 일은 살면서 저지른 가장 수치스러운 일 중 하나로 남아 있지만 내가 그런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온 세상이 그러라고 시키고 있었으니까.
p.168
무엇보다도, 여성 차별, 혐오, 억압에 대한 반발을 전면에 드러내 독자가 희열을 느끼게 해준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우울증, 친구와의 일화, 외국 생활, 연애 및 결혼 생활 회고, 불교 개종 등 일생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여성혐오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렇게 또 한 명 매력적인 에세이스트를 접해 반갑다. 믿고 보는 작가 리스트에 추가해본다.
블랑카 고모의 일화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고모가 밖에서 칼을 갈던 중에 어떤 남자가 지나가면서 여자들 귀에 들리도록 성희롱을 해대는 꼴을 보았을 때의 이야기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블랑카 고모는 그 남자에게 칼을 던졌다.
p.62
이 글은 동녘, 컬처블룸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후기입니다.